● 법 취지 동의하고 대의도 찬성하지만…
● 애플의 극약처방이 반발 직면한 이유
● 정부가 아이폰 내부 들여다볼 권리 획득
● 美, 빅테크 개별 기업들이 자율 규제
● 韓, 기관·단체에 이미지 삭제 권한 줘
● 누가?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령으로!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오픈채팅방 등에서 영상 또는 움짤(움직이는 사진)이 곧장 업로드 되지 않고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방심위에서 불법촬영물 등으로 심의·의결한 정보에 해당하는지 검토 중입니다"라는 경고문을 내보내는 모습을 보며 인터넷 사용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상대적으로 남성 사용자가 많고 익명성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강한 인터넷 커뮤니티일수록 반발의 목소리는 더욱 컸다.
류호정의 설명을 납득하기 어려운 까닭
하루 전인 12월 14일 류호정 정의당 의원이 DC인사이드 야구갤러리에 올린 "안녕하세요, 정의당 류호정입니다"라는 글 역시 같은 취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미 불법 촬영물이라 확인된 영상의 '코드'를, 개인 채팅창이 아닌 오픈채팅 및 게시판에 올라온 영상물과 비교하는 것이므로 검열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는 이러한 프로세스를 게임 내 채팅의 욕설 필터링과 비교했다. 그러므로 "고양이 영상이나 사진이 차단된 적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류호정은 결론을 내렸다.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부터 논해보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여성을 겨냥한 성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특히 미성년자를 약취, 유인해 성적인 영상을 찍게 한 후 판매하거나 그것을 이용해 미성년자를 협박하는 등의 수법을 구사하는 성범죄자들도 있다. 그런 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처벌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국가라 부를 수도 없다.
필자는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N번방 방지법'의 궁극적인 취지에 동의하며 성범죄 예방과 성폭력 피해 확산 방지라는 대의에 찬성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텔레그램성착취공동대책위원회나 류호정 등의 설명은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쉽지 않다. 막 시행된 'N번방 방지법', 그 중에서도 논란의 핵심에 있는 개정 전기통신사업법 제22조의5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언제건 그와 같은 방향으로 악용될 여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필터링은 작동하지만
현재 국내에서 시행중인 필터링을 '전 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중국 같은 극단적인 사례가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미국에서도 필터링은 작동한다. 구글·페이스북·마이크로소프트 등 이른바 '빅 테크' 기업은 이미 자사 서버에 올라오는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필터링하고 있다.아니, 이게 무슨 소리냐 싶은 분들도 더러 계실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심지어 애플은 사용자가 아이폰으로 찍어 기기에 저장한 사진도 필터링하려다가 대내외 반발에 직면해 계획을 철회한 바 있다. 애플은 아이폰에 저장되는 사진을 기기 내에서 필터링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그것을 국가별로 적용할 수 있게끔 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미국 뿐 아니라 각국 정부의 아동 성범죄 기준에 맞춰 대응하려던 취지다. 이 계획은 2021년 8월 외부에 알려졌는데, 전자 프런티어 재단(Electronic Frontier Foundation)이나 민주주의와 정보통신센터(Center for Democracy and Technology) 같은 시민단체 뿐 아니라 애플 내부에서도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철회됐다.
국내에는 크게 보도되지 않은 이 사건의 맥락을 살펴본 후,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과거에는 '불법 촬영된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피해자인 여성을 납치, 강간, 혹은 직접 협박해 가해자의 카메라로 찍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카메라를 숨기고 몰래 찍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대다수 사람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모두가 알 듯 스마트폰은 인터넷이 연결된 카메라다.
오늘날 아동 성 착취자들은 미성년자를 푼돈으로 유혹해 스스로 영상을 찍게 한다. 그것을 제3자에게 돈 받고 팔거나, 그 영상을 이용해 피해자를 다시 협박해 더 많은 금품을 뜯어내고 정신적·육체적 착취를 하는 수법이 널리 퍼져 있다. 국내에서도 현금 및 계좌 거래가 어려운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문화상품권 등을 제시하며 영상과 사진을 찍게 하는 범죄 사례가 여러 차례 확인된 바 있다.
이 경우, '빅테크'가 성폭력
영상의 제작과 유포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애플을 제외한 다른 회사처럼 자사가 운영하는 인터넷 서비스에 올라온
사진과 영상을 필터링하는 것은 사후약방문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번 인터넷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할 테니 말이다.
그러므로 애플은 극약 처방을 떠올렸다. 특히 미성년자 유저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가기도 전에, 기기에 담겨 있을 때부터 필터링을 해서, 만약 문제가 될 것 같은 내용이 발견되면 보호자에게 알리는 등의
시스템을 갖추면 어떨까?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만들 뿐 아니라 시장 점유율도 큰 애플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접근법이다. 아동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를 원천봉쇄할 수는 없겠지만, 빅 테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해법은 미국 시민사회 뿐 아니라 애플 내부에서조차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동 성범죄를 막는다는 대의명분에는 동의하지만, 일단 정부에 아이폰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권리를 주고 나면, 그 후에는 어떤 식으로 악용될지 알 수 없다는 게 핵심적인 반론이었다.
범죄, 특히 아동 성범죄를 막기 위한 필터링 기술은 지금도 존재하며 사용되고 있다. 구글· 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페이스북 등에서 우리가 올린 사진과 영상은 아동 성범죄와 관련 있는지 아닌지 검토되고 있다는 소리다. 우리가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독자들은 모르셨을 것이다. 알았다고 해서 특별히 더 달라질 것도 없다. 인터넷 시대, 스마트폰 시대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이미지 삭제할 수 있는 힘
그렇다면 국내에서 시행된 'N번방 방지법'에 대해서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 미국 빅테크들이 수행하는 필터링은 어디까지나 개별 기업들의 자율규제에 가깝다. 프라이버시에 극히 민감한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서버를 만들고 텔레그램이나 시그널 등 보안을 더 중시하는 메신저를 사용하는 등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반면 'N번방 방지법'은 법이다. 강제력을 지닌다. 더욱 나쁜 건 그 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대통령령'으로 규정돼 있다는 점이다. 개정 전기통신사업법 제22조의5 1항은 전기통신사업자의 삭제 의무를 정하고 있다. 누군가가 신고를 하거나,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단체의 요청"이 있다면 해당 정보를 지체 없이 삭제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어떤 기관 혹은 단체가 포털이나 오픈채팅방 등에서 영상과 이미지를 삭제하도록 할 힘을 갖게 된다.
그런데 그 기관이 어디인지, 어떤 인원으로 구성되는지 등에 대해, 국민은 미리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대통령령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단체'가 다른 의도를 품고 있다면 어떨까? 마땅히 방지해야 할 디지털 성폭력을 구실 삼아 정권에 비판적인 이미지나 영상 등을 필터링의 대상으로 포함시킨다면? 가령 '곰돌이 푸'가 시진핑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필터링하는 중국의 경우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2016년 9월 26일, 당시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트위터에 일본 성인물(AV)의 표지 사진이 올라왔던 사건이 있었다. 지금도 일부 네티즌은 그 사건을 웃음거리로 삼는다.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관·단체는 그 이미지를 '음란물'로 보고 통제할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건 마찬가지다.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인터넷에서 없애버릴 수 있는 정교한 핀셋을 권력의 손에 쥐어주고 있는 셈이다.
2항. "전기통신역무의 종류, 사업규모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조치의무사업자는 불법촬영물등의 유통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술적·관리적 조치를 하여야 한다." 역시 대통령령이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보자. 이 법에 따르면 네이버는 필터링을 하게 하면서 카카오는 그런 책임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누가? 대통령이. 어떻게? 국민이 감시할 수도 국회가 통제할 수도 없는 대통령령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원칙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여성, 특히 아동 청소년을 디지털 성범죄로부터 보호해야 하며,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을 정부와 국내 IT(정보기술)기업, 해외 빅테크가 함께 모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는 그 자체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만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원칙이다. 현행 'N번방 방지법'은 분명히 그 대원칙을 심각하게 결여하고 있다.류호정 정의당 의원을 비롯한 여성주의 진영에서 'N번방 방지법'을 옹호하는 것은 당연하며,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법이 지닌 본질적인 문제와 한계에 대해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게 너무도 의아하다. 이 법은 텔레그램은 못 잡으면서 카카오톡만 막기 때문에 문제인 법이 아니다. 카카오톡에 올라오는 내용 중 무엇이 음란물인지 아닌지, 대통령 마음대로 뽑은 사람들이 단정적으로 규정지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민주당과 정의당, 여성계가 이 문제를 대선용 정쟁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았으면 한다. 외려 법치국가의 상식을 준수하면서 여성 인권을 보호할 방법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다.
#N번방방지법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표현의자유 #애플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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