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한복’이 까발린 中 사탕발림 제국주의
● 장이머우 연출 개막식 논란
● 쑨원, ‘오족공화’ 고안 이유
● 다민족주의, 약육강식 시대 유산
● 차별 않는다는 자치권, 양날의 칼
2월 7일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황대헌, 이준서 선수가 연달아 실격 처리되는 일이 벌어지자 여론은 한층 더 나빠졌다.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두 선수가 예선에서 탈락한 후, 폴란드 선수가 중국 선수를 이겼음에도 또 한 차례 비디오 판독을 거쳐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폴란드 선수를 실격 처리하자 논란은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이번 동계올림픽은 중국만을 위한 잔치가 돼버린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인터넷을 넘어 정치인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중국대사관의 입장은 이렇다.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므로, “중국의 각 민족 대표들이 민족의상을 입고 베이징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제 스포츠 대회와 국가 중대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그들의 바람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에 퍼져 있는 한반도의 문화는 조선족에게도 공통되는 것이므로, 조선족이 조선족의 옷을 입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다 해서 “이른바 ‘문화공정’ ‘문화약탈’이라는 말은 전혀 성립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실 이런 입장은 중국대사관이 나서기 전부터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문화에 개방적 성향을 지니는 식자층과,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국내의 혐오 분위기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진작부터 해왔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선족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한민족’의 일부다. 그런 조선족이 한민족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중국인으로서 중국에 살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고유문화를 재현하는 것 또한 이상할 게 없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필자는 최근 수년 사이 늘어난 조선족 혐오 분위기에 반대한다. 민족주의적 감성에 입각해 조선족을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라고 추켜세우는 모습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족을 일종의 예비 범죄자 집단인 양 몰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보편적 인권 차원을 넘어 한국과 한국인의 장래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의 전통 문화에 대한 중국대사관의 해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납득해서는 곤란하다. 저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혹은 소수민족 정책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확장과 지배 프로세스를 묵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구만 보면 좋은 말처럼 보인다. 모든 민족이 평등하고, 소수민족의 합법적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며, 차별과 억압을 금지하고 분열 조장도 하지 않겠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퍽 순진하다. 모든 말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살펴봐야 그 진의를 온전하게 깨달을 수 있다.
잠시 역사를 되돌려보자. 청나라가 무너지고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중화민국을 수립했던 무렵,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은 고민이 깊었다. 청나라는 만주족과 일부 몽고족이 수적 열세를 이겨내고 베이징을 차지하며 중원 전체를 정복한 왕조였기 때문이다. 반면 중화민국은 근대적 이념을 기반으로 한 신생 공화국이었지만, 한족이 중심이 된 나라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한족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민족에 의한 지배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할 것이며, 반대로 만주족과 몽고족은 정복자에서 피정복자로 굴러 떨어지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중화민국을 파괴하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쑨원은 ‘오족공화’(五族共和)라는 개념을 내세웠다. 만주족, 몽골족, 후이족(회족), 한족, 티베트족이라는 다섯 개의 민족을 명시하고 이들 모두가 중화민국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이념이었다. 이 오족공화의 개념은 이후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설한 후 ‘오족협화’(五族協和)라는 이름으로 되풀이됐다. 일본인을 뜻하는 ‘야마토 민족’, 조선 민족, 몽골족, 한족, 만주족이 서로 협력하며 잘 살아가는 나라, 근대적인 국가 만주국을 이루겠다는 소리다.
오족공화, 오족협화, 그 뒤를 잇는 중국의 56개 민족 담론이 얼마나 폭력적인 발상인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사례를 들어보도록 하자. 카뮈의 소설 ‘이방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는 알제리를 지배했다. 다른 식민지처럼 총독을 파견한 정도가 아니라 프랑스의 영토로 간주하고 행정체계 내에 편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알제리는 치열한 전쟁 끝에 1962년 독립을 얻어냈다.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운동을 효과적으로 탄압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후 프랑스는 헌법을 개정한다. 마치 중국처럼 ‘프랑스는 프랑크인, 켈트인,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그리스인, 부르군트인, 골족, 바이킹, 유대인, 베르베르인 등 10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규정했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참고로 베르베르인이란 알제리 인구의 99%를 차지하는 아랍계 민족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인 뫼르소가 햇빛이 눈부시다는 이유로 쏴 죽인 현지인 또한 베르베르인이다.
어떤가. 중국이 말하는 ‘다민족주의’가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가. 특히 1950년을 전후해 무력으로 병합한 티베트과 위구르를 ‘수많은 중국의 민족 중 하나’로 간주하고 억압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한국을 비롯해 서구 민주주의 문명권을 이루는 나라의 식자층이 생각하는 ‘다문화주의’와는 거의, 혹은 전혀 상관없다. 문화적, 역사적, 도덕적으로 점령 상태를 유지해서는 안 될 타민족을 억지로 한 나라의 범주에 포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등한 법적, 경제적, 문화적 권리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사탕발림이라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최근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국은 호적(戶口: 후커우)제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주를 막는 것이 목적인데, 결과적으로 대도시에서 살지 않는 소수민족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각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하에 주어지는 ‘자치권’ 역시 양날의 칼이다. 한족과 소수민족이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법을 적용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그것을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용납한다. 그것은 ‘민족’의 입장에서는 존중되겠지만 구체적인 ‘사람’의 입장에서는 법적 사각지대에 산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진보 진영에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는 ‘다문화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다. 위구르와 티베트의 참상도 그렇거니와, 심지어 조선족 역시 문화적 말살을 경험하고 있다. 학교에서 조선어(한국어) 수업을 하지 않고 중국어로만 시험을 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중국의 다민족주의는 제국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19세기와 20세기의 잔여물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로의 진입로에 접어들었다. 인구와 산업 구조의 변화, 출산율 저하 등 여러 요건을 놓고 볼 때 우리는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오는 이들과 그 자녀들을 막을 수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 다양성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중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한민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고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상을 지닌, 말하자면 ‘한국계 한국인’과 가까운 과거에 한국으로 온 ‘외국계 한국인’을 법적으로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 국민으로 취급하고 단일한 국민으로 동화해나가야 한다. 문화, 종교, 민족 같은 요소는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그다지 혹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취급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문화적 다양성’이 확보된 새로운 대한민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