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5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아무튼, 주말] 젤렌스키가 초보 대통령? 한국 정치는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킹스스피치’의 청중 효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청중 비용’

일러스트=유현호
 

1925년, 영국. 조지 5세의 둘째 아들 버티(콜린 퍼스)는 말을 더듬는 장애가 있다.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보넘 카터)는 남편을 위해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러그(제프리 러시)를 찾아냈다. 라이오넬은 공인 자격 없는 아마추어 치료사지만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냈다. 이것은 몸이 아닌 마음 문제인 것이다.

버티는 네 살 무렵부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기대만 크고 강압적인 아버지 조지 5세와, 왕족의 책임 따위 무시한 채 자유분방하게 살면서 동생을 쪼아대는 형 데이비드에게 억눌리면서 생긴 심인성 말더듬증이다. 조지 5세는 장성하여 두 딸까지 두고도 여전히 말을 더듬는 작은아들을 보며 탄식한다. “과거의 왕은 옷만 잘 입고 말만 잘 타면 그만이었어. 지금은 집에 있는 대중의 환심을 끌어내야만 해. 이제 우리 왕족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우리는 배우가 된 거야.”

바다 건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잡아가는 가운데 조지 5세는 세상을 뜬다.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 8세로 왕위에 오른 형 데이비드는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인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해버린다. 버티는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조지 6세가 되어 마이크 앞에 서야 한다. 영화 <킹스 스피치>의 내용이다.

버티의 문제는 무엇일까? 라이오넬과 버티의 첫 수업. 라이오넬은 버티가 헤드폰을 쓰게 한 후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주면서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대목을 낭독하게 한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축음기에 녹음된 버티의 목소리는 유창했던 것이다. 단 한마디도 더듬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청중 효과(audience effect)가 부정적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중 효과란 말 그대로 청중의 존재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운동선수들은 관객의 환호성이 울려 퍼질 때 최고 기량을 발휘하는 반면, 어떤 선수는 연습할 때는 펄펄 날지만 관객이 들어오는 실제 시합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버티는 누군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부담을 느껴 말을 더듬는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심리 현상이다.

이 개념을 국제정치학 영역으로 확장해보면 어떨까? 국제정치학의 거대 담론 중 하나인 ‘민주 평화론’을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 여론에 따라 움직이므로, 적어도 잘 발전한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전적 이론이다. 1994년 스탠퍼드 대학교의 제임스 피어론 교수는 이마누엘 칸트로 거슬러 올라가는 민주 평화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청중 효과를 연상케 하는 ‘청중 비용(audience cost)’ 개념을 제시한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 국민에게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면, 민주국가가 전쟁을 벌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국민이 정치권의 청중이 되어 부정적 피드백을 제공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국가가 절대 전쟁을 하지 않거나 전쟁을 무조건 피한다는 뜻은 아니다. 국민들 스스로가 외국의 침략에 맞서거나, 최악의 경우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면, 설령 지도자가 평화를 원한다 해도 전쟁 여론을 억누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국민의 압력 때문이다.

요컨대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에 비해 청중 혹은 국민이 정치권에 요구하는 바가 많고,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정치인이 국민 여론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대신 국민이 원하는 방향의 정책이나 전쟁이라면 독재국가보다 더 전폭적인 지지와 희생을 얻어낼 수 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가 지불해야 하는 높은 청중 비용은 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독재국가처럼 적국을 기만하여 기습 전쟁을 벌이기 어렵지만, 공개적으로 전쟁에 나서면 독재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보여줄 수도 있다.

<킹스 스피치>로 돌아가 보자. 조지 6세가 왕위에 오른 후 나치 독일의 히틀러는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조지 6세는 라이오넬의 도움을 받아 더듬거리면서도 성공적으로 전쟁 연설을 해낸다. 입헌군주정의 군주가 치러야 할 높은 청중 비용이다. 그와 함께 전쟁을 이끈 처칠 총리도 마찬가지다. 처칠은 영국인들에게 ‘나쁜 평화가 좋은 전쟁보다 낫다’는 식의 달콤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뿐’이라며 국민의 희생과 헌신을 요구했다. 민주국가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한다. 높은 청중 비용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을 하나로 모아 국난을 헤쳐 나갈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월 러시아는 기어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우크라이나가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단, 젤렌스키 대통령만은 예외였다. 그는 소셜미디어(SNS)로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수도 키이우(키예프) 사수 의지를 드높였다. 미국에서 항공편을 제시하자 ‘탈출이 아니라 탄약이 필요하다’고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에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의가 불타올랐다. 작은 승전보가 쌓이면서 국제사회의 여론 또한 푸틴과 러시아를 비난하고 책임을 묻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점점 커지는 전쟁의 청중 비용이 우크라이나를 북돋고 러시아를 억누르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감동적인 장면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지난 2월 25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이재명은 TV 토론에서 ‘초보 대통령이 러시아를 자극해 전쟁이 벌어졌다’는 상식 이하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자 민주당 측 인사들은 마치 당론으로 정하기라도 한듯 젤렌스키를 ‘코미디언 대통령’이라고 조롱하며 러시아를 두둔하거나 양비론적으로 발을 빼는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외국인들 보기에 너무도 부끄럽다. 우크라이나는 코미디언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는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코미디를 하고 있지 않는가.

한국 정치는 웃기지도 않고 분통만 터지는 저질 삼류 코미디다. 거짓말로 호객하고 자리에 앉으면 정체불명 약을 파는 약장수 광대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까. 3월 4일과 5일, 대통령 선거 사전 투표일이다. 9일에는 본투표가 있다. ‘청중’인 국민이 ‘주인’ 대접을 받을 몇 안 되는 기회, 절대 놓치지 말아야겠다.

2022-03-04

바가바드 기타(1)

얼마 전 반야심경의 현대어 번역 어쩌구 하는 글을 썼는데, 그 주제가 머릿속에 남아서, 이것저것 틈틈이 좀 더 찾아보다가, 며칠 전 거리에서 '샨티'라는 이름의 인도 식당을 보았고, 엘리엇의 '황무지'의 마지막 줄인 '샨티 샨티 샨티'를 중얼거리다가, 최초의 핵실험이 터져나올 때 오펜하이머가 주절거렸던 '나는 이제 세계의 파괴자, 죽음이 되었도다'라는 바가바드 기타의 대목을 연상했으며, 그리하여 바가바드 기타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면 니체를 굳이 읽을 필요조차 없다. 니체 철학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더 탁월하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 및 여타 인도 철학을 애호하고 옹호하는 이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강렬한 텍스트가 결국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고, 신분 차별을 정당화하며, '너희 크샤트리아들은 우리 브라만이 시키는대로 가서 쌈박질이나 해라'는 취지로 전락하고 만다는 엄연한 사실을 도외시한다. 이것은 니체 철학을 애호하는 자들과도 마찬가지다(니체 철학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애매하고 또 우스꽝스러워지는지에 대해서는 러셀이 <서양철학사>에서 신랄하게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실로 강렬한 텍스트인 관계로, 머리에서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 내지는 '보다 나은 계급'의 일원이라는 점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구의 리버럴 계층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더욱,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졌을 테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필립 글래스의 사티야그라하 무대 영상을 세 번째 돌려보다가, 이제 한 번쯤 글로 털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쉬지 않고 타자를 쳤다.


 

2022-02-27

우크라이나 전쟁: 젊깨문과 늙깨문

목수정을 비롯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의 발언. 이들은 러시아 선전선동을 거의 그대로 주워섬긴다. 우크라이나 침공은 나토, 더 나아가 미국이 유인, 조장, 방조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러시아가 '군사행위'를 하는 건 맞지만 '적대행위'는 미국과 젤렌스키 내지는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세력이 먼저 했다는 논리다.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를 듣고 많은 이들은 혼란에 빠진다. 특히, 유시민이 쓴 이러저러한 책들을 무슨 대단한 지혜의 교과서인 양 달달 외우고 큰, 더불어민주당 코어 지지층 중 상대적으로 젊은 30대 말-40대 초반 세대가 그렇다.

편의상 그 세대를 '젊깨문', 그보다 나이 많은 40대 중반-50대까지를 '늙깨문'이라고 해보자. 젊깨문들은 나름 서구적 가치에 친숙하고 문화적 다양성과 개방성 등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우리는 젊고 쿨하지만 저들은 늙고 촌스럽다'는 전제를 깔고, 국민의힘으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을 비토한다.

젊깨문들은 늙깨문(목수정을 비롯 대놓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나토 욕하는 바로 그 세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는 않다. 후진국 세대인 늙깨문과 달리 나름 중진국 세대이기도 하고, 그들이 금과옥조로 섬기는 정치적 올바름과 글로벌한 가치 등을 놓고 볼 때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현재 자아분열에 빠진 상태다. 늙깨문들이 속속들이 친러주의, 친푸틴, 침략전쟁 옹호 발언을 이 시점에, 어떻게든 자신의 세계관과 기존의 인식을 통합해야 하는 난관에 처해 있다.

과연 그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다. 젊깨문들 역시 깨문버스 특유의 '선한 우리편과 악한 저들의 대결' 같은 원시적 대립 구도를 세계관의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전쟁을 벌여도, 젊깨문들은 그 러시아를 옹호하는 늙깨문을 '우리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의 온갖 망언을 못 본 척 하고 지나가기 위해 용을 쓰고 있다. 바로 그 젊깨문 세대의 일원으로서 깊은 탄식을 담아서 하는 소리다.

젊깨문은 '머리'로는 늙깨문에게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결국 '가슴'으로는 그들을 따라가고 만다. 최근 돋보이는 한 사람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2019년 2월, 나는 이런 글을 썼었다.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에 낯익은 얼굴이 한 분 보인다. 안희정의 부인 민주원 씨가 '내 남편은 미투가 아니다 불륜이다'라고 하자 그것을 열심히 SNS로 옹호하시던 최민희 전 의원. 현재 더불어민주당 디지털소통위원장, 노무현재단 상임운영위원(현). http://pcpp.go.kr/info/informati

저 최민희가 바로 우리가 아는 그 최민희다. <황금빛 똥을 싸는 아이>의 저자인, 말하자면 출세한 안아키. '극문 똥파리' 빼면 다 뭉치는 분위기라고 말한 이재명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구한말 무능부패한 왕과 조정이 일제침략을 못막았듯 준비안된 우크라이나대통령 때문에 우크라이나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고 말한 바로 그 최민희.

젊깨문들은 이럴 때 혼란에 빠진다. 최민희가 입으로 황금빛 똥을 싸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최민희는 이재명 캠프에 있고, 이재명은 젊깨문들의 머릿속에 '절대 타도해야 할 악'으로 설정된 국민의힘과 그 후보인 윤석열과 맞서고 있다. 일종의 시스템 오류다.

그래서 젊깨문들은 어떻게 할까? 몇 가지 현실도피 기제가 있다. 갑자기 뭐 먹는 사진이나 음악 감상문 같은 걸 올린다거나, 다짜고자 맥락없이 #PrayForUkraina 같은 해시태그를 띡 붙인다거나, 김어준 따위가 생산해 퍼뜨리는 윤석열 관련 흑색선전들을 열심히 퍼다나르며 '그래도 민주당은 최악이 아닌 차악'이라고 자기세뇌를 강화한다거나...

그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며 따른다는 가치를 민주당이 모두 배신하고 있지만, 젊깨문들은 늙깨문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못한다. 가스라이팅의 희생자여서일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는, 젊깨문들은 늙깨문들에게 가치 판단의 기준을 위탁하고, 알량한 소비 문화에 안주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런 세대의 일원이며,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2022-02-26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이…”
1976년 시작된 ‘페트로달러’ 시스템
● 중동 산유국 보호 美 군사력이 기반
●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이거늘


2월 21TV 토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우리가 곧 기축통화국으로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발언하며 ‘기축통화 논쟁’이 불거졌다. [채널A 화면 캡처]
“한국이 기축통화국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월 21일 대선후보 TV 토론에서 한 말이다. 국가 채무를 더 높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른 후보들의 견해에 맞서는 본인의 논거로서 ‘기축통화국 편입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컸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출신 경제학자이기도 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역대급 똥볼”이라고 질타한 것을 비롯해 각계각층에서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다. 상황이 우호적으로 돌아가지 않자 이재명은 2월 23일 “내가 얘기한 게 아니라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이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얼마 전 전경련은 보도자료에서 ‘원화가 IMF 특별인출권(SDR)에 편입될 근거’를 언급했고 본인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소리다. 애석하게도 이재명의 인용은 전경련의 본의와는 차이가 있다.

‘기축통화국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발언을 옹호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 탓도 없지 않다. 이재명의 지지자 사이에서는 ‘기축통화는 아니지만 한국 돈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맞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보인다. 해외여행을 갔을 때 한국 돈을 냈다, 호텔에서 팁으로 한국 돈을 주고 나왔는데 좋아하더라, 같은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우리 돈의 힘이 세진 것이 맞으니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도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취지다.

대한민국은 2022년 현재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다. 메모리 반도체와 LNG선으로 대표되는 몇 개의 독보적 수출 품목이 있고, 자동차, 유조선, 기타 공업생산품 역시 준수한 대외경쟁력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확장된 경제력과 인터넷의 힘을 타고 한국의 문화 상품이 해외에서 널리 사랑받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고, 앞으로도 될 가능성은 없다. 왜일까?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 오늘날의 미국 달러가 이에 해당한다. [동아DB]
기축통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개념에 따르면, 외환 시장에서 B라는 나라의 화폐와 C라는 나라의 화폐를 거래할 때 기준이 되는 A라는 화폐, 그것이 기축통화다. 우리가 한국의 원화를 일본의 엔화로 교환한다고 해보자. 우리의 눈에 보이는 환율표에는 한국 돈 얼마로 일본 돈 얼마를 살 수 있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는 원화 대 달러, 엔화 대 달러의 교환비율이 먼저 존재한다. 달러를 매개로 원화의 가치, 엔화의 가치를 평가한 후, 비로소 원화 대 엔화의 환율이 나온다. 이 기준에 따를 때 한국 원화는 기축통화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국제 거래에서 많이 쓰이는 화폐’라는 뜻으로 기축통화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개념 정의를 따르더라도 원화는 기축통화로 인정될 수 없다. 국제 거래에서 원화의 위상은 우리의 수출이나 GDP(국내총생산) 규모보다 작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액 비중을 보면 그렇다. 1월 현재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미국의 달러가 39.92%로 1위, 유로가 36.56%로 2위다. 1위와 2위 이후로는 격차가 한없이 벌어진다. 영국의 파운드는 3위지만 비중으로 따지면 고작 6.3%에 지나지 않는다. 원화는 이 순위표에서 20위권에도 들지 못한다.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니며 앞으로도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경제학’의 눈으로 바라본 설명에 불과하다. 노골적인 힘의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현실 속에서 기축통화란 결국 패권국가의 돈을 의미한다. 어떤 시대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제국의 화폐는 그 영향권 속에서 보편적인 가치 저장 및 교환의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로마 제국의 디나르부터 오늘날의 미국 달러까지 변치 않는 냉정한 현실이다.

게다가 달러는 다른 제국의 기축통화와는 다른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그 가치를 귀금속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로마의 디나르는 기본적으로 은화였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는 디나르의 은 함량이 높고 정품성을 보장받기 쉬웠기 때문에 로마 제국 바깥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로마의 힘이 기울어지면서 점점 은 함유도가 떨어지고 로마의 해외 구매력 역시 꺾이는 악순환이 펼쳐졌다. 달러 역시 연방준비제도와 포트 녹스에 쌓여 있는 금괴를 통해 가치를 최종적으로 담보했으나 베트남 전쟁 비용 및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로 인해 1971년 금태환을 중단했다.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군사력
그렇다면 대체 외국인들은 무엇을 믿고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해야 한단 말인가. 1970년대, 세상에는 금보다 더 소중한 재화가 하나 있었다. 플라스틱의 원료이며, 자동차, 배, 비행기 등 거의 모든 교통수단의 연료인데다가, 심지어 비료를 생산할 때도 필요한 ‘검은 황금’. 석유가 바로 그것이다. 석유를 갖지 못한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은 석유를 확보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반면 미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는 나라다. 그 위에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쏟아져 나오는 막대한 석유의 지배력을 더하면 어떻게 될까.

1976년,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사우디 왕가와 협약을 맺는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하며 무기를 제공하고, 대신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원유를 오직 달러로만 거래하기로 약조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뒤를 이어 석유 수출국 기구(OPEC)에 속한 나라들도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달러는 금이 아니라 원유로 태환되는 기축통화의 반열에 올랐다. 이른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전 세계의 원유 거래는 오직 달러로만 이루어진다.

몇몇 나라들은 페트로달러 시스템으로부터 이탈을 꾀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나라들의 말로는 썩 좋지 않았다. 2000년 9월 사담 후세인은 이라크산 원유 결제 수단을 달러에서 유로로 바꾸겠다고 했는데,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고 후세인 정권은 몰락하고 말았다. 리비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디나르 금화’라는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 원유를 거래하자고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정권이 뒤집히고 카다피는 목숨을 잃고 말았다.

미국이 그런 이유로 전쟁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음모론적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 있다. 미국의 기축통화국 지위는 페트로달러 시스템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또한 미국의 페트로달러 시스템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해 중동 산유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거나 묶어놓을 수 있는 미국의 엄청난 군사력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미국이 갖는 기축통화국으로서의 힘이란 미국 달러로만 살 수 있는 석유의 힘, 석유를 확보하고 지킬 수 있는 미국의 군사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희생과 헌신을 대가로 유지하다
이재명의 ‘기축통화국’ 발언이 문제적인 것은 그래서다. 재정 적자를 늘려 당장 복지 예산으로 뿌리자는 취지로 기축통화국 발언을 했다는 점을 놓고 보면 더욱 그렇다. 이재명과 그가 주창했던 기본소득 등에 동의하는 이들은 기축통화를 그저 ‘맘 놓고 찍어내기만 하면 되는 돈’, 일종의 ‘재정 화수분’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재명에게 기축통화국이란 ‘공짜로 돈 찍어내는 나라’로 여겨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기축통화란 결국 제국, 패권국의 화폐다. 패권국이 패권국의 지위에 오르고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을 모두 수행하며 승리를 거뒀고, 자연스럽게 패권국의 지위에 올랐다. 미국이 패권국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결국 무승부로 끝나버린 6‧25전쟁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베트남에서는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폭탄을 퍼부으면서도 굴욕적 퇴각을 맛보아야 했다.

지금도 미국은 중동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평화 유지’를 위해 군대를 보내고, 여러 비밀스러운 작전을 통해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며, 대내외적인 비판과 비난을 받는다. 미국의 달러 패권은 그런 면에서 결코 ‘공짜’가 아니다. 미국인들의 세금으로 유지되는 미군, 군대에서 젊음을 바치며 때로는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는 군인들의 희생과 헌신, 그것을 대가로 얻어냈고 지금껏 유지하는 것이다.

기축통화국이 되면 한국 돈의 대외적 신뢰도가 높아지니 마치 ‘공짜 돈’이 생긴 것처럼 재정 부채 비율을 100%까지 높일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리는 이재명의 주장은 너무도 가벼운 소리다. 패권국의 화폐, 기축통화는 그런 게 아니다. 패권을 잡고 지키기 위해서는 자국민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적대국 혹은 제3국의 피해 역시 불가피하게 수반된다.

입만 열면 반미 자주를 외치며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너무도 철부지 같은 소리다. 달러에 대한 세계의 신뢰는 결국 달러로만 구입할 수 있는 석유에 대한 신뢰다. 석유를 틀어쥔 패권에 도전하지 않는 한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 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암묵적 협의의 산물이다.

한국이 기축통화국이 된다는 건, 미국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갖고, 미국의 패권을 빼앗아온 후,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특히 진보적 가치관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썩 달가운 미래도 아닐 것이다.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
이 글의 목적은 미국 중심의 자유무역질서와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원치 않게 패권국이 된 미국은 전 세계의 바다를 점령했으면서도 ‘사용료’를 받는 대신 각국이 자유롭게 무역하고 상업적으로 번영하는 국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 이것은 우리가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된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패권과 질서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도덕적으로 결백하다 말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같은 나라였지만 소련의 영향 하에 공산권으로 편입된 북한의 엇갈린 운명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듯, 그 시점에 주어진 다른 선택지에 비하면 분명히 낫다. 우리는 그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이루었고, 앞으로도 더 나은 나라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정권 인사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크라 조롱…그 입 다물라 [노정태가 고발한다]



왼쪽부터 박범계 법무부 장관, 문재인 대통령, 홍현익 국립외교원장. 그래픽=김영옥 기자
 
"러 침공 예측 못 하고 위기 키운 '아마추어 대통령'". 국내 한 언론이 지난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관련 외신을 종합한 짧은 기사에 단 헤드라인이다. 동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현 법무부 장관인 여당 소속 박범계 의원이 트위터에 이 기사를 포스팅한 건 전혀 다른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공인이, 침략당한 외국 대통령을 조롱하는 모양새를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청와대는 미국 주도의 대러시아 제재 불참을 말하다 뒤늦게 제재 동참으로 선회해 인심만 잃었다.
외교원장이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
러시아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조롱한 건 박 장관뿐만이 아니다. 홍현익 국립외교원장도 SNS 댓글로 "우크라이나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주요인이고, 그다음 미국과 러시아의 국익을 내세운 위정자들의 정치적 계산의 합작품…. "이라고 평했다. 이 정부나 더불어민주당에 속해 있거나 정권 친화적인 인사들이 이와 비슷한 과격한 표현을 쏟아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직 코미디언이었다는 점을 특히 조롱거리로 삼는다. 가령 역사학자라며 노골적인 어용 행보를 일삼는 전우용은 트위터에 "무식하고 무능한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처지가 안타깝다"다며 "국민이 무식한 통치자를 선택하면, 무식한 통치자는 대개 '재앙'으로 보답한다"는 극단적인 비하 발언을 내뱉었다.
박범계 SNS

홍현익 국립외교원장이 단 댓글. [페이스북 캡처]
 
개전 직후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크라이나를 보며 손가락질하기는 쉽다. 우크라이나에 대해 잠깐 검색한 후 현 대통령 젤렌스키가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희극 배우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웃음거리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혹은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나 지식인이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그런 식으로만 묘사해서는 안 된다.
개도국 멸시하는 '꼰대 의식' 투영
그런데 왜 재야 지식인부터 장관에 이르기까지 다들 이런 행태를 보이는 걸까. 나는 586 세대, 더 나아가 진보 진영 일각에 팽배한 예능인 혐오와 개발도상국 멸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거라고 본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붕괴로 탄생한 나라다. 건국 30년을 갓 넘긴 신생국이다. 정치·경제 등 사회 전반이 제자리를 잡을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숱한 대내외적 풍파를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우크라이나의 현황은 비참하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부패가 심각한 나라다. 짐작할 수 있듯이 1등은 러시아다. 하지만 러시아는 막강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석유 및 천연가스를 가진 나라지만, 우크라이나는 다르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긴 어렵다. 정치적으론 친서방파와 친러시아파로 나누어져 혼란스럽다. 한편 우크라이나 경제는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재벌, 즉 올리가리히에 의해 지배된다.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 역시 올리가리히 중 한 사람으로, 동유럽 최대의 초콜릿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기업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 하여 그 나라가 반드시 부패하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그랬다. 친서방파가 집권하든 친러파가 집권하든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았으니 국민들은 염증을 냈다.

우크라이나 정치는 러시아의 영향력에 휘둘려왔으나,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 후 유럽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러자 러시아는 2014년 군사력을 동원해 크림반도를 강제 병합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동쪽 돈바스 지역에서는 반정부세력을 조직, 포섭, 지원하는 방식으로 비정규전쟁을 벌여왔다. 2022년 2월 현재 전면전이 벌어졌으나 사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8년째 계속되고 있었던 셈이다.
코미디언 대통령 당선은 부패 반작용
젤린스키의 대통령 당선은 이런 맥락에서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정치 경력이 전혀 없는 배우 출신으로, 2015년부터 '인민의 일꾼'(Servant of People)에 출연해 큰 인기를 누려왔다. '인민의 일꾼'은 시골학교 선생님이 SNS에 올린 정치 비판 영상을 통해 국민적 인기를 얻어 정치권으로 진출하여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정치 풍자 시트콤이다. 답답하고 암울한 정치적 현실 속에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사이다'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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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지하철역 안에 시민들이 대피해 있다. 이날 새벽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군사작전을 선언하면서 침공이 시작됐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렇다고 코미디언을 대통령으로 뽑아?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개그와 다큐를 구분하지 못하나? 박범계 장관과 전우용을 비롯한 대다수 586들이 이런 경멸을 대놓고 드러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크라이나 문제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건국 이후 30년간 얽히고설킨 정경유착을 해결하지 않는 한 미래가 없다.

2019년 대선 당시 젤렌스키는 1차 투표에서 1위를 하고, 2차 결선 투표에서 73.19%의 득표율로 전임 대통령 포로셴코(24.48%)를 압도적 표차로 눌렀다. 우크라이나인들이 시트콤과 현실을 구분 못 하는 바보 멍청이여서가 아니다. 처음 정치에 뛰어든 신인을 지지하여 단번에 정치적 구도를 뒤흔들지 않으면 고질적인 정경유착을 끊을 수 없다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젤렌스키가 법학 석사 엘리트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욱 그렇다. '코미디'라는 키워드를 빼고 본다면, 우크라이나의 2019년 선거는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슷한 일은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투자회사 출신 엘리트 마크롱이 전광석화처럼 나타나 대통령이 되고 본인의 지지 정당을 원내 제1당으로 만들었던 것과 사실상 동일한 현상이다. 기존 정치권에 통째로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열망이 뭉쳐, 기존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과를 낳은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몹시 열악하다. 2013년, 우크라이나의 이웃 폴란드에는 약 22만 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2019년 현재 120만여 명으로 늘었다. 유출 인구 상당수는 고학력, 고소득, 고급 인력이다. 이 추세가 지속할수록 친서방파는 선거에 이기기도, 설령 이긴다 해도 우크라이나를 개혁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기도 어렵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5일 새벽 연설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 인스타그램 캡처]
 
물론 젤렌스키 정권은 여러 약점을 드러냈다. 특히 인재풀이 부족한 탓에 젤렌스키와 가까운 방송 관계자들이 정부 요직을 차지했다는 뉴욕타임스 보도는 젤렌스키의 무능 이미지에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젤렌스키를 택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그가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에 뽑지 않았나. 실제로 젤렌스키는 이전 정권에서 시도하지 않았던 강력한 올리가리히 규제 법안을 연이어 내놓았다. 유효성과는 별개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원하던 방향이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정치 전체를 뒤집어버릴 '아웃사이더'를 원했는데, 우리가 과연 그 선택을 비합리적이거나 어리석다고 비난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선거용 견강부회, 혐오 발언
해방 직후 영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했던 발언은 수많은 한국인의 마음속에 두고두고 응어리로 남았다. 일제 식민지배가 끝나자마자 북한의 침략을 겪고 황무지가 된 국토 위에 두 주먹만 가지고 서 있는 것도 서러운데, 그런 비참한 처지의 대한민국을 이런 식으로 조롱했던 말을, 우리는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박범계, 전우용, 그 외 민주당 의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내뱉는 폭언 역시 마찬가지다. 근엄한 유교적 사농공상 세계관을 깔고는 무려 한 국가의 대통령을 예능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광대''천민'으로 취급하는 혐오를 내비친다. 더 나쁜 건 우크라이나의 사정과 역사적 맥락을 알지도 못하면서, 젤렌스키를 대통령으로 뽑은 우크라이나 국민을 통째로 멸시하는 태도다.

입으로는 온갖 정치적 올바름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노골적인 차별과 혐오와 멸시를 드러내는 사람들 아닌가. 침략당한 외국을 두고 선거용 견강부회를 위해 그런 혐오 발언을 하는 걸 보면 너무 끔찍해서 내가 다 미안할 지경이다. 모든 한국인이 그렇지 않다는 걸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