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13

'20대 남자 성비 문제'의 진짜 희생자

2020년 현재 연령별 성비

20대 남자들은 여자보다 1.2배 많고, 그래서 짝을 구하기 어렵고, 일자리도 예전처럼 쉽게 구할 수 없고, 그래서 피해자다.

이런 소리를 이제 남초 커뮤니티가 아니라 나름 양식과 식견이 있는 기성세대 중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은 말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성비 박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희생자 집단을 가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여성주의적 맥락에서 낙태권은 곧 여성의 선택권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 낙태에 반대하는 서구 기독교 계열이 스스로를 '프로 라이프'라 할 때, 여성주의는 '프로 초이스'라 하여 여성의 선택권으로서의 낙태권을 옹호하는 것 역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1세계 문제다. 한국, 인도, 기타등등 남아선호 및 여아살해가 흔한 제3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게 전개됐다. '시댁과 사회의 강요로 인한 여아 낙태'를 하는 사회에서는, 오히려 낙태시술이 성행한 것이 여성 인권의 억압과 맞닿은 현상이었던 것이다.

<사이언스>의 기자였던 마라 비슨달은 <남성 과잉 사회>에서 그 문제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아시아와 서구를 비교해보면 아시아에서의 낙태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북아메리카에와 서유럽에서 낙태 합법화는 보통 낙태 건수의 감소로 이어진다. 이것은 보기만큼 역설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태법을 완화할 때는 피임도 함께 촉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 않을 권리와 아울러 애당초 임신하지 않을 권리가 대두된다. 하지만 가족계획 정책이 여성의 요구에 대한 배려 없이 수립되고 낙태가 피임을 보완하는 방법이라기보다 속성 인구 조절 방법으로 도입된 아시아와 동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합법적 낙태는 더 많은 낙태를 의미했다. 한국여성개발원의 연구원 변화순은 "가족계획정책에는 성 인지적 관점(남성과 여성에게 미칠 영향을 중심으로 개념과 정책을 검토하는 관점--옮긴이)이 빠져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여성의 몸은 도구죠. 그래서 우리는 약 대신 낙태를 이용합니다"라고 말한다.[208쪽]

마라 비슨달, 박우정 옮김, 『남성 과잉 사회』(서울: 현암사, 2013)

'너무 많이 태어나서 짝 없는 남자들이 불쌍하다'고?

그렇게 남자들을 '과잉생산' 하기까지, 낙태를 강요당했던, 이대남들의 어머니 세대는 안 불쌍한가?

나는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래서, 대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택도 없이 이대남에게'만' 감정이입하며 엉엉흑흑 불쌍불쌍 둥기둥기 해주는지 이해를 전혀 못하겠다.

(아니, 실은 잘 알겠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난다.)

2022-03-12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윤석열은 난제에 빠졌고 이재명은 기회를 얻었다

[노정태의 뷰파인더] 尹 시대, 한국정치 개와 늑대의 시간

● 역대급 초박빙 대선의 후폭풍
● 진보성향 유튜버의 송영길 습격
● 일부 친문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 이재명 ‘1600만 표’의 정치적 의미
● 野, ‘굴러온 돌’ 안철수라는 딜레마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3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당선 인사 겸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3월 9일 치러진 제20대 대통령 선거는 3월 10일 새벽 4시가 돼서야 당선자가 확정됐다. 1%p 이내, 고작 247077표 차이로 당락이 갈린 역대급 초박빙 대선이다. 이로 인해 기호 1번과 2번, 그러니까 여당과 야당이 5년 만에 교체됐다.

‘권력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이제는 ‘과거의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 내의 권력 구도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가 2위로 낙선하긴 했지만 무려 16147738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때 얻은 13423800표를 훌쩍 웃돈다. 이재명이 차기 대선에서 재기를 도모할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대목이다.

반면 원내 제3당 정의당의 현실은 턱없이 초라하다. 2.37%, 803358표. 선거비용 보전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이 완주해 표가 나뉘는 바람에 대선 결과가 달라졌다는 식의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야당이지만 일종의 준 여당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던 정의당과 민주당의 밀월관계는 정권교체와 함께 끝난 셈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건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를 해서 대통령에 당선됐다면 그를 중심으로 국민의힘이 완전히 개편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24만여 표차의 신승을 거둔 탓에 ‘윤석열발(發) 정계개편 시나리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난항에 부딪히고 말았다. 윤석열은 압도적 의석의 거대 야당과 맞서면서, 동시에 110석의 여당을 ‘대통령의 정당’으로 만들어나가야 하는 이중 과제에 놓였다.

‘표삿갓’ 테러의 상징효과
여기서 문득 떠오르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L'heure entre chien et loup). 해가 떠오르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뭔가 보이지만 뚜렷하지는 않은 시간을 뜻한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것이 나를 지켜주는 개인지,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시간이 바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다.

대선 이후 한국 정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접어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내게 다가오는 저 사람과 저 지지층이 나의 편인지 적인지, 나의 편인 척 하면서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것인지, 나를 공격했던 저들의 손을 잡아도 되는 것인지, 끝없이 고민하며 결국에는 모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점이지대(漸移地帶)로 향하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부터 살펴보자. 지난 3월 7일, 서울 신촌에서 거리 유세 중이던 송영길 당시 민주당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표삿갓’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70대 유튜버가 검은색 비닐로 싼 망치를 이용해 송영길의 머리를 여러 차례 가격했던 것이다. 다행히 송영길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장 선거를 치러야 하는 처지의 그는 하루 만에 퇴원해 유세와 연설을 이어나갔다. 송 전 대표의 쾌유를 빈다.

‘표삿갓’은 한미연합훈련을 반대하고 종전 선언을 촉구하는 등의 내용을 유튜브에 올려온 인물이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될 당시에도 “한미 군사훈련을 반대한다”, “청년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 없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가 아닌 진보라는 점, 국민의힘이 아닌 민주당 지지층에 속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적 범죄 행위다. 이와 동시에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극도로 심각해져 있는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삿갓이 내세운 ‘한미연합훈련 반대’, ‘종전선언’ 등은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 내내 추구했던 대북 외교 현안이다. 그를 문재인의 골수 지지자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반면 이재명은 정치 이력을 시작할 때부터 ‘친노’, ‘친문’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 본인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쳐오자 문재인의 아들인 미디어아티스트 문준용 씨를 거론하는 등, 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썩 좋지 않은 감정이 쌓여 있는 상태기도 하다. 이재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송영길이 정치적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이러한 당내 정치 지형과 무관하다 보기 어렵다.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민주당의 내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더레프트’라는 아이디로 잘 알려진 친문 인플루언서를 비롯해, 다수의 친문 지지자들이 이재명을 버리고 윤석열 지지로 ‘갈아타는’ 이변이 벌어졌다. 2018년부터 이재명과 대립해오던 더레프트 및 이른바 ‘극문’ 지지층은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윤석열 지지를 표명하고 당선 운동에 나섰다. 그들은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에게 ‘여니’, 운석열에게는 ‘여리’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이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여니 없으면 여리 찍는다.”

투항과 전향 사이
대선에서 패배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오른쪽)가 3월 1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에 참석해 도열한 의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민주당에서 이탈한 반(反) 이재명 지지층이 실제로 얼마나 투표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윤석열을 겨냥한 민주당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데에는 분명 일정한 기여를 했다.

윤석열의 아내인 김건희 코바나컨텐츠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이 쏟아지던 지난 1월 무렵이 그랬다. 더레프트를 비롯해 친문 ‘네임드’ 지지자 중에는 인터넷에 유포되기 적합한 이미지와 문구 등을 잘 만들어내는, 이른바 ‘능력자’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 그들은 김건희를 향해 쏟아지는 비방과 흑색선전의 내용을 되받아치거나, 윤석열-김건희 부부를 귀엽게 묘사하는 여러 ‘짤방’을 만들고 유포했다. 온라인 선전전에서 취약했던 국민의힘과 그 지지자들 처지에서 보자면 가히 ‘외계인들이 외계 무기를 들고 와서 도와주는’ 형국이었다.

이낙연계의 유명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윤석열 지지 선언을 한 것은 그런 면에서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민주당 기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변화와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니 말이다. 이낙연의 측근으로 불린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괴물보단 식물 대통령을 택하겠다”는 그의 말에는 뼈가 있고 가시가 세워져 있다.

이렇듯 민주당의 내분은 대선 이후에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 이후 이재명의 지지자 중 일부는 여당 의원들을 향해 문자 폭탄을 보냈다. 서울에 지역구를 둔 한 민주당 의원은 ‘송영길 대표 사퇴는 안 된다’, ‘패배 원인은 무조건 이낙연 전 총리’라는 취지의 문자를 하루에 300여 통 이상 받았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는 점잖은 말로 바뀌어 서술돼 있으나, 실제로는 온갖 욕설과 폭언이 담겨 있으리라 예상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만약 이번 선거에서 윤석열이 50% 이상의 과반 득표를 하고, 이재명은 40% 이하의 득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대선에 참패한 민주당의 내분은 본격적으로 더 크게 드러났을 것이다. 이낙연의 열혈 지지층은 이재명이 부패하고 부도덕하다고 비난해왔다. 게다가 선거 결과로 무능이 드러나기까지 했다면, 이재명과 이재명계를 쫓아내거나 자신들이 따로 짐을 싸서 나가버리거나, 아무튼 한 집 살림을 이어가지 않겠다는 결정에 보다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이재명은 정권교체 여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1600만여 표를 얻는 성과를 냈다. 이재명은 대선에서 졌지만 민주당을 움켜쥔 ‘그립’을 놓치지 않고 더 단단히 다져나갈 수 있다. 3월 10일 새벽 4시 KBS의 당선 예측이 나오자마자 후보자 본인이 빠르게 승복 선언을 하고, 같은 날 송영길을 비롯해 당 지도부가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진다며 총사퇴한 것은, 오히려 자신감의 표현에 가깝다. 선거에서 졌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으니, 패배를 빨리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반면 문재인의 임기는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권력은 이미 야당으로, 윤석열의 인수위로 넘어간 상태다. 현직 대통령과 ‘친노 적통’을 믿고 버텨온 친문 혹은 극문으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이재명 쪽에 투항해야 할까? 아니면 이미 한번 지지했으니, 윤석열이 새로운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고, 문재인이 임명한 검찰총장 윤석열의 지지자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할까? 저들은 나의 아군인가? 나는 저들에게 늑대인가, 개인가? 시계(視界) 제로.

이준석을 둘러싼 갈등 지형
대선을 이틀 앞둔 3월 7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경기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에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박수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안개 속처럼 뿌연 상태인 것은 국민의힘도 마찬가지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듯 윤석열의 지근거리에는 소위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관계자)으로 통칭되는 측근 그룹이 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그 점을 연신 지적해왔고, 윤석열이 윤핵관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에 불만을 표하고자 지방으로 떠나는 식의 행보를 보여줬다. ‘윤핵관’과 ‘이핵관’, 그리고 윤석열의 당선에 기여한 다른 세력들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은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권교체에 성공했기 ‘ 때문에’ 앞날을 예단하기 어렵다. 윤석열이 압도적인 득표율과 개인의 카리스마로 당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직과 그에 따른 ‘전리품’은 그대로 있는데, 누가 그것을 차지해야 하는가? 윤석열이 교통정리를 해서 완벽히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초박빙 승부로 결정된 여소야대 정권은 위기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다. 정치에 입문한지 고작 8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보 정치인’ 윤석열이 넘어야 할 큰 산이다.

이준석의 영향력은 크게 상처 입은 상태다. 호남에서 30% 이상의 득표를 올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세대포위론’의 힘으로 전체 득표율에서 10% 이상의 격차를 벌려 압승하리라는 호언장담은 무참히 깨졌다. 국민의힘의 호남 진격은 약 15% 정도의 득표율로 귀결됐다. 이는 그간 국민의힘 계열 정당이 얻은 호남 득표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국민의힘이 호남을 끌어안는 전국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이대남’ 구애 전략 혹은 여성주의 고립 전략이다. 이준석과 극적으로 화해한 윤석열이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짧은 메시지를 올려 여론을 반등시킬 때만 해도 이 전략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대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3월 4일과 5일 사전투표가 시행된 후, 3월 7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이준석이 “여성의 투표 의향이 남성보다 떨어지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며 “저는 그런 (여성들의 이재명 민주당 후보 지지 성향 관련)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것이 온라인에서는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 투표 성향으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본다”는 발언을 하면서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재명 선대위는 선거운동 막바지에 이르러 여성들이 겪는 디지털성폭력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렇게 민주당은 20대 여성표심을 겨냥했고 서서히 판세가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준석은 젊은 여성들의 표심을 ‘어차피 투표하러 안 나오니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일축했다. 역풍을 불러올만한 발언이었다.

여론조사 공표기간 금지 전인 3월 2일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은 20대 여성으로부터 39.1%, 윤석열은 26.7%의 지지를 받았다.(여론조사 관련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그러나 1주일 후인 대선 당일 출구조사에 따르면 이재명을 향한 20대 여성의 지지는 58.0%로 폭증한 반면, 윤석열의 표는 33.8%로 완만하게 늘었다. 안철수와 단일화를 했지만 안철수가 갖고 있던 20대 여성표는 윤석열에게 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준석 심판을 위해 이재명에게 결집하면서 이번 대선을 초박빙 승부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준석이 끌어들인 남녀 갈등은 국민의힘의 ‘짐’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의당의 고통스러운 홀로서기
‘정치 초보’ 윤석열이 풀어야 할 난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와 합당까지 합의한 안철수를 어떻게 예우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선거가 워낙 박빙으로 끝난 탓에 안철수가 어떤 기여를 했고 어느 정도의 지분을 요구할 수 있는지 이해관계자들 간의 해석차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안철수와 ‘굴러온 돌’들은 단일화가 승리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겠지만, 국민의힘의 ‘박힌 돌’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307542표나 쏟아져 나온 무효표를 근거로, 안철수의 기여가 낮으니 많은 지분을 제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국민의힘 바깥 뿐 아니라 안에서도 적과 동지의 경계선은 흐릿해지면서 많은 이들을 혼란과 번민으로 몰아넣을 전망이다.

정의당은 더욱 험난한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창당된 후 10년간 정의당은 민주당 및 그 지지층과 전략적 우호 관계를 수립하며 동반 성장하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았는데, 이제는 그 전략이 유효성을 상실했다. 민주당은 야당이 됐고,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은 정의당에 대선 패배 책임론을 언급하고 있다. 정의당은 이제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과연 진보정당으로서 독자 노선을 수립하고 지지층을 다시 쌓아나갈 수 있을까?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해뜰녘과 해질녘, 하루에 두 번 있다. 저 멀리 다가오는 것이 나의 친구인지 적인지 알 수 없으나, 해뜰녘의 불확실성은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마무리된다. 반면 해질녘의 흐릿한 시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오래도록 지속될 짙은 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겪게 될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해질녘의 어둠이 아닌 해뜰녘의 어둠이기를, 곧 해가 뜨고 많은 것이 분명해지며 더 나은 대한민국을 이룰 토대가 마련되기를 기원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우크라이나 참전한 이근에게 살인죄를 묻겠다고요? [노정태가 고발한다]

SNS에 우크라이나 도착 소식을 올린 이근. 배경은 러시아군 포격으로 불타는 하르키우시. 그래픽=전유진  

먼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이근 대위'라는 유튜브 셀럽(유명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유튜브 방송 '가짜사나이'에서 그가 반복하던 "너 인성에 문제 있어?" 같은 유행어는 사실 왜 유행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침공당한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참전이 목적이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외교부는 여권법 위반에 대한 행정 제재를 가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난 8일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정부의 규정된 사전허가 없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했다”며 “외교부는 현재 여권법에 따라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를 통해 여권에 대한 행정제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여권법 위반에 따른 행정 제재는 여권 반납 명령→(불응시) 여권 무효화→새 여권 발급 제한 등 3단계 조치로 이뤄진다.
오웰도 처벌해야 했을까
우크라이나 국제 의용군으로 참전한 캐나다 코미디언 앤서니 워커. [트위터 캡처]
 
하지만 나는 이근의 우크라이나 의용군 참전을 반대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정부가 이근이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다른 이들의 참전을 막는 것에도 회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울 권리'를 부정하는 것이라서 그렇다. 왜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남의 나라 전쟁에 나설 권리를 허용하지 않는 걸까.

이쯤에서 조지 오웰을 한번 소환해보자. 193612월, 그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의용군에 입대했다. 처음엔 저널리스트로 그곳에 갔지만 난생처음 가본 카탈루냐에 발을 딛자마자 의용군에 들어가 버렸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오웰은 무정부주의적인 카탈루냐에 매료됐고, 프랑코 정권에 맞서 카탈루냐를 지키는 일에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 기자가 아닌 군인으로서 스페인 내전에 가담했다.

전쟁은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았다. 전장의 공포보다 더 고통스러운 건 같은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 투쟁과 내분이었다. 특히 소련의 지원을 받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무정부주의자들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공통의 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프랑코 정권의 파시스트들보다 때로는 더 악독했다. 결국 오웰은 몸과 마음의 부상을 끌어안은 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 원고를 쓰려고 그의 『카탈루냐 찬가』를 다시 읽어봤다. 어디에도 영국 정부가 오웰의 스페인 의용군 입대를 처벌했다는 내용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타국에서 목숨을 거는 일은, 권장할만한 일이 아닐 수는 있어도 금지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깔려 있어서일 것이다.

영국·캐나다·미국 등은 여전히 그런 상식이 통한다. 심지어 영국과 캐나다는 우크라이나 참전을 원하면 참여해도 좋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 역시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시아와 국가 차원의 전쟁을 벌일 수는 없지만 침략자 러시아와 싸우고 싶은 국민이 있다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외인부대 되는데 '이근'은 안 된다?
지난 8일 화상으로 영국 하원 연설을 하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연합뉴스]
 
이런 상식은 한국에서는 상식이 아니다. 비단 강경한 정부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이근의 우크라이나 입국을 다룬 기사에 달린 일반 국민의 댓글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이유로 그의 우크라이나 행을 비난한다. 첫째,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은 외교 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실제 전쟁에 뛰어들면 총, 칼, 폭약 등을 사용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그건 범죄다. 셋째, 한국인이라면 한국을 지켜야 한다.

이 비판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이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모인 2만여 명의 외국인 입대 지원자들은 모두 전쟁을 하려고 우크라이나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침공에 맞서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입국한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이 우크라이나 시민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속성으로 시민권을 발급받은 외국인들은 '국제 군단'(International Legion) 등 별도 편제로 묶여 우크라이나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법적·제도적 절차를 갖추면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반론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는 자동으로 해결된다. 원래 한국인이라도 우크라이나 군복을 입고 작전을 수행하면서 러시아군을 사살한다면 그것은 통상적인 교전 행위일 뿐이다.

프랑스에는 외국인으로 이루어진 '외인부대'가 있다. 이들 외인부대는 대개 프랑스 국경 바깥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그 과정에서 실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한국인 중에도 이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다른 어떤 나라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때로는 사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한국과 제3국의 외교 갈등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

전쟁 중 적군을 살상하고 오면 살인죄를 물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군인이 작전 중 수행한 행위는 통상적 법의 테두리 안에서 말할 수 없다.

분단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엄혹한 현실이 있는데 이를 내버려 두고 굳이 외국의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주장은 어떨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사람에겐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복무를 마친 사람에게까지 그런 논리를 적용하는 건 무리다. 대한민국 남성은 국가의 '병역 자원'이기에 앞서 양심과 의지를 지닌 독립된 인격체다.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권리를 송두리째 부정당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참전에 살인죄를 묻겠다니
지난 1일 영국 거주 우크라이나인들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국 등 주요 유럽 국가들은 자국민의 참전을 허용하고 있다. [EPA]
 
문제는 법이다. 우리 법은 안타깝게도 그런 권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형법 제 111조 사전죄(私戰罪)다. 이에 따르면 "외국에 대하여 사전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금고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의용군으로 외국 군대에 들어가 참전하면 외교상 문제를 일으켜 국익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게 이 조항이 만들어진 주된 이유다.

그런데 지금도 한국인들은 프랑스 외인부대, 혹은 한국 국적을 가진 채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한다. 지금껏 그 누구도 그런 선택을 한다는 이유로 비난받거나, 조롱당하거나, 사회적으로 배척당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국제 군단을 프랑스 외인부대나 미군과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나 근거가 무엇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한국인의 우크라이나 참전을 찬성하지 않는다. 누군가 조언을 구한다면 국내법을 어기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겠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전쟁에 뛰어들어 우크라이나를 돕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의지를 국가가 법으로 틀어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영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사람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결과를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머나먼 땅,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그 나라 군복을 입고 전쟁터에 뒹굴다 목숨을 잃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가 자국민의 양심적 병역 거부마저 존중하는 시대에, 양심적 병역 수행 역시 존중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묻고 싶다. 나도 안다.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로서 우리 사회에 작은 생각의 균열을 내고 싶다.
이근을 비롯해 우크라이나군에 자원입대한 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한다.

2022-03-08

평화를 돈으로 살 수 있는가

답: 불가능하다. 돈도 결국 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나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의 해외 금융자산 동결. 아무리 많은 '외환보유고'를 쌓아도, 그게 자기 땅 자기 곳간에 물리적으로 들어 있지 않은 한, 이토록 쉽게 빼앗기고 마는 현실을 전 세계인이 깨닫고 있다.

링크한 WSJ 기사도 그런 것. 아예 첫 줄부터 이렇게 묻는다. "What is money?" If Russian Currency Reserves Aren’t Really Money, the World Is in for a Shock"

실로 그렇다.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그토록 열심히 축적해온 '외환보유고'라는 게, 이런 식이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미국과 전쟁하려고 하면 싹 동결될 싸이버 머니 아닌가?

그런데, 원래 돈이 그런 것이다. 돈을 돈으로 만드는 건 화폐 구성 물질의 재화로서의 가치나 유용성이 아니다. 신용을 보증해줄 권력, 힘, 폭력, 그런 것들이 돈을, 특히 기축통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준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노정태라는 훌륭한 필자가, 신동아라는 역사와 전통의 근본 시사 정론지에 쓴, 이 칼럼을 참고해볼 수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 이재명은 뭘 희생할 텐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美 달러 패권은 ‘공짜’가 아니다")

여기서 생각을 한 단계 더 이어가 보자. 민주당의 통일정책이란 결국 '평화를 돈으로 사자'로 요약된다. 북한에 유화책을 펴서 돈을 주고, 돈을 더 줄 거라는 기대를 품게 만들면, 우리 말을 잘 들을 거라는 논리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 평화란 힘이 충분히 강해 상대방이 나를 넘보지 못할 때 구현되는 어떤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돈을 적에게 주는 식으로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악당에게 돈을 줘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돈이란 힘의 다른 표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악당에게 돈을 주는 것은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이며, 악당에게 힘을 주는 것은 평화의 정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는 짓이다.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망상, 그것은 미국이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이겨 세계를 정복했던 시절의 산물이다. 워낙 막대한 힘으로 평화가 강요되었기에 돈이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제 드디어 '장기 20세기'가 완전히 끝났다. 지정학과 네셔널리즘의 시대가 돌아왔다. 우리 국민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2022-03-05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민주당에 묻는다…코미디언은 대통령 되면 안 되는가?

[노정태의 뷰파인더] 젤렌스키 조롱은 反민주적이다

● ‘젤렌스키 무능론’은 與 당론?
● 민주주의, ‘부적격자에 자격주는’ 역사
● 프랑스 마크롱도 ‘초보 정치인’이었다
● 나라 리셋 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AP 뉴시스]
“6개월 된 초보 정치인이 대통령이 돼 나토(NATO)가 가입을 해주려 하지 않는데 가입을 공언하고, 러시아를 자극하는 바람에 충돌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지난 2월 25TV토론에서 한 말이다. 우상호 민주당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2월 28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여러 미숙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이재명을 두둔하고 나섰다.

러시아를 탓하는 척하면서 우크라이나에도 슬쩍 책임을 돌리고, 젤렌스키에게 ‘정치 경력 없는 초보 무능 대통령’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박용진 민주당 공동선대위원장 역시 2월 25일 광주방송에 출연해 이재명과 동일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으니 말이다. “잠깐 인기 있고, 잠깐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고 나라의 운영을 맡길 수 없습니다.”

민주당이 마치 당론처럼 밀어붙이는 ‘젤렌스키 무능론’은 왜 등장한 것일까? 속내는 박용진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의 여지없이 해소된다.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정치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외적의 도발을 불러일으키는 무능한 초보 정치인’ 딱지를 붙이기 위해, 다른 나라의 사례를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 최근 방송 토론 보시면 건성건성 대답해요. (중략) 이 중요한 국가 경제 문제와 안보 문제를 이런 식으로 맡길 수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호렌카에서 3월 2일 우크라이나 군인이 러시아의 공격으로 일부 뼈대만 남은 집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남부 헤르손을 장악한 러시아는 인근 마리우폴, 키이우, 동부 하르키우 등에 전방위적 공격을 퍼부었다. [AP 뉴시스]
‘인민의 일꾼’에서 대통령직까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젤렌스키는 ‘인민의 일꾼’이라는 정치 풍자 시트콤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해 단번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말이 틀린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젤렌스키에 빗대 윤석열을 폄하하려 하는 이재명과 민주당의 공격은 퍽 부당하다. 타국민이 겪는 전쟁과 고통을 국내 정쟁에 활용하는 비윤리적 면은 논외로 하더라도 그렇다. 국가, 특히 민주주의 국가의 리더십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철학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노예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고대 그리스를 제외하고 나면, 민주주의의 역사란 곧 ‘부적격자에게 자격을 주는’ 역사다. 참정권과 투표권이 지속적으로 확대돼온 궤적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소리다.

민주주의가 ‘외래 문물’로 수입된 한국에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다. 그러나 소위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소수자들은 정치적 참정권을 뒤늦게, 순차적으로 획득했다. 처음에는 유산계급 남자에게만 참정권이 있었다. 그러다 유색인종 유산계급 남자, 무산계급 남자, 유산계급 여자, 무산계급 여자 순서로 참정권을 획득하고 온전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됐다.

선거에 나온 다른 이에게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선거에 출마해서 다른 이의 표를 받아 대표자가 될 수 있는 권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니 ‘아니, 코미디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고? 저 나라 사람들은 제정신인가?’ 따위 반응을 하는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지만 속으로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 받는 자’를 구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일종의 사농공상 내지는 카스트 제도를 내면에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범죄를 저질러서 참정권이 제한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선거에 나오면 안 될 사람’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 선거에 나왔다면 그 사람을 지지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그런 선택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은 분명 필요하며 그 또한 정치적 자유의 일부다. 하지만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정치인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을 미리 구분 짓고 웃음거리로 삼아 정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트럼프, 오바마 그리고 마크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일은 드물지 않게 벌어져 왔다. 21세기의 인상적인 선거를 놓고 보자면 오히려 최근의 역사는 ‘자격 있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트렌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역임한 도널드 트럼프만 해도 그렇다. 한국인 중 상당수는 트럼프라는 이름을 영화 ‘나홀로 집에 2’에 깜짝 출연한 부동산 사업가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을 이변이라고 보도하는 해외 언론들을 보면서, 그게 어느 정도의 이변인지 제대로 실감하는 이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트럼프는 ‘나홀로 집에 2’가 아니라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인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2004년부터 2017년까지 무려 13년이나 꾸준히 방영된 인기 프로그램이다. 내용은 이렇다. 트럼프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회사 중 하나의 경영자가 되기 위해 16에서 18명의 지원자가 접수한다. 트럼프는 그들을 어르고 달래다가도 골탕 먹이고, 속이고, 혼내고, 해고한다. “유 아 파이어드!”(You are fired: 당신은 해고야!)가 ‘어프렌티스’를 상징하는 명대사인 것은 그래서다. 백만장자 트럼프가 ‘노답’, ‘고구마’인 지원자들을 속 시원하게 해고하는 프로그램이 바로 ‘어프렌티스’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트럼프가 만들어낸 진정한 이변은 대선이 아니라 공화당 경선이다. 조직도 경험도 없는 트럼프가 쟁쟁한, ‘자격’ 있는 정치인들을 제치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선출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트럼프 본인도 과연 그 정도 성공을 예상했을 지에 대해 정치 전문가와 기자마다 의견이 갈릴 정도다.

그러나 중요한 건 대중의 마음이다. 미국인, 특히 공화당 지지자들은 워싱턴 DC에 모여 있는 기성 정치인들, ‘자격’이 충분한 그들을 싸잡아서 싫어했다. 그 모든 이들을 향해 ‘유 아 파이어드!’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 기득권’에 대한 분노의 열풍은 트럼프만의 독창적인 산물이 아니다. 그의 선임자인 버락 오바마 역시 ‘기득권 대 정치 신인’의 구도를 타고 순식간에 권력을 잡은 케이스다. 물론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그 후 시카고에서 인권변호사 겸 헌법학 교수로 일해 왔다. 일리노이 주 의회 상원의원과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력은 ‘중앙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것이 아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 뿐 아니라, 경선 과정에서 나가떨어진 수많은 후보 중 그 누구도 오바마에 비해 경험과 ‘자격’ 면에서 부족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경험도 조직도 없는 오바마를 택했다. 그가 잘 생긴 젊은 남자인 점도 영향을 미쳤겠으나, 근본적인 동력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든 그것과 동일했다. ‘기성 정치권’의 때가 묻지 않은 누군가를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앉혀, 나라 전체를 리셋하고 싶다는 대중적 열망 말이다.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역시 비슷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 국립행정원(ENA) 졸업 후 경제부처 공무원으로 일하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경력을 쌓고, 프랑수와 올랑드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부실장과 경제산업디지털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 모든 이력을 통틀어 마크롱은 자기 이름을 걸고 선거에 나간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2016년 8월 장관직을 내던지고 ‘전진하는 공화국’이라는 정당을 만들더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 그가 경험한 최초의 선거다. 마크롱은 젤렌스키와 다를 바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능력 있는 자’가 아닌 열망을 조직하는 자
이렇듯 민주국가의 선거는 ‘자격 있는 자’, ‘능력 있는 자’만을 선호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특정 시점에 국민들이 지니고 있는 열망을 잘 조직하고 반영하는 이가 승리를 거두게 돼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사회 안정을 추구하며 계층과 계급의 격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을 선호하는 정치 세력, 즉 보수 진영일수록 선거에 부정적인 경향을 보여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것은 진보 진영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선거 회의론자 중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몇 명의 후보를 선거로 뽑은 후, 최종 결과는 추첨에 의해 결정하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제안한 바 있다. 어차피 최종 후보에 속할 정도면 ‘자격’은 충분한 사람일 테니 극한의 대립과 정쟁을 벌이지 말고 최종 승자의 결정은 운에 맡기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신의 기원’에서 고진은 추첨제를 제안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성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실현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권력욕 같은 것이 그렇다. 그러나 제3장 투표와 제비뽑기에서도 썼지만, 인간성을 바꿀 필요는 없다. 그러한 인간성이 나올 여지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176쪽)

퍽 나이브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추첨제 민주주의를 진지한 대안으로 모색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선거는 정치력, 경제력, 기타 여러 요소에 의해 참여자를 제한하기에 완벽하게 민주적일 수 없다는 취지다.

과연 그런 비판이 옳은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추첨제가 선거보다 나은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선거마저도 필요 없다’, ‘적당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추첨하면 된다’ 이런 주장까지 해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다.

선거는 유권자의 열망을 조직하여 국가적 분위기와 정책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행사다. 민주주의 선거에 '부적격자'는 없다. 젤렌스키 같은 배우 겸 TV 프로그램 제작자건, 가라타니 고진 같은 문학평론가건, 누구라도 국민의 선택을 받으면 대통령이 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젤렌스키를 조롱거리로 삼아 국내 정치에 끼워 맞추려 들었던 이들의 반성을 촉구한다.


노정태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