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28

홍남기 부총리님, 자영업자 죽음 앞에서 자화자찬하다니요

홍남기 경제부총리

홍남기 경제부총리

문재인 정부 들어 정부 지출이 경제 성장률을 크게 앞지르면서 나랏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중앙일보는 합리적 예산 조정 없이 무차별적인 선심성 지출 증가로 이어진 현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비판적입니다. 부동산값 폭등으로 가뜩이나 청년들의 내 집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서 "일단 쓰고 보자"며 미래 세대에 빚을 떠넘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코로나 19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아 재정을 더 과감히 풀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박가분 작가가 그렇습니다. 마침 노정태 작가는 도움이 꼭 필요한 자영업자는 외면하고 전 국민 돈 잔치에 불과한 재난지원금에 장단을 맞춘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저격하는 칼럼을 보내왔습니다. 전혀 다른 시각을 담은 두 칼럼을 27일과 28일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안혜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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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 와중인 지난 19일 전남 순천의 한 야산 중턱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자 신원은 석 달가량 실종 상태였던 48세 A씨였다. 산 아래에서 발견된 그의 승용차와 신분증을 통해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농자재 배달 사업을 하던 A씨는 빚에 쫓기다 파산 신고를 했고, 지난 6월 가족에게 "떠나고 싶다"고 말한 후 집을 나섰다가 석 달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코로나 19 대응 전국자영업자비상대책위원회(자대위)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인근에 설치했던 합동분향소가 문을 닫은 다음 날 일이었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며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영업제한조치 철폐를 촉구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난 자영업자들을 추모하며 정부의 사회적 거리 두기에 따른 영업제한조치 철폐를 촉구하는 분향소가 설치됐다. 연합뉴스

그리고 사흘 후인 지난 22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중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대한민국의 올해 성장률을 4.0%로 점쳤다. 지난 5월 전망치 3.8%보다 0.2%포인트 상향 조정한 것이다. 한국 경제의 회복세가 빠르다는 이유였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당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을 읽고 그만 평정을 잃었다. 홍 부총리는 "수출 호조세, 2차 추경 등의 정책효과가 반영되며 우리나라 성장률이 상향조정된 것으로 보인다"며 "이번 전망을 통해 우리나라가 다른 주요국들에 비해 코로나 위기에 성공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고 자화자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홍 부총리에게, 자영업과 자영업자란 과연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는 자영업자를 국민으로 생각하고 있긴 한 걸까?
모두가 아는 사실부터 짚어 보자. 홍 부총리는 문 정부의 핵심 관료 중 한 사람이다. 정권 출범 후 초대 국무조정실장이었고, 2018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부총리로 재직하며 최장수 장관 기록까지 세웠다. 한평생 직업 공무원으로 살아온 이른바 '늘공'(원래 공무원)이라는 점에서 이 기록은 더욱 놀랍다.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동지들이 한 자리씩 차지한 이른바 '어공'(어쩌다 공무원)보다 청와대의 더 큰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어서다.
내가 볼 때 그가 신뢰를 받는 이유는 청와대의 지시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 방향의 지시가 청와대에서 내려온다고 해보자. 일반적으로 '어공' 출신 장관들은 무리해서라도 밀어붙이려 든다. 반면 '늘공'들은 현실의 제약을 고려해 무리한 요구를 거절하거나, 절충점을 찾아 설득하고자 한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늘공'들의 이러한 행동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이들이 자주 쓰는 '관피아'(관과 마피아를 합친 용어)라는 말엔 국민의 뜻을 받아 당선된 정치인이 내리는 지시를 공무원들이 무시한다는 불만이 담겨 있다.
바로 여기에 홍남기의 롱런 비결이 숨어 있다. 그는 여느 '늘공' 출신들과 다르다. 청와대의 지시와 요구를 거스르지 않는다. 반발하는 시늉은 한다. 최저임금 인상, 전 국민 재난지원금, 선심성 돈 풀기를 위한 추경 편성 등 청와대와 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사안에 대해 처음에는 반대하다 결국 정치권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패턴을 반복한다. 오죽하면 '홍백기'(홍이 항복했다)나 '홍두사미'(용두사미를 빗댄 말) 같은 말이 오가겠는가.
'늘공'답지 않은 홍남기의 권력 순응주의는 자영업자들에게 재앙의 서곡과도 같았다.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이 정부 들어 최저임금을 무리하게 인상할 때 이미 자영업자들은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2018년에 16.4%, 2019년에 10.9%씩 껑충 뛰어오르면서 한계에 몰린 자영업자들은 아르바이트생을 내보내거나 본인과 가족의 노동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인 아이스크림 판매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패스트푸드 매장마다 키오스크가 줄줄이 들어선 것도 그 무렵 일이다. 2020년 한국경제연구원의 '2018년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최저임금 적용 대상자의 취업률은 4.1~4.6%포인트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자 아니라 장삼이사도 예상할 수 있는 일이 현실화한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 홍 부총리는 무엇을 했을까?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그리고 그 이론적 배경이 되는 소득주도성장(소주성)에 대해 반론을 펴기는커녕 오히려 소주성이 향후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며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 부작용이 계속 드러나고 있는 소주성이 정말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걸맞은 역량이 없는 것 아닐까. 혹은 소주성이 엉터리인 줄 알면서도 '윗선'의 요구라 입 다물고 적극적인 동조를 했다면, 그는 장관이 아니라 말석의 9급 공무원 자격조차 없는 게 아닐까. 정치가 엉터리 요구를 할 때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 공무원의 가장 기본적인 직업윤리고, 그러라고 법으로 신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렇게 자영업의 기초체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코로나가 터졌다.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삼각 파도처럼, 양쪽에서 동시에 자영업자들을 강타한 것이다. 자영업자 보호는커녕 비합리적인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영업자 죽이기에 나선 청와대와 민주당은 정작 돈이 가야 할 곳은 외면하고 '온 국민 재난지원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 푼돈을 뿌리며 매표에 혈안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부총리가 할 일은 소득 상위 몇 %에게 재난지원금을 주냐는 식의 소모적 논쟁에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소득 배분이 아니라 실제 자영업자가 겪는 피해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청와대는 보다 많이 주자는 입장이 완강했고, 심지어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88%라는 여야 합의를 무시하고 온 국민(경기도민)에게 돈을 뿌리겠다고 나섰다. 홍 부총리는 늘 그렇듯 미약한 반발의 목소리를 내다 이내 '홍백기'를 들어 올렸다.

흔히 공무원을 두고 '영혼이 없다'고 비아냥거린다. 공무원들 스스로도 이런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원래 공직이란 그 자체가 희생이며 헌신이다. 안정된 일자리와 연금 욕심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가 금세 그만두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국가와 국민에 봉사하겠다는 마음 없이는 공직을 오래 수행하기 어렵다.

국가공무원 취임 선서는 이렇다. "나는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 헌법과 법령을 준수하고, 국가를 수호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로서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이 문장 어디에도 정권이나 청와대를 향한 충성 서약은 없다. 공무원이 지켜야 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과 국익이지, 특정 정권과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가 아니다.
묻고 싶다. 최장수 '늘공' 장관 홍 부총리의 충성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 그가 지키는 건 국가인가, 아니면 정권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일신의 영달일 뿐인가. "아니요"라고 해야 할 때 그 말을 못하는 장관이 오래 자리를 차지하는 동안, 오늘도 대한민국의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말 그대로 생사를 건 투쟁을 해나가고 있다. 방조자도 때론 공범과 다를 바 없는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 이 정부 자영업 대학살극의 책임을 물을 때 홍남기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2021-09-26

인문학을 '부수적 학문' 취급하는 윤석열에게 告함!

 [노정태의 뷰파인더-52] 보수정치 몰락의 어떤 시금석

● ‘인화력’ 좋은 윤석열의 여러 실언
● 가장 문제적 발언…‘인문학 무용론’
● 尹 “인문학, 공학 공부하며 병행해도 된다”
● 기업이 굳이 원치 않는 ‘쓸모없는’ 학문?
● 철학과 사상 없이 정치 논할 수 있나
● 인문학은 반성 않는 맹종과 열광에 맞서야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9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외교안보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지난 9월 13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안동대를 방문했다. 지방에 소재한 국립대에서 청년들과 만나 일자리와 대학 교육 등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9수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윤석열은 소위 '인화력'이 좋은 편이다. 처음 본 사람들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그날 언론에 실언으로 보도될 말이 여럿 등장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아프리카 발언'이었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지금 기업이 기술로 먹고살지, 손발로 노동을 해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며 "그건 인도도 안 하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유연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같은 월급을 받는다면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이가 없다'고 이야기했던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단지 월급 통장에 들어오는 돈의 액수만으로 갈리는 게 아니다. 직업의 안정성,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대출 한도와 여부, 미래의 계획 및 이직시의 이점 등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좋은 뜻'을 이해하더라도, 당장 정규직 일자리를 원하는 청년들을 두고 할 말은 아니라고 비판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기업에 필요한 맞춤형 인재 양산해야"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이른바 '인문학 무용론'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프리카 발언, 비정규직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 내지 세련되지 못한 표현의 문제로 이해할 여지가 없지는 않다. '저숙련 고반복' 육체노동보다는 고부가가치 지식노동의 가치를 중시해야 하며,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를 줄이고 원하는 사람은 이직해도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큰 뜻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인문학 무용론'은 다르다. 단순한 말실수가 아니다.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관점의 문제다. 한 발 더 나아가보자면, 국민의힘 대선 후보 중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석열이 '인문대 필요 없다'고 말하는 그 장면으로부터, 우리는 왜 대한민국 보수 정치가 몰락했으며 지금도 쉽게 전열을 회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더듬어볼 수 있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발언의 전체 맥락을 짚어보자. 윤석열은 잔디밭에서 학생들과 둥글게 모여 앉은 후, 청년 취업 문제의 궁극적 해결은 경제 성장이라고 운을 뗐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일자리가 생기고 있다 해도 그 일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없으면 뽑을 수가 없다고 했다. 영상에 담긴 표현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보자.

"학교나 연구소나 그런데서 실제 기업에 필요한 맞춤형 인재를 양산해 내야 돼요. 그러니까 이제, 대학과 학교와 기업이 서로 연계가 돼서 학교에 공부하는 과정도 완전히 바뀌어야 됩니다."

대학이 과연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육성하는 곳인가? 학생들이 취업에 유리한 학과를 찾아다니는 현실만 보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옳지 않다. 가령 AI(인공지능)나 빅데이터 같은 최근의 '핫 트렌드'를 떠올려 보자. 지금이야 누구나 아는 키워드지만 불과 5년 전만 해도 대부분 들어본 적도 없는 개념이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특히 고도의 기술이 적용되는 분야는 발전이 빠르고 예측이 어렵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대학에서 미리 알고 기업이 원하는, 앞으로 원하게 될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단 말인가.

지난해 9월 서울시내 한 대학의 취업게시판에 취업정보가 걸려있는 모습. [뉴스1]

"AI도 5년이면 관심 사그라질 것"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과 학과는 늘 변화를 겪는다. 필자가 들었던 증언에 따르면 6‧25전쟁이 막 끝났던 1950년대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의 입학 성적이 법학과보다 높았다고 한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고 정치적 변화가 워낙 극심했던 해방과 분단 직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0년대 이과에서 가장 입학 성적이 높은 학과는 의대가 아니라 물리학과였다고 한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자던 박정희 시대의 분위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에는 MBC의 드라마 '허준'이 큰 인기를 끌었는데, 그 무렵에는 경희대 한의학과의 성적이 서울대 의과대학을 제외한 모든 의대를 넘어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대학 입시생들의 선호, 개별적인 학과의 장래와 전망,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회적 변화와 돌발 이벤트 등은 우리가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사회의 큰 흐름이 그러할진대 1분 1초가 다른 고도의 기술 산업 분야라면 어떻겠는가? '당신들은 어떤 학생을 원합니까'라고 물어보면 기업의 대답은 매 해마다 달라질 것이다. 대학에서 미리 예측하고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육성한다는 것은 허황된 소리일 뿐이다. 자신들이 앞으로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할지, 그건 기업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학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할까? 다양한 의견이 오가는 분야이긴 하지만 뚜렷한 경향이 있다. 학과별로 나누어진 폐쇄성을 극복하여 초학제적(Transdisciplinary) 대학을 지향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미래의 기술과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학의 초학제적 변화는 당연한 일이다.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이 지난 5월 4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가 좋은 참고점이 될 수 있다. 그는 AI를 전공했지만 AI 또한 "몇 년 전의 블록체인, 빅데이터처럼 유행하다가 5년이면 이 관심이 사그라질 것이라 본다"고 한다. 즉 대학은 당장의 유행을 쫓는 게 아니라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 미래를 '만들어가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카이스트의 인문사회학 분야를 디지털과 융합한 디지털 인문사회학으로 개편했다. 이러한 변화의 방향은 다른 대학에서도 참고할 가치가 있다.

극소수 명문대에만 인문대 남겨둬야 하나?

국민의힘 대선 예비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9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UCU라운지에서 열린 ‘청년 싱크탱크 상상23 청년, 희망을 해킹하라’ 토크콘서트에 참석해 청년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여기서 윤석열의 발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러나 인문학을, 여러분이 무슨 지금 세상에서는 공학이라든가 이런 자연과학 분야가 취업하기 좋고 일자리를 찾는데 굉장히 필요한데, 기업이 그걸 원하니까, 그러면 인문학이라는 거는 그런 걸 공부하면서 병행해도 되는 것이지, 그렇게 많은 학생을 갖다가, 4년 뭐 대학원 과정까지 그렇게, 그건 소수면 되는 거지 그럴 필요가 과연 있느냐, 그래서 그런, 기업 필요에 따라서 학과의 재조정도 있어야 되는데, 그것도 현실적으로 교육 당국이 추진하려고 그러면 반발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윤석열의 '인문학 무용론'은 이렇듯 대학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 차이에서 출발한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실제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맞춤형 인재를 양산"하는 것이라면, 기업의 수요에 맞춰 학과를 만들고 없애며 인문대는 극소수의 명문대를 제외하고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학제적 커리큘럼 하에 학생들을 미래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적응형 인재로 길러내고자 한다면 그럴 수 없다. 인문학을 '틈 날 때 하는' 취미생활로 축소하는 것도 옳은 방향이 아니다. 인위적인 문·이과 구분을 넘어서는 지식 생산과 교육의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문과와 이과의 교양을 구분하는 것은 원래부터 가능하지 않았거니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가령 오늘날의 가장 치열한 쟁점 중 하나인 '백신 거부'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백신 거부는 왜 나쁜가? 인구의 70% 이상이 백신을 맞거나 코로나에 걸려 항체를 가지고 있어야 집단 면역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완고한 백신 거부 운동가를 설득할 수 없다. 이웃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거나, 백신을 만든 것 역시 사람이고 백신 또한 신의 축복이자 섭리라는 종교적 논리를 제시하거나, 이도 저도 안 되면 다양한 인센티브를 개발하고 제공해야 한다. 굳이 나누자면 '이과'가 아니라 '문과'가 나서서 분석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항체는 과학이지만 접종은 시민의 의무와 연대 의식 같은 철학의 영역이다. 집단 면역에 도달하려면 문과와 이과가 힘을 합쳐야 한다.

보수 진영이 무시하는 인문학의 가치

인문학을 '돈 못 버는 쓸모없는 학문'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정치의 영역에서 보자면 더욱 그렇다. 정치란 결국 얼마나 많은 이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철학, 사상, 이데올로기 등 무형의 정신적 요소를 거론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논할 수는 없다. 공통의 신념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인문학의 고유 영역이다.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전대협 세대, 혹은 주사파들이 대한민국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비난 혹은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과연 젊은 시절 학생운동을 했던 그들이 지금도 조직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1980년대에 형성된 냉전 시대의 통일지상주의에 입각해 남북관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 떠나서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그렇다. 리영희 스스로도 1990년대에 상당 부분 폐기한 '전환시대의 논리'에 담긴 사고방식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대착오적인 교조적 신념을 반복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과학적'이라고 여긴다. 그런 착각 속에 단단히 빠져 있는 자들을 '과학'으로만 설득할 수는 없다. 백신 반대 운동가들이 미국의 민주당 정권과 고학력 엘리트를 악마로 여기는 음모론적 세계관에 심취해 있다면, 한국의 주사파나 시대착오적 좌파 세력은 미국이나 주한미군, 미국과 함께 한국전쟁을 치러내며 건국된 대한민국을 악으로 여긴다. '민족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유사 종교다.

보수 정치가 박근혜 정권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수렁에 빠져 있는 이유도 같은 각도에서 짚어볼 수 있다. 진보 진영은 '일제-친일파-미군정-친미파-이승만-박정희-전두환-민정당-한나라당-이후 보수 정당'으로 이어지는 계보도를 만들어 상대를 '악마화' 했다. 그에 맞서는 자신들은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거악과 싸우고 있기에 무슨 짓을 해도 전략적으로 허용된다는 유치찬란한 논리가 지금껏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옮길 때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은 종교와 싸워 왔다. 인문학의 적은 과학이 아니라 반성하지 않는 맹종과 열광인 것이다. 보수 진영이 무시하는 인문학의 가치도 거기 있다. 우리가 경제를 넘어 문화적, 정신적 선진국 반열에 오르려면 인문학의 힘으로 '정치의 종교화'를 극복해야 한다.

#윤석열 #인문학 #대학 #문·이과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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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9

이재명式 마법의 주문 '공공재', 일산대교 다음은?

 [노정태의 뷰파인더-51] 통행료 면제 논란과 '트러스트'

●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기’
● 이 단순명료한 상식 통하지 않는 사람
● ‘공공성’ 내세워 파주, 일산, 김포 주민 자극
●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李에게 할 말
● 선거 홍보 위해 탕진되는 ‘신뢰’라는 공공재
● 권력자가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린다면…
●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GSGGood)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이재명 경기지사, 정하영 김포시장(왼쪽), 이재준 고양시장(오른쪽) 등이 9월 3일 경기 김포시 걸포동 소재 일산대교 톨게이트 현장에서 ‘일산대교 무료화 선언 합동 현장 브리핑’을 하고 있다. [김포시청 제공]
흔히 자본주의를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사람이 성실하게 땀 흘려 두 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 불로소득은 옳지 않다'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기'가 반드시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돈 놓고 돈 먹기'에도 나름의 윤리가 있다. 남의 돈을 먹기 위해서는 우선 내 돈을 걸어야 한다는 기본 원리가 그것이다. '이게 뭐가 윤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 보자. 세상에는 자기 돈을 걸지도 않고 남의 돈을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푼돈을 걸어놓고 목돈을 내놓으라고 우기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본인이 잘못된 베팅을 해놓고 손실이 발생하면 남이 물어줘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은 또 어떤가.

이런 모든 경우를 감안해 보면, '돈 놓고 돈 먹기'는 자연 법칙 같은 게 아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 하며, 투자를 하는 것은 본인의 판단에 따르는 것으로 그 책임 역시 스스로 져야 한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투자의 윤리'인 셈이다.

위험을 부담하는 자가 수익을 향유한다. 투자의 원리요, 자본주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다. 투자를 통해 돈을 버는 것 자체를 경원시하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젊은이들도 주식이나 가상화폐 등 다양한 방면으로 투자를 하고 수익을 올리거나 손실을 경험하는 세상이다. '돈 놓고 돈 먹기'가 꼭 나쁜 말은 아니라는 점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600원 통행료 공략한 대권주자

경기 김포시 걸포동과 고양시 법곳동 이산포 분기점을 잇는 일산대교의 모습. [동아DB]
이 단순명료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재명 경기지사(이하 존칭 생략)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9월 3일, 이 지사는 최종환 파주시장, 정하영 김포시장, 이재준 고양시장과 함께 일산대교 요금소에서 일산대교 무료화를 위한 공익처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일산대교는 그 자체가 별도 법인인 '일산대교(주)'에서 관리하고 있다. '일산대교(주)'의 지분은 2009년 이후 100% 국민연금이 인수한 상태다. 다리 건설에서 지분 인수까지 들어간 총 액수는 2500억 원이 넘는다.

그렇다면 일산대교는 국민연금의 소유인가. 그렇지는 않다. 국민연금은 경기도에 일산대교를 기부채납했다. 다만 2038년까지 30년간 유료로 일산대교를 운영하며 통행비를 받겠다는 협약을 체결한 상태다. 경기도가 소유하고 있는 교량을 국민연금이 소유한 일산대교(주)가 빌려, 통행 요금을 받아 관리하고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연금이 일산대교(주)를 인수했던 2009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일산대교(주)는 매년 100억 원씩 적자를 내고 있었다. 다리를 이용하는 인구가 많지 않았던 탓이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일산, 김포, 파주의 인구가 늘어난 다음, 더 정확히 말하면 김포신도시에 입주가 시작된 이후다. 그럼에도 2009년부터 2017년까지는 적자를 면치 못했고, 2017년에 이르러서야 순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294억 원의 매출에 순이익 43억 원을 올렸다.

9월 현재 일산대교의 통행료는 경차 600원, 소형(1종) 1200원, 중형(2, 3종) 1800원, 대형(4, 5종) 2400원이다. 이를 과도한 요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타 민자도로나 다리의 통행료 뿐 아니라, 서울 남산 1, 3호 터널에 책정된 혼잡통행료(2000원) 등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매일 혹은 자주 일산대교를 이용하는 운전자 처지에서는 무료로 이용 가능한 다른 한강 다리와 달리, 푼돈이나마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이재명은 바로 그런 심리를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재명은 일산대교(주)의 사업자 운영권을 회수하고 공익처분을 내리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2월부터 운을 떼기 시작하더니 9월에 발표하고 10월부터 전격적으로 시행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산대교(주)를 소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으로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투자법 제47조에 따른 공익처분은 주무관청이 청문 등의 절차를 거쳐 확정하면 곧장 효력을 갖는다. 경기도와 국민연금 사이에 치열한 법적 다툼을 예상할 수밖에 없다.

경기도 측의 입장은 이렇다. 국민연금은 일산대교(주)에 후순위채권을 설정했다. 쉽게 말해 돈을 빌려줬다는 뜻이다.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 돈을 빌려주는 이유는 이자를 받기 위해서다. 일산대교 통행료가 얼마가 걷히건 정해진 이자를 가져간다. 그러니 국민연금이 그 이자율을 낮추면 일산대교 통행료도 낮아질 수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연금 수익률을 지키기 위해 자회사를 상대로 한 돈놀이를 계속한다.

이재명이 페이스북에 올린 게시물에서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국민연금공단은 일산대교(주) 단독주주인 동시에 자기대출 형태로 자금차입을 제공한 투자자입니다. 국민연금공단은 출자지분 100% 인수 이후 2회에 걸쳐 통행료 인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선순위 차입금은 8%, 후순위 차입금은 최대 20%를 적용해 이자를 받고 있습니다."

이후 이재명은 트위터에서 좀 더 과격한 표현으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해 먹어도 적당히 해 먹었어야지요. 이자율 20%? 악덕사채업자입니까?"

이러한 표현을 통해 그가 노리는 바는 분명하다. 파주, 일산, 김포 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경기도의 방침대로 공익처분이 시행된다면 국민연금은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게 된다. 국민연금은 온 국민이 낸 돈으로 만든 기금이다. 온 국민이 손해를 본다는 뜻이다. 하지만 2500억 원의 투자금과 향후 기대되는 이익은 국민연금이 투자하고 있는 900조 이상의 기금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손해가 국민에게 당장 실감될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그러니 이재명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와 같이 당당하게 선포할 수 있던 것이다.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 엄연한 공공재입니다. 사기업일지라도 불합리한 운영으로 정부와 국민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면 시정해야 합니다. 하물며 국민연금으로 운영하는 국민연금공단의 사업은 수익성과 공공성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2월 15일 경기 김포시 걸포동 일산대교(주) 회의실에서 열린 일산대교 통행료 개선을 위한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를 하고 있다. [뉴스1]

권력 입맛 따라 계약서도 무시되는 나라

도로는 국가 기간시설로서 공공재인가? 그렇다. 사기업일지라도 영업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친다면 정부가 나서서 어떤 식으로건 조율할 필요가 있는가? 그 또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재명의 발언과 공익처분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렵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공공재'는 도로 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공재가 바로 '신뢰'다.

우리에게 '역사의 종말'로 잘 알려진 미국의 정치철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또 다른 명저 '트러스트'에서 바로 그 '신뢰'에 주목했다.

"경제적 현실을 검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한 국가의 복지와 경쟁력은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적 특성, 즉 한 사회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후쿠야마가 법과 제도 등 '딱딱한' 요소가 아닌 문화라는 '부드러운' 요소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른바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들은 대체로 유사한 법과 제도를 지니고 있다. 일단 세계적으로 법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발전한 대륙법, 영미권에서 발전한 보통법(common law)으로 나뉜다. 각국은 입법 과정에서 외국의 사례를 참고하고 연구하기에, 결국 세계 각국의 법은 세월이 흐를수록 유사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같은 법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법이 운영되는 양태는 동일하지 않다. 사회적 덕목(social virtues), 그 중에서도 신뢰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법을 만들어 놓았다 해도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법을 지키는 사람, 계약을 곧이곧대로 이행하는 사람이 손해라는 인식이 한번 퍼져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을 되돌리기란 매우 어렵다. 하물며 법과 계약을 지키지 않는 주체가 일개 국민이 아닌 정부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하루아침에 정책이 뒤집힌다거나, 정치권의 풍향에 따라 사업의 행방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면, 그런 나라에서 정상적으로 사업을 운영하기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워진다. 기업가는 정치권에 연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며 '정치 리스크'를 피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발생하는 비효율은 결국 소비자, 더 나아가 국가 전체의 비용으로 전가되고 만다. 그러므로 사회적 신뢰가 낮은 사회는 다른 요소가 아무리 유리하더라도 높은 수준의 풍요를 누릴 수 없다.

국민연금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이재명의 주장은 신빙성이 낮아 보인다. 설령 국민연금이 과도하게 높은 통행료를 받고 있다 해도 기습적 공익처분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민자 사업이란 정부에 돈이 없거나 해당 민자 도로 등에 수익성이 부족해 착수하지 못할 때 민간에서 자금을 동원해 공사를 하고 특정 기간 동안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계약 형태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중앙 정부나 지자체에서 손바닥 뒤집듯 엎어버릴 수 있다면, 앞으로는 과연 누가 정부를 믿고 민자 사업에 뛰어들 수 있을까? 일산대교라는 공공재의 가치보다 훨씬 큰, 정부에 대한 신뢰라는 공공재가, 이재명의 대선 홍보를 위해 탕진되고 있다.

무시되는 사용수익권과 'GSGG'

자본주의는 '돈 놓고 돈 먹는' 시스템이다. 삐딱하게 보자면 '사람보다 돈이 앞서는 세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만한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내가 건 판돈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록·기억하며, 기대 수익을 평가하고, 성공하건 실패하건 본인의 책임으로 투자하는 이성적인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이 '공공성'을 앞세워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치권력을 가진 사람이 '공공성'이라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권력자가 '이것은 공공재'라고 지목하는 순간 합법적으로 체결된 계약이나 사용수익권이 아무렇지 않게 무시되는 나라는 결코 좋은 나라라고 볼 수 없다. 정부는 다른 그 어떤 공공재보다 우선하여, 정부에 대한 신뢰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재명 캠프에 속해 있는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말마따나, 정부는 공공선에 복무해야 한다(Government Serves General Good)는 말이다.

#이재명 #일산대교 #민자사업 #기부채납 #신동아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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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8

"언론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스필버그 영화 '더 포스트'
'한국판 닉슨'의 언론 탄압법

캐서린 그레이엄은 결혼 후 45세까지 전업주부로 살았다. 하지만 데릴사위처럼 가업을 이어받았던 남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캐서린은 워싱턴포스트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신문 발행인이 된 것이다.

일러스트=유현호

1971년, 워싱턴포스트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워싱턴 정치 엘리트가 보는 신문이라는 자부심과 달리 실상은 언제나 뉴욕타임스의 꽁무니만 쫓는 신세였다.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 공개를 추진했지만 시장의 평가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뉴욕타임스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특종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국방장관직을 역임할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온갖 기록을 모으고 분석하여 만든 ‘펜타곤 페이퍼’가 유출됐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갈등의 기로에 섰다. 캐서린이 영입한 편집국장 벤 브래들리는 유능한 기자들을 총동원해 펜타곤 페이퍼를 확보한 상태다. 하지만 캐서린은 맥나마라와 절친한 사이이며, 백악관을 차지하고 있는 리처드 닉슨은 최악의 대통령이다. 그 전까지 미국 대통령이라면 마땅히 존중하고 지켰던 헌법적 가치를 무시한다. 대놓고 언론사를 협박하고 언론의 자유를 찍어 누르려 든다. 나쁜 권력이 주먹으로 침묵을 얻어내고자 할 때, 참된 언론인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닉슨은 뉴욕타임스를 상대로 추가 보도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가 같은 출처로 얻어낸 자료에 기반한 기사를 낸다면 그것은 법원에 대한 모욕죄가 된다. 캐서린은 고심 끝에 맥나마라와의 우정을 뒤로하고 권력과 싸우는 언론인의 길을 택한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포스트’가 그려내고 있는 역사 속 실제 사건이다.

표현의 자유는 여러 인권 개념 중 가장 오래된 것 가운데 하나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민회의가 발표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문’ 제11조에 명시돼 있을 정도다.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다만 법에 규정된 경우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식민지 아메리카의 주민들은 영국과 전쟁을 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면서, 수정헌법 제1조에 표현의 자유를 더욱 크고 명료하게 새겨넣었다. “의회는 종교를 만들거나,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금지하거나, 발언의 자유를 저해하거나,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권리, 그리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어떠한 법률도 만들 수 없다.” 이 원칙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하던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19조를 통해 다시 한 번 선포되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을 이끌었던 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왜 이렇게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폭압적인 권력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역임한 역사가 로버트 단턴이 <책과 혁명>, <검열자들> 등의 명저를 통해 잘 보여주었다시피, 프랑스 혁명은 곧 책과 신문, 잡지와 팸플릿 등으로 이루어진 출판과 인쇄의 싸움이었다. 자유사상가들은 천부인권과 법 앞의 평등을 외쳤고, 권력은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그러한 목소리를 막으려 했다.

대서양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왕의 통치를 원치 않는 식민지 백성들은 자유롭게 책을 쓰고 신문을 찍어내며 자신들의 생각을 공유했다. 그 전까지 변변한 필명을 얻지 못했던 토머스 페인이 1776년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상식>을 펴내 일약 베스트셀러 저자가 되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자유로운 언론·출판의 역사와도 같다. 언론 자유가 없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독재’일 뿐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당론으로 추진하고 있는 소위 ‘언론중재법’에 대해 걱정을 넘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8월 30일 처리가 불발된 개정안은 ‘허위·조작 보도’의 내용을 법으로 규정한다. 잘못된 보도가 왜 잘못되었는지 입증할 책임을 언론사에 떠넘긴다. 일단 벌금을 때리면서 ‘네가 무죄라는 것을 증명해보라’는 식이다. 손해배상액 산정을 언론사의 지난해 매출과 연동시킨다는 대목에 이르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게 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시도만 하고 있지 아직은 만들지 못한 악랄한 언론 탄압법이 9월 27일 다시 국회 본회의장에 오를 예정이다.

추석을 앞둔 지금, 대한민국은 수십 년 전으로 퇴행 중이다. 현 정권의 오만한 태도는 전례를 찾기 어렵다. 박지원 국정원장은 야당의 윤석열 후보를 겁박하며 대놓고 정치 개입을 한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대장동 개발 의혹을 제기하는 언론에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여러모로 신뢰도가 높다고 보기 어려운 ‘공익제보자’의 입만 바라보던 친정부 언론들은 문재인 정권이 대놓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지금도 정파 논리에 따라 계산기를 두드릴 뿐이다. 그나마 언론 자유가 보장된 지금도 이런데 언론중재법이 통과된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될까.

<더 포스트>로 돌아와 보자. 전설적인 편집장 벤 브래들리는 후배 기자에게 말한다. “언론의 자유를 지키는 방법은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는 것뿐이야.” 뉴욕타임스가 법원의 가처분으로 입이 틀어막힌 상황에서 워싱턴포스트가 펜타곤 페이퍼에 대한 후속 보도를 내보낸 것은 그래서였다. 그 용기에 감명받은 다른 언론들 역시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를 따라간다. 이제는 한두 언론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언론 대 권력의 정면 승부. 연방대법원은 6대3으로 언론의 손을 들어준다. 블랙 대법관은 그 결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언론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언론의 자유를 박탈하려 들었던 펜타곤 페이퍼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언론중재법이 통과된다면 문재인 대통령 역시 같은 잣대로 평가받을 것이다. ‘한국의 닉슨’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문 대통령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언론중재법을 철회하라는 의사를 밝혀야 한다.

2021-09-17

'타협의 달인' 박지원 긍정평가, 2021년 9월15일로 끝났다


많은 분들은 자칭 타칭 '정치 9단'인 박지원 국정원장의 노회한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단순히 좋으냐 싫으냐로 묻는다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정치인 박지원에 대해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있었다. 문재인 정권 출범 초기까지는 그랬다. 문재인을 앞세워 386세대, 전대협(1987년 결성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로 주사파인 NL이 주축) 세대가 청와대에 깃발을 꽂은 이 정권 아래에서, 그의 '노회함'은 역사적 순기능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주고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란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막무가내 패싸움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다. 선거로 다수와 소수가 가려졌다 한들 소수의 의견을 함부로 묵살해서도 안 되고, 다수의 의견을 100% 관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품어서도 곤란하다. 대화, 타협, 절충 같은 건 케케묵은 소리가 아닌 민주주의의 근간인 것이다. 이제는 어느 면에서 보건 사회의 주역이 되어 있는 386세대는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로 포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애초에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든지 머릿수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가 뒤집히지 않아야 민주주의다.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 되어도 지난 국회와 같은 절차와 관례, 프로토콜을 지킬 때 그 나라는 성숙한 민주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선거 하나 끝났다고 나라가 180도 뒤집히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중독재라는 뜻이다.

탄핵정국에서의 돌파력 

노회한 정치인 박지원은 그런 면에서 386 정권의 해악을 막아줄 좋은 중화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 기대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잠시 2016년 탄핵 정국으로 기억을 되돌려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을 때, 처음에는 탄핵안 가결을 위한 3분의 2 득표를 장담할 수 없었다. 더불어민주당만으로는 3분의 2는 고사하고 과반수도 되지 않는 의석 구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분해 있던 민주당 강경파는 성공 가능성을 장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표결 처리를 강행하려 들었다. 그때 박지원의 진가가 발휘됐다. 당시 국민의당 원내대표였던 그는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전신인) 새누리당 양쪽으로부터 거센 공격을 받으면서도, 일단 표결을 한 주 뒤로 미뤘다. 그리고는 새누리당 내에서 불만을 지니고 있는 세력과 물밑으로 접촉하여 이탈표를 끌어냈다. 대체 무슨 식으로 설득하고 뭘 주고받았는지 언론 보도를 통해서는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박지원의 '거간'은 통했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나는 지금 탄핵에 대한 찬반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막후'에서 움직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는 정치, 타협과 협상을 통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내는 정치, 그런 정치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해 우리 편이 이겨서 저들을 싹쓸이해버리자는 운동권식의 정념에 사로잡히지 않는, 좀 예스럽고 때로는 답답해 보일
수 있지만 '안 될 일도 되게 하는' 정치, 그런 걸 박지원은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 중 40대 이상인 분들은 언필칭 '청년 논객'인 내가 박지원이라는 늙은, 아니 차라리 낡은 정치인에 대해 긍정적인 서술을 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청년 세대가 중년을 뛰어넘어 노년 정치인들에게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버니 브로'의 지지를 끌어냈던 버니 샌더스. [AFP=연합뉴스]

'버니 브로'의 지지를 끌어냈던 버니 샌더스. [AFP=연합뉴스]

아직 한국에서는 벌어지지 않았지만 미국과 영국에서는 이미 드러난 현상이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은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양강 구도로 압축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전임 대통령 빌 클린턴의 부인이자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뉴욕 주 상원 의원을 역임하며 오바마 정권 당시 국무장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치자금 후원뿐 아니라 인맥이나 실력 등 그 모든 면에서 버니 샌더스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샌더스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부모 세대와 맞서려 조부모 세대와 손잡아 

클린턴을 경선 막바지까지 끈덕지게 몰아붙이며 캠프의 자금과 에너지를 소진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흔히 '버니 브로'(Bernie Bro)라 부르는 샌더스의 열혈 지지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버니 브로는 대체로 30대 이하의 백인 남성들이 주를 이루었다. 지금은 MZ 세대라 부르지만 당시에는 밀레니얼이라 부르던 80년대생들이 버니 브로의 핵심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 빌 클린턴과 마찬가지로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 주자다. 버니 샌더스는 1941년생으로 베이비 붐 세대에 속하지 않는, 그보다 앞서 태어난 고령층이었다.
밀레니얼 세대는 베이비 붐 세대와 맞서기 위해 그보다 더 나이 많은 후보를 '우리 편'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같은 현상이 영국에서도 나타났다. 1949년생 제레미 코빈이 정치적으로 급부상하여 2015년부터 노동당의 당권을 접수해버린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과 비슷한 스토리다. 노동당은 고학력 고소득 교양 계층의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런 계층은 연령대로 놓고 보자면 40대에서 60대에 걸친 중년일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부자 노인들의 정당인 보수당을 지지할 수도 없던 영국의 좌파 청년들은 아예 세대, 아니 시대를 건너뛰어 자신들의 대표자를 찾아냈다.

영국 총선거에서 노동당을 이끈 제레미 코빈(앞줄 가운데) 당수. 연합뉴스

영국 총선거에서 노동당을 이끈 제레미 코빈(앞줄 가운데) 당수. 연합뉴스


물론 버니 샌더스나 제레미 코빈 핵심 지지층의 열기를 본선 무대에서 발휘하는 데 실패했다. 샌더스는 2016년과 2020년 모두 대통령 경선에서 탈락했고 코빈은 2019년 총선에서 참패하며 노동당 몰락의 주역으로 손가락질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그들은 정치권에서 은퇴할 시점을 놓친 채 그저 버티고 있는 늙은 정치인 정도로 취급받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 모두 베이비 붐 세대가 정치적으로 장기 집권하는 가운데, 출구를 찾지 못한 청년층의 불만이 노년층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인을 찾는 이변으로 연출되었다.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이와 같은 현상이 한국에서 반복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20대와 30대 남성이 1953년생, 올해로 한국 나이 69세인 홍준표 후보에게 향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생을 수십 년씩 살아온 기성세대들에게는 정치 경력이 수십 년씩 되는 노령의 정치인들이 '식상한 인물'처럼 보이지만, 본인의 인생 자체가 그리 길지 않은 청년들에게는 중년이나 노년이나 사실상 모두 '신선한 인물'이다. 투표권을 지닌 청년들은 자신들과 직접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중년보다는, 나이 차이가 확실히 벌어진 노년에게 쉽게 마음을 여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비록 어딘가 음험하고 '올드'한 면이 있다 해도, 대화와 타협과 절충의 달인 박지원에게 나름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가 대선 무대에 나설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386세대의 폭주를 달래고 막으며 균형을 잡는, 어쩌면 더욱 필요하고 절실한 그런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청년들이 기득권자인 중년과 싸우기 위해 노년 정치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그 노년 정치인이 중년 정치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맞서고 대립각을 세울 수 있다는 신뢰가 필요한 것이다. 버니 샌더스나 제레미 코빈 모두가 그랬다. 그들은 독불장군이었고, 본인이 속한 진영 내에서 언제나 아웃사이더였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 다시 한번 크게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반면 박지원은 어떤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능수능란하게 국회를 오가며 의원들을 규합하고 타협을 이끌어냈던 실력은 온데간데없다. 지금은 그저 문재인 정권과 밀착하여 자기 정치 수명 연장이나 꾀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정보원이라는 중요한 조직의 수장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국가정보원은 대한민국의 대외, 대내, 대북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기관이다. 그런 정보기관의 수장이 어떻게 야권의 유력 대선 주자인 윤석열 국민의힘 예비 대선 후보를 상대로 "호랑이 꼬리를 밟지 말라"느니, '총장 시절 저하고도 술 많이 마시지 않았느냐"느라니,  윤석열 후보의 약점으로 알려진 "윤우진 용산세무서장 문제 관련 자료를 다 갖고 있다"느니 하는 노골적인 정치 개입을 할 수 있는가. 국가정보원이 안전기획부였던, 혹은 그보다 더 이전에 중앙정보부였던 시절에도 이렇지는 않았다.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했을 뿐, 이런 식으로 국내 정치에 논평하며 개입하지는 않았다.
박지원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평가는 2021년 9월 15일까지만 유효했다. 그 후의 박지원은 그저 흔한, 은퇴할 날짜를 놓친 늙은 정객일 뿐이다. 박지원 국정원장의 사임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