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7-15

[북리뷰]우리는 어린이 인격을 존중하나

[북리뷰]우리는 어린이 인격을 존중하나

어린이 문화 운동사
이주영 지음·보리·1만3000원

‘어린이’라는 단어는 1923년에 만들어졌다.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다. 1899년 11월 9일 태어난 소파 방정환이 3·1 운동을 겪은 후 조선 민중 해방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들을 해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책 <어린이 문화 운동사>의 저자인 이주영은 그 뜻을 이렇게 설명한다. “식민지배 아래에서 억압받는 민중을 부모로 두었는데, 거기다 그 부모한테 또 억압을 받으니 어린이는 이중으로 억압받는 민중이라는 것이다.”(19쪽)

1923년 5월 1일 오후 3시,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가 서울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치러졌다. 참여자들은 12만장에 이르는 어린이날 선언을 종로와 전국에 배포하였다. 그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기에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농촌의 어린이들은 말귀를 알아듣고 두 손 두 발을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그 때부터 한 사람의 농사꾼이 되어야 했다. 도시의 어린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노동에 시달리는 것뿐 아니라 어린이들은 일상적인 폭력과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다. 어린이를 동등하면서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 사회라면, 당연히 그 어린이들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테니 말이다. 1923년의 방정환이 벌인 혁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가장 약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리하여 보편적인 인간 해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말이다.

“지금은 어린이날이 5월 5일이지만 처음에 어린이날은 5월 1일이었다. 어린이 운동가들은 노동자의 날인 5월 1일을 왜 어린이날로 했을까? 어린이 운동가들은 어린이도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억압받는 민중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들도 오전에는 노동자의 날 행사에 참여하고, 오후에는 어린이날 행사를 했다.”(21쪽)

5월도 아닌 7월에 갑자기 웬 어린이날 타령인가, 왜 <어린이 문화 운동사>라는 책을 꺼내들었는가.

7월 2일, 대전지법 형사법원 제1형사부는 친딸을 목검으로 폭행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즉 살인죄로 기소된 강모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이 새로 사귄 여자친구가 싫다며 가출한 딸을 찾아 집으로 데려온 후 1m 길이의 목검으로 한 시간 반 동안 때렸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일의 폭행은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으며, 강씨가 딸을 살해할 만한 다른 동기가 없다는 점을 참작해 살인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 시간 반 동안 목검으로 14세의 어린이를 때리는 것을 과연 ‘설득과 훈육의 연장선’상의 행위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어린이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라고 외치던 소파 방정환은 조국과 어린이들의 해방을 목격하지 못한 채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러나 과연 얼마나 어린이들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7.15주간경향 1084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7071727351&code=116

2014-07-10

[GQ] 노인과 불바다

2014년 5월 28일 오전 10시 54분,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 막 진입하던 오금 방면 전동차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악몽이 잊히지도 않았거니와, 5월 2일 상왕십리역에서 벌어진 2호선 열차 추돌 사고의 충격이 생생하던 시점, 지하철에 불을 지른 범인은 71세 노인이었다. 범인 조 모 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는데, 재판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억울한 사연을 알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2003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의 범인 김 모 씨는, 범행 두 해 전 부터 갑작스럽게 걸린 병으로 장애인이 되었고, 신병을 비관하여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심정으로 지하철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국보 1호 숭례문 역시 그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재가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던 채모 씨는 토지 문제로 H건설과 갈등을 빚다가 소송을 걸었고, 패했다. 비슷한 시기 아내와 이혼한 그는 곧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2년 후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들에는 일관된 패턴이 있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남성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방화 사건의 범인 조 모 씨는 71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김 모 씨는 당시 56세, 숭례문 방화 사건의 채 모 씨는 당시 70세였다. 그들은 사회, 세상, 혹은 시스템과 충돌하고 불화한다. 갑작스런 개인적 재난 상황에서, 그들은 일관되게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 지하철에 불을 질러 억울함을 알리겠다는 생각,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남들도 죽이고 나도 죽어야겠다는 발상,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개인 대 개인, 인간 대 인간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러한 무작위 증오 범죄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시각을 확장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으로부터 당하고 쌓인 게 많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공공장소를 활보하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2014년 6월 5일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등장했다. ‘질풍노도의 노인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양선희 논설위원은 “요즘 노인 무섭다”는 말이 떠돈다며 운을 뗀다. 2011년을 기준으로 노인 범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폭력 사건이다. 전체 범죄 중 무려 32.5퍼센트를 차지한다. 지난 10년간, 노인들이 저지른 강도와 강간 사건은 4배, 방화는 2.7배, 살인은 2배 증가했다. 요약하자면, “노인 1명이 늘면 범죄 3건이 느는 꼴이다. 게다가 평생 전과 없이 살다가 60, 70대에 처음 범죄를 저지르는 초범은 5명 중 3명꼴이다.”

노인이 늘어나는 사회 속에서, 그 노인들이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비중 역시 커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노인 범죄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노령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 남성이 늙은 남성으로 대체되면서 그에 따라 강력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을 논거로 삼곤 한다. 몸이 지치면서 영혼도 유순해지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인들은 반대다. 은퇴 연령을 넘긴 노인들이 사람을 때리고 칼을 휘두르며 성범죄를 저지르고 지하철에 불을 지른다. 나름의 방식으로 조사를 해본 양선희 논설위원은 이 현상에 대한 선행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한다.

이렇듯 폭주하는 비행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얄궂게도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노인 친화적’인 곳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일단 호칭 문제부터가 그렇다. 노인들은 언제부턴가 ‘어르신’의 위치를 획득했다. 한국어의 크나큰 단점 중 하나는 발화자와 수용자 사이의 사회적 위계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2인칭 호격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야’, ‘너’ 같은 표현을 쓰면 십중팔구 좋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다. 애매하면 ‘저기요’나 ‘사장님’ 정도로 통칭하게 마련인데, 이 혼란 속에서 한국의 고령층, 특히 남성들은 ‘어르신’이라는 극존칭 대명사를 쟁취해냈다. 얼마 전 난동을 부리는 노인을 향해 사복경찰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진정하시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어르신이라는 표현이 갖는 상대적 비중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극존칭이지만, 실제로는 별볼일없는 노인들에게 돌아가는 호칭이 바로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요금을 안 내고 승차하는 어르신,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비켜주기를 바라며 헛기침을 하는 어르신, 담배 피우는 젊은 여성과 시비가 붙은 어르신 등,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어르신들을 향해 짜증과 분노를 느끼는 동안,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어떤 이들은 멘토나 스승, 혹은 원로의 자리에 오른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찬조 연설에 나섰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의 찬조 연설을 보고 감동한 젊은이들의 반응은 사실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나이대의 노인이 이성적인 태도로 합리적인 말을 조곤조곤 한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중교통에서 맞닥뜨리는 그 막무가내 어르신과 다른 모습을 봤다고 흥분했다. 드디어 우리가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어른을 만났다면서.

이듬해부터 서점가에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은 어떤 면에서 ‘어르신의 귀환’이기도 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한때의 차세대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마저도 이제는 중견 취급을 받는다. 사사키 아타루나 히로세 준, 후쿠시마 료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이 인문서의 주요 저자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강신주를 빼고 나면, 주로 그보다 나이대가 더 높은 저자들의 것이었다. 서울대의 김난도 교수나 법륜 스님 등, 해당 직업군에서는 한창때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불문학자 황현산이나 문학평론가 도정일 같은 원로 인문학자들이 그동안 쟁여둔 원고를 꺼내 들고 나섰다.

이미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룬 이 원로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과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에서 부대낄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들의 책을 손에 든 젊은이들은 출퇴근 시간의 번잡함을 견디며, 어르신과 함께 고단한 하루를 여닫고 있다. 어떤 노인의 책을 읽으며, 다른 노인을 가까스로 견디는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서 불길이 치솟을지 모르는 지하철을 탄다.

이것은 대단히 부조리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교육을 받은 1930년대생, 4.19세대, 386세대 등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나이대로 묶고 이전 세대와 차별화하며 스스로의 이권을 지켜나갔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주로 대학생들을 향해, 멘토가 되어주고 꾸짖는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연도를 중심으로한 세대론의 구조 속에서, 재산이 없고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자리는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잊힌 채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져본 적 없는 그들이 오늘날 어르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아저씨가 되었고, 나이를 먹고 나니 어르신으로 불리며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엘리트들은 동년배 대중들의 존재를 내팽개쳤다. 그들을 설득하고 계몽해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재구성하는 대신, 그저 선거철이 다가오면 지역 개발 이슈를 던지거나 지역 감정을 자극하는 식으로 표를 긁어냈을 뿐이다. 그렇게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평생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다가 나이를 먹은 어르신들, 새로운 세상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가슴속에 방향 없는 울분을 가득 쌓은 채 지하철에 타고 버스에 오르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어르신들, 노인들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멘토들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GQ>, 2014년 7월호.

2014-07-06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별별시선]세월호 침몰, 음모인가 사고인가


어떤 사건이 터졌을 때, ‘원인’을 찾느냐 아니면 ‘범인’을 찾느냐에 따라 근대인과 전근대인의 경계선이 나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적인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제거하려 한다. 반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몸에 익히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문제와 맞닥뜨리면 원인이 아닌 ‘범인’을 파악하고 솎아내는 일에 골몰하게 마련이다.

세월호 침몰 이후의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느냐 하는 것, 사고의 ‘이유’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가’ 세월호 침몰을 만들었는가, 침몰 원인이 아닌 ‘범인’을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비난의 화살이 날아다니는 경로가, 적어도 이번 사건에서는 눈에 띄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박근혜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사고 현장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거대 함선 속에 뛰어들어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것은 해경의 명백한 직무 태만이라는 책임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대중적 차원에서 보자면 온 국민이 격양된 상황 속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을 법한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 세월호 침몰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 채, 국가정보원부터 청와대까지 온갖 주체가 개입한 음모론을 만들고 유포하는 사람들이다. 마치 1987년 항쟁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KAL기 폭파 사건이 터졌듯, 그렇게 국민들의 시선을 정치로부터 특정 사건으로 돌려놓기 위한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 가운데 특히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진행하는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이런 입장을 널리 퍼뜨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정작 세월호 사고가 난 후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하락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국가정보원에서 이렇게 대통령에게 불리한 조작 사건을 만들 이유가 있을까? 둘째, 비행기가 폭파되자마자 폭파범 ‘마유미’를 체포해 국민 앞에 사냥감처럼 전시하였던 1987년과 달리, 지금은 멀쩡히 국내에서 도피 중인 것으로 여겨지는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도 잡지 못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일단 유병언의 신병을 확보한 다음 ‘거사’를 치렀어야 하지 않을까?

요컨대 국가정보원이 지금처럼 막대한 위험을 부담하면서까지, 만약 세월호 침몰이 어떠한 종류의 정치 공작이라면, 이런 공작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느냐는 말이다. 이것은 김어준뿐 아니라 세월호 침몰에 관한 음모론을 이야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세월호 침몰 배후에 거대한 음모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장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그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은 언론인의 의무라는 말이다.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한 서명이 진행되고 있다. 국정조사도 곧 시작될 예정이다. 그런데 과연 세월호 침몰은 어떤 사고였는지, 우리는 최소한의 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누군가 단원고 학생들을 해치고자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으며,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은폐하고 있는 사고인가? 아니면 어떤 대단히 큰 규모의 해상 운송 사고인데, 그것을 통해 바라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점이 대단히 많을 뿐인가?

전자를 택한다면 우리는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후자를 택하면 우리는 ‘원인’을 밝혀야 하고, 그 과정과 결과는 그리 후련하고 속 시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범인’보다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세월호 승객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또한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범인’이 누군지 묻고 따지는 그런 식의 음모론에 대해, 성숙한 시민사회의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비극을 비극으로, 사고를 사고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올바른 대응도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7062042245&code=990100&s_code=ao122

2014-07-01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북리뷰]‘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의 필요성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지음·뿌리와이파리·1만8000원

<제국의 위안부>는 하나의 이미지와 싸우는 책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분노의 눈빛으로 일본대사관을 바라보는 위안부 소녀상의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박유하 교수는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그 위안부 소녀’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신 그가 제시하는 ‘위안부’의 모습은, 적어도 단발머리 소녀가 총칼 앞에 끌려와 유린당하는 모습보다는 일상적인 무언가에 가깝지만, 그렇기에 바로 그 이미지에 친숙한 이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다. 박유하 교수는 지금까지 발행된 자료들을 토대로, 일제가 운영하던 위안소의 모습이 말하자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집창촌 등의 풍경에 더욱 가깝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다양한 발언이 터져나온 탓에 이 책 <제국의 위안부>도 졸지에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정복수 할머니(98) 등 9명이 지난 16일, 서울동부지검에 박유하 교수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그 다음날에는 이 책에 대한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논란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박 교수는 사과할 뜻이 없다고 밝혔고,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한마디 보태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법원으로부터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이 나오기 전에 <제국의 위안부>를 구하여 읽어볼 것을 먼저 권한다. 이 사안은 단순한 ‘논란’에서 사회적 ‘논의’로 승화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책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일본군 위안부는 업자인 포주에 의해 운영된 일종의 공창이었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기지촌’에서 숱하게 보아온 바로 그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속아서 갔건 자발적으로 갔건 관리매춘이 대부분이고, 그런 구조를 제대로 봐야 보상이든 사죄든 받을 수 있다”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일본군이 직접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다는 것, 중간에 끼어든 포주들이 위안부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과 전표를 떼어먹고 그들에게 성매매를 강요했다는 것 등은 우리의 역사적 상상력에 드리워진 ‘신성한 금기’를 젖혀두고 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의 실질적 운영 주체가 윤락업자라는 사실로부터, 박 교수가 지나치게 크고 많은 면죄부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그는 “게다가 동원이 ‘인신매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군이 알고도 지시한 것이 아닌 한, 설사 방관했다 하더라도 그 묵인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한, ‘강제연행’이나 ‘인신매매’의 주체를 ‘일본군’으로 상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255쪽)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를 연장하면 우리는 공공연히 미군기지 앞에 ‘기지촌’이 운영되는 것을 방관하며, 혹은 음성적으로 지원하며 ‘외화벌이’에 나섰던 한국 정부의 지난 시절을 비난할 수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배웠던 그대로 한국군이 위안소를 운영했다는 증언과 자료도 현재 많이 확보되어 있는 상태다. 한국군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저 ‘도의적 책임’만을 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묻혀버리는 수많은 전쟁 성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제국의 위안부> 논란은 좀 더 진지하게 전개되며 승화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7.01ㅣ주간경향 1082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6241106461&code=116

2014-06-17

[북리뷰]보수·진보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북리뷰]보수·진보의 갈등을 극복하는 방법

바른 마음
조너선 하이트 지음·왕수민 옮김·웅진지식하우스·2만9000원

선거가 끝났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권은 선전했다. 한편 경기도지사와 인천시장이라는 두 자리를 놓치면서 야권 내에서는 책임 소재를 묻고 따지는 분위기도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

선거가 끝나고 나면 늘 그렇다. 같은 정당의 다른 정파를 지지하는 사람들, 다른 정당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야권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세력을 지지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이 실패의 원인을 추궁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삿대질은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바깥을 향하기도 한다. ‘아니 어떻게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는데도 새누리당을 찍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거지? 도덕적으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자기 집값 올려주면 장땡인 거야?’ 같은 분노의 의문이 제기되곤 한다는 말이다.

요컨대 2014년의 우리에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도덕성의 유무 혹은 강약으로 치환하는 화법이 매우 익숙하게 통용되고 있다. 나와 다른 정당에 투표한다는 것은 그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 이 서평을 읽는 독자 중에도 최소한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새누리당 같은 ‘친일 독재 수구 꼴통’ 정당에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반대로 굳건한 새누리당 지지자들 가운데에는 야권 지지자들을 ‘어리고 싸가지 없는 것들’로 치부하는 이들이 적지않은 현실이다. 한편 민주당 계열의 야당을 지지하는 이들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을 ‘분열주의자, 새누리당 2중대’로 치부하기도 하며, 진보정당에 한 표를 던지는 이들은 민주당 계열 지지자들을 또 나름의 방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의 골은 매우 깊으며,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다. 상대방을 인간 대 인간으로 바라보고 설득하려는 시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번 지방선거는 심지어 통합진보당이 정당해산심판 소송에 걸려 있던 탓에 이른바 ‘야권연대’마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번 선거에서는 상대방을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단일화’로, 표와 표를 합치자는 계산만 횡행했을 따름이다. 우리는 정치적 지지의 방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완전히 다른 도덕적 사고방식을 가진, 혹은 비도덕적인 괴물로 묘사하는 일에 너무도 익숙한 채 21세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2012년의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책이지만 <바른 마음>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도 바로 이와 같다. 특히 민주당과 공화당의 갈등이 낙태, 동성애 등의 사안을 따라 크게 불거지고 있는 미국에서 ‘리버럴’과 ‘보수’는 상호 대화의 가능성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는 수준이다. ‘리버럴’이 볼 때 ‘보수’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생명권을 들먹이며 산모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가부장주의자들이다. ‘보수’는 ‘리버럴’을 인간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재수없는 먹물들로 본다.

이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물경 7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서 조너선 하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상대방을 괴물로 취급하지 말라고. 다만 그들은 나와는 다른 방식에서 나름의 ‘도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먼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다고. 주제는 간명하지만 그것은 수많은 연구 및 사례로 뒷받침되고 있다. ‘수구 꼴통’들은 도저히 답이 없다고, 저 ‘싸가지 없는’ 진보는 안 된다고, 고개를 내저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책을 뒤적여보기 바란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2014.06.17ㅣ주간경향 1080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610141009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