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20161204 - 20161210: 이탈리아 레퍼렌덤 실패,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앙겔라 메르켈의 연설

* 12월 4일, 이탈리아에서 치러진 국민투표가 부결되었다. 상원과 하원 동수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양원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상원의 숫자를 3분의 1로 줄이고, 총리가 갖는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투표에서, 마테오 렌치 총리가 이끄는 국민투표 찬성파는 참패를 당했다. 투표 결과는 찬성 40%, 반대 60%. 무려 20%p 차이가 나는 엄청난 패배다.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민국가를 이루고 있지만 대단히 강한 지역색과 역사와 문화를 가진 지방들의 연합체이다.  그렇게 분열적인 문화적 바탕 위에, 상원과 하원이 동수로 구성되어 법안 발의권과 부결권을 동시에 갖고 있다보니, 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간 63차례나 정권이 바뀌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비효율적인 정치 체계가 유지되어 왔다. 마테오 렌치 총리는 그러한 구조를 개혁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결국은 자신이 가장 큰 권력을 쥐게 되는 개헌안을 추진했고, 실패했다.

문제는 반대파를 주도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포퓰리즘을 주도하고 있는 오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이번 승리를 계기로 오성운동이 더 큰 영향력을 얻게 되어, 궁극적으로는 유럽연합으로부터의 탈퇴를 이끌어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투표에 참가했으며 찬성 234표, 반대 56표, 무효 7표, 기권 2표로 집계되었다. 오후 3시부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롭게 진행된 탄핵소추의결서가 오후 5시 넘어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달되면서, 현재 그의 국가원수 및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권한은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자 그의 탄핵을 지지하던 70% 이상의 한국인들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음식 쿠폰 등을 선물하고, 탄핵안 가결을 기념하여 외식을 하러 가는 등, 그야말로 '창조경제'의 한마당이 펼쳐졌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지지층의 반감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표정 관리에 들어갔으며, 이후 펼쳐질 조기 대선 정국을 준비하고 있다.

만약 12월 9일이 아니라 12월 2일에 표결을 했다면, 비박계가 마음을 굳히고 돌아올 시간이 없었을 것이므로, 탄핵안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인들의 정신 세계에 깊고도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글에서 설명했다시피 이 결과는 박지원이라는 한 정치인의 과감한 희생적 결단과, 그렇게 얻어진 시간동안 정치권을 압박해낸 유권자들의 합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렇게 한 고비를 넘겼다.


* 4선에 도전하는 독일 총리 앙겔레 메르켈이 '문화적 관용주의'의 종언을 선포했다. 12월 6일, 그는 기독민주당 당원 대회에서 "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독일 내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2015년 전격적으로 시리아 난민들에게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89만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도록 하였던 메르켈이기에 이러한 결정은 큰 변화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서구권을 휩쓸고 있는 포퓰리즘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다. 이전과 같은 이민자 포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 한 다음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프랑스의 중도 우파가 전신을 덮는 수영복인 '부르키니'를 금지했던 것처럼, 유럽의 기존 우파들은 스스로 타협 가능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양보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의 자유는 다른 자유와 마찬가지로 상황에 따라 합리적 근거 및 절차에 의해 제한될 수 있다. 여성들에게 스스로 원하는 옷을 입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과연 메르켈의 이러한, 극우 세력을 향한 유화적 움직임이, 다른 자유의 침해를 최소화하며 극우파의 부상을 억누를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2016-12-10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형량 계산기' 김기춘 vs. '표결 계산기' 박지원

'성지 순례'를 위한 기사를 먼저 하나 소개해보겠다. 11월 27일,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오늘 아침까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접촉했다"며 "탄핵 공조자들이 60명을 훨씬 넘었다는 통화를 했다. 탄핵안은 확실히 가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미 탄핵안이 통과된 이 시점에 우리는 박지원의 표 계산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 1명 기권, 234명 찬성, 56명 반대, 7명 무효. 새누리당의 이탈표는 총 62명으로 예상된다. 박지원이 옳았다. 그의 표 계산이 정확하게 맞았다. 11월 27일 현재, 그 시점까지만 해도 탄핵은 예정된 수순처럼 보였다.

그리고 11월 28일, 박지원은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회의에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대한민국 법 미꾸라지이자 즉석 형량 계산기"라며 구속수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근혜의 지시로 차은택을 만났다고 언론에 밝힌 그가, 본인에게 돌아올 죄책을 박근혜에게 덮어씌우고 자기만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화답이라도 하듯, 11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정국을 뒤흔들었다. 박근혜 본인을 향한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본인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그의 말은, 탄핵을 향해 치닫던 비박계의 기세를 꺾고 주저앉히는 것이었다. 이 묘수를 박근혜 본인이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특히 형사법체계에 통달한 누군가가 대신 내준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아무튼 굉장한 한 수였다.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탄핵의 칼날이 순식간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현실을 현실로서 좀 받아들이고 논의를 시작하자. 야3당의 의석을 전부 더해도 167석이다. 탄핵에는 200표가 필요하다. 33표를 어디에선가 가져와야 하는데, 그 '어딘가'는 당연히 새누리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11월 29일의 3차 대국민담화는 그 33표를 가진 새누리당 비박계를 뒤흔들었다. 그대로 탄핵 절차가 진행된다면, 과반수 의석을 가진 야3당에 의해 발의는 가능하지만, 200표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인'이라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박지원이 택한 경로는 당연히 '이길 수 있는 확률을 최대화'하는 것이었다. 1일에 발의하고 2일에 표결하기로 했던 일정을 수정하여, 9일에 표결하는 것 말이다. 물론 일주일 미룬다고 해서 백퍼센트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렇게 확보된 일주일동안 어떤 변수가 등장하여 비박계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 그 가능성을 얻으려면 일단 탄핵안 발의를 멈추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민주당, 혹은 민주당의 주류 세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29일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가 터져나온 후에도,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박과 친박을 가리지 않고 '새누리당'을 향해 강경한 비난의 어조를 높이면서, 그들의 표를 얻어내기 위한 다른 방안을 마련하지는 않은 채, 그냥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가결이 아니라 부결을 향해 달려가는 질주와도 같았다. 다른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는가? 이것은 3000만명이 아니라 300명이 하는 투표다. 누가 무슨 표를 던질지 투표 개시 전에 미리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 모든 정치적 불이익과 야당 강경파들의 야유를 무릅쓰고 양심적인 비박계 및 새누리당 탈당파 33명이 표를 던져주기를 염원하면서 2일에 탄핵안을 표결한다는 것은, 낙하산을 매지 않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묻지마 표결 강행이었을 뿐이다.

다행히도 '이쪽'에는 '형량 계산기'에 맞설 수 있는 '표결 계산기'가 있었다. 더욱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온갖 비난과 인신공격, 혐오발언 등에도 굴하지 않고 9일 표결안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주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었고, 그동안 탄핵 정국을 둘러싼 '게임의 법칙'이 바뀌어, 새누리당에서 62명의 이탈표가 나오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만약 2일에 그대로 표결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건 박근혜, 혹은 '형량 계산기' 김기춘의 뜻대로 정치권이 놀아난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야권 일각에서는 그렇게 '망하는' 결과가 벌어졌을 때, 국민들이 분노하여 '촛불 민심'이 더욱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는 탄핵당하지 않고, 하야하지도 않고, 내년 대선까지 쭉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안정국을 강화해나갔을 것이다. 국민들은 광장에서 경찰에게 쫓기고, 탄압당하고, 얻어맞고, 정신적으로 너덜너덜해져간다. 그렇게 쌓이는 불만의 목소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는 세력은 미래를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박근혜에 대한 국민적 반감에 기대어 손쉬운 대선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12월 1일까지의 '시나리오'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정치권이 갇혀 있었던 '죄수의 딜레마'

'죄수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내는 것도 요즘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이 그랬다. 탄핵안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는 민주당 주류의 입장은 진정 솔직한 것이었고, 또 합리적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민주당 주류, 즉 친 문재인 계열은, 문재인을 제외한 다른 대선 주자가 부상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탄핵안 가결'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이 현재의 탄핵 정국을 2004년의 그것과 1:1로 대조하는 사람들이 현 정국의 초반에 탄핵 절차 진행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 탄핵과 이 탄핵은 완전히 다르다. 여당을 탈당하고 미니 여당을 차린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박근혜는 아직도 거대 여당 소속 대통령이며, 노무현의 선거법 위반과 박근혜의 온갖 비리 혐의는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등에 대해, 새누리당 의원이 탄핵에 동참하는 것은, 일종의 속죄 의식으로 작동한다. 박근혜를 탄핵함으로써 비박계, 그리고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는 구 친이계는 박근혜와의 선긋기에 성공하고 오명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 근소한 차이로 탄핵에 성공한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만약 비박계가 심지어 새누리당을 탈당하지도 않은 채로 압도적인 탄핵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다면, 그들은 새누리당 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할 것이고, 새누리당의 자산을 잃지 않은 채 조기대선 국면에 임할 수 있다.

대체 왜 민주당의 주류는 탄핵 정국에서 계속 한 발씩 늦게 움직이고, 불필요한 돌발 행동과 강경 발언으로 비박계를 위축시키고, 심지어 12월 3일 촛불집회에서까지 '탄핵'이 아니라 '하야'를 외치고 있었을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지렛대삼아 비박계가 부활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적은 표 차이로 탄핵이 가결되어 도덕적 면죄부를 얻었지만 새누리당 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밀리게 된 비박계가 집단 탈당하여 '제3지대'를 형성하는 것도 원치 않고, 지금처럼 비박계가 세력을 과시하며 새누리당을 재접수하는 것도 민주당 주류가 원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지금처럼', 인기 없는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이어지면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므로 탄핵안은 안타깝게 발의되지 못하거나, 발의된 후에 부결되어야 하거나, 부결되어도 상관 없다.

국민의당의 셈법은 좀 더 복잡했다. 가결되되 아슬아슬하게 가결되어, 친박과 비박의 싸움이 좀 더 커지고,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질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속죄 의식을 제대로 치렀지만 그 결과 갈 곳을 잃어버린 구 새누리당 의원들을 하나씩 포섭해가며 '합리적 중도'로서 외연을 넓힌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지율이 많이 떨어진 안철수 외의 다른 대선 주자를 수용할 여지를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박계가 아예 새누리당 내에서 이겨버리면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므로 그다지 이익을 볼 수가 없다. 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만 실패한다면 애초부터 탄핵론을 펼쳐왔던 안철수의 입지가 더욱 크게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발생했다. 국민의당은 일단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상황이지만, 너무 많은 표 차로 탄핵에 성공하면 그렇게까지 즐거운 상황은 되지 못한다. 반면 민주당은 지지층을 향한 강경 발언과는 별도로, 탄핵을 통해 비박계가 속죄하는 것도 원치 않으므로, 우상호 원내대표의 말마따나 탄핵이 부결되어도 상관 없는 쪽이다. 비박계는 탄핵을 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 성공한다면 최대한의 표를 이끌어내어서 승리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각 정당이 얻게 되는 보상의 상대적 선호도를 -1, 0, 1로 놓고 표를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1-1-1

민주당 입장에서는 작은 표차로 이기는 것보다는 부결되는 게 훨씬 낫다(2점 차이). 국민의당은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일단 탄핵안을 가결시켜야 1점의 손해를 안 볼 상황이므로, 새누리당이 4월 퇴진을 당론으로 정하기까지 한 상황에서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비박계는 작은 표차건 큰 표차건 탄핵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면 아예 참여를 하지 말아야 마이너스 1점의 손해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 부결되는 것이 이득인 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죄수의 딜레마였다. 무기명투표를 이용해 민주당에서 이탈표가 나오면 그 비난은 민주당이 아니라 비박계, 더 나아가 국민의당으로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과 2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보수 성향의 일간지 뿐 아니라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진보 계열 언론에서도 행간에 녹여 계속 언급하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정작 간절하게 탄핵의 성사를 원하는 쪽은 국민의당과 비박계이지만, 그들은 민주당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다. 반면 민주당은 굳이 탄핵을 성사시켜야만 할 간절한 이유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격한 여론 변화와 보상 매트릭스 변동

12월 3일의 촛불시위 이전까지의 계산이 그랬다. 그 후 지역구 의원들에게 쏟아진 전화, 문자, 메신저 등 또한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욱 강한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반성을 해야 한다. 총선이 무려 3년이나 남았고, 다음 총선은 다음 총선의 이슈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 생각이 틀렸다. 전방위적으로 쏟아지는 여론의 압박이 정치권의 보상 매트릭스를 바꿔놓았다.

일단 민주당은 더 이상 탄핵 여론의 발목을 잡으며 한 템포 늦게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온라인 여론전에 힘입어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었으나, 문제는 문재인의 지지율이었다. 성난 탄핵 찬성 여론을 이재명이 모두 쓸어가면서, 물론 경선을 하면 어떻게든 문재인이 이길 테지만, 불안감이 커진 것이다. 탄핵안이 부결되고 '촛불정국'이 이어진다면 문재인이 아니라 이재명만 좋은 일이 되어버린다. 탄핵에 나서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국민의당과 박지원은 2일로 예정된 탄핵 투표를 9일로 미루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주장을 해놓고도, 탄핵안을 통과시키라는 국민 여론의 불만을 한 몸에 떠안았다. 부결되고 나면 대선 국면을 거치면서 국민의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변함이 없지만 손해가 엄청나게 커진 것이다.

여기서 빠진 변수가 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4월 30일 18:00를 기해 나는 모든 권한을 여야가 합의한 총리에게 넘겨주마' 같은 4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면 탄핵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그런 수를 두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아직 모르겠다. 헌재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비박계와 접촉을 했는데 이빨이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해버렸을까?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고 책상을 두드리다 보니 시간이 다 지나갔을까? 내게 주어진 정보 하에서는 알 수가 없고, 결론에 영향을 주지도 않으므로, 일단 넘어가자.

비박계의 셈법은 변함이 없었다. 표결에 참여했는데 부결되면 곤란하다. 표결에 참여한다면 어떻게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이제 민주당에서 배신표가 나올 여지가 사라졌고, 너무도 이상하게도 청와대에서 침묵을 지키면서, 거리낌없이 투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공적 용어로서 대단히 부적절한) 이른바 '촛불 민심'과 첨단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의원 압박의 결과로 변경된 보상표를 다시 그려보자.

민주당국민의당비박계
큰 표차001
작은 표차-110
부결-2-2-2

이제 죄수의 딜레마는 해소되었다. 부결되는 것은 모두에게 확실한 손해를 안겨준다. 작은 표차로 가결되어서 국민의당이 이익을 보는 상황이 생긴다 해도 민주당으로서는 감수해야 한다. 부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박계는 일종의 꽃놀이패를 쥐고 탄핵안 표결에 나서게 되었다.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혹자는, 아니 적잖은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여론조사 결과와 딱 맞아떨어진 국회 표결 결과'를 두고 감탄하는 모양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회의원을 리모콘 삼아 국민의 여론조사 그대로 움직이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만약 12월 1일 '여론' 그대로 탄핵안을 발의하고 12월 2일 표결했더라면, 국민의 여론과는 완전히 다른 국회 표결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12월 9일의 탄핵안 투표가 여론조사와 우연히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12월 1일에 어떤 정치인이 '여론을 거슬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꿋꿋이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그 정치인의 이름은 박지원이다.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모른다면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박근혜 게이트를 두고 박영선 의원에게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여자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고 일갈했던 박지원의 성차별적 의식과 발언을 나는 여전히 규탄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모두 남자들이다. 게다가 박근혜는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박정희의 자식'이기 때문에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온 정치인이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실패를 보상하는 방법은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고, 그 다음 대통령도 여자가 하는 것 뿐이다. 나는 성차별주의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 구시대 정치인 박지원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하지만 2016년 12월의 탄핵 정국 속에서 '최고의 플레이'를 한 명 선정하면, 그건 당연히 박지원이다. 그가 홀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가며 '1일 발의 2일 표결'안을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12월 3일의 촛불 시위대는 앞으로 벌어질 표결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이미 실패로 돌아간 표결의 절망을 안고 거리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이득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국민들이 원하는 바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미 정치 외의 다른 영역에서 충분히 '이기는 경험'을 해온 사람들이다. 2002년 월드컵으로 '세계의 벽' 앞에 무릎 꿇는 비루함이 극복되었다. 김연아 선수를 대표로 한 여러 스포츠인들의 활약은 오늘도 계속된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문화 수출국이며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왜 유독 정치에서만큼은 '우리 정치권이 힘이 약해서 저 악당들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찌질한 서사가 아직도 통용되어야 하는가?

정치는 결과로 말해야 한다. 국민 여러분이 힘을 모아주시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식의 무책임한 정치 세력, 적어도 나는 절대 사절한다. 욕을 먹을 때 욕을 먹더라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정치권 내부의 논리에 부합하는 행보를 하는 그런 정치인과 정치 세력을 나는 원한다. 합법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키는데 성공한 기쁜 날, 앞으로 대한민국의 정치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긴 글을 써 보았다. 이것은 국민의 승리이며 정치의 승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계속, 이기는 정치를 보고 싶다.

2016-12-04

20161127 - 20161203: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박근혜 3차 대국민담화, 트럼프 차이잉윈 통화

* 11월 3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새로운 대북제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대북제재결의 2321호는 지난 3월초 채택되었던 대북제재결의 2270호를 보완하는 것이다.

북한의 석탄 수출에 상한선을 정하고, 그 외 광물의 수출금지를 강화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원자재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을 차단하여 경제적 압박을 가하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결의 채택일인 오늘부터 올해 말까지는 석탄 수출에 5천349만 달러 혹은 100만 톤의 규제를 받고, 내년부터는 연간 4억달러 혹은 750만 톤의 석탄만을 판매할 수 있"다. 동, 니켈, 은, 아연 등의 광물 뿐 아니라 헬리콥터, 선박, 심지어 조형물, 즉 독재자 우상화 조각상의 판매 역시 금지 대상의 목록에 올랐다.

기존 안보리 제재안에서도 석탄의 수출을 금지하고 있었지만, '민생 목적'일 경우에는 허용한다고 예외 조항을 둠으로써, 중국이 북한으로부터 석탄을 수입할 수 있도록 하는 여지를 제공하고 있었다. 새로운 결의안은 그러한 예외 없이, 가격 혹은 무게 둘 중 하나라도 상한선에 도달하면 석탄의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한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은 중단되지 않고 있으며, 2년 내 미국 본토에 공격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 11월 29일 오후 2시 30분, 박근혜 대통령이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전과 달리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기자들 앞에 섰던 그는,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던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향하고 있는 범죄 혐의를 모두 부인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향한 탄핵의 칼날을 피하기 위한 최선의 정치적 수를 두었다는 것이다.

저는 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의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습니다.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주시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이미 '국가 원로'라는 그 어떤 헌법적 정당성도 갖지 못한 임의의 노인 몇 명이 모여 '4월 퇴진, 6월 대선'이 좋겠다고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다음의 일이다. 새누리당 역시 그 '원로'들의 견해에 따라 '4월 퇴진, 6월 대선'으로 가닥을 잡기 시작했고, 그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만 탄핵에 임하겠다고 새누리당의 비박계는 입장을 선회했다.

야3당의 탄핵 추진은 동력을 잃고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200표가 나와야 탄핵안이 가결될 수 있는데, 야3당을 다 합쳐도 결국 30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본래 12월 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표결을 9일로 연기해야 한다고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이 주장하였으나, 온라인의 여론은 당장 탄핵 표결을 하지 않고 무엇을 하느냐는 식으로 휘몰아쳤다. 확보되었어야 할 표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표결을 늦춰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이 왜 그토록 비난당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결국 탄핵안은 상정되었고, 표결은 9일로 결정되었으며, 지난 3일 토요일에는 220만명 가량이 전국에서 촛불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9일 탄핵안이 가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 12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대만의 차이잉윈 총리와 통화했다. 이것은 미국이 자유중국을 버리고 중화민국과 수교하기 시작한 이후 37년만의 일이다.

당연히 중국은 발칵 뒤집혔다. 겅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에서 "세계에는 오직 '하나의 중국'만이 있고 타이완은 중국 영토의 일부"라는 입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대만은 정식 외교 대상이 될 수 없는 상대인데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전화를 한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의 오랜 밀월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거니와,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 정책이 종잡기 어려운 방향으로 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만약 트럼프가 대선 캠페인 당시 했던 말처럼 김정은과 직접 통화를 하면 대한민국은 어떤 처지가 될까? 주사파들이 꿈에 그리던 '통미봉남'이 시작된다면? 대한민국은 어서 탄핵 절차를 밟아 국내의 정치적 혼란을 제거하고 변화하는 세계에 대응해야 한다.

2016-12-02

탄핵은 대박이다

지지난주 토요일의 일이다. 충무로 인근에 즐겨 가는 한 식당이 있다. 닭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집이며 백숙을 잘 삶는다. 그런데 광화문 집회를 몇 시간 앞두고 좀 일찍 저녁을 먹으려 가보니 닭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백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리면서 광화문과 종로 인근을 넘어 충무로까지 식당 매진 사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것도 창조경제라면 창조경제다. 요즘 분위기 살아난 광화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말만 되면 한산하기 그지 없었던 종로와 청계천 일대 상가들까지 '촛불 특수'로 북적거리게 만들었다니 경이로울 따름이다. 경찰이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통행을 막지 않으니, 2008년에는 아예 장사를 못하고 울상이었던 광화문과 종로 인근의 대형서점들도 부쩍 늘어난 유동인구의 온기를 느낀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촛불 호경기는 웃을 일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 앉아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의 경제가 통째로 마비되어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기업들은 박근혜 게이트의 불똥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임원 인사를 한없이 미루고 있다. 경제 성장률 하향이 예상되지만 민간이건 공공이건 경제 연구소들은 한없이 비관적인 수치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체감 경기는 한없이 얼어붙었고, 이제는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던 5000원짜리 순댓국집들 중에도 폐업하는 곳이 보인다.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발생하는 경제적 효과가 정말 굉장한 것이다. 관련 보도를 인용해보자.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6년 11월 소비자동향조사’ 자료를 보면 11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5.8로 조사됐다. 10월보다 6.1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월(94.25) 이후 7년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링크)

한국 대기업들에 대한 신뢰 역시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다. 우리 한국인들끼리야 원래 그랬거니,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현실이 영화보다 저질이구나, 하고 덤덤하게 지나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해외 투자자들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 불안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원화 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빠르게 돈을 빼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돼 총수의 이름이 거론되는 삼성전자(11월 1일 이후 순매도 4627억원), 현대차(321억원), SK텔레콤(408억원) 등 9개 재벌 그룹 관련주도 대부분이 외국인 순매도를 기록 중이다. 이 9개 그룹이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한다."(링크)

국내 소액 주주들의 심정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다. 당신이 해외 투자자라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을 잘 만들어서 수익을 내고 배당도 많이 해달라는 생각에 그 비싼 삼성전자 주식을 매입했는데, 그 삼성전자가 정유라라는 들어본 적도 없는 승마 선수를 위해 수십억 짜리 말을 사고 관리비까지 대고 있었다고? 그래서 검찰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하고 있다고? 이건 갤럭시 노트7이 폭발한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황당한 사건 아닌가?

시간을 한 달 전으로 되돌려보자. 당시만 해도 한가한 소리를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대통령에게는 외치와 국방을 맡기고 내정을 전담할 책임총리를 임명하면 어떻겠느냐는 식의 공허한 정치적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정치권에서 시끄럽게도 울려퍼졌다. 바닥 경제가 말라붙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보따리를 챙기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기상천외한 소리들을 하고 있는 판에, 한국의 정치권 중 일각은 이 난국을 합법적 절차에 의해 해결하려 들기는커녕 최대한의 정략적 이해만을 도모하다가 헛된 시간을 보내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궁지에까지 몰렸다. 누군지 몰라도 법에 대해 잘 알면서 동시에 정략적 이간질에 능숙한 사람이 대신 써준 듯한 3차 대국민 담화문이 투척되자 일순간에 탄핵 대오가 흔들렸다. 이대로는 탄핵안을 발의할 수 있을지언정 통과시킬 수 없다는 게 분명한데도 야권 일각의 분노한 지지자들은 같은 편에게 '사쿠라', '부역자'라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나는 대체 왜 이런 지지자들의 행태를 제1야당에서 제지하지 않는지 의아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중요한 건, 이제 더 물러설 길이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를 탄핵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가 산다. 최순실이 대신 써줬다는 의혹이 있지만 최순실 본인은 한사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표현을 빌려보자. 탄핵은 대박이다. 끝없는 불황의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단 한 장의 카드가 바로 탄핵안 가결이다.

생각해보자. 박근혜를 탄핵시키자고, 하야를 촉구하자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들면서 일대의 경기가 매주 주말마다 불타오른다. 만약 적법한 헌법적 절차에 따라 박근혜의 대통령 권한이 12월 9일 정지된다면 온 나라가 광장으로 돌변할 것이다.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심지어 장례식장에서 눈물 흘리던 유족들도 환호성을 질렀던 것처럼, 4%의 골수 지지자를 제외한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이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오늘날의 불황 속에 소비심리를 진작시키고 사람들이 기꺼이 지갑을 열도록 만들어줄 수 있는 이벤트가 이것 외에 또 있을까?

탄핵은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불안정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해법이다. 탄핵안이 통과되는 날 시민들은 축제를 벌이며 주가는 폭등할 것이다. 어쩌면 출산율도, 마치 2002년 월드컵 당시 그랬던 것처럼, 조금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중요한 건 탄핵안이 부결될 경우 현재의 우울하고 침체되어 있으며 무기력한 분위기가 반전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탄핵만이 해법이다. 이제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광장에서 사진 찍을 생각 하지 말고, 비박계 의원들에게 '충성충성충성' 문자 보내고 바짓가랑이 붙잡고 부정청탁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로비를 퍼부어라. 광장은 시민들이 알아서 지킬테니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일을 하란 말이다. 오직 비박계의 표를 확보해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것이 당신들의 역사적 사명인 것이다.

영국의 권위있는 경제지 『파이넨셜타임즈』는 사설을 통해 박근혜의 퇴진을 요청하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박근혜가 결국 무대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은, 대한민국이 더욱 강력한 민주주의와 함께 이 사건으로부터 솟구쳐오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만한 이유가 되어줄 것이다."(링크) 성공적인 탄핵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지금 탄핵하지 못하면 박근혜는 끝까지 버티려 들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가 버텨줄 수 있을까?

탄핵은 대박이다. 12월 9일은 대통령 탄핵안을 표결하는 날이 아니라, 대한민국 경제 부활의 첫 단추를 꿰는 날이다. 탄핵안 가결을 위해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한다.

2016-11-29

[북리뷰] 광장의 불꽃은 백년 넘게 타오르고 있다

1898, 문명의 전환
전인권·정선태·이승원 지음·이학사·1만8000원

정치학자 전인권에게는 꿈이 있었다. 대한민국의 기원을 정치사상사의 관점에서 밝혀내고, 이 나라가 직면한 제반 상황을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젊은 나이의 그를 병마가 덮쳐왔고, 전인권의 미완성 원고를 그의 동료인 정선태와 이승원이 이어받았다.

<1898, 문명의 전환>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왕조의 신민이 아닌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서 거듭났던 그 순간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헌법 전문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건국한 주체는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대한국민이다. 그렇게 새로운 나라를 만든 주권자들은 부정과 독재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을 쫓아냈고, 빈 틈을 노리고 들어온 군부에 잠시 권력을 내줬지만, 기어이 승리를 거두어 대통령 직선제 민주 헌법을 이룩해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대한국민은 3·1운동을 통해 이 나라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한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런데 갑오개혁이 시작된 것은 1894년이고, 3·1운동은 1919년이다. 불과 25년 만에 조선의 신민들이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대한국민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전인권은 역사학계의 통념에서 벗어나 한 매체와 그 매체로 인한 정치 운동에 주목한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후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고문 자격으로 돌아온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시작된 후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 온 나라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만민공동회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의 순한글신문으로 띄어쓰기를 도입하여 혁신적으로 가독성을 끌어올린 <독립신문> 덕분에 새로운 공론장이 탄생했다. 말하고 읽고 쓰게 된 조선왕조의 백성들은 광장에 모여 밤을 새가며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한 끝에, 상호 간에 평등하며 근대적인 정치 체제의 도입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진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협회의 주체가 비교적 소수의 엘리트였다면, 만민공동회는 대중들이 이끌어간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정치운동”(169쪽)이었다. 하지만 기존 역사학계는 민중주의 사관에 집중한 나머지 동학농민운동을 주요 사건으로 되새기면서 만민공동회를 다소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새로운 매체와 광장에서의 모임을 통한 새로운 정치의식의 출현. 전근대사회의 신민에서 근대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발걸음. 그 중대한 의미를 병상에 누워 정선태와 이승원에게 남길 유언을 녹음하던 전인권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역시 문명의 전환이 왜 1898년이냐, 1876년 개항일 수도 있고, 김옥균이 쿠데타 한 때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시 근대의 출현이라고 하는 것은 ‘대중의 출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대중들이 집단적인 의사 표현을 하고, 과거 백성들과 신민들이 민족의 이름으로 새롭게 호명되면서, 균질화된 혹은 동질화된 그 자격을 가지고 공론장에 참여하고 있는 이 형태.”(304쪽)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광장’의 체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성공하고, 가끔은 실패했지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정치적 주체화의 도저한 흐름 말이다. 우리의 문명은 바로 지금 한 단계 더 나아가야만 한다.

2016.11.29ㅣ주간경향 1203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22105047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