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28

3.1 운동을 기념하여 고종의 장례 행렬을 재연한다?

'3.1 운동은 만세운동이 아니라 실은 고종 장례식이었다'는 말을 내가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때 한 교사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맥락은 3.1 운동을 칭송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망국의 백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은 자주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고혈을 빨아먹은 왕의 죽음을 슬퍼해서라고 비아냥거리기 위해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3.1 운동은 고종 장례식이었을 뿐'이라는 말은 실제로 그렇게 활용되어 왔다. 한국의 모든 것을 비하하며 일본을 칭송하는 이들이 즐겨 입에 담는 소리였다는 말이다. 고양이가 죽었는데 쥐들이 슬퍼하며 거리에 나섰고, 그걸 나중에 독립운동인양 포장했다, 조선인들의 '민도'는 예나 지금이나 그 모양 그 꼴이며 그렇게 선동에 놀아나는 우매한 것들이다, 이따위로 찍찍 내뱉는 소리. 그런 발언의 하나가 바로 '3.1절은 고종 장례식' 타령이었다.

그런데 대관절 어째서, 민족 정기 우뚝 세우기를 그렇게 좋아하고, 친일 잔재 청산에 목숨을 거는 현 정권에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재연한다고 나서고 있는 것일까? 한반도 거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폄하하고 깎아내릴 때 쓰던 레퍼토리를 왜 대한민국의 정부가 앞장서서 재연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그들이 말하는 '올바른 역사인식'이란 무엇인가?

3.1 운동은 기념할만한, 기념해야 할 사건이다. 죽은 왕의 시체를 밟고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탄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내내 차별과 멸시의 대상이었던 평안도 사람 함석헌이 회고했던, 왕이 아닌 국민이 주권자로 재탄생한 날이 바로 3.1절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함석헌의 이야기를 꺼낸 건 국가나 민족과는 다른 차원에서 만세운동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도 그때 들었어. ‘여러분이 다 나라의 주인이니까 누굴 믿지 말고 다 일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독립이 됩니다.’ 그런 말 사천 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들어본 소리거든요. 단군이 계실 땐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국가라고 이름을 걸고 한 이후에 언제 그런 말을, 더구나 평안도 놈들이 들어봐요?” 함석헌은 당시 이승훈의 연설에서 사람들이 받은 충격을 그렇게 요약했다. 그때 사람들이 처음 들어본 것은 ‘나라의 독립’이 아니라 ‘당신이 주인’이라는 말이었다.
고병권, "함석헌이 겪은 3·1운동", 《경향신문》, 2019년 2월 24일.

3.1절에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복원하겠다는 사람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4.19 기념 행사에서 이승만을 추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1919년 3월 1일은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왕정을 떨쳐내기 시작한 날이다. 그걸 '죽은 왕을 기억하는 행사'로 바꾸고 싶어하는 자들은, 민주주의자 행세를 하는 왕당파에 불과한 것 아닌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왕족과 귀족을 용납할 수 없는 평민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만 '대한독립만세'는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

2019-02-04

"그때까지 여행을 건강하게 잘 버텨낸 할아버지의 잉꼬 두 마리가 압수되는 것을 온 가족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1933년 11월 형제들과 어머니, 외조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왔을 때, 마이클은 아홉살 반이었다. 이미 몇달 전에 베를린을 떠났던 아버지는 사실상 난방이 되지 않는 에든버러의 석조 주택 안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앉아 밤늦게까지 사전과 교[206쪽]과서와 씨름하는 중이었는데,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에서 소아과 교수로 재직했던 그였지만 영국에서 계속 의사로 일하기 위해서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익숙치 않은 영어로 의사 면허시험을 다시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마이클이 쓴 자전적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 없이 미지의 땅으로 이주해가는 가족의 걱정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것은 도버에서 통관절차를 밟을 때였다. 그때까지 여행을 건강하게 잘 버텨낸 할아버지의 잉꼬 두 마리가 압수되는 것을 온 가족이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 온순한 새들을 빼앗긴 것, 그 새들이 일종의 막 뒤로 영원히 모습을 감추는 것을 무기력하게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새로운 나라로 이주하는 것이 일정한 상황 아래서는 얼마나 터무니없는 경험까지 강요하는지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마이클은 썼다. 도버의 세관에서 잉꼬가 사라진 사건은 그 이후 수십년이 흐르는 동안 조금씩 새로 획득하게 되는 정체성 뒤로 베를린의 유년시절이 사라지는 과정의 시작이었다. 이 연대기 기록자는 실종된 아이를 위한 추도사를 쓰기에도 부족할 만큼 별로 남은 것이 없는 기억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내 안에는 내 고국이 얼마나 적게 남아 있는가(How little there has remained in me of my native country).[207쪽]

W. G. 제발트, 이재영 옮김, 『토성의 고리』(경기도 파주: 창비, 2011), 206-207쪽

2019-02-03

<로마>에 대해 이것저것

  • 당연히 결말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1.

<로마>는 한 가정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식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어떤 가족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다. 서사의 중심에 선 인물은 식모로 일하는 클레오이지만, 작품의 눈높이는 어린 시절의 감독 본인에게 맞춰져 있다. 아마도 막내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2.

한국어로는 작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성체축일 대학살'이 언제인지에 대해서조차 알기 어렵다. TIME지의 기사에 따르면 1971년 6월 10일, 정부가 훈련시킨 깡패 집단인 로스 알코네스(Los Halcones, 영어로는 Falcons(매))가 시위 현장에 투입되었다. 마치 다른 학생운동 정파인 것처럼 위장하여 살인극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클레오의 남자친구였고 그를 임신시킨 후 외면해버린 페르민이 티셔츠 차림이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씨네21>은 로마를 마치 별도의 도시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알폰소 쿠아론이 택한 영화의 재료는 1970년대 초 멕시코의 한 도시, 로마에서 살던 당시 3년간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사실 로마는 멕시코의 수도인 멕시코시티 내의 한 구역의 이름이다. 물론 나도 가본 적은 없지만, 구글 지도로 확인되는 정보만 놓고 봐도, 멕시코시티의 한복판에 위치한, 옆에 큰 공원을 끼고 있는 멋진 곳이다. 구글 지도의 스트리트 뷰로 둘러볼 수 있다.

2019년인데, 인터넷으로도 확인 가능한 정보를 찾지 않은 채 기사를 쓴다. 다른 이들은 그런 기사를 보고 베낌으로써, 한국어로 유통되는 정보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지겹다.


3.

그래도 국내에 나온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정보들이 도움이 되긴 한다. 가령,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직접 촬영까지 했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타일이 깔린 바닥을 보고 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클레오가 물을 붓고 청소를 한다. 어떤 곳에는 물이 고이고 다른 곳에는 물이 빠진다. 거품이 일어나고 부서지고 흘러간다. 고인 물 위로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가 비춰 보인다. 이 단순한 쇼트부터 너무도 아름다워서, 이것만 두 시간을 보고 있어도 만족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 지경이다. 물, 그림자, 거품. 극도로 단순한 구성 요소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화면이 실로 압도적이다.

<로마>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마스킹(영사기가 빛을 쏘지 않는 스크린을 암막으로 가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스킹이 없다면 화면 바깥에서 허옇게 빛이 일어난다. 극중의 1970년 12월 31일 밤 11시 무렵 발생한 산불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알폰소 쿠아론 본인이 연거푸 강조했다시피 이 영화는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서 봐야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명필름아트센터에서 관람해본 결과, 그 말이 사실이었다.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은 전방 뿐 아니라 측면과 후방, 심지어 극장의 지붕에도 별개의 스피커를 설치하여 바닥을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사운드를 제공하는 방식인데, 영화를 보면 마치 <로마>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로마>는 멕시코시티를 주요 무대로 삼는 작품이며, 멕시코시티는 소음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카메라가 찍어낸 화면 뿐 아니라 마이크로 담아낸 사운드를 통해서도 관객을 압도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멕시코시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소음을 담아낸 후 그것을 다시 설계하여 배치하는데, 다른 극장에서 볼 경우 이런 감상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집에서 본다면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의 어머니 소피아가 큰 차를 몰고 가다가 어떤 소음을 만들어내는데, 돌비 애트모스 시스템이 갖춰진 극장에 앉아있으면 그 고통을 거의 온전하게 전달받을 수 있다.

작품의 결말이자 하이라이트인 대목에서 몰려오는 파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로마>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알폰소 쿠아론은 아주 소박한 소재를 통해 엄청난 숭고의 체험을 전달할 수 있으리라는 비전을 갖고, 확고하게 실행에 옮겨, 성공했다.


4.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제공하는 숭고의 체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이 사람이 관객인 나에게 숭고함을 느끼게 하려 했다'는 사실만큼은 절감했고, 이렇게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장악하려 드는 영화를 본 것은 실로 오랜만이어서, 경탄했다. 하지만 나는 몰입하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작품의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자체가 계속 소격효과를 불러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는 페르민에게 버림받았다. 소피아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 두 여성은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치며, 바다에서 빠져 죽을뻔한 아이들을 건져내면서, 단단한 연대를 이룬다. 바닷가의 그 장면은 실로 아름답다. 완벽하다. 숭고하다. 하지만 껄끄럽다. 계속 식모로서 살아가고 있는 클레오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 자체에 내가 동감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스페인어를 쓰는 이주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도시로 몰려와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간다. 때로는 농장주를 습격해 땅을 빼앗기도 하지만, 정복자의 후예들과 미국인들은 총 쏘는 연습을 하며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 사격을 여성과 아이가 고루 참여하는 레포츠인 양 포장해서 말이다.

이러한 현실을 굳이 '빼앗는 자'와 '빼앗기는 자'로 양분해본다면 감독 자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빼앗는 자'의 편에 서 있었다. 멕시코시티의 로마라는 곳에서 원주민 식모를 두고 살아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식모살이를 하던 원주민의 관점에서 1970년대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일종의 서사적, 혹은 윤리적 도박이 된다.

여기서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알폰소 쿠아론은 그 도박에서 잃지 않았다. 그는 '가진 자'의 눈으로 '못 가진 자'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만들 때 빠질 수 있는 모든 함정을 영리하게 비켜나갔다. 그러나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성공했다는 말과 동일하지는 않다. 클레오와 소피아는 개인적이지만 큰 사건들을 겪으며 단단한 정서적 유대를 맺게 되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로마>의 서사는 그 어떤 비윤리적 선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랑으로 맺어진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식모와 고용인이다. 클레오는 여전히 바깥채에 살며 따로 밥을 먹고 빨래를 하며 개똥을 치울 것이다. 성인이 되고 헐리우드에서 스타 감독이 된 알폰소 쿠아론은 수십년만에 다시 고향에 돌아와, 본인의 어린 시절을 보살펴준 식모와 꼭 닮은 원주민을 찾아내어 카메라 앞에 세워 연기를 시켰다. 자신을 키워준 식모와 같이 <로마>를 보기까지 했다("클레오에 해당하는 실제 인물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영화가 초연될 때 함께 <로마>를 감상했다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비윤리적이라고 지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과연 감동적인가?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감동'을 '향유'해도 되는 것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5.

그렇다면 대체 뭘 어쩌라는 것인가? 나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져봤는데, 잘 모르겠다. 너무 잘 찍었고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지금 시대의 제1세계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 있을만한 함정은 전부 피하면서도, 멕시코의 현대사 뿐 아니라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이후 진행되어온 수탈의 역사까지 묵직하게 담아내고 있기도 하다. 이런 소재를 영화로 만든다면 이보다 잘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목표로 삼고 있는 관객이 아니다. 그 사실을, 영화를 보고 와서 곱씹는 지금까지도 실감한다.

우리가 영화를, 혹은 그 외의 창작된 서사를 소비하는 것은 그것이 완벽해서도 아니고 그 어떤 흠이 없어서도 아니다. 보는 이에게 일말의 불편함도 없게 하겠다는 의지로 충만한 몇몇 작품들(머릿속에 몇 개의 예시가 지나가지만 굳이 거론하지는 않겠다)일수록, '나는 정치적으로 완벽하게 올바른 작품의 팬이다'라고 우기는 소위 '팬덤'에 의해 문제가 발생하는 역설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윤리는 창작물이 아니라 창작물을 만들고 즐기는 사람의 몫일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로마>는 가장 좋은 환경에서 볼 이유가 충분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라는 매체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여러 번 봐야 한다. 하지만 그 소재와 이야기의 전개 등을 되짚어보면, 단순하고 상쾌한 감동 따위는 점점 설 곳을 잃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게 무슨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상문을 남기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 나 말고도 비슷한 고민에 빠져든 사람들이 있을테고, 누군가는 말문을 열어야 하니 말이다.

2019-01-21

새 번역서, <야바위 게임>이 나왔습니다.

번역한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야바위 게임>. 원제는 Rigging the Game입니다. 영어 단어 Rig의 어감을 어떻게 살릴까 하다가 일단 가제를 달았는데, 출판사측에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책의 저자인 마이클 슈월비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가령 앤서니 기든스처럼 학술적인 영역을 넘어 대중에게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는 슈퍼스타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교수, 훌륭한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 <야바위 게임>은 미국의 10여개 대학에서 불평등과 관련한 사회학 수업의 교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번역을 위해 책을 꼼꼼히 읽어보니 잘 알겠더군요. 오랜 세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갈고 닦아온 방법론과 화법이 촘촘히 배어들어가 있습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학생들에게 단번에 느끼게끔 하기 위해, 10명을 교실 앞으로 불러내어 종이접시를 나눠주는 것이 가장 대표적입니다. 상위 10%가 종이접시 열 개 가운데 일곱 개 이상을 차지해버리는 모습을 눈으로 목격하고 나면 학생들로서는 집중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죠.

이렇게 학생들의 이목을 잡아챈 후, 수업이 좀 지루해진다 싶으면 마이클 슈월비는 간단한 사례나 우화를 만들어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곤 했나봅니다. <야바위 게임>도 그렇게 구성되어 있으니까요. 덕분에 학생 뿐 아니라 번역자 역시 틈틈이 쉬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즐겁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순전히 '재미'로만 읽을 책은 아닙니다. 또한 저는 이 책의 내용에 백퍼센트 동의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불평등은 제도와 차별, 약탈로 인해 발생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술의 발전이나 새로운 지식과 가치의 창출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특히 갓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을 상대로, 주로 경제 영역에서의 불평등에 대해 읽을만한 책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현재로서는 <야바위 게임>보다 좋은 선택지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블로그에 소개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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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5

미세먼지 속에서 에너지 문제를 생각하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은 어두컴컴한 날에 과연 태양광이라고 제대로 돌아갈까? 미세먼지 농도가 높으면 높은 확률로 바람도 잠잠하게 마련인데, 풍력발전기가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나 있나? 당연히 원자력밖에 답이 없다. 대중들이 진실을 깨달아가자 뻔한 허위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분들이 아직도 너무 많다.

4세대 원전 상용화를 최대한 빨리 이룩하고 최고의 속도로 전 지구에 보급하여, 운송수단에 투입되는 화석연료까지 모두 원자력과 기타 비탄소에너지로 전환하지 않으면, 100년 후 인류의 미래는 심히 암담할 것이다.

지금까지 통용되는 기존 '환경주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UC 버클리 캠퍼스 같은 곳에서 노닥거리던 히피들이 그 골자를 짠 것이어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과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에 둔감하다. 사람이 얼어죽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바로 그곳이니 말이다. 배부른 놈들이 되는대로 지껄여놓은 한가한 소리들...

어릴 때 미국에서 만들어져 일본 건너온 환경주의 책 보고 여러 면에서 황당했다. '잔디밭에 스프링쿨러로 물을 뿌리지 맙시다', '소다 캔 식스팩을 사면 딸려오는 고리를 잘라서 버립시다' 등, 미국에서나 하는 낭비를 제3세계 한국인더러 하지 말라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한국에서 탈원전합시다 원전 하나 줄여요 웅앵웅 하는 소리에 혹하는 것도 대체로 중산층이거나 그 이상, 내지는 문화적 자산이 충분한 계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발등 찍는 정책도 듣기에 그럴싸하면 지지한다. 미국의 상위 10%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질문을 해야 한다. 집집마다 광활한 잔디밭이 딸려있고 거기에 스프링쿨러로 잔디밭에 물 뿌리는 놈들이 만든 '환경주의'를 21세기에 중국발 미세먼지 퍼마시는 한국인들이 왜 곧이곧대로 따라야 하냐고.

캘리포니아 사는 여러분은 모하비 사막을 태양광으로 싹 덮던 말던 알아서 하시고, 여기는 원전 깔아야 한다. 그래야 가난한 노인들이 얼어죽지 않고, 어린 아이들이 나이 들어서도 견딜만한 기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