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2

[노정태의 시사철]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노정태의 시사哲]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아무튼, 주말] 로버트 액설로드와 ‘협력의 진화'

일러스트=안병현
일러스트=안병현

“오늘 밤 여러분과 사회 실험을 해보겠다.” 강 위에 떠 있는 배 두 척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미치광이 악당 조커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한 척에는 선량한 시민들, 다른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두 배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기폭 장치는 상대방의 배에서 가지고 있다. 내 목숨이 상대의 판단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조커는 조건을 제시한다. 상대편 배를 먼저 폭파하는 쪽은 살려준다. 하지만 둘 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정을 넘긴다면 두 배 모두 폭파한다.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익이다. 아니, 살아남으려면 배신해야만 한다. “누가 먼저 누를까? 하비가 잡아들인 악질 범죄자들? 아니면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 잘 선택해. 빨리 결정하라고. 상대가 먼저 누르면 후회해도 늦으니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표작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이다. 2008년작이지만 ‘다크나이트‘는 여전히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탄탄한 줄거리를 통해 배트맨 시리즈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와 ‘사회적 신뢰’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이론의 고전적 문제 중 하나다. 중범죄를 저지른 두 공범이 취조실에 따로 붙잡혀 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버리면 중범죄로는 기소할 수 없고 경범죄로 2년형을 살게 된다. 둘 다 자백하면 각각 6년형이 예상된다. 경찰은 그들을 유혹한다. 네가 상대를 배신하면 너는 석방이고 자백하지 않은 상대는 10년형을 살게 된다고. 어떻게 해야 할까?

둘 다 입을 다물고 2년형을 받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통해 분석해보면 결과는 다르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건 나는 자백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자백했을 때 내가 받을 형량은 석방 혹은 징역 6년이 된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에 따라 징역 2년 혹은 10년이다. 징역 1년을 -1로 본다면 자백할 경우의 기대값은 -6인데, 자백하지 않으면 -12가 되는 것이다.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일단 자백을 해야 한다.

자백하는 것이 내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이 범죄자들은 언제나 자백한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면 징역 2년으로 끝났을 것을 징역 6년으로 늘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상대가 자백하여 징역 6년이 10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 위험을 뒤집어쓰느니 자백하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모두에게 차악의 결과를 낳는 상황, 그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다.

앞서 말한 ‘다크나이트‘의 장면은 엄밀히 말해 죄수의 딜레마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조커가 두 배를 모두 폭발시킬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쪽은 선량한 시민, 다른 쪽은 범죄자가 타고 있다고 하니, 한쪽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영화 속 시민들은 투표를 감행하여 396대 140으로 버튼을 누르자는 결정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나이트‘의 시민, 선원, 범죄자들은 기폭 장치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는다. 딜레마에 등장하는 두 죄수와 달리 서로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조커는 바로 그런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갈라놓은 후, 너는 착한 사람이고 저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니 남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속삭인다.

지난 8월 31일, 우리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현실에 강림한 모습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 게시물 덕분이었다. 코로나 현장에서 고생한 의료진의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며, 간호사들만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의료진을 갈라놓고 간호사를 앞세워 의사들을 공격하려 든 것이다.

팩트부터 확인하자. 6월 25일 현재, 방역 현장에 뛰어든 자원봉사자는 총 3819명. 그 중 의사는 1790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563명, 임상병리사 등 기타 인력은 466명이었다. 숫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수 아이유가 코로나 1차 파동 당시 의사협회에 방호복을 기부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권은 늘 이랬다. 국민을 반으로 나누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부동산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들 모두 공급을 늘리는 대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가르고, 임대인과 임차인을 나눈 후, 너희들은 나쁘다고 손가락질 하는 식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도 그렇다.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자연스럽게 전체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항의가 빗발치자 팔자 좋게 취직 준비하는 취준생과 고생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을 또 나눈다. 우리가 국민이 아닌 죄수인가. 대체 왜 이런 딜레마를 강요하는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로 믿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수학자, 생물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등이 모두 고민하던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미시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였다. 그는 ‘협력의 진화‘에서 신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게임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된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상대를 믿는다. 상대가 신뢰를 돌려주면 계속 신뢰한다. 하지만 배신하면 다시는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을 ‘팃포탯 전략’이라 하는데, 게임의 실행 횟수가 누적될수록 팃포탯 전략은 기회주의적 배신자의 입지를 좁히고 상호 협력을 낳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도록 기준을 잡고 관리하는 강력한 국가가 문명 발전의 필수 요소인 이유다.

대한민국은 고담시가 아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이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한 줌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공감 능력을 지닌 시민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자.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09/12/FUR77LEORREGTGR3X6FP5F6K7Q

2020-09-02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내 판단·생각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연애' 수작
부동산 정책도 공공의대도 정부가 하는 정신 조종 폭력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유명한 심리학 실험.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고백하면 승산이 높아진다. 안정된 곳에 있을 때와 달리 불안감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그 가슴 뛰는 것을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온 청춘 연애물에는 남자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깡패나 치한 흉내를 내게 한 후 자신이 그 악당을 쫓아내는 용사인 척 하다가 들켜 망신당하는 전개도 곧잘 등장했다. 불안하면 ‘내 편’을 찾고 쉽게 호감을 느끼며 의지하게 된다는 계산의 반영인 셈이다.

하지만 그딴 수작은 연애 시장에서 퇴출당한 지 오래다.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몰아가고,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며,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상대를 놀라게 하고 달래주는 것, 병 주고 약 주는 짓은 더 이상 연애의 기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정신 조종 폭력 행위인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연극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정착시킨 표현이다.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그 작품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정신적인 궁지로 몰아간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용어 자체는 이렇듯 학대당하는 여성에 대한 상담에서 비롯했지만, 가스라이팅의 범위는 남녀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사이의 따돌림, 직장이나 군대 등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등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할 수도 있다. 스물세 번인지 몇 번인지 수도 없이 갈아엎는 문재인표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정책 내놓았다가 분위기 안 좋으면 손바닥처럼 뒤집고, 특례에 예외에 유예 조치 따위를 허둥지둥 꺼내 든다. 이제는 공인중개사나 회계사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에 파악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국민은 처음에 문재인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그저 서툴러서 그렇거니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많은 장관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김현미 장관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며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불안과 혼돈은 문재인 정권의 선의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도 있구나. 국민이 부동산과 관련해 불안과 혼돈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선의’ 그 자체일 수도 있겠구나.

부동산 ‘패닉 바잉‘이 시작되고, 특히 30대 젊은이들이 ‘영끌’하여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시장을 믿어서가 아니다. 문재인을 믿지 못해서다. 집값이 안정적으로 오를 것이라는 신뢰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요동칠지 알 수 없다는 불신이, 국민의 발걸음을 부동산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패닉 바잉에 나선 젊은 실수요자들을 향해 ‘다주택자 매물을 영끌해서 받아준다니 안타깝다’고 비아냥댄 김현미 장관의 발언도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적 행동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의 모든 고위 인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지금이라도 서울, 그것도 강남의 아파트를 사야 한다. 그걸 따라 하는 청년들에게 국토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빈정거리고 비웃는다. 졸지에 수억원의 빚을 진 30대로서는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효과다. 내 판단과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긴 채 그저 복종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가재 붕어 게로 개천에 주저앉아, 저 위에서 선량한 손길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맥없이 기다리게 길들이는 것.

부동산 정책뿐일까? 정부는 코로나 2차 유행이라는 공포 속에서 공공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음서의대’를 만들어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사 면허를 주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코로나부터 잡자는데, 정부는 ‘전면 철회’라는 말을 절대 안 한다. 방역을 정치화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는 쪽은 의사가 아니라 정부다. 하지만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은 정부에 있다. 국민과 의사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겠다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군가가 ‘나쁜 연애’ 하듯이 정치를 하고 있다. 소위 ‘문빠’들은 악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문프’가 멋져보인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 가스라이팅을 중단하라.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0/09/02/XQP3MTNQNBG5XDPGNUCGK3HAO4/

2020-08-29

[노정태의 시사철]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르네 지라르와 ‘희생양 메커니즘’

[노정태의 시사철] 의사·기독교… 희생양 만들기는 멈추고 코로나와 싸워라
일러스트= 안병현

늦여름 주말을 위한 납량특집 코너. 1976년 미국, 이혼을 앞둔 부부가 자동차로 대륙 횡단 중이다.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에서 나와 국도로 접어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옥수수밭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10대 청소년. 차와 충돌했는데 자세히 보니 이미 목에 칼로 그어진 상처와 출혈로 죽기 직전이었다. 아내는 일단 시신을 싣고 대도시까지 가자고 하지만 남편은 사건을 신고해야 한다며 인근의 개틀린이라는 작은 도시로 향한다. 어색한 분위기에 라디오를 틀자 어떤 소년이 외치는 설교가 울려 퍼진다. "속죄! 오직 새끼 양의 피를 통해서만 우리가 용서를 받으리니!"

아내의 경고를 무시하고 개틀린 시내로 진입한 남편 버트는 섬뜩한 사실을 알게 된다. 1964년의 어느 날, 리처드 디건이라는 열여덟 살 소년이 몇몇 친구들과 함께 19세 이상의 모든 마을 사람을 다 죽였다. 인간이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옥수수가 죽어가고 있으므로 속죄의 제물로 인신공양을 해야 한다는 종교적 광신에 빠져든 것이다. 그는 본인도 19세가 된 날 옥수수밭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개틀린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지배하는 광기의 공간이 된 것이다. 버트와 아내 비키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공포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 '옥수수밭의 아이들'은 그의 수많은 작품 중 단연 손꼽히는 걸작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 고작 40여쪽에 지나지 않는 단편이지만 그 악몽과도 같은 여운은 실로 오래 남는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을 생생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프랑스가 낳은 인문학의 거장 르네 지라르가 드러낸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해 알아볼 때다.

사람은 모여 산다. 서로 모방한다. 그러나 인간의 군집 생활과 모방 본능이 좋은 방향으로만 발현되는 것은 아니다. 서로를 향한 폭력 역시 상호 모방과 경쟁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복수했고, 복수할 테니까, 우리도 복수한다. 이렇듯 서로를 모방하고 있는 한 폭력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는다. 때로는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이나 재난으로 인해 공동체가 충격에 빠져 방향을 잃기도 한다. 자칫하면 서로를 탓하며 자멸하는 길에 들어설 것이다.

여기서 원시적인 해법이 등장한다. '희생양'이다. 사회에 속하지 못하는 자, 배제된 자, 약자가 주로 희생양으로 지목된다. 희생양은 발언권이 없다. 따라서 만장일치로 폭력이 결정된다. 서로를 향하던 돌과 주먹이 오직 희생양 하나로만 쏠리게 하면 '공동체'는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퍼져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 보편적인 폭력의 근원인 셈이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그런 사례를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령 유대인 혐오는 나치 독일에서 정점에 이르렀지만 중세 시대부터 유럽에 만연해 있었다. 관동대지진이 벌어지자 공포와 분노에 휩싸인 일본인들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희생양으로 삼았다. 지금도 사람들은 늘 누군가를 따돌리고, 괴롭히며,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고 뭉친다. 학교, 직장, 군대처럼 모든 곳에서 크건 작건 늘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지라르의 통찰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희생양을 만든 자들, 희생제의를 벌인 자들은, 희생양을 성스러운 존재로 떠받든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을 '폭력과 성스러움'이라 한 것은 그래서이다. 희생양에게 집단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 도리어 그 희생양을 숭배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폭력과 광기를 직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혐오와 숭배는 하나다. 그 대상을 '우리'가 아닌 무언가로 만들어 '우리'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숭배와 혐오가 하나라는 것, 폭력과 성스러움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는 최근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의사들을 대하는 현 정권과 지지층의 태도 때문이다. 의료진 '덕분에' 코로나를 극복하고 있다며 배지 나눠주고 인증샷 릴레이 챌린지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의사들을 적폐로 몰아가느라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라. 심지어 아직 코로나 유행이 끝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전광훈 목사가 광화문에서 대규모 집회를 벌인 것을 현명한 행동이라 말할 수는 없다. '턱스크'를 쓰고 구급차를 탄 모습을 보며 나도 화가 났다. 심지어 '바이러스 테러 음모론'까지 퍼뜨리고 있으니 더더욱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어리석고, 반성할 줄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비호감이라 해도 정부의 희생양 만들기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임시공휴일을 만들고 온갖 할인 쿠폰을 뿌리며 외출과 소비를 부추긴 원죄는 분명 정부에 있으며, 감염의 위험을 늘린 것은 광화문 집회나 해운대 해수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희생제의로 불만을 잠재우는 원시 부족국가가 되었을까.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향한 청와대와 정부의 끝없는 찬양과 칭송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래서이다. 윤석열 검찰총장이나 최재형 감사원장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저들의 숭배는 공짜가 아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판단에 거스르는 발언이나 행동을 할 경우 순식간에 '양념'을 끼얹고 조리돌림 하겠다는 협박이 깔려 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청와대에 모여 앉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이 벌이는 끝없는 희생제의의 광기 속에 대한민국은 오늘도 곪아가고 있다. 일관성 없는 부동산 정책이 집값 폭등의 원인이건만, 이제는 청년과 평범한 주부들까지 투기꾼으로 몰아가는 추미애 법무장관의 발언을 보면, 내가 한국에 있는 건지 개틀린의 옥수수밭을 헤매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소설이 끝나도 우리의 공포 가득한 현실은 적어도 당분간은 끝나지 않을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다.

지라르의 철학에는 기독교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그는 ‘희생양’에서 우리가 예수라는 희생양을 통해 희생양 메커니즘의 폭력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지적인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 종교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배제하고 추방하며 얻는 가짜 평화가 아니라 포용하고 품어내는 진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녀사냥을 멈추고 과학의 힘으로 질병과 맞서야 할 때다. 합리와 이성과 믿음과 신뢰로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8/2020082803318.html

2020-08-27

[신동아] 386이 민주화 세대? 현대사 최고의 상징조작

일러두기: 이것은 인터넷과 지면에 실린 판본이 아닌, 편집부의 마지막 교정 이전 단계의 최종 원고입니다. 저는 현재 정치권의 주류를 '반미 세대'라 불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편집부는 최종적으로 '반미의 영향을 받은 세대'라는 표현을 택했습니다. 신동아와의 협의 하에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는 '원문'을 게시합니다.

지면에 올라온 글은 다음 주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156772/1


386이 민주화 세대? 현대사 최고의 상징조작

主流 1960년대 생의 동북공정 뺨치는 ‘민주공정’


●불현듯 얻은 ‘민주화 운동가’의 명예
●1987년 항쟁, 양김·언론·검찰·재야·시민 합작품
●학생만 시위? 도시 빈민도 경찰에 돌 던지며 싸워
●1995년 與, 필요에 의해 386에 민주화 훈장 달아줘
●70년대 운동권과 80년대 운동권 분기점 반미주의
●美로부터 해방? 87년 전두환 무력진압 막은 게 미국
●실제 기여한 만큼만 누리게 제몫 찾아줘야

*사바나 초원처럼 탁 트인 2030 놀이터. 밀레니얼 플레이풀 플랫폼.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 혹은 ‘주류 교체가 완성됐다.’ 이제는 너무 흔하게 들려오는 이야기다. 그러니 문장 속 단어를 하나씩 짚어가며 따져 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산업화 세대’란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은퇴 연령대에 이른 1차 베이비부머를 주로 지칭한다. ‘민주화 세대’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고 이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나이가 된 이른바 ‘386 세대’를 뜻한다.
 
대한민국 권력의 무게추가 1950년대 생에서 1960년대 생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말은 반박할 여지가 크지 않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주류가 교체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386 세대는 민주화 세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징조작’이자 ‘프로파간다(Propaganda) 행위’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화 세력으로의 포장


사람들은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에 대해 딱히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종의 정치적 관용구가 됐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듯 별다른 비판 없이 민주화 세대라는 용어가 사용됐을까. 기원은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대사회학 전문가인 박재홍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는 2006년 ‘교수신문’에 ‘先산업화 後민주화, 정치적 세대구분 옳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박 교수는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용어가 정착된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50∼60대 산업화 세대와 30∼40대 민주화 세대라는 표현의 기원은, 제15대 총선을 앞둔 1995년 말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영입대상 인사를 분류하는 과정에서 정계 원로 등의 안정 희구세력을 산업화 세력으로, 재야 운동을 하는 개혁 세력을 민주화 세력으로 포장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1995년 당시 신한국당이 민주화 세력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던 대상은 386 세대뿐만 아니라 재야 운동권 전반을 포괄했다. 물론 어찌됐든 당시 집권 여당이 386 세대에 민주화의 훈장을 달아줬다는 점은 분명하다.

1995년은 구소련이 붕괴하고 몇 년이 지난 뒤다. 북한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절이다. 한국에서는 왕년의 운동권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고 있던 무렵이기도 하다. 정작 이들은 변변히 내세울만한 경력이 없었다. 일부는 출판·영화·음악 등 문화의 영역에서 활동하며 크고 작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정치가 ‘소프트 파워’(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와 거리를 둬왔던 시절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학생 운동권에 대한 불신 섞인 눈빛도 여전히 존재했다. 386 세대가 사교육 시장에 적극 뛰어들어 돈을 벌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학생 운동권의 ‘장기(長技)’는 조직력이다. 김영삼의 신한국당은 386 세대를 ‘젊은 피’로 수혈키로 결정한 뒤 민주화 세력이라는 레토릭(rhetoric)을 활용하며 이미지를 세탁해줬다. 당시 집권당이 직접 나서서 민주화 세력(혹은 세대)이 완전무결하지는 않더라도 나름의 역사적 공헌이 있다고 포장해준 것이다. 바야흐로 일부 386 세대 인사들의 삶에 새로운 활로가 뚫렸다.

설령 신한국당의 간택을 받지 못했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김영삼이 386 세대 출신 운동권을 영입하자 평생 ‘빨갱이’라고 음해 받아왔던 김대중 역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는 1995년 7월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듬해 치러진 제15대 총선에서 김대중은 32세의 김민석(前 서울대 총학생회장)을 서울 영등포 을에 출마시켰다. 각각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송영길과 우상호 역시 1990년대 후반 김대중을 통해 정계에 입문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386 세대가 비로소 사회 주류로서 첫 걸음을 뗐다.

중국 동북공정에 견줄 ‘민주공정’


정리하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정치권은 30대 젊은 인물을 영입하려 했다. 당시 30대가 386 세대다. 이들 세대 사이에는 합법·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조직 활동을 해본 경험은 있으되 사회 진출에는 어려움을 겪던 고학력자 무리가 떠돌았다. 하지만 당장 정치권에 진출할만한 그럴듯한 경력이 전무했다. 이에 그들이 필요했던 주류 정치권은 앞장서서 386 세대 일부에 민주화 세대라는 훈장을 달아줬다.

실은 산업화 뿐 아니라 민주화에 끼친 1960년대 생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는 이승만의 독재에 맞서 중학생과 고등학생까지 돌 던지고 싸운 1960년, 혹은 박정희에 맞선 투쟁이 펼쳐진 1970년대까지 소급해 올라갈 수 있다. 1980년대에 386 세대가 대학생 신분으로 전두환의 신군부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그 긴 투쟁의 역사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기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세력의 크기나 당사자들이 겪은 고난의 비중을 보더라도 그렇다.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정치 거목은 의원직 박탈, 가택연금, 의문의 교통사고와 납치, 사형 선고 등을 겪으면서도 군부독재 종식을 향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양김을 따르는 가신 그룹, 즉 상도동계와 동교동계 역시 무수한 고초를 치렀지만 보스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했고 결국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데 기여했다.

그에 비하면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학생들이 민주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바는 그리 크지 않다. 물론 신군부가 볼 때 성가신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군부의 권력의 핵심을 위협할 만큼의 힘은 발휘하지 못했다. 학생 운동권은 권력을 갖기에 너무도 어렸다.

1987년 항쟁이 전개된 과정만을 놓고 보더라도 그 점은 분명하다.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라는 두 거대 기성 언론이 반기를 들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했다. 신군부는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검찰이 반발해 사건을 수면 위로 꺼내 정치 쟁점으로 승화시켰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저항적 기독교 세력, 이른바 ‘재야’의 원로들이 힘을 보탰다. 게다가 김영삼과 김대중 두 명의 지도자가 대안으로 존재했다. 국민 여론이 그 두 명을 통해 언제든지 정권 교체의 물결로 이어질 개연성이 컸다.

당시 대학생들이 아무것도 안 했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시위를 했고, 서울대생 박종철과 연세대생 이한열이 희생됐다. 그들의 죽음은 정권을 쓰러뜨릴 더 큰 시위의 기폭제가 됐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촉발 원인에 지나지 않았다. 기저에 깔린 동력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국민 사이에서 꾸준히 누적돼온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렇기에 서울에서 시위가 격화하자 이른바 ‘넥타이부대’가 정권에 반대하며 목청을 드높였다. 대학은 고사하고 중학교도 못 나왔을 도시의 기층 빈민들이 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싸웠다.

결국 신군부는 항복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약속했고 헌법은 개정됐다. 신군부가 권력을 몽땅 빼앗긴 건 아니지만 양김과 그 추종 세력인 상도동, 동교동계에 힘이 실렸다. 제6공화국은 개막과 함께 ‘3김 시대’(김영삼·김대중·김종필)로 전환됐다. 그러니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주체사상 문건을 달달 외우며 이 나라를 혁명적으로 들어 엎을 궁리나 하던 젊은이들의 힘으로 신군부가 쓰러졌다고 포장하는 건 명백한 역사 왜곡이다. 마치 중국의 동북공정에 비견할만한 ‘민주공정’이다.

1983년생이 월드컵 겪었다고 월드컵 신화 만들었나?


1987년 항쟁 무렵 대학에 다녔던 이들을 그럼에도 민주화 세대라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87년 정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87년의 대격변을 스스로 만들어낸 덕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2001년에 대학에 들어가 2002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 월드컵을 경험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다. 나는 2002년 월드컵의 분위기 속에서 청년기를 보냈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면에서 나를 월드컵 세대라 부르는 건 타당하다. 그러나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나 혹은 내 또래들이 만든 건 아니다. 월드컵에서 뛴 선수 중에는 내 또래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월드컵 자체는 분명 내 윗세대의 작품이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는 작은 부품이자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월드컵 세대와 달리 386 세대의 자의식이 매우 비대하다는 데 있다. 386 세대는 처음부터 주류의식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나라의 의사결정 및 여론을 자신들이 쥐락펴락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을 정치권에서 소환한 방식 자체가 그 세대의 비대한 자의식을 더욱 부추겼다. 학생운동 좀 하다가 야인으로 떠돌았는데 불현듯 ‘민주화 운동가’라는 명예를 얻게 됐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386 세대는 어떤 이름으로 호명돼야 마땅할까? 잠시 세대 문제를 연구한 최초의 사회학자 칼 만하임의 지혜를 빌리자. 만하임은 ‘세대 문제’에서 세대를 구분하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세대 위치. 이는 1980년대 생, 2000년대 생처럼 출생 시기에 따라 나누는 방식으로 가치 평가와 무관하다. 386 세대에는 80년대 학번이라는 범주가 덧붙지만, 기본적으로는 1960년대 생이라는 세대 위치가 그들을 개념화한 셈이다.

둘째, 실제 세대. 세대 위치가 사회적 요소에 따라 구분되는 것을 뜻한다. 가령 1929년생과 1924년생은 세대 위치상으로는 유사하지만 실제 세대는 확연히 구분된다. 1924년생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에 입대 연령인 스무 살이 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한 번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후 1950년 한국전쟁에서 또 입대 연령에 포함돼 두 번의 군 생활을 한, 지지리도 운 나쁜 ‘묻지 마라 갑자생’이다. 반면 1929년생은 입대 연령, 즉 성인이 됐을 때 이미 일제가 망했다. 태평양전쟁까지 몸소 겪을 일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제 부역 논란’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셋째, 세대 단위. 지역·소득·교육·기타 변수에 따라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을 묶는 개념이다. 386 세대라는 이름에서 80년대 학번에 방점을 찍으면 비슷한 시기 대학을 함께 다닌 경험을 강조하는 것으로, 세대 단위에 주목하는 셈이다. 같은 논리에 따라 민주화 세대라는 명칭은 세대 단위 안에서도 특정 집단을 다시 분류하는 개념이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이들 중, 열심히 학생운동을 했고 훗날 자신들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용어일 테니 말이다.

386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反美


만하임의 구분 방식을 고려할 때, 1980년 이후 학생운동을 했고 이를 정치적 자산 삼아 지금은 주류가 돼있는 세대 단위를 지칭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용어는 따로 있다. 그들은 민주화 세대가 아닌 ‘반미 세대’로 호명돼야 한다. 반미주의는 1970년대까지의 운동권과 1980년대 이후의 운동권을 가르는 가장 큰 분기점이다. 동시에 오늘날까지도 해당 세대 단위의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다.

그렇다면 반미 세대는 왜 반미주의에 경도됐을까.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해석 때문이다. 그들의 ‘공식적’인 미국관을 요약하면 이런 식이다.

‘광주 항쟁이 발생할 무렵 미국은 항공모함을 한국 쪽으로 보내고 있었고, 따라서 군사적으로 전두환 정권을 압박해 공수부대를 원천 차단하거나 진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광주의 비극을 방치했는데, 이는 어쩌면 방치를 넘어선 적극적 공모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전시작전권은 유엔사령부에 있고 결국 미군의 허락 없이 한국군은 움직일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주의 비극 배후에는 미국이 있고 우리는 1980년 현재까지도 미국의 식민지에 불과했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지금부터라도 우리 민족은 해방돼야 한다. 미국을 혼내주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독립해 진정한 민족국가를 되찾기 위해, 북한과 적극적으로 손잡거나 민중의 저항을 꾀하는 등 혁명을 모색해야 하며, 미국의 꼭두각시인 일본과는 더욱 철저하게 대립해야 한다.’

1980년 이전에는 진보가 반미주의를 당연시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친미 우파였던 장준하, 반공 진보 기독교 사상가였던 함석헌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기층 단위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임미리가 <경기동부>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 훗날 성남시로 승격하는 경기도 광주군에서는 1971년 8·10 사건 이후 빈민운동, 야학운동, 선교활동 등이 활발히 벌어졌다. 무리한 강제 이주의 폐해와 개발 및 보상 과정에서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명맥은 훗날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대신 광주민주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또 다른 광주’ 출신의 학생들이 나타나 ‘경기동부’의 모태가 되었다. “대학가에 퍼진 광주 학살 미국 책임론을 감안하면 그 뒤 성남의 청년·학생운동이 NL쪽으로 기운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물론 대학가의 반미 감정이 동일하지는 않았다. 특히 서울과 광주의 인식 차이가 컸다. 박찬수는 <NL 현대사>에서 “익명을 요청한 전남대 출신 인사의 말로는, 당시[1985년] 공동 투쟁을 준비하면서 서울과 광주 사이에 반미 구호의 수준과 미국문화원 타격 수위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세의 변화는 분명했다. 이듬해인 1986년 9월 8일 전남대 5·18 광장에서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 출범식이 열렸다. 이 조직은 훗날 PD로 진화하는 CA(제헌의회) 계열이 주도한 것이다. 하지만 “학생 수백 명은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면서도 ‘수입개방 강요하는 미제를 몰아내자’, ‘제헌의회 소집투쟁으로 미제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고, 사흘 후에는 같은 장소에서 ‘반미구국투쟁위원회(반미투)’가 출범했다.

운동 내부에 속한 이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복잡한 노선 투쟁이 있었겠으나, 외부자의 시각에서 볼 때 거대한 흐름의 변화는 분명해 보인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혹은 순수하게 군부와 시민의 대결만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대학가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주한미국대사관 한국과장을 역임한 전직 외교관 데이비드 스트라우브는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반미 세대의 탄생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979~1980년 사건들 이후 발생한 반미주의 내러티브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1987년에도 한국인들은 미국의 행동을 과거와 똑같은 렌즈를 통해 보고 있었다. 이 반미 내러티브는 계속 살아남았으며,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특히 소위 386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세대 사이에 남아 있다.”

그들은 민주화 된 대한민국 추구하지 않았다


설령 반미 세대의 반미 내러티브가 사실이라 해도 이후 현대사의 진행을 놓고 보면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1987년 민주화 과정에서 미국이 기여한 바를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반미 세대의 관점에서 현대사의 다양한 사건을 논하는 김형민(필명 산하)은 1987년 항쟁의 성공 이면에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순순히 인정한다. 진보 성향 인터넷매체 뉴스톱에 실린 ‘6월 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칼럼의 한 대목이다.

“그러나 역시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미국이지 싶다. 미국 CIA는 판세를 읽은 후 주한미군에서 탱크 5대를 지원받아 특전사, 수방사 등의 한국군 부대 정문 앞에 가서 고장이라도 난 듯 버티고 세워 놓았다고 한다. 즉 ‘나오지 마라’는 시위를 한 셈이었다. 하이라이트는 역시 주한 미국 대사 릴리였다. 그는 레이건의 친서를 전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무력을 동원하지 마십시오. 레이건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군대를 동원한다면 80년 광주에서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재발될 겁니다.’ 한 나라의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에게 할 소리 수준은 넘어 있었다. 릴리는 이 한 마디를 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군바리야. 정말 그러면 너도 죽어.’”

미국에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방관한 책임이 있다고, 즉 반미 세대의 생각에 어느 정도 타당한 구석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 해도 미국은 1987년 전두환의 무력 진압 시도를 가로막았다. 다시 말해 서울이 제2의 광주가 되지 않도록 기꺼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써 빚을 어느 정도 갚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김형민의 ‘역사 팩트체크’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한 번 새겨진 적개심과 증오는 뇌에 새겨진 문신과 같다. 사실과 논리를 아무리 부어서 박박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 그들은 반미 세대다. 반미주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상과 이념을 버리는 차원을 넘어선다. 자신의 젊은 시절, 그 청춘을 함께한 친구와 동료, 그들이 제공하는 편안한 인간관계와 따스한 추억을 모두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미는 한 세대의 레종 데트르(Raison D'etre), 즉 존재의 이유가 되고 말았다.

반미 세대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는 없는가?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미 세대가 곧 민주화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민주화된 대한민국을 추구하지 않았다. 과거 학생 운동권이었으나 현재 편의점주로 활동하고 있는 봉달호(필명)는 ‘신동아’ 7월호에서 정직하게 고백한다.

“반미, 종북이 본질이었던 우리 운동을 민주화 운동이라 부르는 것은 도둑질하려고 은행에 들어갔다가 우연찮게 은행 강도를 잡은 도둑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형국이랄까. 물론 강도를 잡은 것은 맞지만 원래 자신의 의도를 고백하지는 못하더라도 조용히 반성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역사 재평가와 제몫 찾아주기


그 ‘강도’를 반미 세대가 혼자 잡은 것도 아니다. 1987년 항쟁의 성공에는 김영삼·김대중이라는 불세출의 정치 지도자와 그들을 믿고 따르던 세력, 그리고 묵묵히 투표하고 시위에 참여한 다수의 시민들이 있었다. 또 1980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내정 간섭 논란의 여지를 무릅쓰고 신군부를 억누른 미국의 역할 또한 재평가돼야 한다.

다시 말해 자칭 민주화 세대의 역사적 공헌과 위상은 과대평가됐다. 물론 그들의 역할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반미 세대라는 올바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민주화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적 성취는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의 것이다. 민주화 세대는 없다. 다만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반미 세대가 있을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기여한 바에 걸맞도록 제 몫을 찾아주어야 마땅하다.

약력
●1983년 출생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2020-08-23

[신동아] 음모론·막무가내 논법에도 유시민·김어준이 권력인 이유

 

음모론·막무가내 논법에도 유시민·김어준이 권력인 이유

‘말의 권력’ 쟁취한 재야논객 [2020 新주류 대해부④]

  •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입력
2020-08-23 10:00:01
 
 
  • ● 오류에 아랑곳 않는 ‘김어준 추종자’
    ● 막무가내 토론 불사 유시민에 호감 갖는 청년
    ● 진보·논객 캐릭터까지 친근하게 ‘포장’해 제공
    ● 운동권 학습서적 권하는 동아리 선배 캐릭터
    ●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인생 전반 해답 제공
    ● 보수 논객은 전문가 아니면 저격수
    ● 인생 선배, 친구로서의 호감 못 줘
    ● 지엽말단적인 ‘팩트’에 매몰, 유튜브 중독
방송인 김어준(52) 씨(왼쪽)와 유시민(61) 전 장관은 명실상부한 ‘말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뉴스1]

방송인 김어준(52) 씨(왼쪽)와 유시민(61) 전 장관은 명실상부한 ‘말의 권력’으로 자리매김했다. [뉴스1]

제21대 총선의 여파가 채 가라앉지 않은 5월 11일. 총선 불출마로 국회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된 김무성 당시 미래통합당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진 참았는데 앞으론 싸우려고 그래. 나쁜 놈들이야.” 수십만에서 백만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보수 유튜버들을 겨냥한 말이었다. 그는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가 엄청나게 큰 사이즈인 줄 알았는데 투표해 보니까 아니라는 증명이 돼버렸다. 보수 유튜버들은 조회수 올려 돈 벌어먹기 위해 자극적인 말을 쏟아낸다”고 했다. 

바꿔 말하면 그간 김무성과 통합당은 보수 유튜버,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에 모종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뜻이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보수 유튜버 사이에서나 떠돌던 세월호 유족에 대한 낭설을 차명진 전 의원은 기어이 입에 담았다. 여의도연구원에 따르면 그 결과 수도권 경합 지역에서 후보 10여 명의 당락이 갈렸다. 보수 유튜버의 세계관은 오프라인, 현실 세계, 진짜 정치의 영역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있는 표도 떨구고 말았다.

김어준은 누구인가

보수 진영에 속하는 이들은 큰 의문을 품을 법하다. 분명 자신들은 ‘김어준 모델’을 모방하고 있는데 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그 이전 웹진 ‘딴지일보’를 통해 방송인 김어준(52) 씨가 한 여론 플레이가 바로 그런 것인데 말이다. 

뉴미디어를 활용해 노골적으로 천박하고 화끈하게 편파적인 내용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음모론을 거리낌 없이 유포하면서 틈틈이 펀딩도 받는 비즈니스 모델. 김어준은 그런 식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왜 보수는 안 된단 말인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김씨와 유시민(61) 전 장관 더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의 진보 논객들이 오늘날 담론 시장의 주류가 된 이유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일찌감치 인터넷과 팟캐스트 등 뉴미디어에 발을 담그고 수요를 창출해 온 게 성공 요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김어준 모델’을 극복하려면 김어준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어준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계획대로라면 서울대 87학번이 됐어야 마땅했다. 그랬다면 1학년 1학기에 1987년 민주항쟁을 경험한 386세대 끝물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89학번으로 홍익대에 들어갔다. 대학 생활에서도 겉돌았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989년 1월 1일부로 해외여행이 자유화됐다. 홍대 89학번 김어준의 인생은 평행우주 속 서울대 87학번 김어준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구시대의 막내에서 새 시대의 맏이로. 

1989년 직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어준이 ‘딴지일보’를 만든 1998년에도 해외여행은 희귀한 경험이었다. 모두가 코스모폴리탄의 로망을 꿈꾸던 시절이었다. ‘딴지일보’의 성공은 바로 그런 로망에 터를 잡고 있었다. 비속어를 쓰며 시시껄렁한 풍자를 하는 농담 사이트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것은 포장지에 불과했다. ‘딴지일보’는 비속어 섞인 농담을 스스럼없이 던지는 ‘쿨’한 코스모폴리탄이 되고픈 판타지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곳이었다. 

김어준은 ‘딴지일보’ 총수라는 직함을 달고는 이회창, 노무현, 박근혜 등 당시 쟁쟁한 정치인들을 불러놓고 ‘삼각팬티를 입느냐 사각 팬티를 입느냐’ ‘UFO를 믿느냐’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개그 풍자 사이트여서 할 수 있을 법한 질문 같지만, 당시 정치 뉴스 독자층 특히 고학력층이 목말라했던 탈권위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대변한 것이기도 했다. ‘딴지일보’에 실리는 다른 글도 마찬가지였다. 비속어를 섞고 합성 ‘짤방’을 곁들였지만 바탕에는 진지한 교양주의와 서구적 상식에 대한 동경이 깔려 있었다. 

김어준이 경력 초기부터 개인주의자, 국제주의자, ‘쿨’한 남자의 이미지를 쌓아나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황우석 사태를 거치고 심형래의 영화 ‘디워’를 옹호하면서 자산을 모두 깎아먹은 듯했지만 경력 초기에 쌓아둔 상징자본이 워낙 확고했다. 그는 이내 ‘한겨레’에 연애 상담 칼럼을 쓰면서 내상을 회복했고, ‘황빠’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세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인 2011년 ‘나는 꼼수다’를 내놓으며 오늘날의 김어준이 됐다.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정치적 말싸움

유시민 전 장관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월 1일 경기 고양시 일산 JTBC 스튜디오에서 열린 JTBC 신년특집 토론회에서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JTBC 캡쳐]

유시민 전 장관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1월 1일 경기 고양시 일산 JTBC 스튜디오에서 열린 JTBC 신년특집 토론회에서 ‘한국 언론, 어디에 서 있나’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JTBC 캡쳐]

열혈 추종자들에게 김어준은 단지 재미있는 음모론과 정치썰을 공급해주는 그저 그런 라디오 진행자가 아니다. 나와 달리 인생 시원하고 재미있게 사는 ‘부러운 형님’이다. 보수 유권자나 청취자들에게 보수 유튜버가 갖는 의미가 아무리 각별하다 한들, 김어준의 돈독한 팬덤이 그에게 품고 있는 내적 친밀감을 따라올 수는 없다. 팬에게 김어준이란 ‘쿨한 삶’ ‘쫄지 않는 삶’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표상하는 일종의 우상이다. 

그런 ‘간증’은 지금도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렵잖게 접할 수 있다. 적잖은 팬은 그가 종종 터무니없는 음모론을 쏟아내고 모금 활동을 한 후 돈 관리가 투명하지 않다는 소문이 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동원해 정치적 말싸움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어준을 지지한다. ‘쫄지마, 씨바’를 외치며 저항하는 나, 그런 자아상을 투영할 대상인 김어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팟캐스트는 진보의 놀이터가 됐으니 유튜브를 선점해 자극적 콘텐츠를 쏟아내면 보수도 제2의 김어준을 배출할 수 있다’는 발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보수에는 그런 배경 혹은 스토리를 가진 논객이 현재 전무하니 말이다. 

김어준의 팬들은 김어준 혹은 그가 막무가내로 옹호하는 문재인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정치인에게 자아를 투영한다. 사소한 오류가 발생하는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 플랜’을 찍겠다며 20억 원을 모금해 놓고 그 액수에 미치지 못하는 품질의 영화를 내놓아도 너그럽게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소비자’가 아닌 ‘추종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형성돼 있는 인물은 김어준만이 아니다. 유시민은 10~20대 무렵부터 그의 책을 읽고 자란 이들에게 포승줄에 묶여도 환하게 웃는 ‘항소이유서’의 저자다. 군사정권의 폭압에 무릎 꿇지 않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다. 동시에 유시민은 다방면에 (얕지만)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작가, 즉 자유로운 지식인이기도 하다. 모든 직장인이 한 번쯤 꿈꾸게 마련인 로열티(지적재산권)로 먹고사는 사람이다. 공적인 영역뿐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서도 롤 모델로서 동경할 만하지 않은가? 

보수 진영에서 정치 담론이 유통되는 방식과 진보 진영의 그것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가 여기 있다. 내용의 차이보다 어쩌면 더 본질적이다. 적어도 2000년 이후의 상황만을 놓고 보자면 그렇다. 진보는 담론을 제공하는 논객의 캐릭터까지 독자와 청취자에게 친근하게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신혜식의 차이

주진우 당시 시사IN 기자(가운데)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김용민 시사평론가(왼쪽), 정봉주 전 의원과 함께 2013년 5월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주진우 당시 시사IN 기자(가운데)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김용민 시사평론가(왼쪽), 정봉주 전 의원과 함께 2013년 5월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전영한 동아일보 기자]

김어준과 유시민 외에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B급 좌파’ 김규항 등 이른바 ‘안티조선’의 유명 논객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안티조선 운동의 열기가 사그라지고 나꼼수의 시대가 왔을 때에도 방식은 똑같이 유지됐다. ‘악마 기자’ 주진우, ‘목사 아들 돼지’ 김용민, ‘봉도사’ 정봉주 등의 닉네임을 붙이고 캐릭터를 잡았다. 그중 누구도 ‘총수’ 김어준의 캐릭터와 팬덤을 능가하지 못했지만 작동 원리는 동일했다.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앞서 메신저와 친해지게 하는 식이다. 마치 운동권 학습 서적을 권하는 동아리 선배처럼 말이다. 

반면 보수 쪽에서 정치를 논하는 사람은 두 부류, 전문가 아니면 저격수다. 전문가란 말 그대로 특정 분야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저격수란 상대편의 결점을 파악하고 퍼뜨리는 활동 등에 특화돼 있는 이를 일컫는 말이다. 

물론 진보 논객들도 각자 상황에 따라 전문가 혹은 저격수로 역할을 나눈다. 가령 경제 논객 우석훈의 경우 다양한 사안에 경제학적 해석을 달며 전문가로서 발언한다. 김어준과 나꼼수가 ‘MB 저격수’로 이름을 날린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문제는 보수 논객들이 전문가 혹은 저격수 외에 다른 캐릭터를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개별 논객마다 나름의 성격이 있고 주로 맡는 분야가 있지만, 진보 논객처럼 하나의 완성된 캐릭터를 형성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에게 진보 논객처럼 ‘똑똑하고 좋은 선배’로 받아들여진 보수 논객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가령, 유시민의 책을 즐겨 읽고 그의 유튜브 방송도 즐겨 보는 팬이 있다고 하자. 그 팬은 유시민이 기회만 준다면 본인에게 어떤 고민이 있는지, 어떤 여자나 남자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따위 고민도 서슴없이 털어놓고 상담하려 들 것이다. 유시민을 단지 정치 논객이 아닌 일종의 인생 선배로 바라보고 동경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보수 진영에서 그에 준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조갑제TV’를 열심히 보는 애청자가 조갑제 씨와 개인사를 나누고 싶어 할까? ‘신의 한수’의 100만 명 넘는 구독자 중 신혜식 씨에게 자아를 투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로세로연구소’ 강용석 변호사에게 연애 상담을 받고 싶은 팬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야 없겠지만, 쉽사리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가?

진보 논객 특유의 교양주의

즉 보수 논객의 소비자는 보수 논객을 인생의 선배로, 친구로, 모범으로 여기지 않는다. 반면 진보 논객의 소비자는 바로 그런 시각으로 논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일까? 

앞서 우리는 김어준의 인생을 다소 길게 다루면서 이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흔히 정치 논객으로 불리는 그들은 사실 정치 논객에만 머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팬들은 여전히 그를 ‘쿨’하게 사는 자유인이라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역사, 서평, 여행기 등 세상 모든 일에 대해 다 책을 쓴 ‘걸어 다니는 잡학사전’이다.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의 투사 홍세화는 그 이름도 우아한 ‘파리의 택시운전사’였고, 진중권은 예나 지금이나 명료한 이성적 개인주의의 화신과도 같다. 

중요한 건 개별 진보 논객에게 부여된 캐릭터가 무어냐가 아니다. 그런 캐릭터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속성이 무어냐 하는 점이다. 그들 사이에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입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공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서구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각자의 삶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예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인생 모델은 범(汎)진보 진영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와 부합한다. 가령 유시민은 자신이 아내와 다소 머쓱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침대에 누워서 독일어로 대화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이런 것이다. 보수 진영과 싸울 때에는 종종 앞뒤가 안 맞는 막무가내 토론도 불사하지만, 가장 신뢰하는 파트너인 부인과는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는 남자. 그런데 서로 한국어로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주제는 독일어로 이야기하는 지식인 커플. 청년층으로서는 즉각적인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보수 논객들에게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듣는 건 쉽지 않다. 보수 논객들에게 말하자면 ‘예능감’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원인은 더 근본적인 데서 찾을 수 있다. 진보 진영 특유의 교양주의가 보수에 결여돼 있을 뿐 아니라 보수가 전제하는 사회적 규범이 이미 시대에 뒤떨어져서다. 

386세대가 주축인 진보 논객들은 어쨌건 나름대로 시대 변화에 발맞춰 현대적인 연애, 가족, 인생관을 체화했거나 적어도 그런 척이라도 하기 위해 노력했다. 반면 보수 논객들은 그렇지 않다. 고령층은 미시적 규범 변화를 불편해하며 아예 언급조차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젊은 층은 여성주의 등을 껄끄러워하거나 심지어 적개심을 품고 있다. 청년층, 특히 젊은 여성들로서는 설령 본인의 정치적 지향이 보수에 더 가깝다 해도 보수 논객들에게 호감을 느끼기가 매우 어렵다.

온갖 파편적 ‘팩트’에 매몰된 보수 논객

보수는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를 넘어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넓은 정치에서의 의제 싸움에 실패하고 있다. 진보 논객들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를 찍어야 할지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답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위선적 가식에 불과할지라도 ‘페미니즘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것’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것’ ‘난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호의를 베풀 것’ 등을 말이다. 

그러나 보수 논객들로부터는 이와 같은 긍정적(positive)인 행동의 규범을 얻기가 어렵다. ‘꼴페미’를 욕하는 보수 논객은 많다. 그렇지만 상당수 여성이 페미니즘적인 각성을 해버린 이 시점에 대체 여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할지 실마리 비슷한 거라도 제공해 주는 보수 논객은 사실상 없다. 조선족이 국민의 일자리를 다 빼앗아가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혐오 선동을 하는 보수 논객은 많다. 정작 이미 국민이 된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보수 논객에게서 찾기는 어렵다. 

비유하자면 진보 논객들은 종합 라이프스타일 잡지처럼 인생 전반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한다. 또는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보수 논객 특히 유튜버들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박근혜’라든지, ‘문재인이 감춰놓은 금괴와 공산화의 음모’라든지 ‘우한의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코로나바이러스가 미·중전쟁의 도화선이 될 거’라는 따위의 정치적 사안에 파편적으로 매몰돼 있을 뿐이다. 논객들이 제공하는 ‘이 정도 지식’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 세상사에 나름대로 일관된 태도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지엽말단적인 요소로 치부되기 딱 좋은 온갖 ‘팩트’를 들이대며 진보 논객들을 비웃는 행위 정도가 보수의 한계다. 

보수는 여전히 더 수준 높은 다수의 전문가를 우군으로 보유하고 있다. 여차하면 팔 걷어붙이고 나설 저격수를 찾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보수가 정치 담론에서 열세를 극복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진보는 무엇을 먹어야 할지(꼭 채식주의를 택할 필요는 없지만 동물 학대에 신경을 쓴다), 남성의 경우 이성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할지(대단한 페미니스트가 되지는 못해도 여성의 말에 귀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한다), 날로 다양해지는 국내 인종 구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최대한 관용한다)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일종의 ‘레디 메이드’ 답변을 내놓는다. 패키지 상품을 제공하는 쪽에 소비자의 손이 더 가는 건 당연하다. 심지어 그 묶음 할인 속에는 ‘더불어민주당과 문재인을 지지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반대로 보수는 인생 전반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정치적 갈등에 대해 그럴듯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내로남불’처럼 상대의 흠집을 잡는 볼멘소리를 하는 데 그치고 만다. 2020년에 걸맞은 총체적인 세계관과 철학을 구성하지 못한 채 매번 떠오르는 사안마다 최대한 자극적인 반응을 내놓으며 ‘사이다’에 탐닉하고 있다. 중심 철학이 없고 그에 입각한 판단과 행위 지침도 없으니 선거를 앞두고 사분오열해 자기들끼리 ‘저격’이나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승리하는 정치세력의 윤리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 속에서 윤리학은 정치학과 하나의 세트를 이룬다. 좋은 삶을 탐구하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그 좋은 삶을 국가적인 단위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중독된 보수는 ‘팩트’를 들이대며 ‘내로남불’을 조롱하면 선거에서 거저 이길 수 있으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국민의 판단은 냉혹했다. 새로운 윤리적 지평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패륜적 발언과 행위를 저지르는 집단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던 거다. 

도덕과 명분을 앞세운 정치는 현대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정치는 함께하는 윤리고 윤리는 좁은 관계 속의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승리하는 정치세력이 되고자 한다면 오늘날의 눈높이에 맞는 윤리관으로 무장하고 이를 스스로 체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등




신동아 2020년 9월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