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시사哲] 악당 조커의 ‘갈라치기’는 왜 실패했나
[아무튼, 주말] 로버트 액설로드와 ‘협력의 진화'
“오늘 밤 여러분과 사회 실험을 해보겠다.” 강 위에 떠 있는 배 두 척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미치광이 악당 조커의 함정에 빠져든 것이다. 한 척에는 선량한 시민들, 다른 배에는 범죄자들이 타고 피난길에 올랐다. 두 배에는 엄청난 양의 폭탄이 실려 있다. 그리고 기폭 장치는 상대방의 배에서 가지고 있다. 내 목숨이 상대의 판단에 달려 있는 상황이다.
현재 시각 11시 40분. 조커는 조건을 제시한다. 상대편 배를 먼저 폭파하는 쪽은 살려준다. 하지만 둘 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자정을 넘긴다면 두 배 모두 폭파한다.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익이다. 아니, 살아남으려면 배신해야만 한다. “누가 먼저 누를까? 하비가 잡아들인 악질 범죄자들? 아니면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 잘 선택해. 빨리 결정하라고. 상대가 먼저 누르면 후회해도 늦으니까.”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대표작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이다. 2008년작이지만 ‘다크나이트‘는 여전히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압도적인 영상미와 탄탄한 줄거리를 통해 배트맨 시리즈를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시에 ‘죄수의 딜레마’와 ‘사회적 신뢰’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게임이론의 고전적 문제 중 하나다. 중범죄를 저지른 두 공범이 취조실에 따로 붙잡혀 있다.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어버리면 중범죄로는 기소할 수 없고 경범죄로 2년형을 살게 된다. 둘 다 자백하면 각각 6년형이 예상된다. 경찰은 그들을 유혹한다. 네가 상대를 배신하면 너는 석방이고 자백하지 않은 상대는 10년형을 살게 된다고. 어떻게 해야 할까?
둘 다 입을 다물고 2년형을 받는 게 최선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이론을 통해 분석해보면 결과는 다르다. 상대가 어떤 선택을 하건 나는 자백해야 한다. 내 입장에서 보면 자백했을 때 내가 받을 형량은 석방 혹은 징역 6년이 된다. 반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에 따라 징역 2년 혹은 10년이다. 징역 1년을 -1로 본다면 자백할 경우의 기대값은 -6인데, 자백하지 않으면 -12가 되는 것이다. 손해를 최소화하려면 일단 자백을 해야 한다.
자백하는 것이 내게 합리적인 선택이라면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선택이다. 따라서 이 범죄자들은 언제나 자백한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면 징역 2년으로 끝났을 것을 징역 6년으로 늘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상대가 자백하여 징역 6년이 10년으로 늘어날 수 있다. 그 위험을 뒤집어쓰느니 자백하는 게 낫다. 개인적으로 최선의 선택을 하면 모두에게 차악의 결과를 낳는 상황, 그것이 바로 죄수의 딜레마이다.
앞서 말한 ‘다크나이트‘의 장면은 엄밀히 말해 죄수의 딜레마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가만히 있으면 조커가 두 배를 모두 폭발시킬 테니 말이다. 다시 말해 협력으로 얻을 수 있는 상호 이익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한쪽은 선량한 시민, 다른 쪽은 범죄자가 타고 있다고 하니, 한쪽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불가능하지 않다. 영화 속 시민들은 투표를 감행하여 396대 140으로 버튼을 누르자는 결정까지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크나이트‘의 시민, 선원, 범죄자들은 기폭 장치를 창밖으로 던져버리거나 다시 상자 안에 집어넣는다. 딜레마에 등장하는 두 죄수와 달리 서로에 대한, 혹은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조커는 바로 그런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사람들을 갈라놓은 후, 너는 착한 사람이고 저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그러니 남을 희생시켜도 된다고 속삭인다.
지난 8월 31일, 우리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현실에 강림한 모습을 목격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페이스북 게시물 덕분이었다. 코로나 현장에서 고생한 의료진의 “대부분이 간호사들이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며, 간호사들만을 향해 미소를 던지는 내용이었다. “코로나19와 장시간 사투를 벌이며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장기간 파업하는 의사들의 짐까지 떠맡아야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시겠습니까?” 의료진을 갈라놓고 간호사를 앞세워 의사들을 공격하려 든 것이다.
팩트부터 확인하자. 6월 25일 현재, 방역 현장에 뛰어든 자원봉사자는 총 3819명. 그 중 의사는 1790명, 간호사와 간호조무사는 1563명, 임상병리사 등 기타 인력은 466명이었다. 숫자부터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수 아이유가 코로나 1차 파동 당시 의사협회에 방호복을 기부했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문재인 정권은 늘 이랬다. 국민을 반으로 나누고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물었다. 부동산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들 모두 공급을 늘리는 대신 다주택자와 1주택자를 가르고, 임대인과 임차인을 나눈 후, 너희들은 나쁘다고 손가락질 하는 식이었다. 청년 실업 문제도 그렇다.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자연스럽게 전체 고용을 늘리지 않는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고, 항의가 빗발치자 팔자 좋게 취직 준비하는 취준생과 고생하는 비정규직 청년들을 또 나눈다. 우리가 국민이 아닌 죄수인가. 대체 왜 이런 딜레마를 강요하는가.
죄수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서로 믿는 것이다. 문제는 그 신뢰를 확보하는 방법이다. 수학자, 생물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등이 모두 고민하던 문제에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 건 미시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인 로버트 액설로드였다. 그는 ‘협력의 진화‘에서 신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임이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반복된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상대를 믿는다. 상대가 신뢰를 돌려주면 계속 신뢰한다. 하지만 배신하면 다시는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을 ‘팃포탯 전략’이라 하는데, 게임의 실행 횟수가 누적될수록 팃포탯 전략은 기회주의적 배신자의 입지를 좁히고 상호 협력을 낳는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도록 기준을 잡고 관리하는 강력한 국가가 문명 발전의 필수 요소인 이유다.
대한민국은 고담시가 아니다. 우리는 죄수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이다. 수퍼히어로가 아닌 한 줌의 양심과 상식, 그리고 공감 능력을 지닌 시민의 힘으로 이 세상을 바꿔나가자.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09/12/FUR77LEORREGTGR3X6FP5F6K7Q
"원래 배신당하는 사람보다 믿는 일을 단념하는 사람이 많은 법이야. 믿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근성이 아니면 안 되어서 지치기 마련이야. 위험부담도 크고. 그래서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지면 사람을 어중간하게밖에 믿지 않게 돼."
답글삭제- 게임 『夜明け前より瑠璃色な』中
서로 일련의 신뢰가 쌓인 상황에서 서로를 믿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믿는' 것보다 곱절은 어려운 게 '먼저 믿는' 것입니다.
이번 정권도 그렇지만 '공정한 게임의 룰을 지키도록 기준을 잡고 관리'해야 할 자들이 제 역할을 못 한 지 참으로 오래 되었고, 그렇게 시민끼리의 불신이 누적되고 누적되어 나온 게 헬조선 담론입니다.
'믿었다가 당한 놈도 자업자득'이란 말을 은연 중에 동의하고, 주변 등쳐먹고 아랫사람 갈아대며 부를 쌓은 졸부들을 보며 '한국에서 돈 벌려면 저래야지 암' 하며 반쯤 자조적인 냉소를 날리는, 양심과 상식을 '가진 자의 교양'으로 생각하는 시민 공동체에선 신뢰가 싹트기 힘듭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남 탓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니, 시민 스스로 싼 똥은 시민이 치우는 수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