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8-09

My Fair Lady

7월 28일 보고 온 영화에 대한 평을 지금 쓰는 이유는, 마감도 마감이거니와 그동안 머리에 뽕 맞은 것처럼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가 상영중이라는 사실을 두고 '디 워'에 대한 논쟁으로 떠들썩한 세상은 과연 어찌된 곳인가, 이런 식의 택도 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지금 더 말할 건 아니다. 아무튼 지금까지도 머리가 머엉 하다. CG를 이렇게 저렇게 처발랐네 하면서 마치 CG가 헐리우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너무도 우습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꽃시장 장면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시각적 스펙터클이지, 무슨 욕 같은 이름의 도마뱀들이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그런 것은 애초에 영화의 긴 역사에서 한 방울의 잉크도 잡아먹지 못하는, 시시하다 못해 그래요 니들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훌륭한 거겠죠, 이런 정도라는 것을 왜 다들 모르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스크린에서 햅번을 보고 나는 맛이 갔다. 이 영화가 놀랍게도, 현대 한국 멜로가 지향하는 바와는 완전히 다르게, 두 사람 사이의 계급적인 갈등은 그대로 보존한 상태에서 부모라는 제2의 변수를 독특한 방식으로 완전히 치워버렸다는 것을 알고 나니 더욱 그랬다. 일라이자의 아버지는 히긴스 교수의 추천을 받으면서 50파운드를 챙긴 이후 소식이 없는데, 알고 보니 그로 인해 '운 좋게도'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일라이자가 찾아가니 아버지는 결혼 전야여서 딸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이것은 딸내미가 경마장에서 '아버지에게는 럼주가 모유나 마찬가지였죠'라고 말한 바로 그 노동계급의 행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어느 정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다. 딸을 버리는 게 그렇다는 게 아니라, 워낙 지저분한 상태에서 척박하게 살고 있다 보니 그에 맞는 행동의 방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노동계급으로 살아가던 일라이자가 꽃 한 송이만 팔아달라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 꽃 값을 물어내라고 떼떼거릴 때, 그것마저 예쁘게 보였다면 그 사람은 가난한 여자가 들이대는 한국 드라마의 맥락에 너무 함몰된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내가 최근에 봤던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적나라하게 계급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 이딴 건 솔직히 아무래도 좋다. 까먹기 싫으니까 적어놓은 것 뿐이고, 사실 핵심은 요새, 머리에 뽕 맞은 것처럼 자꾸 이 영화의 노래 컷만 반복해 보고 있어서 그럴 바에야 차라리 블로그에 글을 쓰는 편이 낫겠다고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정말 제 정신이 아니었다.




햅번이 직접 부른 노래. 고난이도의 곡을 소화하기에는 다소 무리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음색이 너무 곱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 노래에서만큼은 너무도 잘 어울릴 뿐더러 사랑스럽고, 자신이 연기를 해서 그런지 정서까지 제대로 담아내고 있다. 마차를 이용한 액션 구성이, 어렸을 때 한 번 봤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인상적이었던 장면.




이 영화를 하도 어렸을 때 봐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기서 활용되는 어구를 발음 교정 교재에서 먼저 알고 있었다고 느끼게 된 경우. 아무튼 이 곡은 그 자체가 좋고 여기서 환희에 가득찬 햅번이 너무도 사랑스러울 뿐 아니라, 노래와는 약간 동떨어지게 '하하'라고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쏙 박히는 클립이다. 일라이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다른 계층의 세계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폭 자빠진 다음 하는 모습을 보고도 가슴이 뛰지 않으면 그건 남자, 아니 사람도 아니다. 지금 와서는 'Wouln't it be lovely'가 더 유명하지만, 이 뮤지컬이 처음 상연되었을 당시에는 이 곡이 최고의 히트작이었고 그것은 작곡가가 의도한 바와 같았다. 타자를 치느라 이 화면만 보고 있음에도 햅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 다 떠오른다. 조심조심 사랑의 감정을 만지는 여자아이의 얼굴과 행동이 그런 거겠지.




사실 노래를 하기 전에 말다툼하는 장면이 일품인데, 그건 클립이 없다. '나한테 배운 걸 나한테 써먹지 마!'라고 발끈하는 히긴스 교수의 대사와 표정이 아주 귀여운데. 히긴스 교수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 때 '문명화' 되었지만 다소 넘치는 태도로 환영하던 햅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여자가 노래를 끝낼 때가 되자 화급하게 막아버리는 히긴스 교수의 행태는 덤으로 봐주도록 하자.


조금 늦어서 허겁지겁 평을 쓰고 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렇기도 하다. 아무튼,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은 '변신소녀물'이 무엇인지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기도 하다. 햅번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내 입에서 감탄이 나오지 않은 적이 없다. 경마장에서 '이 이상 대체 뭐가 있다고!'라며 절규했지만, 무도회 이후 히긴스 교수의 집으로 돌아올 때 입었던 드레스는 무도회의 그것보다 훨씬 우아하다. 용도가 달라서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아무튼, 처음 히긴스 교수를 찾아갈 때 입었던 옷이 설정보다 너무 덜 튀고 덜 예쁘지 않았다는 것 정도가 문제랄까. 목소리가 뮤지컬에 적합하지 않아 더빙을 강요당했던 것만 제하고 본다면 햅번은 너무 예쁘고 훌륭했다.

댓글 3개:

  1. 무슨 영화일까 궁금했는데, 옛날 그 영화네요+_+ 저희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도 없고, 어디 스크린에서 틀어준다면 좋겠는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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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스크린에서 했었어요. 전 그 기회를 잡아서 보고야 말았죠. 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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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너의 블로그는 요새 심하게 문화적이구나.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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