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3

2008년 1월 22일

서울북인스티튜트에서 진행하는 '편집, 디자인, 마케터를 위한 출판 제작 과정'의 제2강을 들었다. FP 한국어판은 단행본 출간을 기획하고 있는데, 어차피 인력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이므로 나는 그 업무도 총괄하게 된다. 편집장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자면 출판 제작 과정을 익히는 것은 필수적이다. (주)포린폴리시코리아의 최환서 사장은 내가 이러저러한 매체의 제작에도 관여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그러고 싶지 않다는 뜻을 내 나름대로는 완곡하게 전달했다. 나는 제작 과정을 꿰고 있는 편집장이고 싶지 편집 일을 도맡아 하는 제작자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험생활을 잠시 접고 직업의 세계에 몸담으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 첫번째이다. 그 다음으로 느끼는 것은 출판과 인쇄라는 두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들이 상호 소통을 거의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두 집단의 지적·문화적 괴리는 가히 놀랍다. 인쇄소 사장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필자였고 편집자였던 벤자민 프랭클린을 떠올리고 있던 나의 관념이 최근 산산히 부서지고 있다. 책을 물리적으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내용을 거의 읽지 않는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첫째 아들의 일화는, 그 당시의 신화 중 하나일 뿐이었을까.

원고를 주는 이와 원고를 받는 이 사이에 힘의 불균형이 또한 눈에 띈다. 구체적인 사건을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로 보건대 일부 상식적인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수의 저자들은 출판 노동자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는 것 같고, 또한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의 원고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오류를 근거로 그들의 지적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출판 노동자들은 저자들이 되도 않는 자존심이나 세운다고 불평을 토로하고 있고, 반면 저자들은 출판사에서 걸핏하면 인세를 떼어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기술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의 일면이 쉽게 드러난다. 저자들은 '출판사', 즉 자본에게 해야 할 화풀이를 노동자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다.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와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저자의 원고의 내용을 폄하하거나 그의 인격적인 부분을 걸고 넘어진다. 약한 개들이 서로 잡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도 우선 한쪽 편을 들고 보자면, 바로 아래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의 글쟁이들은 자신이 어떤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서 자본론을 다시 쓰고 있다고 해도 그렇다. 그의 사상이야 어떻건, 그의 노동은 출판 산업의 일부를 구성하는 저술 작업일 뿐이다. 마감은 지켜져야 하고, 문법과 맞춤법 또한 편집자가 다시 써야 하는 수준으로 엉망진창이어서는 안 된다. 출판 노동자, 혹은 잡지 편집자들이 원고를 다듬는데 괜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필자들은 아무튼 자기 개발을 하면서 그들보다 앞선 정보를 취합하며 필자로서의 입지를 지킨다. 뒤치다꺼리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생각에 완벽한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다보니 편집자들의 사회적 위치가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일단 잡지로 범위를 좁혀보자. 외국의 경우, 유력 매체의 에디터들은 대부분 두 개 이상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 말 그대로 '인맥'을 통해 자신이 속한 매체에 원고를 끌어오는 것이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유는 곧 그들이 쓰는 글 자체의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은 덜 지우고 대신 각자의 글 수준을 높이는, 일종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물론 그렇지 않다.

매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지적이고 우아한 작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한국의 잡지계의 질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잡지 일을 한다는 것이 자신의 에고를 억누를 수밖에 없는 무언가로 인식되고 있는 현실을 절감하면서, 한국인 필자에게 글을 받을 필요가 없는 《Foreign Policy》니까 내가 기꺼이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20대 필자들을 모아 매체를 굴려보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조금씩 조금씩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그런 것 같다. 매체를 운용함으로써 한국어의 흐름에 인상적인 영향을 남기고 싶다는 이상이, 스스로의 에고를 굳이 억누를만큼 내게 강하게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택광 선배의 추천으로 알게 된 《London Review of Books》는, 아직 실물을 만져보지 않아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지만, 훌륭한 매체인 것 같다. 특히 커버가 아주 아름다운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것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낮에 한윤형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던졌는데, 결국 결론은 테리 이글턴 같은 필자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으로 맺어졌다. 하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하련다.

그리하여 오늘의 결론. 테리 이글턴은 됐고, 일단 나는 한 주에 한 편 이상의 서평을 쓰겠다. FP 마감에 임박해있다면, 하다못해 그 매체의 기사 내용을 토대로 한 매체 비평이라도 반드시 올리도록 하겠다. 필자를 구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원고를 편집할 궁리를 하고 있느니 그냥 내가 쓰고 말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꼬박꼬박 알라딘 서재에 올릴 생각인데,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블로그에 공지를 올릴 터이니 방문자분들의 환호성 섞인 리플을 부탁한다. '왜 업데이트가 없느냐'라는 질책도 감사히 받겠다(물론 공지에 써놓은 바와 같이, '별도로 명시되지 않는 삭제 기준'에 어긋나면 지울 수도 있다).

사실 이 포스트처럼 '2008년 모월 모일'이라는 식의 일기를 적어도 사흘에 한 편 정도 올리면서 스쳐 지나가는 기사와 책의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올해의 목표 중 하나였는데, 생각해보니 웹에서 읽은 것들에 대한 코멘트에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평을 쓰는 것이 훨씬 생산적인 일일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책과 서평에 대한 감식안이 쌓이고 그것들을 온당하게 비평하기 위한 지적인 토대를 마련한다면, 먼 훗날 언젠가 LRB 같은 매체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내일은 정말 지각하면 안 되는 날이다. 자야지.

댓글 1개:

  1.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근대 개항기부터 한국의 인문학의 역사는 " '미래의 테리 이글턴'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소년 소녀들의 보모 노릇을 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일은 정중하게 사양"한 사람들의 역사였지요. 다들 잘난 자기만의 철학들을 했습니다. 잡지 한두권, 얇은 저서 한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그들 전부 독일어 원전과 일본어,영어로 철학과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보모노릇 하기 싫었던 그 분들 자기 철학하다가 서양고전에 대한 번역서 하나 제대로 안 남기고 가셨습니다. 그결과는 숱한 오역의 인문학 번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지요. 일본과 비교하면 두말할 필요가 없는.

    20대중반일 님께 보모노릇이라도 잘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님이야말로 보모노릇해줄 선생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차피 서로 보모노릇 받고, 해주며 공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한 5년후면 스스로의 내적 동력만으로 인문학공부라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실테니까요.

    님곁에는 똑똑한 친구들이 많은 것같으니 열심히 공부하셔서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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