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21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나름의 우아함을 유지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그 댓가로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을 부당하게 갈취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인 우아함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더 큰 죄악이다. 그나마도 진짜 부유한 사람이 그러고 있다면 모를까, 가진거라고는 자존심밖에 없는 사람의 경우라면, 자신의 그 알량한 체면을 위해 다른 노동자에게 정당하게 돌아가야 할 노동의 댓가를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강유원이 그러고 있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의 maunscript라는 메뉴에서 말 그대로 '손으로 쓴 다음 컴퓨터로 옮긴' 원고들을 게재하는데, 문제는 그 중 일부가 이미 책으로 출판된 후에도 다운로드 가능한 형태로 공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최신 번역작은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인데, 링크가 걸려있다고 해도 굳이 알라딘이나 다른 인터넷 서점에 가서 구매 버튼을 누르지 마시라. 강유원 홈페이지에 가면 원고역자 후기가 모두 PDF 파일로 올라와 있다. 당신이 할 일은 그것을 받아서 아크로뱃 리더로 읽은 다음 프린트 버튼을 누르는 것 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7000원을 절약할 수 있다.

저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고 알 바도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해두었으면 한다. '나는 책 팔아서 돈 벌 생각 없다'는 관점으로 그러고 있는 거라면 그따위 발상은 기둥에 묶어서 불로 태워버려야 할 것이다. 책은, 저자에게는 자신의 이념과 사상과 꿈과 희망의 표현이지만, 출판 노동자에게는 피와 땀과 눈물이 서린 노동의 결과물이다. 번역자로서 인세를 포기하고 싶거든 자신의 통장에 들어온 돈을 입맛에 맞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거나, 빌딩 위에서 흩날리거나, 경찰의 눈을 피해 불태워버리거나 할 것이지, 대체 무슨 근거로 책의 판매에 해가 될 짓을 하면서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책이 안 팔리면 번역자의 수당만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 '저자'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은 기고나 다른 책의 원고료 등으로 구멍난 수익을 벌충할 수 있다. 하지만 출판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낸 책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이것은 내가 최근에 본, 타인의 소득을 짓밟는 방법 중 가장 잔인한 것에 속한다. 태안에서 기름 쏟은 것보다도, 어떻게 보면 더 심하다. 그건 그나마, 과실이건 중과실이건 '과실'이지만, 이건 의도가 있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버티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한국의 인문학 도서 시장은 기껏해야 1500부 미만에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 강유원 홈페이지에서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의 원고가 실려있는 게시물의 조회수가 1000이 넘는다. 1월 21일 오후 8시 8분 현재 다운로드 수는 810회이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문어 제 발 끊어먹기도 이런 경우는 없다. '나는 내 지식을 무료로 공개하는 사람이오'라는 '가오'를 유지하기 위해, 수 명의 출판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위해를 가해도 되는 것일까. 자신의 강의를 녹음해서 파일로 올리는 것, 그와 관련된 강의 자료까지도 정성스럽게 편집해서 올리는 것 등에 대해서 나는 강유원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 포드캐스팅을 이렇게 철저하게 추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해서는 경우가 완전히 다르다. 과연 '한국의 주어캄프'라는 칭송을 듣고 있는 이론과실천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한국의 주어캄프'의 번역자가 번역 원고를, 책이 나오기도 전에 인터넷에서 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과연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나는 그의 정보 공유 정신 자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계약'이라는 것이 포함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를 우선 지키자는 말을 하고 있다. 말라 죽어가고 있는 인문 출판계의 목줄을 이런 식으로 조르는 필자가 더는 없어야 할 것이다. 다른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를 잡는 이러한 행태가 더 이상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댓글 15개:

  1. 강유원이 필요한 만큼 갖다쓰고 능력껏 채워넣는 공산주의자라는게 사실인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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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언제나 그렇듯 능력과 필요가 불일치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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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전직 '회사원'이었던 분이 이러면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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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현재 '철학자'이시니까 더욱 곤란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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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근래 들어 '카피레프트' 정신이 알량하게 퍼져 나가는 게 참 짜증납니다. MP3 이후로 더 커진 것 같은데...

    '저자가 오케이하면 만사형통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고 있더군요. 작품을 만드는 게 작자 뿐이 아님을 새삼 깨닫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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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강유원님의 코멘트, 원글은 제가 썼습니다.참고하시길.

    http://armarius.net/bbs/view.php?id=www_bbs&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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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게시판에 초고가 있다고 해도 읽을 사람은 꼭 책을 사서 읽지 않을까 싶은데요..

    게시판에서의 자료공유-> 판매율 저조-> 출판 노동자 착취 ...이렇게 쉽게 단정지을 수 있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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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상식적으로 계약 상 그런 파일들을 올리기 전 합의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시지는 않으셨는지요. 비단 강유원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출판물들의 경우에서도 적잖게 미리 전자 출판의 형태로 pdf파일을 인터넷에 공개한 후 정식 출판하여 좋은 판매고를 올리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압니다. 좀 더 성실한 자세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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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다른 것은 제쳐두고 홈페이지 업로드에 이미 출판사와 합의하였다고 하니 강유원에게 '계약을 지키라'는 말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겠군요.
    그리고 '계약'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윤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계약'은 어떠한 사회에서나 지켜지기를 요구받는 것이죠.
    사과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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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한 권 한 권마다 몸과 마음을 쏟아가면서 만들기에 책이 가진 가치와 물성을 무엇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책은 프린트물이나 파일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노정태 님의 생각을 더 이해하기가 힘들군요. 그리고 판매고가 는다고 해서 월급쟁이 편집자가 돈 더 받는 경우는 드뭅니다(판매고가 늘면 물론 편집자로서 보람을 느끼지만 여기서는 노정태 님의 말대로 노동의 대가인 돈에 대해서만 말씀 드립니다). 인센티브 제도를 시도하고 있는 몇몇 출판사들에게는 해당되겠지만 그런 출판사에서도 얼마나 정당한 기준으로 편집자 혹은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배분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중소 출판사 사장님들은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 처지에 더 적당한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정말 책 살 돈 없는 사람들에게는 파일로라도 읽히는 데 동의하시는 분들이 강유원 님의 책을 출간하신 출판사 사장님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쨋거나 이런 부분을 차치하고라도 강유원님의 사이트가 책의 내용과 가치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노정태 님의 지적은 매우 경솔하고 무례하게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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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저야 인문학 '출판노동자'도 아닌 경제경영 '출판노동자'라서인지 모르겠으나, "책은 편집자의 피와 땀을 바쳐 만드는 것"이며, "어떤 이의 무료 배포가 인문학 책의 판매고를 뒤흔들 것"이며, "인문학 책은 그래서는 결코 안되는 신성한 것"이며, 그럼에도 "자본의 윤리에 맞게 그 책을 만든 노동자들에게 제 몫을 돌려줘야 한다"는 식의 철 없는 발상부터 기둥에 묶어 불로 태우는 것이 옳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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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개인적인 감정이 상황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갖습니다.

    마케터들이 흔히 갖는 오류 중의 하나가 모든 잠재고객을 내 고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 한 그는 내 고객이 아닙니다. 내가 뭔가를 팔고 싶기는 하지만 그는 내가 갖고 있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익명님이 지적하고 있듯이 책은 프린트물이나 파일과는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내용과 상관없이 '책이 예뻐서, 또는 종이 냄새가 너무 좋아서' 책을 사기도 하니까요. 또 프린트물로 읽었어도 책의 내용이 맘에 들면 나중에 들춰보기 위해서나 아님 '가오'를 잡기 위해서 책을 사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출판 노동자의 노력뿐만 아니라 저자나 번역자와 같은 지식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게 마련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 성과는 어느 일방에 의해 전유될 수 없다는 님의 지적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님이 걱정하고 있듯이 파일 다운로드 숫자와 책 판매수량과는 상관관계가 그리 커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이 맑시즘을 과거의 유물 정도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굳이 그곳까지 찾아가 파일을 다운로드 받을 정도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그 내용을 온전한 책으로 간직하고자 할 것입니다. 아님, 책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학생일 수도 있겠고요.

    다운로드 받고 그것으로 만족할 독자라면 그는 이미 인문학 시장과는 상관없는 소비자입니다. 관심은 가지되 돈을 쓸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은 다운로드 서비스가 없다면 도서관이나 옆집 친구에게 빌려 있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들이니 출판 노동자의 밥벌이와는 크게 상관 없는 경우라고 봐야겠지요.

    저는 인문학 시장이 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80년대식 출판운동의 방식일 수도 있겠고, 아님 강유원님과 같이 자기 방식으로 '참호'를 굳건히 지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500~1500부 정도의 책을 팔아 서로 나눠 가질 몫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듣던 '성장론'의 재탕인 듯 해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문학 출판 시장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인식이 유효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히려 출판 노동자와 지식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가오 잡는 행태는 출판 자본가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들이 아니던가요? 돈좀 벌었다 싶으면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보다는 번듯한 건물 올리기에 혈안이 되거나 아님 '투자'라는 명목하에 출판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눈에 띄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모두들 '논술시장'으로 떠나 버린 황량한 곳에서 아직도 '돈 안되는 인문학'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을 '철면피' 삼성중공업의 행태와 비교하다니요.
    좀더 애정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봐 주셨으면 하는 부탁을 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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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PDF를 다운로드 했고 책도 구매한 독자입니다. PDF를 프린트한다고 해서 그것이 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A4 용지 프린트물은 10페이지만 넘어가도 간수하기 힘들어지며 더군다나 따로 제본을 할려고 하면 그 또한 비용과 시간이 드는 일입니다.

    컴퓨터 화면이나 프린트물로 책의 내용을 접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내용물이 '책'이라는 정식 인쇄물로 출판된 것과는 효용성과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저는 책을 구매한 것입니다.

    해당 PDF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것과 해당 도서의 판매율 하락을 객관적으로 연관지을 수 있는 근거도 없이 '피와 땀'이라는 공감하기 힘든 과격한 용어를 사용하시면서까지 주장하시는 것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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