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y political words are similarly abused. The word Fascism has now no meaning except in so far as it signifies "something not desirable." The words democracy, socialism, freedom, patriotic, realistic, justice have each of them several different meanings which cannot be reconciled with one another. In the case of a word like democracy, not only is there no agreed definition, but the attempt to make one is resisted from all sides. It is almost universally felt that when we call a country democratic we are praising it: consequently the defenders of every kind of regime claim that it is a democracy, and fear that they might have to stop using that word if it were tied down to any one meaning. Words of this kind are often used in a consciously dishonest way. That is, the person who uses them has his own private definition, but allows his hearer to think he means something quite different. Statements like Marshal Pétain was a true patriot, The Soviet press is the freest in the world, The Catholic Church is opposed to persecution, are almost always made with intent to deceive. Other words used in variable meanings, in most cases more or less dishonestly, are: class, totalitarian, science, progressive, reactionary, bourgeois, equality. George Orwell, "Politics and the English Language"(1946)
언어와 정치에 대해 이보다 더 잘 쓰는 것은 불가능할 듯하다. 오늘 하루 종일 붙잡고 읽었는데,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에세이를 읽고 나면 그의 소설을 찬양하는 것은 유치하고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Hey girl what's wrong with your principles? When you say that you're a vegetarian Well, I've seen you eat meat a couple of times but I swear I won’t tell anyone.
And how about the affection for me after I've been Walking through hell for you? What the hell did you expect me to do?
I still think that you're a bitch, talking Motherfucker You’re the worst cock sucker Swore that you were true to me Yeah - in my dreams, in my dreams
Ah - I just won't rub it in...
Hey girl what's wrong with your principles? When you say that you're a vegetarian Well, I've seen you eat meat a couple of times but I swear I won’t tell anyone.
And how about the affection for me after I've been Walking through hell for you? What the hell did you expect me to do?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다니엘 시레라(Daniel Cirera)의 노래라고 하고, 제목은 Motherfucker fake vegeterian ex-girlfriend라고 한다. 이택광 선배의 블로그에서 잘 들었는데, 위아래로 달린 노래에 대한 코멘트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예전에 가투 몇 번 나갔던 경력을 자랑 삼아, 술자리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걱정하고, 집에 돌아오면 과감하게 교육과 부동산을 위해 보수주의자로 변신하는 한국의 신흥 중간계급들에게 한번쯤 들려줘야할 노래"라는 것이 이택광의 언급이고, 그 밑에서는 젱가님이 "들으면 들을수록 한국 중간계급 또는 지난 10년 개혁세력의 행태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면이 있"다고 응수한다. 나는 이런 시선이 너무도 불편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연애 이야기 아닌가. 중산층, 혹은 상류층 젊은 여성의 허위 의식과 마찰하는 노동 계급 출신 남성이 부르는, 제 아무리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은 찌질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한국 중산층과 '개혁정권 10년' 등을 떠올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약이다.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선입견이야말로 이 노래가 가지고 있는 노동계급적인 삶의 본질이 존재로서 드러나고자 하는 것을 은폐한다는 인상마저 든다(하이데거를 방금 읽은 티가 난다).
노동계급의 남성이 중산층 여성과 이성으로 만나면서 겪게 되는, 그 부대끼는 느낌을 이렇게 간단하게 '한국 중산층에게 들려주면 좋겠다'로 치환하는 과정을 되짚어보면, 결국 그 과정에서 이 노래의 진정한 주인공이어야 할 누군가가 또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찌질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틈을 주지도 않고, 비평가는 '중산층'을 위한 노래로 이 곡을 해석하면서 결국 그들에게 이 좋은 노래를 헌정해버린다. 곡이 지니고 있던 최초의 에너지는 온데간데 없고, 결국 남는 것은 그 흔하고 상투적인 '중산층의 허위의식 비판' 뿐이다.
그들에게 소비자로서의 능력과 의사가 있기 때문에, 중산층을 소재로 삼는 작품들은 넘쳐난다. 다만 그중에서도 중산층을 바라보는 노동계급의 목소리를 온전히 내는 무언가는 제법 드물게 나오는 편이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그 드문 사례 중 하나이다. 그럼 대체 왜 여기서, 이렇게도 간단하게 '한국 중산층'에 대한 비아냥이 마치 노래 전체의 주제인양 등장해야만 할까? 전 여자친구를 저렇게 욕하는 바로 저 화자의 심정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을까? 너무도 뻔한 귀결이지만, 갑자기 펄프를 듣고 싶어졌다. 커먼 피플의 주제 의식도 이 노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중산층의 허위의식'은 90년대에도 있었고 80년대에도 있었고 2010년대에도 계속 있을 것이다. 그것에 진저리를 내는 사람의 노래를 들으면서까지 중산층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비평적 상상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She came from Greece, she had a thirst for knowledge She studied sculpture at Saint Martin's College That's where I caught her eye She told me that her Dad was loaded I said "In that case I'll have rum and coca-cola She said "fine" And then in 30 seconds time she said "I want to live like common people I want to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I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I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like you" Well what else could I do? I said "I'll see what I can do" I took her to a supermarket I don't know why but I had to start it somewhere so it started there I said "pretend you've got no money" but she just laughed and said "oh you're so funny" I said "Yeah Well I can't see anyone else smiling in here Are you sure you want to live like common people you want to see whatever common people see you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you want to sleep with common people like me?" But she didn't understand she just smiled and held my hand Rent a flat above a shop Cut your hair and get a job Smoke some fags and play some pool Pretend you never went to school But still you'll never get it right 'cos when you're laid in bed at night watching roaches climb the wall if you called your dad he could stop it all yeah You'll never live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You'll never fail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watch your life slide out of view and then dance and drink and screw because there's nothing else to do Sing along with the common people Sing along and it might just get you through Laugh along with the common people Laugh along although they're laughing at you and the stupid things that you do because you think that poor is cool Like a dog lying in a corner they will bite you and never warn you Look out they'll tear your insides out 'cos everybody hates a tourist especially one who thinks it's all such a laugh yeah and the chip stain's grease will come out in the bath You will never understand how it feels to live your life with no meaning or control and with nowhere left to go You are amazed that they exist and they burn so bright whilst you can only wonder why Rent a flat above a shop Cut your hair and get a job Smoke some fags and play some pool Pretend you never went to school But still you'll never get it right 'cause when you're laid in bed at night watching roaches climb the wall if you called your dad he could stop it all yeah You'll never live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do whatever common people do You'll never fail like common people You'll never watch your life slide out of view and then dance and drink and screw 'because there's nothing else to do I want to live with common people like you.....
뮤직비디오 버전에서는 이탤릭 표시한 부분이 빠져있다. 대단히 직설적으로, 이 노래는 중산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중산층 여자를 바라보며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 노동계급 남자의 것임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그 부분. 마침 그게 온전하게 다 들어있는 버전을 발견하여 보너스로 덧붙여 놓는다. 코난 오브라이언의 토크쇼에 출연한 윌리엄 샤트너가 부르는 커먼 피플. 데니 크레인 같지가 않다.
정치적 쟁점으로 부각된 한반도 대운하는 박근혜의 화려한 승리와 함께 좌초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정책적 쟁점으로 전락한 한·미FTA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번 총선은 그 과정도 최악이었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도 최악으로 기록될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내놓은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왜 한나라당이 찬성합니까?"라고 강기갑이 질문하던 그 순간, 이미 한국 사회는 돌아오기 힘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도시 지역 출신으로는 천정배 당선자가 사실상 유일하게 반대했다. 결국 18대 국회의 민주당 당선자들 중에서 이념적·가치적으로 한·미 FTA에 반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셈이 가능하다"니, 정말이지 말 다했다.
"사실 노정태의 반론에 대해서, 약간 우려되는 지점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이 모든 건 다 유시민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 견해에 동의하는 면이 없는 바는 아닌데, 결국에 노정태의 글은 이 투표율 하락의 책임도 유시민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단호한 글쓰기'로 진실을 호도하기", How may cuts should I repeat?, 2008년 4월 15일)
내 글에서 과연 저런 내용이 나왔던가? 유시민의 이름이 등장하는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최장집은 탄핵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비판하였지만, 사태가 수습되고 유시민이 민주당을 파국으로 몰아가던 시점부터는 꾸준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해왔다."
"아이추판다님은 "뭘 말아먹었는지 얼마나 말아먹었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권여당이 정권말기에 당 간판을 내렸다면 하여간 무엇이든 심각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라고 하지만, 구 열린우리당이 당 간판을 내리고 아작이 나게 된 것은 노무현 유시민을 비롯한 일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 지역감정의 해소라는 이념적 당위를 위해 정당의 존립 근거를 전부 뒤흔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 자체가 노무현 정권이 행정부 차원에서 벌인 실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시민과 이해찬 등 이른바 '친노' 계열과 정동영을 선두로 하는 신규 당권파들이 기존의 민주당 세력과 분당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의석을 갖게 된 '탄돌이'만으로 구성된 정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었다.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최장집과 총선에 대한 의견들", 노정태의 블로그, 2008년 4월 14일)
'읽힐 수 있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봐야 소용 없다. 한윤형은 내가 술자리에서 떠든 내용과, 그것을 정련하여 만든 글의 내용이 같으리라는 짐작 하에 제대로 된 독해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구 열린우리당이 간판을 바꿔 달고 통합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후 선거에서 참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투표율이 바닥을 친 것이 전부 유시민 탓이라고 나는 주장한 바 없다. 다만 열린우리당은 망할 만한 집단이었고, 더욱이 그들은 한나라당과의 정책적 차이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고, 그래서 '대안'을 찾지 못한 국민들이 투표장으로 향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이 글에서 전제하고 있는 18대 총선에 대한 분석이다. 나는 한윤형이 나의 취지를 함부로 축소하고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열린우리당이나 통합민주당이 자신들의 계급적 지향성을 가감없이 드러내게 된 것, 그것도 유시민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가? 노회찬 심상정이 지역구에서 낙선한 것도 유시민 때문이라고 내가 말하고 있는가? 총선 득표율이 50%도 안 되는 것이 유시민 탓이라고 주장하려면, 혹은 그런 주장을 암암리에 전제하려면 적어도 내가 기존에 쓴 글보다 훨씬 더 길고 복잡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그의 글은 "이 모든 건 다 유시민 때문이다."로 요약될 수 있다"고 내 글을 넘겨짚는 모습을 보고, 다소 어이가 없어서 그의 글에 트랙백을 보내기 위해 이 포스트를 작성하였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나는 술자리에서 필 받은 김에 하는 소리를 그대로 블로그에서 '의견'으로 제시할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나는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유시민 이 개새끼, 나라 꼴이 이게 뭐야?"라고 소리를 지르긴 했다. 하지만 그걸 '정치적 분석'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정치적인 분석을 담은 글에 고스란히 그 취지를 담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면 매우 곤란하다. 아, 곤란하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혹은 발전하고 있는지에 대해 한 두 마디로 잘라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러셀이 이미 50여년 전부터 단언한 바와 같이, 행정부가 입법부를 이끌면 독재의 경향이 크고, 입법부가 행정부를 적절하게 견제하면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가능성이 높다. 이와 같은 통찰에 대해서는 부가 연구가 존재한다.
최근 발표된 연구에서 피쉬와 크뢰닉은 각국 전문가 700여 명이 참여한 조사 분석을 통해, 세계 158개 나라 입법부의 권한을 비교하고 순위를 매겼다. 의회의 권한은 다음 네 가지 범주의 변수들을 사용해 측정했다. 행정부에 대한 영향력(국가 원수 탄핵권 등), 자율성(국가 원수의 의회 해산권 등), 고유 권리(전쟁 선포권 등),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능력(의회 직원을 고용할 예산 등)이 그것이다. 분석 결과, 강력한 입법부를 가진 나라일수록 훨씬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입법부가 취약하면 행정부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며, 특히 독재자가 권좌에 올랐을 때는 속수무책이 된다.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교수인 피쉬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나라의 입법부가 대통령에 대항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12, "국회가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In Box〉,《Foreign Policy》한국어판, 2008년 3/4월호)
한편 아직까지 대한민국은 '제왕적 대통령제'라 불리는 중앙집권적인 정부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령 Bertelsmann Transformation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South Korea, however, has not evolved into a liberal democracy. The country’s political system is characterized by a concentration of power in the presidential office, especially when the party of the president holds a majority in the parliament.(Bertelsmann Stiftung, BTI 2008 — South Korea Country Report. Gütersloh: Bertelsmann Stiftung, 2007.)
집권여당이 그냥 그 이름을 달고 있는 국회의원만을 과반수 이상, 또한 그 당에서 나온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해가 되면 해가 되었지 결코 득이 되는 상황이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최장집 학파의 견해 중 '제도적 민주주의'가 이미 달성되었다는 부분에서 '제도적'에 괄호를 치고 나면, 남는 것은 아이추판다님과 같은 '민주주의 발전도상론'이나 홍준표식의 '민주주의 완성론'밖에 없다. 그 양자는 모두 최장집이 진행하고 있는 민주주의 담론을 속류화한 견해인데, 둘 다 정치적으로 그리 긍정적인 효과를 낳지 못한다. 최장집의 민주화 담론에 대해 섬세한 독해가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최장집은 현재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인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그가 바라던대로 총선에서 심상정과 노회찬이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연구하는 대상인 한국 사회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지식인 집단과 대중을 확실히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적으로 낙후되고 또한 소외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과 비교해볼 때, 최장집이 누리고 있는 '지적 탐구의 직접성'은 부러움을 살만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 그는 노무현 정권이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것'을 진작부터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최장집은 탄핵 사태가 벌어졌을 때에는 선관위와 헌법재판소를 비판하였지만, 사태가 수습되고 유시민이 민주당을 파국으로 몰아가던 시점부터는 꾸준히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유지해왔다. 그 중 많은 이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정권이 한나라당으로 바뀌어도 상관 없다.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민주적이다'라던 그의 대선 관전평이다. 수많은 '노빠'들이 그 시점에 최장집을 헐뜯기 위해 안달이었지만, 한국에서 가장 행복한 지식인이며 동시에 가장 존중받는 학자 중 한 사람인 그에게는 이빨조차 먹히지 않는 일이었다.
문제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탐색이 피상적인 차원에서 소화될 경우 낳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 내가 읽고 있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선거 결과"(Null Model, 2008년 4월 10일)라는, 아이추판다님이 쓴 글을 읽어보자.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한국의 민주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보더라도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고 있다"라고 자신있게 선언하며 글을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앞서 말한 최장집의 사고방식을 이번 총선에까지 확대 적용한 것이다. 그 논지는 "통합민주당은 확실히 말아먹었고 아직까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이렇다할만큼 말아먹은 일도 없다면(말아먹을 시간도 없었지만) 권력이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넘어가지 않는것이야말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딘가 고장나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라는 문장에 잘 요약되어 있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이 대선 역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과 함께 이명박을 당선시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 진실을 외면하고 싶었던 노무현 지지자들에게 최장집이 비춘 진실의 햇살은 마치 장농 밑의 바퀴벌레들에게 사정없이 내리쬐는 형광등 불빛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 그 단순한 공식을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은 "뭘 말아먹었는지 얼마나 말아먹었는지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겠지만 집권여당이 정권말기에 당 간판을 내렸다면 하여간 무엇이든 심각하게 말아먹었다는 건 분명해보인다"라고 하지만, 구 열린우리당이 당 간판을 내리고 아작이 나게 된 것은 노무현 유시민을 비롯한 일부 정치적 급진주의자들이 지역감정의 해소라는 이념적 당위를 위해 정당의 존립 근거를 전부 뒤흔들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그 자체가 노무현 정권이 행정부 차원에서 벌인 실책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시민과 이해찬 등 이른바 '친노' 계열과 정동영을 선두로 하는 신규 당권파들이 기존의 민주당 세력과 분당하면서, 지역적 기반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의석을 갖게 된 '탄돌이'만으로 구성된 정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었다. 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앞서 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최장집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지식인이며, 동시에 식자층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아이추판다님이 보여주고 있는 사고의 궤적 또한, 일종의 '속류 최장집주의'라고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최장집의 정교한 논변은 그 자체로서 섬세한 맥락 하에 전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듯 단순하게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례에 적용되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은 책이 없어서 정확한 인용이 불가능한데, 최장집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정당정치의 활성화, 국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정당 구조 개편 등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다면 구 열린우리당 계열의 통합민주당 의원들이, 단지 자신들이 당권을 점하기 위해 벌인 정치적 투쟁과 그것이 불러온 지지층의 이탈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차원의 해석이 필요하다. 현재 벌어져버린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 점유를 단지 '지난 정권의 실정' 탓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노무현 정권 계속 심판론'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급감한 투표율이 말하는 바와 같이,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지도 않고 그냥 정치적 의사 표현을 포기해버렸다.
투표율의 하락에 대해서도 아이추판다님과 같이, 그것을 모두 '건강한 민주주의'의 발로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번 총선의 가장 큰 특이점 중 하나는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의원들이 내놓는 공약에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정동영과 정몽준이 맞붙은 동작을의 경우, 두 후보 모두 동작 지역에 뉴타운을 건설하겠다며 목청을 높였다. 다른 곳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당 후보와 여당 후보가 모두 뉴타운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울 때, 여당 후보가 이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국민들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건 괜찮을 것이다'라고 민주주의적인 낙관을 품고 있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나라가 망하건 말건 우리 집값부터 올리고 보자'는 근시안적인 개발 환상에 젖어있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욱 정확하다. 이번 총선이 얼마나 '뉴타운 선거'였는지를 알고 싶다면 KBS 스페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의 시청을 권한다. 후마니타스 박상훈 주간의 말마따나 이번 선거는 민주화 이후 최악의 선거였다.
여기서 더욱 우려가 되는 것은 현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수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sonnet님은 "총선 단상"(a quarantine station, 2008년 4월 10일)에서 "지금 반 한나라당 성향의 사람들은 어짜피 친박세력이나 선진당은 다 그나물의 그밥이라고 평면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친박세력의 한나라당 복당을 허용하면 (지금도 헐거운) 히데요시의 당 장악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주장을 편다. 그 밑에 달린 리플들을 보더라도 이러한 인식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사태를 지나치게 입체적으로 보고자 함으로써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및 범 보수 진영을 관통하는 계급적 이익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다. 나름대로 개혁적이라고 표방하고 있던 열린우리당? 아, 열린우리당(당명을 하도 자주 바꿔서 혼동이 있었다)이 겉으로는 그렇게 싸우다가도, 비정규직법 개악에 있어서만큼은 일치단결하여 일사천리로 국회 통과시키던 광경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박근혜와 이명박이 박터지게 싸워서 이명박 맘대로 운하를 못 팔 수도 있다. 하지만 한미 FTA는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고 노동법은 이번 국회 내에 한층 더 개악될 것이며, 현재의 파견근로법 따위가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 이상의 최악으로 나아갈 것임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범 한나라당 계열에서 벌이게 될 이러한 대대적인 악법의 연속에 맞설 수 있는 방안은, 현재로서 전혀 없다.
다시 최장집으로 돌아가보자. 그가 노원과 덕양을 오가며 심상정과 노회찬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번 선거에서 두 후보가 당선되는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 그 자체에 큰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는 점을 방증한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삼성의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고 공인된, 매우 드문 정치인이다. 그들이 국회의원으로서 보여준 실력과, 특히 노회찬이 가지고 있었던 전국적인 단위에서 대중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가 한국 정치의 드문 희망이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지막지한 '시장주의'의 질주를 막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 방향의 사회적 합의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정치라는 과정을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나는 지난 글을 통해 노회찬이 지역구 차원에서 또한 공약 차원에서 실패하였다는 말을 한 바 있다. 그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정치적 비전이 무엇인지에 대해 탐색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그러한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인재였다. 그런 그들이, 비록 선전하였지만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전체적인 행보에 대단히 짙은 암운을 드리우는 사건이다. 한국의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자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천하는 최장집이, 과연 언제까지 '행복한 지식인'으로만 살 수 있을지, 이제 의문이 든다.
일단 이번 선거 결과를 정리하며 글을 시작하자. 우리는 이겼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이겼다. 진보신당은 창당 3주만에 전국 정당득표율 2.94%를 기록하며 50만명의 지지를 얻어냈다. 물론 지역구에서 의석을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패배의 면면은 차라리 승리의 기록이다. 돈이 없어서 유세용 트럭을 빌리지도 못했던 서대문갑의 정현정 후보가 4%대의 득표를 했다. 민주노동당 전 대변인 박용진 후보는 10%를 넘겼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를 온 몸으로 표상하고 있는 광주의 김남희 후보조차도, 놀랍게도 5%를 해냈다.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을 보니 마산의 장애여성 송정문 후보는 1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한다. 조금만 더 받았더라면 선거비용 환급도 받을 수 있었을, 그런 자랑스럽고 동시에 안타까운 숫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진보신당은 물론 이기지는 못했지만, 이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접을 수가 없는 건, 노원병 선거구의 선거운동의 내용과 그 결과가 엄연히 현실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말하자면, 나는 노회찬 선본에서 4월 7일 자원봉사를 했다. 호빵맨 복장을 한 채 유세차를 타고 전 지역구를 후보와 함께 돌았다. 이 글은,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체 노원병 선거구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여가 적절한 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진보신당의 앞날에 끼치게 될 악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밝히기 위한 시도이다.
2.
투표 이틀 전, 분명 노회찬은 앞서가고 있었다. 노원 주민들은 노회찬 선본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특히 평수가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재래시장 골목 등에서 반응이 좋았다. 상가 쇼윈도 너머로 앉아 있는 상인분들께 인사를 하면, 언제나 반가운 화답이 돌아왔다. 노회찬 본인의 캐릭터를 활용한 이미지 전략도 매우 탁월했다. 노회찬 호빵맨이 그 지역에서 얼마나 인기 있는 존재였는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린이들이 유세차량을 따라 달려왔다. 마치 지난 시절 어린이들이 소독차의 뒤를 따라가듯 그렇게. 어떤 한 여자아이는 '호빵맨, 가지 말아요. 여기서 나랑 같이 살아요'라며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유세차량에서는 연신 '노회찬 대세론'을 밀어붙였다. 여론조사 13회 연속 1위를 기록한 후보라고, 민주당에 동정표를 주지 말자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홍정욱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고 했다. 그때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노회찬 선본이 지니고 있던 가장 큰 약점이었다. 개표가 끝나고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노회찬 선본은 갑자기 올라간 노원의 아파트 가격에 졌고, 그것을 더욱 부풀려주겠다는 홍정욱의 '적절한' 공약에 졌다. 상대방을 너무 얕잡아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는 남궁원의 아들이고, 남궁원 또한 전직 국회의원이다. 선거와 관련한 인맥을 상당히 충실히 가지고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회찬 선본에는 바로 그렇게, 아파트 가격의 상승과 관련하여 집값 문제와 맞설 수 있는 전략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저녁부터 여러 사람들에게 이 지점과 관련한 나의 분노를 털어놓았다. 대체 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그저 이미지로만 승부하려 했냐고, '우리 노회찬을 다시 국회로 보내주십시오!'말고 더 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없었냐고, 비교해서 미안하지만, 심상정이 내세운 '핀란드형 자립중고'같은 구체적인 대안을 왜 하나도 마련해놓지 않았냐고, 노회찬 선본과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묻고 묻고 또 물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그건 답이 없는 문제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혹은, 답이 없다고 해서 회피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3.
대한민국은, 적어도 서울은 '뉴타운'에 미쳐있다. 동작을의 득표율이 유독 저조한 것은 김종철 후보의 탓이 아니다. 야당과 여당의 대표주자들이 나와 한목소리로 '뉴타운 개발'을 공약으로 내걸고 조직표로 세 싸움을 벌인 결과 벌어진 일일 뿐이다. 아무튼 이것은 우리의 현실이고, 또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집값을 올려서 부자가 된 후 대한민국을 버리고 떠나겠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친 국민들을, 설득하고 조직하여 '삶'으로 돌려놓는 그것이야말로 진보신당이 해결해야 할 당면 과제인 것이다.
노원병에 출마한 노회찬과 그 선본에서,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선도적인 연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혹자는 노회찬 선본이 후반부에 너무 힘을 뺐다고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관찰에 머무르는 것이다. 홍정욱이 집값 상승을 무기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한, 그것에 대항할 논리를 미리 만들어놓지 않은 노회찬 선본은 말 그대로 '이미지 정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도리어 홍정욱이야말로 한국적인 실정에서 '계급 정치'를 했고, 그에 대한 노회찬 선본의 대응이 '이미지 정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실이다. 무책임한 지역 개발 공약을 남발하는 것이 무슨 계급 정치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노회찬 개인의 스타 파워에 의존하여, 그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는 당위만을 내세웠던 이쪽의 대응에 비하면, 적어도 홍정욱 측은 그 지역 주민들과 '친화적'인 공약을 내걸고 그 위에 후보자 개인의 매력을 첨가하는 방안을 택했다. 아파트 가격이 올라서 자신이 강남 사람처럼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분명히 허위의식이지만, 실제로 가격이 오르긴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물론적인 현실이다. 이 현실을 도외시한 채 우리가 앞으로 대체 어떤 논의를 할 수 있을까? 그건 그냥 대책이 없는 문제니까, 앞으로도 '진보정치의 대의'만을 내걸어놓은 채 유권자들의 선의에 호소한다고? 그건 영원히 3% 정당에 머무르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진보신당의 앞날을 위해서, 또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부동산 열풍의 실체를 파악하고 그에 맞서야 한다.
4.
총선에 나선 노회찬 캠프에 시간도 자원도 부족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한 지역에서, 특히 노회찬이라는 전국구 스타를 앞세우고 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것을 시사한다. 노회찬이 나왔어도 이기는 듯 하다가 졌는데, 다른 후보가 나온다면 어떨까? 또, 서울시의 거의 모든 지역이 뉴타운 개발을 바라고 있는 상황인데, 다른 지역에서는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가령 내가 사는 서울 중구만 해도, 모든 후보들이 약수동 달동네 등의 재개발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러한 개발의 광풍에 맞서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지역 주민들이 진짜 아쉬워할만한 그 무언가를 미시적으로 탐색하고 발굴하여 공약으로 제시하고 검증받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사람들에게 '삶'을 돌려줄 수 있는 그 무언가로 맞서지 않는 한 우리는 대한민국의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문제는 그 모든 과정들은 지역의 개별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사례별로 연구하고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총선 정국은 분명히 그 모든 일을 동시에 시행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무대이다. 지역의 사례를 지역 주민의 시각에서 연구하여, 당선되고 나면 그 정책을 전국적인 단위에서 시행할 수도 있다. 물론 4년 후의 총선을 위해 지금부터 연구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또 그래야 마땅하지만, 기왕 넘어야 할 산이라면 진작 발을 디뎠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한민국의 그 어떤 지역구도 부동산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허공이 아니라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지의, 또한 주택의 가격이 턱없이 오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만큼, 동시에 집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며 시세차익을 누리는 것 외에 다른 삶의 즐거움을 대중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진보진영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노회찬을 국회로 보내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가 대체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다.
노원은 진작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한 지역이며, 서민층이 밀집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나도 처음 가봤는데, 지나치게 밀집되어 있는 아파트와 주택가가 매우 답답한 인상을 준다. 사람들과 '부대낀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는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가령 '생태도시 노원'같은 구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주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생태적인 공약을 개발하여 제시하였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처럼 대세론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는 득표율이 안 나왔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 내년에 열릴 지방선거와 또 4년 후의 총선을 위한 기본 포석은 충분히 깔아놓을 수 있었다.
5.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 정치'의 맥락을 모두 괄호 안에 집어넣고, 한국 사회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부동산을 기준으로 한국의 계급 구조를 설명할 수 있다. 주택이 없고, 아파트를 한 채 소유하는 것이 목적인 계급 A가 있다. 한 채의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그것의 가격이 상승하여 시세차익을 누리기를 바라는 계급 B도 있다. 여러 채의 가옥과 토지를 보유하고 있는 계급 C도 있을 것이다. 노원병의 문제는 계급 B를 위한 공약을 전혀 마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만 노회찬 선본은 소박하게 전제되어 있던 '계급 의식'에 호소하였고, 그것을 위해 노회찬을 국회에 재입성시켜야 한다는 당위만을 붙들고 매달렸다. 하지만 한국의 계급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이 부동산을 기준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판가름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좌파정당 또한 그러한 현실 속에서 계급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고 그것을 국민들에게 제시하지 않는 한, 진보신당이 지금보다 더 큰 외연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지역구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노회찬 선본에 대한 아쉬움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이유도 그래서이다. 우리에게는 지역구에서 선전했던 결과가 엄연한 숫자로 존재한다. 그 힘을 내년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 번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4년 후에 다섯 석 이상, 크게는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노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대선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회찬 캠프가 겪었던 의외의 고전은, 그 자체가 문제적인 상황이며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되짚어보고 연구해야 한다.
'키보드 좌파'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곱씹고 있는 진중권의 작업과 병행하여, 진보신당의 지지자들은 '아파트 민중'을 구성해내기 위한 방법 또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진보신당이 특히 수도권에서 안정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그 노동자들을 '키보드 좌파'로 조직해내면서, 동시에 지역 주민들을 '아파트 민중'으로 결집해내야 한다. 노원병에서 마셔야 했던 쓴 고배가 4년 뒤의 승리의 잔으로 이어지게 하기 위해, 우리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직시하며, 생각하고 동시에 실천하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 총선의 주제는 한나라당이 과반수를 넘느냐 못 넘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신당의 의석이 0석이 되느냐 1석이 되느냐, 혹은 2석 이상을 차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자. 정당투표에서 3%를 넘어서 비례대표가 당선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물론 그 가능성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되겠지만, 정당투표 1%를 얻기 위해서는 40만명의 표가 필요하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8석이나 재미를 본 지난 총선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군소정당과 대형 정당들이 모두 그게 쏠쏠한 장사가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반면 지역구는, 남은 이틀간 세몰이를 하면 승기를 굳히거나 역전할 수 있다. 7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는 것이 총선 지역구 선거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구에 진보신당 후보가 등록되어 있지 않다면,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진보신당을 살리고 보자는 판단을 하고 있는 직장인이라면, 오늘이나 내일은 월차를 내고 노원 병이나 덕양 갑으로 가자. 다소 호들갑스럽게 말하자면, 당신의 월차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다.
노원 병은 그야말로 초박빙이다. 여론조사 결과 노회찬이 밀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여론조사에서 입 다물고 조용히 투표하러 가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오늘과 내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판가름난다. 덕양 갑은 들끓고 있다. 이젠 거의 진보신당 홍보 대사가 되어버린 문소리, 임순례 감독, 그 외 온갖 유명인사들이 심상정 한 사람을 국회로 생환시키기 위해 며칠째 그 곳에서 투쟁하는 중이다. 특히 민주주의의 화신인 최장집이 진보신당의 두 후보를 살리겠다고 나서고 있는 모습은 대단히 고무적이다. 심상정과 노회찬을 당선시키는 것은 비단 진보진영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역구에서는 당신의 작은 노력이 헛되지 않다. 단 한 표라도 더 끌어모아야 하는 상황이고, 또 그럴 수 있다. 대학생들은 자체 휴강을 하고, 직장인들은 연월차를 끌어쓰도록 하자. 월차부대와 휴강돌격대가 노원과 덕양을 점거해야 한다. 이 글을 올리는 즉시, 나 또한 노회찬 선본으로 향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바로 지금일지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노원과 덕양으로 가자.
노회찬 선본 연락처: 02-935-6986 심상정 선본 연락처: 031-966-0797 전화로 문의하면 사무실 위치와 오는 방법 등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문의하고 달려가도록 하자. 일손이 워낙 부족한 상황이다.
《존재와 시간》을 읽다가 문득,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방법론이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일상언어 분석과 통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싶어서, 관련된 논문을 찾기 위해 구글에서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그 결과 Edward Minar라는 사람이 쓴 "Heidegger, Wittgenstein, and Skepticism"이라는 논문이 뜨길래, PDF를 다운받아서 읽으려고 했는데 문장이 다소 거칠어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출력해서 정독했는데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띈다.
우선 독일 철학자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영어 번역본을 읽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한국 학계에서도 한국어 번역본을 통해 연구하는 것을 용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긴 하지만, 특히 하이데거처럼 독일어의 어감에 의지하여 작업을 진행한 이에 대한 논문이 순전히 영역본에 기대어 있다는 것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This is later Heidegger's way of reinscribing his earlier claim that Dasein, human being, is Being-in-the-world--the basic thesis of Division I of Being and Time"같은 표현을 접했을 때 드는 막대한 당혹감은 또 어떤가. 현존재와 인간 존재의 관계를 저렇게 단순하게 이해하지 말라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15판에 자신이 달아놓은 주를 통해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 그렇지만 존재는 여기서 인간의 존재(실존)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다음의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세계-내-존재는 전체로서의 존재에 대한, 즉 존재이해에 대한 실존의 연관을 자체 안에 포함하고 있다. (28, 마르틴 하이데거, 이기상 옮김, 《존재와 시간》 (서울: 까치, 1998))
짐작컨대 저 주석은 프랑스의 실존주의자들(특히 사르트르)을 떨쳐내기 위해 달아놓은 것일테지만, 현존재에 대한 너무도 단순한 이해는 미국에서도 돋보인다. 그리고 결론부의 "The skeptic's discomfort with the idea that our mutual intelligibility rests on nothing deeper than our form of life is understandable"이라는 문장과 맞닥뜨리면, '지금 《확실성에 관하여》쓴 비트겐슈타인 무시하나여!'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까지 느끼게 된다. 이게 대체 뭐지?
문제의 논문은 The Harvard Review of Philosophy의 2001년 9번째 호에 실렸다고 한다. 분석철학이 거두고 있는 성과를 무시하는 건 아닌데, 대륙철학의 텍스트에 대해 미국 학자들이 하는 말을 왜 아무도 듣는 척 하지 않는지만큼은 확실히 알 것도 같다. 여기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간극이 있는데, 과연 그걸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라캉 논쟁을 통해 '대륙철학의 존립 근거' 따위를 머리에 넣고 굴리다가, 우연찮게 '미국 철학'의 텍스트를 읽어본 소감은 대략 이렇다.
전 메가스터디 스타 강사인 이범의 심상정 지지 동영상. 학원 강사가 공교육 강화를 위해 발벗고 나서는 상황이다. 6분 이후 나오는 쓸데없는 이미지컷이 에러이긴 하지만, 학원 강사답게 요점만 집어서 설명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4월 3일 손석희의 시선집중. 심상정과 한평석 후보 인터뷰. 단일화가 되건 되지 않건, 부친상 기간동안 화제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흘 공백이 있었지만 그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 막판 유세에 힘을 기울인다면 역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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