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7-24

이건희와 송두율

최근 두 건의 중요한 재판이 있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 대한 것과, 송두율 교수에 대한 것. 두 판결 모두 집행유예로 마무리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전자는 면죄부를 주기 위한 무죄 판결로, 후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한 유죄 판결로 보인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건 집행유예의 문제가 아니라 구속수사와 불구속수사의 문제이다.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이건희 회장을 구속수사하지 않았다. 반면 증거를 인멸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송두율 교수를 구속수사했다. 한국인들은 그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느냐 무죄 판결을 받았느냐로 그의 유죄와 무죄를 판가름하지 않는다. 순사에게 붙들려서 철창에 갇힌 후 콩밥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오직 그것만이 관건인 것이다.

똑같이 집행유예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건희를 무죄로 보게 만든 검찰의 마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광우병 대책회의 관계자들이 조계사에 숨어 농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손에 넘어가 '구속'되는 순간 대중들은 그를 죄인 취급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헌법 제1조를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의 형사소송법이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지 않고, 동시에 국민들의 법감정 또한 '나쁜놈은 잡아넣어야지'에서 나아지고 있지 않다.

재판 결과만 놓고 보면 이건희와 송두율은 모두 유죄다. 하지만 그 결과에 수긍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두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있다. 그들을 무죄로 만든 것도, 또한 유죄로 만든 것도, 국민들의 법감정을 교묘하게 활용하고 있는 검찰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댓글 5개:

  1. 눈팅만 하다, 사소하달 오류 하나가 눈에 띄어 지적합니다. 2007년 6월 1일에 대폭 개정된 현행 형사소송법 제 198조 1항은 "피의자에 대한 수사는 불구속 상태에서 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불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천명하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그것이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야 그와 별개의 문제겠지요.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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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아, 그렇죠. 저도 쓰면서 가물가물해서 급하게 찾아본 결과 구 형사소송법이 나와서 그렇게 썼습니다. 2007년 2학기에 형사소송법을 재수강했는데, 그때에도 주로 구 형사소송법을 토대로 강의가 진행되었고 또 제가 많이 졸아서... 그 중요한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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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형소법 하시니 어제 본 시험이...ㅠㅠ

    아^^;
    정태님 말씀처럼; 얼떨결에 면접 붙었어요.
    응시표엔 원래 6개월 이내 사진 붙이는 게 원칙인데, 6년 전 사진 붙여서(...) 엄청 혼났거든요...ㅠㅠ

    사진때문에 또 떨어지나보다 하고 울었는데, 그냥 제가 그날 면접시험장에 눈썹 안 그리고 와서 심술부리셨던 건지(눈썹 안 그린 여자가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붙었습니다.

    헤헤헤.
    조만간 이것저것 좀 보내드릴게요.
    다카하시 루미코 단편선이 몇 권 있는데,
    찾아서 보내드릴까요?
    전에 만화책 몽땅 다 젖었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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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그냥... 정보 제공 차원에서 덧글을 답니다. '불구속 수사'의 원칙은 형사소송법이 만들어진 초기(비교법적으로 보면 근대 형사소송 체계가 확립된 이후부터 쭈~욱)부터의 대원칙입니다. 1961년에 처음 형사소송법이 만들어졌을때부터(확인은 못했지만 아마 일제시대에도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었을 겁니다.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하면 매우 많은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거든요. 최소한의 이론적 형평성도 구하기 힘들고...), 인신구속과 관련된 조항은 기본적으로 '~한 사정(요건)이 있을 때에만 구속할 수 있다.'라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석상 구속은 '예외적'으로만 허용(그 요건을 충족할 때에만 가능하니까요)되며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 되는 것이지요. 지난 2007년의 형소법 개정은 당연한 원칙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 조항이 있던 없던 해석상(그리고 실질에 있어서도) 불구속 수사가 원칙입니다. 신문 지상에 나오는 사건만을 기준으로 보면 수사하면 모조리 구속하는 것 같지만, 실제 형사사건(보통 검사가 한달에 150건에서 200건 정도 처리하는)에서 구속은 10건이 채 되지 않습니다(게다가 꽤 많은 비율이 구속적부심을 통해 풀려나고 있죠). 현재 우리 나라에서 불구속 수사의 원칙은 상당히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안지켜지는 부분이 있고 그 곳은 '이념' 과 '자본(가난한 자에 대한 편견 포함)' 그리고 '국민법감정(도통 이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대충 확인되는 바로는 -매우 주관적으로- 조선일보 100자평에 글 올리시는 분들의 생각과 상당부분 일치되더군요)'이 개입된 곳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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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kritiker/ 앗, 리플이 달린 걸 지금 봤네요. 축하드려요. 다카하시 루미코 단편선 이야기도 반가운 소식이군요. 언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본문과 무관한 이야기는 방명록을 이용해 주세요.)


    익명의 변호사/ 제가 형사소송법을 배운 교수님이 워낙 검사들을 싫어하는 분이셔서, 본문의 내용보다는 일종의 뉘앙스에 더 익숙해진 탓에 과감한 이야기를 내놓은 것 같습니다. 실무에 종사하시는 분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저로서는 그 내용을 당연히 더욱 신뢰할 수밖에요. '결정적'인 사건에서 소수자들은 구속수사하고 기득권에게는 '불구속 수사 원칙'을 칼같이 지켜주는 검찰의 행동이 몹시도 못마땅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법 체계가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부당한 일이 되겠죠. 좋은 지적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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