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1

2009년 독서 목록

  1. 20090105 - 움베르토 에코, 김운찬 옮김,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1)
  2. 20090110 - 강영안,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서울: 소나무, 2000)
  3. 20090114 - 앙드레 고르, 임희근, 정혜용 옮김, 『에콜로지카』(서울: 생각의나무, 2008)
  4. 20090114 -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지식인을 위한 변명』(서울: 한마당, 1999)
  5. 20090120 - 존 에이거, 이정 옮김, 『수학 천재 튜링과 컴퓨터 혁명』(서울: 몸과마음, 2003)
  6. 20090122 - 게르트 기거랜처, 안의정 옮김, 『생각이 직관에 묻다』(서울: 추수밭, 2008)
  7. 20090127 - 페터 제발트, 이희숙 옮김, 최현식 감수, 『가톨릭에 관한 상식사전』(서울: 보누스, 2008)
  8. 20090203 - 한국18세기학회, 『위대한 백년 18세기 - 동서 문화 비교 살롱토크』(서울: 태학사, 2007)
  9. 20090204 -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10. 20090205 - 에드워드 사이드, 장호연 옮김,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서울: 마티, 2008)
  11. 20090207 - 에드워드 사이드, 김정하 옮김, 『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서울: 마티, 2008)
  12. 20090326 - 조지프 히스, 앤드류 포터, 윤미경 옮김, 『혁명을 팝니다』(서울: 마티, 2006)
  13. 20090327 - 데를레프 포이케르트,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서울: 개마고원, 2003)
  14. 20090328 - 리처드 예이츠, 유정화 옮김, 『레볼루셔너리 로드』(서울: 노블마인, 2009)
  15. 20090329 - 오트프리트 회페, 박종대 옮김, 『정의-인류의 가장 소중한 유산』(서울: 이제이북스, 2004)
  16. 20090330 - 이영록, 『우리 헌법의 역사』(서울: 서해문집, 2006)
  17. 20090330 - 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서울: 민음사, 1998)
  18. 20090402 - 테오도르 아도르노, 김유동 옮김,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얻은 성찰』(경기도 파주: 길, 2005)
  19. 20090403 - 강영안, 『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서울: 소나무, 2002)
  20. 20090407 -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서울: 디자인플럭스, 2009)
  21. 20090411 - 노베르트 엘리아스, 박미애 옮김, 『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경기도 파주: 문학동네, 1999)
  22. 20090416 - 얀 크노프, 이원양 옮김, 『베르톨트 브레히트』(서울: 인물과사상사, 2007)
  23. 20090416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1』(서울: 아카넷, 2006)
  24. 20090418 - 고종석, 『경계긋기의 어려움』(서울: 개마고원, 2009)
  25. 20090421 -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옮김, 『게공선』(서울: 문파랑, 2008)
  26. 20090421 - 베르톨트 브레히트, 임한순 옮김, 『브레히트 희곡선집 1 - 서푼짜리 오페라 외』(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6)
  27. 20090424 - 토르스타인 베블런, 김성균 옮김, 『유한계급론』(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5)
  28. 20090428 - 아마미야 카린, 송태욱 옮김, 『성난 서울』(서울: 꾸리에, 2009)
  29. 20090428 - 마스모토 하지메, 김경원 옮김, 『가난뱅이의 역습』(서울: 이루, 2009)
  30. 20090503 - 게리 윌스, 권혁 옮김,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6)
  31. 20090505 - 게리 윌스, 김창락 옮김,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서울: 돋을새김, 2007)
  32. 20090509 - 마루야마 마사오 외, 고재석 옮김, 『사상사의 방법과 대상』(서울: 소화, 1997)
  33. 20090510 - 이매뉴얼 더만, 권루시안 옮김,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서울: 승산, 2007)
  34. 20090517 - 도글라스 호프스태터, 데니얼 데닛, 김동광 옮김,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서울: 사이언스북스, 2001)
  35. 20090521 - 게리 윌스, 안인희 옮김, 『성 아우구스티누스』(서울: 푸른숲, 2005)
  36. 20090524 - 김욱, 『법을 보는 법 - 법치주의의 겉과 속』(서울: 개마고원, 2009)
  37. 20090525 - 플라톤, 강철중, 김우일, 이정호 옮김, 『편지들』(서울: 이제이북스, 2009)
  38. 20090605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순수이성비판 2』(서울: 아카넷, 2006)
  39. 20090612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서울: 아카넷, 2005)
  40. 20090615 - 조지프 히스, 노시내 옮김, 『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서울: 마티, 2009)
  41. 20090620 - 강준만, 『대한민국 소통법』(서울: 개마고원, 2009)
  42. 20090717 - 김두식, 『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경기도 파주: 창비, 2009)
  43. 20090721 - 데이비드 퍼피뉴, 신상규 옮김, 『의식』(서울: 김영사, 2007)
  44. 20090721 - 리누스 토발즈, 팀 오라일리 외, 이만용 외 옮김, 『오픈 소스』(서울: 한빛미디어, 2000)
  45. 20090721 - 죠지 레이코프, 로크리지연구소, 나익주 옮김, 『프레임 전쟁 - 보수에 맞서는 진보의 성공전략』(경기도 파주: 창비, 2007)
  46. 20090806 - 나오미 울프, 김민웅 옮김, 『미국의 종말』(서울: 프레시안북, 2008)
  47. 20090806 - 김국현, 『웹 이후의 세계』(서울: 성안당, 2009)
  48. 20090812 - 딜런 에번스, 이충호 옮김, 『진화심리학』(서울: 김영사, 2001)
  49. 20090828 - 앨런 와이즈먼, 이한증 옮김, 『인간 없는 세상』(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50. 20090831 - 슈테판 람슈토르프, 한스 요하임 셸른후버, 한윤진 옮김, 오재호 감수, 『미친 기후를 이해하는 짧지만 충분한 보고서』(서울: 도솔, 2007)
  51. 20090901 - 제임스 듀이 왓슨, 김명남 옮김,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서울: 이레, 2009)
  52. 20090902 - 딜런 에반스, 안소연 옮김, 『진화론』(서울: 김영사, 2007)
  53. 20090906 - A. L. 바라바시, 강병남 김기훈 옮김,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서울: 동아시아, 2002)
  54. 20090908 - E. E. 샤츠슈나이더, 현재호 박수형 옮김, 『절반의 인민주권』(서울: 후마니타스, 2008)
  55. 20090911 - F. 코플스톤, 김보현 옮김, 『그리스 로마 철학사』(서울: 철학과현실사, 1998)
  56. 20090921 - F. 코플스톤, 박영도 옮김, 『중세철학사』(서울: 서광사, 1998)
  57. 20090922 - M. 하이데거, 『세계상의 시대』
  58. 20090925 - 레이첼 카슨, 김은령 옮김, 『침묵의 봄』(서울: 에코리브르, 2002)
  59. 20090928 - 루트 모단, 김정태 옮김, 『엑시트 운즈』(서울: 휴머니스트, 2009)
  60. 20090929 - F. 코플스톤, 김성호 옮김, 『합리론』(서울: 서광사, 1998)
  61. 20091003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상)』(서울: 아르테, 2008)
  62. 20091004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하)』(서울: 아르테, 2008)
  63. 20091006 - 질 들뢰즈, 박찬국 옮김, 『들뢰즈의 니체』(서울: 철학과현실사, 2007)
  64. 20091006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상)』(서울: 아르테, 2008)
  65. 20091007 - 스티그 라르손, 임호경 옮김, 『밀레니엄 II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하)』(서울: 아르테, 2008)
  66. 20091008 - 우석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 세대 새판짜기』(서울: 레디앙, 2009)
  67. 20091009 - 피터 싱어, 함규진 옮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서울: 산책자, 2009)
  68. 20091010 - 제레드 다이아몬드, 강주헌 옮김, 『문명의 붕괴』(서울: 김영사, 2005)
  69. 20091014 - 존 히든, 이두 글방 옮김, 『비트겐슈타인』(서울: 이두, 2001)
  70. 20091015 - 피터 퓨, 정회석 옮김, 『케인즈』(서울: 이두, 1999)
  71. 20091015 - 우석훈, 『생태요괴전』(서울: 개마고원, 2009)
  72. 20091015 - 우석훈, 『생태페다고지』(서울: 개마고원, 2009)
  73. 20091015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영구평화론 - 하나의 철학적 기획』(서울: 서광사, 2008)
  74. 20091016 -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옮김, 『칸트의 역사철학』(서울: 서광사, 1992)
  75. 20091018 - 임철규, 『귀환』(경기도 파주: 한길사, 2009)
  76. 20091019 -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김경희 옮김, 『군주론』(서울: 까치글방, 2008)
  77. 20091022 - 가와노 히로시, 진중권 편역, 『컴퓨터 예술의 탄생』(서울: 휴머니스트, 2008)
  78. 20091027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1)』(서울: 나남, 2008)
  79. 20091028 - 토머스 홉스, 진석용 옮김, 『리바이어던(2)』(서울: 나남, 2008)
  80. 20091029 - 조지 레이코프, 나익주 옮김, 『자유 전쟁 -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진보와 보수의 대격돌』(서울: 프레시안북, 2009)
  81.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서울: 시공사, 2009)
  82. 20091030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2)』(서울: 시공사, 2009)
  83. 20091101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3)』(서울: 시공사, 2009)
  84.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4)』(서울: 시공사, 2009)
  85.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5)』(서울: 시공사, 2009)
  86. 20091103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6)』(서울: 시공사, 2009)
  87. 20091103 - 위르겐 하버마스, 한승완 옮김, 『공론장의 구조변동』(서울: 나남출판, 2004)
  88.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7)』(서울: 시공사, 2009)
  89. 20091104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8)』(서울: 시공사, 2009)
  90.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9)』(서울: 시공사, 2009)
  91. 20091105 -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10)』(서울: 시공사, 2009)
  92. 20091108 - 에드문드 후설, 이종훈 옮김,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서울: 지만지, 2008)
  93. 20091110 - 진중권 엮음, 『미디어아트 - 예술의 최전선』(서울: 휴머니스트, 2009)
  94. 20091117 - 노르베리트 힌스케, 이엽, 김수배 옮김, 『현대에 도전하는 칸트』(서울: 이학사, 2004)
  95. 20091119 - 무함마드 유누스, 김태훈 옮김, 『가난 없는 세상을 위하여』(서울: 물푸레, 2008)
  96. 20091123 - 제프리 영, 윌리엄 사이먼, 임재서 옮김, 『iCon: 스티브 잡스』(서울: 민음사, 2005)
  97. 20091123 - 김기창, 『한국 웹의 불편한 진실』(서울: 디지털미디어리서치, 2009)
  98. 20091125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부시는 전쟁중』(서울: 따뜻한손, 2003)
  99. 20091201 - 아우구스트 몬테로소, 김창민 옮김, 『검은 양과 또 다른 우화들』(서울: 지만지, 2008)
  100. 20091204 - 김태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경기도 파주: 돌베게, 2009)
  101. 20091206 - 밥 우드워드, 김창영 옮김, 『공격 시나리오』(서울: 따뜻한손, 2004)
  102. 20091208 - 조지 몬비오, 정주연 옮김, 『CO2와의 위험한 동거』(서울: 홍익출판사, 2008)
  103. 20091212 - 김학원, 『편집자란 무엇인가』(서울: 휴머니트스, 2009)
  104. 20091218 - 폴 크루그먼, 예상한 외 옮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서울: 한국경제연구원Books, 2009)
  105. 20091221 - E. 캇시러, 유철 옮김, 『루소, 칸트, 괴테』(서울: 서광사, 1996)
  106. 20091223 - 임석재, 『계단, 문명을 오르다: 고대 ~ 르네상스』(서울: 휴머니스트, 2009)
  107. 20091224 -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옮김, 『기호: 개념과 역사』(경기도 파주, 열린책들: 2009)

2009-12-30

세대론 메모

아까 모 편집자님과 만나서 식사하던 중 나온 이야기.

'대학생 말하기 강의'라는 책이 있다고 하자. '20대 말하기 강의'라는 책을 또 누군가 낸다고 하자. 두 책을 사서 볼 독자층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목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대 문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대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있고,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쩌면 객관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20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당장 검색해서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정독할 것).

특히 조선일보. '386세대'라는 단어를 띄움으로써,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원 및 인근 엘리트들 사이의 세대 다툼으로 치환해버렸다. IMF 당시 30대였던, 80년대 학번을 단, 60년생들. 이른바 '58년 개띠'들에게 밀리는 세대들. 이 구조가 지금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386에게 밀리는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세대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왜 노동문제에 무관심한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이 유의미한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적 담론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특정한 문화 컨텐츠를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위로서의 세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구학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보편성을 지니는 세대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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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세대론은 '작은 칼'이다. 작은 단위에서는 잘 들어맞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학생들의 세대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학부제의 전면적 도입 및 실시였다. 그것이 기존의 학생 조직의 재편을 강요하면서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학가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법조인들에게는 곧 들이닥칠 로스쿨 세대가 기점이 될 터이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세대들도 영상원이라는 하나의 교육기관이 생긴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세대론은 작은 단위를 분석할 때 유효하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대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언2: 세대론에 한국의 식자층이 우르르 쏠려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협소하고 위축되어 있으면, 하나의 섹트를 분석할 때에나 맞아떨어질 이야기에 글 읽는 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대론을 유지하고 싶다면 세대론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88만원 세대'라는 히트상품을 버릴 각오를 하고 논의를 구성해야 한다. 담론적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12-29

이건희 사면 문제

이건희 사면 문제의 핵심은 '사면법' 그 자체이다. 제왕적 사법부 운운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서 개소리다. 사법부에서 아무리 잡아넣어봐야 뭐하나, 어차피 '사법적 제왕', 즉 대통령이 사면해주면 그만인 것을.

사면법은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권력의 칼을 쥔 이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절대반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탈피'를 부르짖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 당시 '탈권위주의'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참조할 것.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올해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올해 취임한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오직 그 하나의 업적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취임 즉시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크에서 병력을 즉각 철수하겠다고 말했으며,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노라 선포했다.

드라마틱한 당내 경선을 헤치고 후보 자리에 올랐으며, 지지자들의 열성적인 팬덤에 힘입어 집권하였고,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점 등 너무도 닮은 모습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오바마에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가령 올해 8월 27일 미디어스에 송고한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중도주의의 덫”을 쓸 당시, 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 법안들을 집권 초기에 밀어붙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구하다가 지지 기반을 상실해버린 노무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미국 오바마 대통령  
 
현지시각으로 12월 24일 아침, 기나긴 토론 끝에 미 상원 의회는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전부와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져 60표를 확보하였고, 공화당 의원들은 전부가 반대하고 일부는 기권하였으나 39표에 그쳐 법안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큰 고비를 넘겼다. 상원과 하원의 찬성표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더라도, 드디어 미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 시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바마 취임 1년, 그가 거두어낸 가장 값진 승리이다.

우리는 국제 문제를 바라볼 때 크게 두 가지 오류에 빠지곤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세상 모든 일을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지구 중심의 오류’이다. ‘빌 클린턴의 방북은 김대중의 뜻에 따른 것이다’와 같은 발상이 그에 해당한다. 클린턴이 납북된 여기자들을 데려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납치되건 살해되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도 있느냐’고 정부 관리가 찍찍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평범한 시민도 아닌 기자가 취재 도중 납치되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클린턴은 김정일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 머물렀고, 기자들과 함께 재빨리 북한을 탈출했다. 클린턴 개인이 김대중을 존경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과 미국의 대외정책은 무관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나 모든 별들이 자기 머리 위에서 도는 줄 아는 법이다.

과도한 유비추리의 오류’ 또한 피하기 어려운 오류에 속한다. 국제 문제는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발생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자국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을 고스란히 적용하는 것은 곤란할 수 있다. 가령 올해 이란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를 떠올려보자. 초록색 헝겊과 손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민주화와 재투표를 요구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우리가 작년에 겪었던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2009년의 이란과 2008년의 대한민국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촛불시위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대통령 후보건 이슬람 학자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 민병대가 자국민을 총으로 쏴죽이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발생한 목숨을 건 시위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 한해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필자 본인을 포함해서, 이 두 가지 오류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참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미국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겠다는 음험한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 끼어들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거니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테러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12월 26일 오늘 아침에도 한 건의 테러 기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민항기 안에서 폭약을 터뜨리려다 실패한 한 젊은이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증파하는 것은 물론 지지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처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은 아니다. 한국이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우리가 파병한다고 해서 미국이 자신들의 전략적 필요성을 어겨가며 해야 할 폭격을 안 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면 그 순간 우리는 해당 테러 단체의 적국이 되며,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명이 위협당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미국인을 겨냥한 테러는 벌어진다. 따라서 해외에 군대를 보내서라도 테러 단체를 무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은 ‘이해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오바마가 말하는 ‘초당적 협력’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한 대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의회 정치의 수준과 문화가 다르고, 여당의 정치적 능력과 목표에 대한 동기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수십여 일에 걸쳐 끝없는 토론을 통해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무조건 결사반대로 막아서는 한국의 국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토론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전에,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참여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 실패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을 설득하여 폭력적 충돌 없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그렇게 하는 대신 야당을 ‘꼴통’으로 몰아가기에 바빴고, 결국 협상은 벌어지지 않은 채 국회는 다시 파행으로 접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거론했다.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지자들이 바라는 만큼의 강도 높은 개혁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직도 노무현과 오바마는 유사하다. 그러나 한 쪽은 ‘현실’의 이름으로 ‘이상’을 폐기처분하면서 스스로의 행보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남긴 반면, 다른 한 쪽은 ‘현실’과 ‘이상’을 은근과 끈기로 조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우리는 국제 문제를 지나치게 희화하하여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월 6일 뉴욕타임즈에 실린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이라는 장문의 기사는 탁월한 조정자이자 경청자로서 오바마가 지니고 있는 조정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는 끝없는 회의와 토론을 통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한 것이 되리라고 보장할 수야 없지만, 부시 정부의 그것처럼 성급하고 개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오바마가 미국의 노무현이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거친 곳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노무현이 한국의 오바마였더라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일 수도 있고, 어처구니 없이 떠나버린 전대미문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덜 가신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오바마와 노무현은 여러 모로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오바마를 바라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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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사진들

잊을만 하면 올라오는 사진들입니다.

다량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 특별 감자 셀러드.



당근과 빨간 파프리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 보았음.



2. 가을이와 입동이




무릎고양이 입동이...


의 앞발.


부엌 매트에 턱을 괸 입동이


책장 정리하던 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가을이


둘이 별로 안 친한 분위기


책상을 정복한 가을이


생체 레그워머 입동이



3. 저는 장남입니다


된장남...


악플을 상대하다가 지친 된장남...


이런 분위기의 까페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된장남인 것입니다.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천박하다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비애감이 든다.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인문학 하는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말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좋지만 숲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위대한 작가들이 아니다. 그 작가들처럼 되고 싶어서 그들의 책을 사고 문체를 흉내내며 문예지를 탐독하던 지망생들이야말로 시대의 버팀목이다. 평지의 거봉은 없다. 모든 높은 봉우리는 비슷한 높이의 산들과 함께 산맥을 이루고, 산맥은 가장 야트막한 언덕까지 쭉 이어진다. 한 마리 호랑이의 포효를 위해서는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2009-12-23

싸움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그 누군들 이런 소모적인 논쟁이 지겹지 않겠는가. 지난 며칠 동안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과연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이 상대편의 주장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정당의 지지자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 말고 나 스스로의 모습을 돌이켜보자. 과연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도 경청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왔던가? 무조건 귀를 막고 반대되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매진해온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덮어놓고 외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 당은 의석이 둘 뿐인 작은 정당입니다. 독자적으로 총선을 치를 경우 잃을 것은 없습니다. 의석도 늘어날 것이요 당의 존재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반면 현재 백여 개의 의석을 보유한 민주당은 '파멸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수도권 선거는 보통 2천표 안팎의 차이로 승패가 갈립니다. 약 10만 명이 투표하는 선거구라면 유효투표의 2% 안팎의 차이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우리당 후보들은 지역구의 성격과 후보의 경쟁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도권에서 그보다는 훨씬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 것이며, 한나라당보다는 잠재적 민주당 지지표를 훨씬 많이 빼앗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라당에게 어부지리를 안겨준다는 비난이 일겠지만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민주당이 리모델링 신당으로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음을 분명하게 경고했고 민주당 의원들이 정당개혁의 흐름에 합류할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와, 정말 구구절절 옳은 말이구남.

2009-12-10

오바마 노벨상 수상 연설

* 우리는 새로운 아메리카나로 들어갔음. 제 머리에 왕관을 얹은 나폴레옹처럼, 오바마의 입을 빌어 미국은 이제 대놓고 세계 경찰이 되는 듯.

* 부시가 시작한 'war on terror'가 오바마에 의해 추인된 것도 기록 포인트.

* '제국의 몰락'을 말하는 분들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제국의 몰락'으로 바뀌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제국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전후 관계를 거꾸로 보면 안 됨.

* 연설 졸라 잘 함. 우크라이나 총리 율리아 티모센코의 얼굴에 밀려오는 감동의 쓰나미. 애는 자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윌 스미스. 기타등등.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내가 내 연필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팔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크로마티 고교에 나온 것처럼 괜히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유다. 반면 가을이가 내 연필을 빌려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다면, 내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그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주인인 나의 허락 없이 그것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하거나 처분해버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오공감의 44 사이즈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소유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피오줌을 싸건 말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그러나, 여성의 소유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 즉 가부장 혹은 혈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없다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캠페인으로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전근대적 여성관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토록 이명박 정부의 여성정책, 혹은 인구정책에 대해 가볍게 비아냥거리던 이글루스의 여론 또한 거의 비슷한 프레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혈뇨가 나오도록 밥을 굶는 사람이 왜 '건강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명제에 동의한다면 애초에 그런 값산 '충고'를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통해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지 않다. 성매매나 장기매매의 경우 그것을 합법화하면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암스테르담의 합법적 성매매로 인해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동구권 여성들이 몰려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자발성'의 허구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의 저하는 그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주사하고 먹으며 인공적으로 추출된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문제의 여성은 혈뇨를 누었지만 단백질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소변에 단백질 성분이 섞여 나오고 그 과정에서 신장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디빌더 앞에서 '지금,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느끼한 충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성'의 몸은 남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소유권 행사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몇몇 미덕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의 폐단에 항거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태초부터 겪어야 했던 딜레마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미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에게 '너는 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전근대적 함성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제발 기초적인 것들부터 지키면서 살자.

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오바마의 대답은 병력 증파였다. 3만명 이상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투입하고, 나토(NATO)와 그 외 동맹국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2011년 이전까지 ‘이 일을 끝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비난은 비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미주의’라고 통칭되는 단순한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이 파병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9/11테러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라크 전쟁,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 미국의 국제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비판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어떤 입장과 논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평가할 것인가? 무턱대고 ‘미국이 하는 행동이니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던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익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미국을 비판하는가?

   
  ▲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청와대제공  
 

끝없이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적어도 한 해에 한 권 이상 책을 쓰는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 라캉을 영미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비평서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 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애매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세계경찰로서의 미국, 안 될 게 뭐 있는가? 탈냉전 상황은 실로 그 공백을 채울 어떤 세계적 권력을 요청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신 로마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상식적 지각을 상기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위의책 32쪽, 강조는 저자)

지젝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로 들어가며, 세계 제국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럴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지젝은 미국더러 세계 제국이 되라는 것인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미국이 세계 제국이라면, 미국은 국제법에 있어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 국왕이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활동하려면 ICC의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ICC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기속할 뿐, 그 조약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끔 하는 ‘권력’에게까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의 지위를 벗어나 정말 세계 제국이 된다면, 이라크 전쟁도 ‘합법적’인 것으로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추진중인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드높은 이유도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국가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안정시키고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국경을 잘 틀어막고 신분 조회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테러의 가능성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약 1년 전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테러도 그렇거니와, 며칠 전에는 러시아에서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1세기는 테러의 시대이며 그것은 인류가 처한 보편적 위협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 정부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테러 발생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위협을 ‘미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놓고 본다면, ‘왜 미국이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비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100명을 잡기 위해 10만 명이 투입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 마이클 무어의 일갈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역할을 일개 국민국가로 한정하고 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 행정부도 바보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혹자는 ‘그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전쟁의 이유로 거론하였지만, 그렇다면 미국이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다할 천연자원도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척박한 나라이다. 게다가 전쟁을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핵심적인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쟁을 하는가? 가능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타당하냐 부당하냐에 대한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은 분명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나라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테러 조직에게 값비싼 폭탄을 퍼붓고 수만 명의 병력을 보내 잔당을 소탕하려 들겠는가?

‘반미주의’라는 단순한 틀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탈레반은 문제적인 집단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옥이 되었다. 현장법사가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대한 바미안 석굴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으며 탈레반을 등에 업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알카에다는 민간인들이 탑승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상 초유의 테러를 저질렀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 행위마저도 ‘문화적 다양성’ 같은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러 조직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의 열악한 여건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과, 그 테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단순한 ‘반미주의’는 할 말이 없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대로 ‘이 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니, 우리는 손을 떼자’는 식의 비판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 비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대내정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나 가능한 화법이다.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 오지랖 넓은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미국이 진정 일개 국민국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려 든다면, 우리는 더 높아진 군사비와 더 불안해진 국경을 놓고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마이클 무어는 흡족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처지는 그 쿨한 미국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지젝이 엉성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세계 제국으로 스스로를 확립하고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개 국가 자격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개시하여 한 나라를 거꾸러뜨렸다. 그런 미국에게 제국의 왕관을 씌우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게다가 그 제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나오고, 그것은 결국 미국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왜 한 나라의 시민들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고된 일을 요구하면서 ‘도덕적’일 것까지 바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미국과 관련된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허술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큰 딜레마이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딜레마에 마주설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국제 문제에서 진보진영이 ‘수구꼴통’에 비해 말빨이 딸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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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3

철도파업과 한국식 공감법

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났다. 투쟁대오를 가다듬어 다시 싸우자고 발표했지만, 파업을 푸는 순간 구속 행렬이 이어질 것이고, 실제로 파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축들은 모두 막대한 민사소송을 당한 채 감옥으로 향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용산 참사 1심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드물게도 이번 철도파업에서는 인터넷의 여론이 파업에 동정적인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노회찬의 표현대로 법치주의가 아닌 '박치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네티즌들의 알량한 손가락 놀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여론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저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의아한 것중 하나가 바로 저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어가 쓰이는 화법이 놀랍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공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잘 읽었습니다^^'라는 리플을 다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즉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혹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공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감은 재채기처럼 조건반사적인 것이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출신의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의 최근작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등장하는 논증들은 대부분 이 공감의 무조건성에 기대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가령 지금 당신의 앞에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당신의 주머니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고, 어떤 수영선수가 '나는 누군가 내게 십만 원을 준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수영선수에게 십만 원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철로가 있고,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동차가 철로의 왼쪽 가지 위에 놓여 있다.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른쪽 가지에는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선로 위에 꽁꽁 묶여 있고, 당신은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밑에서부터 열차가 올라오고, 당신은 분기점에서 그 기차를 왼쪽으로 보낼지 오른쪽으로 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승용차를 건지기 위해 그 기차를 오른쪽으로 보낼 수 있는가?

경찰과 검찰, 대통령과 사측은 손에 박달나무 몽둥이를 움켜쥐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매일같이 표명하고 있다. 파업을 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이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짐으로써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에 빠졌고 철로에 묶였다. 그러한 사고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피터 싱어가 물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보고 무턱대고, 주체할 수 없이 드는 동정심 따위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다. 내 연봉보다 많이 받는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어린이의 앞에서 '너 강남 살아 강북 살아? 강남 살면 안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이쯤 되면 '파업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거고...' 운운하겠지만, 두 번째 예를 상기할 것.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 나의 작은 불편과 타인의 엄청난 고통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약 5년간 1호선을 타고 부천에서 신도림 혹은 신길까지 갔다. 안암역 혹은 고대역까지 총 1시간 40분씩 시달려본 사람이다. 철도 파업을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하지만 나의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구속당하고 감옥에 처박히고 손해배상 폭탄을 맞아가며 가정이 파탄나고 절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의 체취가 진동하는 국철에서 덜컹거리는 게 재미있고 흥겹고 신나서가 아니라, 내가 이 고통을 묵묵히 참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엄청난 시련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선택적 공감'을 하는 기술을 익혀버렸다. 예전에 '팩트골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의 디테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문제는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아닌가? '공감이 안 가네요'라고 한 마디 찍 내뱉는 그들을 보면, 내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이 신인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파업은 패배로 돌아갔고, 공공부문의 가장 크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패배한 만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분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귀족노조가 사라지면 모두 부자가 되려나? 모두 노예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부의 악랄한 선전질과 국민들의 '한국식 공감법'이 맞물려, 우리는 아주 비참하게 일하고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덜컥 잘려도 불만 한마디 표하지 못하는, 그런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당신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