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대답은 병력 증파였다. 3만명 이상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투입하고, 나토(NATO)와 그 외 동맹국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2011년 이전까지 ‘이 일을 끝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비난은 비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미주의’라고 통칭되는 단순한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이 파병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9/11테러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라크 전쟁,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 미국의 국제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비판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어떤 입장과 논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평가할 것인가? 무턱대고 ‘미국이 하는 행동이니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던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익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미국을 비판하는가?
▲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청와대제공 | ||
끝없이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적어도 한 해에 한 권 이상 책을 쓰는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 라캉을 영미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비평서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 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애매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세계경찰로서의 미국, 안 될 게 뭐 있는가? 탈냉전 상황은 실로 그 공백을 채울 어떤 세계적 권력을 요청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신 로마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상식적 지각을 상기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위의책 32쪽, 강조는 저자)
지젝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로 들어가며, 세계 제국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럴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지젝은 미국더러 세계 제국이 되라는 것인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미국이 세계 제국이라면, 미국은 국제법에 있어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 국왕이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활동하려면 ICC의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ICC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기속할 뿐, 그 조약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끔 하는 ‘권력’에게까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의 지위를 벗어나 정말 세계 제국이 된다면, 이라크 전쟁도 ‘합법적’인 것으로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추진중인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드높은 이유도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국가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안정시키고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국경을 잘 틀어막고 신분 조회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테러의 가능성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약 1년 전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테러도 그렇거니와, 며칠 전에는 러시아에서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1세기는 테러의 시대이며 그것은 인류가 처한 보편적 위협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 정부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테러 발생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위협을 ‘미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놓고 본다면, ‘왜 미국이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비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100명을 잡기 위해 10만 명이 투입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 마이클 무어의 일갈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역할을 일개 국민국가로 한정하고 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 행정부도 바보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혹자는 ‘그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전쟁의 이유로 거론하였지만, 그렇다면 미국이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다할 천연자원도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척박한 나라이다. 게다가 전쟁을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핵심적인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쟁을 하는가? 가능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타당하냐 부당하냐에 대한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은 분명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나라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테러 조직에게 값비싼 폭탄을 퍼붓고 수만 명의 병력을 보내 잔당을 소탕하려 들겠는가?
‘반미주의’라는 단순한 틀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탈레반은 문제적인 집단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옥이 되었다. 현장법사가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대한 바미안 석굴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으며 탈레반을 등에 업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알카에다는 민간인들이 탑승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상 초유의 테러를 저질렀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 행위마저도 ‘문화적 다양성’ 같은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러 조직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의 열악한 여건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과, 그 테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단순한 ‘반미주의’는 할 말이 없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대로 ‘이 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니, 우리는 손을 떼자’는 식의 비판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 비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대내정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나 가능한 화법이다.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 오지랖 넓은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미국이 진정 일개 국민국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려 든다면, 우리는 더 높아진 군사비와 더 불안해진 국경을 놓고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마이클 무어는 흡족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처지는 그 쿨한 미국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지젝이 엉성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세계 제국으로 스스로를 확립하고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개 국가 자격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개시하여 한 나라를 거꾸러뜨렸다. 그런 미국에게 제국의 왕관을 씌우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게다가 그 제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나오고, 그것은 결국 미국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왜 한 나라의 시민들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고된 일을 요구하면서 ‘도덕적’일 것까지 바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미국과 관련된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허술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큰 딜레마이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딜레마에 마주설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국제 문제에서 진보진영이 ‘수구꼴통’에 비해 말빨이 딸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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