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파업이 실패로 끝났다. 투쟁대오를 가다듬어 다시 싸우자고 발표했지만, 파업을 푸는 순간 구속 행렬이 이어질 것이고, 실제로
파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축들은 모두 막대한 민사소송을 당한 채 감옥으로 향할 것이다.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용산
참사 1심을 보고도 그런 기대를 하는 사람이 남아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드물게도 이번 철도파업에서는 인터넷의
여론이 파업에 동정적인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노회찬의 표현대로 법치주의가 아닌
'박치주의'가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네티즌들의 알량한 손가락 놀림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허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여론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는 저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볼 때 가장 의아한 것중 하나가 바로 저
'공감'이라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단어가 쓰이는 화법이 놀랍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공감한다는 것이 누군가의
블로그에 '잘 읽었습니다^^'라는 리플을 다는 것과도 같은 것처럼, 즉 자신의 의사에 의해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혹은 윤리학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으로 생각하는 '공감'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공감은 재채기처럼 조건반사적인 것이지, 내 마음대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호주 출신의 윤리철학자 피터
싱어의 최근작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에 등장하는 논증들은 대부분 이 공감의 무조건성에 기대고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가령 지금 당신의 앞에 어떤 아이가 물에 빠져서 죽어간다고 해보자. 당신의 주머니에는 십만 원이 들어있고, 어떤 수영선수가 '나는
누군가 내게 십만 원을 준다면 저 아이의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당신은 그 수영선수에게 십만 원을 줄 것인가,
주지 않을 것인가?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Y자로 갈라지는 철로가 있고, 당신이 가장 아끼는 자동차가 철로의
왼쪽 가지 위에 놓여 있다. 엔진이 고장나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다. 오른쪽 가지에는 당신이 모르는 누군가가 선로 위에 꽁꽁
묶여 있고, 당신은 그를 풀어줄 수 없다. 밑에서부터 열차가 올라오고, 당신은 분기점에서 그 기차를 왼쪽으로 보낼지 오른쪽으로
보낼지 결정해야 한다. 당신은 당신의 승용차를 건지기 위해 그 기차를 오른쪽으로 보낼 수 있는가?
경찰과 검찰,
대통령과 사측은 손에 박달나무 몽둥이를 움켜쥐고 노동조합을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매일같이 표명하고 있다. 파업을 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당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게 된다. 파업 노동자들이 시민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말하지만,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그들 자신이 위험에 빠짐으로써 사람들의 동정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은 물에 빠졌고 철로에 묶였다. 그러한 사고 실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 위험에 처한 이를 구하겠다고 대답한다. 적어도 피터 싱어가 물어본 사람들은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대한민국에서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쓰이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위험에 빠진 누군가를 보고 무턱대고, 주체할 수
없이 드는 동정심 따위는 사람들에게 존재하지도 않는 것만 같다. 내 연봉보다 많이 받는지, 한글날에 쉬는지 안 쉬는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는 말인가? 물에 빠진 어린이의 앞에서 '너 강남 살아 강북 살아? 강남 살면 안 구해줘'라고 말하는 것과
대체 뭐가 다른 행동인지 나는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이쯤 되면 '파업은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거고...'
운운하겠지만, 두 번째 예를 상기할 것. 당신은 그렇다면 당신의 승용차를 지키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가? 나의 작은 불편과 타인의 엄청난 고통 사이에서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나도 약 5년간 1호선을 타고
부천에서 신도림 혹은 신길까지 갔다. 안암역 혹은 고대역까지 총 1시간 40분씩 시달려본 사람이다. 철도 파업을 하면 정말 죽을
맛이다. 하지만 나의 그 고통을 덜기 위해, 내가 아닌 누군가가 구속당하고 감옥에 처박히고 손해배상 폭탄을 맞아가며 가정이
파탄나고 절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타인의 체취가 진동하는 국철에서 덜컹거리는 게 재미있고 흥겹고 신나서가 아니라, 내가 이
고통을 묵묵히 참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엄청난 시련을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랍게도
'선택적 공감'을 하는 기술을 익혀버렸다. 예전에 '팩트골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의
디테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지금 문제는 그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 아닌가? '공감이 안 가네요'라고 한 마디 찍 내뱉는
그들을 보면, 내가 인간의 도덕심에 대해 잘못 알고 있거나, 혹은 그들이 신인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파업은 패배로 돌아갔고, 공공부문의 가장 크고 강력한 노동조합이 패배한 만큼, 이제 한국의 노동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분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귀족노조가 사라지면 모두 부자가 되려나? 모두 노예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정부의 악랄한 선전질과 국민들의
'한국식 공감법'이 맞물려, 우리는 아주 비참하게 일하고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덜컥 잘려도 불만 한마디 표하지 못하는, 그런
21세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책상에서 일하는 당신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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