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13

김규항 - 진중권 논쟁 (2)

김규항과 진중권 사이에서 오간 '논쟁'이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어제와 오늘에 걸쳐 진중권은 트위터에 폭풍과 같이 쏘아붙였고, 김규항은 오늘 "논쟁을 끝내며"라는 블로그 게시물을 올려 "이 논쟁에 많은 시간을 사용한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좀 더 생산적인 일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는 뜻을 표했다.

진중권은 실컷 짜증을 내고 있고, 김규항은 최후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부적절한 시점에서 발을 뺐지만, 나는 이 '논쟁'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자체 뿐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집단의 행동 방식에 대한 하나의 거울상을 그려내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규항이 진중권을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진중권이 대중들을 향해 벌이는 활동들을 낮게 평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는, (그의 표현을 빌자면) 진중권보다 더 왼쪽에 있는 그룹들을 존중하지 않고 되려 '닭짓'이나 한다고 폄하한다. 둘째, 그 과정에서 왜 진보신당과 민주당이 다른지, 왜 한나라당에 반대하기 위해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을 찍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우선 첫 번째 논점에 대해 살펴보자. 김규항은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4에 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진중권은 '사민주의'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이야기"라는 전제 하에, "사민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주의 체제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체제"라고 단정짓는다. 따라서 사민주의는 그 태생 및 속성상 자본주의와의 타협주의이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갈등하는 사회주의가 성장해야만 커나갈 수 있는 종속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이와 같은 사민주의 이해는 대단히 편협할 뿐더러, 사민주의에 대한 현대적인 연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견해는 구 소련측에서 만들어낸 서구 좌파들의 역사에 대한 기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실상을 놓고 보면, 사민주의와 레닌주의 모두 기존의 사회주의가 각국의 특수한 현황과 맞물려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정치체계다운 정치체계가 발전하지 못한 러시아에서는 전제정을 몰아낸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근대적 체계를 일거에, 폭력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반면 독일이나 스웨덴 등 민주주의 체제가 발전하고 있는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의 투쟁을 위해 민주주의적 원리, 혹은 현실정치의 방법론을 사회주의 운동에 도입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전자가 되었건 후자가 되었건, 그 어떤 경우에도 김규항이 말하는 '다짜고짜 사회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보편적 원리는 특수한 상황에 맞도록 재해석된 수정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니다'라는 것 말고, 그 어떤 적극적(positive)인 자기규정을 지니고 있는가? 현대 사회주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사민주의 외에 현실적으로 구현된 사회주의의 형태는 구 소련의 그것이며, 그 외에는 중국의 독특한 국가주도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와의 타협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회주의가 민주주의적 원리를 도입한 결과물이다. 민주주의가 곧 자본주의라고 생각한다면 김규항의 단순한 언명에 동의할 수 있겠지만 사태의 전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연구자들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근원적 갈등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은 보편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마이클 무어의 영화 '식코'를 보자. 영국 노동당 내에서도 '왼쪽'에 속하는 노인, 토니 벤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내가 아는 한 가장 혁명적이고 급진적인 이론은 1인 1표제다. 우리는 그 위에서 NHS 같은 것들을 만들어냈다."

진중권더러 사민주의자라고 칭하는 명제 자체의 진리값과는 별개로, 누군가를 '사민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본인의 급진성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발상은 대단히 촌스러울 뿐 아니라 사민주의 혹은 사회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민주의는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다. 하지만 김규항이 말하는 '사회주의'는 그 어떤 형태의 사회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공허한 담론, 혹은 본인이 좌파 혹은 양심적 우파라고 생각하지만 이놈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믿고 싶은 이들을 위한 정신적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샹그릴라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정해버리면, 그 외의 여타 활동에 대해서 냉소하는 일이 한결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점을 살펴보자. 김규항은 진중권이 이번 지방 선거 국면에서 민주당과의 대립각을 더 세우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그 비판을 위해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07에 서 한 고등학생의 편지를 인용한다. 김규항이 인용하는 그 똘똘한 학생에 따르면 노회찬 후보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는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안 되고 있었고, 그 결과 노회찬과 심상정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이러한 시각 하에 김규항은 진중권이 출현한, 선거 직전 서울시장 토론회를 비판한다. 그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지만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한다. 이렇게 안타까워할 거라면, 왜 김규항은 그 토론회에 본인이 참석해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지 않았는가? 김규항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주최측이 기꺼이 패널 자리를 내어줬을 게 아닌가. 그는 선거 국면에 개입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고, 노회찬이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 행태로 인해 TV 토론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가 바라는 '진정한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적의 기회 아닌가?

요컨대 이런 것이다. 왜 김규항은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가?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을 폭로할 기회는 많고도 많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번 선거 과정에서 그가 '더 왼쪽'에 있는 사회당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는가? 진보신당 당적은 없되 한국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진보신당에 채찍질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면, 왜 선거 다 끝난 다음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사후평가와 비판이 불필요하고 무용하다는 게 아니라, 그의 영향력을 더 값지게 쓸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라는 한 사람의 셀리브리티를 쫓아 진보신당에 들어왔지만, 정작 투표할 때가 되면 자신이 속한 정당이 아닌 다른 정당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진중권이 진보신당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비판'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비판은 공허한 사후론에 지나지 않는다.

진중권 때문에 들어온 사람들,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왼쪽'에 있는 김규항이 해야 하는 일은 단 하나다. 그 자유주의자들을 (본인과 같은) 사회주의자가 되게끔 설득하고, 그 설득의 방법론을 찾아내는 것 말이다.

현실 속에서의 정당은 어쨌건 외연을 넓혀야만 하는 조직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과, 정당 내에서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흔들리지 않는 입장을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김규항은 전자를 비판하는 것으로 후자의 몫이 수행된다고 믿는 것인가? 돛잡이가 돛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해서, 기울어진 배의 키가 올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다. 본인이 키잡이 노릇을 하고 싶다면 바로 그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김규항이 진보운동 내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어떻게 부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과연 김규항이 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해 사회주의적인 원리에 동참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진중권이 전진을 '닭짓'한다고 욕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가 될까? 물론 진중권은 대중적 스타다. 하지만 진중권의 영향력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수주의-자유주의-사민주의-사회주의 같은 잣대를 들이대면 이 복잡한 현대 정치를 설명하고 이해해낼 수 있을까? 모든 보편은 특수하게 구현된다. 김규항이 지향하는 '지금 여기'에서의 사회주의는 사민주의가 아닌 그 무엇을 지향하는가? 그는 그것을 말할 수 있을까?

진중권에게는 진중권의 일이 있고, 김규항에게는 김규항의 일이 있다. 대중들 속에서 진보신당의 존재를 알리고 각인시키는 진중권의 일, 혹은 '삐끼질'을 진중권은 훌륭하게 수행해왔다. 그렇다면 김규항은? 김규항의 일은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왔는가? 진보신당이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간다는 비판에서 출발했으므로 그 지점으로 논의를 한정시켜보자. 그는 진중권이 불러들인 '자유주의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무슨 일을 했을까? 그들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이는 것 외에 무슨 역할을 했는지 나는 도저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결코 해법이 아니다.


김규항의 이러한 논법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 혹은 '좌파'라고 칭하는 것이 얼마나 미망한 일로 전락해버렸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어 보여준다. 사회주의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배제된 채, '사민주의'를 내려다보며 논평할 수 있는 상위의 심급을 임의로 마련함으로써, 몇몇 이들에게 턱없는 정신적 우월감을 안겨줄 뿐인 하나의 정신적 기제 혹은 도피처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 혹은 '좌파'라면, 나 역시 단호히 거부하겠다.

나는 진보신당이 더욱 대중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대중들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진중권은 전자의 역할을 지금까지 훌륭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김규항이 후자의 역할을 해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 사람이 진보신당 전체, 한국의 진보진영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다. 결국 그 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하느냐가 관건인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대중성 강박'을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김규항이 그나마 '삐끼질'도 제대로 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논쟁을 바라보며 나는 진중권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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