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1-11

김진숙, 생명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김진숙이 살아서 땅을 밟았다. 나는 그 장면이, 암스트롱의 달 착륙 장면만큼이나 의미심장하다고 느낀다. 암스트롱은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달에 살아서 발을 디뎠다. 김진숙은 300일이 넘는 고공투쟁을 통해 날것 그대로의 생명, 이른바 ‘호모 사케르’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했고, 노동자로서 크레인에 올라 ‘생명’으로서 지상에 발을 디뎠다.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는 로마의 법적 개념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되었지만 생명으로서의 존재를 박탈당하지는 않은 개체를 뜻한다. 누구라도 호모 사케르를 죽일 수 있다. 인간을 죽이면 살인죄로 처벌을 받는 것과 달리, 누군가가 호모 사케르를 죽인다고 해도 그는 살인죄로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호모 사케르는 국가의 법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인간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되었기 때문에, 국법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

트위터, 희망버스, 소셜테이너 등의 단어들과 함께 떠오르는 하나의 기호로서의 ‘김진숙’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개념을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대한민국은 김진숙을 죽이려 하지 않았다. 그저 죽게 내버려두었을 뿐이다. 요구조건을 말하기 위해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은 김진숙이 그냥은 내려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물을 끊고, 전기를 끊고, 통신도 끊고, 그들이 ‘끊을’ 수 있는 모든 연결고리를 잘라냈다. 김진숙이라는 하나의 유기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모든 ‘인간적’ 대우가 사라져가는 과정을 우리는 목격해야만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직접 김진숙을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한 행위가 불러올 파장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김진숙 본인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요구 조건을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가 바로 그의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선량한 사회학자들이 자살을 ‘사회적 타살’이라 포장한다 한들, 두 행위가 갖는 존재론적 위상의 차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특히 21세기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임 대통령의 말처럼, ‘자살로 호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누군가가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의지’를 남기기 위해 그 의지를 제외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로서의, 극단적인 표현의 한 형태로서의 자살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태일은 이렇게 외치며 죽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그는 자신의 분신자살이라는 스캔들을 매체로 삼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다. 생명은 죽지만 ‘사람’ 혹은 ‘주체’만큼은 아주 명료하게 남는다.

김진숙은 그와 정 반대의 전략을 택했다. 크레인을 포위하고 물과 전기와 식량과 통신을 끊어가며 대한민국이라는 주권은 김진숙이라는 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었을까? 그가 ‘사람’으로서 죽기를, 즉 자살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하라! 해고는 살인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스스로 몸을 던지기를, 그래서 사이버 시대를 살아가는 쿨하고 쉬크한 대중들(혹은 ‘귀진보’들)이 ‘아, 또 데모하다가 사람 죽었나보네’라고 힐끗 쳐다보고 다 안다는 듯이 한 마디 지껄이고 지나가기를, 권력은 바랬다.

하지만 김진숙은 끈덕지게 살아남음으로써 ‘사람’이 될 것을 강요당하는 일을 거부했다. 대신 그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을 노출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그가 가진 것이 자신의 생명밖에 없었다고 나는 이미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김진숙은 가까스로 얻어내고 지켜낼 수 있었던 트위터라는 소통의 공간에서 결코 불필요한 소리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가 권력에 의해 죽어가도록 방치되고 있는 날것 그대로의 생명’으로서의 상징성을 끈질기게 수호해냈다. 그는 불필요한 논쟁, 의미 없는 선명성 과시, 본인이 동의하기 힘든 정치인의 접근 등에 대한 대립각 세우기 따위를 결코 하지 않았다.

사람은 주장을 하고 논쟁을 한다. 생명은 그저 살아있을 뿐이다. 김진숙의 트윗을 보며 사람들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감동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무엇에 대한 어떤 희망인가? 김진숙이라는 한 개인은 무엇을 주장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와 대척되는 그 무엇만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가? 이러한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일은 너무도 쉽지만 (그는 『소금꽃나무』라는 책의 저자이므로) 아무도 그런 ‘인간적’인 내용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를 내모는 사람들만큼이나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김진숙은 ‘호모 사케르’였기 때문이다.

간단하고 상스럽게 요약해보자. 사람들은 김진숙에게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김진숙이 보여준 것은 오직 생명 그 자체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전임 대통령, 혹은 그 전임 대통령의 전임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온 기나긴 노동 탄압의 역사를 보았지만, 다른 이들은 ‘다른 노동운동과는 다르게 사람의 향기가 나기 때문에’ 희망버스를 탄다는 개소리를 찍찍 내뱉었다. 그러므로 권력은 김진숙을 죽일 수 없었다. 김진숙이 권력에 의해 타살되는 순간 그는 이 모든 환상의 아이콘이 되어 불멸의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권력은 김진숙이 지쳐 나가떨어지면서 무언가 ‘주장’을 내뱉기를 원했다. 그가 ‘벌거벗은 생명’에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그리하여 모든 이가 각자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을 투영하는 환상의 거울이 깨지기를, 권력은 바랬고 김진숙은 바로 그것만은 결코 내주지 않았다.

사회 문제에 비판적인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김진숙과 같은 투쟁의 방식은 보편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그의 투쟁과 승리가 일회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그것은 일회적인가?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가족들은 꾸준히 죽어가고 있다. 그들 역시 어떤 이념과 주장이 아니라 그저 직장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추방당한 반(半) 인간인 채로 죽어갔고 죽어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이 생명은 살고 저 생명은 죽어가는데? 왜 우리는 이 생명이 살아오는 동안 저 생명이 죽는 일을 지켜보게 되는 건데? 대체 왜?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대답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할 어떤 ‘구체적인 해법’도 모르겠다. 이 모든 논의를 어떤 이들은 ‘분석’이라고 말하겠지만 이것은 그저 일종의 자유연상일 뿐이다. 나는 나의 자유연상이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달 착륙의 유비를 끌어들여 글을 마무리짓도록 하자. 인간이 달에 땅을 딛자 SF 작가들의 상상력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인류는 우주의 저 끝까지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달 탐사 자체에 대한 대중들의 흥미조차 닳아빠지고 있었으며(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는 가장 좋은 텍스트 중 하나로 영화 ‘아폴로 13′을 꼽을 수 있다), 지금껏 인류는 지구 속에서 2만년 전 석기시대의 모습 그대로 싸우고 빼앗고 죽이고 섹스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주제 파악을 해야 하는 시점이 도래했다고 주장하고 싶다. 생명이 정치가 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목격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외의 어떠한 유의미한 서술도 덧붙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2011-10-13

개인글: 네모난 동그라미를 주장하는 사람들

If people were to carry plancards announcing a belief in square circles, we would not do well to understand them as thinking that circles could be square. We would search for some coherent thought to attribute to them, a different thought they meant to express by saying what they did.

Preface, Dworkin, Donald, The Life’s Dominion.

2011-10-12

개인글: Paul Krugman – travia

http://m.imdb.com/name/nm1862259/

그는 영화 Get Him Out Of The Greek에 폴 크루그먼 역으로 출연했다.

2011-10-07

스티브 잡스의 죽음에 대한 리처드 스톨만의 애도사

06 October 2011 (Steve Jobs) 원문 링크

Steve Jobs, the pioneer of the computer as a jail made cool, designed to sever fools from their freedom, has died.

바보들을 스스로의 자유로부터 격리시키고자 디자인된 쿨한 감옥으로서의 컴퓨터의 선구자,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As Chicago Mayor Harold Washington said of the corrupt former Mayor Daley, “I’m not glad he’s dead, but I’m glad he’s gone.” Nobody deserves to have to die – not Jobs, not Mr. Bill, not even people guilty of bigger evils than theirs. But we all deserve the end of Jobs’ malign influence on people’s computing.

시카고의 시장 해롤드 워싱턴이 부패한 전임자 달리를 두고 말했듯, “나는 그가 죽어서 기쁘지는 않지만, 그가 사라져서 기쁘다.” 잡스, 빌 게이츠, 심지어 그들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누구도 죽어 마땅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람들의 컴퓨터 사용에 잡스가 끼친 악영향의 종말을 누릴 자격이 있다.


Unfortunately, that influence continues despite his absence. We can only hope his successors, as they attempt to carry on his legacy, will be less effective.

불행하게도 그 영향력은 그의 부재 이후에도 지속된다. 그의 유산을 이어가고자 하는 후계자들이 잡스보다 영향력이 덜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

앞서 인용한 데이비드 브룩스의 칼럼에서 등장한 세 가지 요소 중, 기업가 정신을 빼고 60년대 히피 운동적 성향을 극대화한 후, 워즈니악 이상의 엔지니어링 능력을 가미하면 바로 이 사람이 나온다. 이 짤막한 글에서조차 대단한 집중력과 광기가 느껴진다. 나는 후대의 사람들이 더 많이 리처드 스톨만의 존재를 의식하고 기억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글: NYT: Where Are the Jobs?

http://mobile.nytimes.com/2011/10/07/opinion/brooks-where-are-the-jobs.xml

잘 쓴 칼럼. 몇 가지 코멘트.

1. 기술 혁신이 느려지고 우리가 보는 세상이 확 달라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크루그먼이 했음. 크루그먼의 영향력은 이렇게 은근히 넓게 미침.

2. 스티브 잡스의 출현 요건으로 60년대의 반문화, 기크 문화, 미국식 기업문화의 종합을 꼽는다. 하지만 아래 리플에서 누군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건 어디까지나 당대의 미국이 좀 더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던 사회라는 것에 기인하는 바가 크지 않나?

3. 정보통신 혁명의 물리적 한계. 기술이 60년대의 SF처럼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한계의 탓이 크다. 가령 마하 5를 넘기면서 무사히 날아가는 비행기, 궤도 엘리베이터 따위. 정보통신 혁명 역시 같은 위기에 봉착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2011-10-06

무한, 생존, 경쟁 – 죽음에 대한 고찰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면서 세계 언론이 들끓기 시작한 가운데, 조선일보의 자회사인 비즈조선은 다음과 같은 문제적 제목의 기사를 내놓았다. “스티브 잡스 사망, 국내 스마트폰 경쟁력에는 도움”(비즈조선, 2011년 10월 6일). 당연히 항의 여론이 빗발쳤고 현재 그 기사의 제목은 좀 더 온건한 형태의 것으로 변경된 상태다.

우리는 대체로 그 ‘무한 경쟁 사회’가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생각하거나 비판한다. 하지만 인간성이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상대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수도 있고, 단지 쾌락을 위해 무고한 누군가를 죽이거나 문자 그대로 잡아먹을 수도 있다.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과연 이 제목 선정을 후회할까? 그는 ‘이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며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자신과 식솔의 생계 및 풍족한 생활을 위해 밥벌이를 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행동이다.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은 ‘무개념’이나 ‘몰상식’ 같은 표현 정도로 무의미한 무언가가 되어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도덕적 관념과 규범이 하나의 인간관/인생관으로 함축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의존할 수 있을만한 기존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기에, 우리는 이 소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앞서 나는 비즈조선의 데스크가 처자식 먹여살리기를 핑계삼아 후안무치한 헤드라인을 뽑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헤드라인의 내용은, 따지고 들어가보면,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살아있는 혹은 남아있는 자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이 발화행위의 내적 동기와 외적 발현에서 모두, 삶은 죽음에게 일말의 설 자리도 허용하고 있지 않다.

비즈조선의 이 헤드라인은 그런 면에서 너무도 ‘비-죽음적’이다. 문제는 그 발화 행위가 다름아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라는 데 있다. 죽음에 대해 비-죽음적으로 말하는 이 방식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즉각적으로 누군가의 이익이나 손해를 떠올리며 입에 담는 이러한 화법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용산참사가 벌어졌을 당시,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굳게 믿는 일련의 네티즌들은 입을 모아 유가족들이 받게 될 보상금이 얼마일지를 놓고 수근거렸다. 죽기 전에는 내려오지 않겠다며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향해 구사대와 전경들이 몰아닥칠 때, 그의 죽음이 사측에게는 이익이 될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진중공업의 주가는 크게 치솟았다. 스티브 잡스의 부고가 전해지고 삼성전자의 주가가 오르는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다른 이들의 이익으로, 그 어떤 반성적 고찰도 없이 즉각 치환되는 것은, 이 비-죽음의 시대를 표상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게 뭐가 나빠?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거 아냐? 이러한 발화의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을 내가 먼저 챙기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가로채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다. 어차피 살아있는 놈들 중 누군가가 이익을 챙기게 되어 있다면, 내가 먹어야지.

그리하여 죽음은 결코 ‘무한 경쟁’을 멈추게 하지 못한다. 오직 살아있는 자들만이 살아있는 세상 속에서, 죽음은 또 다른 경쟁의 도구 혹은 대상으로 전락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삶을 온전히 삶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오래도록 고민해왔다. 번영과 풍요와 여유와 재생산, 우정과 돌봄과 사랑과 공감 등, 혹은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그 필수 요소로 거론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끝이 있으며 누구도 그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죽음 그 자체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으로써 삶은 완성된다. 내가 살아온 나의 삶이 나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내가 타인의 삶과 죽음에 모두 함께함으로써 나 자신의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것이다. 삶에 영원히 결여로서 남을 수밖에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생각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결코 완전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을 강요받는다. 죽음을 바라보고 사유할 겨를이 없다. 그리하여 무한성을 획득하는 것은 경쟁이 아니라 삶다운 모습을 잃어버린 ‘생존’ 뿐이다.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이 ‘무한 생존을 위한 경쟁’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죽음이 사라진 자리에 칡덩굴처럼 뒤엉켜 뻗치는 생존에는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윤리도 성찰도 없다. 심지어 그 생존에는, 지금 우리가 생생하게 겪고 있는 바와 같이, 삶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생존’의 주체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기 때문이다.

2011-09-29

개인글: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

포이에르바흐에 대한 열한번째 테제는 하이게이트 묘역의 마르크스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철학자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왔을 뿐이다. 문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 테제는 일반적으로 철학의 영향력은 중요하지 않으며, 혁명적 실천이 관건이라는 식으로 독해되었다. 전혀 그런 종류의 뜻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수동적으로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철학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으며, 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철학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은 세계를 다시 주조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세계를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43p, Singer, Peter, Marx: A Very Short introduction, Oxford University Press.

2011-09-28

개인글: 조지 엘리엇이 서구 신학에 미친 영향

조지 엘리엇이라는 필명을 쓰던 마리안 에반스(Marian Evans)는 헤겔 철학이 영어권에 잘 알려져있지 않던 당시, 헤겔 좌파에 속하는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을 영어로 옮겨 소개했다고 한다.
세상 참 좁군.

개인글: 인터넷 시대에 ‘내면’은 가능한가

무언가를 읽을 때 소리내어 읽지 않는 것이 일반화된 것은 인류 역사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중세까지는 책을 소리내어 읽고, 입으로 떠들면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근대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유명한 이야기이니 특별히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금 사람들은 시끌벅쩍하게 읽고 쓰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나만 해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고 몰래 적어놓으면 될 이야기들을 왜 굳이 블로그에 적어놓을까? 혹자는 쉽사리 노출증 따위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태는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우리는 이제 인터넷에서 읽고 그것을 즉각적으로 공유하거나 코멘트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좀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제 사람들은 타인으로부터 피드백을 얻을 수 없는 곳에는 자신의 의견이나 흔적을 남기지조차 않는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논란이 불거지면 바로 그 글에 리플이 달렸다. 지금은 그 글을 단축 URL로 뭉쳐놓은 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의견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근대적 자아, 묵독과 내면의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는 근대적 자아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반 새로울 게 없는 뻔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가 그러한 경향성 하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읽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써도 충분하다. 지금 나는 사회를 향해 그리 많은 의견을 던질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오래도록 고민하였고 결국 덜컥 블로그를 열었다.

2011-02-11

여성 문학은 남성 문학의 여집합인가 -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불러온 논란에 대하여

어떤 발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제시되는 맥락과 설명들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때가 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이 트위터에서 내놓은 한 발언을 둘러싼 소동이 바로 그 예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조영일에 따르면 이 발언에 대해 불과 수십분 사이 4-50개의 멘션이 달렸고, 그 중 상당수는 노골적인 비아냥 혹은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는 그 시점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 별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조영일이 쏟아지는 질문들에 대하여 내놓는 트윗들, 그리고 그가 '맥락'으로 제시하는 별도의 비평문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대단히 전형적인,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굳이 지적될 필요가 있는 여성혐오의 한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트위터에 올린 위 발언이 크게 세 가지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첫째, 소설가 김영하와의 논쟁. 둘째, 시나리오 작가 故 최고은 씨의 죽음. 셋째, 자신이 2010년 10월 12일에 쓴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라는 비평문에서 논하는 바.

논쟁을 통해 첫째 맥락에서는 '소설가는 낭만주의적 감수성에 의해 글을 쓰는 존재가 아니라,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하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평적 관점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테제가 도출되었다. 한편 두번째 맥락에서는, 그와 같은 당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의 작가들(여기서 '작가'라는 단어는 대단히 넓은 맥락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이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벅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제의 세 번째 글로 들어가봐야 한다.

"요즘 비평에 대한 오해 하나"는 문학평론가 남진우의 한 칼럼에 대한 비판의 형식을 띄고 있다. 두 사람은 공통된 문제 의식을 지니고 있지만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두 사람 모두 현재 문학의 생산이 문예창작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인식한다. 하지만 남진우는 그것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벌어지고 있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반면, 조영일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더 큰 문제를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국현대문학은 80년대 '민중문학' → 90년대 '여성문학' → 2000년대 '문창과문학'으로 전개되어 왔"다. 하지만 조영일이 보기에 "문창과문학이 완성된 것은 2000년대지만, 그것이 시작된 것은 90년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문창과문학이 여성문학의 완성된, 혹은 발전된 형태인지에 대한 설명을 그 글에서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단지 "오늘날은 90년대보다 더 많은 여성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90년대에 나타난 특징들은 오로지 자신의 시대만 규정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다음과 같은 반발을 할 것이다. 바로 밑에서 조영일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있지 않느냐고. 즉, "우리는 그 이유를 이론적 관점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한국문학의 위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근대문학의 종언으로 인해 문학은 더 이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총체성을 담지하는 텍스트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전까지 소설과 비평과 시를 읽으며 세상을 알아가고자 했던 영특한 10대들과 30대 중반 이후 엘리트 독자층이 와해되고, 그리하여 한국문학이 위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축소된 시장 규모로 인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남성 작가들은 더 이상 소설 쓰기 따위에 매진할 수 없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은 여성작가들이 문창과에서 수업 듣고 소설 쓰면서 일군의 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통찰' 내지는 모두가 알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실에 대한 용감한 폭로처럼 보인다. 하나의 중대한 논리적 비약을 눈감아줄 수 있다면 그렇다. 이 설명은 아무리 에누리해준다 하더라도 왜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는가에 대한 설명일 뿐, 왜 여성 작가들이 늘어났는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는 것 말이다. 남성 작가들이 줄어든다는 것과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다는 것 사이에는 필연적인 상관 관계가 성립하고 있지 않다. 일본의 GDP가 줄어든다고 해서 한국의 GDP가 늘어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에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가 있다. 조영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문학계에 여성작가들이 갑자기 힘을 발휘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거꾸로 질문을 던져보면, 의외로 쉽게 풀린다. "왜 한국문학계에서 남성들의 영향력이 점점 사라져간 것일까?""

이와 같은 질문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이른바 '여성문학'을 '남성문학'의 여집합으로 보는 시각을 전제한다. 여성 작가들이 늘어난 것은 남성 작가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문학계라는 것을 하나의 제로섬 게임으로 파악한다면 이와 같은 접근법이 타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 문학의 독자층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따라서 글쓰기를 통해 돈 버는 일이 이전 시대에 비해 더욱 어려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부류"[sic]들은 전망 없는 문창과에 입학하고 글을 쓰는가?

이게 바로 나와 같은 문학의 문외한이 '문학평론가'로부터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그런 종류의 질문이다. 요즘 여성 작가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나도 궁금하다.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읽고 쓰는지, 무엇을 욕망하고 표현하고자 하는지, 물론 직접 작품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조망을 제시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좋겠다.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에 여성 작가가 많다는 조영일 식의 설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뿐 아니라 섬세함과 반대라는 의미에서 폭력적이다.

조영일이 세 번째 맥락으로 제시한 글이 '한국출판시장현황 - 남성 작가의 감소를 중심으로'라면 이와 같은 시각은 전혀 문제될 게 없다. 즉 그는 단지 사실적이고 경제적인 상황의 기술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문학평론가이며 비평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 작가의 감소를 통해 여성 작가의 증가를 설명하는 방식은 아주 자연스럽게 여성 작가들을 타자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할 것이다.

조영일의 글은 여성 작가들의 양적 증가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당사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행위의 주체가 아닌 어떤 현상의 '결과물'로서 취급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것도 과히 긍정적인 뉘앙스로 다루어지지는 않는 그런 결과물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 번째 맥락, 혹은 2012년 10월 12일에 쓴 글에서는 조영일이 여성 작가들, 혹은 여성문학을 진지하게 대상화하지도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작가들의 증가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남성 작가의 감소에 수반된 일종의 부수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그 글의 논조가 대단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여성 작가들의 목소리를 완전히 배제한 체 그들에 대해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맥락이 추가되었다. '작가는 글을 써서 돈을 버는 프로페셔널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남는 밥을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젊은 여성 작가에 대한 애도'가 뒤섞인 가운데, 故 최고은 씨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나리오 작가이므로 '근대문학의 종언' 같은 논의가 결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지적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은 깨끗이 잊혀지고, 대신 너무도 익숙하고 상투적인 하나의 개념적 대립쌍이 출현하는 것이다. 성녀 대 창녀, 여성 노동자 동지 대 노는 년, 남편이나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예술한다는 년' 대 남는 밥을 얻어먹지 못해 굶어죽는 "생계형 여성작가".



나는 이 지점에서 어떤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김규항의 '그 페미니즘' 사건을 말이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가 아닌 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는 존경한다'고 말하던 김규항의 목소리와 조영일의 시각은 이 지점에서 근본적 유사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본인들이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분할하여 통치하라'는 근본적인 지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형 작가'나 '생계형 여성작가', 혹은 두 가지 모두, 담론적 분할통치를 위해 동원되는 가상의 범주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략은 끝없이 시도되며 너무도 자연스럽게 (특히, 스스로가 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 당혹스러움과 분노 앞에서 정련되지 못한 언어가 튀어나올 때 돌아오는 대답은 백이면 백 다음과 같다. "몰랐어? 이게 현실이잖아. 왜 아닌 척 하니?"

이런 식의 논의가 용기 있는 발언으로 포장되어 유통되면 유통될수록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체는 더욱 심화될 뿐이다. 특히 "예술형 작가"라는 말에 담긴 비하와 질시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싯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등 객차에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야.
나는, 고운

손이 밉더라.


공정한 논의를 위해 박정희와 조영일의 차이를 명시해보자. 박정희는 "불란서 시집을 읽는 소녀"를 비판하면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손놀림을 찬양했다. 반면 조영일은 "예술형 작가"들을 비판하면서 "생계형 여성작가"들을 "옹호대상"으로 삼았다. 공정한 논의를 위해 적었는데, 적고 보니 더욱, 두 사람의 논의 구조가 갖는 차이가 뭔지 모르겠다. 물론 여공과 "생계형 여성작가"는 같지 않다. 그러나 양자 모두 '예술한다는 년'들의 대립쌍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사성을 지닌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이 사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은 그리 큰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는 것인가? 심지어 우리는 '이주노동자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3D업종에 종사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와 같이 경제적 사실을 진술할 때조차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하기 위해, 그 문장 안에 사실관계나 논리의 오류는 없는지에 대해 노심초사한다. 그렇다면 비평의 언어가 그만큼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채 '솔까말 가부장제가 엄존하고' 같은 결론을 제시해버리는 광경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나는 조영일이 이 글을 읽는다 해도 내가 지적하는 문제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성주의적 감수성' 같은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적의 적은 친구', '반대의 반대는 참'과 같은 단순한 논리적 오류에 포박되어 있기 때문이다(이 시점에서 우리는 '여성 작가들이 왜 늘어났는지 알기 위해 남성 작가들이 왜 줄어들었는지를 알아보는' 그의 성향이 꽤 일관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조영일은 말한다. "내가 공격당한 배경에는 최고은씨의 죽음이 있는 것 같은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참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따지고 보면 나만큼 문화계(문학계)의 불공정함을 문제삼은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링크)

설령 조영일 자신이 문학계의 '모든' 불공정함을 문제삼아왔다 해도, 그가 자신이 지적하고 있었던 문제점 중 하나를 범할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 경우 비판받지 않을 수 있는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중학생용 논술 교재에도 안 나올법한, 너무도 당연한 오류의 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이미 그는 '예술가형 여성 작가'와 '생계형 여성 작가'를 구분함으로써 문화계와 문학계를 넘어 인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불공정함에 반기를 들기는 커녕 참여해버렸다. 이건 이명박을 싫어하는 나를 왜 진보 진영에서 욕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왜 이 글을 썼을까?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고 서로 멘션을 주고받아본 적도 없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평의 언어가 오히려 그 대상을 타자화하는 것, 그에 대해 직감하고 반발하는 이들 앞에서 당당해야 할 글의 주인이 희생자 놀이를 해버리는 것, 그 광경을 보고 젠체하며 이성적인 사람 행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등을 나는 참을 수 없다.

이 논쟁에서 조영일이 보여준 것과 같은 언어적 구조는 최대한 지양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발언권을 빼앗아버리는 것, 대상화하고 분할하여 통치하고자 하는 담론적 움직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역할을 조영일을 비판하는 것으로 한정짓도록 하겠다. 소수자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소수자가 아닌 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천은 침묵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침묵으로 지금까지 표현되지 못한 이들에 대한 지지를 표현한다.

2011-01-22

무엇이 정의인가

저는 입대 직전까지 원고를 쓰고 있었습니다. 2010년 10월 11일 입대하였는데, 그날 자정까지 원고를 다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혼자 쓴 책은 아니고, 장정일, 서동진, 이택광, 박홍규 등 쟁쟁한 필진들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무엇이 정의인가?』이며, 제목이 말해주는 바 그대로, 2010년 하나의 '사건'이었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한국 지성계의 맞대응을 총집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현재 『무엇이 정의인가?』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인문학 주간 2위에 올라있습니다. 부동의 종합 1위인 『정의란 무엇인가』의 뒤를 잇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원고를 써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께 자신있게 권해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칸트의 '순수 이성 개념 연역'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으로서, 샌델이 비판하는 칸트의 입장에서 역습을 시도하였습니다. 저는 샌델이 말하는 '정의'와 '도덕'의 개념이, 그 개념 자체의 의미에 부합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책의 본문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필자들의 글도 나름의 입장과 개성을 지니고 있어, 한 권의 책에 포함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 담겨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1년이 밝았습니다. 제가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없는 시간동안, 한국의 지성계가 좀 더 나은 담론과 논의의 구조를 획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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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6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자대에 온지 나흘째 되는 금요일이다. 화요일부터 겪었던 일들을 통해 나는,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현재 나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 대한 반항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권위 혹은 권력관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을 뜻한다.

579일 남은 군 복무기간이 한없이 막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설령 나의 신병기간이 끝나고 내가 상당한 고참이 되어 지금처럼 불편하게 살 필요가 없다 하더라도, 군생활 자체가 편안한 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입대 순서에 따라 경례해야 하는 것 만큼이나, 같은 순서로 경례를 받는 것 역시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와 같은 욕망은 근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이 개인으로서 남아있어야 한다는 당위적 지향성, 지배-피지배 관계에서 벗어난 고립된 상태의 개인의 존재 등을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개인들 사이에서의 경제적 정의의 실현에 관심이 많고, 계층간의 갈등과 불화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에 의해 해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본질적 측면, 혹은 '개인성'의 파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고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이 순간 내가 지키고 싶어하는 바로 그것.

많은 경우 개인의 자유란 궁극적으로 '선택의 자유'라고 간주된다. 나를 가스실에 처넣겠다는 나치를 향해 한 인간으로서의 연민을 품을 수 있는, 그 어떤 경우에도 박탈될 수 없는 선택의 자유. 그런데 한 가지 역설적인 사실은, 그러한 종류의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군대라는 것이다. KTA 3주차 월요일, 카투사 플래너 사용방법을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대한 감상적인 요약과 함께, 어떤 경우에도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달렸다는 통속적 불교의 메시지로 그 내용은 쪼그라들어 버렸다. 비약은 한 단계 더 나아가 그것을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대립으로 놓고 일방의 손을 들어주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군대에서 가르친다니.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양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선택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그 상황에 처한 개인이 아닌 그 개인을 통제하는 시스템에 의해 발화되는 순간, 그것은 그 궁극적 자유를 제외한 수많은 것들을 시스템이 임의로 제한하는 행동에 대한 알리바이로서 작동하게 된다. 군대 오니까 좆같지? 그래도 네게는 이 상황 속에서의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어. 자기개발서적을 읽는 군인들. 자신의 꼬리를 물어뜯고 있는 자유주의. 가장 휴머니즘적으로 표현된 자유주의의 한 모습이 군대 내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좋은 것'으로 이야기되는 광경은 대단히 흥미로운 것이다. 그것은 결국 개인들의 의식을 '내면'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현재의 체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외부로부터의 구체적인 억압과는 별개로 나는 그 억압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지배하지도 않고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선언은 그와 상당히 다른 결을 띈다. 그것 역시 근본적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오직 내면 속에서 시작되고 결정되는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 선언은 나의 외면에 있는 어떤 대상을 지칭한다. 그 대상과의 구체적인 관계,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 등.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명제를 발화하는 주체는 그다지 보편적이지 않다. 적어도 '나는 타인에 대한 나의 반응을 내면으로부터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주체보다는 그렇다. 물론 4성 장군도 전자와 같은 말을 할 수야 있지만 그것은 상당히 넌센스처럼 보인다. 후자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우, 자유주의는 내면적 자유를 향해 침잠해가는 개인들을 통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그것은 자유주의의 본래적 의도와 상반된다.

두 명제의 차이는 왜 자유주의가 끝까지 부정적인 서술에 더 가깝게 머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개인이 가진 힘과 그것을 제약하는 외부적인 권력의 대립관계를 전제한다. 그런데 만약 개인의 힘을 긍정적으로 서술한다면, 그러한 전개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대체로 권력은 그 긍정된 부분을 제외한 모든 것을 제약한다. 군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네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에게 '그 어떠한 상황'을 제공할 수도 있는 권력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어 보여준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겠다'는 텅 빈 서술은 그와 정 반대다. 그것은 화자에게는 긍정적인 서술이 아니나, 청자 즉 권력에게는 분명 어떠한 행위를 하겠다는 예고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인은 그와 같은 표현을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자유주의는 대단히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사상 체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권력론과 인식론을 함유하며, 동시에 대단히 중요한 존재론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나는 바로 그런 것들을 연구하고 싶다. 그 누구에 대해서도,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 않는 자유 속에서.

2011-01-09

2010년 독서 목록

  1. 20100106 - 수디르 벤카테시, 김영선 옮김, 『괴짜 사회학』(서울: 김영사, 2009).

  2. 20100113 - 마이크 데이비스, 정병선 옮김, 『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서울: 이후, 2008).

  3. 20100113 - 도모노 노리오, 이명희 옮김, 『행동경제학』(서울: 지형, 2007).

  4. 20100115 - 로버트 레브나스코니, 변광배 옮김, 『How to Read 사르트르』(서울: 웅진지식하우스, 2008).

  5. 20100123 - 강양구, 강이현, 『밥상혁명』(서울: 살림터, 2009).

  6. 20100124 - 비외른 롬보르, 김기응 옮김, 『쿨잇』(경기도 파주: 살림, 2008).

  7. 20100128 - 카토 요시코, 강현정 옮김, 『내 고양이 오래 살게 하는 50가지 방법』(서울: 해든아침, 2009).

  8. 20100202 - 트와일라 타프, 노진선 옮김, 『천재들의 창조적 습관』(서울: 문예출판사, 2006).

  9. 20100214 - 로빈 킨로스, 최성민 옮김, 『현대 타이포그라피 - 비판적 역사 에세이』(경기도 용인: 스펙터프레스, 2009).

  10. 20100216 - 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11. 20100217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영철 옮김, 『문화와 가치』(서울: 책세상, 2006).

  12. 20100227 - 마크 에론손, 장석봉 옮김, 『도발 - 아방가르드의 문화사』(서울: 이후, 2002).

  13.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정치』(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7).

  14. 20100303 - 막스 베버, 전성우 옮김, 『직업으로서의 학문』(경기도 파주: 나남출판, 2006).

  15.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 기초편』(서울: 교우사, 2009).

  16. 20100306 - 심송용, 강희모, 『아름다운 수식문서작성 프로그램 – LaTeX (II) 활용편』(서울: 교우사, 2009).

  17. 20100328 - Debra Cameron, James Elliott, et al., Learning Gnu Emacs (3rd. ed.), (Sebastopol, CA, USA: O'Reilly, 2005).

  18. 20100417 - 앨버트 허쉬먼, 김승현 옮김, 『열정과 이해관계』(서울: 나남출판, 1994).

  19. 20100517 - 클레어 베상, 박슬라 옮김, 『캣 위스퍼러』(서울: 보누스, 2006).

  20. 20100530 - 캐스 선스타인, 이기동 옮김, 『루머』(서울: 프리뷰, 2009).

  21. 20100610 - 박노자, 『하얀 가면의 제국』(서울: 한겨레신문사, 2003).

  22. 20100702 - 헌터 S. 톰슨, 장호연 옮김,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서울: 마티, 2010).

  23. 20100702 - 플라톤, 이정호 옮김, 『메넥세노스』(서울: 이제이북스, 2008).

  24. 20100706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경기도 파주: 한길사, 1997).

  25. 20100708 - 손석춘, 『신문 읽기의 혁명 2』(서울: 개마고원, 2009).

  26. 20100713 - 아우구스띠누스, 성염 역주, 『자유의지론』(대구: 분도출판사, 1998).

  27. 20100713 - 살바토레 세티스, 김운찬 옮김, 『고전의 미래』(서울: 길, 2009).

  28. 20100715 - 그레고어 쉘겐, 김현성 옮김, 『빌리 브란트』(서울: 빗살무늬, 2003).

  29. 20100720 - 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30. 20100722 - 조지 오웰, 정영목 옮김, 『카탈로니아 찬가』(서울: 민음사, 2001).

  31. 20100725 - 김혜나, 『제리』(서울: 민음사, 2010).

  32. 20100810 - 프란츠 파농, 이석호 옮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서울: 인간사랑, 1998).

  33. 20100811 - 니콜라스 시라디, 강경이 옮김, 『운명의 날 - 유럽의 근대화를 꽃피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서울: 에코의서재, 2009).

  34. 20100828 - 버락 오바마, 이경식 옮김,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35. 20100829 - 로버트 미지크, 서경홍 옮김, 『좌파들의 반항 - 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경기도 파주: 들녘, 2010).

  36. 20100905 - 슈테판 츠바이크, 안인희 옮김,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서울: 바오, 2009).

  37. 20100910 - 로버트 라이시, 형선호 옮김, 『슈퍼자본주의』(서울: 김영사, 2008).

  38. 20100913 - 알레시오 레오나르디, 얀 미덴도르프, 윤선일 옮김, 『한 줄의 활자』(서울: 안그라픽스, 2010).

  39. 20100920 - 얼 쇼리스, 고병헌·이병곤·임정아 옮김, 『희망의 인문학』(서울: 이매진, 2009), 개정판.

  40. 20100921 -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정의란 무엇인가』(서울: 김영사, 2010).

  41. 20100929 -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실천이성비판』(서울: 아카넷, 2002).

  42. 20101225 - Malcolm Gladwell, What The Dog Saw(New York: Little Brown, 2009).

  43. 20101227 - 제임스 트레필, 정주연 옮김, 『산꼭대기의 과학자들』(서울: 지호, 2003).

  44. 20101227 - 장 자크 루소, 김중현 옮김, 『인간 불평등 기원론』(서울: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