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31

[북리뷰] 한국이 싫어서 떠나는 우리들에게

한국이 싫어서
장강명, 민음사, 1만3천원.


문득 떠올려보면, 장강명 이전에 황지우가, '한국을 뜨고 싶다'는 욕망을 문학으로 포착해냈다. 영화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극장에서 "우리도 우리들끼리 / 낄낄대면서 / 깔쭉대면서 /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 한 세상 떼어 메고 /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싶지만, 행만 바뀐 채 곧장 이어지는 문장으로 현실이 엄습한다. "하는데 대한 사람 / 길이 보전하세로 /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 주저앉는다" 황지우의 절창 '새들도 새상을 뜨는구나'의 뒷부분이다.

기자 출신의 젊은 소설가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도 비슷한 정서의 화자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제는 극장에서 애국가가 나오는 세상이 아니기에,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하는 나라가 아니기에, "주저앉는다" 외의 다른 선택지가 가능해졌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고자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는 '계나'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왜 한국을 떠났느냐.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이 싫어서'지. 세 마디로 줄이면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내가 지금 "한국 사람들을 죽이자. 대사관에 불을 지르자."고 선동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태극기 한 장 태우지 않아.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에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입에 담아봤을 바로 그 말, '에이, 이놈의 나라에서 더는 못 살아'를 적나라하게 제목에 담아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발간 즉시 화제작이 되었다. '한국이 싫어서' 떠나고 싶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뭉개고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은 대한민국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계나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 화자의 입을 통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꿈꿨지만, 정말 한국이 싫어서라기보다는 삶에서의 작은 행복을 찾고 싶어서 한국을 떠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직선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2015년 최고의 문제작이다.

하지만 박수를 몇 번 치고 책장을 덮기엔 아쉬움과 의문점을 남기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떨치지 못한 질문은 이것이다. 작가는 남자인데, 왜 '한국이 싫어서' 이 나라를 떠나는 1인칭 화자는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는가? 한국을 굳이 떠나야만 하느냐고 묻는 남자친구에게 계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차피 난 여기서도 2등 시민이야. 강남 출신이고 집도 잘 살고 남자인 너는 결코 이해 못해."

그렇다. 한국은 한국인들이 사는 나라지만, 그 표준적인 '한국인'은 어디까지나 부모 모두 한국인인 남성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해외 여행을 통해, 한국 사회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낀다. 똑같은 일을 해도 남성 대 여성의 평균 임금은 100대 62다. 여성의 노동은 남자의 그것에 비해 절반을 겨우 넘기는 평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세계 그 어디에도 완벽한 성평등이 구현된 나라는 없지만, 한국은 유독 심하게 여성에게 가혹하다.

여기서 작중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고 1인칭 서술을 한 장강명의 선택은 양면적 효과를 낳는다. 일단 그는 '드러나지 않았던 목소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냈고, 그 자체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성형 1인칭 화자의 내면을 서술되어 있는 탓에, 작가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주인공 계나의 판단과 선택은 사회 통념적 비난을 돌파해낼 수 없다. 이 책은 '요즘 젊은이들'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식 세계를 뒤엎지 못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젊은 여자'의 목소리에 애초부터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이민을 떠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으로부터, 한국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이 싫어서> 이후, 더 많은 문학적 도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해본다.


2015-07-16

[북리뷰] 요리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
후안 모레노, 미라크 탈리에르초, 반비, 2만원.

바야흐로 쉐프 전성시대다. TV만 틀면 칼 든 남자들이 흰 옷을 입고 요리를 하고 있다. 누구는 유학파라는 둥, 누구는 국내에서 공부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둥, 심심찮게 그들의 배경까지도 엿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요리라는 것이 과연 쉐프만의 전유물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다양한 장소와 맥락 속에서 요리를 한다. 우리가 요리를 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리사들 가운데에는 독특한,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사연을 겪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슈피겔>의 기자 후안 모레노가 사진작가 미르코 탈리에르초와 수다를 떨던 중 떠올린 아이디어도 바로 그것이었다.

"미르코와 나는 독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요리사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리가 내건 단 하나의 조건은 독자들이 따라 할 수 있는 각자의 최고 요리와 함께 각자의 사연을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음식의 질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야기의 질이다.(12쪽)"

그렇게 수집된 17명의 요리사들이 보여주는 사연들은 하나같이 비범하고, 때로는 충격적이며, 어떤 경우에는 슬픔을 안겨준다. 삼촌의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삼촌이 마피아의 거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고, 지금은 빌 클린턴이나 마돈나도 예약을 하지 못할만큼 잘나가는 뉴욕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오스'의 쉐프인 프랭크 펠레그리노의 경우는 그저 재미있고 유쾌하다.

하지만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의 전속 요리사였던 오돈테 오데라의 이야기는, 그저 인터뷰를 통해 전해듣고 있을 뿐인데도 다소 섬뜩한 인상을 남긴다. 그 반대편에는 시위 현장마다 찾아다니며 '배가 고프면 투쟁도 없다'고 사람들을 독려하고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는 밤 카트 같은 사람도 있고, 사라예보 내전에서 군인으로서 싸우다가 탈출하여 요리사의 길을 걷고 있는 니하드 마멜레지야의 사연도 존재한다. 요컨대, '요리사'라는 단 하나의 범주를 제외하고 나면,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묶여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은 단호하다. "레시피가 들어 있지만 이 책은 요리책이 아니다. 스타 요리사의 이야기가 있지만 스타에 대한 책도 아니다. 음식 이야기가 계속 나오지만 음식에 관한 책도 아니다. 이것은 오직 요리사에 관한 책이다."(13쪽) 그 요리사의 범주는 대단히 탄력적이며, 그만큼 많은 삶의 모습이 포착된다. 나이로비의 쓰레기 집하장에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여성이라던가, 텍사스 교도소에서 그 자신도 죄수의 신분으로 200명이 넘는 사형수에게 최후의 만찬을 차려주었던 남성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모습이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에 담겨 있다.

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기로 하고, 여기서 우리의 현실을 돌이켜보자. 그렇게 TV만 틀면 누군가가 요리를 하거나 그것을 먹는 모습이 등장하고 있건만, 그 모든 요리사들은 '쉐프' 아니면 '엄마'로 양분되는 듯하다. 폼나는 흰 옷을 입고 멋진 태도로 고급스러운 요리를 만들어주는 남자들이 '쉐프'로 불리고 있는 동안, 일상을 지탱시켜주는,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처럼 끝나지 않는 노동으로서의 '집밥' 차리기는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여성의 몫일 뿐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요리가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본질적 요소라면, 그 요리의 양태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고, 요리를 하는 사람인 요리사 역시 그저 두 가지 범주로만 쪼개질 수는 없다. 후안 모레노와 미르코 탈리에르초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요리사'에 집중하여 포착해낸 17개의 삶은,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리의 식문화와 그 식문화를 바라보는 비평적 시각을, 문득 부끄럽게 만든다. 먹방의 시대, 천편일률적인 '쉐프'들의 모습을 보는 게 지겨워진 이들에게, <날것의 인생 매혹의 요리사>를 권하고 싶다.



2015-07-15

미각의 제국, 엄마라는 식민지

1.

나는 황교익이 내게 "자유기레기"라는 폭언을 퍼붓기 전부터 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가 '수요미식회'에 출연하기도 전의 일이다. <미각의 제국>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책을 꺼내놓고 뒤적거리며, 최근의 논란에 대해 한 마디 덧붙여본다.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읽고, 나는 경향신문에 "엄마 없는 하늘 아래"(경향신문, 2015년 7월 13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나는 황교익의 칼럼이 '어머니즘'에 몰입한 나머지, 그가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맞벌이 여성'들에게 무심하고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론 내 칼럼에는 그 내용만 들어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황교익은, 인터넷에 기사가 올라온지 고작 한 시간 가량 지난 시점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블로그 게시물을 올렸다. 자신의 칼럼은 '맞벌이라는 현상이 있었고 그로 인해 80-90년대생들이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못 먹고 자랐다는 사실을 직시했을 뿐,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부추긴 바 없다'고 반론했다.

그 과정에서 "글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기레기", "자유기레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였는데, 그러한 표현은 어떤 면에서 부차적인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이 여성차별적인 내용을 생각하고 또 글로 표현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황교익은 7월 12일자 칼럼에서 맞벌이 여성들의 죄책감을 건드린 게 맞다. 그 내용은 지난 블로그 게시물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에서 상세하게 다루었으므로, 오늘은 좀 더 넓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2.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어머니의 수와 같다"는 말을 들었다. ①어머니가 자식에게 먹이는 음식만큼 사랑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은 이 세상에 없다는 말일 것이다. ②어머니의 음식에 대한 이런 애착은 어머니가 부재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곁에서 매일 먹을 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③아내의 음식도 그럴 것이다.(94쪽, 원문자와 강조는 인용자)

<미각의 제국>의 서른한번째 항목 "아내"에서 인용한 대목이다.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과연 그럴까?

①에 대해 우선 생각해보자. 저 문장은 사실의 기술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므로, '세상 모든 어머니가 자식에게 정성스럽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지는 않는다' 같은 사례 나열식 반박을 하지는 않겠다. 황교익의 칼럼이 SNS에 등장한 후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해준 맛없고 이상한 음식'을 토로하는 작은 축제가 벌어졌었다는 사실만 기록해 두기로 한다.

①의 본질적인 문제는 그것이 개념상 여성일 수밖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데 있다. 성차별이라고? 저것은 어머니의 음식과 사랑을 찬양하는 말 아닌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도 성차별이다. '적대적 성차별'이 아닌 '호의적 성차별'이란 말이다.







어머니나 부인의 역할, 특히 가사 노동에 대해 과도하리만치 상찬을 쏟아붓는 것은, 위에서 인용된 트윗에서 말하는 바 "호의적 성차별"에 속한다. 가사 노동은 여자(라기보다 어머니+아내지만 그 외의 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거론되고 있지 않다)의 몫, 그 밖의 것은 남자의 몫, 이렇게 세상을 나누어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성차별적임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물론 황교익이라는 한 사람의 가정 생활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고, 직접적으로 간섭할 바도 아니며, 이 글 또한 그의 개인사에 대한 어떠한 예단과 평가도 담고 있지 않음을 명백히 해둔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밑줄까지 그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설령 남편이 가계 수입의 전부를 벌어오는 경우라 하더라도, 자녀 양육과 가사 노동에서 일정 부분을 분담하는 것은 현대적이고 평등한 가정을 이루는 기본이다.

'성차별'이라는 말이 과도한가? 표준국어대사전은 차별을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성을 낮춰보는 것 만큼이나, 불필요하게 '숭배'하는 것 역시, 차별의 개념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일이다.

아내가 단지 내 미각만 조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조정하고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어머니가 어린 나를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아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해서 먹인다는 것은 곧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일이다.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아내가 내 삶의 조정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권위는 이 사랑이 부여한 것이다.(95쪽)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나는 지금 황교익이라는 사람의 개인적 삶에 대해 그 어떤 예측이나 평가도 하고 있지 않다(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또 밑줄을 그었다. 이 게시물은 그의 책에 담긴 내용의 '담론적 차원'에 대한 평가지, 저자의 '삶'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렇듯 '가사노동하는 어머니-아내'를 신성시하는 목소리 그 자체가 여성 억압의 근원이었음을 지적해왔다는 역사적 사실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가사 노동을 여성에게 모두 떠맡기고 그것을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칭송하는 남자들의 모습은, 마치 아이티에서 노동하는 노예들을 바라보는 고갱의 감상적 시선을 연상시킨다. 혹은, 기왕 황교익이 일제 식민지 시절을 언급하였으니, '조선의 미'를 예찬하던 일본 지배층의 아련한 눈빛과도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그러한 노동은, 수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전원적 풍경의 일부로 감상의 대상이 된다. 자신이 하는 고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3.

게다가 이러한 전근대적 '어머니-모유-집밥-사랑'의 물신적 숭배, 이른바 '어머니즘'은, 황교익 본인의 과학적 음식 세계와 전혀 상응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책 <미각의 제국>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 중 한 사람이지만, 도저히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수많은 '어머니'들은 이상한 요리를 하고 있다. 그냥 이상한 요리를 하는 수준을 넘어, 의학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온갖 '효능'에 혹하고, 그러면서도 '설탕 두 숟가락 대신 매실청 세 숟가락 넣기' 같은 비과학적, 비효율적 레시피가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인의 밥상을 가장 망치고 있는 프로그램은 '여섯시 내고향'이나 '생생정보통'이지 '집밥 백선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섯시 내고향'을 보자. 모든 식재료를 고추장에 버무리고 튀김옷을 입혀서 '탕수'로 만들어버린다. '생생정보통'이나 'VJ 특공대'에서 나오는 온갖 '맛집'들은 또 어떤가. 이 문제는 대한민국에서 황교익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머니'들이, 과연 이러한 정보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가?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하다. 황교익 본인의 삶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의 '집밥'은 바로 저런 TV 프로그램에 휩쓸리고 있다.

요리에 관심 있는 시청자들이 왜 백종원의 '차라리 설탕을 넣어라'에 열광했는지 황교익도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은 것 아닌가? 황교익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상적인 '집밥' 말고, 현실의 '집밥'은 어차피 지금도 설탕투성이다. 단지 '설탕을 먹는다'는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매실청' 같은, 음식의 향을 더욱 망가뜨리는 변종 식재료를 투입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황교익의 '어머니즘'은, 황교익 자신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한식 레시피가 전반적으로 너무 달다'는 황교익의 비판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일으켜진 죄책감 앞에서, 대중들, 특히 '집밥'의 '조정자' 역할을 하는 많은 주부들은, 설탕을 안 넣고 대신 다른 첨가물을 투입하여 단맛을 벌충한다. 그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단맛이 부족해서 맛없게 느껴지는 집밥을 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몸에 안 좋은 설탕을 먹이고 싶지는 않아서, 설탕 범벅인 매실청으로 단맛을 내는, 그런 모순된 사랑 말이다.

황교익 본인이 원하는 '한식의 레시피 변화'를 이끌고 싶다면, '어머니의 밥은 무조건 옳다' 같은 전근대적 도그마를 깨뜨려야만 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머니'들이 해주는 '집밥'은, 황교익의 이상 세계의 그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4.

황교익이 꿈꾸는 '미각의 제국'은 '어머니'라는 식민지가 없으면 실현되지 않는다. 그 '어머니'는 일단 모유 수유를 해야 하고, 자식에게 '집밥'의 맛을 가르치기 위해 출산 후 무려 6년이나 육아 휴직을 하는 그런 어머니이다. 요컨대 돈은 돈대로 벌어오고, 밥은 밥대로 다 차려야 황교익이 말하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황교익의 육아 관련 정책 제안은, 앞서 말한 '호의적 성차별'의 예시로서 완벽하다.

제아무리 숭고하다고 미사여구를 덧붙인다 한들, 그런 시각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세상에나, 6년의 육아휴직이라니, 멀쩡히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는 여성보다 미취학아동의 '집밥' 입맛이 그렇게나 더 소중한가?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우려면, 일을 쉬는 수밖에 없다. 애 하나 낳으면 6년간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세상에 그 어떤 기업이 미쳤다고 여성 사원을 뽑겠는가? 그 경제적 부담을 모두 국가가 진다면, 국가는 모든 여성들이 취업을 애초에 못 하도록 막으려 들 것이다. 재정적 부담이 엄청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 6년 동안 남자들은 승진하고 직업적으로 숙련도를 높인다. 저런 세상에서 여성은 모두 집에서 애 키우다가 애들이 다 자라면, 비숙련노동 허드렛일이나 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즘'은, 그 대변인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선량하고 순박하며 자연스러운 발상이 아니다. 오랜 역사적 맥락 속에 굳어져버린 차별적 성 역할관이 투영된 인습적 사고다. 나는 황교익이 부디 '어머니즘'을 극복하고, 변화된 현실과 개선된 대중적 인식 속에서, 그가 원하는 바람직한 식탁을 구현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덧붙임)

집밥은 그냥 집에서 먹는 밥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늘 밥을 해먹는 그곳이 바로 집이다. 그 집밥이 꼭 '어머니'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 개인적인 체험을 되짚어봐도 그렇다. 논산훈련소에서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내가 만든 파스타였다. 냉장고에 있는 아무 재료나 되는대로 썰어 넣고 볶아서, 대충 끓인 면에 대충 볶아 만든, 그런 얼렁뚱땅 파스타. 그게 나의 집밥인 것이다. '자신만의 집밥'을 가진 남성들이 더 늘어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2015-07-13

말한 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는가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문화일보, 2015년 7월 12일)을 텍스트 에디터에 퍼놓은 후, Ctrl-F를 눌렀다. 제목까지 포함해, 이 글에는 "엄마"가 총 30회 등장한다. "엄마"는 두 글자로 된 단어니, 총 60글자가 '엄마'를 표현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자 이름을 빼고, 제목을 포함하여, 본문 전체가 띄어쓰기 포함 2664자라고 나오니, 문제의 칼럼에는 "엄마"가 약 2.25퍼센트 함유되어 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까지 신문 지면에 오른 칼럼 중 '엄마 함유율'로는 최고 수준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어떨까?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 "아버지", "파파", "부친" 등을 검색해봐도 마찬가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황교익의 칼럼 "‘백주부’ 백종원에 열광? 맞벌이엄마 사랑 결핍 때문"에는 "엄마"가 30번 나올 때, "아빠"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수량적 분석까지 하는 이유는, 7월 12일 밤 10시 51분에 올라온 이 블로그 게시물 때문이다. 황교익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였다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 내용은 내 칼럼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대한 비판인데, 심지어 내가 기사를 읽기도 전에 읽고 비판 게시물을 썼다는 점도 놀랍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내용이다.

황교익의 말이다.

'맞벌이를 했다, 그들은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기 힘들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부추긴다고 지레짐작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때의 그 상황을 누구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맞벌이는 언급하면 안 되는 금기의 영역인가.

짐작을 넘어 나더러 무심하고 잔인하다는 억측의 말까지 붙인다.

그런데 정작 그의 칼럼을 좀 더 읽어보면, 맞벌이하느라 자녀들에게 밥을 해먹이지 못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자극하고 있다는 게, 너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황교익은 자신이 쓴 칼럼을 끝까지 읽어보긴 한 것인가?

‘백종원 엄마’의 음식을 두고 내가 “맛없다”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할 것이다. 이럴 바에야, 진짜 엄마한테 진짜 엄마 손맛을 배우면 어떨까. 엄마도 그때에 맞벌이하느라 사랑을 듬뿍 주지 못한 것에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마지막 문장이 '죄책감 찌르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앞서 우리가 꼼꼼하게 세어보았다시피 황교익의 7월 10일 칼럼에는 '아빠'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밥을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중대한 삶의 기회를 빼앗긴 것처럼 묘사된다. 게다가, 거의 모든 칼럼니스트들이 가장 힘을 주는 마지막 문장에서, "엄마"는 "마음 한구석이 늘 짠할 것"이라고까지 한다. 다시 한 번 묻자. 이게 죄책감 강요가 아니면 뭔가?

왜 황교익은, 자신이 한 말을 두고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가?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엄마'에게, 또 '여성'에게, 나쁜 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이 맞벌이 여성에게 "무심하고 잔인하다"고 비판하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사실인 것을.

그는 블로그 본문에 "이 정도면 기레기이다"라고 내뱉은 것으로도 성이 안 풀렸는지, "#자유기레기인가"라는 태그까지 붙였다. 물론 음식에 대한 전문성에서 내가 황교익과 비교할 대상이 못 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거나, 우기면서 타인에게 인신공격을 하지는 않는다.

사실 진짜 문제는 황교익이 덧붙인 내용에 담겨 있다.

참고로 육아 관련 정책에 대해 내 의견을 밝히겠다.

이 내용은 오래 전부터 여러 강연과 방송에서 말한 적이 있어 아는 이들이 많다.

"국가는 엄마가 자신의 품에서 자식을 온전히 키울 때까지, 적어도 6세까지, 경제적으로 완벽히 보장해주어야 한다"이다.

이 정책은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아이들의 권리'까지 감안하여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정책을 현실 속에서 실행한다면, 그는 차우세스크와 맞먹는 독재자로 역사에 이름을 아로새길 수 있을 것이다. 황교익의 '어머니즘'이 얼마나 현실 정합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전근대적인지에 대해서는 새로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2015-07-12

[별별시선]엄마 없는 하늘 아래

“방송에서 백종원을 ‘백주부’라고 한다. 집안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 주부다. 주부는 대체로 엄마다. 백주부를 ‘백종원 엄마’라고 풀면 백종원에 대한 대중의 열광이 어디서 비롯했는지 알 수 있다. 대중이 백종원을 통해 얻으려는 건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 그렇다, 엄마다.”

최근 예능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외식업자 백종원을 둘러싼 대중적 열광을 두고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내린 평가다. 발언 자체가 문제적이지만, 일단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황교익은 <집밥 백선생>을 보긴 했을까?

<집밥 백선생>은 연령대별로 나름 안배된, 하지만 요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네 남자에게 백종원이 아주 기초적인 레시피와 기술을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타깃 시청자는 ‘엄마의 사랑’이 결핍된 ‘한국 맞벌이 부부의 1호 자식들’인 ‘1980~1990년대생’이 아니다. 평생 손에 물 묻힐 일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갑자기 자기 손으로 밥을 챙겨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중년 남성들이다. 그것은 <집밥 백선생>의 1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물론 방송을 하다 보면 제작진이 의도한 타깃 시청자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상세한 시청률 표가 없으니, 논의를 위해 일단 황교익의 말대로 1980~1990년대생들이 <집밥 백선생>에 열광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집밥’이니까 ‘주부’가 하는 것이고, ‘주부’니까 ‘엄마’일 것이라는 자동연상은 적잖은 의문을 남긴다. 많은 이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집밥 백선생>에서 가장 차별화된 키워드는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이지 좋은 선생이다. 학생의 수준에 맞춰 아주 기초적인 내용부터 가르쳐준다. 이렇게 만들면 무슨 맛이 날지 상상해보라고 한 후, 당장 실습부터 해서 출연자들의 결과물에 대해 리뷰해주고,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유도한다. 그러니 시청자들 역시 손쉽게 따라해볼 용기를 낼 수 있다. 방송에 나온 식재료가 다음날 품귀 현상을 빚는 것은 괜히 벌어지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집밥’과 ‘엄마’가 분리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오직 여성에게만 쏠리던 가사노동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비로소 남자들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남자도 ‘집밥’을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가 TV를 통해 전국에 유포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방영된 ‘통조림을 이용한 생선 요리’편을 떠올려보자. 왜 통조림을 쓰는가? 백종원은 생선을 사온 후 냉장고에 넣었다가 조리하고 잔여물을 버릴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비린내가 나고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내가 본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들이 TV에서 요리를 했지만, 가사노동의 덧없는 고통을 이렇게 공정하게 전달하고 설득한 사람은 없었다.

황교익의 식재료 중심주의에는 분명 경청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러나 백종원에 대한 대중적 열광을 분석하는 그의 시선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먹이고 싶지만 시간도 없고 경제력도 부족한 엄마들의 죄책감을 부추긴다는 면에서, 무심하고 또 잔인하다. “맞벌이로 바빠 내게 요리 한 번 가르쳐준 적이 없는 엄마와 달리 부엌의 온갖 인스턴트 재료로 요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게 백종원의 인기 비결이라고 황교익은 말한다. 그런 논리라면, 아이가 집밥을 못 먹고 자라는 것은 엄마가 맞벌이를 안 해도 될 만큼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아빠 탓 아닌가?

아빠가 돈 벌고 엄마가 살림하고 애 둘 낳아 기르는 4인 가족 모델은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집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엄마’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구시대적, 여성차별적 세계관은 더더욱 현실 적합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집밥 백선생>의 성공은 변화한 세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엄마주의자’들이 엄마의 손맛 타령을 한다 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요리는 생존을 삶으로 바꾼다. 다 큰 어른들이 엄마 집밥 타령하는 것은 보는 사람마저 부끄럽다. 많은 남자들이,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스스로의 삶을 가꾸어나가면 좋겠다.


입력 : 2015.07.12 21:23:15 수정 : 2015.07.12 21:24:1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7122123155

2015-07-02

[북리뷰] 이성애도 한때는 정상이 아니었다?

사랑의 역사
루이-조르주 탱, 문학과지성사, 1만3천원.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전 세계의 국가를 하나의 기준으로 나눠볼 수 있다. 동성커플의 결혼을 법으로 인정하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로 말이다. 영국의 시사·경제주간지 <The Economist>에 의해 '게이 디바이드'라고 명칭되기도 한 이 격차는, 지난 6월 26일 미국의 연방대법원이 '각 주는 동성커플의 결혼을 막을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여 미국 내 동성혼을 전면 법제화함으로써, 확연히 가시화되었다.

영화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이 동성의 파트너와 함께 제출한 혼인신고서가, 우리의 민법 규정상 특별히 반려되어야 할 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게이 디바이드'에서 선진국이 아닌 후진국의 편에 서 있는 것 같은 불안감을 떨쳐내기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난 6월 27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한국 사회는, 느리지만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루이-조르주 탱은 동성애자이며 동시에 흑인이다. 동성애자 인권 운동과 인종차별 철폐 운동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는 실천적 지식인이며, 학문적으로는 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푸코의 방법론을 동원해, 사람들이 '자연스럽다', 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아주 근본적인 질서에 물음표를 던진다. 과연 '이성애'는 당연하기만 한 일인가?

우리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시민이며 동시에 군인이었던 그들은 서로 동성애 관계를 맺고 전우로서 함께 전장에서 뒹굴었다. 저자는 문학 연구자답게 중세의 대표적인 서사시 '롤랑의 노래'를 사례로 든다. 롤랑의 뒤를 따라 약혼녀가 죽는 장면을 후대의 연구자들은 크게 강조했지만, 그것은 분량상 대단히 미비하며 극중 비중도 크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롤랑이 그의 맞수인 올리비에 경과 나누는 진한 우정 혹은 애정이다. 그들은 서로 변하지 않는 충직함을 맹세하고, 진지하게 입을 맞추고, 함께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정말 중세의 서사시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세인들이 오늘날의 우리보다 더 '개방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올바랐'기 때문에 동성애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동성애 뿐 아니라 이성애에 대해서도 현대인과 같은 관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중세인들은 여자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지한 감정적 교류를 남자와 나누었고, '남색가'가 아니면 남자와 몸을 섞기란 곤란한 일이므로,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남자들끼리의 관계를 돈독히 다졌다.

기사, 즉 무인 중심의 중세가 궁정사회로 변모하면서 이성애 중심주의가 탄생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이제 여자는 남자들끼리 싸워서 얻는 전리품이 아니라, 그 여성의 마음을 얻어내야만 하는 설득과 유혹의 대상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 또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기사, 성직자, 의사들이 이성애에 온갖 딱지를 붙이며 그 영향력을 줄여나가기 위해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실패했다. 결국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성애는 너무도 당연하기에 눈에 띄지 않는 지배적 에피스테메가 되었고, 대신 동성애가 '문제적 대상'으로 부각된다.

이 책을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한 푸코적 해석으로 보는 것은 분명 가능하며, 그것이 저자의 의도에 더욱 가까운 독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진지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과연 한국 사회가 '이성애 중심 사회'로 나아간 적이 있긴 한지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마치 올리비에 경이 롤랑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내어주듯, 한국의 일부 남성들은 성매수 경험이나 여성혐오적 농담 등을 공유하며 그들끼리 진한 '형제애'를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동성애가 인권의 판단 지표로 부각되어 있는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문명적인 이성애자의 삶을 구현하는 것부터가 우리에게 과제로 주어져 있음을, 불현듯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