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3

마스크 뱅크런: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예금을 맡아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며 유통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예금주가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하면 내줄 수가 없다. 망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 자본국가들이 20세기 초 경험했던 '뱅크런'이다.

지금(3월 4일 0시 무렵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대란' 역시, 따지고 보면 뱅크런과 유사한 현상이다. 다수가 일시에 패닉을 일으켜 특정 재화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뱅크런의 경우는 그 대상이 현금이었다면, 지금은 마스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입하려 할까? 과도한 건강 우려? 마스크가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걸 모르는 우매함 때문에? 아니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마스크를 구입하려 하는 이유는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언제 마스크를 못 사게 될 지 모르니, 살 수 있을 때 사두자, 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 원리에 따라, 혹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제공하는 시장 뿐 아니라, 실은 그 시장의 바탕이 되는 정부마저 서서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법은 정부가 정부답게 일하는 것이다. 뱅크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뱅크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은행에 더 많은 돈을 갖다주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예금주들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언제건 은행은 당신들에게 돈을 줄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예금을 주지는 말아야, 예금주들이 믿고 집에 돌아가면서 뱅크런이 종료된다.

문제는 화폐와 달리 마스크는 소비재라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미쳤나본데, 마스크를 오래 써도 된다느니 빨아 써도 된다느니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나보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껴 쓰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마스크를 확보하고자 줄을 서게 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장군처럼 하면 된다. 전국 읍동면 단위까지 퍼져있는 행정력을 이용해, 1인당 몇 장의 마스크를 정부가 확보하여, 신분증을 확인하고 직접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해법이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해법이다. 왜냐하면 시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마스크라는 물건 자체가 관건이 아니다. 지금 줄을 선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1인당 몇 장씩 직접 손에 쥐어줄 수 있는가?

만약 정부가 이걸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마스크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행렬 자체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마스크를 유통하는 시장과, 그 시장의 질서를 확보하는 정부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물량을 70%, 80%, 아니 100% 확보한 채로 유통에 나서도 이런 식이면 마스크는 계속 부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사서 비축해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공급은 모자라고, 남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불안해져서, 자신도 줄을 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설마 하면서도 줄을 선다. 마스크 뱅크런이다.

마스크 그게 뭐 비싼 것도 아니고, 생산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 없는 것은 신뢰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 앞으로 2주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전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에 걸맞는 단호한 모습을 정부가 보였으면 한다.

직접 나눠줘라. 그러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굳이 사러 나가서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정을 되찾고, 굳이 줄까지 서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는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흔히 쌓여 있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게 무슨 어려운 논리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할까? 우리나라 행정력이 그렇게 부족한가? 정부가 직접 물량을 확보까지 해놓고 그걸 굳이 '판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물량을 '판매'하면 실수요자가 아닌 누군가가 매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그런 식이면 품귀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외 국가에 그것을 유통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거나, 그런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 너무도 좋은 여건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시장과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따라서 또 사재기에 나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스크 뱅크런이다. 정부가 정부답게 행동하여 국민을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면 금방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부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하라.

댓글 2개:

  1. 정치의 아버지들이 봉건제, 군주제를 넘어 의회를 만들고, 대의제 민주주의를 고안한 이유 중 하나는 유사시에 (되도록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시장을 통제하고 국민의 공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에 간섭하기 위해서죠.

    그것을 오남용하여 파시즘이나 사회주의로 흐르지 않는 선에서 활용하라고 준 권한을 참 못 써먹는 것 같습니다 저 작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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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권력을 정당하게 활용한다'는 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검찰을 동원해 신천지를 압수수색하면 그 자료를,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은 혐의 외의 용도로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판사 출신 법무부장관이 검찰에 요구하는 그런 세상이니 말입니다.

      저런 사람들을 '민주화 세력'이라고 믿고 따랐던 저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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