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6

[노정태의 시사철]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아무튼, 주말]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과 '대상화'


한 도시에 어떤 슬픔도 모른 채 살다가 죽은 왕자가 있었다. 평생 '행복한 왕자'라고 불렸던 그는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 시내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동상이 되었다. 겨울이 왔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때를 놓친 제비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하다가 왕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의 가난과 비참 때문이었다. 제비는 왕자의 명을 받아 처음에는 칼자루의 루비를, 나중에는 사파이어로 만든 왕자의 눈을, 마지막에는 왕자의 몸을 덮고 있던 금박을 하나씩 벗겨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흉한 모습이 되자 도시의 시장과 권위 있는 관계자들은 동상을 철거해버리고 만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의 내용이다.

일러스트 = 안병현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동화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일종의 교훈담으로 말이다. "틀렸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다. 그는 "예술은 오직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유미주의자였다. '행복한 왕자'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화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대상화는 현대 철학, 특히 페미니즘 및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비롯한 페미니즘의 여러 고전을 만나게 되지만, 여기서는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논의에 기대보도록 하자. 그가 학술지 '철학과 사회 문제(Philosophy & Public Affairs)' 1995년 가을 호에 기고한 논문 "대상화(Objectification)"가 오늘날까지도 교과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누스바움은 고전 소설과 통속물, 잡지를 넘나들며 텍스트 여섯 개를 발췌한다. DH 로런스의 '무지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제임스 핸킨슨이라는 철학자가 로런스 세인트 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쓴 하드코어 에로 소설인 '이사벨과 베로니크', '플레이보이' 1995년 4월 호,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가 남자 동성애자들의 성생활을 다룬 '수영장 도서관', 헨리 제임스의 '황금 그릇'이 그것이다. 그 각각을 검토하며 대상화의 특징을 도구성, 자율성의 부정, 수동성, 대체 가능성, 침해 가능성, 소유권, 주체성의 부정이라는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말은 어렵지만 요지는 간명하다. 대상화란 인간 존재가 하나의 대상이자 사물로 취급되는 현상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어떤 수단을 위한 도구로, 혹은 사고팔 수 있는 재화로 취급하며, 때로는 약탈하고 어떨 때는 예찬하기도 하는 행위를 대상화라 부른다.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대상화가 주로 문제가 된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도구로 삼고, 인신매매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숭배'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다.

저 일곱 분류가 수학 공식처럼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맥락에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령 DH 로런스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서로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양자가 합의하에 계급적 위계를 뛰어넘는 성적 대상화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누스바움은 판단한다. 반면 '플레이보이'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해로운 대상화에 속한다. 이웃집 여자, 여비서, 학교 선생님 등 어떤 범주를 통째로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왕자'로 돌아가 보자. 왕자를 행복의 아이콘으로 삼아 성 안에 가둬놓고 있었던 도시는, 왕자를 섬기면서 동시에 대상화하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동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우는 아이에게 "저 행복한 왕자처럼 웃으라"고 훈계한다. 도덕적 교훈 전달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도시의 고위 관료들은 동상이 보기 좋고 예쁘니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며 자신들의 취향을 뽐내지만, 정작 왕자가 흉측해지자 쓸모가 없어졌다며 폐기 처분해버린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장식품"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이 주도하여 전국에 세워진 소녀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녀상은 일제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차적으로는 대상화에 맞서는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녀상은 각자의 삶과 목적과 꿈을 지니고 있었던, 정의연에 동의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그 모든 위안부 피해자를, '한복 입은 소녀'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치환했다.

앞서 누스바움이 제시한 대상화의 일곱 유형 중 특히 '소유권'이 의미심장하다. 대상화하는 자는 대상화된 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소녀상 제작자가 소녀상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하며 다른 조각가의 모방을 금하는 현실은 무엇을 뜻할까. 정의연이 일제에 의한 강압적 성적 대상화를 고발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반일 운동의 도구로서 대상화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젊은 시절 일제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되었고, 훗날에는 같은 민족에 의해 이념적으로 대상화되고 있었다.

대상화에 저항하는 자는 폭력과 처벌을 당하게 마련이다. 관부재판을 통해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와 피해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받은 고 심미자 할머니의 이름이 남산 '기억의 터'에서 배제된 것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정의연이 자신들의 뜻대로 대상화되지 않는 피해자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상당수의 기성 여성주의자들은 운동과 조직을 지키겠다며 피해자의 절규를 외면한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위안을 위해 다시 '행복한 왕자'를 펼쳐든다. 와일드는 주장한다. 예술은 도덕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유용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대상화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은 참다운 가치를 얻는다. 쓰레기가 되어 소각로에 처박혔지만 왕자의 심장은 불 속에서도 녹지 않았다. 신은 죽은 제비와 그 심장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들을 천국으로 불러들인다. 대상화를 거부하며 존엄해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닐 것이다. 보석과 금박을 나누어주던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에 갇히기를 거부한 피해자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5/20200605022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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