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7

캐릭터의 제약과 난이도의 문제

조지 R. R. 마틴에게 있어서 '얼음과 불의 노래'중 가장 쓰기 어려운 캐릭터는 브랜이었다고 한다. 가장 어리고, 게다가 이야기의 초반에 추락하여 두 다리를 잃은 후로는 다른 캐릭터에게 의존하는 캐릭터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말을 좀 더 심층적으로 해석해보자. 캐릭터에게 제약이 존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 여지가 생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작가는 캐릭터가 지니는 불리한 요소들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그 내면과 활동을 글로 표현해내기가 쉽지 않게 되고 만다.

이는 요즘 잘나가는 '웹소설'이라는 장르에 왜 이렇게 '전생물'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제2의 인생을 사는 누군가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현생의 문제를 아주 쉽게 풀어가는 '사이다' 구성이, 구체적인 장르를 불문하고 웹소설의 표준적 작성 방식 중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다'를 원하는 대리만족의 욕망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조지 R. R. 마틴이 브랜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에 비추어 생각해보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현생을 다시 살아가는 먼치킨 캐릭터는, 제약을 가지고 있으며 고생하는 캐릭터에 비해, 작가 입장에서 보면 훨씬 '쉬운' 캐릭터임에 분명한 것이다. 만들기도 쉽고 이야기도 술술 풀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공급이 끊이지 않으므로 재미를 찾는 독자들은 공급되는 것을 읽게 된다.

'전생의 기억을 안고 태어나는 자의 정신적 황폐함'에 대해서는 이미 '전지적 독자 시점'이 갈데까지 간 사고실험을 해서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생물은 계속 나올 것이고, 독자들은 계속 소비할 것이다. 혹자는 손쉽게 독자들의 수준을 욕할지 모르겠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생산자들의 문제가 없지는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댓글 6개:

  1. 요즘 전생물이 유행이군요. 웹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아서 몰랐습니다. 인물과 그 인물에 얽힌 사건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제약이 대폭 사라지는 이점을 창작자로서는 요즘 같은 시대에 외면하기 힘들겠어요.
    '빨리 빨리' 컨텐츠를 생산해서 공급해야 하는 시대고 특히 웹 이라는 플랫폼은 그런 컨텐츠 공급 속도를 자랑하는 곳이니까요.

    답글삭제
    답글
    1. 많이는 아니고 위에 언급한 '전지적 독자 시점'을 읽어봤고요, 그 밖에 몇 개를 좀 앞부분만 뒤적여본 수준입니다. 옛날에 양산되던 무협지들이 '기연'을 만나서 갑자기 '초절고수'가 되는 식의 전개를 보여주었다면, 지금은 아예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나'가 되어서 현재의 인생을 쉽게 살고 싶어하는 거죠.

      대중소설과 대중문화 자체가 지니고 있는 맥락을 도외시하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고, 이 글도 그런 목적으로 쓴 건 아닙니다. 어쨌건 지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뭐라도 읽으면서 쉴 수 있다면 좋은 거니까요. 하지만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좀 더 고민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삭제
    2. 제가 요즘 날짜에 맞춰 컨텐츠 생산 하느라 힘들답니다. 그래서 첫 댓글이 그런 내용이 되었습니다. ㅎㅎ
      댓글로 말씀하셨듯이 작품의 내용과 캐릭터 설정 방식에 대한 고민은 늘 필요하다고 봐요. 쉽게 쉽게만 생산하려고 하면 나중에 다시 보았을 때 그 누구보다 창작자 자신이 후회하는 경우가 많을 듯 합니다. 사실 독자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작품을 기억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만든 사람 본인은 두고 두고 곱씹는 당사자니까 말이죠.

      그런데 솔직히 이 글을 읽었을 때 가장 첫번째 들었던 생각은 제가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이면 참 좋겠다는 것이고, 그건 지금도 여전한 바람입니다. 전생에 대한 기억 뿐 아니라 현생이 어떻게 끝날지도 알면 좋겠어요. 제약이 풀리고 나니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네요. ㅎㅎ

      삭제
    3. 뭔가 컨텐츠를 생산하고 계시는군요. 분야가 어찌됐건 무에서 유를 뽑아내는 건 힘든 일이죠. 기운 내시길.

      '전생을 알면 현생이 쉬워질텐데'가 전생물의 생산과 공급을 이끄는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빵과 장미님은 그 욕망을 정확하게 짚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현생이 어떻게 끝날지는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말이에요. ㅎㅎ

      삭제
  2.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게임 제작의 방법론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재미있는 게임은 제작자의 고민을 수반한다'
    게임이 재미있자면 배경 플롯이 웅장할 수도 있고, 캐릭터 육성의 변수가 다양할 수도 있고, 보스 패턴이 까다로울 수 있고 뭐 그런 겁니다. 이걸 위해선 고민 많이 해야 하죠.
    이걸 뒤집으면 어디서 베껴온 IP, 제작사 측에서 확률 장난치는 가챠, 유료아이템 없으면 원천적으로 못 깨는 보스.. 이런 재미없고 개발자가 고민 안 하는 게임이 됩니다. 그러니 건물주들이 오토 돌리는 게임이 되기 십상이죠.

    개발사 입김보다 유통사(퍼블리셔) 입김이 커지고, 기획자의 아이디어보다 안정적인 수익창출 시스템과 사업팀의 비즈니스모델이 커지게 된 결과인데요, 웹소설 시장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보다 팔리고 양산 가능한 서사 구조가 선호되고, 독자는 오토 돌리듯 클리셰의 파편을 소비하는거죠.

    '커다란 이야기의 소실'이든 '데이터베이스 서사'든 학자연하게 표현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겠지요. 일단 저는 다른 분야지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는 미디어를 즐겨온 소비자의 입장에서 '좋은 게 좋은 거' 마인드로 즐기고 있습니다. 초극의 계기가 발생할 수도 있고, 이대로 사장될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거니 하면서요. :)

    답글삭제
    답글
    1. 제 이야기와 딱 맞는 사례로군요. 하긴, 기억을 돌이켜보면 게임 업계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재미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도 벌써 몇 년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입니다. IP라 부르는 원작 내지는 자체 스토리 구조를 울궈먹고 또 울궈먹으며, 플레이 예시 화면은 딱 봐도 천편일률적이고... 그 이면에는 말씀하신대로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게임이 아니라, '이렇게 해야 돈이 된다'고 계산하여 만드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놓여 있을 테고요.

      결국 이런 상황이 누적되면 언젠가는 각 분야에서 판이 뒤집힐 테지만, 그걸 보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죠. 생각해보면 꼭 서브컬처 분야가 아니라 전반적인 정치나 사회 문화적인 측면도 비슷하게 굴러가는 것 같아서 암담합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