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박원순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칸트와 '윤리 형이상학 정초'
대체로 속편은 본편보다 못하게 마련이지만 '대부2'는 예외다. 미국으로 건너간 비토 콜레오네, 그 뒤를 이은 아들 마이클 콜레오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걸작이다. 아들의 시대는 차갑고 쓸쓸하다. 아버지 때부터 알고 지냈던 프랭키 펜탄젤리가 마이클에게 등을 돌렸고 청문회장에서 증언하고자 한다. 마이클은 프랭키를 협박해 증언을 못 하게 막고 나서, 수감되어 있는 프랭키에게 심복인 변호사 톰 헤이건을 보내 제안한다. 마치 고대 로마에서 황제에게 반역을 꾀했던 자를 처분할 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반역자에게 자살을 요구하는 것, 그것은 '좋은 거래'였다고 톰이 말하자, 프랭키는 덧붙인다. 고대 로마인들은 뜨거운 욕조에서 정맥을 끊어서 죽곤 했는데, 자살을 앞두고 작은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 떠나는 톰의 뒷모습을 보며 프랭키는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여흥이라 할 수 있는 시가를 한 모금 크게 빨아들이고는, 그날 밤 그 방식대로 목숨을 끊는다.
칸트가 '대부2'를 봤다면 어땠을까? 흔히 갖는 편견과 달리 칸트는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영화를 영화로서 즐겼을 것 같다.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프랭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 윤리학의 사고방식에서 자살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가올 고통이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내게 더 '이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윤리의 토대와 사회 자체가 허물어진다.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남을 속이는 짓이 용납된다면 그 누구도 남을 믿고 계약할 수 없게 되므로 역시 도덕과 윤리는 불가능해진다. 한편 본인의 소질과 능력을 개발하는 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 등은 꼭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도덕 원칙이 파탄에 이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도우며 다른 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가 도달하는 실천적 윤리 준칙 네 가지를 정리해보자. 자살 금지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다. 이를 어기는 순간 모든 윤리적 판단과 행동이 불가능해진다. 거짓말 금지는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다.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가 사회로서 존속할 수 없다. 재능 개발과 운명 개척은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충 먹고살 수 있지만,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자선과 선행 역시 불완전한 의무에 속한다. 사람들이 남을 돕지 않는다고 세상이 당장 망하지는 않겠지만 퍽 각박한 곳이 되어버릴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핵심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칸트는 그 어떤 종교나 통념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은 신의 말씀이나 사회적 관습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그 모든 요소를 뛰어넘는 올바름을 찾고자 한다면 우선 이성적으로 보편타당한 원칙을 찾고, 그 원칙에 따라 도덕을 재구성해야 한다. 종교적 계시와 공동체의 관습에서 도덕을 찾던 중세를 지나, 이성과 법 및 규칙에 따라 사회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근대로 넘어온 것이다.
박원순 시장의 난데없는 부고 앞에 온 나라가 망연자실한 상태다. 그가 남긴 공과 과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우호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여성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인권 변호사가 다름 아닌 성폭력 혐의를 뒤집어쓴 채 자살했다는 아이러니에 할 말을 잃어버린 이도 적지 않다. 경찰에 접수된 신고가 어떻게 박원순에게 전달되었는지 그 경위도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살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국회의원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문제가 불거지자 마포쉼터 손영미 소장이 자살한 것이 지난달 6일, 고작 한 달여 전 일이다. 이전에도 여러 정치인 및 관련자의 자살이 잇따랐다. 그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우리 사회가 진실이 무엇이냐는 요구를 '애도'의 눈물로 덮어버리는 이상한 관성에 빠져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살은 왜 나쁜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람'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대나 중세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목적이 얼마나 훌륭하고 숭고하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떤 경우에는 살인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패밀리'를 위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마피아가 상대 조직의 두목에게 너의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2020년의 우리가 근대국가의 한복판에서 마피아의 윤리를 용납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박원순이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그의 성폭력 혐의만큼이나 자살함으로써 법에서 도피한 점 역시 문제적이다. 변호사는 법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혐의를 받는 사람 또한 다른 형사 피의자와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도움을 통해 공정한 재판을 거쳐 합당한 처벌을 받거나 무죄를 입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 그렇게 쌍방이 공정하게 맞서 실체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근대 법 체계의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박원순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에게 명예와 권력을 안겨준 근대적 법 체계를 송두리째 내팽개쳐 버렸다.
'대부2'는 참 멋진 작품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명배우 두 명이 빛을 발하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연출 또한 절정에 올라 있다. 그래도 그 본질은 조폭 영화다. '패밀리'를 위해 사법 체계를 교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현대 민주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철학을 공부하기 전 나는 법대에 다녔다. 인권 변호사 박원순은 진보적 법학도의 우상이었다. 이런 사건일수록 그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법치국가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박원순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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