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둘, 짜장면은 하나… 文정부가 나누는 방식
존 롤스와 god, 그리고 '정의론'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살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남들 다 하는 외식도 몇 번 못 하고 자랐다. 늘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다가 질려서 밥투정을 하자 어머니는 비상금을 꺼내어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그다음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도 다 아시리라.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상황 자체에 집중해보자. 사람은 두 명인데 짜장면은 한 그릇이다. 나눠 먹어야 한다. 어떻게 나누어야 공정할까? 정답이 있다. 한 사람이 나누고, 다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다. 상대방이 무엇을 고를지 알 수 없으니 나누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나누어진 짜장면의 양을 평가할 방식 같은 걸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짜장면을 나누는 사람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절차적 공정함이 갖춰진다면 결과적 정의는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평생 단 한 그릇의 짜장면도 먹어본 적이 없었겠으나,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일찍이 '정의론'을 통해 주장한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약간 황당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을 해보겠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왜 나쁜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차별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차별하건 차별하지 않건 최대 다수가 최대한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롤스는 수긍하지 못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을 담아 1958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논문을 펴냈고 가히 파천황 격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논문의 힘으로 1962년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후 1971년 '정의론'을 펴냈고, 20여 년이 넘는 고민을 담아 1991년에 개정판을 출간했다. 철학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과학 분야에서 반드시 참고하는 현대의 고전이다.
'정의론'은 대단히 두껍고 어려운 책이지만 난해하지는 않다. 요약해보자.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불평등은 모든 이에게 공정한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질 때, 그리고 불평등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의 처지가 이전보다 향상될 수 있을 때, 오직 그럴 때에만 허용된다.
여기서 앞서 말한 '짜장면 문제'가 나온다. 누가 시행하더라도 공정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그것을 '절차적 정의'라 불렀다. 물론 세상 일이 짜장면 나눠 먹는 것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중요한 건 정의에 대한 고민을 절차의 문제로 바꿨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완벽한 정의에는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합리적인 문명사회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론'에 실린 롤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형식적 정의, 즉 규칙성(regularity)으로서의 정의만 있어도 대단한 부정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 공정한 절차를 지킨다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원칙을 규칙성 있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결과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법과 제도가 부정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법에 따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알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쓸 수 있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법과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결함이 있는 규칙이라 해도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꾼다면 더 나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비록 완벽히 옳은 것은 아니라 해도, 존재하는 규칙을 지키며 그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천국제공항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고자 준비했던 수많은 젊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노력하고 좌절하여 분노한 젊은이들을 향해 '비정규직 차별'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소위 '진보 인사'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롤스가 말했듯 젊은이들은 그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고 있을 따름이다. 잘못된 구조를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싸잡아 욕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당신들은 어쩌면 이렇게도 오만한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도 그렇거니와,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거시 경제적 현실까지, 이 사안에는 많은 쟁점이 얽혀 있다.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5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이전에 입사한 사람만을 직고용한다는 그 대목만큼은 절대 납득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대통령의 '깜짝 선물'로 전락해버린 나라에 대체 무슨 정의와 도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취업준비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소기업에 취직해 회사와 함께 성장하려는 젊은이, 작은 가게부터 시작해 큰 미래를 꿈꾸는 초보 자영업자 등,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려 하는 모든 이들 역시 같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법도 규칙도 관습도 신뢰할 필요 없이 오직 '이니'만 믿으면 되는 것인가? 이게 나라인가, 팬클럽인가? 팬클럽도 이런 식으로 원칙 없이 운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도와 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공정한 결과를 추구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규칙을 무시한 채 정의롭다고 여기는 결과를 힘으로 강제하면 반드시 정의롭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 롤스가 반박한 것은 공리주의지만, 현실에서는 공산주의 역시 같은 오류에 빠져들었고 결국 몰락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왔고 안 왔고가 기준인 세상에서는 어떤 정의로운 연설도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대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정한 규칙과 절차부터 지켜야 한다. 형식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양보도 헌신도 불가능하다. '어머님께'로 돌아가 보자. 어머니가 짜장면을 나누었고 아들이 선택했다. 아들은 그게 공정한 줄 알고 혼자 먹었다. 철이 들고 나서야 어머니의 희생을 이해했다. 굴하지 않고 버티고 이겨내는 젊음을 향해 응원의 노래를 보낸다.
원문: 조선일보 주말판 '아무튼 주말':(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3/20200703018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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