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저는 '라면 형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제목에도 넣지 말아달라고 일부러 한번 더 당부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제목은 편집부의 권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동급식카드는 왜 인천 ‘라면 형제’를 구원할 수 없었나
[아무튼, 주말] 레비나스와 윤리학
엄마는 없었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다. 맏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약간의 생활비가 들어있는 돈 봉투와 크리스마스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메모 한 장뿐이었다. 실제로는 네 남매가 살고 있었지만 애가 많이 딸려 있으면 세를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는 아이들을 감춘 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출생신고를 하지도 않았으므로 학교는 고사하고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 그때그때 다른 남자를 만나 집에서 출산한 자식들이었다. 이제 열두 살 맏이와 세 동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내용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에 기반을 둔 작품이다. 네 남매가 방치되어 있었다.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엄마는 몇 달에 한 번씩 방문하며 가끔 돈도 보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차남의 시신이 비닐에 싸여 벽장에 감춰져 있었다. 장남이 어울려 놀던 불량한 친구들이 어른 없는 집을 아지트 삼았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집주인의 신고로 경찰이 개입해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다.
이런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 14일, 인천의 한 빌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열 살짜리 형과 여덟 살짜리 동생이 큰 화상을 입었다. 엄마는 없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날부터 지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웃은 엄마가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다며 이미 세 차례나 경찰에 신고한 바 있었지만 강제력 있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급식 대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고,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의 어머니는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가정이었기에 매달 150만원 내외의 지원금을 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발생 무렵 어머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스가모 사건처럼 사실상 자식을 내다 버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웃으로부터 아동 학대와 방치로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양육자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동 보호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듯하다.
약자와 타자를 존중하며 돌보는 것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은 그런 주제에 소홀했다. 대부분의 철학자가 남자, 그것도 지배 계급 남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자연에 가까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문명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웅변하며 ‘에밀’을 쓴 루소도 그랬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고아원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인의예지를 논하면서 수백, 수천명의 노비를 부리던 조선 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철학에서 윤리의 지위란 고작 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반성도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생각해보자.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주체의 사유를 통해 세계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생각해야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어야 다른 이들도 있을 수 있으니, 내가 아닌 너, 자아가 아닌 타자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자기중심적 지배를 끝없이 확장하는 근대적 병폐의 근원이며, 결국 나치의 만행으로 이어졌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했다. 그의 부모와 형제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으로 이어지던 서양 철학의 위계를 뒤집었다. 기존 철학은 내가 있고 너를 알게 된 후 네게 선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비나스는 비참하고 고통받는 타자인 네가 있고, 그런 너를 보살피면서 나는 윤리적 존재가 되고 자신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너는 나보다 먼저고, 윤리는 존재보다 앞선다. 제1 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선포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 ‘애무’ 같은 용어를 철학적으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남의 속을 모른다. 타자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근대 철학은 그 무지에서 한계와 공포를 느낀다. 레비나스의 생각은 다르다. ‘전체성과 무한’의 한 문장.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다.” 서로가 얼굴을 가진 타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애무’ 또한 마찬가지다. 연인은 끌어안아도 여전히 서로에게 목마를 수밖에 없는 타자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다 보면 또 다른 타자, 즉 아이가 태어난다. 연인은 함께 아이를 쓰다듬으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랑의 철학. 레비나스 이전에는 그 어떤 철학자도 마주보고 어루만지는 것을 이토록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복지라는 미명하에 거론되는 온갖 선심성 현금 살포 정책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인천 형제에게는 기초생활수당과 아동급식카드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과 보살핌은 받지 못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고립됐다. 양육자인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야 할 국가는 돈만 주고 손을 놓았다. 요즘은 그런 돈을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주는 게 대단한 복지요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자리 파괴에 대응하고자 미리 고민하는 것까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얼마를 주네, 누구한테 주네 목청을 높이는 현 정치권의 논쟁은 값싼 포퓰리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래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렇다. 국가가 사람을 고용하고 훈련시켜 직접 복지를 제공하는 대신, 몇 푼의 돈을 주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우파 경제학자도 기본소득에 찬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천 형제 사건 앞에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스가모 사건의 충격은 컸지만 2010년 오사카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어떻게 없애야 할지 밤새 토론해도 부족한 시점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끌어안는 따스한 공동체를 향한 철학과 정치가 절실하다.
글 잘 읽었습니다.
답글삭제레비나스의 '윤리의 윤리', '타인을 위한 주체의 희생'을 읽으며 문득 떠오르는 논지가 있습니다.
자유에 대한 밀의 원칙 "한 사람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 자신이다"일 때, 누군가 이 말에 동의한다면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의 선택과 판단 역시 존중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보편적 진리'란 것을 깊게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선택과 판단을 존중하기 힘듭니다. 밀의 자유주의적 원칙은 파고들면 진리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상대주의적 명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본문에서 나온 데카르트 이래의 주체 중심의 사유, 더 나아가 플라톤 이래 서양을 지배한 로고스주의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니체는 진리의 적은 의심이 아닌 확신이라 한 바 있습니다. 보편적 진리를 확신함은 자연스레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등한시하거나 심지어 부정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궁극적으로 이는 민주주의의 장애물이 됩니다.
사회 안전망 밖의 문제는 각자의 '진리'를 담보로 탁상공론하기에는 너무나 당사자적이고 즉각적인 면모가 강합니다. 단순히 '복지'라는 한 어휘로 치환하기보다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려는 노력의 관점에서 보기 위해선 분명 '얼굴을 마주 보고 끌어안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밀 뿐 아니라 모든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단위'만을 남겨놓고, 그 외의 가치판단의 영역을 공백으로 비워둡니다. 다시 말해, 굉장히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절대적 가치 척도를 제시하면서 동시에 그 척도 외의 모든 가치 기준을 상대화하는 것이죠.
삭제피터 싱어의 채식주의 옹호론이 바로 그런 사고방식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싱어에게 있어서 쾌락은 절대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고통은 절대 피하거나 줄여야 하는 것이므로, 기존의 가치관이나 관습, 사회작 식습관 등과 무관하게, '저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절대화되고, 그것이 강경한 채식주의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저 논증에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만, 중요한 건 저런 생각도 가능하다는 것, 한 걸음 더 나아가 21세기에도 여전히 철학적 사고는 중요하며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이겠지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자세 같은 것도 바로 그런 면에서 유의미하고 또 요긴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