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태의 뷰파인더②]
●英이코노미스트 “文정권, 피포위의식 사로잡혀”
●같은 호에 韓언론에 보도 안 된 ‘세계사회관 조사’ 결과 실려
●2018년 조사 결과, 한국인 중 ‘민주주의 반감’ 응답자 30%
●‘푸틴의 러시아’보다 민주주의 반감 커…이라크와 비슷한 수치
●‘산업화·민주화 동시 이룩한 한국’은 K방역처럼 ‘국뽕’일 뿐
●여권, 민주주의 앞세워 민주주의 제도 망가뜨려
●정권 비리 수사팀 좌천에 언론인 감옥행, 이것은 독재!
뷰파인더는 1983년생 필자가 진영 논리와 묵은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써 내려가는 '시대 진단서'입니다.
국내 언론의 외신발(發) 보도 행태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다. 숱하게 일어나는 오역 논란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그렇다. 개별 외신이 갖는 속성과 논조, 맥락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자신이 지지하는 대상에 대해 긍정적 뉘앙스의 발언이 나오면 기뻐하고 부정적인 언급이 나오면 화를 내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이번 '이코노미스트' 칼럼에 대한 보도 역시 그랬다.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던 시기부터 '월스트리트저널'을 정점으로 하는 해외 유력 경제지들이 우려를 표했던 것은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코노미스트'가 경제지 가운데 문 정권에 우호적인 편에 속하는 매체였다. 이번 보도를 통해 비로소 입장을 바꾼 셈이다.
‘이코노미스트'는 같은 호에서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국내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화제를 모은 피포위의식 칼럼은 우리가 다 알고 있던 내용을 정리해서 보도한 것이다. 반면 주목받지 못한 또 다른 보도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몰랐던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의미심장한 차원을 넘어, 섬뜩하다.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
세계사회관조사(World Value Survey)는 1981년부터 시행됐는데, 약 100여개 국가에서 동일한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한 후 그 결과를 비교하는 프로젝트다. 본부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비영리기구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다방면에서 세계인의 가치관 변화를 긴 시간대에 걸쳐 가늠해볼 수 있는 척도로 인정받고 있다.
가장 최근 자료는 2017년 중반부터 2020년 초까지의 연구를 집약한 7차 조사(Wave 7)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는 2018년에 진행됐다. 촛불시위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뒤이어 치러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1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다.
세계가치관조사에 따르면 한국 민주주의 근간은 위태로워 보인다. "우리나라의 통치 방법으로써 다음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큰 주제 하에, 238번 문항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호오를 묻고 있다. 한국인들의 응답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원자료를 확인해보면 '대단히 좋다' 18.5%, '약간 좋다' 51.6%, '약간 나쁘다' 25.1%, '대단히 나쁘다' 4.9%로 부정적인 응답이 합산 30.0%에 달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와 같은 수준의 반감은 1995년~1998년 진행된 3차 조사(Wave 3) 당시 러시아에서나 나왔던 수치다. 옛 소련 몰락 이후 극도로 피폐해졌던 옐친 대통령 집권 당시의 러시아 말이다. 같은 7차 조사를 놓고 비교해보더라도 문제는 여전하다. 푸틴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꾀하고 있는 러시아에서조차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답변이 채 20%가 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는 그래프를 통해 현재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된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이 극히 큰 나라로 두 국가를 지목한다. 하나는 대한민국, 또 하나는 이라크다. 이라크인들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약 40%가 약간 나쁘거나 대단히 나쁘다고 응답했다. 미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린 후 지금까지 혼돈의 늪에 빠져 있는 그 이라크가 '민주주의'라는 지표에서 한국과 비교대상에 올라 있는 셈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국뽕 서사'
얼마 전까지는 나 또한 일정 정도 이에 동의했다. 그것을 자칭 '민주화 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를 통한 민주주의에 대해 국민의 30%가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나라라면, 언제 어떤 식으로건 민주주의가 쓰러지거나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다 해도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2020년 현재, 대한민국은 제도적 측면에서 볼 때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민주주의 선진국이다. 반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만을 놓고 보면 1990년대 후반 러시아나 오늘날의 이라크 등 민주주의가 망가져 있다고 평해도 과언이 아닌 나라와 비교될 수준이다.
이 결과를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나는 세계가치관조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호감 여부를 묻는 질문은 세계가치관조사의 4차 조사에서 처음 등장했다. 다행히도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설문조사 자료도 모두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 해당 질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응답 추이는 다음과 같다.
1995년에는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 응답이 15.2%로 지금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2001년에는 13.5%로 조금 더 낮아졌다. 2005년에는 22.8%, 2010년에는 24.6%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해 '나쁘다' 혹은 '매우 나쁘다'라고 응답했다. 이렇듯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이 특정 시점 이후로는 계속 커져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10명 가운데 3명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과 의회에 대한 반감과 불신을 품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에서 한국은 러시아·이라크와 비교당해야 하는 정치 후진국이 되고 말았다. 현 정권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부정적 답변이 30%나 나온 책임은 문재인 정권에 있다고 봐야 한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 이후 분열과 상처를 어루만지고 민주적 제도와 절차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87년 체제' 이후를 기획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대로 수행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테니 말이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아는데
대통령 직선제는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두 '보스 정치인'의 리더십으로 이뤄졌다. 이제는 공정한 룰(rule)과 투명한 제도, 합리적 소통에 터를 잡은 민주주의를 구성해야 할 때다. 그것이 탄핵 정국 이후 온 국민의 염원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개헌안을 취임 직후 발표했다면 개헌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너도 알고 나도 알고 '이코노미스트'도 알다시피 문재인 대통령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정권 비리를 수사하는 검찰 수사팀을 뿔뿔이 찢어 사방팔방 좌천시켰다. 말끝마다 검찰개혁을 들먹이며 '공수처법'을 통과시켜놓더니, 야당이 협조하지 않자 이제는 야당을 완전히 배제한 채 공수처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바꾸겠다고 했다.
이것은 독재다. 적어도 민주주의는 아니다. 세계가치관조사가 제시한 '글로벌 스탠다드'에 따르면 그렇다. 민주주의는 대통령을 선거로 뽑는다고 완성되지 않는다. 의회와 정당이 중심에 서야 온전한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여당은 국회 상임위원장 자리를 기어이 독식했다.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와 공무원, 국회의원을 겁박하기 위해 '친위 조직'인 공수처를 밀어붙였다. 입맛에 맞지 않는 뉴스를 '가짜뉴스'로 낙인찍고 처벌하겠다는 어엿한 독재 법안까지 들먹이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한국 민주주의를 '나쁘다'고 보는 30%는 대체 누구일까? 세계가치관조사가 제공하는 자료를 분석해보면 응답자의 성별, 연령, 정치 성향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해석 방법론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어떤 확정적인 답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두 가지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특히 의회와 정당에 대한 한국인들의 불신과 반감의 수준은 통상적인 민주주의 선진국과는 차원이 다르게 나쁘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통계와 그래프를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둘째, 청와대와 여당이 민주주의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행보를 밟고 있는데도 정권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율이 흔들리지 않는다.
1987년 개헌 이래 법사위원장은 언제나 야당 몫이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당정치와 의회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다. 그런데 당시 SNS(소셜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는 실명을 내걸고 번듯한 직함을 자랑하며 점잖은 말투로 문재인 정권의 '막가파 행태'를 옹호하는 고학력 인사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었다. 의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정권에 철통같은 지지를 보낸 거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민주주의라는 제도나 가치가 아니라, 선거에서 이긴 현 정권만을 지지하는 행위로 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중 일부 혹은 상당수가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민주주의'에 부정적으로 응답한 30%에 들어가리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젊은층을 향해 호소하고 싶다. 민주주의는 한국인의 '종특'(종족 특성)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특산물'도 아니다. 대통령과 여당이 무슨 짓을 하건 '묻지마 지지'를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짓이다. 민주주의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경제가 위태로워진다. 정치 불안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짧은 시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 우리의 자랑거리다. 그 성취는 언제라도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는 건전한 시민의 상식으로 가꾸고 지켜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는 불닭볶음면을 먹으며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달라는 외국인 유튜버 같은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있다. 국뽕은 인민의 아편이다. 깨어나 현실을 바라볼 때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basil83@gmail.com
SNS에 보이는 실명을 건 번듯한 직함과 학벌의 인사들 중 유독 포스팅이 잦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답글삭제그런 사람들 중 많은 경우는 이미 현실에선 끈 다 떨어져서 인터넷에서라도 현시욕 채우려는 사람들입니다.
문 행정부와 여당의 포퓰리즘 정치는 한국의 IT환경과 맞물려 정말 기가 막히다 싶을 정도로 운문에 특화되어 있으니, 페이스북, 트위터는 누구나 적당히 내실 없는 문비어천가를 부르면 아낌없는 좋아요를 받을 수 있는 상냥한 그들만의 세계인 셈입니다.
노정태 님도 아시듯, 뼈 아픈 현실을 얘기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게 많지만 달콤한 환상을 얘기하려면 약간의 학자연함과 다량의 미적 감성만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전 그들 중 정말로 정신 체계의 근간을 전복시키고 초석부터 새롭게 쌓으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그건 엄청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거든요.
그렇다면 적어도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사유와 방식을 찾아 익히는 건 그보다는 덜 수고스럽다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제 심정을 나이브하게 날것으로 워딩하자면
정권과 여당을 자신들의 페르소나로 투영하며 만족감을 얻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나잇살 처먹고 응석 좀 부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제는 페이스북에 문재인 소나타 운운하던 검사, 틈만 나면 페이스북에서 윤석열 욕하던 검사, 모두 승진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낱 인터넷 낭인이나 곧 퇴직하기 직전의 퇴물들이 해도 곱게 보기 힘든 짓을 이제는 버젓한 조직 주류층들이 일삼고 있는데 그걸 국가가 제대로 제지하지도 않는 거죠. 이번 검찰 인사를 보며 정말이지 절망했습니다. 심지어 이명박 박근혜 시절에도 구색맞추기는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없어요. 미친 것 같습니다.
삭제물론 99%의 '근엄한 SNS 페르소나'들은 말씀하신 그대로이겠지만 말이에요. 아무튼 한심하고, 절망스럽습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글을 써아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