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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1

유시민, '미친놈 전략', 민주주의

지난주 목요일(9월 28일) 방영된 썰전을 보며 매우 당황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매우 이상한 논리를 아주 힘주어 강변하는 가운데, 박형준 교수가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지 않고 지나간 모습 때문이다. 편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청자에게 전달된 바 그렇다.

유시민의 논리를 요약해보자. 김정은은 '미친놈 전략'을 쓴다. 트럼프도 '미친놈 전략'을 쓴다. 그런데 수천 발이 넘는 핵탄두를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의 지도자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는 희박하다. 둘 다 '미친놈'이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은 당위론적인 정답인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과 당위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과 당위를 구분하는 것은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미국 네가 뭘 잘한 게 있다고 북한한테만 핵을 포기하라는 거냐'는, 자주파의 기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미친놈 전략'이라는 표현이 가져다주는 착시일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모두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보자.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절벽을 향해 차를 몰아가고, 브레이크를 먼저 밟는 쪽이 지는 싸움을 한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결국 똑같은 전략적 행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미친놈 전략'은 '미친놈'을 '나쁜놈'으로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는 반면, '치킨게임'은 이기는 쪽이 대범한 것이고 지는 쪽이 '치킨(겁쟁이)'인 싸움이니 말이다.

아마 트럼프와 김정은 둘 다, 스스로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중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미국의 행동도 바뀔 수 없다. 이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나를 포함해 문재인 정권의 대외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많은 이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반면 유시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그 외 여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북한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빈정거리며, 미국도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치킨게임'의 관점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본다면, 유시민 식의 주장이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 한 사람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동의하는 순간 핵 개발을 포기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설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사랑에 빠져서 데니스 로드맨과 셋이 함께 셀카를 찍는다 해도, 핵탄두를 지닌 북한이 ICBM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를 용납할 수가 없다. 북한은 독재국가인 반면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공식적인 시스템은 모두 김정은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김정은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거나 제거된다면 핵 개발도 멈출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상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물론 정치권의 판단과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인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국민이 원하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갖는 '괴물같은 호전성'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할 상황이 오고, 그 전쟁으로 인하여 국민 정서가 자극되기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다. 국민이 최종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데, '국민 일반'의 판단은 정치권에 비해 훨씬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굉장히 재수없는 엘리트주의자 같은 말을 했는데,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냉전의 설계자이며 궁극적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대전략가 조지 케넌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캐넌의 미국 외교 50년』의 한 페이지를 인용해보자.

자기 자신이 전쟁과 평화 중 어느 상황에 처했다고 보는지에 따라 하룻밤 새에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뒤바꾸는 이런 놀라운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묘한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엊그제만 해도 우리나라와 다른 강국 사이의 쟁점은 미국의 젊은이 한 명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의는 신성하고, 대가는 고려할 가치도 없으며, 폭력에는 무조건 항복 말고는 어떤 한계도 없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압니다. 민주주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민주주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의 자극에 느릿느릿 대응합니다. 그런데 일단 자극을 받아서 칼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제 자극했다는 사실 자체가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화가 나서 싸웁니다 --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싸우는 거죠. 민주주의는 자신을 자극할 만큼 경솔하고 적대적인 강국을 징벌하기 위해 싸웁니다 -- 이 강국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런 전쟁은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조지 F. 케넌, 유강은 옮김,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서울: 가람기획, 2013), 180-181쪽. 강조는 인용자.

김정은은 하루아침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끝낼 수도 있다. 북한의 전쟁 시작과 끝은 모두 김정은 혹은 그에 준하는 수뇌부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달렸다. 북한 주민 2천5백만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럼프가 처한 상황은 정 반대다. 물론 미국 대통령은 의회나 대법원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결정만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미국의 전쟁은 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미국이 함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훌륭한 안전핀이다.

문제는 그 안전핀이 뽑기 어렵게 고안된만큼, 한번 뽑으면 되돌리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조지 케넌이 말하는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그렇게 깊숙이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미국 국민들의 생각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막상 미국인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미국의 국민들이 더 많은 피를 보고 싶어하게 되었다. 미국인이 흘린만큼 독일인의 피도 강처럼 흘러야 한다는 분노가 미국을 뒤덮었고, 전쟁은 끝날 때가지 끝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너무도 '상식'인 양,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엉터리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불타죽고 떨어져 죽고 건물 잔해에 깔려죽는 것을 보아버렸기 때문에, 뭐가 됐건 '나쁜 씹새끼들'을 처부숴야 했던 복수심이 핵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령 힐러리 클린턴 뉴욕 주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내심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보복성 무력행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다들 눈이 뒤집힌 상태였고, 정치권이 국민 여론을 따라간 것이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다.

심지어 조지 W. 부시와 그의 측근들도 어느 시점에는 이라크에 WMD(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그런데도 왜 전쟁을 했을까. 석유 때문에 전쟁을 했다, 이런 '진보의 상식'만을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밥 우드워드가 쓴 『부시는 전쟁중』(Bush At War)과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그리고 『현실 부정 국가』(State of Denial, 번역 미출간)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미 백악관 수뇌부도 빈 라덴에게 테러를 당하고 후세인을 두들겨 패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 전반이 '빡이 돌아있는' 상태였고, 그들 스스로도 '빡이 돌아있는' 상태여서, 눈에 보이는 '개새끼'한테 손에 잡히는대로 폭탄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북한과 미국이 치킨게임을 한다. 누가 꿇어야 하나? 당연히 북한이 꿇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김정은이라는 '미친놈' 하나만 생각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설령 2020년에 오바마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미국 국민 전부가 '미친놈'처럼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전쟁을 할 수 있다. 조지 W. 부시 개인이나 럼즈펠트와 딕 체니가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9/11을 당한 미국인 대부분이 'mad'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3억명의 미국인 전부가 '미친놈'이 되기 전에, 김정은이라는 한 사람의 '미친놈'이 치킨게임에서 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까? 일단 미국 정부는 북한인의 입국을 모두 막은 상태지만, 한국 여권 들고 미국으로 잠입한 북한 공작원이 무슨 짓을 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김정은 정권의 목적은 결국 협상이라고? 김정은 정권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고, 그들 중 누군가는 김정은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미국을 자극하는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건 그냥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9/11도 터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가능할 줄 누가 알았는가?

북한과 미국, 김정은과 트럼프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김정은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치킨게임에서 지느니 그냥 전쟁을 해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이다. 트럼프라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평범한 시민들'이 전쟁을 결심하면 이라크에 대량학살무기가 있건 없건 그딴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정은이 제2의 오사마 빈 라덴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 한국에 미국인이 얼마나 살건 미국남자니 영국남자니 하는 여행객들이 한국 음식 맛있어요 같은 유튜브 영상을 올리건 말건, 삼성전자 공장이 파괴되면 아이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건 말건, 미국은 전쟁을 할 것이다. 저기 잡아야 할 개새끼들이 있는데 아이폰 다음 세대 출시에 지장이 생길까봐 전쟁을 안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 분위기에 일단 휩쓸리고 나면, 팀 쿡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미군, 특히 일선에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사병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리버럴한 고학력 미국인 말고,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 출신의 십중팔구 트럼프 찍었을 저학력 저소득층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보다 전쟁 경험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다. 우리에게는 전쟁이라는 것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김정은 정권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 '김정은도 미친놈, 트럼프도 미친놈, 에헤야 모르겠다 전쟁은 안된다' 같은 시골 서당 훈장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여권의 주요 지식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너무도 우려스럽다. 국제 정치와 안보를 다루면서 '미친놈' 전략이니까 고집하는 놈이 '나쁜놈'이라는 식의 논변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아닌 진지한 의견으로 여겨지며 TV를 통해 유포된다. 과연 우리에게는 과연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긴 한 것인가?

2017-08-09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

2017-08-06

발전소, 잠수함, 핵탄두

'탈핵'을 선언하고 착공한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를 멈춘 나라가 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한 차례 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휴전'중인 적국에서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안보 위협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2017년 8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3자의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고 대통령이 선언하고 국내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는 가운데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 원자력 잠수함이 핵탄두를 가진 미사일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의아한 소리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핵탄두를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땅 위의 경수로는 반대, 물 속의 경수로는 찬성?

월성 1, 2, 3, 4호기를 제외하고 나면 현재 건설되어 있는 모든 발전용 원자로는 가압경수로다. 그런데 원자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최초의 가압경수로는 미 해군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호에 탑재되었다. 원자로와 직접 닿는 고압의 냉각수가 열교환기를 통해 2차 계통의 물에 열을 전달한다. 그렇게 발생된 증기로 발전기를 돌리면 가압경수로가 된다. 반면 그 증기로 잠수함의 스크류를 작동시키면 원자력 잠수함인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원자로로 발전을 하여 그 전기를 이용해 추진력을 얻는 형태의 원자력 잠수함도 운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가동중인 발전용 원자로 중 대다수는 원자력 잠수함에 실리는 원자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탈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건설중인 가압경수로 원전의 공사를 멈추면서, 똑같이 가압경수로가 들어가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자는 논의를 하는 정부는,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땅 위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비행기가 들이받아도 꿈쩍하지 않는 철근 콘크리트와 철판 등으로 차폐벽을 둘러싼다. 애초에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바깥에 건설되어 있으며 ('임시 배치'된) 사드에 의해 보호받는다. 반면 원자력 잠수함은 군사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이기에,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위험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원자로'를 줄이겠다고, 없애겠다고, 짓던 것도 안 만들겠다고 '탈핵 선언'을 한 대통령이, 어떻게 동시에 '원자로'를 바닷속에 풀어놓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발생한 적도 없는 진도 7.0의 강진이 정확히 원자력 발전소를 강타할 가능성을 운운하는 환경주의자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하겠다는 원자력 잠수함이 북한의 어뢰나 기뢰에 맞아 폭파될 가능성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심지어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는 딱히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관리가 부실했던 어뢰의 폭발로 침몰한 바 있다). 과연 우리는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을 가진 상태로 '탈핵' 논의를 하고 있긴 한 걸까.


군사용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니?

북한이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이유로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논리는 더더욱 이상하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인 이유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국가의 숫자와 핵탄두의 수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리는 우라늄-235를 20%미만까지 농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당연한 전제 조건이 따라붙는데, 그것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니 원자력 잠수함을 만들어도 그것은 평화적 이용이다'라는, 딱 들어도 세계가 납득할 리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에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핵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저농축우라늄(우라늄 235 동위원소가 20퍼센트 미만)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유철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군사적 목적으로는 (핵)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하는 차원이고 우라늄 농축의 20% 이하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협상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 문구 해석을 놓고 양국이 상당 기간 갈등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핵잠수함은 핵무기가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일 뿐"이란 논리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강기헌, "한국형 핵잠수함 가능한가…기술력은 충분,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관건", 중앙일보, 2016년 8월 30일. http://news.joins.com/article/20523425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규정상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사용은 핵사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원자력 잠수함을 '비군사적'이라고 우기고 있다면, 은밀함이 생명인 원자력 잠수함에 대해 IAEA의 핵사찰을 허용해야 한다. 같은 기사를 좀 더 인용해보자.

IAEA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라도 원자력 관련 시설을 사찰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런 상황까지도 펼쳐질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사전 통보 없이 IAEA 직원이 한국을 찾아온다.
"핵잠수함 핵연료 전용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잠수함이 어디에 있나요?"(IAEA 직원)
"글쎄 그걸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해군)
핵연료 사찰을 거부하는 건 IAEA 규정 위반이다. 그렇다고 사찰을 받아들여 핵잠수함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은밀성'이 깨지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자체적 핵무장을 추진하는가?

반대로 군사적 목적임을 솔직하게 밝힌다면 IAEA의 핵사찰을 받지는 않겠지만 한미원자력협정 위반이다. 그러한 행위는 북한만 몰래 핵개발 하는 '불량국가'인 줄 알았던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이미 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두고 논의가 오갈 때, 지적되었던 부분이다.

결국 한국이 저농축이든 고농축이든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을 추진한다는 것은 단순한 ‘해군력 강화’가 아니라 그대로 ‘핵무장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북한 핵 위기’가 일어났듯, 한국의 핵잠수함 추진은 ‘남한 핵 위기’로 비화될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비핵화선언은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1990년대 이후의 모든 논의는 한국의 핵잠수함을 둘러싸고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 한국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의혹 국가 명단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미국 입장에서도 핵무장은 동맹 파기를 고려할 만한 사안.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제재를 결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이 입게 될 정치·경제·안보적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황일도, "한국 핵잠수함 보유, 무엇이 문제인가", 신동아, 2004년 3월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221/3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핵잠수함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북한이 국제 사회의 문제아니까 우리도 문제아가 되고야 말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석할 것을 알면서도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핵무기 마피아'의 일원임을 자백하는 꼴이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 정책의 방향이 바로 그렇다는 데 있다. 평화적 목적으로 쓰이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신고리 5, 6호기는 짓다가 말고 공론화를 벌인다. 그러면서 군사적 목적일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한다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결국 자체 핵무장을 하겠다는 속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토록 한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북한의 핵무기보다 한국의 원전이 위험하다는 사람들

북한은 자타공인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다. 주민들이 굶주리고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개발해왔고 이제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내부 엘리트들도 치를 떠는 공포정치로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 북한에 원유 등 핵심적인 자원을 제공하고 무역을 통해 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최근에만도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습 사건, 연평해전 등을 저지른 바 있다. 그들 말로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원한다고 할 뿐이지만, 지속적으로 한국의 재산 및 군인과 민간인들을 공격해왔다. 아직도 북한에는 납치되어 구금된 일본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핵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북핵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고 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집단의 손에 핵탄두가 들려있지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미국이 북한을 몰아세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개발을 했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니 일단 사실로서 인정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들 가운데 문재인 정권의 탈핵 선언과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 반대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핵무기는 위험하다. 특히 위험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반면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에 따라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사망자가 나오는 비율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석탄(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 440명.
수력(세계 평균) 1400명.
원자력(세계 평균) 90명(체르노빌, 후쿠시마 포함).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악의 원전 참사'를 다 더해도, 원자력 발전은 지붕에 설치하는 친환경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을 제외하고 미국 내에서의 사망자만을 꼽는다면, 1조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 0.1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다. (출처: James Conca, "How Deadly Is Your Kilowatt? We Rank The Killer Energy Sources", Forbes, 2012년 6월 10일. https://www.forbes.com/sites/jamesconca/2012/06/10/energys-deathprint-a-price-always-paid/#2398b939709b)

그런데 대체 왜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로 행동할까? 가장 안전한 발전 수단인 원자력은 위험하다고 '탈핵'하자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핵무장으로 향하는 첫 걸음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평화의 원자력을 버리고, 위험하고 가난하며 고통스러운 자체 핵무장과 국제적 고립의 길로 향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칼을 쳐서 보습을, 핵탄두를 연소시켜 발전을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폭발시켜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원자로에 넣어서 연소시켜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농축된 우라늄-235 혹은 플루토늄-239를 원자로에 넣고 천천히 분열시킴으로써, 모두에게 유익한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핵탄두 해체인 것이다. 성경 구절에 나오듯,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미가 4:03)드는 평화의 이상 그 자체다.

실제로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현재 생산중인 전력 중 10% 가량이 노후된 핵탄두를 연료로 삼아 나오고 있다. 그 많은 핵무기를 다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일이고, 아무 이유 없이 터뜨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핵탄두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도 이와 같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북한이 핵을 개발해놓으면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어 '민족의 힘'을 보여준다는 망상이 넘쳐났지만, 그것은 한낱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이 아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이며 세계 10대 규모의 교역 국가다. 만약 대한민국의 손에 북한의 핵탄두가 들어온다면, 그것이 들어갈 곳은 오직 원자로 뿐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평화적 목적의 발전용 원자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 유명한 사진을 보자.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발전소를 지어줘도 냉각탑을 폭파시켰던 북한은, 밤이 되면 불이 켜지지 않는 암흑의 국가다. 반면 우리는 일본보다 먼저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평화의 원자력 국가다. 이 차이가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이라는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무기로 쓰느냐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쓰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오늘이 이토록 달라진 것이다.

북한의 핵탄두가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하는 그날, 북핵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 정부는 정 반대의 원자력 정책을 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를 경계하라

고리1호기를 방사능 괴물이라도 되는 양 쫓아내며 문재인 대통령은 자뭇 비장한 표정으로 '탈핵'을 깜짝 선언해버렸다. 수십년 간 우리 산업과 가정의 에너지를 책임져온 솥단지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선포한 셈이다. 그러더니 북한을 핑계로 대신 칼과 창을 만들겠다고, 누가 봐도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인 원자력 잠수함 건설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 정권의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이들을 향해 '원전 마피아'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들 아닌가?

양자는 줄곧 혼용되어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시피, 분명히 다르다. 나는 원자력 발전소를 더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의 자체적 핵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없애되 원자력 잠수함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이들을 '원전 마피아'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해방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누려온 평화와 경제 성장은 전승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 질서와 자유무역에 힘입은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냈다. 반면 북한은 90년대 이후 핵무기를 만들어 체제 보장을 받기 위해 골몰했고 지금껏 불량국가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왜 2017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내던지고 핵무기를 손에 들려고 하는가? 왜 성공적이었던 평화의 길을 벗어나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더니, 그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향평준화를 택한 것인가?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현 정부의 탈핵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자력 잠수함을 꼭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 '농축 우라늄 중독 증상'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은 원자력 발전소이지 핵탄두가 아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핵탄두를 원자로에 넣어 전기를 뽑아내자. 우리가 가야 할 평화로운 번영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17-07-28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책을 쓰는 사람, 책을 외우는 사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 있을까? 본인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고민하여 판단한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이 한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떤 '경전'을 잘 외우고 지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넘어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렇다. 주자학은 중국 내에서 지배 이념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얼마 후 부흥한 양명학의 비판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지적 흐름도 그에 따라 변했다. 그리고 중국의 학문은 고증학으로 넘어가, 청 제국의 말기에 이르면 유교 문헌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판적인 문헌 비평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 중국 고전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느냐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조선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행'이 끝난 주자학의 해석을 놓고 당쟁을 벌이고 지배 계급끼리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조선 밖의 세상에서는 해상 국제 무역이 출현하고 일본 및 중국은 서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옛날 책'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셸런버거? 그게 누군데?'

스스로 생각한 자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탈핵이 아니라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되짚어보며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미국의 환경 단체 '환경 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셸런버거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탈핵 정책을 철회해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부터 생각해보자. 적지 않은 문재인 정권 지지자, 네티즌, 그리고 환경단체 운동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셸런버거? 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은 누군데?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체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셸런버거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해 2008년 '환경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서명을 한 인물들 중 온실가스 감축 운동의 선봉장인 미 항공우주국(NASA)출신 기상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너는 듣보잡이고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핵발전소 옹호론자일 뿐이다'라는 편견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가차없이 '듣보잡' 취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핑커 역시 해당 공개 서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숫자와 자료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미 맹목적인 반핵 운동을 접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사례다.


원자력 발전: 가이아 여신을 위하여

실제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 원자력 발전을 더 개발하고, 그 이용을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고, 다들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기에 깜짝 놀랄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부터 꼽아보도록 하자.

'가이아 이론'.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니 말이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발상으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2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임스 러브록은 2004년, 영국의 신문 〈인디팬던트〉(Independent)에 한 편의 기념비적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러브록: 원자력 에너지는 유일한 친환경 해법이다(James Lovelock: Nuclear power is the only green solution)

러브록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기후 변화가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고려해볼 때,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우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폐기물의 양도 석탄에 비해 훨씬 적다. 따라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직면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 칼럼이 공개된 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관의 창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핵심 교리 중 하나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것을 계속 믿기로 했다. 제임스 러브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의 관성적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에 다시 한 번 돌을 던진 사람이 등장했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도 『도둑맞은 세계화』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그는, 2011년 4월 5일 영미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의 지면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의 격분을 자아내는 칼럼을 발표한다.

"반핵 로비 단체들이 우리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The unpalatable truth is that the anti-nuclear lobby has misled us all)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반핵 로비 단체들이 과장하고 부풀려온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 수를 지적한다. 탈핵론자들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은, 핵방사능 효과에 관한 과학위원회(UNSCEAR, 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Of the workers who tried to contain the emergency at Chernobyl, 134 suffered acute radiation syndrome; 28 died soon afterwards. Nineteen others died later, but generally not from diseases associated with radiation. The remaining 87 have suffered other complications, including four cases of solid cancer and two of leukaemia.
체르노빌 원전을 봉쇄하기 위해 투입된 인부 중 134명이 즉각적인 방사능 피폭의 영향을 받았다. 28명이 곧 사망했다. 19명이 추후 목숨을 잃었지만, 대체로 방사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나머지 87명은 그 외의 복합적 증세를 겪었는데, 네 명은 고형암(solid cancer)에 걸렸고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려면, 격납 용기도 없이 폭발한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정도의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계속 그러한 오해를 증폭시키며, 자기들끼리 인용하여,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보라고!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많은 국내의 환경주의자들과 그들이 증폭시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지 몬비오는, 심지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열흘이 지난 시점, 역시 〈가디언〉을 통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정론을 말했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Why Fukushima made me stop worrying and love nuclear power)의 마지막 문단이다.

Yes, I still loathe the liars who run the nuclear industry. Yes, I would prefer to see the entire sector shut down, if there were harmless alternatives. But there are no ideal solutions. Every energy technology carries a cost; so does the absence of energy technologies. Atomic energy has just been subjected to one of the harshest of possible tests, and the impact on people and the planet has been small. The crisis at Fukushima has converted me to the cause of nuclear power.
그렇다, 나는 여전히 원자력 업계의 거짓말쟁이들을 혐오한다. 그렇다, 만약 무해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 기술에는 댓가가 따른다. 에너지 기술의 부재에도 댓가가 따르고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가장 가혹한 시험 중 하나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이 사람들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작았다. 후쿠시마 사태는 나를 원자력 발전의 옹호자로 개종시켰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피해야 했다.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십만의 이주민은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 아니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방사능의 누출 그 자체로 발생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인기 예능 〈알쓸신잡〉에서 이른바 '어용 지식인' 유시민 작가도 유포했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일본국민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지진 및 쓰나미 피해자와 원전 사고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혹은 구분하지 않는, 거짓말일 뿐이다.


환경주의자들의 '선택적' 공감과 우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6도의 멸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역시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6도의 멸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높았던 시점을 연구한 고고학/고생물학 논문들을 전부 뒤지고 스크랩하여, 우리가 다가올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설득력있게 제시한 바 있다.

지구기온이 4℃ 상승하면, 해수면이 0.5미터 이상 높아지면서 이 대도시도 긴 수명을 다할 것이다. 오늘날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21세기 후반에는 치명적인 침수가 시작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이 했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이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올라가 150만 명이 살던 곳을 버려야 하며, 350억 달러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한다. 나일 강 삼각주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잠기면 로제타나 포트사이드 같은 도시의 시민 수백만 명도 집을 떠나야 한다.[204-205쪽]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이는 것 뿐이다. 그러자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환경주의'에 흡착되어버린 '탈핵'의 망령의 힘이 너무도 거세다. 더욱 끔찍한 것은, 해외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여 입장을 변경한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일종의 교조적 이념이 되어버린 환경주의가 국가 정책을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히피들의 구루, 원전 전도사 되다

무조건적인 탈핵이라는 이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섭냐 하면, '환경주의'라는 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반박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을만큼 완강하다. 공자가 직접 나타나서 논어를 다시 해석해주는데도 조선의 유생들이 '그것은 진정한 공자의 뜻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10년 2월, TED 토론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로 그 잡지를 본 적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때문에, 한국의 식자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바로 그 잡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원류라는 바로 그 잡지 말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창간한 환경주의의 대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968년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했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200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한다. 반면 그렇게 태어난 환경주의를 책으로 공부하거나 귀동냥으로 듣거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일단 원전을 없애고 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론을 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논적으로 등장한 마크 제이 제이콥슨은 모두 탄소 변화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한다. 나는 당연히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주장 가운데 '풍력 발전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좁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력발전기는 단지 막대가 꽂힐 땅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돌아감으로써 조류들을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공해 원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탈핵론자들의 공포 마케팅, 청와대를 홀리다

아무튼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을 동치시키는 공포 마케팅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하냐하면, 스튜어트 브랜드와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토론에서 처음에는 75:25로 원자력 발전의 손을 들어주었던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어 65:35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는 힘이 세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가운데 10%는 오히려 핵탄두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의 생산이 아니라 해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이미 들쑤셔진 '공포 마케팅'은 잠들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해가 가리면 발전이 안 되는 태양광, 바람이 멈추면 발전이 안 되는 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형의 한계상 수력 발전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선택은 화력 아니면 원자력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더 '환경적'인 선택은 당연히 원자력이고 말이다.

환경주의자는 당연히 원자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어떤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심지어 '유령'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환경주의의 창시자가 입장을 바꿔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원자력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인류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없거나, 매우 불투명하다. 선각자들은 일찌감치 경고를 시작했고, 지난번에 언급한 빌 게이츠처럼, 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환경주의자'라고 할만한 어떤 활동 내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해외의 환경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왔으며, 그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면에서 나름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맹목적인 탈핵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말이다.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해보자.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남이 했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 입장을 바꾸는 순간 본인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주의자들은, 진보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 변화 앞에, 그리고 한국의 좁은 땅이라는 선천적 한계 및 기저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태양광 및 풍력의 태생적 제약에 대해, 그들은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저 〈녹색평론〉을 비롯한 몇몇 환경주의자들만의 회람 목록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는 과연 〈판도라〉라는 영화 한 편이 나라의 미래와 관련된 논의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인가.

탈핵 중심의 환경 운동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그 생각을 버렸다. 우리가 그 고정관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생각하자.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6-05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문재인 정권의 전반적인 경향성을 네 글자로 줄이자면 '내로남불'일 것이다. 자신들이 하면 위장전입도 건강보험료 부정도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요컨대 '내로남불'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정규직 일자리 81만개 확충', '원자력 발전소 전면 폐쇄'처럼 요란하게 홍보했던 멋진 정책들도 모두 슬그머니 포기하거나 목표를 과감하게 하향 조정하고 있다. 노래 가사마냥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국정과제 선정 과정에서 문 대통령 공약 일부는 수정 혹은 폐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기획위는 이미 부처별 1차 업무보고에서 일부 공약을 수정하거나 실제 이행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기업 반발이나 현실적인 제한 때문에 공약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도 쉽지 않거나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가계 통신비 인하(통신 기본료 폐지), 광화문 대통령, 탈(脫)원전·탈석탄발전소, 고교학점제 도입, 전속고발권 폐지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정기획위가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현재 6470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4대강 보 개방 등도 추진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일 수 있다.

김채연, 이태훈, 황정수, 박동휘, 이정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1차 업무보고 마무리…폐기·수정 기로에 선 5대 공약", 한국경제, 2017년 6월 4일, (링크).

그러나 어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청와대 참모들은 이미 배치된 사드를 조용히 '착하게' 포장하는대신, 이미 들어와 있다고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던 미사일 발사대 4기를 문제삼아 국방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분노가 밀려온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미 배치하기로 합의가 끝났고, 당연히 국회의 비준 따위 처음부터 필요 없는 포대 하나를 두고, 신임 정부가 끝없이 어깃장을 놓고 있다. 대한민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을, 특히 평택 미군기지와 왜관 부산으로 이어지는 미군 보급선을 지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포대를 놓는데, 수도권의 시민들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야권에서 끊임없이 생산하다가 급기야는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죽건 말건 한국 정부는 신경 안 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이런 나라에 정나미가 안 떨어지면 이상한 일 아닌가?

미국의 입장이 '옳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최소한의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북한은 한국을 향해 전면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선뜻 폭격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폭격을 사랑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북한의 핵 시설을 날려버릴 폭탄쯤은 넘쳐난다. 하지만 때릴 수가 없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미군의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고 대대적인 확전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 뿐 아니라 미군의 우발적 행동 역시 막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드는 그 주한미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받으며 주둔하는 한, 대한민국 역시 위 문단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보호받는다. 저러한 식의 '공포'를 북한에 심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자주국방'을 하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과연 얼마가 될까? 북한의 전면적 공격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골수' 진보 자주파가 아닌 다음에야, 주한미군의 철수에는 대체로 반대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2.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을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가?
  3. 셋째,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할 경우 그 비용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설득할 의향이 있는가?

5월 31일 문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 소속 딕 더빈 상원 원내총무를 만나 사드 배치에 대해 논의했다. 더빈 의원은 면담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원치 않으면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의 관련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링크). 문제는 청와대에서 내놓은 해당 면담에 대한 브리핑에서는 그러한 충격적 발언에 대한 언급이 쏙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빈 의원이 거짓말로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면, 청와대에서 언론 브리핑에서 해당 내용을 '보고 누락'한 셈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언론의 추가 취재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마음을 굳게 먹고 출입기자단과 청와대 관계자의 문답을 읽어보자.

▶기자=“더빈 총무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냐”
▶청와대 관계자=“비슷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미국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 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고 했다”
▶기자=“민감한 발언인데 어제(5월 31일)는 왜 공개를 안 했나”
▶관계자=“(더빈 총무 발언이) 그렇게 중요한가…아,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허진, "[현장에서] 더빈 발언을 “그냥 미국 시민 질문”으로 느꼈다는 청와대", 중앙일보, 2017년 6월 2일, 강조는 인용자. (링크).

저 청와대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일개 미국 시민'과 만나서 사드 배치라는 안보 중대사에 대해 논의를 한 셈이다. 문재인의 청와대에는 대체 무슨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가?

더빈 의원의 발언이 갖는 심각성을 인식해서 브리핑에서 뺐다면 그것은 의도적 왜곡이며 '보고 누락'이다. 반면 저 설명대로 '일개 미국 시민'이 하는 흔한 소리로 이해해서 언론 브리핑에 소개하지 않은 것이라면, 청와대 외교 안보팀은 그 자리에 앉아있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한국에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으러 온 여느 미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미국 국방 예산을 주무르는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청와대는 미국 더빈 의원의 발언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라는 발언까지 대놓고 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동이 다 있나? 한국인들은 조지 W. 부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모욕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자신들은 미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상원 원내총무를 '그냥 미국 시민'이라고 부르다니?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사드 배치에 대한 기존의 협의 사항을 잘 지켜나가자고 다시 당부했지만, 문제는 청와대에 있다. 문 대통령과 문정인 외교안보수석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그래서 이렇게 사드를 놓고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의 외교적 지향점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크고 엄청난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미 ('K값'이 무려 1.6이나 나온,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선거'지만) 합법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 신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놓고 있는 외교적 행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일언반구 언급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사이다' 행보만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사드 배치를 취소하고 싶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겉으로는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부산으로 도망치면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외친 이승만의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청와대 참모진에게 최대한의 업무 파악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들은 지금, 동맹의 가치를 코 푼 휴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최악의 예측불가능한 미국 대통령이 재임한 가운데, 극히 위험한 외교 안보적 불장난을 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철수, 한미동맹의 파기, 중국의 보호 하에 가능한 북한과의 통일을 원한다면, 제발 정직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논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혹시 잊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2017-05-30

문재인 정권, 싸드 불장난을 멈춰라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싸드 발사대가 두 대만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국방부로부터 그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네 기가 더 있었기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했다고 윤영찬 홍보수석비서관이 발표했다. 5월 30일, 오늘 가장 큰 뉴스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은 언론플레이다. 그것도 아주 수준이 낮고 질이 나쁜 언론플레이다. 외교 안보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로 이런 불장난을 하는 문재인 정권을 나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이렇게 대놓고 집권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언론플레이부터 하는 청와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국방부(와 한통속이 된 미국)'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여론몰이 하려는 의도는 알겠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 서서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청문회 정국에서 여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과 그의 주변 인사들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 유포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왔었다는 것을 청와대가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쳐보자. 그걸 홍보수석을 통해 언론에 대고 발표하는 것은 과연 '대통령'으로서, '청와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와 있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2017년 4월 28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28일 군관계자는 "현재 사드의 발사대 4기는 경북 칠곡 왜관의 캠프 캐럴에 보관중이며 성주골프장의 시설공사를 마치는 하반기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링크) 그보다 이틀 전에 나온 다른 뉴스. "이동식 발사대는 요격미사일을 쏘는 발사대로 지난달 6일 사드 장비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고, 보통 사드 1개 포대는 6기의 발사대를 갖춥니다."(링크)

정리하자면 첫째, 싸드 발사대가 한반도에 총 여섯 기 들어와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째, 설령 그 보도를 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싸드라는 것이 어떤 시스템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1개 포대가 배치된 이상 6기의 발사대가 뒤따라왔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치 '장전된 리볼버 한 정'에는 실탄 여섯 발이 들어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문재인의 청와대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트집을 잡고 있는 셈이다. 보고가 누락되었다 한들 '아니 어떻게 발사대 네 기가 몰래 들어와 있을수가?'라고 역정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조직과 인력들이라면 설령 저런 착오가 있었다 한들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혼동한 사람이 쪽팔리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화를 낸다면 이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싸드 발사대 네 기가 한반도에 몰래 들어와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가짜뉴스'다. 문제는 그 '가짜뉴스'의 출처가 청와대라는 것이다. 싸드는 현재 외교 국방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것을 두고 청와대에서 '가짜뉴스'를 유포한다? 그것도 한낱 국내 정치에서 팻감으로 쓰기 위해? 국방부 길들이기 하려고? 국방부를 길들이려면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활용할 일이지, 이렇게 동맹국과의 신의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수를 써야만 하는 것일까? 문재인과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외교란 무엇이고, 안보란 무엇이며, 국방이란 또 대체 무엇인가?

나는 문재인에게 한 표를 던지지 않은 60%의 국민의 일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서 존중한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과 청와대 역시 국민들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한 외교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용, 청문회 국면 돌파용, 국방부 길들이기용 카드로 휘두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국민 존중의 첫 걸음이다. 문재인 정권은 안보 불장난을 멈추고 수권세력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올해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올해 취임한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오직 그 하나의 업적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취임 즉시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크에서 병력을 즉각 철수하겠다고 말했으며,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노라 선포했다.

드라마틱한 당내 경선을 헤치고 후보 자리에 올랐으며, 지지자들의 열성적인 팬덤에 힘입어 집권하였고,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점 등 너무도 닮은 모습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오바마에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가령 올해 8월 27일 미디어스에 송고한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중도주의의 덫”을 쓸 당시, 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 법안들을 집권 초기에 밀어붙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구하다가 지지 기반을 상실해버린 노무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미국 오바마 대통령  
 
현지시각으로 12월 24일 아침, 기나긴 토론 끝에 미 상원 의회는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전부와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져 60표를 확보하였고, 공화당 의원들은 전부가 반대하고 일부는 기권하였으나 39표에 그쳐 법안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큰 고비를 넘겼다. 상원과 하원의 찬성표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더라도, 드디어 미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 시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바마 취임 1년, 그가 거두어낸 가장 값진 승리이다.

우리는 국제 문제를 바라볼 때 크게 두 가지 오류에 빠지곤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세상 모든 일을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지구 중심의 오류’이다. ‘빌 클린턴의 방북은 김대중의 뜻에 따른 것이다’와 같은 발상이 그에 해당한다. 클린턴이 납북된 여기자들을 데려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납치되건 살해되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도 있느냐’고 정부 관리가 찍찍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평범한 시민도 아닌 기자가 취재 도중 납치되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클린턴은 김정일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 머물렀고, 기자들과 함께 재빨리 북한을 탈출했다. 클린턴 개인이 김대중을 존경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과 미국의 대외정책은 무관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나 모든 별들이 자기 머리 위에서 도는 줄 아는 법이다.

과도한 유비추리의 오류’ 또한 피하기 어려운 오류에 속한다. 국제 문제는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발생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자국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을 고스란히 적용하는 것은 곤란할 수 있다. 가령 올해 이란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를 떠올려보자. 초록색 헝겊과 손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민주화와 재투표를 요구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우리가 작년에 겪었던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2009년의 이란과 2008년의 대한민국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촛불시위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대통령 후보건 이슬람 학자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 민병대가 자국민을 총으로 쏴죽이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발생한 목숨을 건 시위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 한해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필자 본인을 포함해서, 이 두 가지 오류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참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미국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겠다는 음험한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 끼어들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거니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테러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12월 26일 오늘 아침에도 한 건의 테러 기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민항기 안에서 폭약을 터뜨리려다 실패한 한 젊은이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증파하는 것은 물론 지지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처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은 아니다. 한국이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우리가 파병한다고 해서 미국이 자신들의 전략적 필요성을 어겨가며 해야 할 폭격을 안 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면 그 순간 우리는 해당 테러 단체의 적국이 되며,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명이 위협당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미국인을 겨냥한 테러는 벌어진다. 따라서 해외에 군대를 보내서라도 테러 단체를 무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은 ‘이해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오바마가 말하는 ‘초당적 협력’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한 대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의회 정치의 수준과 문화가 다르고, 여당의 정치적 능력과 목표에 대한 동기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수십여 일에 걸쳐 끝없는 토론을 통해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무조건 결사반대로 막아서는 한국의 국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토론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전에,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참여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 실패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을 설득하여 폭력적 충돌 없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그렇게 하는 대신 야당을 ‘꼴통’으로 몰아가기에 바빴고, 결국 협상은 벌어지지 않은 채 국회는 다시 파행으로 접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거론했다.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지자들이 바라는 만큼의 강도 높은 개혁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직도 노무현과 오바마는 유사하다. 그러나 한 쪽은 ‘현실’의 이름으로 ‘이상’을 폐기처분하면서 스스로의 행보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남긴 반면, 다른 한 쪽은 ‘현실’과 ‘이상’을 은근과 끈기로 조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우리는 국제 문제를 지나치게 희화하하여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월 6일 뉴욕타임즈에 실린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이라는 장문의 기사는 탁월한 조정자이자 경청자로서 오바마가 지니고 있는 조정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는 끝없는 회의와 토론을 통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한 것이 되리라고 보장할 수야 없지만, 부시 정부의 그것처럼 성급하고 개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오바마가 미국의 노무현이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거친 곳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노무현이 한국의 오바마였더라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일 수도 있고, 어처구니 없이 떠나버린 전대미문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덜 가신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오바마와 노무현은 여러 모로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오바마를 바라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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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4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오바마의 대답은 병력 증파였다. 3만명 이상의 미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추가로 투입하고, 나토(NATO)와 그 외 동맹국에서도 추가 병력을 보냄으로써, 2011년 이전까지 ‘이 일을 끝내려 한다’고 그는 말했다. 예상치 못한 결정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비난은 비난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반미주의’라고 통칭되는 단순한 관념의 틀을 벗어나 이 파병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9/11테러에서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라크 전쟁, 그리고 다시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지는 21세기 미국의 국제 정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과연 그 비판의 주체가 되는 ‘우리’는 어떤 입장과 논거에 기반하여 그것을 평가할 것인가? 무턱대고 ‘미국이 하는 행동이니까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던 시간과 장소가 존재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친미주의만큼이나 위험하고 무익한 발상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국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도 그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왜 미국을 비판하는가?

   
  ▲ 지난 19일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만나고 있다.ⓒ 청와대제공  
 

끝없이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적어도 한 해에 한 권 이상 책을 쓰는 왕성한 필력의 소유자, 라캉을 영미권에 유행시킨 장본인, 슬라보예 지젝은 이라크 전쟁에 대한 그의 비평서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도서출판 b)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구절은 미국의 대외정책이 지닌 애매성을 잘 포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소박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세계경찰로서의 미국, 안 될 게 뭐 있는가? 탈냉전 상황은 실로 그 공백을 채울 어떤 세계적 권력을 요청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신 로마제국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상식적 지각을 상기해 보라. 오늘날 미국에 대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세계 제국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것, 즉 그런 척하면서도 무자비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민족국가로서 계속 행동한다는 것이다. (위의책 32쪽, 강조는 저자)

지젝은 ICC(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미국의 비협조적 태도를 예로 들어가며, 세계 제국으로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럴 힘을 지니고 있는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처럼 행동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데 지젝은 미국더러 세계 제국이 되라는 것인가, 되지 말라는 것인가? 만약 미국이 세계 제국이라면, 미국은 국제법에 있어서 ‘불법’을 저지를 수 없다. 국왕이 국법을 어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젝은 미국이 세계 제국으로 활동하려면 ICC의 규칙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전후가 뒤바뀐 발상이다. ICC는 조약에 가입한 국가들만을 기속할 뿐, 그 조약이 실질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게끔 하는 ‘권력’에게까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만약 미국이 일개 민족국가의 지위를 벗어나 정말 세계 제국이 된다면, 이라크 전쟁도 ‘합법적’인 것으로 봐야만 한다는 뜻이다.

현재 추진중인 아프가니스탄 증파에 대해 회의적인 목소리가 드높은 이유도 같은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국가로만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안정시키고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을 더 보내야 할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국경을 잘 틀어막고 신분 조회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테러의 가능성을 대폭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카에다와 같은 테러 조직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약 1년 전 발생한 인도 뭄바이의 테러도 그렇거니와, 며칠 전에는 러시아에서 열차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00여명의 사상자가 출현하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1세기는 테러의 시대이며 그것은 인류가 처한 보편적 위협 중 하나로 이해된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서구 세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파키스탄 정부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모양새를 내고 있다. 테러 발생으로 인한 인명 손실과 위협을 ‘미국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문제’로 놓고 본다면, ‘왜 미국이 이런 전쟁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한 비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알카에다 100명을 잡기 위해 10만 명이 투입되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고 따져 묻는 마이클 무어의 일갈은 바로 그러한 ‘상식적인 국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스로의 역할을 일개 국민국가로 한정하고 있다면,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다. 미 행정부도 바보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을 두고 혹자는 ‘그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전쟁의 이유로 거론하였지만, 그렇다면 미국이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프가니스탄은 이렇다할 천연자원도 없고, 국토의 대부분이 고산지대로 이루어진 척박한 나라이다. 게다가 전쟁을 해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부시와 달리, 오바마는 전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핵심적인 지지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왜 미국은 전쟁을 하는가? 가능한 설명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미국이 실제로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경찰의 폭력적인 법 집행이 타당하냐 부당하냐에 대한 판단을 잠시 접어두고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미국은 분명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고 있다. 미국이 아니라면 그 어떤 나라가 자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테러 조직에게 값비싼 폭탄을 퍼붓고 수만 명의 병력을 보내 잔당을 소탕하려 들겠는가?

‘반미주의’라는 단순한 틀거리로 이 문제를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탈레반은 문제적인 집단이며, 해체되어야 한다. 그들이 지배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은 여성의 지옥이 되었다. 현장법사가 보고 눈물을 흘렸을 거대한 바미안 석굴은 다이너마이트로 파괴되었으며 탈레반을 등에 업고 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알카에다는 민간인들이 탑승한 항공기를 이용하여 사상 초유의 테러를 저질렀다. 이런 극단적인 폭력 행위마저도 ‘문화적 다양성’ 같은 이름 하에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테러 조직이 발생하게 되는 사회의 열악한 여건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과, 그 테러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미군의 바그다드 점령 이후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부상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부조리한 폭력 앞에서 단순한 ‘반미주의’는 할 말이 없다.

마이클 무어가 말하는 대로 ‘이 전쟁은 미국 국민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의미한 것이니, 우리는 손을 떼자’는 식의 비판은 일견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단 하나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외하면 그렇다. 그 비판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미국 시민들이 자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며 대내정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나 가능한 화법이다. 세계 경찰로서의 미국, 오지랖 넓은 미국이 존재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게는 군사적으로 이익이 되는 일이다. 미국이 진정 일개 국민국가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려 든다면, 우리는 더 높아진 군사비와 더 불안해진 국경을 놓고 고심하며 살아야 한다. 물론 마이클 무어는 흡족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의 처지는 그 쿨한 미국인의 이해관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렇다고 지젝이 엉성하게 지적한 것처럼, 미국이 하나의 국가가 아닌 세계 제국으로 스스로를 확립하고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일개 국가 자격으로도 이미 충분히 미국은 국제법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전쟁을 개시하여 한 나라를 거꾸러뜨렸다. 그런 미국에게 제국의 왕관을 씌우는 일이 과연 현명한 것일까? 게다가 그 제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나오고, 그것은 결국 미국 시민들이 낸 세금이다. 왜 한 나라의 시민들이 세계 제국의 역할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그런 고된 일을 요구하면서 ‘도덕적’일 것까지 바랄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진영’에서 미국과 관련된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의 허술함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평가는 하나의 큰 딜레마이며,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완벽한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그 딜레마에 마주설 수 있는 ‘주체’를 확립하는 것이다. 북한 문제, 국제 문제에서 진보진영이 ‘수구꼴통’에 비해 말빨이 딸릴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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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한미FTA, 자동차 재협상 보다 '전략적 중요성'

State of Denial. 워싱턴 포스트의 전설적 기자 밥 우드워드가 쓴,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의 백악관 비사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부시 정부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세 권의 시리즈 중 마지막에 속하는 이 책은, 백악관 내의 의사소통이 부재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담아내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만약 누군가 참여정부의 한미 FTA 추진에 대해 책을 쓴다면 역시 같은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State of Denial. 어떤 면에서는 부시 정부보다 못하다. 노무현 정권은 대체 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하는지, 그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내놓지 못한 채 순식간에 협상단을 파견했다. 부시 정부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일단 군대를 보내고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시는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처형하면서 어쨌건 ‘승리’를 거둔 반면, 한국이 이루어낸 협상 성과는 초라하기만 하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미국에는 당연히 전쟁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적지 않았지만, 노무현의 한미 FTA는 요란한 국정 홍보 광고에도 불구하고 시큰둥한 분위기 속에서 추진되었다.

11월 19일 일본 찍고 중국 갔다가 가는 길에 잠깐 들른 오바마 미 대통령의 발언은, 지난 정부 당시 추진된 한미 FTA가 진정 ‘State of Denial’속에서 진행되었다는 것을 너무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 협상을 통해 한국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정부가 내놓은 답변이 너무도 궁색하자, 사람들은 당연히 ‘경제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추진되는 FTA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청와대와 정부는 펄쩍 뛰면서 그 혐의를 부인했다. 2006년 8월 8일 경향신문은 노무현 대통령이 여당 의원들 중 일부를 청와대에서 만나 “북한 문제로 한미관계에 틈이 많이 벌어졌는데 이걸 메우려면 결국 경제 분야 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정태호 청와대 대변인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State of Denial.

   
  ▲ ⓒ청와대  
 

이른바 ‘조중동’으로 통칭되는 기존 언론들은 한미 FTA와 한미동맹 사이에 거래 관계가 성립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지속적으로 사설이나 칼럼 등에서 협상의 타결을 촉구해왔다. 조중동에서 하는 말이 저런 식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지난 정부는 한미 FTA의 이유가 전적으로 경제적이라고, 철저히 탈정치적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리고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에 왔고, 이명박 대통령과 공동 기자 회견을 가졌으며, 이 기자 회견에서는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같은 희극적인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이런 언급이 들어있다는 데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공동 기자회견의 내용 중 일부다.

“FTA가 가지는 경제적 • 전략적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FTA 진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And we recognize that there is not only an economic, but a strategic interest in expanding our ties with South Korea.)”

한미 FTA의 추진 배경에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솔직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영어 구문을 살펴보면 그 내용은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이익 뿐 아니라 전략적 이익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했다’는 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말이다. 노무현 정부의 ‘공식 입장’및 그 지지자들의 염원과 달리, 이미 한미 FTA가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확인’된 바 있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 수 있다.

검은 것은 검은 것이고 흰 것은 흰 것이다. 저 드넓은 미국 시장을 향해 나아가자던 한미FTA, 대체 왜 하는지에 대해 국민들을 설득시키지도 못한 채 협상 내용도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그 한미FTA는, 경제 협상이기 이전에 전략적 동맹을 돈독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참여정부는 그 사실을 끝까지 부인하고 싶어했지만, 인기에 연연하며 정치하지 않는 현 정부는 가릴 게 없다. 노무현은 이명박을 낳았고, 이명박은 노무현을 잡아먹고 있다.

필자는 한미동맹을 ‘무조건 타파해야 할 악’으로 보지 않는다. 잠재적 핵개발국이며 언제 붕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패국가인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 세계 최강의 군사 대국과 동맹을 맺고 있는 것은 득이 되면 득이 되었지 실이 되지는 않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한미 FTA추진은 근본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위해 FTA를 추진하는 것은 경제 논리와 안보 논리를 뒤섞는 것으로, 양자 모두의 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을 정부가 직접 통제할 수는 없다. ‘공물’로 바쳐진 FTA가 미국 경제에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FTA를 맺은 나라라고 해서 군사적 동맹을 반드시 강화해야 할 어떤 필연적 당위가 도출되지도 않는다. 진정 그런 이유로 FTA를 채결한다면 미국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협상을 해줘야만 한다. 지난 정부는 이런 발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거니와, 그 사실을 국민들에게 계속 숨긴 채 사실에 대한 부인과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점에서도 용서받기 어렵다. 이 협상의 근원적 동기를 ‘뽀록’내주었다는 것은 잘한 일이라면 잘한 일이겠지만, 이미 2000명 이상의 파병을 결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면서 자동차 협상까지 다시 할 수 있다는 뉘앙스를 흘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 또한 같은 수준의 비난을 피할 수 없다.

한미동맹은 한미동맹이고 FTA는 FTA이다. 양자를 분리해서 다룰 때 모든 면에서 열세인 대한민국은 그나마 명분과 실리를 조금이나마 챙길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게 된다. 기왕 FTA가 재논의된다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채결되어 있는 온갖 독소조항들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경제 논리’로만 보자면 그렇겠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정부 시절부터 이미 이 FTA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자동차 재협상이 있느냐 마느냐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2009-10-09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조두순, 장자연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 엄격한 잣대가 과연 평등했는가?

‘대체 왜 지금에서야 폴란스키를 체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피아노>, <차이나 타운>등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3세 소녀에게 약물과 술을 먹인 후 피해자가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음에도 항문성교를 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977년의 일이다. 46일간 정신과 의사의 상담을 받은 끝에 ‘사회에 무해하다’는 판정을 받고 잠시 가석방된 틈을 타, 그를 다시 구치소에 구금한 후 재판을 진행하려 했던 판사의 결정에 불복하고 미국에서 빠져나간 것은 1978년 2월 1일. 아직 미국으로 송환되지는 않았지만, 31년만에 미 사법 당국은 폴란스키를 다시 붙잡았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  
 
적지 않은 수의 헐리우드 영화 감독과 스타들, 프랑스 대통령 샤르코지와 대중적 철학 저술가 베르나르 앙리 레비 등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구명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예술가, 철학자 등에게 관대한 프랑스의 문화적 전통도 그렇거니와, 싸움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언론의 경향성이 맞물려 폴란스키의 체포는 일종의 ‘문화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국내의 언론 및 예술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 무관심이 다행스러운 이유는 안그래도 ‘공인’들에게 관대하지 않은 국내의 여론이, 폴란스키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에게 비난의 화살을 메다꽂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무관심은 불행한 일이다. 아동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관심을 한층 더 끌어올릴 수 있는 논쟁의 씨앗을 머금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법 현실과 성범죄

연예인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마이스페이스, 기타 등등 사적인 공간을 뒤져 몇 장의 사진이나 ‘발언’을 얻어낸 후 ‘어떻게 공인으로서 이럴 수 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인터넷의 여론과 달리, 한국의 사법 현실은 (폴란스키의 체포 및 압류를 끝까지 요구하는) 미국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프랑스에 더 가깝다. 몇몇 유명한 뺑소니 사건이나 도박 사건 등을 놓고 일반적인 경우와 형량을 비교해본다면 분명 그렇다. 그 대상이 연예인이 아닌 정치인, 혹은 기업가라면 솜방망이 처벌의 사례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쉽고, 통상적인 형량이 선고되거나 집행된 경우를 찾는 게 어려워질 지경이다.

반대로 인터넷의 열화와 같은 분노가 곧장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 50대 남성이 안산에서 9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평생 회복될 수 없는 상해를 입힌 사건, 이른바 ‘조두순 사건’의 경우를 보면 확실히 그렇다. 경애하는 지도자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천인공노할 사건에 크게 진노하시어 ‘그가 받은 형기를 모두 살게 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성범죄에 대한 공포에 떠는 민중들의 마음을 크게 헤아리신 것이다. 그 뜻을 이어받아 법무부와 정치권은 성범죄에 대한 형량을 높이고 공소시효를 연장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요컨대 한국의 법 시스템은 대중들의 분노가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으면 즉각 반응하지만, ‘사회적 강자’를 향하고 있으면 귀를 막는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를 ‘사회적 약자’라고 칭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나 또한 그 다섯 글자를 타자로 치는 것이 참으로 메스꺼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변변한 소득도 직업도 없었고, 성범죄를 포함한 온갖 범죄를 저질러 전과 10범이 넘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그는 사회 시스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존재인 것이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직 ‘조두순’이라는 한 개인에게로, 혹은 언제 다가와서 내 아이에게 혹은 나에게 성폭행을 가할지 모르는 ‘잠재적 범죄자’들에게만 향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지금 조두순을 동정하는 게 아니다. 조두순이 아닌 사람들, 안정된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있을 따름이다.

과연 한국 사회가 성범죄자에 대한 ‘화학적 거세’를 요구할 수 있을만큼 성범죄에 대해 경각심을 지니고 있는가? ‘설령 상대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를 성적으로 착취해서는 안 된다’, ‘설령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가해자가 누가 되었건 성범죄만큼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서울신문 10월5일자 1면  
 

‘성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

이런 논의를 할 때 가장 곤란한 것 중 하나는 ‘성범죄’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체 ‘성범죄’가 무엇일까? ‘조두순 사건’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수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이미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 남성들 중 상당수는 성매매를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성매매는 성범죄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두순이 저지른 범죄에 진노하신 그 분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못생긴 마사지걸 발언’이 터졌을 때 이명박 대통령은 스포츠 마사지에 대한 것이라고 황급히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공식석상에서조차 성매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발언이 등장했으나 그것이 이미 ‘성범죄’임을 지적하는 목소리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남자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돈이 있는 남자가 성을 제공할 수 있는 여자에게 돈을 주고 섹스 서비스를 받는 성매매가 대체 왜 성폭력이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리 베커와 리처드 포스너를 필두로 한 법경제학자들이라면 ‘성이라는 재화를 자유롭게 매매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따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매매는 엄연히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성폭력이다.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은 성매매를 강요한 자, 성매매를 한 자 모두 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포주도 나쁘지만 그 포주에게 돈을 주고 성을 구매하는 ‘평범한 남자’도 그 범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다만 강압에 의해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성매매피해자’로 규정하여 처벌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미 이 지점에서부터 뭔가 크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성매매는 누구나 다 하는 거고, 그냥 쉬쉬하고 넘어갈 일이지 그것을 괜히 단속하겠다고 하면 ‘풍선효과’가 발생해서 성매매가 음성화되고, 그래서 차라리 공창제를 시행하는 게 나을 것이고, 등등 운운하는 이들을 상대로 성범죄에 대한 전반적인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에서 ‘성범죄’로 규정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남이 저지른 성범죄’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드높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다면

‘조두순 사건’에 대한 여론과 함께 폴란스키의 체포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두순이 저지른 끔찍한 범죄를 곱씹으며 ‘미국처럼 200년, 300년씩 콩밥 먹여야 한다’고 이를 갈았다. 그렇게 외치는 남성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성매매를 한 경험이 있을 것이며, 설령 그것이 범죄로 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성범죄에 대한 ‘죄의식’이 사회적으로 널리 공유되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미국의 경우는 차원이 다르다. 프랑스 대통령이 헛기침을 해도 사법 당국은 꿈쩍하지 않는다. 성범죄는 성범죄일 뿐이며, 누가 저질렀더라도 처벌을 받아야 하고, 아무리 오래 된 것일지라도 법의 심판대에 서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슈피겔』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LA 주 검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 다루는 사건이 무엇인지 아는가? 한 신부가 20년전 어떤 소년을 성적으로 학대한 사건이다. 왜 이런 경우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하고, 폴란스키를 체포한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폴란스키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혹자는 폴란스키를 고발한 소녀가 그를 유혹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조사 결과 피해자는 폴란스키와 단 둘이 남아있을 때 성관계를 거절했다. ‘무섭다, 집에 가겠다’는 의사를 수 차례에 걸쳐 분명히 표현했다. 이미 가해자가 먹인 술과 약물로 인해 행동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다.

피해자는 두려웠기 때문에 적극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면 ‘적극적인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화간’이라고 몰아붙이는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고, 가해자는 어렵잖게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거나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은 후 집행유예로 빠져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 장자연씨 사건’을 떠올려보면 된다. 성접대를 받은 사람들이 과연 법에 규정된 처벌을 받았던가? 아니, 애초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나 했던가? 한국 검찰은 미국 검찰이 그러하듯이 성범죄에 대한 강력한 처벌 의지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 XX를 죽여라’, ‘거세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미국의 제도와 형량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 그런 엄격한 처벌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단호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폴란스키 사건을 보라.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연예계에는 감독과 배우들간의 은밀한 성적 거래가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다.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며 사건 발생 이전에 부인이 연쇄살인범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는 충격을 겪었다.

그러나 미국의 법 체계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이고 술을 먹인 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명했음에도 힘과 협박으로 제압하고 피해자의 항문에 성기를 삽입하여 수 개월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다는 것만이 관건일 뿐이다. 성폭력은 성폭력일 뿐이다.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사건이 벌어진지 31년이 지났지만 검찰은 끝까지 처벌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것은 바로 이럴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미국식으로 하자고? 그 엄격한 잣대가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리라고 보장할 수 있다면, 나는 찬성한다. 하지만 이미 한국 사회는 고 장자연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그런 사회이다. 형량을 높이고 전자발찌를 평생 채우자고 주장하는 정치인과 법무부 관계자들 중, ‘미국식 윤리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적어도 ‘각하’께서는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정태/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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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오바마 미 대통령이 ‘중도주의의 덫’에 걸렸다.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보수층과 진보층 양쪽으로부터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대통령으로 환영받았던 그의 지지율은 현재 50% 선에서 오가고 있다(국내 상황 때문에 이게 ‘높은’ 지지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초기임을 감안했을 때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선과 총선 모두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공히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의 개혁은 시작부터 높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 및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높은 기대를 받으며 대권을 탈환해낸 모습은 여러 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측면이 적지 않다. 오바마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무현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양자 모두 기존의 ‘정치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노무현과 오바마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비주류 출신이며 그들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차별 구조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경향신문 8월 18일자 9면.  
 
노무현과 오바마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난맥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장점이나 특징 뿐 아니라 단점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중도주의’라는 막연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그 단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노 정부에 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주요 개혁 법안들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마찬가지 현상이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일구어낸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국내 매체에서는 이 사안을 두고 ‘세금 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태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미국인들은 원래부터 세금 내기를 싫어했지만, 강력한 국세청 덕분에 성실한 납세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극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타운홀 미팅’을 방해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정도 저항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킬만한 오바마측의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가 ‘초당적 협력’, ‘중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보수진영의 공세에 맞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파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본인이 빌 클린턴처럼 탁월한 사교술을 바탕으로 의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세부적인 주고받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이탈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중도주의’의 이상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도주의는 없다

여러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버락’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선명성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이 된 그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런 이들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남으로써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힘을 모아야 할 시점에 내부의 정치 투쟁이 불거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기간 동안 충분히 보아 왔다.

그렇게 해서는 소수파 출신 정치인이 살아날 수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나의 생존술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얻어내었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내 진정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 ‘중도주의’를 외치며 이쪽의 정책과 저쪽의 정책을 절충하겠다는 발상은 양쪽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본거지 역할을 해야 할 기존 지지자들마저 이탈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 『프레임 전쟁』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가 만든 로크리지연구소의 정치 전략 제언에서 따온 것이다. ‘중도주의’는 없다.

가령 낙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한 아기를 ‘중간 정도’만 낙태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해답은 0 아니면 1, 도 아니면 모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에 속한 누군가가 ‘중도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어중간한 합의책을 도출하거나 그런 제안을 어물쩍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수층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기존의 지지층이 대폭 이탈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중도주의 덫에는 미래가 없다

레이코프 교수와 로크리지연구소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지 말고, 대신 지지층과 반대자에게 강력한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권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특정 정책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믿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것 저것을 뒤섞는 것보다, 현재 추진되는 의료보험 개혁이 어떻게 ‘미국적 가치’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활용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평생 빨갱이라는 족쇄에 묶어놓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뒤섞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국민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갔다. 70년대의 김대중과 2000년대의 김대중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지 모르지만, 통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지일관 같은 편에 선다.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연이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그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키워나갈 것인지를 놓고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진정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포장하려고 하며, 계파 내의 이합집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잡탕밥같은 정책을 내놓는 일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는 덫이다. 그것은 권력을 이미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여타의 정치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워낙 중간을 좋아한다고?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중도주의의 덫에 빠져 있는 한, 미래는 없다.

2009-08-12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버마에서 벌어지는 법의 횡포와 민주주의 - 아웅산 수치와 쌍용자동차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된 채 오랜 시간이 지속되자,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고 보도된 그의 말은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조깅을 열심히 한 덕분에 아직까지 건강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중 한 문장만큼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YS는 ‘우리가 함께 잘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뤘다. 아니었다면 버마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내용을 기사로 읽으면서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추정된다. YS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을 DJ가 했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실로 버마의 상황은 정말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현지시각으로 8월 11일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다시 군부에 의해 1년 6개월의 가택연금 처분을 당함으로써 버마의 민주주의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볼 수야 없겠지만, 버마 국민들이 가지고 있던 미약한 희망이 다시 한 번 짓밟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아니면, 버마처럼...지금 버마는?

지난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아시아의 민주화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바람을 타고 이루어졌다. 1987년 한국에서 직선제 개헌을 쟁취했고, 필리핀에서는 그 전 해인 1986년 피플 파워 운동이 벌어졌다. 그 영향을 받아 버마에서도 1988년 8월 8일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문제는 최루탄을 쏘다가 탄이 다 떨어지자 항복한 한국 군부와 달리, 버마 군부는 국민들을 향해 실탄을 마구 쏘았고, 시위대가 전부 투쟁 의지를 상실하고 집에 들어박힐 때까지 계속 실탄을 쏘았다는 데 있다.

   
  ▲ 동아일보 8월 12일자 1면.  
 
아웅산 수치는 바로 그 당시 민주항쟁을 이끈 당사자였다.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민들은 군부를 표로 심판했고, 수치 여사가 이끄는 야당은 1990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아웅산 수치 여사는 민주화된 버마의 총리가 되었어야 한다. 비록 1989년부터 가택 연금 상태였긴 하지만, 그가 이끄는 정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또 그 정당은 아웅산 수치 여사를 총리로 인정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에 불복했고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선거는 무효화되었고 수치 여사는 오래도록 자신의 집에 갇혀있었다.

가택연금 기간이 끝난 후 다시 연금이 시작된 것은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버마 군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아웅산 수치를 법원으로 끌고 들어가고, 법원은 그에게 예정된 징역형을 선고한다. 차마 살해할 수는 없으니만큼 늙어 죽을 때까지 가두어두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가장 어이없는 경우는 바로 올해 벌어진 것이었다. 존 윌리엄 예토(John William Yettaw)라는 미국인이 수치 여사가 연금되어 있는 저택의 건너편 호수를 헤엄쳐 건너갔다. 그는 저택에 도착했고 수치 여사는 그를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바로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가택연금 규칙상 외부인이 허가 없이 들어와서는 안 되므로 아웅산 수치가 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법 논리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마 군부는 오래도록 재판을 끌었다. 재판의 방청을 요구하는 외국 저널리스트들의 요구에 대해서도, 묵살했다가 허용했다가 다시 묵살하는 식으로 갈팡질팡했다. 아웅산 수치 뿐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숱한 범민주화세력들에 대해서도 일제히 연행 및 수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결과야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인세인 교도소는 새삼스레 밀려닥친 정치범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세계 각국의 인권단체들이 항의를 하고 행동을 취해보았지만 이미 국제적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버마 군부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버마 봉쇄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The Economist>가 도달한 결론도 그런 것이다. 이미 (‘인권’을 존중하는) 서구 세계는 버마에 대해 봉쇄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괴로워지는 것은 버마의 국민들이지 군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군부는 국민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건 전혀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인 대우인터내셔널을 포함하여 여러 아시아 기업들이 버마의 해상 유전 및 가스전 개발에 진출하고 있고, 그 경로를 통해 군부는 엄청난 양의 달러를 직접 챙길 수 있다. 일반적인 봉쇄 조치가 실질적인 의미를 전혀 지니지 못하는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이 서구 언론들의 중평이다.

<The Guardian>그런 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군부의 돈줄이 되는 바로 그 에너지 수출에 대해서도 봉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버마의 주변에 있는 돈 많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버마의 국내 정치에 대해 거의 완전히 무관심한 수준에 이르러 있다. 버마 뿐 아니라 수단과 나이지리아 등에서도 중국은 자원을 챙겨 떠나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일관하여 독재 정부의 후견자 역할을 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에는 시민사회가 국가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견제하기는커녕, 잃어버린 고구려의 꿈을 꾸고 앉아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버마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주범 중 하나로 대한민국을 지목하는 것은 그리 ‘오버’스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 지배는 버마와 얼마나 다른가? 

역설적이게도 국내에서는 한창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 고작 싸이월드에 ‘쇠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고 써놓은 것만으로도 수억원 어치의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되고, 다음 아고라에 글 좀 썼다고 구치소에 잡아넣고, 시위중인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시민들이 엄연히 보도 위에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세 번의 경고방송을 형식적으로 마무리지은 후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진압작전에 돌입한다.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가, 그리고 법원의 사법 절차가 군사독재 종결 이후 이토록 문란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문제는 바로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법 질서의 혼돈이, 버마의 군부 독재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데 있다. 군부의 개가 되어 있는 사법부는 이미 아웅산 수치에게 가택 연금을 내리겠다는 결정을 해놓고 수사 및 재판을 시작한다. 그나마 국제적으로 명성이 있는 수치가 아닌 다음에야,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수사 기법’의 일환으로 폭행을 당해 사망하거나 하는 일이 벌이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 지금까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나아질 리 없는 ‘현실’이니까.

버마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총선에 출마하는 것을 막기 위해 18개월, 즉 1년 반 동안의 가택 연금을 추가로 명령했다. 사법 절차의 몽둥이를 휘둘러 정치적 반대자의 입을 틀어막는 행태는, 그러나 남의 일이 아니다. 삼성 X파일 사건 관련 폭로로 인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현재 재판중이다. 법원은 노회찬에게 아마도 실형을 선고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삼성의 비위를 거슬린 누군가가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노회찬이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난신고끝에 다시 국회의원 뱃지를 얻어낸 조승수의 경우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거 전 날 밤 주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도와주는 지렁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전선거운동을 한 후보자가 되었고, 의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일명 ‘젖사마’로 불리는 최연희 의원이 벌금 500만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음으로써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과 비교해보자. 대한민국에 공정한 법의 지배가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두 가지 차원 모두를 함께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미성숙한 부국(富國)이 국경 밖에서 어떤 해악을 끼치고 다니는지, 민주화를 염원하는 버마 국민들에게 얼마나 미운 나라일 수밖에 없는지를 우선 똑똑히 알아야 한다. 동시에 버마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법의 횡포가 지금 우리에게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 60여명을 대상으로 검찰은 무더기 기소를 하고 나섰다. 심지어 예전에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어떤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관이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잡고 이 노동쟁의를 일종의 공안사건으로 몰아가고자 하는 분위기까지 감지된다.

외국인도 사람이고 노동자도 국민이다. 외국인의 인권을 깔아뭉개는 대한민국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을 무턱대고 두들겨 패고 잡아 넣는 현행 법 집행에 대해서도 시민사회의 단호한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한다. ‘아직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어물거리다가는 곧 ‘내 차례’가 온다. 20년이 넘도록 암흑 속에 갇혀 있는 버마 국민들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2009-07-23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커다란 이슈에 맞서는 작은 민주주의

미디어법이 통과되어버린 이 시점에 ‘작은 민주주의’같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왠지 부적절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또한 한나라당에 의해 저질러져버린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이 지면의 존재 이유는 그것을 성토하는 것이 아니므로, 나는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는 두 개의 사례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1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만들기 위해서는 3리터의 물이 소요된다. 1리터는 병 속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2리터는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린다. 게다가 그 물을 슈퍼마켓까지 운반하고 냉장고에서 차갑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250밀리미터의 석유가 필요하다. 플라스틱 병에 담긴 생수만큼 식수를 비효율적으로 생산•운반•보관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다.

국내에서는 한나라당에 의해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파는 것을 허용하는 방침이 추진되고 있지만, 해외의 경우에는 정반대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시민들이 생수를 조직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호주의 New South Wales 지방의 한 마을인 분다눈(Bundanoon)의 350여명 주민들은 마을 회관에서의 투표를 통해 생수를 금지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BBC는 ABC의 보도를 인용하여, 오직 한 사람만이 금지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사람은 생수 업체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대체 왜 주민투표까지 벌어지게 된 것일까? 시드니에 위치한 한 생수 업체가 분다눈 인근의 수원지에서 물을 가져다가 생수로 만들고, 그것을 다시 분다눈에 판매할 것이라는 계획이 주민들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 물을 퍼다가 우리 동네 주민들에게 팔아먹겠다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그런 경우 생수 자체를 금지할 필요는 없다. 수자원 사용에 대한 보상금을 타낸다거나, 이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에서 받아가는 식으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다눈의 주민들은 생수 자체에 대한 전체적인 금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 브랜드의 생수 뿐 아니라 모든 생수의 유입과 판매를 금지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생수가 환경 파괴에 일조한다’는 인식이 없다면 행해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지구적인 이슈에 맞서는 한 지역의 작은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우르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 수아레즈(Suarez)에서는 마을 광장의 가로등을 LED로 전부 교체했다. 이것 역시 지역 의회에서 결의하여 추진된 일이다. LED 가로등은 일반 가로등에 비해 70에서 최고 90퍼센트까지 에너지 효율이 높다. 게다가 그 가로등 위에는 태양 전지 패널이 부착되어 있다. 낮동안 내리쬔 햇빛으로 밤의 거리를 밝히는 것이다. 앞으로 닥쳐올 에너지 위기에 맞서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개발도상국의 지역 의회가 앞장서서 고효율 에너지 소비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들이 친환경정책과 더불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BBC는 한 지역 의회 의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아레즈가 LED 가로등 완제품을 수입하는 대신 부품만을 수입하고 그 조립은 인근 업체에 맡김으로써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에 대해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고,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며, 그 과정에서 ‘작은 민주주의’를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7월 22일 한나라당에 의해 ‘민주적’으로 통과된 미디어법과 금산분리법 등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세계는 지금 전 지구적 이슈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특정 재벌 및 언론사가 방송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에 모든 정치적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국회 점거와 질서유지권 발동 따위만 난무한다. 더운 여름, 어지러운 정국이다.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민주주의는 국회만의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지구적 인식을 바탕으로 지역적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들의 작은 민주주의를 희망한다.

2009-07-13

[시론] 신장 유혈 사태, 타인의 비극과 우리의 미래 사이

7월 8일 우름치에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면서 신장 지구의 유혈 사태는 제압되었다. 중국 공안은 금요일에 메카에 모여 집회를 하는 이슬람교도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종교 행사가 폭력 시위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접한 어떤 국가의 경찰을 연상시키는 대목인데) 모스크를 한시적으로 폐쇄하기도 했다. 이렇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는 진정되어가고 있다.

‘해외’라는 단어를 들으면 ‘시장’ 내지는 ‘자원’을 떠올리는 국내 언론의 속성상, 신장 지구 유혈 사태의 보도 방향도 대부분 그쪽으로 편향되어 있었다는 인상을 준다. 신장 지구에서 개발된 유전이 있고, 그 유전의 개발권을 한족이 독점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다가 한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하게 되었다는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신장 지구 유혈 사태를 이렇게만 묘사할 경우, 위구르인들의 폭력 행사 이후 역으로 한족들이 위구르인들에 대해 자행한 무차별적인 폭력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국내 언론의 통상적인 설명은 신장 지구의 민족 갈등을 ‘자원 수탈자’와 ‘선량한 토착인’으로 치환시켜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 조선일보 7월 7일자 3면.  
 
물론 한족들이 세운 거대한 에너지 기업이 자원 개발에서 나오는 이익을 독식하고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일부 기업만이 진출해 있고 그 기업들만이 문제였다면, 위구르인들이 봉기를 일으킨 후 극소수의 부유한 한족들이 쫓겨나거나 대피하는 쪽으로 사태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 800만의 위구르인들은 해당 지역 인구의 40%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나머지 60%는 중국 각지에서 건너온 한족들이며, 그들 중 대다수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해온 하층민이다.

1990년대 말부터 중국 중앙정부는 동부로 밀려드는 미숙련 노동자들을 처리하고 동부와 서부의 불균형한 발전을 해소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이주 정책을 추진했다. 서부를 개발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4대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말이 한국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듯이, 서부 지역을 개발한다는 말은 중국의 저소득층에게 더 나은 삶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약속으로 들렸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뉴욕타임즈》의 에드워드 왕(Edward Wong)은 위구르인들의 폭동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한 중국인 이민자 가족의 사례를 통해 그들의 열악한 생활 수준을 보도했다. 매일 아침 8시에 리어카를 끌고 행상을 나가 한밤중에 집에 들어온다. 벌이가 쏠쏠하다 해도 미화 300불 수준에 머물고, 그러면 가까스로 생활비를 맞출 수 있다. 서부 개발의 노다지를 노리고 들어온 한족 이민자들에게도 막연한 불만은 팽배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문제는 서로 막연히 품고 있는 삶에 대한 불만이 특정한 계기로 터져나올 경우, 그것은 눈 앞에 보이는 다른 민족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치환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앞서 인용한 보도에 따르면, 폭력 사태의 계기가 된 장난감 공장 살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저소득층 위구르인과 한족들은 그럭저럭 서로 도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불씨가 튀자 그들은 서로 갈라져 몽둥이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며 서로의 변변찮은 재산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먼저 폭동을 벌인 위구르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다민족 ‘포용’ 정책이 실상은 해당 문화의 압살로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은 이민자의 증가로 인해 다수에서 소수로 변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문화와의 연결고리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위구르인은 하루 다섯 번의 기도를 드릴 수 없다. 이것은 이슬람인들의 취업을 실질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족 사장들은 메카 순례를 위해 긴 휴가를 쓰고 싶어하는 위구르인, 라마단을 지키고 낮 동안은 금식하고자 하는 이슬람 신자들의 사정을 신경쓰지 않는다.

종교 뿐 아니라 언어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우름치에 위치한 신장대학교에서는 오직 위구르 시(詩)에 대한 강의만이 위구르어로 이루어진다. 1990년대부터 대학 교육에서 위구르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신장 지구 내 한족의 불만이 경제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면, 위구르족의 불만은 경제적인 문제와 문화적인 차원을 동시에 포괄하고 있다.

중앙 공산당 정부는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댓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G8 행사에 참여하고 있던 후진타오 주석이 급히 귀국한 것은 그러한 의지를 특히 대내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위구르의 유혈 사태가 더 악화되어 국제 사회가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확산된다면, 인접한 티벳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도미노 효과를 불러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중앙정부가 강력한 제압 의지를 보인 것은 그러나, 적어도 현지인들의 생존권 측면에서 볼 때,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이 폭력 사태는 ‘돈 많은 한족’과 ‘가난한 위구르인’의 대결이 아니다. 위구르인들은 (국내 언론에서 너무도 자주 언급되는) 석유 회사가 아니라, 자기 주변의 한족들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한족들의 대항 시위도 마찬가지이다. 중앙정부의 이주 정책에 대한 불만을 그 정부를 향해 풀어내지 못하고, 대신 이웃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유혈 사태가 지속되는 것은 그 어떤 문제의 해결에도 도움이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인종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곳을 ‘개발’하는 것으로 국내의 실업 문제 등을 해결하려 하는 중앙정부가 있다면, 당연히 저소득층은 생활을 위해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중국과 위구르의 관계를 식민지와 제국의 그것으로 당장 치환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마치 영국이 식민지배를 시작한 이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의 『제국』에 따르면, 영국이 제국으로 성립해있을 당시 영국의 식민지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보다 영국에서 식민지로 넘어간 이민자의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는 일거양득이다. 식민지를 개발하면서 국내의 불만 세력이 될 수 있는 저소득층을 먼 곳으로 보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신장과 티벳에서 바로 그러하듯이, 원주민보다 이민자의 수가 많거나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가면 문화적, 인종적 단일성이 흐트러지기 때문에 분리 독립운동의 추진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중국 정부는 신장 지구를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동에서 서로 건너간 이민자들이 다시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신장 위구르 유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대한민국과 북한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북한에서 ‘거지떼’가 내려와 우리 모두 거지가 될 것이라고. 어쩌면 맞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북한의 체제가 얼마나 유지되고 있는 가운데 남한과 하나의 정치 단위를 구성하느냐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지금처럼 어느 정도의 국가 형태가 존속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의 고위층과 남한의 자본이 결탁하여 이북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개발’이 시행된다면, 마치 중국 동부와 서부의 관계가 그러하듯이, 대규모 이주의 물결은 북에서 남이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향하게 될 수도 있다. 위구르에 사람이 없어서 한족들이 건너간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남한의 양극화가 심해져 안정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층이 크게 늘어나고, 북한에 이른바 ‘개발 특수’가 시작된다면, 남한의 저소득층은 당연히 북한으로 이주할 것이다.

비록 혈통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미 남과 북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다른 형태의 집단이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이 서로의 이민자를 포용해야 하는 문제가 도래한다면, 그것은 결코 간단하게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북한이 망하고 남쪽으로 ‘거지떼’가 몰려올 상황에 대해서만 걱정하지 말고, 북한이 개방되고 남쪽에서 ‘노가다’들이 몰려가 에스닉 그룹을 형성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걱정을 해볼 필요가 있다. 신장 지구 폭력 사태라는 ‘타인의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이 조만간 우리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중국이 대한민국을 삼켜버릴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서 적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인구와 경제력을 놓고 볼 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없다. 우리는 그보다는 북한 사람들을 중국이 위구르족 대하듯이 취급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피해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덩치가 커져버렸지만, 아직 자신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한국인들이 그 사실을 실감하게 될 때 국제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크게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노정태/Foreign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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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2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이명박 대통령이 쿠데타로 쫓겨난다면 - 온두라스 쿠데타를 보며

이런 상상을 해보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이고 ‘상상’임을 확실히 못박아두는 바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실제로는 그럴 만한 정치력이 없지만) 한나라당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어, 자신이 연임할 수 있게끔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가 이미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거리에서의 항의 시위나 시민단체 및 야당의 반발 따위로는 그의 의지를 가로막을 수 없다. 급기야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완성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터져버리는 것이다.

온두라스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지난 토요일, 호세 마누엘 셀라야(Hose Manuel Zelaya) 온두라스 대통령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관저의 침실에 들어갔다. 비록 대법원은 대통령이 위법 행위를 했다고 두 차례에 걸쳐 선고한 바 있고, 육군과 해군에서도 직접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셀라야 대통령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 복면을 쓴 군인들이 그를 깨우기 전까지 그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그가 추진하던 헌법 개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예정된 날의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 체포되어 파자마 차림으로 코스타리카로 이송된 그는, 쿠데타에 굴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 자신에 대한 지지를 요청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은 셀라야 대통령의 정당성을 확인했다. 반미주의의 기수라 할 수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셀라야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유엔에서도 쿠데타를, 당연한 일이지만, 합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분위기이다. 온두라스 의회는 재빠르게 셀라야 대통령을 ‘전 대통령’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온두라스 국내의 정확한 반응을 알 수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이 고립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 헤럴드경제 6월 29일자 14면.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적법’한 선거에 대한 의혹으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이란 사태를 살펴보았다. 그 사건을 두고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옹호를 운운하는 것은 상스러운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정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국민투표를 한다면 개헌에 성공할 수 있고, 헌법을 바꾼다면 대통령직을 연장할 수 있는 ‘적법’한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나라의 실제 정치 상황만 놓고 보자면 쿠데타를 저지른 군부와 법원에게 어쩌면 더 정당성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국제사회는 일제히 셀라야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이번에도 문제의 핵심은 ‘민주주의’에 달려있는 것이다.

냉전시대가 끝난 이후, 자본주의/민주주의는 ‘외부’를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일당 독재는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의 북쪽에 위치한 세습왕정국가도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든 나라의 모든 정치가 다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 아닌 나라가 없다. 정치적 선악을 판단하는 일은 ‘민주주의냐 민주주의가 아니냐’라는 질문보다 몇 배는 더 복잡해졌다. 지금 온두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도 바로 그렇다.

원론적으로 따지자면 쿠데타는 반민주주의이고 선거에 의해 선출된 행정부 수반 대통령의 통치는 민주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헌법기관에서 반대하는 개헌을 강행하는 대통령의 통치도 과연 민주적인 것인가? 그따위 국민투표가 벌어지는 일이 과연 민주주의의 이념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앞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의 ‘외부’가 없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적인 절차 혹은 투표를 통해 헌법을 바꾸고 통치하는 것이 그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의 보증수표가 된다면, 우리는 나치의 독일 지배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2009-06-17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이란 대선 시위, 남의 일이 아니다 - 절차적 민주주의는 절대적인가

6월 13일 선거 결과가 발표된 후, 이란은 폭풍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그 시위를 보고 있노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은, 현 정부의 임기가 3년 반 넘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대선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의 이번 대선은 분명히 ‘합법적’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보통, 비밀, 평등의 원칙이 지켜지는 가운데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유세 과정에서 개혁파 후보인 미르 호세인 무사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밝은 녹색을 상징으로 삼아 축제처럼 선거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테헤란의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지지 집회는 외신 기자들의 카메라를 붙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아랍권을 순방하는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은밀한 지원 사격도 눈에 띄었다. 바야흐로 이란에도 변화의 물결이 당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경향신문 6월 15일자 8면.  
막상 투표함을 열고 보니 결과는 기대와 완전히 딴판이었다. 현임 대통령인 마무드 아마디에자드가 62.6%의 득표율을 올리며 상대방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것이다. 이란의 대선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고 있기에, 한 후보자가 과반수 득표를 하지 못하면 결선투표가 진행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이 압도적인 수치에 무사비를 지지하던 이란 국민들이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사비에 대한 지지 열풍은 분명히 뜨거웠다. 그런데 이렇게 완패했다니? 선거 조작을 의심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미국의 인권단체 Avaaz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증거가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개별적인 증거들은 아직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바 없다. 만약 확실한 증거가 나온다면, 이란의 최고 결정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는 무사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아마디에자드의 지도력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17일 오후 7시 현재까지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는 총 12명. 이 숫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나는 몇 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우선 테헤란을 뒤덮었던 밝은 녹색의 물결을 짚어보자. 무사비의 지지자들은 주로 여성, 도시에 거주하는 전문직 종사자, 고학력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선거 운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축제와도 같았다. 문제는 그러한 ‘축제와도 같은 선거’가 반드시 민주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 논자들은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선거운동이 도리어 이슬람 원리주의적 사고방식에 고착되어 있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논리 자체는 부당한 피해자 탓하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서 어떤 ‘교훈’을 얻어내느냐이다. 요즘 한국인들은 ‘축제’라는 개념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선거도 축제처럼 하고, 홍보도 유세도 축제처럼 하고, 심지어는 시위도 축제처럼 하고, 등등. 특히 촛불시위에 본격적인 사회 이슈를 접목시키려 들 때마다, ‘촛불시위의 자발성이 훼손된다’거나 ‘축제의 장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반발이 없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놓고 보면 그 축제라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축제처럼 선거운동하다가 결국 목숨 걸고 데모하게 된 이란 국민들을 보면 분명히 그렇다. 무언가를 ‘축제처럼’ 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그 자체가 정치적 성격과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이란의 경우를 1대1로 비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질적으로 이란을 지배하는 집단은 혁명수호위원회이며, 최고지도자 하메네이의 입김에 의해 이번 정국의 방향이 좌우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쨌건 절차적으로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시위로 인해 물러난다 해도, 이란이라는 나라의 안정성은 그리 큰 타격을 받지 않는다. 반면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권력의 대부분이 대통령에게 집중되어 있고, 그 대통령 위의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다. 3년 반 뒤에 한국에서 지금 이란과 같은 시위가 벌어질 경우,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가져올 충격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란의 시위를 보며 한국의 3년 반 뒤를 걱정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이란이 처한 국제적 고립과 사회적 불평등 등을 놓고 볼 때, 현 국면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지켜지지 않는 것은 비교적 덜 심각한 일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해 국민들의 반발을 힘으로 억누른다면 그것은 큰 비극이 될 터이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도 그러한가? 우리가 가진 것은 87년 체제의 허약한 정통성 뿐이다. 다음 대선이 치러진 후 이란의 경우와 같은 시위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정당한 시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지켜내야 할 ‘민주주의’란 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혹여 그러한 행동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염치불구하고 독자 여러분께 이 질문을 남겨둔 채 이번 칼럼을 마무리짓고자 한다.

2009-06-04

[노정태의 우물밖 개구리]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 - 태국의 노란 셔츠 시위대를 보며

우리나라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머리 속의 ‘세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가장 큰 나라인 미국이 있고, 그것보다 작지만 우리보다 ‘조금’ 큰 나라 일본이 있고, 그 옆에 한반도가 있으며 왼쪽으로는 큼지막하게 중국을 그려놓고 그 속에 상상의 동물과 식물, 미개인 따위를 잔뜩 그려놓는다(대륙의 …라는 이름이 붙는다). 마치 ‘판교 위에 분당, 분당 위에 천당’이라는 식의 농담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어디까지나 동아시아의 일부이며, 그 ‘아시아’란 한중일 동북아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1987년 민주화 투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버마의 8888 운동이나 중국의 천안문 사태 등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아시아 국가들이 동시에 겪게 된 경제 성장과 서구식 민주 사상의 보급, 그것을 억누르고자 하는 통치 이념과의 갈등 등이 모두 하나의 큰 그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벨기에를 바라보며 네덜란드와 그 근처 다른 나라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듯, 한국을 바라보는 ‘색목인’들은 이 나라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들의 모습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전제로 놓고 최근 대한민국을 관통한 하나의 큰 사건을 돌이켜보자.

가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에서 시민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 색종이를 뿌리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바 있다. 한국인들이야 내부 사정을 다 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운동에서 이 노란색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그러나 국제 뉴스를 꾸준히 접하는 외국인이 이 광경을 바라볼 경우,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은 아마도 태국의 ‘국민 민주주의 연대(PAD)’일 것이다. 노란색 셔츠를 입고 공항을 점거하여 관광객들의 출입국을 가로막았던 바로 그 단체 말이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러 나온 시민들을 대체 뭐에 비유하는 거냐’라고 흥분하기 전에, 일단 태국 시위의 전체적인 풍경도를 먼저 들어주셨으면 한다. 2001년 탁신이 태국 총리로 취임하고, 2006년 탈세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태국은 시위의 격량 속으로 빨려들게 되었다. 탁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빨간 티셔츠를 입고, 탁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란 티셔츠를 입는다. 그 양 집단의 성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빨간 티셔츠는 태국 북부의 서민들이 주를 이루고, 노란 티셔츠는 태국 남부의 중산층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빨간 티셔츠는 탁신 전 총리와 그의 일당들을 지지하는 반면, 노란 티셔츠는 푸미폰 국왕과 군부의 행동에 더 높은 점수를 준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서서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태국의 중산층 시위대는 국왕과 군부로 대변되는 태국의 권위적 통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 물론 탁신 총리와 그의 정치적 동료들 또한 민주 투사는 아니지만, 태국의 중산층이 지지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인 것이다.

   
  ▲ 중앙일보 2008년 12월 2일자 17면.  
 
본디 원론적으로는 중산층의 확대가 곧 민주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객원 연구원인 조슈아 쿨란트치크(Joshua Kurlantzick)에 따르면, 정치적 변화가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 중산층들은, 경제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민주주의는 지지하지만, 그 성장의 과실을 더 낮은 계층의 사람들과 나누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탁신이나 차베스같은 포퓰리스트 정치가가 출현하여, 이른바 ‘빈민 퍼주기’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후,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저소득층에게 경제 성장의 혜택을 안겨주게 될 경우 그 비용은 지금까지 성장의 과실을 누려온 중산층들이 지불할 수밖에 없다. 도시에 거주하는 (대부분이 화이트칼라인) 중산층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당선된 총리 혹은 대통령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듭 반복해서 시위를 하며, 결국 그를 쫓아낸다. 문제는 그렇게 누군가를 쫓아낸 다음이다. 이미 투표를 통해 단결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낸 바 있는 저소득층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는다. 그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시위대를 구성하고, 투표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난리 끝에 결국 군부가 개입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사실상 그 효력을 다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단 복잡한 현대 사회와 경제 속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나라를 온전히 통치해내는 경우부터가 매우 드물다. 90년대를 지나며,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군부는 쿠데타로 집권한 후 다음 선거가 시작되기 전에 물러나거나 선거를 통해 추출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들어서는 민주정부라고 해도 기존의 권위를 회복하여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차하면 시위가 벌어질 것이고, 또 저차하면 군부가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태국이 바로 그 함정에 빠져 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명박 정부의 인권 탄압, 공권력 남용,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 등을 모두 ‘우리가 찍은 대통령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것, 그 과정에서 닥쳐오는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결연히 맞서는 것은 모두 훌륭한 미덕이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현 정부의 특정한 모습에 반대를 함에 있어서, 또한 현 정부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하고, 그 범위를 기존의 것보다 더 넓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태국의 경우를 살펴보자. 탁신이 총리가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남부의 중산층들이 경제 성장의 과실을 북부의 저소득층, 노동자들과 나누려 들지 않은 데 있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차베스가 당선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빈부격차가 커질수록 저소득층에게 ‘떡고물’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흘려 정권을 잡는 ‘민주독재’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개발’이니, ‘한반도 대운하’니 하는 것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넷에서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흔히, ‘대체 국토를 작살낼 뿐인 그따위 공약을 진정 믿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고 분개하곤 한다. 하지만 함바집 아줌마라면 국토가 어떻게 되건 말건, 당장 자신에게 떨어지는 게 있다는데, 그 공약을 내건 이명박 후보를 찍지 않을 도리가 없다. 뉴타운 개발이나 그린벨트 해제 등도 마찬가지이다. 비판자들은 ‘그런 식으로는 돈 가진 사람들만 1억 벌고, 못 가진 사람들은 100원도 못 받는다’라고 비판하지만, 정작 투표자들은 50원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런 공약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결국, 이명박 정부 또한 한국 사회의 소득 양극화가 낳은 산물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는 교육받은 중산층들은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지 않은 반면, 서울 외 지역에 거주하는 저소득층들은 현 정부에 대해 그리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이명박 정부는 차베스처럼 저소득층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을 안겨주는 정책을 펴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생색도 제대로 못 내고 있다. 또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하나회를 숙청해버린 후 한국의 군대는 정치와 완전히 거리를 두게 되었다. ‘군사 독재’라는 단어가 욕설처럼 쓰이는 우리의 현실을 감안해볼 때, 민주주의가 혼돈에 빠지고 다시 군부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거의 희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이 ‘경제적 민주화’의 요구로까지 향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 큰 불안 속으로 빨려들 수밖에 없다. ‘대운하 공약’을 듣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명박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 저소득층을 설득해낼 만한 그 무언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도리어 지금까지 이루어낸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그 무언가로 돌변할 수도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결국 ‘경제적 민주화’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2009-05-21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알타이연합론인가 대동아공영권인가?

‘우리 핏줄’ 몽고, 혹은 변태적 혈통주의

짙은 안개 속에서 탈옥한 죄수는,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한 바퀴 빙 돌아 원래 갇혀있던 교도소로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이른바 ‘민족문학’의 첨병이었던 왕년의 대문호 황석영의 이른바 ‘변절’ 논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오리무중 속에서 걷고 걷다보니, 결국 또 하나의 제국주의로 돌아와버리고 말았다. 황석영이 주장하는 이른바 ‘알타이연합’, 그 논리를 천천히 짚어보도록 하자.

우선 그 ‘알타이’라고 통칭되는 국가에 사는 사람들과,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을 한 혈통이라고 주장할 수나 있는지가 의문이다. 그저 공통되는 것은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언어학상의 한 분류뿐인데, 그나마도 한국어가 정말 거기에 속하는지에 대해서 이견이 존재한다. 바이칼 호수에서 태어난 위대한 민족혼을 공유하고 있다고 우길 수야 있겠지만, 현대의 맥락에서 보자면 한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거의 혈통적 공통성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굳이 같은 혈통이라고 한다면, 생판 본 적 없는 16촌 친척이 다가와 사업하게 돈 좀 빌려달라고 할 때의 그런 ‘친척’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선조가 되는 사람들과 ‘몽고인’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혈연 교배를 했던 시점은 다름아닌 몽고 강점기이다. 고려의 국왕은 반드시 몽고 여인과 결혼해야 했고, 그걸 보고 좋다고 권문세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국제 결혼’ 시키기에 바빴던 시절이니만큼, 왕성한 혈연 관계가 맺어진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있다. 당시 그런 국제 결혼을 통해 혈연관계를 뒤섞은 후, ‘우리는 모두 몽고의 자식’이라고 말했던 것은 몽고인들이었을까, 아니면 고려인들이었을까? 혹은 고려의 지배계급이었을까 아니면 고통받는 민중들이었을까?

‘알타이 연대’의 근간에 깔려 있는 혈통주의에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만약 고려와 몽고가 한 핏줄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몽고강점기에 벌어진 지배층간의 대규모 국제 결혼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정복당한 나라의 후손들이 그걸 마치 자랑인 양 떠벌리는 꼴이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실제로 몽고강점기 당시 백성들은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했다. 반면 권력을 잡고 있던 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몽고에 줄을 대기 위해 난리를 치고 있었다. ‘알타이 문화권’을 주장하는 것은 ‘몽골리안의 핏줄’을 이야기하는 것보다야 낫다. 전자는 공허할 뿐이지만 후자는 변태적이기 때문이다.


   
  ▲ 중앙일보 5월8일자 40면  
 
알타이연합론 ≒ 대동아공영론

이쯤 되면 황석영의 ‘알타이 연합론’은, 황석영에 앞서 일찍이 몽고 타령을 시작한 몽고반점 얼리어덥터 조갑제의 ‘기마민족 정복자론’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징기스칸이 전 세계를 정복한 것은 맞다. 그런데 우리는 징기스칸과 함께 전 세계를 정복한 게 아니라, 그에게 정복당한 세계 중 일부에 불과했다. 원나라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가로 상당한 수혜국 대접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고려가 몽고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효도르에게 두들겨 맞고 암바 걸려서 실신했다가, 나중에 효도르가 찾아와서 같이 술 한 잔 한다고 해서, 얻어터진 약골이 효도르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고려가 원나라와 함께 외국에 원정을 나간 적이 있었긴 하다. 고려 민중들의 고혈을 쥐어짜서 대 함대를 건설하고, 수전에 익숙하지 않은 몽고 병사들을 대신하여 엄청난 숫자의 고려 병사들이 출전했는데, 일본에서 폭풍이 불어와 모두 바다에 빠져 죽어버린 그 사건 말이다. 대체 ‘우리(몽고+고려)’가 정복해낸 게 뭔가? 기마민족의 기상, 닥치는대로 약탈하고 강간하는 사나이의 모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몽고 타령, 알타이 타령, 바이칼호에서 뿜어져나온 우리 민족의 기상 타령, 이 모든 것들이 기대고 있는 지점은 동일하다. 힘에 대한 동경, 제국주의에 대한 갈망,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여기서 황석영의 ‘알타이연합론’은 일제 강점기 문인들의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찬성과 공통분모를 지니게 된다. 정복당한 자들이 정복한 자들과 자기동일시하려 하고, 급기야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몽고 밑에서 2등 부마국이 되었으니 몽고와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좋아라 했다. 일제시대의 문인들은 일본 밑에서 ‘내선일체’를 달성하면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 서게 될지 모른다며 학도병들의 참전을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이제 황석영은 알타이 문화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마치 가미카제 전사처럼 폭탄을 짊어지고 이명박호의 갑판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던 논리나, 황석영을 포함한 ‘범 몽고주의자’들이 이런 저런 이름 하에 몽골리안 국가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논리나, 양자의 차이가 그리 크지도 않다. 한민족이 살기에 한반도는 너무 좁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 반면 저 넓은 대륙에는 인구는 없지만 풍부한 자원과 개척되지 않은 광활한 영토가 있다고? 일본인들도 그렇게 주장했다니깐. 우리가 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나라는 사실 따지고보면 먼 친척이기 때문에, 친척끼리 도와주는 거지 정복하는 게 아니라고? 일제가 하면 폭력적 침탈행위지만 우리가 하면 정당한 자본 투자일 뿐이라고? 일제도 그렇게 말했다. 서양 세력이 총칼을 앞세워 폭력적인 근대화를 강요할 때, 일본은 정당한 자본 투자를 한다고. 아시아인의 공통성에 주목하자고.


대한민국, 이미 제국주의 국가일지도

제국주의는 제국주의일 뿐이다. 민족주의의 허울을 씌운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지지도 않을 뿐더러, 사실 이미 대한민국의 자본은 그런 공허한 수사 없이도 공공연히 해외 ‘진출’을 하고 나선 상태이다. 여기서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사안만 살펴보도록 하자.

1987년 6월10일, 한국의 직선제 개헌 쟁취는 숱한 아시아 국가 민중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1988년 8월8일, 버마의 민중들은 대규모 봉기를 감행했다. 그런데 버마의 군부는, 애초에 국민을 위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거리에 나선 사람들을 무조건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다. 그렇게 8888은 진압되었고, 아직도 버마의 봄은 멀다.

문제는 버마(미얀마)의 연근해에서 천연가스를 뽑아내고 있는 한국 기업이, 바로 그 미얀마 군부의 돈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정환닷컴에 따르면, 대우인터네셔널은 버마에서 투자가치 4580억원에 이르는 가스전을 개발하고 있다. 그 수입 중 버마 군부에게 들어가는 것은 86억4천만 달러로, 이는 그 나라의 국민총생산보다 많은 액수이다. 국민들이 죽건 말건 군부가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기업 덕분인 것이다. 게다가 대우인터내셔널의 최대 주주는 자산관리공사이며, 그와 무관하게 한국가스공사도 그 가스전의 개발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별게 아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우리’의 이익 때문에 사람이 죽건 말건, 아무튼 ‘우리’는 배가 고프고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고 더 넓은 땅에서 웅비를 떨치고 싶고, 칭얼칭얼 징징징징거리고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의 국민 되는 것은 다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그런 ‘진출’에는 사실 민족이니 알타이니 하는 수사도 그리 필요치 않다. 대우로지스틱스가 마다가스카르의 한복판에 벨기에 영토의 절반 크기나 되는 농장을, 무려 99년간 무상으로 임대받는 계약을 체결했을 때, 그게 ‘우리 민족’이어서 그랬겠는가 말이다. 결국 마다가스카르에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고, 시위대의 대표는 대우로지스틱스와의 계약을 해지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선 바 있다.  황석영이 꿈꾸는 몽고의 거대 농장과, 마다가스카르의 옥수수 농장이 다를 게 뭔가? 설마 아프리카 동남부의 섬 마다가스카르의 원주민들도 우랄 알타이 어군에 속하나? ‘우리 핏줄’인가?


알타이연합? 알타리김치나 드세요

온갖 비장미를 풍기며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나선 황석영만큼이나, ‘문학하는 사람은 자유롭게 상상할 권리가 있다’며 그를 옹호하고 나선 김지하의 발언 또한 난망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김지하 본인이 촛불을 보면 촛불에서 율려를 보고, 2002년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보면 또 거기서도 율려를 보는 사람이니만큼, 황석영이 이명박 정부를 중도 실용주의로 평가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수 있겠다.

하지만 케인즈의 말마따나 자신이 허공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받아적고 있다고 여기는 광인 또한, 결국 어느 경제학자나 정치철학자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듯이, 황석영의 알타이공동체론은 100여년 전 일본인들이 떠들었던 시덥잖은 제국주의 옹호론의 헛된 변주일 따름이다. 그나마 세부적인 내용을 보면, 제국주의에 필요한 국제 정세 인식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황석영 본인은 자신이 “알타이 연합을 통해 지역적 균형을 이루면서 중국, 일본과도 건설적으로 협력하고, 그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남북의 연방연합 논의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이라는 포부를 밝힌 바 있는데, 제발 이런 소리를 할 때에는 지도를 펴놓고 했으면 좋겠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아래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아프가니스탄이 있고, 아프가니스탄의 아래에는 파키스탄이 있으며, 파키스탄과 이란은 동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 일본과의 건설적 협력”과 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덜란드가 프랑스, 독일과의 건설적 협력을 위해 한국에 투자하고, 궁극적으로는 벨기에와의 1830년 이래의 분단을 넘어서 하나의 국가로 나가려고 한다고, 어느 네덜란드 작가가 말했다고 쳐보자. 타자를 치면서도 헛웃음이 나온다. 제발 꿈 좀 깨시라.

물론 문학가의 상상은 자유다. 하지만 황석영이라는 최고 수준의 예술가가 내놓은 상상이라 보기에, ‘알타이연합’은 너무도 조악하고 유치하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와서 내놓은 구상이라고는 하지만, 별 생각 없이 폼나는 소리니까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산티아고에 다녀오시는 게 어떨까 싶다. 의미 없이 공허한 수사를 남발하며, 여행지에서 문득 마주친 풍경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를 성찰하는 여행기를 쓰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산티아고가 제격이니 말이다. 물론 서점가에는 ‘산티아고 여행기’가 넘쳐나지만 황석영이 하면 다르지 않겠는가. 먼길 떠나기가 힘드시다면 자택에서 알타리김치에 보리밥 한 그릇 석석 비벼 자시고, 푹 주무시고 일어나신 다음, <풍물기행 세계를 가다>, <W> 같은 프로를 보며 대륙의 꿈을 보듬으시는 것도 강추할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