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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1

탈핵론자들은 대체 무엇에 반대하는가

나는 지금까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탈핵론자들은 뭔가를 열심히 반대하고 있는데, 자신들이 뭘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방사능 유출의 위험'은 한국 원전의 설계와 가능한 사고의 영역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로 핵물질이 유출된 것은 격납 용기를 감싸는 콘크리트 외벽의 두께가 고작 16cm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수소폭발을 견디지 못했다.

반면 미국 최악의 원전 사고였던 TMI(Three Mile Islands) 발전소 사건은 달랐다. 노심용융으로 인해 수소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격납 용기 외벽의 두께가 1미터였고, 내부의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견뎌냈다. 심지어 사고가 난 2호기는 폐쇄했지만 그 옆의 1호기는 얼마 후 정상 가동했다. 하루에 적어도 8시간씩 노동자들이 출근해서 일했다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원전 폭발 사고가 일어난 후에 일하던 사람들도, 방사능 때문에 죽지 않았다. 격납 용기의 힘이다.

이와 같이, 방사성 물질이 원자로를 감싸고 있는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경우, 방사능은 유출되지 않는다. 방사능이란 방사성 물질이 뿜어내는 파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그 어떤 발전용 원자로도 후쿠시마처럼 16센티미터에 불과한 콘크리트 외벽을 가진 격납 용기 안에 들어있거나 하지 않다.

한국에서 최악의 원전 사고가 터져도 핵물질이 격납 용기 밖으로 나올 가능성은 0에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원전 내에서 벌어질 수 있는 수소폭발의 에너지에는 한계가 있고, 그 폭발력을 격납 용기가 너끈히 견뎌내기 때문이다. 그럼 방사능은 나오지 않는다. 방사능의 위험 때문에 원전에 반대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들이 말하는 '원전이 공격당하면 핵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이 끔찍하다'는 말 또한 현실 속에서 발생할 수 없다. 이미 미국에서 2002년에 실험을 해봤다. 두께 1미터 이상의 격납 용기는 보잉 767로 들이받아도 끄떡없다.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와 직격해도, 어지간히 센 탄두를 탑재하고 있지 않은 한, 격납 용기 내의 핵물질을 유출시킬 수는 없다. 그렇게까지 강력한 탄두, 가령 핵탄두를 실은 미사일이 날아온다면 그때는 원전이 아니라 그 공격 자체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동남권에 위치한 원전은 원전에 반대하는 환경주의자들이 대체로 반대하는 THAAD가 '죽음의 전자파'를 쏘아대며 지켜주는 범위 안에 있다. THAAD의 주된 목적은 부산항에서 왜관을 거쳐 평택으로 이어지는 미군의 보급선을 방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는 미군의 보호 하에 놓이게 되었다. 원전이 북한 미사일에 공격당할까봐 걱정되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THAAD 배치에 찬성하고, 추가 배치를 추진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그들이 말하는 '규모 7.0의 지진이 바로 원전 밑에서 발생하면 큰일 아니냐'는 우려 역시 말이 안 된다. 그럼 당신들은 규모 7.0의 지진이 청와대 바로 밑에서 발생할 가능성은 0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0.00000000000000000001%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논리로 원전을 폐쇄해야 한다면, 청와대 역시 같은 확률로 지진 피해를 입고 폭싹 무너질 수 있다(하지만 그런 지진을 겪어도 원전 건물은 안 무너진다.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금 당장 청와대에서 나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자연재해를 견딜 수 있는 어딘가로 피신해야 한다. 어디가 좋을까? 노아의 방주?

그들이 말하는 소위 '화장실 없는 아파트' 타령, 사용후핵폐기물 문제 역시 마찬가지로 엉터리다. 사용후핵폐기물이 10만 년을 가니까 원전을 당장 없애야 한다는 사람은, 화력발전소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인 탄소가 몇 년을 가는지 알고 있나? 무한대다. 왜냐하면 탄소는 원자이며 원자는 대단히 특별한 경우(핵융합이나 핵분열 혹은 방사성 붕괴 등)가 아닌 다음에야 우주가 멸망할 때까지 쭉 그냥 그대로 가기 때문이다.

사용후핵폐기물이 걱정된다면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면 된다. 이미 과학적으로 처리 방법은 다 고안되어 있다. 다만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와 핵탄두의 개발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기 때문에,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에 의해 해당 기술의 발전이 막혀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원자력계는 4세대 원전 개발에서도 앞서나가는 선두주자다. 4세대 원전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순간, 10만 년을 간다는 사용후핵폐기물 문제는 깨끗하게 사라진다. 대신 그 핵폐기물이 값싸고 훌륭한 발전 연료로 재활용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에너지라고 칭송하는 핵융합보다 훨씬 쉽게 구현 가능하고 그만큼 안전한 대안적 에너지 시스템이다.

그들이 말하는 온갖 '위험'에는 실체가 없다. 반면 실체가 없는 위험을 떠벌이는 '세력'에는 실체가 있다. 당신들은 원전의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아니면 원전의 위험을 떠벌이는 당신들의 세력을 지키고 싶은 것인가?

탈원전을 외치는 이들은 최소한의 지적 정직성을 보여주기 바란다. 사실 당신들 스스로도 알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이 탈원전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숙의'하면 할수록,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당신들의 공포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실체가 없는 '위험'을 홍보하는 것으로 뭉친 '세력'에는 존재의 당위가 없다. 나는 한국 뿐 아니라 세계의 환경주의가 새롭게 바뀌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믿는다.

2017-10-03

'에너지 민주주의'라는 가짜 이념

탈핵론자들이 내거는 멋진 기치 중 하나가 바로 '에너지 민주주의'다.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이해하고 작동시키는 원전보다, 개똥이네 말숙이네 집에 모두 태양광 발전기가 깔려있으면, 그게 본질적으로 '민주적'이고 따라서 옳다는 논리다.

이건 에너지 정책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하는 주장이다. 민주주의는 일단 근대국가를 전제로 한다. 근대국가는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시스템이고, 다만 그 폭력의 활용 방식을 법치주의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큰 발전소를 다 없애버리고 작은 발전소만 돌아가는 것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것은, 에너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에너지 전근대주의, 혹은 에너지 봉건주의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애초에 민주주의 자체가 (고대 그리스의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근대적 이념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렴하게 에너지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것, 본인이 사용한만큼 필요에 따라 적용된 누진제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요금을 내는 것, 그리고 그 에너지의 생산과 사용 과정에서 공공의 이익을 해치지 않도록 감시 체제가 돌아가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탈원전'과 필연적인 상관이 없다.

에너지의 생산과 유통을 감시하는 문제도 그러하다. 원자력 업계가 그렇게 의심스럽고 사악해보인다면, 감시하는 단체들이 전문성을 키움으로써 투명성을 강화할 수 있다. 오히려 원전은 숫자가 많지 않고 그만큼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http://nsic.nssc.go.kr/main.do)와 같이 자료를 공개하는 일이 가능하다.

원전을 욕하기 위해 원자력안전정보공개센터 자료를 참고하는 사람들이, 그 생태적 피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태양광과 풍력을 예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너무 잘 관리되는 탓에 알 수 있는 '문제'에만 손가락질하고, 자신들이 정작 파악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은 아예 없는 셈 쳐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무조건 선이니까 관리 감독의 필요가 없다고? 태양과 바람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리가 없다고? 그런 목가적 판타지에 기반해 국가 정책을 추진하자는 소리인가?

오히려 에너지 봉건주의자들의 이상대로 '공동체' 단위로 발전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살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에너지의 값이 비싸진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존에 저렴한 가격에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었던 빈곤층부터 소외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거노인들이 전기장판을 못 틀게 된다는 말이다.

에너지는 민주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에너지를 민주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집집마다 발전기를 나눠 달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에너지 민주주의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마다, 나는 총을 들고 무장할 권리가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미국의 총기 소지 옹호론자들을 떠올리게 된다. 에너지의 생산은 최소한의 공간에서 집중적으로 하고, 그것을 적법한 기구에 의해 감시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 이념에 부합한다. 마치 국가의 총과 무기는 군대와 경찰이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다만 국민들은 국회나 정부 및 법원을 통해 그 무장 조직들을 감시하는 것이 근대국가의 기본인 것처럼 말이다.

원전에 반대하는 논리로 뭘 갖다 붙이건 그건 주장하는 사람 마음이다. 하지만 탈원전을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포장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알고도 그런다면 '강남 좌파 판타지'에 복무하는 것이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고민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7-10-02

고래와 영웅 - 도덕적 에너지 실천에 대하여

1.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다. 슈퍼히어로가 되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어린이의 꿈이다. 그러나 현실은 팍팍하고, 일상은 지루하며 때로 고되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세상과 맞장을 뜨는 사람들'에 대중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어떤 정치적 당위가 없거나 아예 부도덕한 존재라 해도, 그가 '거대한 무언가'와 싸우고 있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흥분하고 편을 들어주기도 한다. 지강헌처럼 부당한 형사 정책에 희생된 이가 탈옥을 하면 국민들은 호응하고 그를 기린다. 하지만 신창원 같은 명백한 범죄자가 탈옥을 해도, 그저 탈옥을 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언론이 흥분하고 팬클럽이 생기며 그가 입었던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것이다.

약한 것과 옳은 것은 전혀 같은 가치가 아니지만 우리는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대중을 설득하고자 할 때에는, 설령 자신들이 실제로는 강자라 하더라도, 스스로를 약자라고 포장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와 같은 무모한 도전은 반드시 합리적인 근거를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대신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박히는 어떤 '그림'이 나와주는 것이 관건이다. 마치 1975년,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포경선에 달려들던 그린피스처럼 말이다.


2.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생태학 박사 과정을 밟던 대학원생 패트릭 무어(Patrick Moore)는 1971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뜨거웠던 대학가의 분위기에 휩쓸렸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에서 벌어지기로 예정된 수소폭탄 실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자 하는 한 환경운동 그룹에 참여한 것이다. 그들은 낡은 어선 한 척을 타고 수소폭탄 실험의 현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본인들을 '인간 방패'로 제공하는 시위를 하기로 했다.

목표와 방법이 정해졌다. 그런데 그 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할 것인가? 처음에는 '평화(Peace)'로 하자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앞에 '녹색(Green)'이 붙었다. '그린피스(Greenpeace)'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린피스호는 그들이 막고자 했던 그 수소폭탄 실험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더 이상의 수소폭탄 실험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과연 그린피스 때문이었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린피스 호에 탔던 12명의 환경운동가들은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반핵운동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린피스의 활동은 1975년 전기를 맞이한다. "Save the Whales", 일본과 소련의 포경선에 맞서 고래들을 구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린피스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포경선의 작살이 날아다니고 고래들이 물보라를 튀기는 가운데 그린피스의 젊은 활동가들이 그 어느 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 공해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린피스는 자신들의 활동을 영상에 담았고, 언론은 이런 '멋진 그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삽시간에 그린피스는 전 세계인이 아는 환경운동의 아이콘으로 거듭났다.

이후 그들은 승승장구하며 다양한 환경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패트릭 무어와 다른 이들의 입장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생물학자였던 패트릭 무어는 거대 조직으로 거듭난 그린피스가 염소(Chlorine)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염소는 그냥 염소일 뿐이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용 화학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나트륨과 결합된 염소는 염화나트륨, 즉 소금이다.

특정한 원소 하나를 두고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며 모든 종류의 일상용품으로부터 염소를 추방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던 그린피스를, 훈련된 생태학자인 패트릭 무어는 더 이상 견뎌낼 수가 없었다. 그린피스의 창립자 중 하나인 그는 그린피스를 탈퇴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3.

화학은 화학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제품들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그린피스는 자연에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인 원자번호 17번을 가진 그 원소를 '악'으로 보기 시작했다. 포경선과 싸우는 것은 이제 식상한 일이다. 미국 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도 지상 핵실험 따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린피스는 여전히 맞서 싸울 거대한 악을 필요로 했고, 자연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염소를 '악마의 원소'라 이름붙이고 반대 운동을 벌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면, 방사능을 '죽음의 파장'이라는 식으로 낙인찍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방사능은 자연에 존재하는 특정한 파장들을 이르는 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길면 적외선이고 짧으면 자외선이다. 그 자외선보다 짧은 파동에는 X선과 감마선이 있고, 알파파, 베타파, 감마파라는 입자선도 존재한다. 이러한 파장들을 모두 포괄하는 이름이 바로 그 무시무시한 방사선이다. 방사선은 일반적으로 방사성 물질이 더 안정한 물질로 붕괴될 때 발생하는 입자선 혹은 전자기파라고 정의된다.

그냥 그게 전부다. 염소가 염소인 것처럼, 방사선은 방사선이고, 방사능이란 특정 물질이 방사선을 내뿜을 수 있는 능력을 뜻하는 단어다. 염소를 '악'이라 부르는 것이 우스꽝스럽다면 방사능을 '악'으로 매도하는 것 역시 한심한 일이다.

인간은 19세기 말까지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방사선의 존재를 파악하고 방사능 물질을 추출하여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주기율표에 써있는 자연수의 형태로 똑 떨어지는 줄만 알았던 원자들이, 중성자의 갯수에 따라 다양한 동위원소를 갖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우라늄에는 중성자가 146개 있는 우라늄-238도 있지만 143개 있는 우라늄-235도 있으며 자연계에 0.7%가량 존재하는 중성자 143개짜리 우라늄을 많이 뭉치면 연쇄반응을 일으켜 핵분열의 속도가 빨라지며 심지어 임계치를 넘기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이 모든 발견과 기술적 진전은 도덕과 무관하다.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힘이 있고 그것을 꺼내 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만약 핵분열의 발견과 통제 기술의 발달이 2차 세계대전과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핵무기의 제작은 훨씬 뒤로 늦춰졌을 것이다. 원유를 정제해서 나오는 가솔린이 오래도록 연료와 연구용으로만 사용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제서야 네이팜탄으로도 만들어지고 몰로토프 칵테일(일명 화염병)로도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보다 먼저 그것이 폭탄으로 사용되는 광경을 목격한 탓에, 원자력이라는 에너지 자체는 도덕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 현상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반핵 운동이 터져나온 것은 그런 면에서 당연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린피스 역시 반핵운동 단체로 시작했고, 원자폭탄 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까지 그 모든 원자력에 반대했다. 마치 십수년 후 '염소'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였듯, 그린피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환경 운동은 '방사능'이라는 자연 현상에 대한 반대 운동에서 출발한 셈이다.


4.

방사능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린피스는 방사능에 반대했고, 염소에 반대했고, 지금은 또 무언가에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자연 현상과 도덕적 판단 사이의 간극을 뛰어넘을 수 있는 이유는 '거대 자본/원자력 마피아/미 제국주의/기타등등'으로 표상되는 어떤 거대한 권력과 조직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소리가 버젓이 진보적 담론으로 유통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거대한 조직과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소수자들'로 포장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포지셔닝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방사능이 뭔지 몰라도, GMO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도, 심지어는 염소가 무엇인지 몰라도 그린피스의 편을 든다. 한국수력원자력과 몬산토와 카길과 미 제국주의가 그 배후에 있다고 외치면 많은 이들의 판단은 그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게 내제되어 있는 도덕심의 작동 원리를 그들이 잘 활용하고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압받는 소수자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은 권태롭고 피곤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웅의 편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포경선과 맞서 싸우는 그린피스의 모습을 TV로 보고 후원금을 퍼부어주었던 서구 시민들 중 대부분은 그 전까지 일본이 고래고기를 먹는 몇 안 되는 나라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적잖은 이들은 고래라는 동물에 대해 '성경에 나오는 요나를 삼킨 동물'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그린피스의 활약을 보고 감동한 사람들에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크고 무시무시한 작살을 단 배' 앞에 어줍잖은 낡아빠진 어선을 끌고 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그 영웅들에게, 나의 후원금을 보낸다는 사실 그 자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5.

2017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에서 오가는 탈핵 논의에 대해 생각해보자.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정책적 당위성의 측면에서도 탈핵 진영은 탈핵 반대 진영에 비해 논거가 빈약하다. 아니, 사실 논거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한국 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도 체르노빌처럼 흑연을 감속재로 쓰는 고속로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후쿠시마처럼 비상용 발전기를 침수될 수 있는 낮은 곳에 배치해놓은 원자력 발전소도 한국에는 없다. 우주에서 공룡을 멸종시킬만큼 거대한 운석이 날아와 강타하지 않는 한 한국의 원전은 깨질 뿐 폭발하지는 않는다. 우라늄이 폭발할 수 있을만큼 농축되어 있지 않으니까. 심지어 북힌의 장사정포가 날아와도 원자로의 방호벽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찬성하는 이들은 당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권력'이 그들의 편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탈핵 반대 진영은 본인들이 과학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린피스나 환경운동연합이 그러하듯이 스스로를 도덕적 당위의 담지자로 여기지는 않는 듯하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탈핵은 '운동'인 반면, 원자력 발전은 '정책'이며 '기술'일 뿐이다. 탈핵에 찬성하는 것은, 고래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그린피스를 후원하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안겨준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구차한 현실론에 지나지 않는 무언가로 취급된다. 심지어 원자력 업계 종사자들도 종종, 그래 실은 그렇게 좋은 건 아니고 궁극적으로 보자면 없어져야겠지만 당장은 할 수 없죠,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현실의 무게를 아는, 일상을 지켜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이지 않는 영웅적 노력의 결과물인지 아는 나잇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원자력 발전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세상을 바꾸고 싶고, 저 거대한 권력을 향해 돌을 던지고 싶고, 전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젊은이들은, 일단 탈핵에 찬성한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피가 뜨거운 젊은이들에게 너무도 싱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은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벗어나, 원자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왜 도덕적이며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가격이 싸서, 짓다 만 발전소가 있으니까, 수십조원에 달하는 원전 시장을 빼앗기니까, 라는 식의 주장으로는 대통령 탄핵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산주의적, 도덕주의적 열기를 이겨내기 어럽다.

원자력을 쓰지 않을 수 없다는 차원을 넘어, 왜 사용해야 하며 왜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아 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그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6.

이제서야 국내에서도 원자력 발전이 기후 변화 대응책으로서 필요하다는 주장이 공론장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교역량에 비해 놀라우리만치 세계적 트렌드에 뒤쳐진 나라다. 고맙게도 현 장권의 기습적인 탈핵 정책이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원자력 발전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고, 원자력 발전이야말로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저발전원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는 기후 변화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21세기 인류가 처한 단 하나의 가장 큰 안보 위험 요소를 꼽는다면 그것은 기후 변화일 수밖에 없다. 가령 방글라데시의 경우 인구는 1.6억인데 그 중 4천만 명 이상이 해발 1미터 이하의 저지대에 살고 있다. 해수면이 1미터만 높아져도 대한민국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환경 난민이 된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은 따로 도망갈 곳도 없으므로 최선을 다해 기후변화에 맞서고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최대한 많은 국토를 가꾸고, 가급적 나무를 심어서 토양의 유실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의 '신재생 발전' 드라이브로 인해 전국 방방곡곡에 나무를 베고 산을 깎아서 태양광 발전기를 짓고 있다. 그런 식으로 국토를 벌거숭이로 만들지 않아도 되는 원전은 없애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원자력 발전을 유지하고 에너지 믹스에서 원전의 비중을 확대하는 것은 단지 경제적이거나 합리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만큼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임으로써, 한국에 비해 가난하고 기후 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부족한 나라의 빈민들이 그만큼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방글라데시처럼 인구는 많은데 기술력이 부족한 나라에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현재 방글라데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2021년 완공을 목표로 원전을 건설중이다).


7.

원자력 발전에 찬성하는 것이 과연 '영웅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원자력 발전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너무도 안전하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의 안전성을 높이자'는 대중적인 운동을 할 여지가 없다는 것 말이다. 원자력 발전은 실로 너무도 안전하다. 얼마나 안전하냐면, 심지어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WHO 조사에 따르면,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마다 석탄은 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는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는 440명, 수력(세계 평균)은 1400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런데 원자력은 인류 최악의 사고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까지 포함해도 세계 평균 고작 90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다. 이보다 안전한 에너지원은 없다. 지붕에 설치하는 태양광 발전보다 원자력 발전이 더 안전한 것이다.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숫자가 그것을 입증한다.

안전한 원자력 발전을 계속 사용하는 것, 그 활용을 늘려나가자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어떻게 영웅적 행위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또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원전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전의 사용은 결코 영웅적인 일이 아니다. 무릅써야 할 위험 따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전이 위험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 원전이 '폭발'하면 수백만의 이재민이 생길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영토 내에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원자력 발전소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낀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탈핵 반대 진영에서는 그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원전이 위험하지 않다고 홍보하는 쪽에 주력해왔다. 그런 계몽은 언제나 옳고 필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확률이 0.0000000000000000000001%여도 0은 아니니까 위험하다'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해법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1) 과학적인 사실, 기술적인 설계, 그에 대해 쌓여있는 한국의 노하우를 놓고 볼 떄, 원전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2)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고 질 좋은 전기를 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으므로써, 기후 변화에 취약한 제3세계의 빈민들을 돕는 도덕적 에너지다.
3) 그러므로 아무리 사실에 입각한 안전성을 주장해도 수백조분의 1의 가능성 때문에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느끼는 그 엄청나게 희박한 가능성의 공포심을, 견뎌내시라. 그것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에 사는 한국인의 의무다. 그 조그마한 공포심 때문에 우리가 원전을 포기하면, 방글라데시의 빈민가가 물에 잠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으로서 원전 공포심을 참아야 할 의무가 있다.

사실 1)을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2)도 당연한 것이고 3)까지 나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적잖은 이들은 아직도 원전의 사고 위험을 두려워하고, '수십만년 동안 사라지지 않는 핵폐기물'에 대해 정말 큰 부담감을 느낀다. 경수로에서 사용된 핵연료라고 해봐야 물에 담가서 열을 식힌 후 포장해서 쌓아두면 그만일 뿐인데도 말이다.

사실을 전달하고 계몽하는 것은 늘 필요하다. 그 가치는 아무리 반복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탈핵이란 원전이라는 괴물과 싸우는 성전이기 때문이다. 원전이 안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그들은 반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탈핵에 반대하는 이들 역시, 우리 인류에게 골고루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성향을 충족시킬만한 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원전이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괴물과 싸우기 위한 우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굉장히 안전하고 튼튼하며, 핵폐기물 문제도 과장되었다 뿐이지 사실 합리적으로 처리가 가능하지만, 그래도 걱정된다면 그 걱정을 하시라고. 당신이 걱정하면서 '핵발전소'를 참아내는 그만큼, 가난한 나라의 환경 난민들은 웃음지을 수 있다고.


8.

우리는 모두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 어린 시절에만 그런 게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기여하고 싶어하고, 때로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도 하며, 설령 남을 돕지는 못하더라도 해를 끼치지는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다.

포경선을 향해 달려들던 그린피스의 활동가들이 자극한 것은 바로 그런 원초적인 참여의 본능이다. 사실 우리 대부분의 삶의 99.99%는 고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들이 고래를 지키기 위해 달려들 때, 뭔가 올바른 일에 동참하고 싶다는 인류 본원의 도덕심은 위안을 받았다.

그린피스는 그렇게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고, 자신들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고자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들을 가난에서 구제하고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원자력에 수십년에 걸쳐 사악한 에너지이며 죽음의 방사능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낙인을 벗겨내고 현실을 올바로 봐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 지구의 인구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화석 연료의 사용량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셰일 가스 로또를 터뜨린 미국은 한번 포기해버린 원전 기술을 복원하는대신 되려 석탄을 캐서 활활 불태우겠다고, 파리 협정에서 탈퇴하겠다고 목청을 높인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위무하기 위해 제3세계의 환경 난민에 대한 고민을 집어치우고, 태양광 발전기가 멈추는 밤이면 밤마다 석탄 화력 발전소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중이다.

원자력은 악이 아니다. 화력도 악하지 않다. 다만 현 시점에서, 보다 나은 에너지원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를 촉진시키는 화력 발전의 규모를 늘려가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태양광이나 풍력은 모두 간헐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대규모의 화력발전, 특히 가스발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태양과 바람의 나라는 사실 석탄과 가스로 돌아간다. 그것은, 도시에 거주하는 선진국 시민들에게는 흡족해보일 수도 있지만, 환경 난민이 될 위기에 처한 제3세계의 빈민들에게는 재앙과도 같다.

원자력은 안전하다. 그 안전성에 대해서는 수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이미 해두었다. 그래도 정 불안하다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지구 어딘가에 사는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아직 인류에게 친숙하지 않은 에너지의 사용에서 비롯하는 불안과 막연한 공포심을 참고 견디는 것, 원자력이 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공부하는 것, 그리고 지난 수십년 동안 쌓여온 편견과 혐오의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한국 같은 발전된 산업 국가에 사는 우리가 해야 할 도덕적 에너지 실천이다.

2017-10-01

유시민, '미친놈 전략', 민주주의

지난주 목요일(9월 28일) 방영된 썰전을 보며 매우 당황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 유시민 작가가 매우 이상한 논리를 아주 힘주어 강변하는 가운데, 박형준 교수가 그것을 제대로 반박하지 않고 지나간 모습 때문이다. 편집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청자에게 전달된 바 그렇다.

유시민의 논리를 요약해보자. 김정은은 '미친놈 전략'을 쓴다. 트럼프도 '미친놈 전략'을 쓴다. 그런데 수천 발이 넘는 핵탄두를 가진 미국의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겠다는 북한의 지도자를 비난할 도덕적 근거는 희박하다. 둘 다 '미친놈'이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은 당위론적인 정답인 '어떤 일이 있어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불가하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

이 주장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도덕과 당위를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과 당위를 구분하는 것은 국제 정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유시민은 '미국 네가 뭘 잘한 게 있다고 북한한테만 핵을 포기하라는 거냐'는, 자주파의 기본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은 '미친놈 전략'이라는 표현이 가져다주는 착시일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모두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보자.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 나온 것처럼 두 사람이 함께 절벽을 향해 차를 몰아가고, 브레이크를 먼저 밟는 쪽이 지는 싸움을 한다고 해보자는 말이다. 결국 똑같은 전략적 행위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미친놈 전략'은 '미친놈'을 '나쁜놈'으로 착각하게 할 우려가 있는 반면, '치킨게임'은 이기는 쪽이 대범한 것이고 지는 쪽이 '치킨(겁쟁이)'인 싸움이니 말이다.

아마 트럼프와 김정은 둘 다, 스스로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치킨게임'을 벌이는 중이라고 자신의 행동을 평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미국의 행동도 바뀔 수 없다. 이것이 미국의 주장이다. 나를 포함해 문재인 정권의 대외정책을 신뢰하지 않는 많은 이들도 이렇게 생각한다. 반면 유시민,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 그 외 여권을 옹호하는 이들은 북한의 행동을 바꾸기 위해 미국이 제재를 가하면 전쟁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경고한다. 뾰족한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둘 다 '미친놈 전략'을 쓰고 있다고 빈정거리며, 미국도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양비론을 곁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치킨게임'의 관점에서 지금의 현상을 바라본다면, 유시민 식의 주장이 통할 수 있는 여지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김정은 한 사람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동의하는 순간 핵 개발을 포기할 수 있다. 반면 미국은, 설령 트럼프가 김정은과 사랑에 빠져서 데니스 로드맨과 셋이 함께 셀카를 찍는다 해도, 핵탄두를 지닌 북한이 ICBM까지 가지고 있는 상태를 용납할 수가 없다. 북한은 독재국가인 반면 미국은 민주국가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의 공식적인 시스템은 모두 김정은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김정은 한 사람의 마음이 바뀌거나 제거된다면 핵 개발도 멈출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미국은 궁극적으로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상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다. 물론 정치권의 판단과 결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정치인들이 원하건 원치 않건, 국민이 원하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가 갖는 '괴물같은 호전성'인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런데 전쟁을 해야 할 상황이 오고, 그 전쟁으로 인하여 국민 정서가 자극되기 시작하면, 멈출 수도 없다. 국민이 최종적인 의사 결정을 하는데, '국민 일반'의 판단은 정치권에 비해 훨씬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굉장히 재수없는 엘리트주의자 같은 말을 했는데,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다. 냉전의 설계자이며 궁극적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대전략가 조지 케넌의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것이다. 『조지 캐넌의 미국 외교 50년』의 한 페이지를 인용해보자.

자기 자신이 전쟁과 평화 중 어느 상황에 처했다고 보는지에 따라 하룻밤 새에 이데올로기적 태도를 뒤바꾸는 이런 놀라운 능력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묘한 특징입니다. 이를테면 엊그제만 해도 우리나라와 다른 강국 사이의 쟁점은 미국의 젊은이 한 명의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의 대의는 신성하고, 대가는 고려할 가치도 없으며, 폭력에는 무조건 항복 말고는 어떤 한계도 없어야 합니다.

이제 저는 여기에 대한 답을 압니다. 민주주의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민주주의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는 상대의 자극에 느릿느릿 대응합니다. 그런데 일단 자극을 받아서 칼을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면, 이제 자극했다는 사실 자체가 쟁점이 됩니다. 민주주의는 화가 나서 싸웁니다 --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싸우는 거죠. 민주주의는 자신을 자극할 만큼 경솔하고 적대적인 강국을 징벌하기 위해 싸웁니다 -- 이 강국에게 잊지 못할 교훈을 주기 위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이런 전쟁은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조지 F. 케넌, 유강은 옮김,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서울: 가람기획, 2013), 180-181쪽. 강조는 인용자.

김정은은 하루아침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고 끝낼 수도 있다. 북한의 전쟁 시작과 끝은 모두 김정은 혹은 그에 준하는 수뇌부 몇 사람의 의사결정에 달렸다. 북한 주민 2천5백만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트럼프가 처한 상황은 정 반대다. 물론 미국 대통령은 의회나 대법원의 승인 없이 독자적인 결정만으로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는 코드를 가지고 있지만, 트럼프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미국의 전쟁은 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미국이 함부로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훌륭한 안전핀이다.

문제는 그 안전핀이 뽑기 어렵게 고안된만큼, 한번 뽑으면 되돌리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조지 케넌이 말하는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이다. 그가 볼 때 미국은 유럽의 전쟁에 그렇게 깊숙이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미국 국민들의 생각도, 전쟁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다가 막상 미국인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자, 미국의 국민들이 더 많은 피를 보고 싶어하게 되었다. 미국인이 흘린만큼 독일인의 피도 강처럼 흘러야 한다는 분노가 미국을 뒤덮었고, 전쟁은 끝날 때가지 끝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다시 유시민으로 돌아가보자. 유시민은 너무도 '상식'인 양, '이라크 전쟁은 석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 정설'이라고 말했다. 엉터리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불타죽고 떨어져 죽고 건물 잔해에 깔려죽는 것을 보아버렸기 때문에, 뭐가 됐건 '나쁜 씹새끼들'을 처부숴야 했던 복수심이 핵심이다. 당시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령 힐러리 클린턴 뉴욕 주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내심으로는 그런 터무니없는 보복성 무력행동에 찬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다들 눈이 뒤집힌 상태였고, 정치권이 국민 여론을 따라간 것이다. 나머지는 다 부차적이다.

심지어 조지 W. 부시와 그의 측근들도 어느 시점에는 이라크에 WMD(대량살상무기)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했다. 그런데도 왜 전쟁을 했을까. 석유 때문에 전쟁을 했다, 이런 '진보의 상식'만을 달달 외우고 있는 사람들은 밥 우드워드가 쓴 『부시는 전쟁중』(Bush At War)과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 그리고 『현실 부정 국가』(State of Denial, 번역 미출간)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미 백악관 수뇌부도 빈 라덴에게 테러를 당하고 후세인을 두들겨 패는 것이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미국인 전반이 '빡이 돌아있는' 상태였고, 그들 스스로도 '빡이 돌아있는' 상태여서, 눈에 보이는 '개새끼'한테 손에 잡히는대로 폭탄을 집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북한과 미국이 치킨게임을 한다. 누가 꿇어야 하나? 당연히 북한이 꿇어야 한다.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김정은이라는 '미친놈' 하나만 생각을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은, 설령 2020년에 오바마가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미국 국민 전부가 '미친놈'처럼 화를 내기 시작하면 전쟁을 할 수 있다. 조지 W. 부시 개인이나 럼즈펠트와 딕 체니가 전쟁광이어서가 아니라, 9/11을 당한 미국인 대부분이 'mad'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3억명의 미국인 전부가 '미친놈'이 되기 전에, 김정은이라는 한 사람의 '미친놈'이 치킨게임에서 져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이라고 그런 일이 벌어지지 못할까? 일단 미국 정부는 북한인의 입국을 모두 막은 상태지만, 한국 여권 들고 미국으로 잠입한 북한 공작원이 무슨 짓을 하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김정은 정권의 목적은 결국 협상이라고? 김정은 정권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많고, 그들 중 누군가는 김정은 정권을 몰락시키기 위해 미국을 자극하는 테러를 감행할 수도 있다. 이건 그냥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9/11도 터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가능할 줄 누가 알았는가?

북한과 미국, 김정은과 트럼프가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김정은이 져야 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치킨게임에서 지느니 그냥 전쟁을 해버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는 '미국'이다. 트럼프라는 개인의 성향이 아니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평범한 시민들'이 전쟁을 결심하면 이라크에 대량학살무기가 있건 없건 그딴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김정은이 제2의 오사마 빈 라덴 취급을 받기 시작하면 한국에 미국인이 얼마나 살건 미국남자니 영국남자니 하는 여행객들이 한국 음식 맛있어요 같은 유튜브 영상을 올리건 말건, 삼성전자 공장이 파괴되면 아이폰 생산에 차질이 생기건 말건, 미국은 전쟁을 할 것이다. 저기 잡아야 할 개새끼들이 있는데 아이폰 다음 세대 출시에 지장이 생길까봐 전쟁을 안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 분위기에 일단 휩쓸리고 나면, 팀 쿡도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많은 미군, 특히 일선에서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사병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학교를 다니거나 졸업하고 대도시에 거주하는 리버럴한 고학력 미국인 말고, 소위 '플라이오버 스테이트' 출신의 십중팔구 트럼프 찍었을 저학력 저소득층 말이다. 2차 대전 이후 미국보다 전쟁 경험이 많은 나라도 흔치 않다. 우리에게는 전쟁이라는 것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생각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 김정은 정권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 '김정은도 미친놈, 트럼프도 미친놈, 에헤야 모르겠다 전쟁은 안된다' 같은 시골 서당 훈장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여권의 주요 지식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 너무도 우려스럽다. 국제 정치와 안보를 다루면서 '미친놈' 전략이니까 고집하는 놈이 '나쁜놈'이라는 식의 논변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아닌 진지한 의견으로 여겨지며 TV를 통해 유포된다. 과연 우리에게는 과연 김정은이나 트럼프를 '미친놈'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긴 한 것인가?

2017-08-09

무궁화 꽃은 지지 않았다?

탈원전과 핵잠수함, 쌀밥과 파스타

유럽 선진국들이 앞장선다는 그 '탈핵'. 특히 대대적인 탈핵 실험을 진행중인 독일이 많이 거론되며, 스위스도 가끔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그 나라들이 가진 공통점에 대해 국내 언론은 따로 언급하지 않는 듯하다.

독일도 그렇고 스위스도 그렇고, 탈원전을 선포하고 시행하는 나라들은 핵잠수함 도입 같은 소리를 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사방이 내륙인 스위스야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한때 U-보트로 영국과 미국의 해군을 쩔쩔매게 만들었던 독일 역시 핵잠수함 따위 잊어버린지 오래다. 왜냐하면, 내가 지난 글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핵잠수함이란 가압형 경수로를 탑재한 잠수함이기 때문이다. 즉, 탈핵과 핵잠수함 도입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은 탄수화물 줄이기 위해 쌀밥 끊고 파스타 먹겠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라는 게 있습니다

지난 글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거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어때서?'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완전히 주제파악을 못하는 소리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대중적 인식과 청와대의 의사 결정 수준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핵잠수함을 보유한 나라, 그리고 핵폭탄을 가지고 있는 나라 사이에는 놀라운 유사성이 있다. 그것을 대략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핵잠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핵탄 보유국: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NPT 공인)
핵탄 보유 선언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
핵탄 보유 추정국: 이스라엘

뭔가 느낌이 오지 않는가? 그렇다. 핵확산금지조약(NPT)상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다섯 나라는 모두 핵잠수함도 가지고 있다. 그 나라들은 동시에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퀴즈.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은 어떤 나라들일까?

정답: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아주 간단한 문제다. 왜 어떤 나라는 핵을 가져도 되고 어떤 나라는 플루토늄을 재처리하는지 아닌지 감시를 당해야 하는가? 인류가 마지막으로 겪은 전면적 국제전에서 만들어진 세계 질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저 질서를 이겨내고 싶다면, 인도나 파키스탄 혹은 북한처럼 국제적 고립과 제재를 감수하고 NPT에서 탈퇴해가면서 핵무기를 만들거나, 3차 세계대전을 벌인 후 이기는 수밖에 없다.

반면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고사하고 패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였던 나라다. 심지어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 식자층은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도 몰랐기 때문에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타령을 하고 있었다.

여수에서 돈 자랑하지 말고, 미국 앞에서 핵무기 타령하지 말라

핵무기 보유의 국제정치학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한국이 돈 좀 벌고 어깨에 힘 좀 들어갔다고 '우리도 핵잠수함 좀 가지면 안 되나?'라고 하는 행동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에 어떻게 보일까? 아파트 한 채 샀다가 값 올랐다고 수백억 수천억 부자들 앞에서 돈자랑하고 '나 무시하냐?' 이러는 강남 중산층처럼 보이지 않을까?

주제 파악을 좀 하고 살자는 소리다. 우리는 기껏해야 세계 10위권에 속하는 경제력을 갖춘 나라고, 그나마 1인당 구매력 기준으로 놓고 보면 선진국 클럽에 들어가기에는 체급이 딸리는, 태평양 북서쪽에 붙은 자그마한 사실상의 섬나라일 뿐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좀 팔리고 싸이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히트 치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나 싶은데, 현재 대한민국은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강국의 반열에 들 수가 없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렇게 공개적으로 핵무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나라들이, 최소 20%에서 최대 90% 이상 농축한 우라늄-235을 연료로 쓰는 가압형 경수로를 잠수함에 탑재하면, 그게 바로 핵잠수함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핵잠수함을 개발하고 운용한다는 것은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도 돈 좀 벌었으니까 어깨에 힘 좀 주겠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구나 싶다.

군용 원자력 잠수함이지만 군사 목적의 원자력은 아니라구요

핵잠수함은 원자력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무기다. 원자력 잠수함이 연료 보급 없이 긴 시간 작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우라늄-235를 농축시켜야 한다. 핵탄두를 만드는 것과 원자력 잠수함 연료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행동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핵탄두를 가질 수 없는 나라는 공개적으로 핵잠수함을 가질 수도 없다. 그리고 201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북한 핑계를 대면 우리가 핵탄두(와 유사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국제 사회가 용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다.

핵을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단지 추진력으로 사용할 뿐이니 괜찮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를 막론하고 보이는데, 한미원자력협정에 규정된 바에 따르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 제13조를 읽어보자.

제13조
폭발 또는 군사적 적용 금지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및 구성품과 이 협정에 따라 이전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에 이용되었거나 이러한 핵물질, 감속재 물질, 장비 또는 구성품의 이용을 통하여 생산된 모든 핵물질, 감속재 물질, 또는 부산 물질은 ①핵무기 또는 어떠한 ②핵폭발 장치, 어떠한 ③핵폭발 장치의 연구 또는 개발이나 어떠한 ④군사적 목적을 위해서도 이용되지 아니한다.

해군과 정부, 그리고 청와대 및 야권의 핵무장론자들은 우리가 잠수함에 탑재하는 것이 핵폭탄이 아니라 원자로일 뿐이므로 괜찮다고 주장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위 조항의 문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그렇게 폭발하는 방사성 물질과 그 연구 개발은 ①에서 ③까지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지적되어 있다. 그리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을 터뜨리지 않고 사용하는 군사적 활용'은 ④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군용 잠수함은 군사적 목적으로 움직인다. 군함이기 때문이다. 그 잠수함에 들어가는 원자로가 ④의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대놓고 한미원자력협정을 어기겠다는 소리를 지금 대통령 포함 해군과 정치권에서 마구 하는 중이다. 한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한다던 사람들 중 일부는 문 대통령이 각별히 관심을 갖는다니까 핵잠수함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라고 완곡어법을 써가며 옹호한다. 미국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장난하냐?

눈앞의 북핵을 핑계로 언젠가 완성될 비밀 핵개발?

북한의 핵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그러므로 북한의 미사일이 한반도에 떨어지기 전에 격추시키는 종말고고도지역방어시스템, 즉 사드(THAAD)가 필요하다. 이미 '임시 배치'되어 있지만 몇 기 더 배치되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북한이 우리에게 핵을 쏜다면 즉각적으로 되갚아줄 수 있다는 확실한 위협 수단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선택은 자체적인 핵무장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동맹에 입각해 미국의 전략핵무기를 다시 한반도에 배치하는 것이다.

북한 핵미사일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해보지도 않은 '자체 핵개발'을 대응책으로 제시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태의 심각성을 도외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배치할 수 있고, 확실히 날아가서 터진다고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미국의 전술핵 배치야말로 '대북 억제력'으로서 유의미하다. 원자력 잠수함을 설령 몰래 만든다 한들 그걸 언제 완성할 것인가? 핵잠수함을 국제 사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들어서 몰래 실전 배치하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북한의 핵미사일에 대한 억지력이 필요하면 한미동맹에 기반해 미국의 전략핵을 배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대응이다. 그러나 '주체적 핵개발' 좋아하는 민족주의자들은,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미국의 핵무기를 놓자고 하면 또 드러눕고 난리 피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원자력 잠수함 추진에 대해서는 별 말 없던 온갖 '평화 지킴이'들이 드러눕고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말이다.

무궁화 버섯구름을 피워올리고 싶다는 군국주의적 열광

자체적 혹은 '주체적'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1990년대, 한국 사회가 소소하지만 나름대로 '버블 호황기' 비슷한 것을 누리던 시절, 상업화된 민족주의적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부터 퍼져나간 군국주의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박정희에 대한 복고풍 열광이 몰아닥쳤는데,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핵무장마저도 '재평가'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핵무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긍정적 인식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자는 뜻이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데프콘』 같은 대중적 소설이 우리 사회에 심어놓은 군국주의적 열광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 핵무기를 개발하고 그걸 일본에게 쏜다 해서 한국이 선진국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모든 국민의 삶은 군국주의로 인해 피폐해질 것이다. 마치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인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삶도 황폐해졌듯이 말이다.

무궁화 꽃은 피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풍요는 원자폭탄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마찬가지로 원자폭탄으로 향하는 첫 단추인 원자력 잠수함에 집착하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줄 필요가 없다.

핵폭탄이 아닌 평화와 번영의 무궁화 꽃을

정부는 원전 폐로 등에 연구를 집중하고 소형모듈원전 등 차세대 원전의 개발을 뒷전으로 미룰 태세다. 그런데 원자력 잠수함에 들어가는 선박용 원자로는 만들고 싶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정도가 있는 법 아닌가. 원자력 잠수함을 정 만들고 싶다면, 민간용 원자력선인 무츠를 만들어서 기술과 노하우를 습득했던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한국에 새 정부가 들어서더니 다짜고짜 '탈핵합니다! 그런데 핵잠수함 만들고 싶다 핵 핵핵핵' 하는데 미국이 대체 왜 한미원자력협정을 바꿔준단 말인가? '사우스와 노스 모두 코리아는 핵에 미쳤군'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핵폭탄을 가진 가난한 나라. 북한이다.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그런 미래를 거부해야 한다. 신고리 5, 6호기는 마저 짓고, 4세대 원전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자체 핵무기에 대한 집착은 깨끗하게 접는 모습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도록 하자. 그것이 평화와 번영의 길이다.

2017-08-06

발전소, 잠수함, 핵탄두

'탈핵'을 선언하고 착공한 원자력 발전소의 공사를 멈춘 나라가 있다. 그런데 그 나라는 한 차례 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휴전'중인 적국에서 핵탄두와 미사일을 개발하는 안보 위협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응으로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고 한다. 2017년 8월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3자의 시각으로 생각해보자. 원자력 발전소를 짓겠다고 대통령이 선언하고 국내에서 설왕설래가 오가는 가운데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겠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 원자력 잠수함이 핵탄두를 가진 미사일에 대한 대응책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의아한 소리이긴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핵탄두를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원자력 발전에 대한 몰이해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땅 위의 경수로는 반대, 물 속의 경수로는 찬성?

월성 1, 2, 3, 4호기를 제외하고 나면 현재 건설되어 있는 모든 발전용 원자로는 가압경수로다. 그런데 원자로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최초의 가압경수로는 미 해군에 의해 개발되었고,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호에 탑재되었다. 원자로와 직접 닿는 고압의 냉각수가 열교환기를 통해 2차 계통의 물에 열을 전달한다. 그렇게 발생된 증기로 발전기를 돌리면 가압경수로가 된다. 반면 그 증기로 잠수함의 스크류를 작동시키면 원자력 잠수함인 것이다(프랑스에서는 원자로로 발전을 하여 그 전기를 이용해 추진력을 얻는 형태의 원자력 잠수함도 운용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 가동중인 발전용 원자로 중 대다수는 원자력 잠수함에 실리는 원자로와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렇다면, '탈핵'이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건설중인 가압경수로 원전의 공사를 멈추면서, 똑같이 가압경수로가 들어가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하자는 논의를 하는 정부는, 원자력의 안전성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땅 위에 건설된 원자력 발전소는 비행기가 들이받아도 꿈쩍하지 않는 철근 콘크리트와 철판 등으로 차폐벽을 둘러싼다. 애초에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 바깥에 건설되어 있으며 ('임시 배치'된) 사드에 의해 보호받는다. 반면 원자력 잠수함은 군사 작전에 투입되는 함정이기에,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가능성을 늘 안고 있다. 위험성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원자로'를 줄이겠다고, 없애겠다고, 짓던 것도 안 만들겠다고 '탈핵 선언'을 한 대통령이, 어떻게 동시에 '원자로'를 바닷속에 풀어놓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한반도에서 발생한 적도 없는 진도 7.0의 강진이 정확히 원자력 발전소를 강타할 가능성을 운운하는 환경주의자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이 도입하겠다는 원자력 잠수함이 북한의 어뢰나 기뢰에 맞아 폭파될 가능성은 두려워하지 않는 걸까(심지어 러시아의 핵잠수함 쿠르스크 호는 딱히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데도 관리가 부실했던 어뢰의 폭발로 침몰한 바 있다). 과연 우리는 최소한의 상식적 기준을 가진 상태로 '탈핵' 논의를 하고 있긴 한 걸까.


군사용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니?

북한이 핵탄두를 개발했다는 이유로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겠다는 논리는 더더욱 이상하다. 북한의 핵개발이 문제인 이유는 원자폭탄을 보유한 국가의 숫자와 핵탄두의 수량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국제적 합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015년 개정된 한미원자력협정에 따라 우리는 우라늄-235를 20%미만까지 농축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당연한 전제 조건이 따라붙는데, 그것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니 원자력 잠수함을 만들어도 그것은 평화적 이용이다'라는, 딱 들어도 세계가 납득할 리 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일부에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핵잠수함에서 사용하는 저농축우라늄(우라늄 235 동위원소가 20퍼센트 미만)을 생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지낸 원유철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는 "군사적 목적으로는 (핵)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하는 차원이고 우라늄 농축의 20% 이하는 잠수함을 움직이는 발전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협상을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어떠한 군사적 목적도 포함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군사적 목적' 문구 해석을 놓고 양국이 상당 기간 갈등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핵잠수함은 핵무기가 아니고 핵연료로 추진하는 잠수함일 뿐"이란 논리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란 얘기다.

강기헌, "한국형 핵잠수함 가능한가…기술력은 충분, 안정적인 핵연료 확보가 관건", 중앙일보, 2016년 8월 30일. http://news.joins.com/article/20523425

핵잠수함을 만들면서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규정상 비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사용은 핵사찰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원자력 잠수함을 '비군사적'이라고 우기고 있다면, 은밀함이 생명인 원자력 잠수함에 대해 IAEA의 핵사찰을 허용해야 한다. 같은 기사를 좀 더 인용해보자.

IAEA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라도 원자력 관련 시설을 사찰할 수 있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이런 상황까지도 펼쳐질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사전 통보 없이 IAEA 직원이 한국을 찾아온다.
"핵잠수함 핵연료 전용에 대해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잠수함이 어디에 있나요?"(IAEA 직원)
"글쎄 그걸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해군)
핵연료 사찰을 거부하는 건 IAEA 규정 위반이다. 그렇다고 사찰을 받아들여 핵잠수함의 위치가 노출된다면 '은밀성'이 깨지게 된다.

문재인 정권은 자체적 핵무장을 추진하는가?

반대로 군사적 목적임을 솔직하게 밝힌다면 IAEA의 핵사찰을 받지는 않겠지만 한미원자력협정 위반이다. 그러한 행위는 북한만 몰래 핵개발 하는 '불량국가'인 줄 알았던 전 세계인들에게 큰 감동을 줄 것이다. 이미 2004년, 노무현 정권 시절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두고 논의가 오갈 때, 지적되었던 부분이다.

결국 한국이 저농축이든 고농축이든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하는 잠수함을 추진한다는 것은 단순한 ‘해군력 강화’가 아니라 그대로 ‘핵무장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물질 보유량이 얼마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북한 핵 위기’가 일어났듯, 한국의 핵잠수함 추진은 ‘남한 핵 위기’로 비화될 공산이 크다. 이쯤 되면 비핵화선언은 신경 쓸 거리도 못 된다.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1990년대 이후의 모든 논의는 한국의 핵잠수함을 둘러싸고 그대로 반복될 수 있다. 한국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의혹 국가 명단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중국은 물론 미국 입장에서도 핵무장은 동맹 파기를 고려할 만한 사안. UN 안전보장이사회가 한국에 대한 제재를 결의할 수도 있다. 이 경우 한국이 입게 될 정치·경제·안보적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할 것이다.

황일도, "한국 핵잠수함 보유, 무엇이 문제인가", 신동아, 2004년 3월호. http://shindonga.donga.com/3/all/13/103221/3

북한이 핵무장을 하고 있으므로 우리도 핵잠수함을 만들겠다는 소리는, 북한이 국제 사회의 문제아니까 우리도 문제아가 되고야 말겠다는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석하지 않기를 기대한다면 제정신이 아닌 것이고, 그렇게 해석할 것을 알면서도 원자력 잠수함 도입을 운운한다면 그거야말로 '핵무기 마피아'의 일원임을 자백하는 꼴이다.

문제는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원자력 정책의 방향이 바로 그렇다는 데 있다. 평화적 목적으로 쓰이고 있고, 그럴 수밖에 없는 신고리 5, 6호기는 짓다가 말고 공론화를 벌인다. 그러면서 군사적 목적일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한다고 분위기를 띄우면서, 결국 자체 핵무장을 하겠다는 속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토록 한다. 아니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렇게 해석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북한의 핵무기보다 한국의 원전이 위험하다는 사람들

북한은 자타공인 국제 사회의 골칫거리다. 주민들이 굶주리고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핵무기를 개발해왔고 이제 완전한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민주주의는 고사하고 내부 엘리트들도 치를 떠는 공포정치로 체제를 유지한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 북한에 원유 등 핵심적인 자원을 제공하고 무역을 통해 달러를 공급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은 최근에만도 연평도 포격, 천안함 피습 사건, 연평해전 등을 저지른 바 있다. 그들 말로는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원한다고 할 뿐이지만, 지속적으로 한국의 재산 및 군인과 민간인들을 공격해왔다. 아직도 북한에는 납치되어 구금된 일본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핵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북핵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한다. 사람을 죽이고 해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무기'를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집단의 손에 핵탄두가 들려있지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것 같다.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미국이 북한을 몰아세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핵개발을 했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긴 하니 일단 사실로서 인정하긴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들 가운데 문재인 정권의 탈핵 선언과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에 반대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핵무기는 위험하다. 특히 위험한 사람들의 손에 들어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위험하다. 반면 원자력 발전소는 위험하지 않다.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면 이는 너무도 명백하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조사에 따라 1조킬로와트시(kWhr)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사망자가 나오는 비율을 따져보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석탄(세계 평균) 10만 명.
천연가스 4천명.
태양광(지붕 설치) 440명.
수력(세계 평균) 1400명.
원자력(세계 평균) 90명(체르노빌, 후쿠시마 포함).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최악의 원전 참사'를 다 더해도, 원자력 발전은 지붕에 설치하는 친환경 태양광 발전보다 안전하다. 후쿠시마와 체르노빌을 제외하고 미국 내에서의 사망자만을 꼽는다면, 1조kWhr의 전력을 생산할 때 0.1명이 사망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안전한 전력 공급원은 원자력이다. (출처: James Conca, "How Deadly Is Your Kilowatt? We Rank The Killer Energy Sources", Forbes, 2012년 6월 10일. https://www.forbes.com/sites/jamesconca/2012/06/10/energys-deathprint-a-price-always-paid/#2398b939709b)

그런데 대체 왜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로 행동할까? 가장 안전한 발전 수단인 원자력은 위험하다고 '탈핵'하자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핵무장으로 향하는 첫 걸음으로 지목될 수밖에 없는 원자력 잠수함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의가 대체 무엇일까? 가장 안전하고 깨끗한 평화의 원자력을 버리고, 위험하고 가난하며 고통스러운 자체 핵무장과 국제적 고립의 길로 향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칼을 쳐서 보습을, 핵탄두를 연소시켜 발전을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폭발시켜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니다. 핵탄두를 없애버리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원자로에 넣어서 연소시켜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농축된 우라늄-235 혹은 플루토늄-239를 원자로에 넣고 천천히 분열시킴으로써, 모두에게 유익한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핵탄두 해체인 것이다. 성경 구절에 나오듯,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미가 4:03)드는 평화의 이상 그 자체다.

실제로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현재 생산중인 전력 중 10% 가량이 노후된 핵탄두를 연료로 삼아 나오고 있다. 그 많은 핵무기를 다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일이고, 아무 이유 없이 터뜨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의 핵탄두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도 이와 같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북한이 핵을 개발해놓으면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어 '민족의 힘'을 보여준다는 망상이 넘쳐났지만, 그것은 한낱 망상일 뿐이다.

우리는 북한이 아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중요한 플레이어이며 세계 10대 규모의 교역 국가다. 만약 대한민국의 손에 북한의 핵탄두가 들어온다면, 그것이 들어갈 곳은 오직 원자로 뿐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평화적 목적의 발전용 원자로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이 유명한 사진을 보자. 평화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발전소를 지어줘도 냉각탑을 폭파시켰던 북한은, 밤이 되면 불이 켜지지 않는 암흑의 국가다. 반면 우리는 일본보다 먼저 원자력공학과를 개설하고,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온 평화의 원자력 국가다. 이 차이가 바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다. 원자력이라는 자연에 존재하는 에너지를, 무기로 쓰느냐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쓰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오늘이 이토록 달라진 것이다.

북한의 핵탄두가 원자력 발전소의 연료로 사용하는 그날, 북핵 문제는 궁극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현 정부는 정 반대의 원자력 정책을 펴고 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를 경계하라

고리1호기를 방사능 괴물이라도 되는 양 쫓아내며 문재인 대통령은 자뭇 비장한 표정으로 '탈핵'을 깜짝 선언해버렸다. 수십년 간 우리 산업과 가정의 에너지를 책임져온 솥단지를 다 부숴버리겠다고 선포한 셈이다. 그러더니 북한을 핑계로 대신 칼과 창을 만들겠다고, 누가 봐도 핵무기를 만들기 위한 전초 단계인 원자력 잠수함 건설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현 정권의 탈핵 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은 원자력 발전을 옹호하는 이들을 향해 '원전 마피아'라고 손가락질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원전 마피아'가 아니라 '핵무장 마피아'들 아닌가?

양자는 줄곧 혼용되어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시피, 분명히 다르다. 나는 원자력 발전소를 더 발전시키고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의 자체적 핵무장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은 원자력 발전소를 모두 없애되 원자력 잠수함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옹호하는 이들을 '원전 마피아'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해방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누려온 평화와 경제 성장은 전승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국제 질서와 자유무역에 힘입은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없던 나라를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냈다. 반면 북한은 90년대 이후 핵무기를 만들어 체제 보장을 받기 위해 골몰했고 지금껏 불량국가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체 왜 2017년의 대한민국 정부는 원자력 발전을 내던지고 핵무기를 손에 들려고 하는가? 왜 성공적이었던 평화의 길을 벗어나 북한과 같은 경로를 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불러일으키는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더니, 그 통일을 이루는 방식으로 하향평준화를 택한 것인가?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현 정부의 탈핵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원자력 잠수함을 꼭 만들어야만 한다는 그 '농축 우라늄 중독 증상'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우리에게 번영을 가져다준 것은 원자력 발전소이지 핵탄두가 아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고, 핵탄두를 원자로에 넣어 전기를 뽑아내자. 우리가 가야 할 평화로운 번영의 길이 바로 거기에 있다.

2017-07-28

스스로 생각하는 환경주의: 가이아 이론과 홀 어스 카탈로그

책을 쓰는 사람, 책을 외우는 사람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 있을까? 본인 스스로 자료를 모으고 고민하여 판단한 사람은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무슨 이유로 어떤 결정이 내려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남이 한 이야기를 녹음기처럼 되풀이하고 있을 뿐인 사람들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생각을 바꾸지 못한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어떤 '경전'을 잘 외우고 지키는 것만이 지상 과제일 뿐이다.

중국의 주자학이 조선에 넘어왔을 때 벌어졌던 일이 바로 그렇다. 주자학은 중국 내에서 지배 이념의 자리를 잠시 차지했지만 얼마 후 부흥한 양명학의 비판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의 지적 흐름도 그에 따라 변했다. 그리고 중국의 학문은 고증학으로 넘어가, 청 제국의 말기에 이르면 유교 문헌에 대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판적인 문헌 비평이 출현하기에 이른다.

반면 그 중국 고전을 얼마나 잘 외우고 있느냐로 정치적 투쟁을 벌이던 조선의 상황은 완전히 달랐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행'이 끝난 주자학의 해석을 놓고 당쟁을 벌이고 지배 계급끼리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조선 밖의 세상에서는 해상 국제 무역이 출현하고 일본 및 중국은 서구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을 때, 우리는 '옛날 책'을 놓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셸런버거? 그게 누군데?'

스스로 생각한 자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탈핵이 아니라 더 많은 원자력 발전을 요구하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를 되짚어보며 자꾸 곱씹게 되는 말이다.

미국의 환경 단체 '환경 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마이클 셸런버거 대표가 문재인 정부를 향해 탈핵 정책을 철회해달라는 공개 서한을 보내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및 기고를 통해 한국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부터 생각해보자. 적지 않은 문재인 정권 지지자, 네티즌, 그리고 환경단체 운동가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마이클 셸런버거? 저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은 누군데?

이러한 태도 자체가 '주체적'인 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말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따져보는 것이 상식적인 대응일 것이기 때문이다. 셸런버거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에 의해 2008년 '환경 영웅'으로 선정되었다는 사실도, 그와 함께 서명을 한 인물들 중 온실가스 감축 운동의 선봉장인 미 항공우주국(NASA)출신 기상학자 제임스 핸슨(James Hansen)가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조차, '너는 듣보잡이고 환경운동가가 아니라 핵발전소 옹호론자일 뿐이다'라는 편견의 벽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버렸을 뿐이다. 세상 그 누구보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함께하고 있음에도,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는 가차없이 '듣보잡' 취급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로 널리 알려진 스티븐 핑커 역시 해당 공개 서한의 서명자 중 한 사람이다. 객관적인 숫자와 자료에 입각해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고 고민하며 해답을 찾으려는 이들은 이미 맹목적인 반핵 운동을 접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늘리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는 한 사례다.


원자력 발전: 가이아 여신을 위하여

실제로 많은 환경주의자들이 현재 원자력 발전을 더 개발하고, 그 이용을 확대하고, 미래를 향한 징검다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중에는 일반적인 독자들에게 생소한 이름도 있고, 다들 너무도 잘 아는 이름이기에 깜짝 놀랄 사람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부터 꼽아보도록 하자.

'가이아 이론'. 다들 들어봤을 것이다. 정규 교육 교과서에 나오는 개념이니 말이다. 지구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로 간주하고 그 생명체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다는 발상으로,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이 1972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임스 러브록은 2004년, 영국의 신문 〈인디팬던트〉(Independent)에 한 편의 기념비적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제임스 러브록: 원자력 에너지는 유일한 친환경 해법이다(James Lovelock: Nuclear power is the only green solution)

러브록의 주장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하다. 기후 변화가 초래할 엄청난 재앙을 고려해볼 때,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우고 있는 것은 자살행위라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은 24시간 돌아가는 기저전력을 공급하며, 발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고, 폐기물의 양도 석탄에 비해 훨씬 적다. 따라서 기후 변화의 재앙 앞에 직면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이 칼럼이 공개된 후 세계의 환경주의자들은 발칵 뒤집어졌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관의 창조주 가운데 한 사람이,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핵심 교리 중 하나를 부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것을 계속 믿기로 했다. 제임스 러브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절대선으로 여기는 대다수 환경주의자들의 관성적 사고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

그러한 고정관념에 다시 한 번 돌을 던진 사람이 등장했다. 영국의 환경운동가이며 저술가인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가 그 주인공이다. 국내에도 『도둑맞은 세계화』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그는, 2011년 4월 5일 영미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진보 언론 〈가디언〉(The Guardian)의 지면을 통해 환경주의자들의 격분을 자아내는 칼럼을 발표한다.

"반핵 로비 단체들이 우리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The unpalatable truth is that the anti-nuclear lobby has misled us all)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그는 반핵 로비 단체들이 과장하고 부풀려온 대표적인 사례로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자 수를 지적한다. 탈핵론자들은 수십만 명이 죽었다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다. 하지만 진실은, 핵방사능 효과에 관한 과학위원회(UNSCEAR, United Nations Scientific Committee on the Effects of Atomic Radiation)의 보고서에 따르면,

Of the workers who tried to contain the emergency at Chernobyl, 134 suffered acute radiation syndrome; 28 died soon afterwards. Nineteen others died later, but generally not from diseases associated with radiation. The remaining 87 have suffered other complications, including four cases of solid cancer and two of leukaemia.
체르노빌 원전을 봉쇄하기 위해 투입된 인부 중 134명이 즉각적인 방사능 피폭의 영향을 받았다. 28명이 곧 사망했다. 19명이 추후 목숨을 잃었지만, 대체로 방사능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나머지 87명은 그 외의 복합적 증세를 겪었는데, 네 명은 고형암(solid cancer)에 걸렸고 두 명이 백혈병에 걸렸다.

방사능이 위험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즉각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노출되려면, 격납 용기도 없이 폭발한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정도의 일을 감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방사능의 위험에 대한 우리의 사고 체계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수십년에 걸쳐 계속 그러한 오해를 증폭시키며, 자기들끼리 인용하여, '상식'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후쿠시마를 보라고! 당신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많은 국내의 환경주의자들과 그들이 증폭시키는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시민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지 몬비오는, 심지어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지 고작 열흘이 지난 시점, 역시 〈가디언〉을 통해 (적어도 내 생각에는) 정론을 말했다. "왜 후쿠시마는 내가 근심을 멈추고 원자력 발전을 사랑하도록 하였는가"(Why Fukushima made me stop worrying and love nuclear power)의 마지막 문단이다.

Yes, I still loathe the liars who run the nuclear industry. Yes, I would prefer to see the entire sector shut down, if there were harmless alternatives. But there are no ideal solutions. Every energy technology carries a cost; so does the absence of energy technologies. Atomic energy has just been subjected to one of the harshest of possible tests, and the impact on people and the planet has been small. The crisis at Fukushima has converted me to the cause of nuclear power.
그렇다, 나는 여전히 원자력 업계의 거짓말쟁이들을 혐오한다. 그렇다, 만약 무해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나는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상적인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 기술에는 댓가가 따른다. 에너지 기술의 부재에도 댓가가 따르고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는 가장 가혹한 시험 중 하나에 직면하였지만, 그것이 사람들과 지구에 미치는 영향은 작았다. 후쿠시마 사태는 나를 원자력 발전의 옹호자로 개종시켰다.

물론 그 사고로 인해 많은 이들이 대피해야 했다. 지금도 후쿠시마 원전과 아주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수십만의 이주민은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 아니라 쓰나미 때문에 발생한 것이며, 방사능의 누출 그 자체로 발생한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최근 인기 예능 〈알쓸신잡〉에서 이른바 '어용 지식인' 유시민 작가도 유포했던, "방사능 누출 사고 이후 일본국민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이 죽었다"는 말은, 지진 및 쓰나미 피해자와 원전 사고 피해자를 구분하지도 못하는, 혹은 구분하지 않는, 거짓말일 뿐이다.


환경주의자들의 '선택적' 공감과 우려

반면 화력발전소의 경우에는 특별한 지진이나 지진해일 등의 재난이 없더라도 꾸준히 사망자가 발생한다. 계속해서 연료를 투입하고 폐기물을 제거하는 등 사람이 개입해야 할 작업의 양이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가령 2016년 2월 현재, 태안화력발전소의 경우 2011년부터 5년간 각종 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화력발전소의 환경적 위험 뿐 아니라 작업자들의 위험 역시 모른다. 환경주의의 공포 마케팅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소에서 일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사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6도의 멸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환경운동가 마크 라이너스(Mark Lynas)역시 원자력 발전을 적극 활용해야 기후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기후 변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6도의 멸종』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지구의 평균 기온이 지금보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높았던 시점을 연구한 고고학/고생물학 논문들을 전부 뒤지고 스크랩하여, 우리가 다가올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이 펼쳐질지 설득력있게 제시한 바 있다.

지구기온이 4℃ 상승하면, 해수면이 0.5미터 이상 높아지면서 이 대도시도 긴 수명을 다할 것이다. 오늘날도 도시의 상당 부분이 해수면보다 낮다. 21세기 후반에는 치명적인 침수가 시작될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이 했던 연구에 따르면, 2050년이면 해수면이 50센티미터 올라가 150만 명이 살던 곳을 버려야 하며, 350억 달러의 피해가 날 것이라고 한다. 나일 강 삼각주의 넓은 지역이 바다에 잠기면 로제타나 포트사이드 같은 도시의 시민 수백만 명도 집을 떠나야 한다.[204-205쪽]

이와 같은 재앙을 피하는 방법, 피하지 못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은, 탄소 배출을 급격하게 줄이는 것 뿐이다. 그러자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는 없다. 너무도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환경주의'에 흡착되어버린 '탈핵'의 망령의 힘이 너무도 거세다. 더욱 끔찍한 것은, 해외에서는 스스로 생각하고 비판하여 입장을 변경한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일종의 교조적 이념이 되어버린 환경주의가 국가 정책을 뒤흔들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와 히피들의 구루, 원전 전도사 되다

무조건적인 탈핵이라는 이념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얼마나 무섭냐 하면, '환경주의'라는 것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반박하는데도 사람들이 듣지 않을만큼 완강하다. 공자가 직접 나타나서 논어를 다시 해석해주는데도 조선의 유생들이 '그것은 진정한 공자의 뜻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010년 2월, TED 토론에서의 일이다.

나는 실제로 그 잡지를 본 적 없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 때문에, 한국의 식자층들 중 많은 이들은 〈홀 어스 카탈로그〉(Whole Earth Catalog)라는 이름을 알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바로 그 잡지, 환경주의와 히피즘의 원류라는 바로 그 잡지 말이다. 그리고 그 잡지를 창간한 환경주의의 대부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고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 1968년 〈홀 어스 카탈로그〉를 창간했던 스튜어트 브랜드가 2000년대에 원자력 발전을 옹호한다. 반면 그렇게 태어난 환경주의를 책으로 공부하거나 귀동냥으로 듣거나 그저 막연한 불안감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일단 원전을 없애고 봐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보다 더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토론을 볼 필요가 있다. 스튜어트 브랜드와 그의 논적으로 등장한 마크 제이 제이콥슨은 모두 탄소 변화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모색한다. 나는 당연히 스튜어트 브랜드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주장 가운데 '풍력 발전이 차지하는 면적이 매우 좁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다. 풍력발전기는 단지 막대가 꽂힐 땅만 차지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돌아감으로써 조류들을 죽이고 소음을 유발하는 공해 원인이기도 하니 말이다.


탈핵론자들의 공포 마케팅, 청와대를 홀리다

아무튼 '원자력 발전'과 '핵폭탄'을 동치시키는 공포 마케팅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얼마나 강력하냐하면, 스튜어트 브랜드와 마크 제이 제이콥슨의 토론에서 처음에는 75:25로 원자력 발전의 손을 들어주었던 청중들의 태도가 바뀌어 65:35로 변하게 만들 정도로, '공포'는 힘이 세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 가운데 10%는 오히려 핵탄두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다고, 다시 말해 원자력 발전은 핵무기의 생산이 아니라 해체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해도, 이미 들쑤셔진 '공포 마케팅'은 잠들지 않는다.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의 한계는 명확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국내 언론을 통해서도 지적하고 있다. 구름에 해가 가리면 발전이 안 되는 태양광, 바람이 멈추면 발전이 안 되는 풍력만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수급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에게는 24시간 내내 돌아가는 발전기가 필요한데, 지형의 한계상 수력 발전으로 그것을 충당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선택은 화력 아니면 원자력 뿐이다. 그리고 둘 중 더 '환경적'인 선택은 당연히 원자력이고 말이다.

환경주의자는 당연히 원자력에 반대해야 한다는 어떤 관념이 있다. 그 관념은 심지어 '유령'도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있고, 굉장히 힘이 세다. 얼마나 힘이 세냐면 환경주의의 창시자가 입장을 바꿔도 대중들이 설득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러나 한국과 달리 미국,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는 서서히 원자력에 대한 입장이 달라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는 환경주의자들이 원자력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원자력을 완전히 포기해버리면 인류에게 100년 후의 미래는 없거나, 매우 불투명하다. 선각자들은 일찌감치 경고를 시작했고, 지난번에 언급한 빌 게이츠처럼, 그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공포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기

나는 기후 변화의 영향을 걱정하는 사람이지만, '환경주의자'라고 할만한 어떤 활동 내역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해외의 환경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에 늘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왔으며, 그 논의를 이해하고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면에서 나름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맹목적인 탈핵론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있다고 말이다.

앞서 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반복해보자.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만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다. 반면 남이 했던 주장을 그대로 주워섬기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다. 그 입장을 바꾸는 순간 본인의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환경주의자들은, 진보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날로 심각해져가는 기후 변화 앞에, 그리고 한국의 좁은 땅이라는 선천적 한계 및 기저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태양광 및 풍력의 태생적 제약에 대해, 그들은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는가. 그저 〈녹색평론〉을 비롯한 몇몇 환경주의자들만의 회람 목록에서 맴돌고 있을 뿐 아닌가. 우리는 과연 〈판도라〉라는 영화 한 편이 나라의 미래와 관련된 논의를 뒤흔들도록 내버려둬도 괜찮은 것인가.

탈핵 중심의 환경 운동을 만든 사람들은 이미 그 생각을 버렸다. 우리가 그 고정관념에 묶여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스스로 생각하자. 그래야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

2017-07-21

미래 세대를 위한 에너지 정책

미래 세대를 위한 탈핵?

'미래 세대를 위해 탈핵을 해야 한다!' 탈핵 찬성론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사고가 난다면 그 해악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원전에서 생산되는 핵폐기물은 아주 오랜 시간 남아있을 수밖에 없으니, 미래 세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완전한 탈핵을 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특히 한때 '청년 논객' 소리를 들었던 사람으로서, 나는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탈핵을 주장하는 논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가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해야만 하는 미래가 아니라, 대비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미래를 들이대며, 정작 미래 세대의 앞길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10만년 폐기물이라는 패배주의적 협박

원자력에 대한 공포심을 접어두고 잠깐만 생각을 해보자. 방사성 폐기물이 안전하게 보관되어야만 한다는 시간 10만년. 그것은 얼마나 긴 시간일까? 참고로 현생 인류가 출현한 것은 약 2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10만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적' 단위가 아니다. '고고학적' 혹은 '천문학적' 시간이다.

이 지점에서 원자력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가 순수한 라듐을 추출한 것은 1898년의 일이다. 엔리코 페르미가 최초의 원자로를 개발하여 인공적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것은 1942년. 그리고 지금은 2017년이다. 고작 75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엄청난 과학적 발견과 기술 발전의 속도를 보라. 라듐을 추출한지 44년만에 인류는 핵분열을 인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3년만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70여년만에 독자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나라의 반열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다시 10만년에 대해 생각해보자. 10만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돌도끼로 사냥을 하던 호모 사피엔스는 우라늄-235를 농축시켜 발전도 하고 폭탄도 만들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우리 인류가 10만년이 더 흐르는 동안 멸망하지 않고, 기술 발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계속 지구에 살고 있다면, 과연 그 시점에 방사성 폐기물 따위가 문제거리로 남아있을까?

10만년 운운하는 것은 그러므로 협박이다. 무슨 협박인가? 방사성 폐기물의 문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문제를, 우리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 말이다. 미래 세대를 운운하며 10만년동안 사라지지 않는 폐기물에 대한 공포심만을 자극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협박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빌 게이츠도 '원전 마피아'에게 매수당했다?

하지만 그런 협박에 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마 전 지구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을 0으로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화석 연료를 계속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탄소를 포집할 수도 있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비중을 더 높일 수도 있지만, 그 각각에는 기술적 제약이 존재한다.

포집된 탄소의 부피는 방사성 폐기물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것을 오랜 세월동안 안전하게 보관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태양광과 풍력은 모두 에너지 밀도가 너무 낮아서 굉장히 넓은 땅에 발전기를 깔아야만 하고, 그 자체가 공해 요소가 된다. 결국 좁은 면적에서 많은 전기를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해법은 원자력 뿐이라는 것이 빌 게이츠의 해답이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담아 2010년 2월, TED에서 강연을 했다. 제목은 '제로 탄소를 향한 혁신!'이다. 2050년 인류가 발생시키는 탄소의 양을 0으로 만들려면 원자력 발전의 대 혁신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27분 정도 시간을 내서 강연과 질의응답을 직접 보는 것을 권한다.

빌 게이츠가 말하는 진행파원자로(TWR:Traveling Wave Reactor)는 MIT가 2009년 세계 10대 유망 기술로 선정한 바 있는 '오래된 미래'다. 아이디어가 제시된 것은 1950년대의 일이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현재 사용되는 원자로는 U-235를 분리하여 연료로 사용하는데, 그 분리 과정에서 U-238 혹은 열화우라늄이 발생하고 방사성 폐기물로 처리된다. 반면 진행파원자로는 바로 그 '폐기물'을 연료로 사용한다. 열화우라늄에 증식파(Breeding Wave)를 쏘아서 플루토늄-239로 증식시킨 후, 이후 발생하는 연소파(Burning Wave)를 이용해 Pu-239를 핵분열시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진행파원자로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한번 연료를 넣으면 최장 60년까지 발전소가 가동된다. 플루토늄까지 완전히 연소시키고 나면 남는 폐기물들은 안정적인 비방사성 물질, 그리고 독성이 약해진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양의 방사성 물질들 뿐이다. 그리고 그 폐기물을 그대로 뽑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 60년의 기간 동안 연료를 추가할 필요도 교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로 인한 사고의 위험도 훨씬 적다. 말하자면 꿈의 원자로인 셈이다.

물론 이것은 꿈이다. 아직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고속증식로를 개발한 나라는 여럿 있지만 이런 형태는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빌 게이츠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모든 인류가 풍족하게 에너지를 쓰는 '보편적 에너지 복지'를 누리게 하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2011년 이후에도 빌 게이츠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부호이자 자선사업가이기 이전에 엔지니어이고, 위험에 대응하는 최선의 방법은 기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이라는 진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vs. 빌 게이츠

빌 게이츠의 원자력 발전소. 그리고 대한민국의 탈핵 정책. 두 가지를 놓고 비교해보자. 양쪽 모두 '미래 세대'를 걱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구체적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현재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탈핵 논의는 '하지 말자'고 주저앉는 소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원자력 분야의 전문가는 커녕 그 어떤 과학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진행파원자로가 과연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지, 언제쯤 가능한지, 전혀 확신할 수 없다. 이 글은 진행파원자로라는 특정한 기술을 옹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둔다.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의 탈핵 논의는 과학 이전에 세계관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우리가 얼마나 스스로를 믿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미래의 에너지를 연구하고 개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세상에는, 빌 게이츠처럼, 에너지와 원자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난점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자원과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러므로 방사성 폐기물의 '10만년'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것이다. 적어도 그 반감기가 다 채워지기 전에 말이다. 우리가 '원전 마피아'를 향해 공허한 손가락질이나 하는 동안, 빌 게이츠를 포함해 미래를 직접 만들어가는 사람들은 훨씬 안전하고 깨끗하며 믿음직한 원자로를 개발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당연히 비싸게) 판매할 것이다. 반면 우리는, 10만년이라는 공허한 단위를 놓고 '미래 세대'를 걱정하면서, 정작 미래 세대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로 전락시킬 것이다.

10만년이 아니라 향후 10년부터 걱정하자

지금 우리가 걱정해야 할 단위는 10만년이 아니다. 10년이다. 그리고 100년이다. 지금처럼 온실가스가 배출되고 기후 변화가 임계점을 넘는다면 100년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기후 변화를 막는 것은 그 무엇보다 크고 중요한 전 인류적 과제다.

한편 우리에게는 10년 후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필요도 있다. 지금 당장 기습적으로 탈핵 정책이 추진된다면, 원자력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인력의 수급에도 차질이 빚어진다. 지금 당장은 티가 나지 않겠지만 10년쯤 지나면 다방면으로 그 충격이 밀려오게 된다.

빌 게이츠는 2012년 원전 기술 강국인 대한민국과 4세대 원전 개발에 대해 협의했다. 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2014년 협상이 결렬되었다. 중요한 건 그 시점까지는 우리나라가 빌 게이츠와 미래를 논의할 수 있는 원자력 기술 강국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탈핵 결정 후 10년이 지나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미래 타령을 하면서 정작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의 몫을 빼앗게 된다. 10만년 운운하다가 10년 후의 부와 풍요, 안정된 세상을 놓친다. 100년 후의 기후 변화를 막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이렇게 어리숙하고 한심한 일이 또 있을까? 대체 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대신, 아무 것도 하지 말자고 주저앉으면서 '미래'를 운운하고 있는가?

우리가 미래를 먼저 만들자

현재의 탈핵 논의는 기술과 과학 이전에 세계관의 투쟁이다. 새로운 힘, 물론 두렵지만 통제 가능한 에너지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 의사결정권자들, 환경주의자들과 여당 지지자들은 마치 척화비를 세우고 꽁꽁 문을 걸어잠그던 위정척사파처럼 대응하고 있다. 그것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기회를 날려버리는 동안, 빌 게이츠 뿐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등 원전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은, 우리보다 앞선 에너지원을 확보하여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스스로 가난의 길을 택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10만년 동안 남는 폐기물의 공포에 사로잡히는 대신, 그 폐기물까지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그런 진취적인 미래를, 우리가 먼저 만들자는 말이다.

2017-07-14

한산모시, 세탁기, 에어컨

올 여름 더위는 한산모시로 맞서보자?

2017년 7월 13일, 대한민국 청와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서천군수 출신으로 이날 처음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나소열 자치분권비서관이 눈에 띄자 문 대통령은 '한산모시'를 거론했다." 일종의 스몰 토크일 수도 있겠지만 논의가 전개되는 방식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문 대통령이 ""예전 군수님으로 계실 때 한산모시를 입으셨는데 보기에도 참 좋았다"고 말"하자, "나 비서관은 "모시를 입으면 체감온도가 3도 더 떨어진다고 한다. 대통령님께서도 한산모시를 입으시면 어떠신가"라고 답해 회의장에 웃음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이 '한산모시' 대화는 복선이다. 어떤 복선인가? 현 정부가 기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탈핵 기조에 맞물려, 공공기관 냉방 온도 제한을 민간에까지 확대하고 싶다는 대통령의 심경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이라는 뜻이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문 대통령이 여름철 냉방 온도가 28도에 맞춰져 있는 것을 거론하며 "우리는 28도 지키고 있습니까"라고 묻자, 김수현 사회수석이 "여름철 온도가 28도 넘게 올라가면 자동으로 냉방이 켜지고 내려가면 꺼진다"고 답했다.

이어 문미옥 과학기술보좌관이 "사무실 냉방 온도는 양복을 입고 일하는 남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며 "재킷을 벗는 것이 에너지 절약에 굉장히 좋다는 논문도 있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넥타이만 풀거나 재킷을 벗어도 그렇다. 시민들은 반팔을 입는데 과거 관공서나 은행, 대기업에 반팔 입고 들어가면 추웠다"며 "정부는 28도를 스스로 하면 되는데 민간에는 어떻게 되나"라고 물었다.

김승욱, ""한산모시 입으면 3도 떨어져" 靑 회의서 '무더위나기' 화제", 연합뉴스, 2017년 7월 13일.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7/13/0200000000AKR20170713095500001.HTML

내가 지난 포스트(링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 청와대에서 나온 한산모시 타령은 박정희 시대의 '근검절약', '한 집에 전등 하나 끄기'와 동일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문제는 실제로 그 시대에는 산업용으로 쓰기에도 전기가 모자라던 시점이 있었던 반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가정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면?

다른 모든 판단을 일단 보류해두고, 한 가지 가정법을 도입해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산모시에 대해 스몰토크를 하다가 '공공기관 에어컨 온도 28도를 민간에도 실현할 방법 없느냐'라고 말했다면 여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발칵 뒤집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지금은, 동일한 취지의 발언이 대통령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상대적으로 너무 잠잠하다.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시원하다, 이것은 값비싼 한산모시로 옷을 해 입는 기득권층 외의 모든 사람의 더위 고통을 무시하는 발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지는 옷감인 모시는 가격도 비쌀 뿐더러 재질이 약하기 때문에 바느질하기도 힘들다. 빨래할 때에도 당연히 세탁기에 넣고 돌릴 수 없고, 조심스럽게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야 한다. 그걸 잘 널어서 말리지 않으면 옷감이 상한다. 입을 때에는 그냥 입는 게 아니라 풀을 뿌려서 빳빳하게 다려야 한다. 요컨대 생산 및 관리에 있어서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옷이다.

게다가 그 옷을 입는 사람은 육체노동을 할 수가 없다. 옷감이 너무 섬세하고 약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몸 쓰는 사람이 활동적으로 입으라고 만드는 옷이 아니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시조 읊는 양반님네들을 위한 옷이다. 만들고 관리할 때에는 남의 노동이 들어가고, 입는 사람은 노동하지 않는 옷, 그런 옷을 입자는 말이 농담처럼 회의를 앞두고 오가는 청와대의 풍경이다.


지배층의 한산모시, 피지배층의 에어컨

이것은 대단히 절망적인 일이다. 탈핵 탈원전이라는 추상적 당위를 실현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탈핵 선언을 해버린 청와대에서, 그 무더위에 맞서는 방법으로 농담인 양 슬쩍 한산모시를 운운한다는 것 말이다. 치열하게 머리를 쓰면서, 땀흘려 몸을 움직인 후, 제대로 냉방이 된 곳에서 쉬는 국민들의 모습을 우리의 청와대는 상상하지 못한다. 대신 과거의 지배계층, 세습 귀족들이 입던 노동집약적인 옷감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탈핵에 뒤따를 수밖에 없는 전기 공급 저하에 맞춰 냉방 온도를 높일 것을 민간 영역에까지 넌지시 주문한다. 공개된 사진에 따르면 정작 본인들은 긴팔 옷 입고 있었고, 회의장에 들어올 때까지 재킷까지 걸치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애초에 한산모시는 그런 옷감이 아니다. 남이 빨아주고 다려주고 풀먹여주는 한산모시 입고 공사판에서 삽질을 하거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국 한산모시에 대한 대화는 애초에 더울 일 없는 '윗분들'한테나 통할 소리다.

그런데 그걸 국민들 들으라고, 기업들 들으라고 언론 앞에서 넌지시 흘리고 있다. 이것은 위선이며 기만이다. 게다가 탈핵이라는 당위를 앞세우고 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의 21세기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사림의 대두와 붕당정치'쯤에 해당하는 대목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이것은 에너지 정책 이전에 철학의 문제다. 세계관의 차이다. 무슨 말인지 좀 더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고장난 냉장고에 갇혀버린 '진보'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에너지를 덜 쓰는 것이 과연 '진보'인가? '적극적인 에너지 수요 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이 탈원전론자들의 기본 논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경제 성장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한국 수출 기업들의 경쟁력 중 하나였던 값싼 전기를 포기하더라도, 탈핵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지점이 있다. 물론 산업용 전기가 한국에서 놀라우리만치 저렴한 것은 사실이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방만하게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맞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가정용 전기를 OECD 평균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링크). '에너지 절약'이라는 당위와 누진제로 오랫동안 국민들의 정신을 옥죄어온 탓이다.

그러므로 산업용 전기 이용을 합리화하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민간 영역에서 소비하는 전기 사용량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진다. 탈핵 탈원전주의자들은 당연히 그 또한 줄여야 한다, 혹은 '합리화'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말이다.

행복한 공동체를 원하는가? 재래시장을 살리고 싶은가? 생태문제를 해결하고 싶은가? 가족들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안전하고 싱싱한 식품을 원하는가? 그럼 냉장고를 없애라! 당장 냉장고가 없다고 해보자. 우리 삶은 급격하게 변할 수밖에 없다. 직접 재래시장에 들러서 싱싱한 식품을 사야 한다. 첨가제도 없고, 진공포장 용기에 담겨 있지 않다. 식품을 사가지고 오자마자, 우리는 가급적 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싱싱하다는 것은 금방 부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말이다. 또 우리는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살 것이다. 혹여 어쩔 수 없이 많이 살 수밖에 없었다면, 바로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밖에 없다. “고등어자반을 샀는데요. 조금 드셔보시겠어요.”

강신주,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괴물, 냉장고", 경향신문, 2013년 7월 21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12131165

이런 식의 주장은 환경주의의 탈을 쓴 전근대적 퇴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재 오가는 탈핵 탈원전 논의의 근간과, 이 퇴행적 전근대주의와의 거리가 과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에너지의 사용 그 자체를 죄악시하는 현재의 환경 담론은 과연 현실에서 어느 정도의 선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가?


더 많은, 더 효율적인, 더 평등한 에너지를

에너지를 더 쓴다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오히려 해방이고, 평등이며, 사랑이다. 일단 그것은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케임브리지대학의 경제학자 장하준의 그 유명한, '세탁기가 인터넷보다 인류에 더 큰 기여를 했다'는 말을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여성들이 기계의 도움을 받아 훨씬 빠르게 그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비로소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해방되고 노동생산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강신주가 꿈꾸는 '유토피아'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에너지의 사용, 가령 에어컨은, 한산모시 입고 부채질하는 지배층이 아닌 사람들도 여름에 시원하게 몸을 식힐 수 있게 해준다. 즉 계급적으로도 더욱 평등한 선택지인 것이다. 방직산업의 발전이 노동의 착취를 포함한 여러 폐해를 낳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더욱 분명한 사실은 이전까지는 평생 한 벌의 옷만 겨우 입고 살았을 수많은 저소득층에게 풍족한 의복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여름에는 제대로 틀어놓지 않는 에어컨 때문에 낮 시간을 허비한다. 겨울에는 추위에 떨면서 일을 하는데, 개인용 난방 기구를 틀려고 하면 회사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단속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러니 당연히 업무 효율이 떨어지고 노동 시간이 길어지는 원인 중 일부가 된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은, 에너지의 사용을 '줄여야' 한다는 말과 전혀 다르다. 나는 당연히 전자의 편이지만 결코 후자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이고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보편적인 인간 해방의 길이기 때문이다.

'에어컨 온도를 높이는 대신 한산모시를 입으면 되지', 이것은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된다는 말과 거의 같은 소리다. 지배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피지배계층을 포함한 국민 전부에게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결코 아니다. 그 한산모시를 만들고, 빨래하고, 풀을 먹여 다리는 사람의 노동을 지워버릴 뿐 아니라, 그렇게 팔자 좋게 좋은 옷 입고 유유자적할 수 없는 수많은 노동자들 역시 도외시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하다

만약 어떤 정치 세력이 '우리는 내년도 경제성장률 목표를 마이너스로 잡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에너지에 대해서만큼은 '지금보다 전기의 생산도 소비도 줄이자'는 말이 무슨 합리적인 대안인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 에너지의 생산·소비는 경제 그 자체의 성장 및 침체와 직결된 것인데 말이다.

이번 탈핵 탈원전 논의를 계기로 한국의 진보 진영이 집단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전근대로의 퇴행적 경향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인상이다. 나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더 평등하게 사용해야 한다.

그 에너지의 생산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선택지 안에 원전이 있다면, 그 원전의 위험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최대한 효율적이면서 평등하게 배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무턱대고 일단 원전은 악이니까 추방하고 보자는 식의 정념을 바탕으로 한 탈핵 논의는 우리를 경제성장도 안 되고 행복하지도 않은 전근대국가의 길로 주저앉힐 뿐이다. 나는 그런 나라에 살고 싶지 않고,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치도 않는다.

우리에게는 한산모시가 아니라 26도, 혹은 25도로 맞춰진 에어컨이 필요하다. 의사결정권자들이 한산모시를 입고 다니면서 에어컨을 끄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일터와 집에서 적절한 환경을 제공받는 그런 나라를 원한다. 이번 여름의 탈핵 논의를 계기로, 진보 진영 내의 퇴행적 전근대 경향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비판되기를 바란다.

2017-06-05

문재인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문재인 정권의 전반적인 경향성을 네 글자로 줄이자면 '내로남불'일 것이다. 자신들이 하면 위장전입도 건강보험료 부정도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식으로, 요컨대 '내로남불'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아울러 '정규직 일자리 81만개 확충', '원자력 발전소 전면 폐쇄'처럼 요란하게 홍보했던 멋진 정책들도 모두 슬그머니 포기하거나 목표를 과감하게 하향 조정하고 있다. 노래 가사마냥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하지만 국정과제 선정 과정에서 문 대통령 공약 일부는 수정 혹은 폐기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기획위는 이미 부처별 1차 업무보고에서 일부 공약을 수정하거나 실제 이행 여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기업 반발이나 현실적인 제한 때문에 공약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기도 쉽지 않거나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가계 통신비 인하(통신 기본료 폐지), 광화문 대통령, 탈(脫)원전·탈석탄발전소, 고교학점제 도입, 전속고발권 폐지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정기획위가 ‘공약을 이행하겠다’고 밝히긴 했지만 2020년까지 시간당 최저임금 1만원으로 인상(현재 6470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4대강 보 개방 등도 추진 과정에서 사회적 갈등과 논란이 일 수 있다.

김채연, 이태훈, 황정수, 박동휘, 이정호, "국정기획자문위원회 1차 업무보고 마무리…폐기·수정 기로에 선 5대 공약", 한국경제, 2017년 6월 4일, (링크).

그러나 어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리고 그것은 슬픔이 아니라 공포를 느끼게 한다. 문재인 대통령과 그의 청와대 참모들은 이미 배치된 사드를 조용히 '착하게' 포장하는대신, 이미 들어와 있다고 언론에 보도까지 되었던 미사일 발사대 4기를 문제삼아 국방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다. 그리고 분노가 밀려온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이미 배치하기로 합의가 끝났고, 당연히 국회의 비준 따위 처음부터 필요 없는 포대 하나를 두고, 신임 정부가 끝없이 어깃장을 놓고 있다. 대한민국에 배치된 주한미군을, 특히 평택 미군기지와 왜관 부산으로 이어지는 미군 보급선을 지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하는 포대를 놓는데, 수도권의 시민들은 어떻게 할 거냐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반론'을 야권에서 끊임없이 생산하다가 급기야는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죽건 말건 한국 정부는 신경 안 쓰지만 미군은 한국인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이런 나라에 정나미가 안 떨어지면 이상한 일 아닌가?

미국의 입장이 '옳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는 최소한의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기 때문에 북한은 한국을 향해 전면적인 군사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반대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미국은 북한을 선뜻 폭격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폭격을 사랑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북한의 핵 시설을 날려버릴 폭탄쯤은 넘쳐난다. 하지만 때릴 수가 없다. 북한이 한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미군의 피해가 당연히 발생하고 대대적인 확전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존재가 북한 뿐 아니라 미군의 우발적 행동 역시 막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드는 그 주한미군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받으며 주둔하는 한, 대한민국 역시 위 문단에서 말한 이유 때문에 보호받는다. 저러한 식의 '공포'를 북한에 심어주기 위해서 우리가 '자주국방'을 하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과연 얼마가 될까? 북한의 전면적 공격이 가시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될 수 있을까? 이렇듯 많은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골수' 진보 자주파가 아닌 다음에야, 주한미군의 철수에는 대체로 반대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1.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2.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와 비용을 어느 정도로 추산하고 있는가?
  3. 셋째,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할 경우 그 비용을 국민들에게 공개하고 설득할 의향이 있는가?

5월 31일 문 대통령은 미국 민주당 소속 딕 더빈 상원 원내총무를 만나 사드 배치에 대해 논의했다. 더빈 의원은 면담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사드(THAADㆍ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를 원치 않으면 9억2300만 달러(약 1조300억원)의 관련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링크). 문제는 청와대에서 내놓은 해당 면담에 대한 브리핑에서는 그러한 충격적 발언에 대한 언급이 쏙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더빈 의원이 거짓말로 인터뷰를 한 게 아니라면, 청와대에서 언론 브리핑에서 해당 내용을 '보고 누락'한 셈이다.

해당 사안에 대한 언론의 추가 취재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준다. 마음을 굳게 먹고 출입기자단과 청와대 관계자의 문답을 읽어보자.

▶기자=“더빈 총무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이냐”
▶청와대 관계자=“비슷한 취지의 발언이 있었다. ‘미국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미국은 한국에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 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고 했다”
▶기자=“민감한 발언인데 어제(5월 31일)는 왜 공개를 안 했나”
▶관계자=“(더빈 총무 발언이) 그렇게 중요한가…아, 그냥 미국 시민으로서 국익 차원에서 평범한 질문을 하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허진, "[현장에서] 더빈 발언을 “그냥 미국 시민 질문”으로 느꼈다는 청와대", 중앙일보, 2017년 6월 2일, 강조는 인용자. (링크).

저 청와대 관계자의 말대로라면 문재인 대통령은 '일개 미국 시민'과 만나서 사드 배치라는 안보 중대사에 대해 논의를 한 셈이다. 문재인의 청와대에는 대체 무슨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 있는 것인가?

더빈 의원의 발언이 갖는 심각성을 인식해서 브리핑에서 뺐다면 그것은 의도적 왜곡이며 '보고 누락'이다. 반면 저 설명대로 '일개 미국 시민'이 하는 흔한 소리로 이해해서 언론 브리핑에 소개하지 않은 것이라면, 청와대 외교 안보팀은 그 자리에 앉아있을 능력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한국에 불고기와 비빔밥을 먹으러 온 여느 미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미국 국방 예산을 주무르는 장본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청와대는 미국 더빈 의원의 발언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라는 발언까지 대놓고 했다.

세상에 이런 무례한 행동이 다 있나? 한국인들은 조지 W. 부시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이 사람'(this man)이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오래도록 모욕감을 느껴왔다. 그런데 자신들은 미국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상원 원내총무를 '그냥 미국 시민'이라고 부르다니?

매티스 미 국방장관은 사드 배치에 대한 기존의 협의 사항을 잘 지켜나가자고 다시 당부했지만, 문제는 청와대에 있다. 문 대통령과 문정인 외교안보수석은 주한미군의 철수를 원하는가? 그래서 이렇게 사드를 놓고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 아닌가? 나는 그들의 외교적 지향점이 나와 다르다는 것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크고 엄청난 사건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국민들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다.

이미 ('K값'이 무려 1.6이나 나온, 김어준 식으로 말하자면 '부정선거'지만) 합법적 절차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 신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자신이 놓고 있는 외교적 행보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일언반구 언급 없이 그저 보여주기식 '사이다' 행보만을 거듭하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사드 배치를 취소하고 싶게 만드는 모든 행동을 하면서, 겉으로는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논하고 있다. 이것은 부산으로 도망치면서 서울은 안전하다고 외친 이승만의 거짓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정직함을 요구한다. 청와대 참모진에게 최대한의 업무 파악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그들은 지금, 동맹의 가치를 코 푼 휴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최악의 예측불가능한 미국 대통령이 재임한 가운데, 극히 위험한 외교 안보적 불장난을 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철수, 한미동맹의 파기, 중국의 보호 하에 가능한 북한과의 통일을 원한다면, 제발 정직하게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들에게 논의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혹시 잊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2017-05-30

문재인 정권, 싸드 불장난을 멈춰라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싸드 발사대가 두 대만 들어와 있는 줄 알았다고 한다. 국방부로부터 그렇게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네 기가 더 있었기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분노했다고 윤영찬 홍보수석비서관이 발표했다. 5월 30일, 오늘 가장 큰 뉴스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 이것은 언론플레이다. 그것도 아주 수준이 낮고 질이 나쁜 언론플레이다. 외교 안보에 관하여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로 이런 불장난을 하는 문재인 정권을 나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이렇게 대놓고 집권한지 한 달도 안 돼서 언론플레이부터 하는 청와대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국방부(와 한통속이 된 미국)'이라는 가상의 적을 만들고 여론몰이 하려는 의도는 알겠다. 그렇게 난리를 피우면 서서히 불리하게 돌아가는 청문회 정국에서 여론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대통령과 그의 주변 인사들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담보로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짜뉴스 유포 언론플레이를 할 수 있는지, 그것만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

백번 양보해서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왔었다는 것을 청와대가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다고 쳐보자. 그걸 홍보수석을 통해 언론에 대고 발표하는 것은 과연 '대통령'으로서, '청와대'로서, 합당한 행동인가?

일단 사실관계부터 확인해보자. 싸드 발사대가 총 6기 들어와 있다는 것은 국민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2017년 4월 28일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28일 군관계자는 "현재 사드의 발사대 4기는 경북 칠곡 왜관의 캠프 캐럴에 보관중이며 성주골프장의 시설공사를 마치는 하반기에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링크) 그보다 이틀 전에 나온 다른 뉴스. "이동식 발사대는 요격미사일을 쏘는 발사대로 지난달 6일 사드 장비 가운데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했고, 보통 사드 1개 포대는 6기의 발사대를 갖춥니다."(링크)

정리하자면 첫째, 싸드 발사대가 한반도에 총 여섯 기 들어와있다는 것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둘째, 설령 그 보도를 접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싸드라는 것이 어떤 시스템인지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1개 포대가 배치된 이상 6기의 발사대가 뒤따라왔을 것을 예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마치 '장전된 리볼버 한 정'에는 실탄 여섯 발이 들어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말이다.

문재인의 청와대는 바로 이런 차원에서 트집을 잡고 있는 셈이다. 보고가 누락되었다 한들 '아니 어떻게 발사대 네 기가 몰래 들어와 있을수가?'라고 역정을 낸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무능과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조직과 인력들이라면 설령 저런 착오가 있었다 한들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을 것이다. 혼동한 사람이 쪽팔리는 일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화를 낸다면 이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싸드 발사대 네 기가 한반도에 몰래 들어와 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가짜뉴스'다. 문제는 그 '가짜뉴스'의 출처가 청와대라는 것이다. 싸드는 현재 외교 국방에 있어서 가장 첨예한 사안이다. 그것을 두고 청와대에서 '가짜뉴스'를 유포한다? 그것도 한낱 국내 정치에서 팻감으로 쓰기 위해? 국방부 길들이기 하려고? 국방부를 길들이려면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인사권을 활용할 일이지, 이렇게 동맹국과의 신의를 지속적으로 흔드는 수를 써야만 하는 것일까? 문재인과 청와대 참모진들에게 외교란 무엇이고, 안보란 무엇이며, 국방이란 또 대체 무엇인가?

나는 문재인에게 한 표를 던지지 않은 60%의 국민의 일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서 존중한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과 청와대 역시 국민들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심각한 외교 안보 이슈를 국내 정치용, 청문회 국면 돌파용, 국방부 길들이기용 카드로 휘두르지 않는 것은 그러한 국민 존중의 첫 걸음이다. 문재인 정권은 안보 불장난을 멈추고 수권세력으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2017-05-18

문재인의 '10조 추경',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당시 공약이었던 '80만 일자리 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10조 단위의 추경을 추진할 예정이다. 물론 대통령 본인과 더불어민주당 정부 관계자들, 그리고 지지자들은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5월 17일 나온 기사에 따르면, 우리는 무턱대고 '좋은 게 좋은 것이며 잘 될 것이다'라는 태도만을 취할 수가 없다.

문재인 정부가 각종 위원회를 신설하면서 공직사회가 반색하고 있다. 만성적인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새 정부는 위원회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위원회가 많으면 부처와 중복되는 ‘옥상옥’ 조직이 돼 관료사회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병률, "관료들, 새 정부 각종 위원회 신설에 ‘반색’…인사적체 해소 기대", 경향비즈, 2017년 5월 17일

이미 대선 과정에서 수없이 지적되었다. 문재인 캠프는 대체 '10조 추경'을 통해 어떤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지 구체적인 내역을 밝힌 바 없다(링크). 서서히 그 전모가 드러나는 것은 반가운 일인데, 그것이 '옥상옥' 조직이 될 우려가 큰 온갖 '위원회' 만들기에 투입된다면? 그러한 예산 편성과 집행이 '중년 공직자 배불리기'의 일환일 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있을까?

국가 전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공무원은 늘어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미 대선 토론 과정에서 지적되었다시피, 한국의 공무원 숫자가 OECD 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라는 비판은 과장된 허위 주장이다. "우리나라는 국가공무원과 지방공무원만 합한 숫자인데, 다른 국가들은 관공서 비정규직을 비롯해 비영리 공공단체와 사립학교 교원, 군인까지 모두 포함한 경우가 많"(링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무원 숫자를 많이 늘리겠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전 현직 공무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많이 늘린다는 문재인의 대선 공약은 지금이라도 철저히 검증되고 비판되어야 한다. 공무원이 현재 '안정된 일자리'로서 최우선 순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망한 나라인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의 건강한 성장이지 공무원 일자리'만'의 성장이 아니다.

2017-05-17

노무현과 진보 언론의 갈등

진보 언론에 대한 문재인 지지자들의 원성이 높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한경오'(한겨레, 경향, 오마이뉴스)는 노무현을 무조건 매도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후에야 꼬리를 내린 비겁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단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진보 언론이 노무현과 대립했던 것은, 노무현과 대립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 언론은 진보 언론이기에 노무현을 비판해야 했다. 그가 재임 중, 그리고 퇴임 후에 연루되었던 가족 친지들의 뇌물 수뢰 혐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이라는 이유로 뇌물을 받았는데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보' 이전에 그냥 '언론'이 아니다.

위 표는 2006년 7월 7일 경향신문에 실린 "조·중·동의 왜곡 ‘신문발전기금’ 악의적 보도"(링크)가 출처다. 행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진보의 이상을 배신한 것은 노무현임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조중동'을 비판하는 쪽에 더욱 가깝지 노무현에게 직접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지는 않다.

불과 10여년 전의 사실들을 두고 '설명'이 필요하게 될 줄이야.

2017-05-02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2017년 5월 9일 치러질 제19대 대선에서 기호 3번 안철수 후보에게 표를 줄 생각이다. 세상 만사에 의견 밝히는 것을 업으로 삼아온지 10년도 넘었지만,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이렇게 공개적으로 누구를 찍겠다고 선언해본 적이 없다. 시인 김수영이 "엔카운터識"에서 했던 표현을 빌자면, "야한 선언은 안해도 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시의 구절처럼, "어제하고는 틀려졌"고, "틀려졌다는 것을 알았"으며, "틀려져야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것을 당신한테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나는 '야한 선언'을 한다. 안철수를 찍겠다고.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그 이유는 세 사람의 이름과 이어진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


1. 신해철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그 신해철이 그렇게 열심히 지지했던 민주당에서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약칭 의료분쟁조정법), 일명 '신해철법'의 통과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서, 법안이 표류하게 되리라는 것 또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은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의되었다. 전자는 더불어민주당 오제세 의원, 후자는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 세부적인 차이가 있지만 골자는 같다. 사망이나 중장애 등 중대한 피해 발생시, 의료사고 피해자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분쟁 조정을 신청하면 의료인의 동의 없이도 조정 절차가 개시될 수 있도록 법에 명문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큰 수술의 경우 마취된 상태로 본인의 몸을 맡겨야 하고, 전문적인 의료 지식이 없으며, 상대방의 고의나 과실을 입증하기도 어려워 의료사고 발생시에도 재판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지 못했던 의료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조정을 통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주는 법이다. 반대로 의사들은 그러한 조정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15일 내에 이의를 제기하면 된다. 법으로 강제되는 것은 조정절차의 '개시'일 뿐 그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료 단체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고, 더불어민주당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법안 발의를 해놓고는 상임위 법안소위에 안건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결국 19대 국회가 끝나면서 자동 폐기될 처지에 놓였는데 그때 고인의 유족 및 친지들이 안철수 의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 상황에서, 안철수는 이름만 걸고 엉덩이를 빼는 대신,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이틀만에 신해철법이 법사위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철수는 전국의사총연합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낙선운동을 하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바로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새누리당도 더불어민주당도 신해철법을 발의만 하고 내버려뒀던 것이다.

2016년 2월 12일, 4월 총선을 불과 두 달 앞둔 시점이다. 의사들을 적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철수는 정치적 손해를 감수하기로 하고 옳은 일을 했다. 그러자 스포트라이트가 안철수에게만 쏠리는 것을 그냥 보고 넘길 수 없었던 거대 여당과 야당의 의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철수는 의석을 지켰고 국민의당은 모든 정치평론가들의 예상과 여론조사를 뒤엎고 40석에 가까운 제3당이 되었다. 그리고 20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법사위와 본회의를 통과하여 신해철법이 통과된 것이다. 2016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이 사례는 대단히 중요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은 문화적 프로파간다가 필요할 때마다 신해철의 음악과 발언 등을 많이도 이용해왔다. 하지만 정작 그의 유족들을 위해 결정적인 노력을 한 사람은 안철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어떤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왜 신해철의 유족이 문재인이 아니라 안철수에게 "그대에게"와 "민물장어의 꿈"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는지 의아해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꼭 필요할 때, 예상되는 불이익을 무릅쓰고, 어려운 이들을 도왔기 때문이다.

신해철법의 통과 과정이 증명하고 있다. 안철수는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손해를 봐야 한다. 그 손해를 뛰어넘는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얻지 못하더라도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이지만, 큰 책임을 지고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지도자에게 더욱 절실하다.

나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때로는 정치적 손해를 무릅쓸 수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말로만, 선량한 이미지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는 정치적 이력서를 가진 사람 말이다.


2. 김영란

일단 그 법의 이름을 '김영란법'이라고 부르면 안 된다. 그 점부터 확실히 해두고 싶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의 약칭은 "청탁금지법"이지 '김영란법'이 아니다. 청탁금지법의 역사는 안철수의 정치 이력과도 거의 포개진다. 이 대목은 이미 잘 정리된 기사를 인용해보자.

안 전 대표는 지난 2013년 8월 김영란법과 관련한 정부안이 제출됐을 당시 언론 인터뷰를 통해 '사회정의'를 강조하며 "원안 통과"를 주장했다.

당시 안 전 대표는 같은해 4월 재보선을 통해 국회에 입성한 뒤 독자세력 구축에 나서고 있던 터라 혁신 경쟁을 벌였던 김한길 대표 체제의 옛 민주당이 2014년 김영란법을 정치혁신 과제로 선정‧발표하는 데 자극을 줬다.

안 전 대표의 김영란법 소신은 옛 민주당과 통합해 새정치연합으로 거듭난 이후 의원총회 등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안 전 대표는 지난해 3월31일 새정치연합 창당 후 처음으로 열린 의원총회에서 "'김영란법을 이번 4월 국회에서 통과해야 한다"며 "원래 취지대로, 많은 국민이 바라는 대로 통과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해 4월 국회 교섭단체대표연설에서도 김영란법 처리를 요구하며 "이 법안의 통과야말로 정치권의 자기정화 의지를 국민에게 보여드리는 상징"이라고 강조했다.

안 전 대표는 7·30 재보궐 선거 참패로 대표직에서 물러나 5개월여간 자숙기간을 가진 뒤 내놓은 첫 일성도 '김영란법 처리'였다.

당시 김영란법이 소관 국회 상임위인 정무위원회 처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안 전 대표는 성명을 내고 "'김영란법'은 가히 '부패공화국'이라고 할 대한민국의 공직자 부패를 뿌리 뽑을 수 있는 강력한 반부패 법안으로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고 힘을 실었다.(링크)

그런데 부정청탁법은 '신해철법', 즉 의료분쟁조정법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다. 의사들의 반발만 이겨내면 그만이었던 의료분쟁조정법과 달리, 교수, 기자, 공무원, 정치인 등 너무도 많은 이들이 부정청탁법의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의료분쟁조정법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고양이가 대단히 많고 힘도 세다.

안철수가 한 일은 여당과 야당의 책임자들을 만나 그들의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2015년 2월 26일, 안철수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를 차례로 만나, 부정청탁법을 다음 본회의에서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 것이다. 당시는 국민의당을 창당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안철수는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대립 구도를 넘어, 양자를 오가며 합의점을 찾아내고 옳은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부정청탁법을 좌초시키면서 생색내는 건 너무도 쉽다. 거대 여당과 거대 야당이 서로를 탓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면 된다. 그러면 국민들은 속이 터지겠지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놈들 때문에 그랬다'면서 남탓만 하면 우리쪽 지지층은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을텐데. 그것이 바로 적대적 공존의 매커니즘이다.

애초에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런데 이미 '적'으로 보고 있다면, 그래도 대화를 해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 정치인은 군인이 아니다. 상대방과 대화를 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야 한다. 안철수는 날치기 통과도 필리버스터도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가장 많은 고양이, 아니 호랑이들의 목에 방울을 달아야 했던, 부정청탁법을 두고서 말이다.

안철수를 찍고 싶지만 문재인이나 심상정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진보적인, 혁신적인, 개혁적인 의제 가운데 많은 것들은 어쩌면 안철수가 대통령이 될 때 더욱 잘 실현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부정청탁법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안철수의 정치 스타일은 '말이 되고 좋은 법이면 누가 발의했건 통과시킨다'이기 때문이다. 좋은 법이지만 새누리당에서 발의했으니까 안 되고, 꼭 필요한 일이지만 더민주가 빛을 볼까봐 일부러 망쳐버리고,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정책에 대해 제대로 토의하고 협상하여 빠르게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정치권을 원한다면 현재로서는 안철수를 찍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번 대선은 누가 이기건 여소야대 대통령이 된다. 우리에게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정치를 할 줄 아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던져놓고 원외투쟁을 일삼거나, 국회법을 교묘하게 악용하여 날치기 통과를 하는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할까. 안철수는 소위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법의 통과 과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능력을 입증한 바 있는, 당선 가능한 대통령 후보다.


3. 안철수

안철수가 처음 정치를 시작했을 때 나는 그의 출현을 반기지 않았다. '국회의원 의석수 200석으로 줄이겠다'는 발언 때문이었다. 많은 이들이 국회를 불신하지만, 그 국회에게 탄핵당한 박근혜만 봐도 알 수 있다시피, 행정부보다는 입법부에게 더 많은 권력이 주어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에 부합한다. 안철수는 정치 혐오에 기대어 급성장한 포퓰리스트라고 나는 판단했고, 절대 그에게 표를 줄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런 면에서, 2012년에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큰 혼란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을 조율하고 그 중에서 최선을, 차선을, 차차선을, 차악을 택해나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때로는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끌어내야 하지만 때로는 국민들을 실망시키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안철수는 의사로 교육받은 후 프로그래머로, 또 사업가로 살아왔다. 의학은 과학이다. 생명 그 자체의 신비로움과는 별도로, 사람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고, 명백한 오답이 존재한다. 프로그래밍은 그보다 훨씬 더 확실한 논리의 세계다. 사업은 1인1표가 아니라 1주1표의 원리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의 일이다. 정치에 뛰어들자마자 대통령이 되었으면 안철수가 대한민국에 큰 혼란을 초래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하지만 안철수는 금방 배웠다. 앞서 살펴본 두 사례만 봐도 확실히 그렇다. 20대부터, 30대부터 국회의원이 되어 지금껏 기세등등한 구386들보다 안철수가 훨씬 '정치'를 '정치답게' 잘 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손해를 감수할 줄 아는 용기, 정치적 목표의 실현을 위해 상대방과 마주앉아 대화하고 합의점을 도출해내는 지혜를, 이미 실천적으로 입증했다. 대통령직에 요구되는 새로운 도전 과제에도 역시 잘 적응하고 대처해낼 것이라 기대하게 된다.

현재 당선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후보자는 총 세 명이다. 그런데 그 중 대통령이 된 후에도 뭔가를 배워나갈 것이라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대한민국은 외교, 안보, 정치, 경제, 기타등등 전방위적인 위기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지지자들에게 종교적인 숭배를 받고 있지만 국회 활동 실적부터가 바닥에 놓여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스스로를 '스트롱맨'이라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발언과 행위를 일삼고, 심지어 젊은 시절 약물을 이용한 강간을 시도했다는 사실까지 자서전에 써놓은 사람을 두고 대통령의 자격을 논해야 하는 걸까. 소거법으로 생각해봐도 당선권 내에서 '찍을만한 사람'은 안철수 뿐이다. 이렇게 다시 한 번 검산을 해본 후, 나는 안철수를 찍기로 결정하고, 공개적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이번 대선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붕괴했기 때문에 치러지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그런데 그 빈 자리에 무능한 운동권 세력이 들어선다면, 그들과 적대적 공존 관계인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다시 살아날 수밖에 없다(홍준표가 지지율을 높이면서 벌어지고 있는, 5월 2일 현재 상황이 바로 그렇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무능한 운동권 세력의 적대적 공존, 그것은 '절대적 공존'이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그 구도가 깨진다. 국민이 새로운 선택을 함으로써 정치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수십년에 한 번 돌아올까 말까 한 역사적 기회이기도 하다.

나는 그런 결과를 보고 싶다. 역사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내 힘을 보태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안철수를 찍을 것이다. 내 결정을 알리고, 이 생각의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설득되기를 기대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양자택일 속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는 한 현실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이 했다고 하는 말을 인용해보자.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에게는 좀 더 대담하고, 과감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하지만 잘 살펴보면 안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져 있다. 나는 10년 전의 여당도 두 달 전의 여당도 아닌, 미래의 여당에 한 표를 던진다.




보론

이른바 '진보 논객'이면서 왜 심상정을 찍지 않느냐는 질문이 당연히 들어올 것이다. 맞다. 나는 '진보 논객'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남들도 나를 그렇게 바라본다. 하지만 한국 진보 진영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논의 중 많은 것들에 나는 동의할 수 없고, 애석하게도 그 논의들은 심상정의 공약에 반영되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싸드다. 나는 싸드를 한반도에 배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바꿔본 적이 한 번도 없는 확고한 싸드 배치 찬성론자다. 당연히 싸드 비용은 미국이 낼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미군이 소유하고 운용하는 미군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땅에 미국의 무기가 들어오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진보 진영의 기본적인 세계관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과 미국은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의 안전과 번영의 토대다.

이것은 진보 진영의 세계관 전체가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2008년 이후, 진보는 정부가 추진하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 온갖 종류의 이유를 '과학적'으로 제시하며 반대하는 관성에 젖어 있다. 그래서 싸드에서는 중국 영토를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전자파가 나오고 그것은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이 된다. 그 전자파는 '죽음의 전자파'여서 레이더보다 해발 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 참외밭의 농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드 배치를 반대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중국 외교부장이 한국을 향해 무력 충돌을 운운하는 것은 이쪽에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일이지만, 미 대통령 트럼프가 말도 안 되는 10억 달러를 운운하는 것만큼은 절대 참을 수 없는 주권 침해가 된다.

요컨대 반미주의, 반과학주의, 음모론주의가 오늘날의 진보 진영을 지배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종합하면 세계에 대해, 국제 정세에 대해, 대단히 부정확한 정보 하에 분기탱천할 뿐인 오늘날의 대한민국 진보의 모습이 나온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래도 사회적 당위의 실현을 위해 진보 정당을 지지해왔으나, 모든 대선 공약이 '복지 확대'로 수렴되고 있는 지금, 나는 진보 진영과 나의 세계관 차이를 더는 없는 척 할 수가 없다.

앞서 부정청탁법을 논의할 때 기술했다시피, 안철수가 지금까지 해온 정치적 스타일을 놓고 볼 때,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심상정의 공약 중 좋은 것들은 현실화될 수 있다.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면 안철수의 공약들을 가져다 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당선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심상정 본인과 그의 정당이 전제하고 있는 세계관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기 때문에, 이번 대선에서는 심상정에게 투표하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진보 진영의 세계관과 나의 그것이 갖는 차이에 대해, 그리고 내가 왜 동의할 수 없으며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머지않아 (어쩌면 여러 편의) 글로 정리할 예정이다. 그렇게 내 입장을 밝히고, 공개적으로 토론하여,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과 나의 의견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질 그날을 기대한다.

2017-04-30

19대 대선, 누구를 찍을 것인가? (수정)

대선이 벌써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거 구도가 짜이기 전부터 누구를 찍을지 마음을 정해놓은 상태일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선거가 급하게 치러지는 바람에 아직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어떻게 자신의 투표를 설명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 글을 써본다. 목차의 질문에 하나씩 답을 하면서 누구에게 나의 소중한 표를 줄지 결정해보자.


1.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가?

이번 대선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보궐선거'다. 많은 이들이 이쯤 되니까 아예 박근혜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있지만 아직 1심 유죄판결조차 받지 않은 피의자일 뿐이다. 복역중이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투표권도 있다(언론에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이번 대선 투표는 기권할 것 같지만, 아무튼 권리가 있다).

그 박근혜를 지지하는 세력과 후보 역시 여전히 활동중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가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의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남재준은 독자 출마 후 4월 29일 홍준표 지지를 밝히며 사퇴했다. 보도에 따르면 "홍 후보는 "조 후보도 아마 그만둘 것 같다"며 자신에 대한 지지를 암시했(링크)"다고도 하던데, 여기서 말하는 '조 후보'는 조원진이며 그의 선거 구호는 '박근혜를 지킵시다'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탄핵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은 홍준표를 찍는 게 맞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본인의 부정적 입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어 숫자로 제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니 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박근혜 탄핵에 찬성하는 사람은 다른 그 어떤 이유에서도 홍준표를 찍지 말아야 한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국민들의 의사가 왜곡되어 정치권에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준표를 으면 근혜가 아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2.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당신은 문재인을 좋아하는가? 나는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안철수를 좋아하는가? 심상정을 좋아하는가? 유승민을 보면 배신자라고 느끼나? 이런 식으로 질문하지 않고도 그들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이유는 충분히, 정책과 입장으로 인해 나누어진다. 하지만 문재인은 예외다. 정치적, 정책적 발언을 근거로 문재인을 평가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인 싸드 배치에 대해 생각해보자. 문재인의 입장은 무엇인가? 트럼프의 '10억 불' 발언이 나오기 전까지 그는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트럼프가 이상한 소리를 하자 '국회 비준을 거쳐 배치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다. 그렇다면 '차기 정부에서 결정하겠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나의 정책적 지향점을 유권자들에게 설명하지 않은 채 선거에 임하겠다, 왜냐하면 싸드 배치 반대하는 표 떨어질까봐, 이 소리 아닌가?

다른 공약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공약 전부가 그런 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공약을 실현하기 위한 예산 문제부터가 불투명하니 말이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 측은 28일 19대 대선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 공약을 발표하면서도 '득표활동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사유로 세율인상의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았다."(링크) 득표 활동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것저것 퍼주는 공약을 제시하되, 세율 인상은 슬쩍 뭉개고 지나간다. 그것도 대선 정책공약집이라는, 말 그대로 '공약'을 해야 하는 문서에서 말이다. 그 이유를 문재인 선대위 윤호중 공동정책본부장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국민도 자신이 세금을 더 내게 될 것이라고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틀렸다. 어떤 국민들은 문재인을 그냥 좋아하기 때문에, 문재인이 당선 후 뭘 하건 그냥 기분이 좋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문재인을 찍으면 된다. 그것까지 말릴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재인이 청와대에 입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행복이 아닌 사람들이라면 꼭 문재인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편을 권하고 싶다.

나는 문재인의 공약을 믿기 어렵다. 공약과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찍는 선거는 2012년을 마지막으로 우리 역사에서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다. 문재인을 꼭 찍고 싶다면, 어쩌겠는가, 찍어야지.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가?

현 대선 국면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의미한 질문을 단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이것은 '그렇다' 혹은 '아니다'로 나누어지는 양자택일형 질문이며, 온 국민의 안위와 관련된 안보 이슈일 뿐 아니라, 한국 및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사안이다.

싸드 배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일단 심상정은 현 대선 국면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싸드 배치 반대 의사를 흔들림 없이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단 한 사람의 후보다. 앞서 말했듯 문재인의 입장은 '다음 정부인 내가 알아서 하겠다, 지금 나한테 묻지 마라'는 쪽이지 결코 싸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국회 비준을 거치겠다는 말도 그렇다. 대통령이 된 후에 국회에 통과를 요구하면 당연히 통과될 것이니 결코 반대하겠다는 소리가 아니다.

반면 심상정은 한미동맹의 폐기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아주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 싸드 배치 반대는 궁극적으로 한미동맹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쩌면 먼 미래에는 한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미국의 힘이 약해져서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재래식 병력만으로 북한과 전쟁을 하면 당연히 대한민국이 이긴다. 하지만 수만에서 수십만 명 이상의 인명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이미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동맹을 파기하고 '주체적'으로 남쪽에서도 핵무장을 한다면, 그것은 북한과 같은 국제 사회의 문제아가 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그런 과감한 군사적, 외교적 실험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싸드 배치만은 절대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 아니 상당수는, 사실 민주당과 문재인이 반대하니까 덩달아 반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 후 '착한 싸드'를 놓으면 오히려 싸드 예찬론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부는 진심으로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미국으로부터 당장 전시작전권을 회수해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며, 싸드 레이더에서 나오는 소위 '죽음의 전자파' 때문에 성주에서 나오는 참외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 싸드 배치에 진심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심상정을 찍어야 한다. 심상정의 득표율만이 한미동맹의 파기를 무릅쓰더라도 싸드 배치를 철회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확인해주는 공식적이고도 명백한 지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는가?

싸드 배치에 찬성한다면 안철수를 찍어야 한다. 유승민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러므로 유승민을 찍는 것 역시 싸드 배치에 찬성하되, 박근혜 탄핵 반대 세력과는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유의미한 선택지가 된다.

안철수는 본래, 4월 30일 현재 문재인이 취한 것과 흡사하게, 국회의 비준을 거쳐 싸드를 배치하자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올해 초 입장을 바꾸었다. 입장을 바꾼 이유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TV 토론을 통해 여러 차례 설명했다. 대선후보에 맞춰서 국민의당 역시 싸드 배치에 대한 입장을 변경했는데, 그 과정에서 박지원은 "햇볕정책은 튼튼한 한미동맹에 기반한다"며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 입장이다. 나는 싸드 배치 그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정치인과 정당이 입장을 변경하고 표명하는 과정의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관리인인 박지원은 당연히 싸드 배치에 반대하고, 햇볕정책을 영원토록 유지하며, 개성공단을 되살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 후보와 입장이 다르므로, 햇볕정책에 대한 새로운 해석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과 후보의 입장을 조율했다. 이런 게 바로 정치인과 정당의 언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승민의 경우에도 목적지는 같다. 싸드 배치에 찬성하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가능한 재정 정책 하에 '중부담 중복지'로 복지 정책을 펴고자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지향점이 유사할 경우, 당연히 당선 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유승민을 찍는 것보다 안철수를 찍어서 대선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승민의 정치 생명 연장에 도움이 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다른 정책들은, 그리고 온갖 네거티브는?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이미 지지율 1위인 후보의 캠프부터가 공약에 수반하는 예산에 대해 정직한 입장을 밝히지 않는 그런 선거다. 어차피 정책들은 주어진 예산과 여건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령 심상정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당장 2018년 최저임금을 순식간에 1만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 문재인이 대통령 된다고 해서 내년에 곧장 전국에 단설유치원이 쫙 깔리고 모든 유아들을 수용할 수 있을 성 싶은가?

달콤한 공약만큼이나 씁쓸한 네거티브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후보에게 호의를 갖고 보기 시작하면 모든 공약이 다 좋아보인다. 반대로 '저 인간 조져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뉴스를 보면 네거티브의 소재는 늘 넘쳐난다. 문재인 아들 문준용 씨의 취업 비리 의혹, 안철수 후보 부인 김미경 씨의 소위 '갑질' 논란, 심상정은 본인이 진보라면서 아들을 '귀족학교' 보냈다더라, 유승민은 선거에 딸 동원 안하겠다면서 지지율 안 나오니까 홍대입구에 데리고 나왔네, 등등.

한편 홍준표는 돼지발정제로 강간 모의를 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밝히고도 10%가 넘는 국민들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생각한다. 그 수치는 박근혜의 탄핵에 동의하지 않았던 여론조사상 수치와 거의 흡사하다. 다시 말해 홍준표에 대한 '사실에 입각한' 네거티브는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안철수나 문재인의 지지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부터 지지하던 사람들이 최근 나온 몇 개의 이슈 때문에 마음을 바꿀까? 그럴 일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이 부동층에 속하는 경우, 인터넷, 특히 SNS를 통해 몇 개의 네거티브 사안들을 돌려보면서 어떤 후보를 반대하거나 그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지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에게도 그 정도 논란은 당연히 있다. 그런데 상대편의 네거티브한 요소를 욕하면서 자신이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후보자에 대한 의혹들은 일부러 무시하기 시작하면, 소위 '빠'가 되어버린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자가 선거에 못 이겨도 '빠'는 되지 말자.


6. 세계적 추세(잡담)

이것은 잡담이다. 객적은 소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그런데 현재 세계인들은 '안 해봤던 짓'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브렉시트, 트럼프, 그리고 프랑스 대선이 마크롱과 르펜의 대결이 된 것. 물론 이 배후에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백인들이 공공연하게 인종차별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가장 크게 도사리고 있다(그에 대해서는 경향신문에 기고한 나의 칼럼들을 참고해도 좋겠다.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링크), "[별별시선]트럼프, 샌더스, 대한민국"(링크)).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작년부터 벌어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이변에는 결국 '지금까지 안 해왔던 일'을 해보자는 갈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긍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그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기존 정치권이 그러한 변화에의 갈망을 보다 순치(馴致)된 정치적 견해로 탈바꿈시키지 못한 채 포퓰리스트들이 놀이터로 삼는 동안 수수방관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최근 정치적 상황 역시 세계적 경향의 일부라고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총선을 통해 자체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제3당이 출현했고,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으며, 결국 12월이 아니라 5월에 조기 대선을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안 가봤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여당도 둘로 쪼개졌고, 야당도 둘로 쪼개졌으며,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여당이 아예 사라져버린 채 치러지는 선거다. 정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면 기존에 자신이 해왔던 투표에 비해 보다 파격적인 표를 던져도 좋을 시점이다.[주]


7. 요약 및 결론

1) 박근혜 탄핵에 반대하면 홍준표 찍자.
2) 문재인이 그냥 좋으면 문재인 찍자.
3) 싸드 배치에 반대하면 심상정 찍자.
4) 싸드 배치에 찬성하면 안철수나 유승민이다.
5) 당선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안철수를 찍자.

이번 대선은 대통령 보궐선거다. 대한민국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선거이며, 3당 합당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거대 여당의 잔존 세력들을 완전히 정치의 변방으로 몰아낼 수 있는 역사적 기회다. 동시에 미국의 트럼프, 일본의 아베, 중국의 시진핑, 북한의 김정은을 상대할 수 있는 유능하고 대담한 정치 지도자를 반드시 선출해야만 하는 그런 선거이기도 하다. 싸드 배치 논란과 중국의 보복, 트럼프의 돌발 발언 속에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논의해야만 할 시점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의 사안(박근혜 탄핵, 싸드 배치)와 한 명의 인물(문재인)을 기준선으로 하여,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의사 결정 가이드를 만들어 보았다. 온갖 종류의 현란한 공약들을 수십개씩 클릭하는 것보다, 위에서 제시한 다섯 개의 선택지에 따라 다섯 명의 후보자 중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는 것이 훨씬 명확하고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한 사람의 유권자이자 주권자로서, 이 글을 읽은 분들의 사고 역시 조금이나마 더욱 단단해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꼭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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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허핑턴포스트에 이 글을 보냈다. 그런데 허핑턴포스트가 선관위에 문의해본 결과,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기사나 기고를 실으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여, 글을 일부 수정했다(허핑턴포스트 블로그도 일종의 '언론'으로 취급되고 있나보다). 5월 2일에 허핑턴포스트에 올라올 게시물과 내용을 동일하게 하기 위해 해당 지면에 맞춰 수정한 내용을 이곳에도 반영한다. 참고로 삭제된 문단은 다음과 같다.

지난 총선에서, 다들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안철수는 40석에 가까운 제3당을 출현시켰다. 그 결과 새누리당의 내분도 가시화되고, 점점 친박과 비박의 사이가 벌어지면서, 박근혜의 탄핵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한국 정치가 '안 가봤던 길'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냐 민주화냐라는 30년 묵은 대립구도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선택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다.

1에서 5까지 다 읽고도 누구를 찍을지 결정하기 어렵다면, '안 가봤던 길'을 가보자. 투표권을 갖게 된 이래 지난 총선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비판적 지지'따위 하지 않고 올곧게 진보정당만 찍어온 나의 결론이다. 지금은 보수정당의 후보를 찍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정치권의 전체 구도가 바뀌고, 진보정당에도 새로운 활로가 뚫릴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위 두 문단은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 기왕 허핑턴포스트 블로그에 송고한 판본에서 삭제되기까지 했으니, 조만간 (적어도 사전 투표가 시작되기 전) 해당 내용에 대해 좀 더 길게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그것은 허핑턴포스트에 보내지 않고 내 블로그에만 올릴 계획이다.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한 글은 다음과 같다. "신해철, 김영란, 안철수"(2017년 5월 2일 작성)

2017년 4월 30일 03:40 작성 / 2017년 4월 30일 21:45 수정

2017-03-16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2010-07-29

[기고] 저 민주당과 무슨 연합을 할 것인가? - 이재오, 엄기영, 심상정

이재오는 은평구 토박이다. 문국현에게 불의의 기습을 당하기 전까지 쭉 그곳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왔다. 지역 주민들과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그런 이재오가 재보선에 출마했다. 이미 6·29 지방선거에서 정권심판론의 단물은 많이 빠진 상황. 이재오가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대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길 것인가?

민주당은 신경민 전 MBC 앵커를 영입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경민 본인이 고사했다. 민주당에게는 '다음 카드'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선된다면 70세의 초선 의원이 되는, 땅투기 의혹으로 오명을 뒤집어 쓴 장상이 후보로 나왔다. 국민참여당의 천호선 후보는 줄기차게 단일화 협상을 요구했지만 민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곱게 뺨을 대준 민주노동당과의 차별화를 위해 진보신당은 사회당의 금민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지만 그 결과는 458표. 은평을 재보선의 결과가 이렇다. 이재오를 뺀 모든 선거 참여자가 패배했다.

한편 신경민의 직장 상사였던 엄기영 전 MBC 사장은 선거를 앞두고 강원도에 출마한 한나라당 후보들의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개인적인 친분에 따라 지지 방문을 하였을 뿐이라고,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었다"고 말한다. 물론 그럴 리가 없다. 이광재 강원도지사 당선인이 유죄 확정을 받으면 강원도지사 보궐선거가 치뤄질 것이므로, 그것을 노린 포석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정권의 외압으로 신경민 앵커가 마이크를 놓을 때, 그것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던 엄기영이다. 그 엄기영이 한나라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이 두 사례를 종합하여 볼 때 우리는 민주당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파악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저 민주당과의 적극적인 선거 연대를 통해 진보정치의 외연을 확장한다거나, 심지어 진보정당이 민주당의 '진보 블록'이 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식의 이른바 '빅 텐트'론의 현실을 가감없이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주당은 애초에 빅 텐트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도 없다.

만약 민주당이 파격적인 후보 선택을 통해 은평을 선거에서 승리하고 싶었다면, 장상같은 '그냥 홀딱 깨는' 후보가 아니라, 한 장의 유의미하고 강력한 카드가 존재했다.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왔다가 후보 사퇴와 함께 유시민 후보 지지를 요청했던 심상정 전 진보신당 대표를 영입하면 된다. 지역에 깊게 뿌리내린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완전히 신선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후보가 필요하다. 이미 그런 전략으로 이재오는 문국현에 의해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다.

만약 그런 제안이 실제로 심상정 측에 전달되었다면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당의 대표까지 역임한 간판 스타에게 진보신당 경기도당은 '1년 당직 정지'이라는 징계를 선언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민주당이 은평을을 제시했다면 심상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단지 민주당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런 적극적인 전략을 세우고 행동을 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심상정의 의도에 대한 어떤 단정적 추론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떠나거나 버리려고 했다면 더 좋은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민주당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들이 심상정이라는 대중성과 인지도를 갖춘 진보 인사를 영입할 수 있었던 기회는, 오직 이번 재보선 뿐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장상을 데려왔고, 국민참여당 측에서 끈질기게 요구한 단일화 요구를 결국 선거 직전에서야 수락하였으며, 참패하였다.

말하자면 '빅 텐트'를, 민주당의 입장에서 주도적으로 칠 수 있는 기회는 이번 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오를 꺾으면 '이명박 정부 심판'이라는 민주당의 기조를 꾸준히 유지할 수도 있고, 독자세력을 유지하려 하는 진보신당과 그 외 세력들의 기세를 완전히 허물어뜨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민주당이 진보정당이거나 진보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들이 정치적 승리를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집단이냐 아니냐는 것을 문제삼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민주당은 철저히 몇몇 지도부의 손아귀에서 움직일 따름이다.

스스로의 영역을 더 개척할 능력을 잃어버린 지도부가 지휘하는 정당에서 공천을 받는 것은, 그래서, 특히 정치 신인으로 무대에 데뷔하고 싶은 누군가에게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엄기영은 왜 본인의 이미지를 망쳐가면서까지 한나라당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는가? '진보 개혁'적 성향을 지닌 분들께는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민주당의 현실이다. 이념적으로는 사실 한나라당과 크게 다를 바 없고, 하지만 당선가능성은 형편없이 낮고. 그게 민주당이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진보진영 내에서 '빅 텐트' 같은 공상정치소설이 절판되기를 소망한다. 현재의 민주당은 과거의 민주당의 유산을 갉아먹으며 존속하는 이익결사체일 뿐이다. 정권심판론의 바람이 몰아치지 않는 한, 그들은 이재오같은 토박이 거물을 이길 능력이 없다. 그런 판세를 읽고 엄기영은 한나라당의 공천을 받고 싶은 뉘앙스를 풍기며 바바리 코트를 여민다. 결국 남은 것은 심상정과 같은 진보정치인들의 선택과 결단이다. 썩은 기둥 밑에서 아직도 '빅 텐트'를 부여잡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남은 2년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를 시작할 것인가?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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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0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강만수 특보의 이중국적 발언 – 마붑 알엄 씨의 경우

가령 내가 이 코너에서 ‘나는 저탄소 녹색성장이라는 정부의 기조에 동의한다’라고 선언한다고 해보자. 사람들은 미쳤구나, 라고 대답할 것이다. 마치 대운하, 혹은 4대강 정비 사업에 동의한다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한국과 같이 이미 성장할대로 성장해버린 경제 체계가 발전의 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산업 기조를 변화하는 일이 꼭 필요하며, 기후 변화와 환경 문제가 엄습해오는 21세기 초반의 현실을 놓고 볼 때 그 방향은 결국 ‘저탄소 녹색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4대강 정비는 전혀 저탄소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지만, 그 고탄소 회색성장에 걸려있는 깃발은 분명 ‘저탄소 녹색성장’인 것이다.

이처럼 문제는 정부가 전혀 엉뚱한 방향에 올바른 단어를 가져다가 써먹고 있다는 데 있다. 현 정부에서 발표하고 있는 정책 기조들 중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할만한 것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친 서민 경제정책’, 얼마나 좋은가. ‘중도 실용주의’도 말은 좋지 않은가.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고, 실제로 진행되는 바를 살펴보면 본래의 이상이 실현되기는 커녕 그와 정반대되는 방향으로만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 한국경제 온라인 기사 화면 ⓒwww.hankyung.com  
 
오늘 다루게 될 ‘이중국적’도 마찬가지이다.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는 9월 7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중국적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을 내놓았다. 그는 “돈을 지원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다. 해외 우수 인재를 받아들이는 이민정책도 검토해야 한다. 나도 백인 조카 며느리가 둘이다”고 말했다. 강 특보가 ‘백인 조카 며느리’를 언급하는 것만 봐도 우리는 이미 그가 생각하는 ‘이중국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중국적 허용 그 자체는 옳은 일이라는 것이다.

저출산 문제에 대한 가장 확실한 해법은 이민자들에 대한 문호를 넓히는 것이다.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낼 수 없는 한, 떨어지는 출산률을 직접적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출산 보조금 지급, 육아 환경 개선 등 간접적인 일들 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출산률이 떨어지면 전체 인구의 노령화가 진행되고, 경제적 요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사회의 활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각국 정부는 출산률 저하와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제시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강만수, '저출산 해결하기 위해 해외 우수인재 받아들여야'

인구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인 이민 수용 정책을 펴는 것이다. 이미 경제적으로 충분한 성장을 이룩한 나라에서는 출산률이 저하되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의 경우 아직도 인구증가율이 너무 가파르다. 이런 경우 이민은 해당 국가의 국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민을 받아들이는 나라는 그로 인해 국내의 인구 저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이중국적 문제에 접근해보자. 2009년 5월 현재 국내에는 45만 명의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다.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 불법체류자만 해도 20만 명에 이른다.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60% 이상은 방문취업자이다. 방문취업자에게는 최장 3년의 체류가 허용되며, 요식업이나 건설업 생산직 등 일부 제한된 업종에 한하여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3년 이상 체류할 경우이다. 현행법은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자신의 국적을 보유한 채 머무르는 것, 즉 간이귀화를 허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한국 국적을 얻거나 한국에서 떠나야 한다.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들의 인권 신장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한국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경우 사람은 자신의 국적에서 정체성을 확인하곤 한다. 따라서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않는 한,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한국에서 이른바 ‘후진국’ 국민들에게 국적의 문호를 쉽게 열어주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그 문제까지 다루지는 않기로 하자). 문제는 그 국적이 없으면, 유학생이나 어딘가에 고용된 누군가가 아닌 다음에야, 3년 이상 체류하면서 경제 활동을 하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는데 있다.

혹자는 이런 사안을 논하면 ‘거지 나라에서 온 거지들이 우리나라에서 돈 벌어서 나가려는 걸 우리가 왜 보장해줘야 하냐’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다 자기네 나라로 송금해버릴텐데, 그러면 국부가 유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의 목소리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통해 반박했던 중상주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가치는 화폐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한국에 와서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한다면 그는 그 활동을 통해 그만큼 한국의 GDP를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동시에 외국인 소비자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그들이 버는 액수 중 일부가 국외로 유출된다 해도, 한 사람이 한국에 들어와서 노동하고 소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순전히 대한민국의 GDP를 증가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대세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돈을 벌어서 들고 나간다 한들, 이미 그동안 먹고 마시고 생활하면서 쓰는 돈이 있고 그것이 한국 경제에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혹은 들어와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일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모두 지하경제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강만수의 발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가 말하는 ‘이중국적’은 이렇듯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저소득층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닌 듯하다. 강만수 특보가 과연 영화 <반두비>의 주인공을 맡은 마붑 알엄 펄럽 씨와 같은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 말을 했을까? 마붑 알엄 씨는 방글라데시의 두라람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한 인재다. 영어는 당연히 잘하고 한국어도 한국인처럼 하며, 그 외에도 뱅골어, 우르드어, 힌두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그런 그도 한국에 와서 염색공장, 플라스틱 공장 등 3D업체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노동운동에 뛰어들었고 지금도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과연 강만수가 말하는 “해외 우수 인재”에 마붑 알엄 씨 같은 사람이 포함될 수 있을까? “백인 며느리 두 명”을 운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절망감이 앞선다. 인종주의라는 게 별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짓이 바로 인종주의이다. 이중국적 허용 논의가 이렇게 흘러가서는 안 된다. 이주민들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논의여야지, 인종주의에 찌든 ‘해외 우수 인재’ 타령이나 부유층의 탈세와 병역 회피 논란으로만 치달아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제발 우리와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

노정태/전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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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 중도주의의 덫

오바마 미 대통령이 ‘중도주의의 덫’에 걸렸다. 의료보험 개혁과 관련하여 보수층과 진보층 양쪽으로부터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전 세계인의 대통령으로 환영받았던 그의 지지율은 현재 50% 선에서 오가고 있다(국내 상황 때문에 이게 ‘높은’ 지지율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초기임을 감안했을 때 유례가 없이 낮은 수준이다). 대선과 총선 모두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공히 다수당의 위치를 점하고 있지만 정작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오바마의 개혁은 시작부터 높은 파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놀라울 정도의 카리스마와 연설 능력 및 매력을 지닌 정치인이 혜성처럼 등장하여 드라마틱한 경선을 통해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높은 기대를 받으며 대권을 탈환해낸 모습은 여러 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케했다. 따지고 보면 그런 측면이 적지 않다. 오바마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누어진 미국을 ‘하나의 미국’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다. 노무현은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과제임을 천명했다. 양자 모두 기존의 ‘정치권’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고,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노무현과 오바마 모두 사회적으로 볼 때 비주류 출신이며 그들의 당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차별 구조가 어느 정도는 해소되었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닌다.

   
  ▲ 경향신문 8월 18일자 9면.  
 
노무현과 오바마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난맥상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장점이나 특징 뿐 아니라 단점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중도주의’라는 막연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그 단점으로 꼽힐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노 정부에 온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주요 개혁 법안들을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여당이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변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마찬가지 현상이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미국 민주당은 현재 상원과 하원 모두에서 다수당이며, 지지율이 떨어지긴 했지만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일구어낸 대통령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의료보험 개혁 법안의 처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까?

국내 매체에서는 이 사안을 두고 ‘세금 내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미국인들의 정서’ 등을 이유로 들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바마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을지언정 사태 자체를 이해하는데는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설명이다. 미국인들은 원래부터 세금 내기를 싫어했지만, 강력한 국세청 덕분에 성실한 납세가 몸에 베어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극성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이 정부에서 추진하는 ‘타운홀 미팅’을 방해하고 반대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지만, 애초에 이런 법안을 처리하고자 했다면 그정도 저항은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었지 그것 ‘때문에’ 일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은 개혁을 추진하고 성사시킬만한 오바마측의 동력이 고갈되고 있다는 데 있다.

오바마가 ‘초당적 협력’, ‘중도주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는 비판을 이제는 피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의료보험 개혁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몰아붙이는 보수진영의 공세에 맞서 굳건한 신념을 보여주지 못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내 보수파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보인다. 본인이 빌 클린턴처럼 탁월한 사교술을 바탕으로 의원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세부적인 주고받기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화당의 이탈표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중도주의’의 이상을 빨리 포기해야 한다.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의원과 민주당 의원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중도주의는 없다

여러 진영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풀뿌리 자원봉사자들의 조직력과 단결력이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버락’이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운동원들 사이에서는 선명성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대통령이 된 그에게 실망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며, 그런 이들의 목소리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타남으로써 정책에 대해 토론하고 힘을 모아야 할 시점에 내부의 정치 투쟁이 불거지는 것이다. 이 모든 광경을 우리는 이미 지난 정부 기간 동안 충분히 보아 왔다.

그렇게 해서는 소수파 출신 정치인이 살아날 수가 없다. 자신보다 강한 세력들의 눈치를 보는 것도 하나의 생존술이 될 수 있겠지만, 이미 대통령이라는 자리까지 얻어내었다면 자신의 지지층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세상이 두 쪽 나도 나는 내 진정성을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야 할 때이다. ‘중도주의’를 외치며 이쪽의 정책과 저쪽의 정책을 절충하겠다는 발상은 양쪽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본거지 역할을 해야 할 기존 지지자들마저 이탈시키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와 『프레임 전쟁』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와 그가 만든 로크리지연구소의 정치 전략 제언에서 따온 것이다. ‘중도주의’는 없다.

가령 낙태에 대해 정치적 논쟁이 발생했다고 해보자. 한 아기를 ‘중간 정도’만 낙태할 수는 없다. 결국 모든 해답은 0 아니면 1, 도 아니면 모로 나누어지게 마련이다. 여기서 진보진영에 속한 누군가가 ‘중도주의’를 표방함으로써 어중간한 합의책을 도출하거나 그런 제안을 어물쩍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미 견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수층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우리가 이미 노무현 정부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시피, 기존의 지지층이 대폭 이탈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중도주의 덫에는 미래가 없다

레이코프 교수와 로크리지연구소는 ‘중도주의’를 추구하지 말고, 대신 지지층과 반대자에게 강력한 ‘진정성’을 보여줄 것을 권한다. 사람들이 정치인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특정 정책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을 믿고 내 삶의 중요한 결정을 맡길 수 있는지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의료개혁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정책적인 차원에서 이것 저것을 뒤섞는 것보다, 현재 추진되는 의료보험 개혁이 어떻게 ‘미국적 가치’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진정성 있게 설득하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에게는 탁월한 대중 설득력과 카리스마가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활용해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도 우리는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통일에 대한 그의 신념은 그를 평생 빨갱이라는 족쇄에 묶어놓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그것을 ‘중도적’으로 뒤섞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 반대로, 국민들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진정성’을 갖고 때를 기다리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입장을 다져나갔다. 70년대의 김대중과 2000년대의 김대중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을 취할지 모르지만, 통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초지일관 같은 편에 선다. 그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연이어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영원히 떠나보내며, 그 유산을 어떻게 관리하고 키워나갈 것인지를 놓고 이른바 ‘진보 진영’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진정성’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중도주의자’로 포장하려고 하며, 계파 내의 이합집산에만 집중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잡탕밥같은 정책을 내놓는 일에만 골몰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중도주의는 덫이다. 그것은 권력을 이미 어느 정도 가진 사람이 여타의 정치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워낙 중간을 좋아한다고?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라’고 외친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의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중도주의의 덫에 빠져 있는 한,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