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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8

오드리 탕: 공무원의 역할

우선 공무원이 책임져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번째는 확실성이다. 상수도와 인터넷이 끊김없이 제공되도록 하는 것도 확실성이다. 두번째는 정의와 균등함이다. 모두는 균등한 기회를 가져야 하며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한다. 세번째는 민주주의 의지에 대한 반영이다.

공무원의 역할은 민주주의 의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뀔 것이다. 10년 뒤에는 사람들이 누군가가 대신 해주길 바라는 대신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적인 행동을 할 것이며 더이상 디지털 장관 같은 역할이 필요없게 될 수도 있다.

또한 머신러닝과 자동화 등이 공무원들이 하는 업무 중 ‘확실성’과 관련된 업무들을 대체할 것이다. 따라서 10년 후 공무원의 역할은 공공의 가치를 찾아 사회정의가 유지되도록 하는데 집중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사회적 지위가 다르더라도 공유할 수 있는 공공의 가치를 구성원들이 찾아내고 관련 규범을 만드는 데는 인간의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역할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강현숙, 오주영, "[인터뷰] 대만 디지털 장관 오드리 탕 (3)", 2020년 4월 10일.

‘디지털 시대와 공무원의 역할’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텍스트 가운데, 가장 탁월한 축에 속한다. 공무원이란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하며 왜 해야 하는가? 기술 발전에 따라 그 일은 어떻게 달라질 것이며 어떤 식으로 존속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품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2020-04-16

아직 개표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2004년 총선, 노회찬이 소수점 차이로 김종필을 꺾고 국회에 입성했던 그때를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민주노동당이 급성장하여, 마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리버럴 파티를 압도하고 보수당과 양당 구도를 이루는 미래를 꿈꿨다.

어린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가 아무리 원숙했다한들, 정의당이 된 민주노동당이 NL 주사파 주류가 떼어준다고 꼬여낸 비례 의석 몇 개에 눈이 팔려, 원칙이고 뭐고 다 갖다바치며 공수처같은 악법에 동의할줄은 몰랐을 것이다.

개표 결과가 최종적으로 어찌되건, 이미 내 피는 식었다. 내가 현실 정치에서 희망을 보던 나날은 여기서 마무리되는 듯하다.

2020-04-12

21대 총선 과정에서 확인된 몇 가지

  • ‘소수 정당을 우대하는 제도’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도 결국 정치 지형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만든다.
  • 우리가 잊고 있던, 단순다수대표제에 기반을 둔 소선거구제의 장점.
    1.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유권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2. 선거에 참여하는 모든 후보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3. 유권자에게 ‘저 인간 떨어뜨리기’의 권리가 주어진다. 반면, 비례대표제의 경우, 유권자는 무슨 수를 써도 타 정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떨어뜨릴 수 없다.
  • 애초에 ‘소수 정당의 원내 진입을 촉진하는 제도’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봐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왜 당위적 선으로 여겨지는가? 어차피 국회에 보내놓으면 거대 여당/야당 따까리 짓이나 하는데?
  • 소선거구제이며 비례대표 따위 없는 영국의 정치.
    • 한국보다 훨씬 역동적이다.
    • UKIP이나 스코틀랜드 국민당 같은 소수 정당이 출현하여, 대중을 설득하고, 민심을 움직여, 소선거구제를 뚫고 의석을 얻어낸다.
    • 그 역동적 과정 속에서 영국은 새로운 정치적 의제와 대립 구도를 얻었다(그 의제가 좋은 의제라는 뜻은 결코 아님).
  • 반면 한국은, 제도만 신나게 뜯어고쳤지, 5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대립 구도 속에서, 현재의 국면에 걸맞는 정치적 의제를 내놓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
  •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가? 왜 ‘제도’ 탓이나 하는가?
  • 이것은 정치인들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생각하기로.

2020-04-06

2000년대 초, 인터넷과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촬영자와 모델의 갑을 관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전문가이든 아마추어 동호회원이든 ‘촬영을 거부한 모델’이라는 소문이 나면 사진 업계에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 관계를 악용해 모델을 성적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비공개 촬영회가 2000년대 초반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게 곽씨의 증언이다.

허정헌, ‘모델이 신었던 스타킹 나눠 드려요’ 도 넘은 촬영회, 한국일보, 2018년 5월 21일. http://m.hankookilbo.com/News/Read/201805211066365076

2000년대 초반. 디씨 부흥기. 월드컵 하고 세상 다 ‘우리 거’라고 믿던 때. 페미니즘이 여성만이 아닌 ‘모두’의 것이던 시절.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부장관을 ‘흑미추녀’ 같은 식으로 조롱하는 영상을 만들고 유포해도 ‘진보적’으로 괜찮다고 여겨지던 시절. 여자니까 박근혜를 지지할 수도 있다던 최보은을 김규항이 두들겨 패놓은 탓에, ‘젖녀오크’ 같은 언어 성폭력에 감히 반발하지 못하던 시절. 다함께 여혐하던 시절.

발기탱천한 진보남들의 부랄발광에 여성들이 장단맞춰주고 남성적 언어의 외피를 둘러쓰고 같이 놀았던, 혹은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절. 그게 존나 쿨한 줄 알았던 시절. ‘우리’가 이 시점에 ‘힘을 몰아주지’ 않으면 수꼴들이 부활한다는 협박이 날아오던, 그런 시절에 만들어진 여혐 템플릿들.

우파 남자들은 국가의 개입이 싫지만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라서, 좌파 남자들은 시장주의가 싫지만 가난한 여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라면서, 성매매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이대 부르주아 꼴페미’를 욕하던 시절. 성매매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좌파 남자’들이 진보 사이트에서 히죽대던 시절.

* 일러두기: 표현이 다소 거칠지만 기록 및 공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여,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블로그에 적어둡니다.

2020-04-04

코로나 바이러스와 페미니즘의 위기

COVID-19 사태는 여성주의와 그 성과마저 위협하고 있다. 재택근무 혹은 자가격리가 일상화되면서 당연하다는 듯 여성에게 가사노동이 떠안겨지고 있는 현실에서 논의를 시작해보자.

외신도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인한 위기를 겪고 있지만 아시아 여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8일 재택근무와 함께 가사노동·자녀돌봄노동을 해야 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언급하면서 “어린이집과 학교들이 문을 닫으면서 특히 일하는 여성의 육아 고충이 커지고 있다. 성 불평등이 더욱 심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가연, “”코로나 때문에 일이 두배” 육아·가사노동에 피로 호소하는 여성들”, 아시아경제, 2020년 3월 10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0031009205389640

이는 단지 집에서 밥을 더 자주 해야 하고, 아이를 돌보는 일 등이 여성에게 편중되게 떠넘겨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가령 말레이시아의 경우 SNS를 통해 재택근무중인 여성들을 상대로 ‘남자를 위한 직장의 꽃’ 역할까지 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가 빈축을 산 바 있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여성부는 앞서 이동제한령에 따른 봉쇄 기간 중 아내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들을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게시했다. 현재 삭제된 게시물에서 여성부는 여성들에게 남편에게 잔소리하지 말라고 조언하고, 여성들이 집에서도 편하게 입기보다는 옷을 단정히 입고, 화장도 하라고 권했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 그림에는 금지 표시를 하고,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PC작업을 하는 여성을 포스터에 등장시켰다. 여성들이 가사일에 도움이 필요할 때 ‘비꼬는’ 태도를 남편에게 취하지 말라고도 했다.

조재희, “”아내들, 잔소리말고 화장해라”가 봉쇄 기간 정부 지침?”, 조선일보, 2020년 4월 1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4/01/2020040101974.html
/말레이시아여성부 인스타그램·호주 ABC | 조선일보 기사에서 재인용

여기서 우리는 경제 영역에서 페미니즘이 추구한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라는 명분 하에 심각하게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제약 없이,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일할 권리
  2. 여성이 직장에서 일함에 있어서 소위 ‘여성적인 역할’에 묶이거나 그러한 역할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보다 근본적인 문제 또한 발생하는 중이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시행된 주말, 영국의 가정폭력 상담 핫라인에 걸려오는 학대 신고 건수가 65% 증가했다. BBC는 자신을 성적으로 학대했던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살고 있던 여성이, 직장이 문을 닫으면서 월세를 내지 못해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게 된 경우도 보도한다. 여성의 경제적 생활과 권리 이전에 직접적인 생존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퇴행은 COVID-19가 최초로 터져나온 중국에서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마치 그 동쪽에 있는 어떤 나라처럼) ‘우리가 코로나 대응을 정말 잘한다 최고다’ 따위 프로파간다에 매진했는데, 그 주요 소재로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원되어 왔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환자에게 헌신하기 위해 삭발한 간호사의 눈물겨운 사연이라던가, 뭐 그딴 것들. 인터넷의 반응을 살펴보면 일부 한국인들은 그런 모습에 진심으로 ‘감동’하기까지 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인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여성의 신체를 정권 홍보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는 위챗 기사가 10만 건 이상의 조회수를 올린 후 검열되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말이다.

중국의 의료 현장에서 여성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홍보를 위한 성적 이미지의 대상으로 착취당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남자들보다 더 열등한 급식을 받아왔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한 바 있다.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여성을 헌신적이고 용감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이상화하면서, 대상화하고, 뜯어먹는 것이다.

The propagandists’ portrayals of women during the epidemic—as self-sacrificing, brave or beautiful—“basically all follow the playbook”, says Zoe, the blogger. But she was surprised to see a state-run charity follow the volunteers’ lead and donate sanitary pads. People’s Daily has condemned “feudal” attitudes to menstruation and eulogies to “extreme behaviour” such as returning to work right after a miscarriage. Only fierce and widespread anger, she reasons, could have spurred the party’s mouthpiece to say such things.

“Covid-19 has revealed widespread sexism in China”, The Economist, 2020년 3월 7일. https://www.economist.com/china/2020/03/07/covid-19-has-revealed-widespread-sexism-in-china

아직 사태가 종식되려면 멀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잠잠해진다 해도 언제 다시 발병자가 솟구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니 더더욱, 이러한 재앙을 기회로 여성의 권리를 빼앗으려 하는 권력의 움직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다.

2020-03-27

n번방과 텔레그램, 기술과 선악의 문제

특정 기술의 기반 위에서 발생하는 악을, 기술 자체의 선악 판단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도, 텔레그램도, 기술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이번 사안에서는 그렇다.

텔레그램이 특정 국가의 ‘범죄 수사’ 목적에 따라 자료를 제공하기 시작하면, 러시아 정부가 추적하는 반체제인사와 성소수자 및 인권 운동가, 대륙 중국과 홍콩의 반 시진핑 운동가들 등의 신변이 모두 위험해진다.

n번방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악이지만, 반 시진핑 반 푸틴 운동가들은 정의의 편이니까, 다른 케이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발화자는 텔레그램이라는 일개 인터넷 메신저 서비스의 운영진에게,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결정할 권한을 주는 셈이 되어버린다.

n번방에 관여한 개자식들은 모두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 일벌백계가 아니라 백벌백계가 답이다. 그런데 그게 텔레그램의 잘못인가? 지금은 그 이용자들이 또 다른, 기밀성이 보장되는 메신저 혹은 딥웹으로 향했을 것이다. 그럼 그건 또 그 서비스의 잘못인가?

이 사안을 두고 ‘기술에 대한 인문학적/시민사회적 성찰’을 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의아하다. 이것은 경제적, 정서적으로 취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다. 성범죄는 성범죄로 다뤄야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중산층 이상 가정에서는 어린이 청소년들의 SNS 사용을 금지 혹은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21세기다보니 기초적인 학교 과제를 위해 다들 구글 계정은 가지고 있고, 구글 문서 등을 이용해 숙제를 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공유 구글 문서를 만들어 채팅창으로 활용하고, 당연히, 그 공간에서 사이버불링도 죽어라고 한다.

그럼 이게 구글 탓인가? 구글이 모든 사용자의 모든 문서 사용 내역을 조회하여, 사이버불링이 발생할 경우 신고해야 하나? 당신들이, 혹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가? 어떤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텔레그램 탈퇴 선언’ 등을 종종 보면서, 나는 우리 사회가 (넓은 의미에서 ‘서구 문명’의 일부인) 기술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전시하며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경향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쉬운 답은 없다. 하지만 ‘쉬워보이는’ 답은 있다. 신기술에 손가락질을 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런 ‘쉬워보이는’ 답을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

2020-03-25

유발 하라리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찬양하지 않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하긴 했다. 하지만 한국'만'을 논한 것도 아니고, 예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Financial Times에 기고한 칼럼 중 한국이 등장하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Asking people to choose between privacy and health is, in fact, the very root of the problem. Because this is a false choice. We can and should enjoy both privacy and health. We can choose to protect our health and stop the coronavirus epidemic not by instituting totalitarian surveillance regimes, but rather by empowering citizens. In recent weeks, some of the most successful efforts to contain the coronavirus epidemic were orchestrated by South Korea, Taiwan and Singapore. While these countries have made some use of tracking applications, they have relied far more on extensive testing, on honest reporting, and on the willing co-operation of a well-informed public.

“Yuval Noah Harari: the world after coronavirus | Free to read”, Financial Times, 2020년 3월 20일. https://www.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한국, 대만, 싱가포르가 공히 거론되고 있다. 또한 이 세 나라 모두 정보통신기술을 이용해 국민들의 동선을 추적하였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포르는 대륙 중국과 이스라엘에 비해 훨씬 인권을 존중하며 검역 및 격리 절차 등을 수행하므로,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내용을 한국 언론은 이런 식으로 번역하여 전달하고 있다.

반면 투명한 정보 공개와 시민들의 협조로 감염 확산을 저지한 성공적인 사례로는 한국을 들었다. 하라리 교수는 “한국은 일부 접촉자 추적시스템을 이용하긴 했지만, 광범위한 검사와 투명한 보고, 정보를 잘 습득한 대중의 자발적인 협조에 의존했다”고 지적했다.

박형기, 박혜연, 박병진, “유발 하라리-폴 크루그먼 등 세계적 석학 “한국 배워라””, 뉴스1, 2020년 3월 22일. https://news.v.daum.net/v/20200322120107853

이것은 의도적인 왜곡 보도의 사례로 기록되어야 한다. 유발 하라리는 한국인들의 국뽕을 충족시켜주며 밥벌이를 하는 ‘영국남자’ 같은 캐릭터가 아니다. 왜 우리의 언론은 멀쩡한 한 사람의 학자를 한국에서 국뽕 장사하는 외국인 유튜버 수준으로 전락시키는가.

통탄할 노릇이다. 이번 COVID-19 감염증 사태로 인해, 한국 언론의 수준이 점점 더 깊게 곪아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2020-03-24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배우는 이유

배울 게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코로나 대응’에서 배울 게 없는 나라도 있다.

대만, 뉴질랜드 등이 그렇다.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차단하고, 귀국하는 자국민의 건강 관리와 동선 추적을 제대로 해낸 그 나라들은, 미국이나 유럽 입장에서 볼 때 배울 게 없다. 걸리지도 않은 병을 치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지금처럼 100명 넘는 사망자에 8천여 명의 감염자가 나오도록 사태를 키우지 않았다면, ‘세계가 보고 배우는’ COVID-19 대응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다.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막는 것. 돌아가야 할 사회 기반이 제대로 작동하게 함으로써, ‘아무 일 없는 일상’을 지켜주는 것.

반대로 기업은 없는 문제도 만들어서 해결책을 팔아먹는 집단이다. 멀쩡히 다들 3.5파이 이어폰 잘 쓰고 있는데, 애플에서 ‘유선 이어폰은 적폐다’라고 손가락질하더니, 이어폰 구멍을 없애고 ‘혁신적’인 에어팟을 팔아먹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국 정부의 COVID-19 대응은, 국가로서 수준 미달이다. 없어도 되는 문제를 키우거나, 문제가 커지도록 방치한 후, 허둥지둥 처리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걸 외국에서 참고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정말 좋은 나라, 국민을 진정 보호하는 나라는, 그런 문제가 아예 생기도록 하지 않는 나라다. 대만이나 뉴질랜드처럼.

2020-03-14

중국발 입국 봉쇄, 부도덕과 비도덕의 경계에서

퀴즈. 2020년 3월 14일 현재, 뉴질랜드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는 총 몇 명일까? 정답은 5명. 눈을 의심할텐데, 다섯 명, 맞다. 감염 의심 증세를 보였으나 검사 결과 음성으로 나온 사람은 379명, 현재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은 두 명이고, 사망자는 없다.

뉴질랜드의 인구가 480만명이 조금 안 되는 수준이라고 해도 이것은 실로 경이로운 숫자다. 한국의 확진자가 50명에 검사 결과 음성인 사람이 3800명 정도라고 생각해보면 금방 감이 올 것이다. 세계가 놀라고 경탄해야 할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하고 있는 곳은 다른 그 어디도 아닌 뉴질랜드인 것이다.

그런데 그 뉴질랜드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2월 3일부로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던 것이다. 1월 28일 컨트롤 타워에 해당하는 National Health Coordination Centre (NHCC)를 세운 후, 그 통제에 따른 대응이었다. 외국인의 경우 중국을 떠난지 2주가 지났음이 확인된 경우에만 입국을 허용했다. 사실상 '중국 봉쇄'를 단행한 것이다.

3월 14일 현재 대만의 확진자 수 또한 40여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만 또한 뉴질랜드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입국을 전면 차단했다.

대만과 뉴질랜드, 두 나라에는 공통점이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초기에 중국으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았고, 돌아오는 자국민을 철저히 추적 관리했다. 더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섬이라는 것이다. 출입국 통제가 용이하다.

반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 또한 사실상 섬이다. 뉴질랜드나 대만보다 더 훌륭한 의료 체계와 헌신적인 인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응은 대만 및 뉴질랜드와 너무도 달랐다. 중국 본토로부터의 외국인 입국을 막지도 않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한국인에 대한 세심한 추적 관찰도 수행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활발한 사회 활동'을 권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사망자 수는 대만의 확진자 수보다 많다.

진지하게 묻자. 뉴질랜드와 대만의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차별과 혐오의 표현인가? 뉴질랜드 총리 저신다 아던은 1980년생 여성으로, 세계 최연소 여성 지도자이며, 노동당이다.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진보 여성 지도자다. 차이잉원의 내각에는 오픈리 트랜스젠더 장관이 IT 기술을 총 지휘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를 혐오냐 아니냐의 문제로 끌고 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친문 선전선동가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의 눈에는 차이잉원과 저신다 아던이 혐오와 차별을 주장하는 수구 꼴통으로 보이는가? 내 눈에는 그들이, 자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당연한 일을 담대하게 하는 국가 지도자로 보인다.

솅겐국(aka 유럽)이나 미국처럼 육로로 외국과 교통이 가능한 나라는 입국 금지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만이나 뉴질랜드 혹은 한국 같은 섬나라는 입국 금지를 하면 외국인이 못 들어온다. 입국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기만 해도 필요 이상의 왕래가 줄어들면서 감염 경로 추적이 용이해진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정부와 청와대는, 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초기에 바로 그것을 하지 않았다. 60명 넘는 국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남은 국민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병이 옮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스크를 구입하기 위해 약국 앞에 줄을 선다.

세계가 한국의 코로나 대응을 칭송한다고? 웃기고 자빠진 개소리 집어치워라. 진정 바이러스 대응을 잘 해낸 국가들은 따로 있다. 지리적 여건을 살려 봉쇄에 성공한 나라들은 모두 수십 명 수준으로 감염자를 통제했고, 뉴질랜드의 경우 아무도 죽지 않았다. 대만은 단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때 보건 총책임자가 통곡했다.

'글로벌 언론'들은 그런 사례를 부각시킬 수가 없다.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지리적 여건이 갖춰져야 가능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와 대만의 성공 사례가, 글로벌 언론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방향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정부가, 글로벌 언론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아닌가?

다시 차별과 혐오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가 중국인, 특히 조선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우려가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에게 면역도 백신도 없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상황이다.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 입국을 금지하는 것은, 혐오 행동인가? 아니다.

중국인, 조선족에 대한 혐오는 부도덕(immoral)한 것이다. 반면 질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을 차단하고, 중국발 한국인의 행동 경로를 추적하는 것은 그저 의학적인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자체는 도덕적인 선악을 따질 일이 아니다. 비도덕(unmoral)이다. 쓰나미가 몰려올 것에 대비해 제방을 높이 쌓는 것이 도덕과는 무관한 것과도 마찬가지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금지라는 대응을 초기에 시행하지 않은 이유가, 과연 중국인 혹은 중국계 동포에 대한 혐오를 막기 위한 것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한국의 청와대가 그렇게까지 탁월한 인권 감수성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대통령이 뭘 하건 옹호하는 친문 네티즌들은 중국발 입국 금지를 주장하는 이들을 '혐오 세력'으로 몰아가기 바빴다.

요컨대 그들은, 부도덕을 막기 위해, 도덕과 상관 없이 요구되는 대응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 소리를 지껄이던 사람들은, 사람이라면, 지금까지 발생한 60명이 넘는 사망자들 앞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세계가 감탄하는 한국의 코로나 대응 능력 최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확진자를 찾아낸다 크어~' 같은 소리들을 지껄이는 중이다. 나는 그들을 보며 인간이라는 종 자체에 대해 회의에 빠지고 있다.

정리해보자. 중국발 외국인의 입국 차단은 몇몇 국가에서만 효과가 있었다. 전 국토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들이 그렇다. 대만과 뉴질랜드는 이른 시점에 봉쇄 전략을 택해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길을 택했고, 그 대가를 값비싸게 치르고 있다.

중국발 외국인 입국 봉쇄를 도덕적 사안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방역 차원에서의 입국 봉쇄 조치는, 그 자체만으로는, 비도덕(unmoral)한 일이다.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런 봉쇄 조치가 한국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혹은 한국인으로 완전히 동화된 중국계 시민들에 대한 혐오로 번질 우려는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부도덕(immoral)의 문제를, 비도덕(unmoral)한 의학적 목적의 입국 봉쇄와 혼동하는 것 자체가 오류다.

이 문제를 연거푸 강조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관념과 끓어오르는 도덕적 정념들이 너무도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혐오하라' 같은 손쉬운 구호를 앞세우는 얼간이들이 득세할 때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만다. 지금도 어쩌면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기준을 잃지 않되, 도덕을 적용할 곳과 아닌 곳을 명확히 구분하는 지혜가, 무척이나 절실한 요즘이다.

2020-03-08

정부와 언론의 뻔뻔스러운 '바이러스 검사 맛집' 프레임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놀랍지 않다. 여론조사가 조작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여론 그 자체가 조작에 가깝도록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정부가 뭘 잘못해왔는지, 뭘 잘못하고 있는지, 뭘 더 잘못할 예정인지 모른다. 대신 그들이 아는 것은 언론을 통해 유포된 이상한 프레임이다. 가령, 이런 것들 말이다.

  1. 한국은 정말 빠른 속도로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전 세계가 깜짝 놀라 감탄한다.
  2. 한국은 정말 투명하게 정부가 모든 정보를 공개하며, 그래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과 싸우는 전 세계 정부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일단 1을 살펴보자. 얼핏 들으면 한국이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개쩔게 잘 대응하는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검사를 하는 것은 그만큼 감염자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감염된 사람이 없다면 검사를 할 일도 없다. 이건 마치 집이 활활 불타고 있는데 소방수가 불 잘 끈다고 좋아하는 꼴이다.

COVID-19 감염증 검사 프로토콜. 일단 열이 나야 하고, 마른기침을 동반한 가래가 나와야 한다. 그 가래를 채취하여 검사한다. 1차 의료기관에는 지금도 수많은 감기, 폐렴 환자들이 당도한다. 의사들이 그들 중 COVID-19 감염 의심자를 걸러낸다. 그렇게 한 차례 선별된 의심 증상자들의 가래를 채취하여 샘플을 만들고, 샘플을 분석하여 확진자를 선별한다.

즉, COVID-19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고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 모두가 검사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 대상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일부는 음성이 나오고 일부는 양성이 나온다. 그렇게 양성이 나온 사람들만 확진자다. 이 관계를 집합으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확진자 ⊂ 피검사자 ⊂ 유증상자

그러므로 한국에서 검사를 빨리 한다고 자랑할 일은 하나도 없다. 외국인들이 보면 신기하긴 할텐데 그게 외신에 나온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의료 자원을 총동원해야 할만큼 COVID-19 바이러스가 퍼졌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면 애초에 이렇게 '세계가 깜짝 놀라는 한국의 검사 속도'를 자랑할 일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과 청와대의 판단 착오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어쩌면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한국의 검사 속도 세계가 깜놀!'같은, 무슨 나영석 PD가 연예인들 데리고 외국 나가서 식당 차리고 외국인들이 맛있다고 따봉 해주는 것 같은 프레임을 언론에서 적극적으로 유포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외신들은, 좀 보기 드문 일이긴 하니까 보도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그런 장단에 놀아나는 건 좀, 문제 있지 않나? 집에 홍수가 나서 오수가 역류하고 있는데 '캬, 우리 형님 바가지로 물 퍼내는 솜씨 보소~ 엄지척!' 이지랄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 프레임도 그렇다. 귀찮아서 모든 외신을 일일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어권 언론이라면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를 백퍼센트 찬성하거나 환영할 까닭이 없다. 아니나다를까, 이번주 이코노미스트를 펼쳐보니,

In South Korea, by contrast, the government is being forthright and formidably transparent, allowing Koreans to trace their possible brushes with the disease. As well as briefing the press thoroughly twice a day, and texting reporters details of every death, the government puts online a detailed record of each new patient’s movements over previous days and weeks, allowing people to choose to shun the places they visited. The risk of illicit activity being thus uncovered—at least one extramarital affair may have been—gives people an extra incentive to avoid exposure to a disease which, in most of the infected, results in only mild symptoms.

한국에서는 대조적으로 정부가 직설적이고 투명해서 한국인들은 질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스스로 추적해볼 수 있다. . . . 바람직하지 못한 활동이 드러날 위험도 있다. 적어도 한 건의 불륜 사례가 드러났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의 감염 사례에서 가벼운 증상만 보이고 끝날 수 있는 이 병에 노출될 가능성을 더욱 피하게 만드는 유인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What the world has learned about facing covid-19", The Economist, 2020년 3월 5일

국민의 신용카드와 교통카드 정보에 기반해 누군가의 소비와 동선을 모두 추적하여 까발리는 것은, 외신들이 나오는 '서구 선진국'이라면, 영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수집하여 언론에 대서특필하고 있다.

이것을 '투명성'이라고 아이고 좋다 멋지다 한국 최고~ 라는 식으로 영어권 언론이 다룰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할 것이다. 지금 위에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기사처럼, 다들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우려를 전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해당 대사를 좀 더 읽다보면 등장하는 문단은, 한국인 중 상당수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투명성'이라는 것이 외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정직하게 알려준다. "한국의 권력은 시민의 사생활에 아주 작은 비중을 둔다. 한국의 대응 중 일부는 다른 민주 국가에 적용되기 어려울 것이다."(South Korea has powers that put very little weight on its citizens’ privacy; some aspects of its response might be hard to mount in other democracies.)

물론 그 이후로 케나다의 사례를 들어, 국민의 동의 하에 잘 작동하는 민주국가가 국민의 설득과 동의 하에 격리 조치 등을 더 잘 시행할 수 있다는 서술이 따라붙고 있긴 하다. 그래도 한국의 '투명성'이 기존 민주국가의 상식과 어긋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야 한국의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투명하다고 뉴욕타임즈 같은 외신에서 막 좋아요 쌍따봉 했다는데?' 정도로 알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청와대의 편에 선 언론들은 청와대 편을 드느라 그런 식으로 단장취의하고 있으며, 현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들 또한, 어쨌건 '국뽕 장사'를 하면 조회수에 도움이 되니까, 국뽕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이니 청와대는 여론조사를 조작할 필요가 없다. 여론 자체가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대응이 잘못되어 이 사달이 나고 있는데, 확진자 빨리 잡아낸다고 좋아라 하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논리가 통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국은 '바이러스 검사 맛집'이 아니다. '정부가 투명한 국가'로 전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지도 않다. 바이러스가 퍼질대로 퍼진 감염국이며, 국민의 사생활이고 뭐고 일단 까발리고 보는, 국민의 사생활을 덜 보호하며 민주적 원칙을 쉽게 양보하는 국가다.

여러분이 읽는 수많은 '외신에서 어쩌구' 타령에서, 국내 언론이 감추고 있는 이면의 맥락이 이렇다는 것이다. 다만 그 외신들은 '젠틀'하게, 우리의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리를 안 하고 있을 뿐이다.

2020-03-03

마스크 뱅크런: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한꺼번에 은행에서 돈을 찾으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은행은 예금을 맡아주는 곳일 뿐 아니라 그 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출해주며 유통하는 곳이다. 따라서 모든 예금주가 한꺼번에 돈을 찾겠다고 하면 내줄 수가 없다. 망한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 자본국가들이 20세기 초 경험했던 '뱅크런'이다.

지금(3월 4일 0시 무렵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마스크 대란' 역시, 따지고 보면 뱅크런과 유사한 현상이다. 다수가 일시에 패닉을 일으켜 특정 재화를 원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뱅크런의 경우는 그 대상이 현금이었다면, 지금은 마스크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람들은 왜 마스크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구입하려 할까? 과도한 건강 우려? 마스크가 실은 별 도움이 안 되는데 그걸 모르는 우매함 때문에? 아니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이 다수의 마스크를 구입하려 하는 이유는 공급 차질에 대한 우려 때문이다. 언제 마스크를 못 사게 될 지 모르니, 살 수 있을 때 사두자, 이 심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따라서 시장 원리에 따라, 혹은 정부가 직접 나서서, 더 많은 물량을 확보하고 시장에 공급하는 식으로는 해결이 요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마스크를 제공하는 시장 뿐 아니라, 실은 그 시장의 바탕이 되는 정부마저 서서히 불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법은 정부가 정부답게 일하는 것이다. 뱅크런 상황으로 돌아가보자. 뱅크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은행에 더 많은 돈을 갖다주는 게 아니다. 부족한 것은 화폐 그 자체가 아니라 화폐와 은행에 대한 예금주들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언제건 은행은 당신들에게 돈을 줄 능력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선포하면서, 실제로 예금을 주지는 말아야, 예금주들이 믿고 집에 돌아가면서 뱅크런이 종료된다.

문제는 화폐와 달리 마스크는 소비재라는 것이다. 지금 정부는, 미쳤나본데, 마스크를 오래 써도 된다느니 빨아 써도 된다느니 같은 소리를 한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국민들로서는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정부가 제공할 수 있는 물량에 한계가 있나보다, 그러니까 우리더러 아껴 쓰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일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더 마스크를 확보하고자 줄을 서게 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기장군처럼 하면 된다. 전국 읍동면 단위까지 퍼져있는 행정력을 이용해, 1인당 몇 장의 마스크를 정부가 확보하여, 신분증을 확인하고 직접 분배하면 된다.

이것이 최선의 해법이며, 가장 자본주의적인 해법이다. 왜냐하면 시장이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신뢰의 문제다. 마스크라는 물건 자체가 관건이 아니다. 지금 줄을 선 사람들은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국민에게 마스크를 1인당 몇 장씩 직접 손에 쥐어줄 수 있는가?

만약 정부가 이걸 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마스크를 사겠다고 줄을 서는 행렬 자체가 대폭 줄어들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들은 마스크를 유통하는 시장과, 그 시장의 질서를 확보하는 정부의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지금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것이다. 정부가 물량을 70%, 80%, 아니 100% 확보한 채로 유통에 나서도 이런 식이면 마스크는 계속 부족할 것이다.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사서 비축해두려 할 것이며, 따라서 공급은 모자라고, 남들이 줄을 서는 것을 보면 불안해져서, 자신도 줄을 서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설마 하면서도 줄을 선다. 마스크 뱅크런이다.

마스크 그게 뭐 비싼 것도 아니고, 생산 물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도 아니다. 지금 없는 것은 신뢰다. 시장에 대한,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 앞으로 2주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총력전이라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그에 걸맞는 단호한 모습을 정부가 보였으면 한다.

직접 나눠줘라. 그러면 사람들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굳이 사러 나가서 줄을 서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줄을 서지 않으면, 다들 어느 정도는 안정을 되찾고, 굳이 줄까지 서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마스크는 약국이나 마트에 가면 흔히 쌓여 있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게 된다.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게 무슨 어려운 논리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할까? 우리나라 행정력이 그렇게 부족한가? 정부가 직접 물량을 확보까지 해놓고 그걸 굳이 '판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부 물량을 '판매'하면 실수요자가 아닌 누군가가 매입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공급을 늘려도 그런 식이면 품귀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국 외 국가에 그것을 유통하여 이득을 보겠다는 사람이 나오거나, 그런 이득을 보는 자들이 있으리라는 불신이 국민들 사이에 퍼지기 너무도 좋은 여건이다. 그러면 국민들은 시장과 정부를 불신하게 되고, 따라서 또 사재기에 나선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마스크 뱅크런이다. 정부가 정부답게 행동하여 국민을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면 금방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다. 부디, 호미로 막을 수 있는 일을 가래로 막지 말라.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국가는 국민에게 신뢰를 공급하라.

2020-01-23

빌 게이츠와 신뢰의 화장실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빌 게이츠>의 1화는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과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동시에 다룬다. 화장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아 부질없이 목숨을 잃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는데, 그 문제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지도층은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빌 게이츠는 그 문제를 직시하고, 자신이 가장 잘 하는 방식대로, 최선의 기술적 돌파구를 마련하여 해결하려 한다.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가 기술, 테크놀로지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다큐멘터리 내에서 잘 지적하고 있다시피, 개발도상국의 대도시에는 대체로 하수처리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잘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런 사회기반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원이 마련되지 않거나, 마련된다 해도 운영 과정에서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즉 개발도상국 화장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의 사회적 자본이나 신뢰 따위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빌 게이츠가 '선의'로, 그러한 사회적 신뢰를 요구하지 않는 혁신적인 화장실을 만들어주는 것이, 과연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가령 인도에서는 고철 및 비철금속의 가격이 상승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죽기 시작한다. 살인이 늘어나서가 아니다. 맨홀 뚜껑을 뜯어서 팔아먹는 도둑들 때문이다. 가로등이 있거나 제 기능을 못하는 깜깜한 거리에서, 도둑이 뚜껑을 훔쳐간 맨홀에 사람들이 빠져서 다치고 죽는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빌 게이츠가 인도의 거리에 CCTV를 설치해준다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 도둑들이 훔쳐가봐야 팔아먹을 수 없는 재활용 플라스틱 따위로 맨홀 뚜껑을 개발해준다면 어떨까? 도둑은 맨홀 뚜껑을 훔쳐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멀쩡히 길을 걷던 사람이 땅으로 쑥 꺼지면서 목숨을 잃는 일도 상당부분 방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저런 방식은 문제에 대한 해결로 보이지 않는다. 맨홀 뚜껑을 훔쳐갈만큼 극심한 인도의 가난, 그리고 맨홀 뚜껑을 훔쳐가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인도라는 국가의 치안 등의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안 죽는다면 그것은 진보다. 하지만 사회적 신뢰의 부재로 인해 인프라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발생할 것이다.

맨홀 뚜껑 도둑 문제와 하수처리장 유지비 도둑 문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공공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사취하는 자들을 해당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감시하고 처벌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렇다. 빌 게이츠는 개발도상국에 전기가 필요 없는 화장실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나라에 이미 건설되어 있는 발전기를 돌려서 이미 있는 하수처리장을 가동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것은 해당 국가에 살아가는 이들의 전반적인 사회적 공공 의식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언론에서 글을 쓰거나 썼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는 기술결정론자요 기술만능주의자다. 나는 원자력이라는 새로운(19세기에 발견되어 20세기에 상용화된) 기술을 인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기후변화라는 전대미문의 재앙과 맞설 수 있으리라 굳게 믿는다. 하지만 그 모든 기술의 개발, 발전, 사용은 사회적 신뢰가 당연히 전제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부럽게도 빌 게이츠는 사회적 신뢰를 중시하는 나라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돈을 벌었고, 그 미국인들의 선한 의지를 세계 만방에 과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시설이나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회적 자본이 없어서 돌아가지 않는 개발도상국의 화장실 문제를 '해결'해주는 모습을 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결국 모든 사람은, 모든 사회는,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테니 말이다.

2020-01-19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입만 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던 분들 중, 지금 청와대와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리스 대사 콧수염 일제 순사' 레퍼토리에 똑부러지게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쪽바리'가 혐오발언인 게 분명하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상대로 '일제 순사같은 콧수염' 타령하는 것이 혐오발언이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도 하다.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백인과 일본인 혼혈인 미국 대사를 '인종차별'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게 설명해보자. 어떤 발언이 혐오발언이냐 아니냐, 인종주의적 언사냐 아니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속한 국가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그저 '당사자에게 부여된 어떤 범주를 폄하와 모욕의 근거로 삼느냐'만 따져보면 된다.

가령 우리는 드록바를 '흑형'이라 부르는 게 인종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0센트라던가, 쿤타 킨테라던가, 심지어 버락 오바마를 상대하더라도 '흑형' 타령을 하면 그것은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흑형' 운운은 해당 흑인의 모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백인, 혹은 백인 혼혈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 또한 억지다. 한국에서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많은 혼혈인들이 당해온 모욕과 차별을 도외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록바한테 '흑형' 하는 거나, 웨인 루니한테 '백돼지' 하는 거나, 둘 다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다. 해리스 대사를 두고 '일제 순사',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게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있긴 한가?

유시민이 만들어낸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미 대륙 원주민은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당신들은, 심지어 선량하지도 않다. 그저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기 위해 인권을 동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일말의 인권에 대한 관심 없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당신들이 인권을 적에게 던지기 위한 돌맹이 취급하던 것이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선량함'에 반대한다.

2019-11-07

세대의 이름: 88만원 세대, 혹은 김지영 세대?

1.

1983년생인 나와 내 또래들이 속한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름을 붙이기 위한 시도는 숱하게 있었다. 88만원 세대, 에코 세대, G세대, 기타등등. 88만원 세대를 제외한 나머지를 들으면 헛웃음이 난다. 내 세대를 규정짓기 위한 수많은 실패작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편 <88만원 세대>의 성공으로 우리 세대는 그 책의 제목을 고스란히 이름으로 가질 뻔했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의 제목을 4년제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할 예정인 우리가 감히 가져다 쓸 수 있느냐'는 반성과 회의 때문에 우리 세대는 스스로 그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지 못했거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2000년대 후반부터 소위 '젊은 논객', '청년 논객'등의 이름으로 공론장에서 의견을 발표하는 영광을 누려왔기에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 세대는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는 행위 자체를 꺼려왔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은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는 좋게 말하자면 윤리의식이나 염치라고 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배짱과 자신감 혹은 대표의식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의 갈등.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의 구조와 변화를 설명하는데 가장 많이 동원되고 있는 수사법이다. 너무도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익숙하며, 익숙한만큼 당연히 옳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산업화 세대만 산업화를 한 것도 아니고, 민주화 세대만 민주화에 기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산업화 세대'라는 말부터 따져보자. 1950년 이후에 태어난 1차 베이비부머를 산업화 세대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들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나라에서 태어나 극빈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60년 어린이로서 4.19를 겪었고, 철 들 무렵부터 그들의 대통령은 박정희였다. 동시에 그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않거나, 대학에 진학한 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무렵이면, 한국은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며 뼈가 부서져라 일해서 오늘날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된 세대라는 것이 사회 일반의 관념이다.

얼핏 보면 산업화 세대의 성장 과정과 민주화 과정의 변곡점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4.19가 일어날 당시 그들은 10대 초반 혹은 열 살도 안 된 나이였다.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도 어렸다. 반면 1980년 광주항쟁이 벌어지고 이후 전두환 정권을 상대로 한 투쟁이 벌어지던 무렵 그들은 이미 사회에 자리를 잡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생활인이었기에 '제대로 된 투쟁'을 하지 않은 세대라고 여겨진다. 이러한 시각은 특히 386세대 내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이해는 386세대의 자부심 혹은 오만에 의한 왜곡일 가능성이 크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6.29 선언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386세대의 투쟁만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전두환의 신군부가 시민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미국은 내정간섭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우려하여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젊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반미감정이 확산되었다. 그래서인지 87년 항쟁의 전개 과정에서 미국은 전방위적으로 전두환 정권에게 군 동원을 하지 말라는 압력을 넣었다. 일설에 따르면 CIA는 미8군의 탱크를 빌려와 수도방위사령부 앞에 세워두고 무력 시위를 했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6월항쟁의 성공 과정에 미국이 우호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광주학살 미국 방조설'에 비하면 사실상 알려지지 않은 수준이다. 이는 역시 미국측에서 내정간섭 논란 우려로 인해 적극적인 홍보를 하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월 항쟁의 과정에서 '산업역군'들의 역할을 도외시하는 것 또한 부당한 일이다. 6.29 선언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5공 세력의 정책결정권자들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반발이었다. 시위가 단지 대학생이나 사회소외계층 뿐 아니라 중산층 전반에 이르기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신군부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넥타이 부대'란 누구인가? 대학생, 혹은 갓 대학을 졸업한 386세대, 즉 '민주화 세대'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그들보다 윗세대인 산업화 세대의 다른 이름이 바로 '넥타이 부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월 항쟁이 386세대 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의 승리이기도 하다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라는 이름을 독점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3.

1990년대 당시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60년대에 태어난 그들. 이른바 386세대 중 엘리트에 속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기에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가 1987년 이루어진 직선제 개헌의 산물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두 가지 맥락을 지니게 된다. 첫째, 그들은 50대 중후반을 넘어서는 지금까지도 스스로를 '민주투사', 다시 말해 저항과 변혁의 주체로 바라본다. 그들은 자신을 체제를 유지하며 보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구성원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둘째, 하지만 그들은 동시에 1987년 체제의 출발과 함께하는 기본 세대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기꺼이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87년 체제의 출발에 대해 386세대가 '민주화 세대'를 참칭함으로써 자신들이, 혹은 자신들만이 현 민주 체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양 이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 마치 1960년의 4.19가 '4.19 세대'만이 아닌, 당시 사회를 구성하던 수많은 개인과 집단의 의지가 모였기에 벌어진 사건인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세력화한 특정 세대, 연령 집단 중 같거나 유사한 사회적 단위 속에서 동질적인 세대 경험을 한 이들이 거대한 사회 변화에 큰 기여를 할 수는 있으나, 어떤 집단만이 전반적 사회 변화를 대변하거나 그것을 자신들의 것인 양 포장하는 일은 옳지 않다.

소위 '산업화 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한만큼, '민주화 세대' 혹은 그 세대에 속하는 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안철수, 이재웅, 이찬진 등 소위 '벤처 1세대' 역시 모두 80년대 학번이다. 그들은 현재 정치권에 포진하고 있는 386세대와 같은 시기에 대학을 다녔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 반미투쟁, 혹은 통일운동 등에 투신하는 대신, 그들이 청년기를 보내던 당시 막 움트기 시작한 IT 산업의 태동과 변화에 주목하고 그 흐름에 탑승하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그리고 현대자동차그룹의 자동차를 수출해 우리에게 필요한 석유 등 천연자원을 수입하여 먹고 사는 나라가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아직 실리콘벨리에 명함을 내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세계 어느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놓고 보더라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IT 선진국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지만 운동권은 아니었던 그들, 말하자면 '386 우파'들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자 김대중 정권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벤처 창업 열풍에 탑승하여 새로운 산업 영역을 창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경제 규모 면에서 월등하고 인프라 또한 비교할 수 없이 튼튼한 일본에서도 이런 식의 대대적인 산업 변화를 이끌지는 못했다.

삼성전자와 소니의 위상이 변화하게 된 것은 단지 두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가전제품'이라는 영역이 위축되고 'IT'가 떠오르게 되었던 거대한 산업적 변화 및 그에 대해 양국이 산업정책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했는지 여부와 맞물려 있다. 일본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한국은 성공했다. 그리고 한국의 성공에는, 90년대에 30대였고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이지만 '민주화 세대'는 아닌, '386 우파'의 역할이 영향을 미친 것이다.

요컨대 386세대라고 해서 모두 민주화 세대는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무렵 대학에 다닌 이들이 자신들을 민주화 세대라고 부르는 것은, 사회 전체가 나름의 기여를 해서 이루어낸 87년 민주 체제에 대해 자신들의 몫을 과도하게 주장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판은 산업화 세대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의 노고와 헌신이 2차 산업 중심의 산업화에 큰 기여를 했음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3차 산업, 4차 산업 중심으로 경제 구조가 변하고 있는 지금, 1950년대생만을 일컬어 산업화 세대라 부르는 것은 역사적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것이다.


4.

다시 우리 세대로 돌아가보자.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은, 그 개념이 등장했던 노무현 정권 무렵부터 가시화된 비정규직의 일상화를 폭로한다는 측면에서 시의적절했고 유의미했다. 지금도 우리 세대 뿐 아니라 더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로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그러면서도 장래를 보장하기 어려운 삶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담고 있기에 그것을 한 세대가 자신의 것으로 삼아 깃발처럼 휘두르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에 대해, 내가 속한 세대의 구성원들은 오래도록 고심해왔다. 그와 같은 토론들은 대부분 인터넷 게시판이나 사석에서 이루어졌기에 쉽게 인용 가능한 출판물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사자로서 많은 논의에 참여해온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1980년대생들은, 특히 1960년대생들이 자신들을 대뜸 '민주화 세대'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대범함 혹은 뻔뻔함을 갖지 못했다. 물론 그러한 고민과 주저함에는 윤리적 근거가 없지 않다. 대학생 혹은 사회적 발언권을 인정받는 고학력층으로서 스스로가 특권 계층임을 자각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는 88만원 세대'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꼭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힘을 갖지 않는 것, 권력을 쥐지 않고 공백을 창출하는 것은, 과연 그 자체만으로도 윤리적인가. 2019년의 나는 회의적이다. 가령 미국이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병력을 축소하고 철군시키자 그 힘의 공백을 타고 러시아의 개입이 커졌으며, 희대의 학살자이며 독재자인 아사드 정권의 폭정이 심해졌고, 내전이 심화되면서 대대적인 난민이 발생한 최근의 국제 정세를 떠올려 보더라도 그렇다. 어떤 힘의 존재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힘, 권력의 오용과 남용이 문제이고, 그 오남용 중 가장 나쁜 형태의 오남용은 바로 권력의 공백이다. 진보적인 지향을 잃지 않고 있지만 현실주의자이기도 한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88만원 세대'의 대표 주자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 부르지 않기로 하였다. 이는 스스로에게 이름을 붙이고 세력화함으로써 권력을 갖게 되는 과정을 전반적으로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이켜보니 그렇기도 하거니와 당시로서도 그와 같은 전개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 세대, 혹은 우리 세대를 대변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들은, 권력을 포기하고 대신 한 줌의 도덕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담론의 주도권은 정작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할 세대의 손에서 벗어나버렸다. 대신 그것은 이미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선과 도덕을 독점하고 있다고 여기는 그들, 즉 자칭 민주화 세대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 광주항쟁을 자신들의 세대 구심점으로 삼고 있는 그들에게 비정규직 및 국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언제나, 논리적으로 볼 때, 미국에 대한 분노와 저항보다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 시절에 두루 사용되었던 용어를 빌리자면,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충돌할 때, 자칭 민주화 세대는 늘 민족모순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개성공단은 올곧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찬성이 아니라 반대의 대상이어야 한다. 외국의 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을 이용, 혹은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여건 속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칭 민주화 세대 및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현재의 진보 담론 구조 속에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찾기 어렵다. '계급모순'이 '민족모순' 앞에 입을 다물고 마는 형국인 것이다.

'88만원 세대'가 자체적인 의제 생산 구조를 갖추고 진보의 갱신에 나서서 성공했다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약간의 사회적 인지도 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으며, 그 사회적 인지도라는 것 역시 자칭 민주화 세대의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는 무언가였으니, 88만원 세대가 가진 운신의 폭은 지금 회고조로 짚어보는 것보다 훨씬 좁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세대가 스스로에게 이름 붙이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권력을 갖기 위한, 혹은 권력 투쟁에 나서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인 주체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5.

201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역사는 다시 한 번 1980년대생을 호명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지금 모두가 아는 그 책,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주의에 입각해 쓰여진 소설이지만 동시에 80년대에 태어나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의 집단적인 경험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작품이기도 하다.

80년대생들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아아 우리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988년 올림픽부터 1997년 IMF까지 약 10여년의 기간은 한반도의 역사상 가장 역동적으로 경제적 힘이 용솟음치고 문화적으로 다방면에 걸쳐 '기성세대'의 자리를 '신세대'가 빼앗아가던 무렵이기도 하다.

이런 세상을 보며 자랐기에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이 성인이 된 후에 살아갈 사회도 똑같은 역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어느 정도의 민주적 구조와 평등은 당연히 주어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삶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우리는 투쟁하되 자칭 민주화 세대처럼 싸우지 않는다. 일하되 타칭 산업화 세대처럼 일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풍요와 어느 정도의 제도적 민주화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모순'은 물론이거니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경제적 목표 의식 따위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으로 와닿을 리 없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이 제공하는 문제의식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싱싱한 지금의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동시에 김지영은 소위 명문대에서 교육받은 고학력자이기도 하다. 높은 학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쌓아온, 혹은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온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임신, 출산, 육아 그 자체의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고통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만큼이나, 그러한 과정에 거의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사람은 일을 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혹은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경력 단절이 문제인 것은 사람이 스스로의 가치를 노동과 노동에 따른 보상을 통해 찾는 선순환의 과정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여성들은 전적으로 어머니와 주양육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할지 모르지만, 모든 여성에게 그러한 역할이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것은 큰 문제다. 하물며 '아 대한민국'에서 자라난 80년대생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이는 <밀레니얼 선언>에서 이야기하는 바, 인적자본으로 길러졌지만 노동시장에 속하지 못하는 밀레니얼들의 사정과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그 위에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사회학적인 용어를 사용해보자. 한국의 노동시장을 정규직, 공무원으로 구성된 1차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및 불안정노동으로 이루어진 2차 노동시장으로 나누어보면, <88만원 세대>는 후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82년생 김지영>은 1차 노동시장에 진입하려 하거나, 진입했거나, 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신,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다시 배제되는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두 책이 다루는 대상은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같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경제적, 사회적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다른 각도에서 다루고 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약 10여년의 시차를 두고, 베스트셀러를 넘어 한 시대를 규정짓는 책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6.

<82년생 김지영>은 <88만원 세대>의 뒤를 이어 다시 한번 80년대생들을 사회적 맥락에서 호출하고 있다. 이는 그 세대 집단의 주체화를 요청하고 있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질문은 주체화의 요청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과연 그 부름에 응할 것인가, 응한다면 이제 80년대생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기 시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세대가 자신들을 어떻게 부르는가, 스스로에게 어떤 이름을 허락하는가의 문제는, 해당 세대 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행보를 좌우하는 사안이다. 잠시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라는 구분으로 돌아가보자. 저 수사법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히 자칭 민주화 세대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름으로써, 자신들이 현행 민주주의 체제에 상당히 많은, 혹은 대부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양 주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호칭이 옳지 않고, 역사적 맥락을 왜곡시킨다는 것을 앞서 우리는 확인했다. (개인적으로는 50년대생과 그 앞뒤의 세대를 '도쿄올림픽 세대', 60년대생부터 70년대 초반생까지를 '서울올림픽 세대'라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현재 30대인 80년대생들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한일월드컵 세대'가 되겠다. 이 호명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2000년대 말, 당시 20대였던 우리 세대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는 이름 하에 주체화했다면 어땠을까. 비정규직 저소득층 청년의 문제를 고학력 4년제 대학생들이 대리하는 문제가 발생했으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비정규직과 노동시장의 이분화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동력을 우리 세대가 잠시라도 손에 넣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었을테지만, 이제는 모두 지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대담한 가정을 해볼 수 있다. 80년대생 여성을 중심으로 한 한국 정치의 재구성은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와 같은 정체성의 구성과 주체화가 이루어진다면, 80년대생 여성들은 스스로를 '김지영 세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중년 남성으로 이루어진 정치권은 자신들을 지지하지도 않는 냉소적인 젊은 남자들을 끌어안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젊은 여성들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청년들 스스로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김지영 세대'라고 부른다면, 그 세대 혹은 우리 세대는 자체적인 의제를 찾고 확보하는 일, 특히 386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며 자신들의 활동 반경을 확보하는 일에 과연 관심이 있는가?

<밀레니얼 선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미국 뿐 아니라 한국처럼 산업화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고, 경제 개발의 풍요를 누리며 성장한 중년층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하는 나라의 청년들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젊은 노인들'은 당장 취직을 걱정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사이, 체제에 대한 저항과 투쟁마저도 '늙은 청년들'의 전유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맬컴 해리스는 이런 상황 속에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책을 마무리지었다. 번역자로서 나 또한 과도하게 정치적인, 혹은 모종의 정치적 결집과 실천을 요구하는 말을 역자 후기에 담지는 않았다. 저자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이 책은 출간된 후 몇 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별도의 자리가 마련되고 나니, 한때의 '청년 논객'으로서 다양한 술회가 떠오른다. 그 회한의 폭풍 속에서, 우리 세대가 가지고 있는 최악의 위기와 갈등이야말로 다시금 새로운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덧붙여본다.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




일러두기: 이 글은 2019년 11월 6일 서울 팟빵홀에서 있었던 <밀레니얼 선언> 북토크 발제용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2019-08-29

독일식 정당명부제에 대하여

'독일식 비례대표제'가 독일에서 잘 돌아가는 이유는 독일이 독일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정치에 뜻을 품은 청소년들이 일찌감치 정당에 가입해, 평당원부터 차근차근 정당인으로서 이력을 쌓아나가고 그 과정에서 능력과 청렴도가 검증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정당명부 비례투표를 해도 되는 것.

반면 한국에서 정치란, 박근혜에게 청년비례 공천받은 이준석 같은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4-50대 무렵까지 이력을 쌓은 사람들이 인생 이모작을 하러 들어가는 분야다. 중년의 정치 신인들은 지역 연고, 그 순간의 인맥, 기타 이해관계와 당선 가능성을 가늠하여 소속 정당을 택한다.

게다가 한국의 정당들이 독일의 정당처럼 일관된 정책 지향과 이념적 방향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요컨대, 한국의 정당은 자신들이 내놓는 후보의 인적 측면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정책적 측면에 대해서도, 독일에 비해 매우 보증력이 떨어지는 선거 공략용 공대에 가깝다는 말이다.

지역 기반 투표가 국회 의석을 deadlock 시키는 것을 문제라고 본다면 비례대표를 강화하는 것을 해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개별적인 후보자에 대한 인적 검증이 소선거구제 시절보다 약화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해 '하자 있는 국회의원'이 더 나올 수 있다는 것은 각오해야 한다.

삼김시대에도 지역구는 나름 필터링을 했다. 보스에게 공천받은 후보가 떨어지면 개망신이니까. 하지만 전국구 의석은 '돈 받고 파는 거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그냥 다들 넘어가주는' 분위기 아니었던가. 비례대표제가 무조건 '민심'을 더 잘 반영한다는 식의 환상을 넘어서서 그 작동 방식을 보자.

지금은 아무리 정치 거물이어도 총선때는 긴장 타야 한다. 여차하면 골로 간다. 하지만, 가령 100% 정당명부비례제라면, 선순위 공천자는 국민이 아무리 싫어해도 당선된다. 비례대표가 늘어날수록 유권자의 '떨어뜨리는 힘'은 줄어든다. 대신 공천권 가진 사람의 '고르는 힘'은 한없이 커진다.

요컨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는 정당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구성하고 반영하는 조직으로서 제 기능을 하며, 정당 내부의 정치 행위와 역학 관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충분히 쌓여 있어야, '민심'을 올바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 제도다. 한국이 그런 나라인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 해볼 일.

하나 더.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자신들의 의석이 늘어날 거라 믿는 군소정당(정의당, 바른정당 등)들. 그러한 방식의 선거 제도 하에서 대형 정당은 비례 순번의 말석에 군소 정당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해당하는 인물을 공천한다.

유권자는 '작은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전적으로 반영하는 인물'보다는, '큰 정당에 속한, 내 지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인물'의 당선을 위해 투표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 비례대표제 하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인데 그게 더 큰 규모로 시행될 뿐이다. 한국의 정당은 이념정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대 기성 정당이 이념정당의 이념적 지향성을 빼앗아올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하면, 유권자로서는 그 실체와 존속 여부가 불투명한 군소정당을 지지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기민당과 사민당이 아니라는 말이다. 뭐, 이미 다들 '합의'를 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비례대표가 늘어난 후 지금까지 진보정당이 지역구에서 못 본 재미를 비례에서 실컷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유권자에게 비례대표 투표용지가 '잔돈'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애매한 잔돈 그냥 '좋은 일 하겠다는 사람들'한테 주자, 이걸 모아서 의석 만드는 게 진보의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그 '잔돈'이 '목돈'이 되면, 유권자들이 예전처럼 진보정당에 옛다 하고 줄까? 그리고 거대 정당들이 이전처럼 순순히 개평 떼어줄까? 안 그럴 것 같은데...

정의당이나 바른미래당 등 군소야당이 진정으로 '정치개혁'을 원했다면, 선거제도 그 자체보다 일단 국회의원 의석을 늘리는 것을 전제로 협상에 임했어야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200명으로 줄이고 전원 비례대표로 뽑느니, 모든 의석을 지역구로 돌리고 400명을 뽑는 게 훨씬 '대의제'에 부합.

한국에서 국회의원이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 떠나서 숫자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숫자 뿐 아니라 국회라는 기관 자체가 갖는 권한이 너무 약함. 가령, 감사원을 청와대 직할이 아니라 국회 직할로 옮기면 과연 국정감사가 지금처럼 연례 호통쇼에 머물까?

선거제도개편을 밀어붙이는 측은 국회의 권한을 늘리는 데 관심 없다. 자신들의 의석을 '상대적으로' 더 확보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의석을 300석으로 묶고, 자기들도 남에게 설명 못하는 복잡한 선거제를 도입한다? 이런 정치적 선택을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기만적인 일처럼 보인다.

2018-01-14

'흙수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하지 말라?

대체 어떤 악마가 '흙수저들의 자수성가를 위해 소위 '암호화폐'를 규제해서는 안 된다'는 희한한 논리를 개발했는지 모르겠다. 현실은 그와 정 반대다. '흙수저'를 보호하려면 소위 '암호화폐' 거래를 규제해야 하며, 최대한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하고, 거래에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돈은 액수가 같아도 가진 사람에 따라서 절대 같은 돈이 아니다. 가령 어렸을 때부터 단 한 번도 쪼들린 적 없이 자란 청년이 친척들로부터 넉넉하게 받아온 세뱃돈과 용돈을 모아 만든 500만원을 생각해보자. 날려먹어도 큰 상관이 없는 돈이다. 잘 사는 부모들은 심지어 자녀들한테 '투자 경험'을 안겨준다며 일부러 과하게 용돈을 주기도 한다더라. 그런 돈은 아무리 유입되어도 큰 문제가 될 건 아니다.

하지만 비트코인 열풍에 귀가 팔랑거린 빈곤계층 청년이 월세방 보증금을 빼온 500만원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 돈이 사라지면 그의 월세방도 사라진다. 주거의 질이 급감하고 삶의 질이 곤두박질친다. 더 나쁜 경우는 없는 돈 끌어모아 '가즈아~'에 동참한 경우.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받았다거나, 기타등등. (회사 공금을 끌어다가 비트코인에 넣었는데 값이 안 올라서 큰일이라는 인터넷 게시물 캡쳐를 본 적도 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 기록해둘만한 사안이다.)

이게 결국 돈 놓고 돈 먹기라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렇다면 '흙수저'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건 하우스 입장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 아예 부자들은 돈을 날려도 된다. 하지만 가난하면 애초에 그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다. 이 정권은, 청와대는, 그리고 코인판이 계속 이렇게 규제 없이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또 잔인하다. 일확천금의 꿈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코인판에 갖다 부은 청년들이 대체 어떤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지 걱정되지도 않나?

처음부터 이건 돈놀이판이었다. 그냥 웃기는 장난으로 취급되던 비트코인이 진지하게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랬다. 페이스북의 창업에 자신들의 지분이 있다고 주장하여 마크 주커버그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윙클보스 쌍둥이 형제가 '제미니'(라틴어로 쌍둥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거래소를 만들고 거액을 투자하면서부터 엉터리 아나키즘적인 몽상은 어엿한 투기 상품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그 어떤 흙수저도 윙클보스 형제처럼 '존버'할 수는 없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 '흙수저'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다. 한탕 크게 먹어서 인생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시달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과 완전히 반대되는 짓이다.

대체 대한민국의 국격이 어디까지 후퇴하려고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가 무슨 정당한 논의인 양 언론에 오르내리고 정치인이 왈가왈부하기에 이르렀는가? 자기 돈 갖다 박아서 한탕 하건 쪽박 차건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게 마치 정당한 사회적 신분 상승의 사다리인 양 포장하지 말라는 소리다. 사회가 사회로서 유지되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마저 모두 망가져가고 있는 듯하다.

2018-01-06

〈1987〉은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인가

나는 〈1987〉이 여성을 배제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586세대가 내뱉는 승리의 함성과도 같은 이 영화 속에서, 여성들은 온당히 받았어야 할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 뿐 아니라, 허구의 서사를 창작하는 일에 대한 인식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적인 현상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그들이 여성 캐릭터에 대해 내린 판단을 보다 정확히 서술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픽션을 창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직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시점에서만 '현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 결과 있어야 할 여성들의 목소리는 사라졌고, 대신 남은 것은 '그 모든 민중'의 대변자인 연희(김태리 분)라는 '순수한 여대생' 뿐이다.

김경찬 작가와 이우정 제작자가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의 한 대목. "나머지는 실존 인물들로부터 차용했다면 연희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한 인물이다." 이우정 제작자도 그러한 인물 배치를 순순히 인정한다. "당시 사건에 말리지 않았던 일반인들의 표상이 연희였다."

요컨대 연희는 도구적 인물이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혹은 직·간접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던 남성들에게는 '시위 현장에서 마주쳤던 것도 같은 아련한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 87년 6월 항쟁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예정대로 작년 12월이 대선이었다면 '역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계속 훈계를 들었을 젊은이들에게는, 쉽사리 감정이입할 수 있는 인물. 요컨대 피와 살을 지닌 개인으로서의 '사람'은 아닌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희는 좋은 캐릭터다. 외부로부터의 자극과 내면으로부터의 갈등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폭발할 때, 배우 김태리의 단정한 용모와 선을 넘지 않는 연기 톤이 조화를 이루어 기대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문제는 연희가 '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학 새내기인 그는 이 세상의 악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연희가 할 일은 그저 눈을 뜨고 거리에 나가 버스에 올라 깃발을 휘두르는 것 뿐이다.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세상을 낳기 위해 무염시태(無染始胎)의 존재로 설정된 연희 말고는, 유의미한 여성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심각한 문제는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씨네21〉 인터뷰를 통해 확인하고 나니, 나도 이 문제에 대해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6월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선창을 하는 목소리는 배우 문소리씨다. 어떤 역할이든 캐스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배역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목소리만 썼다. <1987>은 여성 캐릭터가 거의 없다. 조금 더 조화롭게 여성 캐릭터가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김정남의 배역을 여성으로 바꿔볼까 생각까지 했었는데 우리는 실화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남성들이 나오는 영화가 되었다.

이 대답은 실로 문제적이다. 감독은 "팩트에 최대한 충실하면서 드라마적으로 윤택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서, "한병용 같은 경우 실제로 편지를 빼내오고 전달한 교도관은 두분이었는데 두 인물을 하나로 합쳤다"라고까지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은 극적 긴장감을 위해 실존인물 두 명을 하나로 합치는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역사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은 그 수많은 운동권 여성 캐릭터 한 두 명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고 그들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교회건 절이건 성당이건 운동권이건, 어떠한 신념에 기반한 조직이 작동하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제공하는 이들 중 상당수, 때로는 대다수가 여성이지만,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 뿐이라는 것을.

따라서 '공식 기록에 충실하려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애초에 그 공식 기록으로부터 배제된 여성들을 끌어안지 않겠다는 선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장준환 감독과 김경찬 작가, 이우정 제작자는 그러한 효과를 알면서도 선택을 했다. 현실 속에 존재했던 두 사람의 교도관을 하나로 합칠 때에는 '극적 재미'를 앞세우던 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속에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내지는 않으면서 그 핑계로 '팩트'를 들이댄 것이다.

역사의 악역은 거의 모두 남자다. 왜냐하면 그들이 권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 악과 맞서 싸우는 일에는 남녀가 없다. 따라서 역사의 선한 역할에는 남성과 여성이 고루 포진해야 한다. 문제는 그 싸움이 승리로 기록되건 패배로 기록되건, 역시 기록하는 자는 남성적인 시각을 전제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헌신과 희생은 기록되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혹은 숫제 의도적으로 지워지기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정착 과정에서 예수가 부활한 빈 무덤을 처음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의 역할이 어떻게 축소되었는지, 예수를 따르던 그 수많은 여인들의 이름은 왜 남아있지 않은지, 대신 우리가 아는 것은 12명의 남자 제자들 뿐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라. 남자들끼리 뭉친 권력에 맞서 싸우는 이들은 여성들의 힘을, 마치 1단 로켓처럼 소진시켜버린 후 떨궈버리기 일쑤였다.

〈1987〉의 제작진이 확인한 '역사적 사실'에 여성의 이름이 부족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바를 모를 리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건 조금만 생각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도 뻔한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해도 어차피 선택하는 과정에서 서사화가 이루어지지만, 특히 픽션을 창작하는 중이었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어떤 의미에서건 (왕년의?) '운동권'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1987〉에는 더 많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해야 했다. 선량한 교도관의 수더분한 누이, 시대적 각성을 하는 주인공과 덩달아 운동권 서클에 들어가는 날라리 친구 같은 기능적 인물 말고, 그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내면의 어둠과 빛이 공존하는 유의미한 입체적 여성 캐릭터가 설 자리를 만들었어야 한다. '팩트'로 기록되지 않은 '진실'을 밝히는 것, 그게 바로 픽션의 임무 아닌가?

역사는 전두환, 노태우, 박처원, 박종철, 이한열, 이부영, 김정남, 함세웅 등의 이름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도 매일 밥을 먹었고 세탁된 옷을 입었다. 그러한 돌봄노동은 자연스럽게 운동권 여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수많은 문건을 쓰고 몰래 인쇄하고 뿌리며 연락을 주고받던 것도 여성들이었고, 심지어 남자 운동권들의 자기 서사화와 달리, 여자들이야말로 용맹하게 돌을 던지고 전경들에게 얻어맞아가며 싸웠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그런 기록의 부재를 〈1987〉의 제작진은 '팩트'로 받아들여, 영화로 만들었다.

이런 이중적 기준 앞에 나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역사의 기록에서 배제된 자들을 픽션의 세계에서마저 지워버린다는 것은 너무도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다. 더 길게 말을 이어봐야 중언부언일 수밖에 없으니 시 한 편을 인용하면서 끝내도록 하자. 우리는 역사를 이런 식으로 기억해서도 안 되며, 이런 식으로 서사화해서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는 노동자의 의문
-베르톨트 브레히트

성문이 일곱 개나 되는 테베를 누가 건설했던가?
책 속에는 왕의 이름들만 나와 있다.
왕들이 손수 돌덩이를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몇 차례나 파괴되었던 바빌론
그때마다 그 도시를 누가 재건했던가?
황금빛 찬란한 리마에서 건축노동자들은 어떤 집에 살았던가?
만리장성이 준공된 날 밤에 벽돌공들은 어디로 갔던가?
위대한 로마제국에는 개선문들이 참으로 많다.
누가 그것들을 세웠던가?
로마의 황제들은 누구를 정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던가?
끊임없이 노래되는 비잔틴에는 시민들을 위한 궁전들만 있었던가?
전설의 나라 아틀란티스에서조차 바다가 그 땅을 삼켜 버리던 밤에
물에 빠져 죽어 가는 사람들이 노예를 찾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젊은 알렉산드로스는 인도를 정복했다.
그가 혼자서 해냈을까?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토벌했다.
적어도 취사병 한 명쯤은 그가 데리고 있지 않았을까?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그의 함대가 침몰 당하자 울었다.
그 이외에는 아무도 울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7년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 이외에도 누군가 승리하지 않았을까?

역사의 페이지마다 승리가 나온다.
승리의 향연은 누가 차렸던가?
10년마다 위대한 인물이 나타난다.
거기에 드는 돈은 누가 냈던가?

그 많은 사실들.
그 많은 의문들.

2017-11-10

"층간 내리사랑"과 국가의 역할

KBS 1FM 라디오를 듣던 중 공익광고가 흘러나왔다. 자기 집에서 살살 걸어다니고, 악기 연습을 자제하는 등 조심스럽게 생활하는 사례들을 죽 나열한 것이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이어지는 멘트.

"위층은 아래층을, 아래층은 그 아래층을 먼저 생각하는 층간 내리사랑. 이웃간의 새로운 사랑법입니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적어두었다. 위 인용문은 공영방송 KBS 라디오 공익광고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친 것이다. 층간소음이 심하니 이웃간에 서로 '배려'해야 한다며,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하자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은 광고를 하고 있다.

이 광고는 대한민국에서 시장경제와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그 실패가 어떻게 시민사회의 짐으로 전가되고 있는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정부는 시민 사이의 위계적 관계를 은연중에 강조하거나 미화한다.

아파트 층간소음은 구조적 문제다. 사회경제적 구조 이전에 건물의 구조상 발생하는 문제라는 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지어지는 아파트 중 대다수는 벽식 구조로 지어져 있다. 별도의 기둥 없이 아파트의 벽 자체가 중량을 지탱하는 방식이다.

벽식 건물은 공사 속도를 내기 좋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지만, 인근의 진동이 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그게 바로 층간소음이다.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절대다수의 아파트가 애초부터 층간소음이 울려펴지기 쉬운 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다.


벽식 구조에서는 바닥 울림이 고스란히 벽을 타고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맹점이 있다. 쉽게 말해 진동을 일으킨 바닥과의 접점이 모든 벽으로 넓게 이어져 있기 때문에 전달이 잘 된다. 특히 벽식 구조라면 7층의 쿵쿵대는 소리가 5층·4층까지는 물론, 거꾸로 위로 8층으로도 더 잘 전해진다. 반면 기둥식은 벽은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 핵심은 기둥과 보이다. 바닥의 충격음, 진동이 보와 기둥으로 분산된다. 바닥 충격이 기둥을 타고 전달될 가능성이 줄어든다. 이철승 연구원은 “네모난 상자를 두드리면 벽이 공진현상을 일으켜 진동이 증폭된다. 벽식 구조 아파트가 이런 형태다”라며 “구조가 중요한데 우리는 그동안 너무 바닥 두께나 차음재에 치중해 왔다”고 지적했다.

전병역, "‘구멍뚫린’ 층간소음, 대안은 기둥식인데…", 경향신문, 2016년 8월 20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8201832011&code=940100

기둥식 건물은 벽식 건물에 비해 공사비가 많이 든다. 같은 높이의 건물을 지을 경우, 벽식으로 지어야 더 많은 세대를 우겨넣을 수 있다. 기둥식으로 지으면 층고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대별로 부담해야 할 돈 또한 늘어난다. 최종적으로 그 비용은 소비자인 주민이 내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지금처럼 사는 게 답일까? 아이가 뛰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자기 집에서 소리도 제대로 못 내고 조심조심 까치발로 다녀야 하는 상황이 정상일까? 서울 시내 아파트의 경우 수억원씩 하는데, 그 돈을 들여가며 자기 집에서 "층간 내리사랑"을 실천해야 하나?

이것은 전형적인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문제다. 리스크를 감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이 분명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자신이 짊어지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백하다.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을만큼 확실한 기준을 만들어 건설사를 규제하는 것이다.

국가가 해야 하는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존재하면 모두가 편해지지만, 만들고 정착시키는 비용을 아무도 지불하고 싶어하지 않는, 규칙을 만들고 집행하는 것 말이다. 그러한 역할을 하라고 우리는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는 그 세금으로 군대와 경찰과 행정 조직을 꾸려나간다. 공익을 위해 정부가 설정한 넓은 의미에서의 규제 외의 영역에서 국민은 자유롭게 거래하고,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렇게 설계되어 있다.

KBS 1FM에서 흘러나오는 공익광고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그따위 공익광고를 통해 '너희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오늘날 한국인의 거주 형태 중 가장 지배적이라 할 수 있는 아파트의 건설에 있어서, 대체 어떤 구조적 하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층간소음에 의해 고통받는지 파악하고,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기업을 규제함으로써 개인들이 스스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대신, 국민들에게 '너희들끼리 친절하고 행복하게 지내봐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 최악인 것은 그 와중에 동원되는 수사법이 가족주의적 상하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윗집 사는 사람은 아랫집 사는 사람의 손윗사람이 아니다.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을 동원할 계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꼭데기층 사는 사람은 단군할아버지라도 되는가?

이런 식의 '개혁'은 폼이 나지 않는다. 건설사 뿐 아니라 자신들이 내야 할 분양가가 높아질 우려를 느끼는 아파트 소비자들 역시 반발할 여지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재벌 회장 몇 명 불러놓고 꾸짖는 모습 보여주고, 감옥 보내고, "재벌 혼내느라 늦었다"고 공정위 위원장이 말하는 그런 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웃사랑은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아니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수평적 관계다. 그건 국민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아파트 층간소음 문제에 있어서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실태 조사와 그에 따른 엄격한 규제다. 물론 멋지지도 않고 폼도 나지 않겠지만, 그게 바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며, 국가의 역할인 것이다.

2017-11-05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1.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물론 우리, 대한민국에는 핵탄두가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기술이 있다. 한국형 신형 원전 모델인 APR-1400은 지난 10월 유럽사업자요건 인증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 지난 6월에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 인증 심사를 사실상 통과"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안전성을 검증받은 원전 설계 기술이 있고, 설계도에 맞춰 실제로 원전을 만들어낼 기술과 인력 또한 확보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건만 갖춰진다면 양국 우호의 상징으로 보다 저렴한 가격에 원전을 '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는 우리가 가진 강점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오히려 원자력 발전을 말려죽이고 싶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니 우리가 미국에 핵을 '쏘는' 상상은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위 '환경주의자'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마따나, 우리는 다른 미래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2.

2017년 11월 5일 현재,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는 대규모 정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초대형 허리케인 마리아(Maria)와 어마(Irma)가 발전소가 밀집한 섬의 남동부를 강타하면서 주요 송전망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10월 23일 복스(Vox)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본섬의 79퍼센트가 아직 정전 상태에 놓여 있다.

푸에르토리코 대정전 사태는 엄밀히 말해 발전소가 아니라 송전망이 망가져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왜 송전망이 망가졌는지 따져본다면, 푸에르토리코의 경제가 몰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때 잘나갔던 푸에르토리코 경제가 주저앉게 된 이유의 한복판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탈원전 논쟁의 한복판에서 푸에르토리코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푸에르토리코는 본디 스페인의 식민지로 개발되었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결과 스페인이 물러나게 되었고, 1952년 새 헌법을 통해 미국의 자치령으로 편입되었다. 2012년 주민투표를 통해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될 것을 결정했지만 미국의 연방의회에서 거쳐야 할 절차가 많은 탓에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령'이지만 '미국'은 아니다.

그 섬의 역사는 섬 전체에 전기를 공급해온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Puerto Rico Electric Power Authority (PREPA))의 역사와도 같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하고 있다. 1941년 설립된 푸에르토리코 에너지국은 197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호경기 속에서 함께 호황을 누렸다. 제약업체를 필두로 한 미국의 기업들이 세제 혜택을 노리고 푸에르토리코에 대거 공장을 건설했던 것이다. 지금도 몇몇 의약품들은 잘 살펴보면 "Made in Puerto Rico"라고 원산지 표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잠깐이었다. 1996년 클린턴 정부가 푸에르토리코의 세제 혜택을 없애면서 많은 공장들이 섬을 떠났다. 그와 함께 경제가 고꾸라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PREPA와 푸에르토리코 자치정부의 어리석은 결정이 큰 역할을 했다. 첫째, 애초부터 정부와 지자체는 요금을 내지 않고 전기를 쓰고 있었다. 둘째, 경제가 위기에 몰리자 석유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태양광과 천연가스 발전에 돈을 쏟아부었다(“The story of Puerto Rico’s power grid is the story of Puerto Rico”. The Economist.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conomist.com/news/united-states/21730432-even-hurricane-maria-hit-it-was-mess-story-puerto-ricos-power-grid). 셋째, 기저발전으로서 제 역할을 해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진작에 포기한 상태였다.

3.

2016년 기준 푸에르토리코의 발전원 비중을 알아보자. 미국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47%가 석유, 34%가 천연가스, 17%가 석탄, 2%가 신재생에너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신재생에너지의 비중은 2%에 지나지 않으며, 사실상 가격이 함께 오르내리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총 발전량의 8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Puerto Rico - Territory Energy Profile Overview - U.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EIA)”. 2017년 10월 21일 접속. https://www.eia.gov/state/?sid=RQ).

애초부터 유가의 등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전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푸에르토리코는 90년대 말부터 2008년까지 이어진 유가의 고공행진 속에서 경제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경제위기 이후 폭락했던 유가는 이제서야 슬슬 고개를 들고 있는데, 그동안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도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 내에서 하와이 다음으로 높았다. 그런데 하와이의 경우 관광산업이라는 믿을 구석이 있는 반면 푸에르토리코에는 그런 게 없다.

경제적으로 워낙 낙후되어 있는 탓에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다. 전력망의 품질이 형편없는 탓에 지금과 같은 대정전이 아니어도 자꾸 전기가 끊기고 공장의 생산 비용이 높아진다. 인프라가 엉터리인 탓에 경제가 절름거리고, 경제가 힘차게 달려나가지 못하니 인프라 확충이 늦어진다. 악순환이다. 앞서 인용한 Vox의 기사에서 FiveThirtyEight의 자료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에르토리코 발전소 설비의 연식 중위값은 44년이다. 일반적인 산업국가 발전 설비 연식의 중위값이 18년인 것에 비하면 굉장히 높은 수준이다. 낡은 전력 인프라에 의존해 간신히 돌아가던 경제가 초대형 태풍을 만나 좌초한 것이다.

4.

푸에르토리코는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PREPA는 발전원 중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천연가스와 태양광 발전의 비중을 높이기로 결정했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떠나는 와중이었다. 세제 혜택이 사라진 마당에, 전기요금이라도 더 저렴하게 공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왜 그들은 하지 않았던 것일까? 영어권에서 나온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아도 뚜렷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충분히 짐작 가능한 사실이 있다. 굳이 태양광과 가스 발전을 늘리려 드는 그러한 움직임이 '친환경'으로 포장되었으리라는 점 말이다. 산업과 경제의 기초 체력이 갖춰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PREPA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이 아니라 '깨끗한 에너지'에 돈을 쏟아부었다. 물론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 발전기, 가스 발전기가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을 불러온 직접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더 저렴한 발전원이 존재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는 것 역시 분명하다.

지금도 푸에르토리코에는 풍력 발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태풍을 맞은 상태에서도 건재하게, 전혀 고장나지 않은 발전기가 남아있었다(지멘스의 놀라운 기술력이여!). 하지만 발전기를 운용하는 이들은 망연자실하게 돌지 않는 풍력 터빈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풍력 발전기를 최초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외부 전력원이 필요한데, 바로 그 외부 전력원을 확보하는 것이 현 시점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문자 그대로 '태평양 앞바다가 사이다여도 컵이 없어서 못 마시는' 꼴이다(Dreazen, Yochi. “Darkness: life in Puerto Rico without electricity”. Vox, 2017년 10월 23일 접속. https://www.vox.com/2017/10/23/16501164/puerto-rico-hurricane-maria-power-water-sewage-trump).

5.

푸에르토리코에 건설되어 있던 태양광 발전 판넬이 태풍을 맞아 파괴된 모습.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하던가. 일론 머스크는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 소식을 접하자 그것을 자신의 태양광 발전 사업의 홍보 기회로 삼았다. 푸에르토리코 전역에 솔라시티(Solar City)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나는 일론 머스크의 그러한 제안이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그가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공개한 것처럼, 솔라시티에서 만드는 태양광 발전기 내장형 타일을 시공하여 테슬라 자동차 한 대를 굴리고 집안 전체에서 쓰고 남을만큼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해도, 푸에르토리코의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기는 집에서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음악을 듣고 TV를 볼 때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면 등받이 쪽의 물탱크에 새로운 물이 차오른다. 그런데 수도가 정상 작동하려면 (고대 로마나 에도 시대의 일본처럼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지 않는 한) 당연히 어딘가에서 전기를 이용해 수압을 만들어내고 있어야 한다. 도시가스를 연료로 사용하는 보일러가 작동하기 위해서도 전기가 필요하다. 그야말로 인프라 중의 인프라인 셈이다. 그런데 일론 머스크는 그러한 재앙을,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고소득층을 위한 제품의 홍보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에는 집집마다 옥상에 깔려서 각 가정의 소비를 충족시켜주는 전기만 필요한 게 아니다. 섬의 인프라 전체를 작동시켜줄, 절대 꺼지지 않는, 어지간한 자연재해에도 굴하지 않는 든든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러니까, 원자력 말이다.

6.

1959년. BONUS(BOiling NUclear Superheat reactor)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추진되었다. BWR이라는 실험적 기법을 채택한 원자력 발전 시스템이다. 푸에르토리코 측에서는 평범한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를 원했으나, 애석하게도 아주 작은 용량의 시험적 설비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 섬의 서쪽 끝인 린꼰(Rincon)에 부지를 마련하고 1963년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General Nuclear Engineering Corporation (GNEC)이 이리저리 인수합병되는 과정을 거치며 건설은 지체되고 비용이 상승했다. 결국 예정보다 한 해 늦은 1964년 4월에 첫 시동을 했고 1965년 9월에서야 최대 출력을 뽑아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결국 발전소는 1968년 폐쇄되었고, 오늘날은 원자로의 건물을 재활용하여 박물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원자력 발전소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웨스팅하우스를 통해 평범한, 검증된, 583메가와트의 발전소를 건설하고자 했다. 1970년 시작된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는 실제로 진행되는 것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1978년 완전히 폐기되었고, 이후 오늘날까지 푸에르토리코는 '핵발전소 없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섬'이 되어있다(“Nuclear Energy for Puerto Rico | ANS Nuclear Cafe”. 2017년 10월 22일 접속. http://ansnuclearcafe.org/2016/04/14/nuclear-energy-for-puerto-rico/).

7.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1970년의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추진되었다면, 푸에르토리코의 운명은 지금과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다. 미 연방 정부의 세제 혜택 철회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안정적인 산업 기반을 확보하고 경제력을 다졌더라면 그토록 낙후한 발전 및 송전 설비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의 대정전은 경제적 실패의 문제고, 그 경제적 실패의 밑바탕에는 잘못된 에너지 정책이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실패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자력을 도입해야 할 시점을 놓쳤다. 둘째, 석유의 비중을 줄이고자 택한 것이 천연가스와 태양광이었다. 말하자면 후라이팬 바깥으로 뛰어서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다. 그런데 두 번째 실패에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또 다른 에너지 정책 실패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클린턴 정권과 함께 불어닥친 미국 내 탈원전 열풍에 푸에르토리코의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도 미국의 담론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수많은 IT 기업들이 푸에르토리코를 소재로 자기 회사의 기발한 기술을 뽐낸다. 일론 머스크 뿐만이 아니다. 구글은 거대한 기구를 띄워서 푸에르토리코에 무료 와이파이를 제공하겠다고 하고 있고, 페이스북은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24시간 돌아가는 신뢰할만한 기저발전이 없다면 현대 문명은 유지될 수 없는데 말이다.

8.

관련 뉴스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누구도 푸에르토리코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감히 입에 올리고 있지는 않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는 건설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설비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기술 자체가 굉장히 고난이도이며, 여타의 발전소보다 훨씬 건설 비용이 크다. 당장 전기가 안 돌아서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섬을 두고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경제이고, 경제는 인프라가 확충되어 있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푸에르토리코와 마찬가지로 한국도 실질적으로는 섬과 다를 바 없는 환경이다. 마치 우리처럼, 그들에게도 원자력이 필요하다. 설령 폭풍우와 기상 악화로 석탄이나 석유 혹은 가스를 실은 배가 입항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꿋꿋하게 작동하는, 한 번 연료를 보급하면 1년 정도는 거뜬한, 그런 원자력 발전소 말이다.

만약 한국이 석유 47%, 천연가스 34% 등의 에너지 믹스를 가지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경제적 처지는 어땠을까?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견디고, 2008년 경제위기 이전까지의 고유가 상황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까?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을 이루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을까?

9.

11월 7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다.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뭐니뭐니해도 북핵이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고 ICBM에 장착하여 발사 실험까지 성공하는 순간, 그것이 미국 본토에 떨어지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므로, 미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험을 제거하려 들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참모들이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실이 있다.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시 미국에 핵을 '쏠' 능력이 있다는 것 말이다. 다만 그들의 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기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의 핵은 완성된 기술이며 평화적으로 활용되는 발전소라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미국에 원전을 수출할 수 있을만한 기술력을 인정받은 나라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리고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원하는 300만 이상의 (미국 대통령 투표권은 없는) 미국 시민들이 살고 있다. 북한이 아니라 우리도 미국에 핵을 '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상, 아니 망상에 가깝다. 현 정권의 탈핵 기조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 내의 여론과 푸에르토리코 주민들의 의사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담대한 계획'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상상을 멈출 수 없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원자력의 유용함과 안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래서 한국에 온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깜짝 놀랄 제안'을 던진다면? 그렇게 우리가 가진 기술로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의 밤을 밝힐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상하며 긴 글을 한 편 써 보았다.

2017-11-03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월 1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지방분권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도권과 지방이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년 지방선거에 개헌 국민투표를 함께 하자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나는 지방분권개헌에 반대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권한을 어떻게 지방에 넘겨줄지,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가 현재 가지고 있는 권한 중 일부는 중앙정부가 회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덜컥 지방분권개헌을 약속하는 것은 무책임한 정치적 행보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지역 사회가 위축되고 소멸하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실체 없는 이상을 앞세워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예산이 새어나가는 것을 경계해야 할 시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전략을 수립하며 추진하는 백년지대계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권은 정 반대의 방향으로 국사를 처리하고 있다. 가령 탈원전 정책을 생각해보자.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단위를 놓고 본다면 탈원전이란 성립할 수 없는 정책이다. 우리는 사실상의 섬나라에 살고 있으며, 석유도 LNG 가스도 나오지 않는다. 바람의 질도 형편없고 국토의 70%가 산이다.

국가 단위의 에너지 정책을 놓고 볼 때 최선의 선택지는 원전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여 더 안전하고 풍부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지자체의 시선에서 보자면 탈원전이 좋다. 위험하지도 않지만 아무튼 다들 싫어하는 기피시설인 원전은 어딘가로 쫓아내버리고, 우리 동네는 소위 '꿀 빠는 지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최선일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권의 탈원전 정책은 바로 저런 식의 지역이기주의를 적극 부추기고 그에 호응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원자력만큼 안전한 전력 공급원이 또 없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마땅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는 불편한 짐을 떠안고 있다고 느끼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이런 진실을 설득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대통령의 사고방식이 아니다. 일개 시장이나 도지사의 눈으로 국가 에너지 정책을 바라보고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전공대의 건설과 유치에 대한 논의도 그런 식이다. 과연 지금 한국전력이라는 공기업이 대학을 추가로 건설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대학에 들어갈 학생들의 숫자는 날로 줄어들고 있고, 멀쩡히 있는 대학들도 정원을 줄이는 이 판국에 말이다. 정상적인 대통령의 시각으로, 나라 전체의 살림을 바라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시각에서라면, 굳이 지금 대학을 더 지을 이유를 찾기란 어렵다. 하지만 일개 지자체장의 눈으로 보자면 무슨 상관이랴? 일단 우리 지역에 번듯한 건물 가진 대학 하나 더 들어오는 게 급선무다.

정작 지자체의 운영을 보면 한숨만 나올 지경이다. 풍기인삼축제조직위원회는 지난 10월 20일, 2.5미터 크기의 인삼 조형물을 공개했다. 그런데 그 실상은 이런 꼴이었다.

축제의 주제를 나타내는 조형물로 축제장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남원천에 세워졌다. 문제는 인삼 조형물 중간 부분에 붉은 색을 띤 남자의 성기 모형이 부착돼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모터장치를 해 성기 모형이 아래위로 계속 움직인다. 인삼 조형물에는 '인삼의 힘!'이라고 적힌 어깨띠가 걸쳐져 있다. 풍기인삼이 정력에 좋다는 뜻을 담기 위해 조직위가 설치했다. (이용호, "풍기인삼축제? 풍기문란축제!", 한국일보, 2017년 10월 23일.)

지자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돈을 펑펑 쓰고 있다. 강원도 양구군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시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만들고 기네스북에 등재하기 위해 1억1천6백만원을 소진했다. 울산시 울주군의 초대형 옹기에는 9천만원, 충북 영동군의 초대형 북에는 2억3천만원이 들었다. 지자체장이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고 했거나, 알량한 '관광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물건들일 것이다. (참고: 윤영현, "'세계 최대'가 뭐길래...지자체 '억' 단위 세금 펑펑", SBS, 2017년 10월 31일.)

이건 반드시 '지방'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강남스타일 말춤 조형물'이 있다. 2016년 신연희 강남구청장의 주도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풍기인삼처럼 문란하지는 않지만 제작비는 총 4억원 가량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여선웅 강남구의회 의원은 이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당시 싸이측에서 동상 제작에 부정적이어서 완전한 말춤 동상을 제작할 수 없었다"며 "정상적이면 포기해야 되는데 기어코 손목이라도 만들어 버린 것이다"라고 조형물 관련 뒷얘기를 전했다"(김남중, "싸이, 코엑스 '강남스타일' 조형물에 "과하다"", 국민일보, 2017년 7월 24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일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권리가 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하거나 유보될 수 없는 자유의 이상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의 자의적 판단이나 폭력에 우리의 자유가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의 확충은 지자체에 수많은 예산을 퍼주고 그것을 낭비하건 말건 수수방관하며, 큰 필요성이 있건 없건 아무 축제나 벌이고 대학을 짓겠다고 하는 그런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런 과정에서 국가 전체의 역량이 훼손되기 시작하면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훼손된다. 지방자치의 이상 하에 우리 개인들의 삶이 침해당하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치경찰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위 '섬마을 주민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인 교사는 낙도의 경찰이 아니라, 그 경찰을 관할하는 목포의 지서까지 찾아가 신고를 했다. 왜일까? '섬마을 공동체'와 경찰은 서로 얼굴을 보고 지내는 이웃이기 때문에 성폭력을 신고해봐야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복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판단이었다. 공권력은 주민과 친근해야 하지만, 유착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자치경찰제가 과연 지역 토호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권 내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모든 지방자치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지방자치는 줄어드는 인구와 고령화에 대응해 훨씬 밀도 높고 '스마트'한 방향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재정적으로 자립도 어렵고 산업 기반도 허물어진 가운데, 지자체들이 궁여지책으로 조잡하고 흉측한 조형물을 만들고 축제를 벌이며 대학 유치에나 목숨을 걸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중앙정부가 제동을 걸기는커녕 도리어 지방분권개헌을 덜컥 약속해버리는 오늘날의 모습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는 말이다.

지자체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예산을 최종적으로 책임진다. 지자체는 내부의 범죄나 소요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는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에 스스로 맞서야 한다. 지자체는 남자 성기가 껄떡거리는 인삼 조형물 수천 개를 만들고 파산해도 중앙정부에 재정적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반면 중앙정부가 재정적으로 파산하면 그 여파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요컨대 권한과 책임의 범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라를 운영하는 것은 지자체적 시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자체는 내후년의 산업 동향과 '미래 먹거리'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른 지자체에게 돌아갈 몫을 어떻게 우리 지자체가 확보하느냐가 더 중요한 관건이다. 하지만 국가는 다르다. 국가의 경영은 미래를 바라보며 이루어져야 하고, 때로는 국민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일도 추진하며 동의를 얻어나가야 한다. 요컨대, 대승적 관점을 견지해야 마땅하다. 언제나 주민 행복만을 위해 오직 그것만을 원칙으로 삼아도 큰 탈이 없는 지자체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다.

이게 나라냐? 지난해 촛불시위에서 많이 들려왔던 구호다. 당시 시위의 참여자들은 그 시위를 통해 '나라다운 나라'가 이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현재의 집권 세력은 '나라다운 나라'를 '촛불특별시'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대한민국은 국가다. 지자체의 연맹이 아니다. 청와대가 지자체의 눈으로 국가를 바라보지 말고, 국가의 눈으로 지자체를 바라보면서, 온 국민을 위한 미래의 계획을 수립할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