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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6

K방역, 부동산… 한국은 지금 ‘문재인 쇼' 절찬 방영 중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데카르트와 트루먼쇼
일러스트=안병현
보험 회사 직원 트루먼 버뱅크는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시 헤이븐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고소 공포증과 물 공포증이 함께 있어 고향을 떠날 수 없는 게 아쉽다. 늘 웃는 얼굴로 친절한 이웃을 만날 때마다 하루 인사를 한꺼번에 건넨다. ‘굿 애프터 눈, 굿 이브닝, 굿 나잇.’

언제부턴가 트루먼의 일상이 삐걱거린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서 무대 조명이 떨어지지 않나, 자기 머리 위에서만 비가 쏟아지지 않나, 심지어 어린 시절 보트 사고로 죽은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노숙자를 만났는데 사람들이 그 노숙자를 버스에 태워서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나. 트루먼은 점점 의심한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진짜’일까?

독자 여러분도 모두 아실 그 이야기, ‘트루먼 쇼’의 설정이다. 트루먼의 인생은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다.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른 살이 된 지금까지 쭉 그랬다. 사상 최대의 리얼리티 쇼이면서 PPL인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지만, 본인만 그 사실을 모른다. 평생을 보고 듣고 접해온 모든 것이 가짜인 셈이다.

‘트루먼 쇼’는 1998년 개봉 당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보면 어떤 부분은 시대에 뒤처져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소셜미디어나 유튜브에 자기 일상을 생중계하는 ‘자발적 트루먼’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주제 의식은 여전히 빛난다. 자기를 둘러싼 이 모든 것이 가짜가 아닐까 의심하는 트루먼의 모습은 서양철학의 근본 질문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코기토 명제’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어떤 전능한 악마가 나를 속이기 위해 내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을 악마 뜻대로 조종한다고 해보자. 영화 속 ‘트루먼 쇼’의 연출자 크리스토프처럼 모든 경험과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차원을 넘어, 상식과 감각조차 뒤바꾸는 것이다. 불을 만져도 뜨겁지 않고 물을 마셔도 시원하지 않고, 빨간색이 파랗게 보이고 사람들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1+1=2가 아니라 3이 정답이라면?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 나의 모든 인식이 잘못되었다 해도, 인식하고 있는, 즉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다. 악마가 나를 아무리 철저히 속인다 해도, 속이는 대상인 내가 ‘있어야’ 속일 수 있다. ‘트루먼 쇼’의 모든 것이 가짜여도 트루먼만은 ‘진짜’여야 ‘트루먼 쇼’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저서 ‘성찰’의 한 대목. “나는 내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동안, 그 악마는 결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끔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그 어떤 경우에도 참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내,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당시는 인류의 지적 역량이 다방면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모든 지식과 도덕적 판단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 신학은 더 이상 ‘제1 학문’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할 철학이 과연 보편적 합리성을 보증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는 진리를 인간이 가진 이성의 힘으로 밝혀낸 후, 그 위에서 수학과 자연과학을 포괄한 모든 학문 체계를 세우고자 했다. 마치 트루먼이 ‘트루먼 쇼’의 세트장 밖으로 나간 것과 같다. 인류는 종교와 관습이 아닌 이성의 힘으로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 뒷걸음질치기도 하는 법.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트루먼 쇼’가 절찬리 방영 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가장 가까운 예부터 들어보자. 지난 11일, 문 대통령이 경기 화성시 LH 동탄 공공 임대주택을 방문했다. 그는 44m²(옛 13평형)와 신혼부부용 41m²(12평형)를 둘러본 뒤 “공간 배치가 아늑하고 아주 아기자기하다” “신혼부부에 아이 한 명은 표준이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두 명도 가능하겠다” “굳이 자기 집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임대주택이 충분히 좋은 주택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등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흡족해했다.

LH 측이 야당 요청으로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그 두 채는 ‘세트장’이었다. 3300만원을 들여 가구를 구입한 후 공임비 650만원과 부가세까지 포함해 총 4290만원을 들인 초호화 세트장이었다. 보증금 6000만원에 월세 20만원 수준인 임대주택에 보증금과 맞먹는 비용을 들여 만든 일종의 ‘가상현실’이었던 것이다.

어디 부동산 정책뿐일까.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역시 돌이켜보면 일종의 ‘트루먼 쇼’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이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평양에서 냉면을 먹고,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 ‘쇼’를 열심히 하면 평화가 올 것처럼 바람을 잡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 의향이 없다. 북측 해역으로 흘러 들어간 우리 국민에게 총을 난사하고 시신에 불을 붙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K방역’이라는 ‘문재인 쇼’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미국, 영국, 심지어 일본도 확보한 백신이 한국에만 없다. 겨울과 함께 하루 감염자가 1000명이 넘는 대유행이 시작되었는데 병상 확보조차 제대로 안 되어 전전긍긍이다. 비교적 감염자가 많지 않았던 지난여름과 가을 정부는 대체 무엇을 했던가? ‘덕분에 캠페인’을 벌이며 도리어 의사들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문재인 쇼’의 청구서는 결국 국민이 감당할 몫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 ‘트루먼 쇼’가 계속된 것은 시청률 때문이었다. 시청자가 있으니 쇼가 계속되었고, 트루먼은 섬에 갇힌 노예나 구경거리로 살아갔던 것이다. ‘문재인 쇼’도 마찬가지다. ‘우리 이니’가 화면에 멋지게 등장하면 그만이라는 40%의 고정 시청자들이 리모컨을 꽉 쥔 채, 대한민국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로 몰아가고 있다.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얻은 결론이다. 그 성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할 것이다. 권력은 온갖 ‘쇼’로 국민을 속일 수 있다. 하지만 국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참 길고 힘겨웠던 한 해의 끝. 더 많은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며, 주권자로서 존재하는 새해가 되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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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6

[노정태의 시사哲] 아동급식카드는 왜 인천 ‘라면 형제’를 구원할 수 없었나

일러두기: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저는 '라면 형제'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가급적 제목에도 넣지 말아달라고 일부러 한번 더 당부할걸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제목은 편집부의 권한.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감안하고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정태의 시사哲] 아동급식카드는 왜 인천 ‘라면 형제’를 구원할 수 없었나

[아무튼, 주말] 레비나스와 윤리학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엄마는 없었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다. 맏이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약간의 생활비가 들어있는 돈 봉투와 크리스마스 전까지 돌아오겠다는 메모 한 장뿐이었다. 실제로는 네 남매가 살고 있었지만 애가 많이 딸려 있으면 세를 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엄마는 아이들을 감춘 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출생신고를 하지도 않았으므로 학교는 고사하고 주민등록조차 되지 않은 아이들. 그때그때 다른 남자를 만나 집에서 출산한 자식들이었다. 이제 열두 살 맏이와 세 동생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내용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에 기반을 둔 작품이다. 네 남매가 방치되어 있었다. 멀쩡히 잘 살아 있는 엄마는 몇 달에 한 번씩 방문하며 가끔 돈도 보냈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차남의 시신이 비닐에 싸여 벽장에 감춰져 있었다. 장남이 어울려 놀던 불량한 친구들이 어른 없는 집을 아지트 삼았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고 집주인의 신고로 경찰이 개입해 사건이 드러나게 되었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이다.

이런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난 14일, 인천의 한 빌라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열 살짜리 형과 여덟 살짜리 동생이 큰 화상을 입었다. 엄마는 없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날부터 지인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웃은 엄마가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다며 이미 세 차례나 경찰에 신고한 바 있었지만 강제력 있는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아이들은 급식 대신 스스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고, 사고가 난 것으로 추정된다.

형제의 어머니는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었다. 기초생활수급가정이었기에 매달 150만원 내외의 지원금을 받았다. 경찰에 따르면 사건 발생 무렵 어머니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었다. 스가모 사건처럼 사실상 자식을 내다 버린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이웃으로부터 아동 학대와 방치로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양육자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동 보호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듯하다.

약자와 타자를 존중하며 돌보는 것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철학은 그런 주제에 소홀했다. 대부분의 철학자가 남자, 그것도 지배 계급 남자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자연에 가까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문명의 해악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웅변하며 ‘에밀’을 쓴 루소도 그랬다. 정작 자기 자식들은 고아원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인의예지를 논하면서 수백, 수천명의 노비를 부리던 조선 유학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철학에서 윤리의 지위란 고작 그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리투아니아 태생의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반성도 그 지점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명제를 생각해보자.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주체의 사유를 통해 세계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생각해야 존재가 있고, 존재가 있어야 다른 이들도 있을 수 있으니, 내가 아닌 너, 자아가 아닌 타자는 부차적인 문제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사고는 자기중심적 지배를 끝없이 확장하는 근대적 병폐의 근원이며, 결국 나치의 만행으로 이어졌다고 레비나스는 생각했다. 그의 부모와 형제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었다.

레비나스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론으로 이어지던 서양 철학의 위계를 뒤집었다. 기존 철학은 내가 있고 너를 알게 된 후 네게 선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비나스는 비참하고 고통받는 타자인 네가 있고, 그런 너를 보살피면서 나는 윤리적 존재가 되고 자신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 너는 나보다 먼저고, 윤리는 존재보다 앞선다. 제1 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을 선포한 것이다.

레비나스는 ‘얼굴’ ‘애무’ 같은 용어를 철학적으로 끌어올렸다. 우리는 남의 속을 모른다. 타자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근대 철학은 그 무지에서 한계와 공포를 느낀다. 레비나스의 생각은 다르다. ‘전체성과 무한’의 한 문장. “타자가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면서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을 우리는 얼굴이라고 부른다.” 서로가 얼굴을 가진 타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다.

‘애무’ 또한 마찬가지다. 연인은 끌어안아도 여전히 서로에게 목마를 수밖에 없는 타자다. 그렇게 사랑을 나누다 보면 또 다른 타자, 즉 아이가 태어난다. 연인은 함께 아이를 쓰다듬으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랑의 철학. 레비나스 이전에는 그 어떤 철학자도 마주보고 어루만지는 것을 이토록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반대로 향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복지라는 미명하에 거론되는 온갖 선심성 현금 살포 정책들만 놓고 봐도 그렇다. 인천 형제에게는 기초생활수당과 아동급식카드가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관심과 보살핌은 받지 못했다.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들은 고립됐다. 양육자인 엄마가 해주지 못하는 역할을 대신해야 할 국가는 돈만 주고 손을 놓았다. 요즘은 그런 돈을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주는 게 대단한 복지요 정의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기본소득을 이야기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자리 파괴에 대응하고자 미리 고민하는 것까지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얼마를 주네, 누구한테 주네 목청을 높이는 현 정치권의 논쟁은 값싼 포퓰리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원래 기본소득이라는 제도 자체가 그렇다. 국가가 사람을 고용하고 훈련시켜 직접 복지를 제공하는 대신, 몇 푼의 돈을 주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같은 우파 경제학자도 기본소득에 찬성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천 형제 사건 앞에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스가모 사건의 충격은 컸지만 2010년 오사카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는 일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한다. 복지의 사각지대를 어떻게 없애야 할지 밤새 토론해도 부족한 시점이다. 얼굴을 마주 보고 끌어안는 따스한 공동체를 향한 철학과 정치가 절실하다.

2020-09-02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朝鮮칼럼 The Column] ‘나쁜 연애’ 하듯 하는 정치

내 판단·생각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연애' 수작
부동산 정책도 공공의대도 정부가 하는 정신 조종 폭력
일상에서도 정치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유명한 심리학 실험.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고백하면 승산이 높아진다. 안정된 곳에 있을 때와 달리 불안감으로 인해 가슴이 뛰고, 그 가슴 뛰는 것을 상대에 대한 호감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나온 청춘 연애물에는 남자 주인공이 친구들에게 깡패나 치한 흉내를 내게 한 후 자신이 그 악당을 쫓아내는 용사인 척 하다가 들켜 망신당하는 전개도 곧잘 등장했다. 불안하면 ‘내 편’을 찾고 쉽게 호감을 느끼며 의지하게 된다는 계산의 반영인 셈이다.

하지만 그딴 수작은 연애 시장에서 퇴출당한 지 오래다. 상대방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몰아가고,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며,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 때문이다. 상대를 놀라게 하고 달래주는 것, 병 주고 약 주는 짓은 더 이상 연애의 기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는 정신 조종 폭력 행위인 것이다.

가스라이팅은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연극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정착시킨 표현이다.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되기도 한 그 작품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못하도록 하여 정신적인 궁지로 몰아간다. 아내는 남편에게 의존하면서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다. 용어 자체는 이렇듯 학대당하는 여성에 대한 상담에서 비롯했지만, 가스라이팅의 범위는 남녀 관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사이의 따돌림, 직장이나 군대 등에서 벌어지는 괴롭힘 등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가스라이팅을 할 수도 있다. 스물세 번인지 몇 번인지 수도 없이 갈아엎는 문재인표 부동산 정책이 대표적이다. 이 정책 내놓았다가 분위기 안 좋으면 손바닥처럼 뒤집고, 특례에 예외에 유예 조치 따위를 허둥지둥 꺼내 든다. 이제는 공인중개사나 회계사도 뭐가 어떻게 되는지 한 번에 파악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국민은 처음에 문재인 정권에 호의적이었다. 그저 서툴러서 그렇거니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 많은 장관이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는 와중에도 김현미 장관만은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며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분위기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불안과 혼돈은 문재인 정권의 선의가 낳은 부작용이 아닐 수도 있구나. 국민이 부동산과 관련해 불안과 혼돈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선의’ 그 자체일 수도 있겠구나.

부동산 ‘패닉 바잉‘이 시작되고, 특히 30대 젊은이들이 ‘영끌’하여 집을 사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시장을 믿어서가 아니다. 문재인을 믿지 못해서다. 집값이 안정적으로 오를 것이라는 신뢰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요동칠지 알 수 없다는 불신이, 국민의 발걸음을 부동산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

패닉 바잉에 나선 젊은 실수요자들을 향해 ‘다주택자 매물을 영끌해서 받아준다니 안타깝다’고 비아냥댄 김현미 장관의 발언도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가스라이팅의 교과서적 행동이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의 모든 고위 인사를 모범으로 삼는다면 지금이라도 서울, 그것도 강남의 아파트를 사야 한다. 그걸 따라 하는 청년들에게 국토부 장관이라는 사람이 빈정거리고 비웃는다. 졸지에 수억원의 빚을 진 30대로서는 가슴이 철렁할 것이다.

그게 바로 가스라이팅의 효과다. 내 판단과 생각을 스스로 믿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인생의 결정권을 남에게 넘긴 채 그저 복종하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 가재 붕어 게로 개천에 주저앉아, 저 위에서 선량한 손길로 나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맥없이 기다리게 길들이는 것.

부동산 정책뿐일까? 정부는 코로나 2차 유행이라는 공포 속에서 공공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음서의대’를 만들어 시민단체 추천으로 의사 면허를 주겠다고 했다. 의사들은 코로나부터 잡자는데, 정부는 ‘전면 철회’라는 말을 절대 안 한다. 방역을 정치화하고 국민 건강을 해치는 쪽은 의사가 아니라 정부다. 하지만 판을 쥐고 흔들 수 있는 힘은 정부에 있다. 국민과 의사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겠다고 덤벼들고 있는 중이다.

지금 누군가가 ‘나쁜 연애’ 하듯이 정치를 하고 있다. 소위 ‘문빠’들은 악당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문프’가 멋져보인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상의 영역에서도, 정치적 차원에서도, 가스라이팅은 범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 가스라이팅을 중단하라.

 

원문 링크: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0/09/02/XQP3MTNQNBG5XDPGNUCGK3HAO4/

2020-06-06

[노정태의 시사철]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아무튼, 주말]

폐기 처분된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이 울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과 '대상화'


한 도시에 어떤 슬픔도 모른 채 살다가 죽은 왕자가 있었다. 평생 '행복한 왕자'라고 불렸던 그는 아름다웠던 모습 그대로 시내 광장 한복판에 우뚝 선 동상이 되었다. 겨울이 왔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갈 때를 놓친 제비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하다가 왕자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시의 가난과 비참 때문이었다. 제비는 왕자의 명을 받아 처음에는 칼자루의 루비를, 나중에는 사파이어로 만든 왕자의 눈을, 마지막에는 왕자의 몸을 덮고 있던 금박을 하나씩 벗겨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렇게 흉한 모습이 되자 도시의 시장과 권위 있는 관계자들은 동상을 철거해버리고 만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행복한 왕자'의 내용이다.

일러스트 = 안병현
대부분은 이 이야기를 동화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일종의 교훈담으로 말이다. "틀렸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의도와는 다른 해석이다. 그는 "예술은 오직 예술적 가치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유미주의자였다. '행복한 왕자' 또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상화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대상화는 현대 철학, 특히 페미니즘 및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비롯한 페미니즘의 여러 고전을 만나게 되지만, 여기서는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의 논의에 기대보도록 하자. 그가 학술지 '철학과 사회 문제(Philosophy & Public Affairs)' 1995년 가을 호에 기고한 논문 "대상화(Objectification)"가 오늘날까지도 교과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누스바움은 고전 소설과 통속물, 잡지를 넘나들며 텍스트 여섯 개를 발췌한다. DH 로런스의 '무지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제임스 핸킨슨이라는 철학자가 로런스 세인트 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쓴 하드코어 에로 소설인 '이사벨과 베로니크', '플레이보이' 1995년 4월 호, 영국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가 남자 동성애자들의 성생활을 다룬 '수영장 도서관', 헨리 제임스의 '황금 그릇'이 그것이다. 그 각각을 검토하며 대상화의 특징을 도구성, 자율성의 부정, 수동성, 대체 가능성, 침해 가능성, 소유권, 주체성의 부정이라는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말은 어렵지만 요지는 간명하다. 대상화란 인간 존재가 하나의 대상이자 사물로 취급되는 현상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고 어떤 수단을 위한 도구로, 혹은 사고팔 수 있는 재화로 취급하며, 때로는 약탈하고 어떨 때는 예찬하기도 하는 행위를 대상화라 부른다. 특히 여성을 상대로 한 대상화가 주로 문제가 된다. 여성을 성욕 해소의 도구로 삼고, 인신매매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숭배'하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다.

저 일곱 분류가 수학 공식처럼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각각의 맥락에 따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가령 DH 로런스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서로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양자가 합의하에 계급적 위계를 뛰어넘는 성적 대상화이기에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다고 누스바움은 판단한다. 반면 '플레이보이'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해로운 대상화에 속한다. 이웃집 여자, 여비서, 학교 선생님 등 어떤 범주를 통째로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여성을 인간이 아닌 성적 대상으로 비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왕자'로 돌아가 보자. 왕자를 행복의 아이콘으로 삼아 성 안에 가둬놓고 있었던 도시는, 왕자를 섬기면서 동시에 대상화하고 있었다. 죽은 후에도 동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우는 아이에게 "저 행복한 왕자처럼 웃으라"고 훈계한다. 도덕적 교훈 전달의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도시의 고위 관료들은 동상이 보기 좋고 예쁘니 쓸모가 없어도 괜찮다며 자신들의 취향을 뽐내지만, 정작 왕자가 흉측해지자 쓸모가 없어졌다며 폐기 처분해버린다. "아름답고 보기 좋은 장식품"으로 대상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연이 주도하여 전국에 세워진 소녀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소녀상은 일제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일차적으로는 대상화에 맞서는 예술인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소녀상은 각자의 삶과 목적과 꿈을 지니고 있었던, 정의연에 동의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던 그 모든 위안부 피해자를, '한복 입은 소녀'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치환했다.

앞서 누스바움이 제시한 대상화의 일곱 유형 중 특히 '소유권'이 의미심장하다. 대상화하는 자는 대상화된 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소녀상 제작자가 소녀상에 대해 저작권을 주장하며 다른 조각가의 모방을 금하는 현실은 무엇을 뜻할까. 정의연이 일제에 의한 강압적 성적 대상화를 고발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위안부 피해자들을 반일 운동의 도구로서 대상화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젊은 시절 일제에 의해 성적으로 대상화되었고, 훗날에는 같은 민족에 의해 이념적으로 대상화되고 있었다.

대상화에 저항하는 자는 폭력과 처벌을 당하게 마련이다. 관부재판을 통해 일본에서 위안부의 존재와 피해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받은 고 심미자 할머니의 이름이 남산 '기억의 터'에서 배제된 것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정의연이 자신들의 뜻대로 대상화되지 않는 피해자에게 '기록말살형'을 내린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 할머니에게 화살을 돌리고 있다. 상당수의 기성 여성주의자들은 운동과 조직을 지키겠다며 피해자의 절규를 외면한다. 여성주의의 이름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위안을 위해 다시 '행복한 왕자'를 펼쳐든다. 와일드는 주장한다. 예술은 도덕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유용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런 대상화를 거부함으로써 예술은 참다운 가치를 얻는다. 쓰레기가 되어 소각로에 처박혔지만 왕자의 심장은 불 속에서도 녹지 않았다. 신은 죽은 제비와 그 심장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들을 천국으로 불러들인다. 대상화를 거부하며 존엄해지는 것은 예술만이 아닐 것이다. 보석과 금박을 나누어주던 행복한 왕자처럼, 소녀상에 갇히기를 거부한 피해자가 스스로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5/2020060502224.html

2020-05-28

[노정태의 시사철]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자기만의 방'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통과되던 무렵의 어느 날 밤, 버지니아 울프는 변호사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메리 비턴이라는 숙모가 봄베이에서 낙마 사고로 숨졌고, 숙모의 유언에 따라 울프가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울프는 생계를 위해 지속하던 신문 기고, 대필, 노인 책 읽어주기, 조화 만들기, 유치원 과외교사 등을 집어치우고 문학에 몰두한다. 1928년 10월 발표한 두 강연문을 편집하여 쓴 에세이 "자기만의 방"에서 그는 자신의 행운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은 후, 이전까지 '문학'의 영역에 등장하지 않았던 진실을 말한다.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만한 돈과, 자물쇠를 걸어잠근 채 혼자 생각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울프의 주장에 '부르주아 페미니즘' 같은 딱지를 붙이고 매도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자기만의 방"이 세상의 진실을 간파하고 드러낸 작품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돈이 많다고 해서 그 누군가가 꼭 자유롭고 행복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돈이 없다면 자유롭고 행복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리만치 어려워지니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보다 조금 앞선 시대를 살았던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이 쓴 <돈의 철학>을 같이 읽어보자.

사람들은 돈을 이용해 사고 팔고 주고 받으며 자신에게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 즉, 돈은 교환의 매개체이다. 그렇기에 돈에는 어떤 '본질'이 없다. 내가 가진 1만원이나 다른 사람의 1만원이나 모두 1만원일 뿐이고 그 외의 다른 속성을 갖지 않는다. 돈은 누가 어떻게 벌었는지 등도 가리지 않는다. 그저 '많다' 아니면 '적다'로 표현되는 순수한 양(量)적 재화인 것이다.

여기서만 끝났다면 짐멜의 논의가 오래 기억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천재성은 "돈의 소유의 양적 차이가 그 소유자에게 매우 현저한 질적 차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간파한 데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연금복권은 매달 500만원을 20년간 지급하고, 로또는 10억원대의 1등 당첨금을 한번에 준다. 둘 중에 골라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다면 무엇을 택할 것인가? 연금복권에 비해 로또가 훨씬 잘 팔린다는 현실이 말해주듯이 대체로 로또를 선호한다. 목돈이 주는 '질적 차이' 때문이다. 물론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으며 글을 썼던 버지니아 울프가 그랬듯, 갑자기 생긴 큰 돈으로 평온한 일상을 깨뜨리는 대신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연금복권을 택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에서 시작해 게오르그 짐멜을 운운하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고통을 겪은 여성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그 돈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인생의 선택지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의 충격적인 폭로 이후 우리가 처음 알게 된, 혹은 모른 척 하고 있었던 역사적 비극과 회복에 대해,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짚어봐야 하는 것이다.

'돈의 노예' 같은 표현에 너무도 익숙해진 탓에 우리는 돈이 인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만들어주었는지 잘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인간관계'가 뒤엉켜있는 소규모 공동체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도 그런 꿈을 품고 귀농하거나 하면 대체로 실망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습, 편견, 속박, '공동체'의 압력 따위 때문이다. 돈은 그런 것으로부터 개인을 가장 결정적으로 해방해주는 소유물이라고 짐멜은 강조한다.

대도시 런던에 살며 매년 500파운드의 연금을 받는 버지니아 울프가 느낀 해방감도 그런 것이었다. "나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한 숙모님이 물려준 유산에서 나오는 몇 장의 종잇조각에 대한 대가로 사회는 닭고기와 커피, 침대와 숙소를 제공해 줍니다." 울프는 일에서 벗어남으로써 부질없는 감정도 털어내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증오심도 쓰라림도 없고, 다른 이에게 아부할 필요도 없으며, 대신 연민과 관용을 느끼다가 그마저도 넘어 "사물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이다.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가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해 저지른 짓은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회계 오류인지 회계 부정인지, 4억이면 충분할 전원주택을 7억에 구입해놓고 자기 아버지를 수위로 채용하는 게 정상인지 아닌지, 사실관계와 불법 여지를 모두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넘어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단지 드러난 문제를 비난하는 것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윤미향과 정의연은 '자기만의 방'을 원했을 여성들까지 그저 '피해자'로 묶어둔 셈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개인으로서 생각하고 말하고 젊은 시절 못다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유를 되찾아주고 싶었다면 그분들이 단 하루라도 젊고 건강할 때, 2015년 위안부 협상을 통해 일본이 준 배상금이 아니더라도,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경제적 도움을 드렸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현실은 짐승만도 못한 것이었다. 추운 단칸방에 시계 하나 안 걸어주고 온수매트 한 장 안 놓아드렸다. 여성주의의 대의를 내걸고, 다른 여성을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태에 몰아넣어둔 채, 자기 딸은 미국 유학 보냈고 윤미향 본인은 금배지를 달았다.

다시 "자기만의 방"을 꺼내든다. 울프가 강연문을 썼던 그 무렵, 영국의 '남성 문학'은 여성의 입을 틀어막은 채 오직 숭배와 예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 위선을 울프는 위트 넘치는 문장으로 해부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우상(偶像)으로 박제했던 정의연의 행보 역시 그러한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가 던진 질문 앞에, 윤미향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대답해야 할 때다.

* 일러두기: 조선일보 5월 23일자 주말판 지면에 실린 것과는 조금 다른 미교열 원고입니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조선일보 홈페이지 또는 네이버 뉴스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05-09

[노정태의 시사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정치,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아무튼, 주말] 노자의 '도덕경'과 보수정치
일러스트 = 안병현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일본의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 일명 '곤마리'가 출연한 넷플릭스 리얼리티 쇼 제목이다. 독자 여러분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주 자그마한 체구의 일본 여성이 미국의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나긋나긋하지만 단호한 말투로 말한다. 일단 가진 걸 모두 꺼내어 쌓아놓은 후,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엄격한 순서가 있다. 옷, 책, 서류, 소품, 추억의 물건. 일단 몽땅 꺼내서 쌓아놓는다. '내가 이렇게나 짐이 많았어!'라고 경악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각각에 대한 판단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이 핵심이다. 옷이건 책이건 옛날에 찍은 사진이건, 하나씩 만져보면서 '설렘'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설레면 잘 정리해서 간직하고, 설레지 않으면 물건에 '고마웠어'라고 작별 인사를 하고 버린다. 정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쌓여 있던 과거와 선을 긋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이 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걸까? 일본인은 좁은 집에 산다. 정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반면 넓은 집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의 경우 정리를 하지 않아도 대충 살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물건을 쌓아두지 않고, '설레는' 것만 남겨야 하는 어떤 이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곤도 마리에의 주장은 그렇게 철학적 맥락을 띠게 된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노자 철학의 일부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도덕경'의 11장을 펼쳐보자. 서른 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꽂혀 있으니, 바퀴통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들어도 방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의 쓸모 덕분이다. 있음과 없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관계가 순환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노자 철학의 핵심 대목 중 하나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동아시아인들은 이 논의에 너무도 친숙하다. 많은 경우 이것을 철학적 논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하다. 하지만 곤도 마리에가 찾아가는 미국인들, 심지어 넷플릭스로 지켜보는 모든 이는 신선한 깨달음을 얻는다. 가족이 사는 집, 각자 눕는 방, 심지어 자주 안 쓰는 물건을 치우는 창고까지도, 꽉 차 있으면 쓸모를 잃어버린다. 비어 있어야 쓸모가 생긴다. 더 좋은 삶과 경험을 채워넣으려면, 우선 비워야 한다.
이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는 가족이 살아가는 집보다 더 큰 단위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정치의 영역에서도 그렇다. 4월 총선에서 역대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후에도 끝날 기미가 없는 미래통합당의 내부 분열 및 의기양양한 청와대와 여당을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보수 정치라는 집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을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에 따라 살펴보자. 옷. 새로 맞춘 핑크색 옷이 한가득 쌓여 있다. 설레는가? 그럴 리가. 책과 서류는 어떨까. 오랜 집권 경험을 지닌 거대 정당으로서 막대한 지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차고 넘친다.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제대로 활용된 바 없다. 쌓여만 있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소품들은? 선거를 앞두고 '잔재주'를 부릴 법한 시점이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수 정치라는 집은 있긴 한데 쓸모가 없는 것들로 꽉 차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늑하기는커녕 퀴퀴하고 답답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추억의 물건을 살펴볼 차례다. 돌이켜보면 나쁜 것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 당시, 2008년 금융 위기에 대응하여 내놓았던 일련의 정책들을 생각해보자. 이명박 정권의 여러 과오와는 별도로 오늘날까지도 참고할 만한 지점이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도 모든 게 잘못되지는 않았다. 지지율 하락을 각오하고 공무원 연금 개혁의 화두를 제시한 정치적 용기만큼은 곱씹을 필요가 있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정치적 위험을 무릅쓸 수 없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이, 친박 양대 계파는 자신들이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 상징적 자본을 쇄신하지 않았다. 탄핵 이전에도,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보수 정치는 설레지 않는 것들을 잔뜩 끌어안고 버티고만 있었다. 결국 국민이 보수를 통째로 내다 버리고 만 것이다.
여당과 청와대 역시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 북한 깜짝쇼 따위 집어치우고, 국가에 필요한 인기 없는 정책을 펴나가야만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미래를 위한 노동 개혁이 절실하다. 21세기 초,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연합정권이 슈뢰더 총리의 지도하에 감행한 하르츠 개혁에 비견할 만한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문제다. 대기업 정규직과 공무원에게만 유리한 노동 구도를 타파하여, 상위 20%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하위 80%를 좀 더 폭넓게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온 국민이 창의적으로 일자리를 오가고 만들어낼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벌어질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지형에서 한국이 국제적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마련해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의지가 없다. 대통령 지지율은 60%를 넘나들고 국회 의석도 3분의 2나 되는데 뭐가 두려워서 할 일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쓰지도 않을 것을 모아만 놓는 이들을 '호더(hoarder)'라 부른다. '지지율 호더', 문재인의 지금 모습 아닌가. 지지율은 정책으로 환산되어 필요한 곳에 쓰여야 한다. 경제가 무너지면 지지율도 의미가 없다. 김영삼은 지지율 90%를 넘긴 적도 있지만 정권 교체를 피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된 첫 주말이다. 나들이 길에 나서는 건 성급할 수 있다. 나는 집 정리를 할 계획이다. 창문을 활짝 열고, 먼지를 털고, 안 쓰는 물건들을 내다 버릴 것이다. 그래야 뒤늦게 찾아온 봄을 신선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우리의 정치권에서도 유의미한 변화가 벌어지기를 바란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국민을 설레게 하지 못하는 것들을 내다버린 후, 진짜 설레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이제 과거와 작별해야 할 때가 왔다. 더 이상 설레지 않다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고 보내주자. 정중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 2020년 5월 9일자 조선일보 주말판 게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08/2020050802565.html
* 참고: 기사에 포함된 일러스트는 이 게시물의 사진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