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12

인문학의 사회적 기능

우리의 문화적 코드 속에는, '공자왈 맹자왈' 하듯 학자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 권위로 찍어누르고자 하는 행동 유형과, 그것에 반발하는 무조건적인 작동 기제가 동시에 내재되어 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그토록 긴 글을 써가며 설명한 내용을 이렇게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칸트를 빌어 창조론을 과학에서 추방할 수 있"는 이유는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가 우리의 경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시 심리학 또한 추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심리학의 대상은 인간의 심리 현상이며 그것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과 과학의 역할 분담에 대해 끝없는 혼돈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의 인문학적 상식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문학의 저변을 넓혀서 사이비 지식의 범람을 막는다'라는 말의 뜻도 제대로 이해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추판다님의 계속되는 오해는 인문학을 하나의 큰 덩어리로 놓고, 그것을 과학과 같은 대립선상에 올려놓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인문학은 과학을 '제어'하지 않는다. 사실을 놓고 보자면, 정 반대로 과학을 '보조'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창조과학'자들이 곧잘 입증하려 드는 명제 중 하나인 '여호수와 10장에 나오는 태양 멈춤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에 대해 생각해보자. 지구가 돌다가 멈추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과 온갖 사물들은 접선 방향으로 날아가게 된다. 이것은 과학적 사실이고 그래서 과학도들은 이렇게 반박한다. 하지만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온갖 이유를 대가며 그 반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인 성경'에 그렇게 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는 것, 창세기부터가 적어도 다섯 개 이상의 사본이 특정 시기에 결합하여 만들어진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르네상스 시절부터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교회들은 대체로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지만 인간의 손을 거쳐 기록되었으므로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인문학이 과학을 '보조'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과학적으로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문학적으로도 부인될 수 없는 사실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이 온갖 '과학적' 증거를 들어 그 사실을 주장할 때, 인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의견에 대해 인문학적 합리성을 통해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질문은 완전히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다. 가령,

또, 인문학으로 창조론에 대응하는 건 현실정치적으로도 별로 바람직한 시도는 아니다. 다윈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칸트라고 딱히 받아들일 것 같지도 않고, 이쪽에서 칸트를 내세우면 저쪽에선 중세철학의 온갖 변신론이나 아니면 다른 상대주의 철학들을 들이댈텐데 이런 끝나지 않을 싸움에 빠져드는 게 과연 '해결책'일까?
"인문학적 제어론 (2)", Null Model, 2008년 11월 11일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이 지닌 다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오히려 창조론에 과학으로 맞서는 것이야말로 끝이 나지 않는 싸움으로 이어진다.

창조론을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성경에 '과학적' 권위를 입히고자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 대해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성경이 '과학적' 텍스트라는 의미가 된다. 창조과학자들은 과학자들에게 떡밥을 던지는 저질 블로거와 다를 바 없다. 과학자들의 답변을 통해 그 논쟁이 끝날 가능성은 0으로 수렴한다.

이 경우, 비록 '정답'이 없고 '끝나지 않는 논쟁'만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인문학이야말로 이런 무지와 편견에 맞서는 가장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쓴 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창세기 1장 내에 존재하는 두 텍스트의 차이를 설명해보라고 하는 것, 백제가 중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에게 굴삭기가 때려부수고 있는 산성의 정체를 물어보는 것, 등등의 반성적 고찰이 사회의 상식으로 통용된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그래도 믿고자 하는 사람은 줄기차게 믿겠지만, 그 발언이 가지는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고 그로 인해 끼쳐질 사회적 해악의 감소 또한 노려봄직하다.

'제어론자'와 '견제론자'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 과학에 대한 불필요한 '인문학적' 비판이,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문학적' 논쟁으로 소화될 수 있다. 나는 그들의 발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황우석이 과학자로서 잘못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과학에 대한 무지에서 그들의 잘못된 의견이 생산되고 있다면, 인문학적 논쟁을 통해 그 무지를 깨우치고 올바른 견해를 수립하게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역할이다.

마치 인문학이 '야, 너 철학자 칸트가 한 얘기 아냐? 것도 모르냐? ㅋㅋㅋ'라는 식으로 깝죽거리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우선 우리가 속한 문화가 무식한 사람을 천시하는 문화이고, 그것을 십분 활용하는 덜 된 인간들이 있기 때문이지 인문학 자체를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황우석이 포토샵으로 연구 성과를 냈다고 해서 모든 과학도들이 포샵질의 달인인 것처럼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2008-11-07

과학과 철학은 대립하는가

나는 과학을 좋아한다. 과학자들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도 나쁘지 않다. 수학은 잘 못했지만, 과학은 잘했다. 비록 문과생이지만 교양과학 서적을 즐겨 읽는 편이고, 구독 블로그 목록에는 과학 종사자들의 블로그가 적잖게 올라와 있다.

또한 소칼이 《지적 사기》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에 대해서도 적잖이 공감한다. 은유는 어디까지나 은유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를 따라가면서 전개되어야 한다. 또한 은유는 기본적으로 잘 아는 것을 통해 잘 모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모르는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더 모르는 대상을 끌어들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소칼이 제기한 일부 경향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나치게 확대하여, '인문학이 현대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는 아이추판다님의 발상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저의"라는 글에서 아이추판다님은 문제 의식을 혼동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이었다. 아마 그는 노예 소유주였을 것이다.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반대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재위 기간을 모두 전쟁과 정복으로 보냈다. 카이사르는 당대의 문장가요 교양인이었으나 갈리아에 대해서는 침략자였고 로마 공화정에 대해서는 독재자였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 중 일부는 이단심문관이었으며 또한 마녀재판관이었다.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는 식민 통치를 위해 고전을 가르쳤다.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
"저의", Null Model, 2008년 11월 4일


'인신공격의 오류'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아이추판다님이 인문학의 역할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은 몇몇 '스승'들의 인격을 본받기 위해 하는 학문이 아니다. 개별적인 인문학 분야에는 나름의 연구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대한 연구와 연구자에 대한 인격적 판단은 별개로 취급되어야 한다. 특히 여기서 아이추판다님은 철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나 또한 그 차원에서 대답해보겠다.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철학을 '잘 사는 법'에 대한 연구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즉, 철학자라면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의 철학은 잘못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식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짧은 생각이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관통하는 주제를 세 가지의 질문으로 요약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특히 근대 이후의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그리고 그 지식에 대한 확실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지를 꾸준히 질문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코기토 명제도, 그 방법으로 발견된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부터 세계에 대한 지식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 모든 지적 탐구의 역사는 '잘 사는 법'과는 관계가 없다.

따라서, 가령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했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도매금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이데거의 철학이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준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그 중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문제의식. 철학적 텍스트에서 그동안 덜 중요하다고 여겨진 부분을 잡아내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해석 기법. 독일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논지를 구성하는 방법론. 이것들은 하이데거가 어떤 사람이었는가와는 무관하게, 철학의 역사에서 이루어낸 큰 성취로 평가되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의 철학 그 자체로부터 나치즘과의 관련성을 캐내려는 시도가 꾸준히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그 자체가 철학적 논쟁인 것이지, "프랑스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하이데거는 나치였다. 이런데도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보면 저의가 의심스러워진다."라고 제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중반부터 인간에 대한 자연 파괴를 통탄하고, 그것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켜낸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그렇다면 과연 인문학, 범위를 좁혀 철학이 '현대의 문제'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의"에 다음과 같은 리플을 달았다.

'좋은 나라'란 무엇인가요? 이명박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와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가 다를 것 같은데요. 이런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고전에서 다루어진 논제들을 다시 훑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창조과학같은 사이비 과학이 미국에서 판치는 이유는,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단의 '열심'을 제어할만한 인문학적 소양이 그 사회에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창세기의 창조 설화가 '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아우구스티누스 시대부터 상식이 되어있습니다만, 그게 진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느냐 아니면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문학의 유물'로 취급되느냐는 다른 문제죠.

한국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노빠'들이 '상식'을 운운하며 날뛰지만, 대체 그 상식이 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다운 대답을 듣기란 어렵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도 노예 소유주와 영국 부르주아들, 그 외 비도덕적인 사람들이 실컷 논의해놓은 바가 있는데, 그 모든 과거의 유산을 도외시하고 현재만을 사는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 무식한 자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지에 근거하여 사고하고 판단한다. 미국에서 판을 치고 있는 창조과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지구가 7일만에 뚝딱 만들어지지 않은 것임을, 또한 생명체가 진화해왔음을 증명하는 '과학적 증거'들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게 과연 '과학'의 부족 때문일까?

하지만 나의 문제제기를 아이추판다님은 영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새 포스트를 올려, "이와 같이 인문학이 무엇을 제어해야 한다 또는 제어할 수 있다는 관점을 '인문학적 제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제어대상으로 손꼽히는 것이 아마 과학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밑에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신 분이 잘 지적해 주셨다시피, 나는 인문학이 과학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없다. 나는 이미 칸트가 1700년대에 한 주장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칸트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대상, 가령 신, 자유 등과 같은 대상에 대해서도 우리의 이성이 범주를 적용하려 드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신은 자비로운가?', '인간은 기계론적으로 결정된 존재인가, 아니면 자유를 가진 존재인가?' 등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대상은 경험 가능한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계속 이런 질문을 한다. 요컨대 사람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들을 그저 헛소리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신은 자비로운가?'라는 질문에 대해 누군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면, '신은 자비롭지 않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신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하게 된다. '신은 세계를 창조하였는가?'라는 질문 또한 마찬가지다. 리처드 도킨스가 되도 않는 무신론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칸트가 대답했다. 창조자로서의 신이 존재한다는 관념은 우리가 세계를 일관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경험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기술이기 때문에 참과 거짓을 논할 수는 없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것은, 곧 과학적 지식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말과도 같다. 《프롤레고메나》에서 칸트는 '안전한 길에 접어든 학문'의 대표로 수학과 자연과학을 꼽는다. 수학은 경험적 대상을 갖지 않는 순수한 사유의 산물이기 때문에 형이상학과 같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반면 자연과학은 경험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학문으로서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 '안전한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 또한 칸트의 자연과학에 대한 생각에 동의한다. 철학이 해야 할 일은 과학을 '제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지식이고 무엇이 지식이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사이비 지식과 사이비 과학이 사람들에게 어설픈 회의주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 중 하나이다. 이것은 나만 동의하는 발상이 아니다. 최근 과학철학에서 등장한 논의들은 말 그대로 '최근'의 것일 뿐 그것이 철학이나 인문학 전체를 대변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이 무색무취하지 않다는 비판, 과학은 중립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있다는 비판을 하는 인문학자들에 대해 나는 그러므로 따로 변호의 말을 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의 발상이야말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일은 어디까지나 철학 혹은 인문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프랑스 철학은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아야만 하므로 백인들의 전유물이다'와 같은 허술한 논변을 내세우는 과학도의 역할이 아니다.

"인문학적 제어론"이라는 포스트를 통해 아이추판다님은, 프랑스 철학의 '스타일'에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어의 섬세한 뉘앙스를 통해 전개되는 논의는 그만큼 프랑스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그 결과 "철학판이야말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로 남아있"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마지막 결론에는 귀를 기울일만한 지점이 있다. 철학은 대부분의 학문과 마찬가지로 "서구-백인-남성-중산층"의 전유물이다. 하지만 그것과 프랑스 철학의 수사학적 성향을 논하는 것은 별개다.

아이추판다님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철학 텍스트는 충분히 번역 가능하고, 또 외국어를 통해서도 교육하거나 토론할 수 있다. 물론 특정 언어의 특성에 기대어 창조된 개념의 경우 전달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하이데거의 Dasein은 독일어의 Da와 Sein을 합성한 것으로, 독일어를 모른다면 즉각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단어를 한국어의 맥락에서 '현존재'라고 번역하고,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존재자이다'라고 서술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이데거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서양 철학을 하는 것, 혹은 서유럽이나 미국에서 발간되는 주요 철학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등재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한 것은, 철학이 문화적 맥락 속에서 논의되는 학문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황인종이고 저들은 백인종이고 그래서가 아니다. 가령 분석철학의 경우 김재권 교수가, 정치철학의 경우 승계호 교수가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한국계 미국 철학자'이지 '한국 철학자'는 아닐 것이다. 아이추판다님이 논적으로 생각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상당히 문화 중립적이고 철학은 그렇지 않다. 중국인이 한국 사학계의 논문집에 자기 논문을 올리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가 프랑스 철학계의 일원이 되기 어려운 것을, 지나치게 해석하면 곤란할 듯 싶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자신이 아는 극히 몇 가지의 사례만을 놓고, 인문학에 대한 포괄적인 비하를 서슴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인문학에 대한 무분별한 증오는 도리어 반지성주의의 토대가 될 뿐이며, 과학을 우롱하는 비과학적인 목소리에 대한 사회의 면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낳는다. 한참 전에 언급한 창조과학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창조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흔히 쓰는 논법은 이런 것이다. '신이 이 세계를 창조했을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100% 부정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100% 부정할 수야 없다. 하지만 수많은 증거들이...'라고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면 창조과학자는 '거봐라,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전해도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라고 논리적 비약을 할 것인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선량한 과학자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내게 된다. 혹은 리처드 도킨스처럼 책을 쓰거나.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종류의 지적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의 몫이었고, 나는 그 사례를 칸트를 통해 제시한 바 있다. 오히려 그동안 진행되어온 철학적 논의에 무지한 상태로, 다만 잠시 기승을 부리고 있을 뿐인 주장들에 반박하기 시작하면, 담론적으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자신이 뭘 반박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단 화부터 내다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창 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제어론"의 리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은 그가 고래를 관찰하는 것과 별로 상관없어도 그의 정치철학하고는 심각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일까요?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가 아니었다면 과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설마 알렉산더 대왕이 아테네 사람이었다고 생각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알렉산더는 마케도니아의 왕자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교육한 것은 마케도니아가 제국으로 본격적인 발을 내딛기 전의 일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쓴 것은 그가 알렉산더의 교육을 마치고 아테네로 돌아와 뤼케이온을 설립한 뒤 한참 후의 일이며,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에 입각한 도시국가를 논하고 있을 뿐 알렉산더가 만드는 제국의 논리를 찬양하고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제국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설득력있게 입증할 수 있다면 그는 인문학계의 스타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추판다님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판하다가 못된 것만 배웠는지,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일단 써놓은 후 질문으로 바꿔서 그 입증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고 있다.

기초적인 오류는 계속 발견된다.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한 폴리스'였던' 것은 맞는데, 플라톤이 살던 시대는 이미 아테네가 한물 간 다음이었고, 아리스토텔레스로 넘어가면 거의 망해가고 있었다. 플라톤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 태어나, 페리클레스의 후계자 알키비아데스의 죽음을 목격했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패권을 빼앗기고 위축되는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국가》에서 수호자 계급을 칭송하는 것은 스파르타에 대한 동경심에서 비롯한 것이라는 데에 많은 연구자들이 동의한다. 물론 아테네 사람이니까 다른 도시국가에서 온 유학생을 가르치고, 시라쿠사로 망명해서 자신의 이상국가를 건설해보고자 시도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게 플라톤 철학의 본질적 내용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아이추판다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파피루스가 중세에 유럽으로 건너가게 된 과정에 대해 뭔가 더 알고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은 없으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체 이런 의미 없는 소리를 뭐하러 하는 걸까?

홍준기를 포함한 일부 인문학자들이 과학적 지식에 무지하고, 과학에 대해 불필요한 '견제론' 따위를 들먹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수는 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아이추판다님은 인문학적 상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있는대로 다 드러냈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대한 서평에서 테리 이글턴은, '영국의 새들'이라는 책 한 권 달랑 읽고 조류학에 대해 떠드는 녀석을 보는 기분이라고 실소를 터뜨렸다. 내 소감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과학을 '까고' 있지 않다. 다만 과학을 수호하기 위해, 얼척없이 철학을 '까는' 방향을 택한 이를 책망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런 식으로 과학과 철학을 대립하는 것으로 놓는 것은, 결국 반지성주의와 지적 회의주의의 득세만을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아이추판다님이 좀 더 신중하게, 과학도로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을 수행해주었으면 한다.

2008-11-06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인터넷 미디어 비평 매체 '미디어스'에 기고한 글입니다. 미국 대선에 대한 제 생각은 좀 더 천천히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외신과 주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보자. 'It's time'이라는 명료한 표어와, 속된 말로 대단히 '간지나는' 표지로 오바마의 당선 커버스토리를 낸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가 당장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는 '적절한 상황이 되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을 뿐,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즉시 철군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걸지 않았다. 오바마가 일거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미디어스, 2008년 11월 6일.

‘오바마’를 지금 팔아라? - 미국 대선 결과를 보는 외국 언론들의 몇 가지 시선

버락 오바마는 '변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미국의 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그것을 보도하는 대부분의 한국 언론의 자세는 새로움과 거리가 먼 것 같다. 한국 주류 언론에서 오바마의 당선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인간극장. 2. (어쩌고 저쩌고) 흑인. 3. 부시와는 다름. 그리고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 두 가지 정도 사안을 살펴본다. 첫째, 오바마가 당선되었는데 한미 FTA를 원안대로 통과시킬 수 있을까? 둘째, '친미 반북'을 표방하던 정치 세력에 균열이 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될까?

물론 앞서 말한 세 가지 보도 포인트는, 모르는 사람에게는 궁금한 것일 수 있다(가령, '아니, 흑인이 미국 대통령이 됐단 말야?'라며 놀랄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또 케냐 이민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인종차별을 딛고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된 남자의 '성공 신화'는 언제 들어도 가슴 설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같은 정보만을 쏟아내는 국내 언론들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바마의 당선이 왜 중요한 일인지를 명확히 하고, 그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대강이라도 나누어 보는 것이다.

   
  ▲ 뉴욕타임스 웹사이트 캡처.  
 
여러 외신과 주요 블로그를 통해, 오바마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기대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보자. 'It's time'이라는 명료한 표어와, 속된 말로 대단히 '간지나는' 표지로 오바마의 당선 커버스토리를 낸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가 당장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애초부터 그는 '적절한 상황이 되면' 이라크에서 발을 빼겠다고 했을 뿐,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즉시 철군하겠다는 식의 공약을 내걸지 않았다. 오바마가 일거에 이라크에서 철군할 것이라는 기대는 실현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컴퍼니에 인수된 미국의 국제문제 전문지 <Foreign Policy>는, 각계 전문가 10인에게 다음 행정부를 구성할 만한 '드림팀'을 꼽아달라고 청탁했다(<Foreign Policy>, 2008년 11/12월호). 그 결과 다섯 명의 전문가가 로버트 게이츠 현 국방장관의 연임을 요청했다. 그가 이라크 파병군 증가를 통해 상황 호전에 기여한 인물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오바마가 이라크에서 당장 미군을 빼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11월 이후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이슈가 된 경제 살리기는 어떨까. 역시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주를 이룬다. 2001년 경기 침체기 당시에도 소득 중 소비 비중을 줄이지 않았던 미국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국 소비자들의 신용카드가 닫혀있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위기로 확산되는 경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다. 미국 경제가 겪고 있는 위기는 카리스마나 구호만을 통해 극복될 수 없을만큼 구체적이고 심각한 것이다.

그래도 영국의 <가디언>은 '대통령 오바마는 미국의 희망이며 동시에 우리의 희망이다'라고 환호하는 사설을 내보냈다. 그 희망은 구체적인 정책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그가 선거 과정에서 보여준 뚜렷한 정치적 입장에 근거하는 듯하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미국의 건강 보험 시스템, 막대한 재정 적자, 경제 위기 등을 오직 '올바른 태도'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008년 미국 대선이 2004년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건강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는 점에 주목한다. 뉴욕타임스 사이트에 있는 그의 블로그를 통해, 크루그먼은 '오바마는 당당하게 진보적인 가치를 내걸고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음으로써 승리했다'며, 그 가치는 결코 폄하될 수 없는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현실은 어렵지만 나침반만은 비로소 올바른 방향을 향하게 되었다고 그는 생각한다.

   
  ▲ 가디언 웹사이트 캡처.  
 
하지만 구체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역시 현실은 어렵다. 클린턴 1기 당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히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거대 기업들의 로비와 영향력이 살아있는 한 오바마가 자신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오바마가 오늘 승리한다면, 진짜 시험이 내일부터 시작될 것이다'. 요컨대 그는 희망을 걸고 있지만 낙관하지는 못하고 있다.

선거가 시작되기 전, 10월 29일 영국의 유명 칼럼니스트 사이먼 잰킨스는 <가디언>에 글을 보냈는데, 그 첫 문장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오바마를 주식에 빗대어, '지금 오바마를 팔아라'라고 권한다. 오바마 주식은 과대평가되어 있으며 장래 다가올 시장은 미쳐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금 너무 큰 기대를 걸면, 나중에 안게 될 실망의 크기가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공화당원이 아닌 흑인 대통령 후보'라는 것 뿐이다. 오바마가 자신의 선거운동을 승리로 이끈 것은 그의 개인적 매력과 풀뿌리 조직의 결합 덕분이었다. 그 둘은 국정 운영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매도 시기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당연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오바마'를 아는 것보다 '미국' 그 자체를 아는 것이다. '오바마와 나는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철학을 추구하고 있다'라는 대한민국 현직 대통령의 발언이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것은, 두 사람의 외모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두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오바마만을 놓고 아무리 궁리해봐야 우리는 미 대선과 한반도의 운명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노정태 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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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10월의 여행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마감이 덤벼들고, 개인적으로 맡은 일도 처리하다보니 10월에 다녀온 여행 사진을 11월에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나는 동행인과 함께 10월 3일 개천절에는 10번째 쌈지사운드페스티벌에 다녀왔고, 이후 10월 4일과 5일에 걸쳐 부산에 내려가 영화는 한 편도 안 보고 국제시장과 깡통시장을 쏘다니며 이것 저것 쇼핑을 하고 돌아왔다.

긴 글을 쓰긴 좀 피곤해서, 사진과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김창완 밴드. '기타로 오토바이를 타자'부터 세 곡을 내달렸다. 쌈싸페의 키치 분위기가 김창완 밴드에 압도당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 전까지는 '슈퍼키드'라는 명랑한 친구들이 나와서, 치킨집 앞에 놓는 흐느적거리는 풍선 인형을 틀어놓고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얼쑤절쑤 덩실덩실 신나게 랩을 하는 분위기였는데, 김창완 밴드가 락으로 정리했다.




유앤미블루의 이승열. 한국의 보노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백 퍼센트 즐기지는 못했다.

사실 이번 쌈싸페의 최고 이벤트는 심수봉의 등장이었는데, 그 광경을 사진으로 못 찍은게 아쉽다. 목소리의 힘은 많이 죽었지만 타고난 분위기만큼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10월 부산여행의 목적지가 바로 여기였다. 국제시장. 토요일 밤에 지리를 파악하고 일요일에 쏘다녔는데, 걸으면 걸을수록 '암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런 곳. 낮에 찍어서 그런지 그 느낌까지 살아있지는 않다.




부산에서는 포장마차에서 오뎅과 곤약을 같이 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굳이 시식해보고 있는 대중문화비평계의 큰 별 노정태 선생.




해 떨어진 자갈치 시장에서, 회가 나오기 전까지.





부산 국제시장의 '개미집'에서 먹은 낚지볶음.





개미집 간판. 낙지가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개미집 간판을 자세히 보면 글씨 안에 정말 개미가 들어있다. 둘 다 은근히 귀엽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말처럼 달리고 싶은 사람은 클릭해서 크게 보시길.




친구가 구입한,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는 우산을 쓰고 찍은 사진. 노먼 록웰의 일러스트를 나는 사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몽롱하고 포근하지만, 나와는 너무 이질적인 문화적 코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의 일러스트를 보고 있노라면, 내 것이 아닌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고, 그로 인해 굳이 느낄 필요가 없는 소외감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기 때문이다. 이건 어렸을 때, 양과자 깡통에 그려진, 풍성한 핑크색 치마를 입고 양산을 쓴 아가씨의 파스텔 그림을 볼 때의 기분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러스트가 우산에 그려져 있으니, 감정적인 동요를 미적인 즐거움이 압도했다. 어쩌면 예전 그때와 감성의 구조가 조금 달라진 것일 수도 있겠다.




깡통시장을 쏘다니다가 먹은 '할매 유부오뎅'. 당면이 들어있는 유부를 삶아서 오뎅과 함께 내준다. 다소 느끼하긴 하지만, 북적거리는 시장을 누비고 다니다가 HP를 충전할 때에는 이런 걸 먹어줘야 하지 싶다.




국제시장에 있는 가야밀면에서 저녁. 작년에 다른 곳에서 먹어본 밀면은 실망스러웠는데, 여기는 마음에 들었다. 밀면 맛이라는 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맛있는 것과 맛없는 건 확실히 다르다.




여행의 소득. 골동품 상인에게서 덥썩 산 손목시계. 메이커도 없고, 방수 기능도 없고, 바늘 세 개와 유리판만 있는데, 은근히 그럴싸해보여서 샀다. 지금도 내 손목에 차고 있음.

마감을 끝내고, 맡은 일들을 잘 처리하고, 언젠가 또 여행을 가게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요즘 이래저래 사는 게 팍팍하다. 고작 한 달 전인데, 이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터무니없을 정도로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다시 봐도 흡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