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15

인간에 대한 예의, 신에 대한 예의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노정태)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자그니님)



내가 지난번 포스트에 쓴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놓고 불필요한 리플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말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그니님의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 2009년 2월 13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사회를 전제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강자에게 도움이 될까?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가톨릭 교회가 진보진영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가톨릭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 세계에 지부가 뻗쳐 있는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를 건드릴 경우 발생하게 될 저항의 크기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한 가지 본질적인 사항을 전제로 한다. 한국과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신앙심이다.

경찰이 신부를 때리건 말건, 경찰이 성당을 수색하건 말건, 나는 그냥 성당에 와서 성체 받아먹고 갔으니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예수님 땡큐, 신자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었다면 경찰은 명동성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때리건 말건, 안방 장농을 뒤지건 말건,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대통령 각하 땡큐, 이런 사람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1000만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명동성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글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회의 일원'인 나의 우월함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목적의 우월함이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원천봉쇄했을 때, 효자동 등 궁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바로 내 반응과 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 길을 막아서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고자 할 때 경찰이 막아서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그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신앙심보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신앙심은 그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사회 정의를 함께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정의로운 가톨릭'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 직접적인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을 불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대해 되짚어보자. 그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이럴 수가!'라고 경악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주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천주교회를 '진보적인 사회단체'중 일부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양자들 중 실질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천주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가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서 일부 '진보적'인 블로거들이 취하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다소 야비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그니님이 쓴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를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 중 지금은 다소 멀어진 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끝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를 지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홍길똥'이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 다. '냉담자인 나는 신자가 아니라는데, 당신들 지금 나 내치는 거?'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파문을 당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일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자그니님은 파문까지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서의 종교 생활과 진보적인 스스로의 지향성을 조율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신자들이 볼 때, 이런 태도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의 글 제목에 담긴 질문에 대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답해보겠다. 내쫓는 것은 가톨릭이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것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이단과, 종교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박해 왔다. 바로 그 신앙심과 충성심이 명동성당을 성지로 만들어온 진짜 원동력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특별한 패션인 양 목에 두르는 손수건처럼 천주교인의 소속을 들먹거릴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천주교회는 소외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회적 선행이 단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 즉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강남성모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가톨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강남성모병원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완전'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라는 식으로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조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한다. 성당에서 조용히 해야 하고,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의'가 만약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라면, 우리는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납득해야만 한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환자들이 비싼 돈을 내고 입원했는데, 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것은 그 '인간들'에 대한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강자들에게만 유리한 무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남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윗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도리어 그 반대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요구를 펼치는 이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신앙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향의 논의를 아예 시작할 수도 없다.

미사 시간에 확성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실로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명동성당과 관련한 문제를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이지도 않다.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경찰은 성당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같은 이유로 시위대는 성당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들은 그 신앙심 자체를 함부로 비아냥거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체스터튼의 글을 인용하면서 내 부족한 논의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18세기의 사회적 계약이론은 우리 시대의 여러 섣부른 비평에 나타나 있다. 모든 역사적 통치기구의 이면에는 찬성과 협동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옳았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익을 의식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질서나 윤리를 얻고자 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틀렸다. 도덕성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그러한 거래의 흔적이 아니라, 두 사람이 "우리는 성스러운 곳에서 서로를 때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흔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도덕성을 얻었다. [127쪽]
G. K. 체스터튼, 『오소독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2003)
73p. Orthodoxy (San Francisco, U.S.: Ignatius Press, 1995)

2009-02-13

명동성당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요청을 두고 이글루스 내에서 논쟁이 뜨거운 것 같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명동성당이 경찰에게 '시설물 보호 요청'을 한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고, 명동성당의 권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성당측에 집회 사실을 먼저 알리지도 않고 일단 그쪽으로 향한 대책위의 행동에 대해서도 나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우선 대책위에 대해 먼저 말해보자. 프레시안의 기사에 따르면, 대책위는 명동성당에서 집회를 할 생각이면서 명동성당측에 그 사실을 미리 알리지도 않았다.

사회단체로 구성된 '이명박 정권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범국민 대책위원회'는 이날 오전 11시 기자 회견을 가진 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철야 농성을 벌일 예정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와 진압의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 원세훈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 처벌, 그리고 검찰의 재수사 등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동성당에는 경찰이 먼저 도착해 모든 입구를 봉쇄했다.

경찰은 "성당 측에서 시설 보호 요청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성당 관계자는 "(농성을 하면) 성도들에게 피해가 가고, 촛불 집회를 하면 화재 위험이 있다"며 "시설 보호 요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책위 관계자는 "급하게 결정하고 우리가 성당 쪽에 미처 알리지 않았던 농성을 성당에서 먼저 알고 경찰에 연락했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다"며 "경찰이 먼저 성당에 농성 일정을 알려줬을 것"이라고 질타했다.

결국 경찰보다 먼저 도착한 20여 명의 대책위 대표자는 봉쇄한 경찰들 뒤 들머리에, 10여 명은 경찰 앞에 서서 기자 회견을 시작했다.
강 이현. “80년대로 돌아간 명동성당…경찰 '원천 봉쇄'.” 프레시안, February 11, 2009.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11163232§ion=03.

촛불시위가 게릴라 시위로 변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 또한 매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책위 차원에서 움직이는 공식 행사마저 그런 식으로 절차를 무시하고 운영해서는 안 될 일 아닌가?

'민주화의 성지'인 명동성당이 어떻게 시위대를 막을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되물어보고 싶다. 명동성당이 '성지'일 수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말이다. 경찰이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명동성당은 시위자들이 도망칠 수 있는 소도로서의 기능을 해왔다. 요컨대 공권력이 천주교의 권위를 '존중'했기 때문에, 혹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기 때문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당측에 연락하지도 않고 일단 진입부터 하려고 든 대책위의 행동이 과연 '존중'이라고 볼 수 있을까? 행간에 묻어나는 뉘앙스를 보면, 대책위는 '성당측이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적잖이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먼저 연락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들이 성지를 진정 '성지'로서 존중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 성지가 경찰로부터 존중받기를 바란단 말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대책위가 허가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성당이라면, 경찰은 더 쉽게 들어와서 그들을 체포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명동성당의 권위는, 종교의 권위는, 결국 사회 전체의 존경과 존중으로부터 나온다. 교단에서 사병에 가까운 '경비'를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현대 국가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가령 『사하촌』같은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깡패들을 절이나 교회, 성당에서 거느리고 있다면 굳이 시설경비요청을 부를 필요도 없다. 그것은 대학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필립 풀먼의 소설 『황금나침반』에 등장하는 옥스포드 조단 칼리지를 떠올려보자. 조단 칼리지는 그 자체가 (리라가 사는 세계 속에서) 손꼽히는 부자이며, 거대한 재력을 가지고 있다. 그 영토에서는 국왕의 법보다 조단 칼리지 자체의 법이 우선한다. 그러므로 만약 대학은 당당하게 공권력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소설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68혁명 당시 소르본느 대학은 경찰이 진입하려 하자 '소르본느는 소르본느가 다스린다'며 그들을 쫓아내고 학생들을 거두었다. 대학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금이야 프랑스에서도 대학 구내에 경찰들이 들락거리는 것 같지만, 본디 '거대 조직'은 그처럼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공권력과 대립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바티칸의 경우도 그렇다. 바티칸이 독립된 국가라는 것이 뭘 뜻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교회는 원래 국가와 대립하는, 또한 세속적 차원에서 동등한 차원의 힘을 가지는 무장 집단이기도 했다. 명동성당과는 달리 성 베드로 성당은 이탈리아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할 필요가 없다.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있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시절이니까 그들이 관광객과 사진을 찍어주면서 자신들의 소임을 다하고 있지만, 유혈사태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당장 군인이 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 맥락에서 한 가지 가정을 해볼 수 있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존중받는 이유가 단지 '사회의 존경과 존중'만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동성당에 어느 정도 확실한 힘을 가진 무력집단이 있고, 그래서 그들이 군사독재시절에는 경찰들의 난입을 두들겨 패서 쫓아내면서 수배자들을 지켜주었다고 말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는 마구 들락거릴 수 있지만, 경찰만 못 들어오는 민주화 성지'라는 식의 잘못된 관념이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당이 무장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명동성당에서 시설보호요청을 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방금 인용한 프레시안 기사에 따르면, 성당 입구를 막아선 경찰이 신자들의 신분을 확인한 후 입장시켜주었다는데, 이건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로서 참을 수 없을만큼 모욕적인 일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나처럼 공권력보다 천주교회의 권위를 더욱 존중하고, 따라서 성당 땅에 경찰이 들어오는 꼴을 눈 뜨고 참아주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성당이라는 곳 자체가 공권력의 공백지 역할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나는, 사전연락도 없이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식으로 나온 대책위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양자가 모두 진입 요청을 한다면 당연히 경찰은 안 되고 대책위는 환영이다. 하지만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고자 한다면 둘 다 안 된다, 이게 교회의 입장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배타적인 것, 단호한 것, 규율을 내세우고 사람을 선별하는 것, 무차별적이기 이전에 확고한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 이런 것들을 모두 '보수적'이라느니 '수구 꼴통'이라느니 하는 딱지를 붙인다면, 명동성당은 앞으로도 '민주화의 성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명동성당이 성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찰에게) 배타적이었고, (경찰에게) 단호했으며, (국가에게 종교적인) 규율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라는 요구가 그렇게 못마땅한가? 그래서 굳이 '개톨릭'이니, '수구화'니 이런 소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나? 이건 뭐 중학생들도 아니고. 관광지에 있는 이국 종교의 사원에 들어갈때에는 신발을 잘도 벗는 사람들이, 한국 땅에 있는 우리의 성지에 들어갈 때에는 너무도 무례한 것 아닌가?

정리해보자. 교회가 단독으로 무장을 하거나 실력행사를 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명동성당의 권위, 천주교회의 권위는 오직 사회의 존경심으로부터만 나와야 한다.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명동성당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지 않는다면, 집회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올 수 있다. 요컨대 '교회의 권위'라는 공공재의 가치가 떨어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명동성당측과 최소한의 사전 연락도 없이 집회를 열고자 했던 대책위를, 이번만큼은 비판한다. 하지만 굳이 경찰을 불러서 교회의 문을 틀어막은 처사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세상에서, 가톨릭 교회만큼은 그 권위와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시위대가 무단으로 시위를 벌이는 것만큼이나, 경찰이 신자들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는 전자에 다소 화가 났지만, 지금은 후자에 더 화가 난다.

우석훈 필화사건에 대하여

오늘자 경향신문에 관련 기사가 나왔다. 전문을 인용해보자.

우석훈씨 “靑서 비판글 쓰지말라 경고” (경향신문, 2009년 2월 13일)

ㆍ‘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씨 주장 파문 ㆍ“필화 사건… 굴복안해 충돌 불가피 할듯”

<88>의 저자 우석훈 박사(41·연세대 문화인류학 강사·사진)가 정부 고위 관계자로부터 ‘정부 비판을 자제하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12일 밝혔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에 이어 정부가 본격적인 ‘비판 언로(言路) 차단’에 나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 박사는 12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10일 정부 고위 인사로부터 정부 비판 글을 자제해 달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경고를 받기는 했지만 정부 관계자가 직접 전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인사는 ‘청와대 홍보실에서 글을 모니터링하고 있다’고도 했다”면서 “사실상 청와대가 원 소스이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나를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때도 몇 번 경고를 들었지만 ‘오해가 있으니 풀자’는 수준이었다면, 이번에는 ‘이런 식으로 쓰면 곤란하다’는 식으로 경고 수위가 높았다”며 “글 쓰는 것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덧붙였다.

우 박사는 지난 5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칼럼이 직접적으로 문제가 된 것 같다면서 정부측 인사가 “이런 식으로 쓰지 말라”고 했다고 전했다. 우 박사는 ‘녹색성장이라는 사기극’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녹색 본래의 의미는 ‘반핵’인데 이명박 정부는 철저하게 원자력 위에 서 있기로 선택한 것이라서 ‘녹색’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반녹색”이라며 “기괴한 토건자본의 ‘그린 워시’, 즉 녹색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녹색 마케팅이 바로 녹색성장”이라고 비판했다.

우 박사는 “(경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지인들의 피해가 걱정돼 말하기 곤란하다”면서 “내가 글 쓰는 기조가 있고 글은 계속 쓸 것이므로 어찌됐든 앞으로도 충돌은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그는 11일 오전 1시33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필화 사건…’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지난 정권에서도 나는 청와대에 눈엣가시였는데, 본의 아니게 주변 지인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 필화 사건에 대한 거의 마지막 경고를 오늘 받은 듯싶다. 모르겠다…. 감옥 보내려면 보내라…”고 적었다.

우 박사는 2006년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 2007년 <88> 등을 출간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20대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왔다. 현 정부 들어서는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 <직선들의 대한민국> 등의 저작과 기고문을 통해 경제정책을 비판해왔다.

이에 대해 송경재 경희대 교수는 “모니터링이 여론수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감시와 통제의 수단으로 비판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글 쓰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도록 하고 언로를 막는 흐름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정인·조미덥기자 jeongin@kyunghyang.com>


이럴 때에는 다들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당사자 운동'이라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고, 그 '당사자 운동'의 좌파 버전과 우파 버전이 또 나누어질 수 있으며 변듣보가 잘해보면 좋겠다고 말한 우석훈의 실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계급론에 세대론이라는 당의(糖衣)를 입혔다는 공저자의 설명은 참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386과 유신세대는 착취를 멈추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쨌건 이런 일이 터졌는데 우석훈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이 허구적이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을 혼자 아는 것과, 글로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가령 나 같은 경우에도 작년 12월 25일에 관련 내용으로 칼럼을 하나 썼지만 청와대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건을 저지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겠지만, 어쨌건 글쟁이는 다른 사람의 주목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보낸 원고에서 문장 하나가 잘렸는데,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그것을 복원시켜보자.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를 잠재우고, 적극적으로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진정 정부가 주도해야 할 '녹색성장'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추가적으로 건설하고 수출하는 그 '녹색'은, 푸르른 잎사귀의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다. 방사능 폐기물이 뿜어내는, 돌연변이 괴물의 징그러운 녹색이다.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진보신당의 녹색특위는 당원들의 유가환급금을 모아 태양열 발전소를 건설하는 '정치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있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초능력도 없으면서, 둘리처럼 '호이, 호이!'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핵폭탄과 구공탄들" (경향신문, 2008년 12월 25일)


핵발전소 추가 건설이 친환경정책이 아니라는 것은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들 알 법한 내용이다. 고작 그런 내용을 칼럼에 썼다고 해서 정부로부터 외압이 들어오는 것은 명백한 언론탄압이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다. 나는 우석훈에 대한 정부의 외압에 반대한다.

2009-02-12

용역과 용병

그런데 군주가 자신의 국가를 방어하는 데에 사용하는 무력은 그 자신의 군대이거나, 아니면 용병(mercenario, mercenary)이거나 외국의 원군, 또는 이 세 가지가 혼합된 혼성군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병과 원군은 무익하고 위험합니다. 자신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서 용병에 의존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의 영토를 결코 안정되고 안전하게 통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병이란 분열되어 있고, 야심만만하며, 기강이 문란하고, 신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 그들은 신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한 약속도 잘 지키지 않습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전쟁을 하지 않는 한, 그들은 기꺼이 당신에게 봉사하지만,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도망가거나 탈영합니다. 기실 이탈리아가 최근에 겪은 시련은 다른 어던 이유보다도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용병에 의존한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물론 이 용병들의 일부는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다른 용병들과 싸울 때 용맹을 떨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외국군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때, 일거에 그들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샤를 왕은 이탈리아를 백묵 하나로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이러한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한 사람은 진리를 말한 셈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믿은 죄악이 아니라 제가 적시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이는 군주들의 죄악이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처벌을 받았습니다. [84-85쪽] (강조는 인용자)

Niccolo Machiavelli. 『군주론』. 강정인, 김경희 옮김. 제3판 개역본. (서울: 까치글방, 2008).

용역들이 'Policia' 방패를 들고 날뛴 사건이 경찰들에게도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경찰 방패는 '싸제'도 있다던데? 허허, 싸제가 더 좋지 않나?' 이런 소리를 하니까 전경들 몇몇의 눈이 번뜩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경찰들은 극심한 스트레스 하에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과연 그들이 '용역'이라는 사병의 문제에 대해 정식으로 반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

레디앙은 용역의 배후에 삼성물산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물론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공권력이 사적 폭력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사적 폭력은 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라는 거다.

법대에서 숨을 쉬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안다. '법은 불법에 조응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얻어진 증거를 법정에서 채택하지 않는다. 법은 절대 정의를 지향해야 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단체와 연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해서도 안 된다.

그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이 남긴 교훈도 그것이다. 아무리 그 녹음에서 명백한 선거법 위반 사실이 나왔다고 해도,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인 이상 법정은 그것을 받아줘서는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주거침입죄'로 관련자들을 처벌해버린 엽기적인 판례가 나왔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법은 불법에 조응해서는 안 된다. 정의는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 경찰은 조폭과 연합해서는 안 된다.

한편 불법도청을 통해 얻어낸 증거를 통해 재판이 좌우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명백히 면책특권을 지니고 있는 국회의원이 그 자료를 공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명박 시대에 들어와서 세상이 딱히 더 나빠진 게 어디 있냐는 사람(가령 '미스터 불온')은 세상 물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것 같다. 권력조직은 다들 '알아서 기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금 고삐 풀린 규제가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자본주의만이라도 돌아가는 세상과 그마저도 안 되는 세상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17-18세기에 부르주아들이 혁명을 한 이유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폭력을 국가에서 독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가 정치적 과정을 통해 통제할 수 있도록 폭력이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역의 폭력, 용병의 폭력은 그렇게 통제될 수가 없다. 이것은 《Foreign Policy》2009년 1, 2월호에 실린 한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일 군대가 좀 더 약한 화력으로 작전을 수행한다면, 전투 지역에 있는 다른 부문들도 여기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다. 특히 사설 경비업체들이 그렇다. 필자 중 한 사람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사설 경비업체의 호위를 받는 무장 수송대 차량을 타고 잘랄라바드 부근의 어두운 고속도로를 지나다 끔찍한 경험을 했다. 경찰이 설치한 검문소들을 무시하며 질주하던 수송대는, 승객이 가득 찬 채 길가에 정차해 있던 미니 버스를 뒤에서 들이받았다. 중무장을 한 SUV에 받힌 버스는 그 충격으로 길 밖으로 튀어나가 버렸다. 그러나 경비업체 요원들은 차를 세우고 부상자를 구호하라는 우리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적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프간 시민은 이처럼 위압적인 물리력을 쓰는 게 군대인지 사설 용역업체인지 구별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반감이 곧 현실적 위협으로 나타나는 지금과 같은 전쟁판에서, 그 결과는 오로지 우리가 덮어쓰게 된다.

30-31쪽. 너새니얼 C. 픽, 존 A. 네이글, "미 육군 해병대 - 반전 대응용 야전 교범 아프가니스탄 특별판" (Foreign Policy 한국어판, 2009년 1/2월호)


"그들은 동료들과 있을 때는 용감하게 보이지만, 강력한 적과 부딪치게 되면 약해지고 비겁해집니다"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문제는 용산에서 소방호스로 물을 뿌리던 용역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데 있다. 무전기 통신의 내용을 통해 추측해보자면, 만약 용역이 호스를 잡고 있었다면, 경찰측에서 '신나는 물로 못 끈다, 물 그만 뿌리고 소방차 불러라'라고 할 때 용역은 어떤 식으로 대응했겠는가? 지금 내가 한 이야기는 전적으로 '가정'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당신의 파멸은 적의 공격이 지연되고 있는 만큼 지연되고 있는 데 불과합니다. 따라서 당신은 평화시에는 그들에게, 전시에는 당신의 적에게 시달릴 것입니다. 모든 이유는 그들이 당신에게 아무런 애착도 느끼지 않으며, 너무나 하찮은 보수 이외에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에 나가 생명을 걸고 싸울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명박이 유지광과 이정재를 다시 불러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게 된다.

2009-02-10

[인터뷰]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친구들에게 궁금한 게 있다면?

“저는 진짜 쇼프로가 재미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가 20대들과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왜냐하면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방식이 쇼프로를 모방하고 있어요. 대여섯 명이 모이면 누구 하나가 큰 목소리로 사회자가 돼요. 그리고 막 역할을 부여해요. 얘는 찌질하고 쟤는 소심하고 너는 엉큼하고… 이런 식으로 좁은 틀로 몰아넣어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면, 열혈정태라고 붙여버리고 역시 열혈정태야, 열혈정태, 오늘도 분노? 무슨 쇼프로 자막 붙이듯이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정말 재미없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이것은 20대뿐아니라 30~40대도 마찬가지죠. 대중문화에 쇼프로를 빼면 다른 오락이 없기에 TV에만 의존하게 되는 거고 그러다보면 세상 보는 게 좁아지는 거죠. 문제는 재미로 보고 있다는 건데, 그게 정말 재미있냐는 거죠.

사람들이 쇼프로를 모방하면서 사람관계를 맺고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맥락에서 벗어나는 걸 용납하지 않고요. 요즘 유행하는 오락프로그램들이 사람들이 노는 형식을 본 따서 극화시킨 거잖아요. '패밀리가 떴다'에 대본이 있다 없다를 놓고 난리가 났었는데, 그게 TV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놀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픽션이라고 드러나니까 그걸 못 참는 거잖아요. 픽션이나 논픽션이냐를 떠나서 자기들도 그런 역할놀이를 하는 걸 알지 못해요.

"무신경함때문에 시민들은 화난다"(꺄르르, 노정태 인터뷰. 2009년 2월 10일 게시)


오마이뉴스 블로거기자 꺄르르님과의 인터뷰가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인터뷰는 지난주 수요일(2월 4일) 오후 2시 상수역 인근 비하인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장황한 이야기를 매끄럽게 정리해준 인터뷰어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