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자그니님)
내가 지난번 포스트에 쓴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놓고 불필요한 리플 논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그 말의 맥락을 좀 더 설명하면서, 지금까지는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지 않았는데, 자그니님의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 2009년 2월 13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시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사회를 전제한다면, 과연 그 사회는 약자에게 도움이 될까 아니면 강자에게 도움이 될까?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가톨릭 교회가 진보진영의 방패가 되어줄 수 있었던 것은, 군부가 가톨릭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전 세계에 지부가 뻗쳐 있는 가톨릭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때문일 수도 있고, 종교 탄압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다는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 수도 있고, 교회를 건드릴 경우 발생하게 될 저항의 크기에 대한 공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요소는 모두 한 가지 본질적인 사항을 전제로 한다. 한국과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품고 있는 강렬한 신앙심이다.
경찰이 신부를 때리건 말건, 경찰이 성당을 수색하건 말건, 나는 그냥 성당에 와서 성체 받아먹고 갔으니 이번 한 주도 무사히 예수님 땡큐, 신자들의 분위기가 이런 식이었다면 경찰은 명동성당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를 때리건 말건, 안방 장농을 뒤지건 말건,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오늘도 무사히, 대통령 각하 땡큐, 이런 사람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1000만의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명동성당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고, 그것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디 경찰 따위가 감히 천주교회의 일원에게 신원 확인을 하고 있단 말인가?"라는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글을 읽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주교회의 일원'인 나의 우월함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 가야 하는 목적의 우월함이다.
촛불시위가 한창 벌어지고 청와대로 향하는 길을 경찰이 원천봉쇄했을 때, 효자동 등 궁궐 근처에 사는 주민들은 주민등록증을 보여달라는 경찰의 요구에 바로 내 반응과 같이 대응했다. 그들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 길을 막아서면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경찰들에게 분노했다. 천주교 신자인 내가 주님이 계신 집에 들어가고자 할 때 경찰이 막아서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그보다 더 크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신앙심보다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가 앞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신앙심은 그 무엇보다 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과는 사회 정의를 함께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보다 더 정의로운 가톨릭'을 요구하고자 한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심에 대해 직접적인 모욕을 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일부의 사람들은 바로 그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을 불러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사건에 대해 되짚어보자. 그 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이럴 수가!'라고 경악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천주교를 자기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천주교회를 '진보적인 사회단체'중 일부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양자들 중 실질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을 지닌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다. '어떻게 당신들이 이럴 수 있습니까!'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 천주교가 이럴 수 있습니까!'가 훨씬 더 강력한 목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글루스에서 일부 '진보적'인 블로거들이 취하는 태도는, 어떤 면에서 다소 야비할 뿐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어리석기 짝이 없다.
자그니님이 쓴 "내쫓는 것이 가톨릭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를 살펴보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 중 지금은 다소 멀어진 이라는 것을 굳이 강조하면서, 끝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를 지닌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홍길똥'이라고 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짓이 다. '냉담자인 나는 신자가 아니라는데, 당신들 지금 나 내치는 거?'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도 우습기는 매한가지다. 세례를 받으면 파문을 당하지 않는 한 천주교회의 일원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리고 자그니님은 파문까지 당해야 할 만큼 대단한 인물이 전혀 아니다.
보수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서의 종교 생활과 진보적인 스스로의 지향성을 조율하고자 노력하는 다수의 신자들이 볼 때, 이런 태도는 '진보적'인 것에 대한 광범위한 불신만을 불러올 뿐이다. 그의 글 제목에 담긴 질문에 대해, 자격은 없지만 내가 대답해보겠다. 내쫓는 것은 가톨릭이 아니다. 하지만 반박하는 것은 가톨릭이다.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통해 이단과, 종교 자체를 비아냥거리는 이들 모두에게 반박해 왔다. 바로 그 신앙심과 충성심이 명동성당을 성지로 만들어온 진짜 원동력이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특별한 패션인 양 목에 두르는 손수건처럼 천주교인의 소속을 들먹거릴 때, 그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바로 당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단 말이다.
천주교회는 소외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그렇게 되도록 많은 신자들이 꾸준히 목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회적 선행이 단 하나의 중요한 원동력, 즉 신앙심에서 나왔다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다. 만약 그것을 부정한다면 강남성모병원에서 벌어진 일을 비난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게 된다. 가톨릭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강남성모병원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 '완전'해진다.
같은 맥락에서 '성당도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라는 식으로 명동성당의 시설물 보호 조치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나는 반대한다. 성당에서 조용히 해야 하고, 성물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하고, 미사 시간에 조용히 해야 하는 등의 기본적인 '예의'가 만약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라면, 우리는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납득해야만 한다.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고자 환자들이 비싼 돈을 내고 입원했는데, 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는 것은 그 '인간들'에 대한 예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때로, 강자들에게만 유리한 무기로 사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남성모병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윗사람'들이 보기에 더럽고 시끄럽고 무례하게 시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과연 '신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일까? 도리어 그 반대로, 정당한 노동에 대한 요구를 펼치는 이들을 때리고 쫓아내고 핍박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종교에 대한 진지한 자세, 신앙심에 대한 철저한 존중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향의 논의를 아예 시작할 수도 없다.
미사 시간에 확성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신부님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리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간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실로 신성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신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만약 명동성당과 관련한 문제를 오직 인간에 대한 예의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보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종교적이지도 않다. 신자들이 하느님과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경찰은 성당에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같은 이유로 시위대는 성당측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들은 그 신앙심 자체를 함부로 비아냥거리거나 모욕하지 말아야 한다. 체스터튼의 글을 인용하면서 내 부족한 논의를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18세기의 사회적 계약이론은 우리 시대의 여러 섣부른 비평에 나타나 있다. 모든 역사적 통치기구의 이면에는 찬성과 협동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주장은 명백히 옳았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익을 의식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질서나 윤리를 얻고자 했다는 주장은 사실상 틀렸다. 도덕성은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네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나도 너를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다. 도덕성에는 그러한 거래의 흔적이 아니라, 두 사람이 "우리는 성스러운 곳에서 서로를 때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한 흔적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그들의 도덕성을 얻었다. [127쪽]
G. K. 체스터튼, 『오소독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경기도 파주: 이끌리오, 2003)
73p. Orthodoxy (San Francisco, U.S.: Ignatius Press,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