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04

윤계상, 박재범, 공론장으로서의 인터넷

윤계상의 '좌파' 발언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수그러들었다. 변영주 감독 등 진짜 '좌파'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아주었기 때문이 기도 하고, 본인이 모종의 울분의 표현으로 그 단어를 꺼내들었을 뿐 애초에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계상의 그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이 발견된다.

첫째, '영화판은 원래 좌파다. 그래서 나는 소외당하고 있다'는 말을 본 사람들이 '좌파는 그런 게 아니다'라고만 말할 뿐, 그 언어의 화용이 대단히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는다. 예로부터 우리는 '말 많으면 빨갱이'로 간주하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좌파는 곧 먹물이요, 유식하다는 먹물놈들은 무식한 우리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피해의식이 지금도 인터넷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지 않은가. 본인이 아는 좌파의 개념은 잠시 접어두고 윤계상의 발언을 살펴보자. 그건 전혀 특별할 게 없는 표현이다. 나보다 많이 배운 먹물은 다 좌파고, 좌파는 재수없는 엘리트고, 그래서 다 싫다는 그런 수준의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둘째, 변영주 감독이 인터넷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지 이 사건은 또 '윤계상 발언'으로만 다루어지고 있었다. GQ는 원래부터 인터뷰를 잘 하기로 유명한 매체였고, GQ 인터뷰가 다른 매체에 의해 재보도된 것도 이번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인터넷 언론들이 끼어들었고, 역시나 '네티즌 술렁거려' 같은 표현을 들먹이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GQ를 보고 흥분한 사람은 별로 없다. 포털 사이트 대문에 떠 있는 '네티즌들이 흥분했다'는 기사를 보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제를 발견하여 군중에 가담한다.

이 두 가지 요소를 종합해보면 윤계상의 발언을 둘러싼 촌극은 결국 박재범 사건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박재범이 한 말도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한국인은 입만 열면 '빌어먹을 이 나라, 빨랑 돈 벌고 튀어야지'라고 궁시렁거린다. 모든 남자 고등학생들은 불특정 다수의 누군가를 '따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박재범은 그것을 친구와 이야기했을 뿐이다. 윤계상의 경우도 그렇다. 내가 겪어본 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누군가가 자신보다 유식한 존재라는 사실을 참지 못한다. 특히 어설프게 배웠거나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무식이 죄냐?'라고 물을 때 이미 그는 무식한 자신에 대한 죄의식의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뻔한 소리를 한 청년들이 왜 갑자기 공공의 적이 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인터넷 언론, 혹은 그냥 언론의 문제가 등장한다. 대중들은 이른바 공인, 그 중에서도 제일 만만한 연예인들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 연예인과 자신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기를, 그래서 그도 나도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같은 새끼일 리는 없다는 것을 믿고 싶어하기도 한다. 내가 쇼프로를 보면서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사람 냄새'를 풍겨야 하지만, 대중들은 동시에 그 연예인이 정말 나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면 가루가 되도록 깔 준비를 하고 있다.

따라서 연예인은 대중과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고, 다르면서도 같아야 한다. 그 미묘한 줄타기가 무너질 때 대중들의 공격적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은 섹시 컨셉의 아이비가 섹스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로 인해 무너진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대중들의 성향은 그렇고 연예인들은 그 속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점을 찾아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한 스타가 구설수에 휩싸이는 것은 그 자체가 보는 이에게 재미 혹은 묘한 쾌감을 안겨주고, 어쨌건 신문 판매 부수 내지는 클릭수 증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존 매체 혹은 새로 판에 뛰어든 인터넷 매체들은 바로 그런 '껀수'를 찾아내고자 안달이 나게 마련이다. 여기서부터 진짜 문제가 발생한다. 인터넷 매체들은 더 이상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다. 대신 네티즌들의 몇몇 반응을 기사화하여 보도를 사건한다. '보도를 사건한다'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풀어서 설명하자면, 별 것 아닌 일을 터뜨려서 사건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박재범은 고삐리였고, 윤계상은 평범한 한국 남자 수준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이란 말인가? (윤계상은 박재범보다 좀 더 문제적이긴 한 것 같지만, 그거야 아직 경험이 부족한데 혈기만 넘치는 나이여서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보도가 그렇게 나가기 시작한 이상, 별 거 아닌 일이었던 것이 바로 대형 사건이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기자들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을까?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이렇다. 인터넷이 사생활을 저장하는 공간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연예인에 대한 온갖 '소스'가 인터넷으로 모이게 되었고, 현장 취재 다니느라 바쁜 기자들보다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이들이 그런 요소들을 더 잘 찾아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식이다. 네티즌들이 찾아낸 연예인의 사생활을 기자가 새삼스럽게 '폭로'해서 기사 하나를 날로 먹는다. 그러면서 '네티즌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 순간 몇몇 사람들이 보고 시시덕거리던 것이 포털 사이트 뉴스를 타고 모든 이에게 중요한 사안처럼 돌변해버린다.

윤계상 사건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잡지 에디터가 인터뷰를 한 경우지만, 그 외의 기본적인 형식은 동일하다. 어딘가에서 발견해낸 평범한 사실을 '네티즌 술렁' 같은 표현을 덧붙여 인터넷 매체에서 재가공하면, 비로소 그게 진짜 사건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핵심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박재범 사건의 경우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삼지선다형으로 풀어보자. 단, 복수정답은 허용하지 않는다.

① 엄한 거 까발려서 젊은이 인생 망친 디씨 코갤. ② 그걸 뉴스랍시고 보도해서 일을 부풀린 언론, 특히 동아일보. ③ 이유야 어찌 되었건 광기의 춤사위에 끼어들어서 함께 모닥불에 땔감을 넣고 북치고 장구치며 빙빙 돌고 춤을 춘 '네티즌' 전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나는 ②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디씨의 잉여들이나 이른바 '네티즌'들은 원래 그런 성격을 지니고 있고 반드시 그러한 속성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할 어떤 당위적 의무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대중들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궁금해하거나 그에 대해 나름의 탐색을 하는 것 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며, 연예인이라는 집단 자체가 사실상 그러한 욕망 위에 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에 대한 미국인들의 광기어린 집착과 멸시, 동시에 쏟아지는 동경 따위를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대중들은 원래 그렇다.

하지만 언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특히 한국의 주류언론은 원래 저질이었고 지금도 저질이며, 거기에 인터넷 매체들까지 끼어드니 완전히 개판이 되어버렸지만, 언론은 대중과 달리 공공의 선을 지향해야 한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가 왔다고 한들 '공론장'의 주도권은 어디까지나 공식화된 언론 매체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시민사회는 공론장에 대한 장악력을 꾸준히 잃어갔고, 대신 신문이나 방송 같은 '체계'들이 의회 민주주의의 일부로서 작동하는 공론장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18세기에는 부르주아들이 살롱이나 커피숍에 모여서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소식지를 만들어서 돌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공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그런 영역은 생활세계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지금은 사적인 공간에서의 토론이 공적인 의사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대신 '체계'는 '생활세계'를 식민화한다. 언론들이 '네티즌 반응'을 채집하여 보도를 사건하는 현상을 나는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디씨인들이 개인의 사생활을 캐내 시덥잖게 시시덕거리다가 흥미를 잃으면 내팽개치는 현상은 개가 땅에 묻힌 뼈다귀를 캐낸 후 씹다가 내뱉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잡지 에디터가 심도 깊은 질문을 해서 의외의 답변을 얻어내는 것 역시, 바로 그러라고 잡지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도 일상적인 일이다. 문제는 그것을 '사건'이라고 굳이 보도함으로써 공론의 영역으로 이끌어내는 언론들이 있다는 것이다.

GQ 인터뷰 전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윤계상의 발언 중 골때리던 것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다. 인터뷰의 분위기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 매체들은 오직 그 '좌파 발언'에만 집중해서 '네티즌 술렁' 기사를 만들어냈다. 요컨대 '네티즌 술렁'은 인터넷이라는 '생활세계'로부터 '체계'가 지속적으로 약탈해가는 상아나 금, 노예같은 것이다.

물론 대중들은 잔인하다. 너무도 잔인한 나머지 그 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다. 사생활을 파해치고 잔인하게 조롱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그런데 루머를 퍼뜨리는 것은 인류가 구석기시대부터,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그 행위 자체를 근절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절도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이다. 소유권이 있는 한 도둑질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생활이 있는 한 폭로가 있고, 진실이 있는 한 루머가 있다.

그러나 근대국가는 말 그대로 근대에 생겨난 것이고, 그것이 유지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공론장 또한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그 각각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주체 및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형성되며 또한 그로 인해 단단해질 수 있다. 따라서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생활을 까발리는 저열한 네티즌'이라는 식의 수사를 남발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를 은폐하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인간 본성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건, 바로 그런 대중들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대중사회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것을 개입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터넷질을 하다가 남의 사생활을 깠다고 해서 그게 공론장을 더럽히는 행동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행위는 개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공론장과는 무관하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토론의 경우, 엄밀한 의미에서의 공론장에는 참여하지 못한 채 이루어진다.

나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오공감의 떡밥을 물어서 끼어든다면, 이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아니다. 이글루스 사용자들, 혹은 '네티즌'이라 할 수 있는 일부만을 염두에 두고 그 글을 쓴다면 분명히 그렇다. 반면 보편적인 사회 대중들을 염두에 두고 매체에 기고를 한다면 그것은 공론장에의 참여가 될 수 있다. 구경꾼의 숫자가 아니라, 발화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경꾼의 속성이 핵심이다.

숫자만 많다고 해서 그 청중들이 공론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숫자가 적어도 공적인 사안을 합당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으면 공론장이 된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인사청문회를 실시간으로 보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선덕여왕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지만 전자는 공론장에서의 토론이고 후자는 그냥 문화적인 컨텐츠일 뿐이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비슷한 차원에서 나누어볼 수 있다. '신상 까기'는 야만적이기는 해도 공론장의 기능 내지는 속성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공론장에 사적인 요소를 뒤섞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사태는 정 반대로, 공론장을 구성하는 체계가 대중들의 '사적 폭로'를 공적인 사안으로 무리하게 격상시키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익명의 네티즌들은 누군가의 실명과 인적사항 따위를 폭로하면 '복수'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 현상을 비판하기에 앞서서 질문을 해보자. 왜 그게 복수가 될까? 가면이 벗겨지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가상무도회에서 쫓겨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피와 살을 가진 개인으로 격하되는 것, 인터넷 마을에서 쫓겨나는 것 등을 동시에 의미하기 때문이다. '털린 자'들은 버로우를 타고 네티즌들은 그것으로 응징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박재범의 사례에서도 딱 들어맞지는 않지만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마이스페이스를 뒤져서 지난 이야기를 찾아내고 폭로하는 것은 디씨에서 누군가의 신상을 털때 하는 짓과 다를 바 없다. 이름이나 전화번호, 학교 등을 통해 일단 싸이 주소부터 알아내고 거기서 사진첩을 샅샅이 뒤지는 게 신상 털기의 일반적인 행태라고 본다면 분명히 그렇다. 문제는 개인들의 이러한 사적인 난장판에, 공공의 것으로 기능해야 할 언론이 클릭수 장사를 하기 위해 빨대를 꽂아넣고 있다는 것이다(그로 인해 이제 인터넷의 개인들은 언론이 바로 그렇게 보도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연예인의 사생활을 추적하기도 한다. 박재범 사건에서도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있었던 것 같다).

전자와 후자 모두 비판의 대상이지만 전자를 비판할 경우 '내 탓이오, 우리 모두의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런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라는 보장 또한 사실 없다. 하지만 후자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네이버 메인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이유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국내 매체들의 기사 수준은 정말 한심스러울 지경이다. 한국의 공론장이 엉망인 이유로 네티즌들을 꼽는 것은 손쉬운 답변이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언론이 원래 저질이었고,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저질이 되고 있을 뿐이다.

언론 산업의 구조를 도외시한 채 네티즌만을 비난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본말전도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그런 '윤리적' 잣대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교묘하게 은폐함으로써 공론장을 현재의 수준으로 고착시키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제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의는 지금 할 만한 것이 아니므로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자.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제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계속 읽기)



10월 31일 미디어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급하게 써서 논의 전개가 엄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이유로 사법부가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할 순간에 손을 떼고, 그로 인해 더 큰 맥락에서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적어도 정치적 개입을 피할 수는 없는데, 그 순간마다 판단의 기준이 모호하다면 그게 제일 곤란한 일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만을 강조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입니다. 읽어주신 분들의 소감과 지적을 감사히 받겠습니다.

2009-10-31

헌법재판소와 헌법의 수호자 - 헌재가 국민의 일반 의지를 대변하는가?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

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뭐냐, 의회가 법을 만드는 것, 헌법재판소가 위헌법률을 심판하는 것, 행정부가 행정 작용을 통해 국민의 권익을 실현하는 것 등이 모두 헌법 수호활동이다, 라는 식의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논쟁은 명확한 결론 없이 끝나버렸다. 칼 슈미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야말로 헌법의 수호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루소의 정치 이론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었고, 국민의 ‘일반 의지’를 가장 잘 대표할 수 있는 자만이 헌법의 수호자로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기껏해야 각 지역에서 당선된, 혹은 정당대표로 올라온 국회의원 개개인은 헌법의 수호자가 될 수 없다. 의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나 의회의 견해는 분열되어있고, 당파적인 갈등으로 얼룩져 있지 않은가. 헌법적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과연 인민 전체의 ‘일반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까? 의회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칼 슈미트는 고개를 저었고, 그것은 독일 국민들의 일반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결국 독일인들은 그들의 ‘일반 의지’의 대변자로, ‘헌법의 수호자’로, 히틀러 총통을 옹립한다.

   
  ▲ 2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전국언론노동조합, 미디어행동, 야당 등은 헌재 판결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곽상아  
 

‘헌법의 수호자 논쟁’의 전후 과정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손쉽게 생각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문제가 도출된다. 대체 그 ‘국민의 뜻’이라는 게 무엇인가? 우리는 그 ‘일반 의지’를 과연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비록 확인할 수는 없지만 ‘국민의 뜻’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고, 그것을 투표라는 과정을 통해 누군가 혹은 어떤 기관이 대표하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얼핏 생각하면 그것은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적절한 민주주의 이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와 완전히 다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개별적인 국회의원은 대통령의 뜻에 반기를 들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의 승인을 받은 헌법 기관이지만, 국회의원은 기껏해야 지역구 주민 수십만의 주권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이정희 의원보다 곱절로, 아니 따따블로 ‘대표성’을 지니는 인물이 되어버리고, 따라서 그의 말은 더 많은 국민의 의지를 담아낼 것이며, 정당하다. 이런 결론에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국회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의회는 단일한 의사를 표현하는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즉 본래적으로 함유하고 있는 분열성으로 인해, 한 사람이므로 단일한 대통령보다 ‘국민의 뜻’을 덜 반영하게 된다. ‘대표성의 원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왕을 뽑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당연히 민주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지만 선거가 민주주의에 필요한 모든 정당성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내 맘대로 산다, 그것이 나다’라는 식의 단순한 주장만을 반복하며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없듯, 민주주의 또한 ‘국민의 뜻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이 통치한다’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일반 의지’에 따라 선출된 헌법의 수호자였다.

흔히들 사람들은 사법부를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칭하곤 한다. 대통령도 선거로 뽑고 국회의원도 선거로 뽑지만, 판사는 임명되고 승진하는 별개의 직급 구조를 가진 집단이다. 반면 의회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집단으로 간주되어왔다. 헌법재판소가 의회의 결정을 함부로 뒤엎는 것은 당장은 속 시원한 일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옳지 않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미디어법에 대해 절차는 위법하지만 무효로 선언할 수 없다고 판시한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런 입장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고전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의회가 국민의 의사를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기관이라는 것은 영국의 의회주의가 갓 시작할 무렵, 그리고 아메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무렵을 지배했던 헌법관이었다. 당시에는 행정권을 ‘왕’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왕이 뽑은 상원은 귀족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므로, 결국 국민의 의사를 대변할만한 집단은 하원 뿐이었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현대 사회의 국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의 말을 인용해보자.

시민들은 자신들이 정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중은 더 이상 헌법 이론에 나와 있는 것처럼 정부 내의 특별한 대행 기관인 하원만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이제 정부 전반에 대한 그들의 권리를 염두에 두지, 그 한 부분에 대한 권리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강조는 인용자. 189쪽, 『절반의 인민주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하던 국민들은 그가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당할 때 ‘아, 우리 국민들을 대변하는 헌법기관인 국회가 권력자인 대통령을 끌어내었구나, 나의 일반 의지가 실현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은 그와 정 반대였다. ‘내가 뽑은 대통령한테 네깐 놈들이 뭐하는 짓이냐’는 분노의 파도가 전국을 휩쓸었다. 그러한 헌법적 인식이 타당하냐 그르냐를 떠나서, 국회나 대통령이 그들이 지닌 대표성만으로 모든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미디어법과 관련한 사항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헌재가 인정한 바와 같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은 대리투표를 했고 일사부재의 원칙을 어겼으며 입법 절차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특히 대리투표의 경우, 적어도 필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87년 민주화 이후 이렇게 명백한 대리투표 현장이 발각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므로 그들이 만든 법은 정당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가?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국회 격투기를 더 봐야만 하게 생겼다. 문을 뜯어 부수고 야당 의원들을 패대기치는 것도 ‘국민의 뜻’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이 하는 일이니만큼, 절차적으로 타당하지 않더라도 무효화할 수 없는 입법 행위의 일부가 된다고 추인해버렸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는 누구인가? 어떤 헌법기관이 최종적인 헌법의 수호자로 작동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그래도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인 헌법 수호 기관으로 활동해야 하며 그러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나는 칼 슈미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헌법 수호 기관으로서의 헌재에 대한 신뢰가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낀다.

2009-10-27

[미디어스]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

개인적으로 온라인에서 온갖 논쟁을 보거나 참여해온지 벌써 10여년이 다 되어간다. PC 통신 시절까지 합치면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최근 『괴짜경제학』으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과 뉴욕타임즈 출신의 저널리스트 스티븐 더브너(Stephan J. Dubner)의 신간 SuperFreakonomics가 출간되면서, 바야흐로 지상 최대의 키보드 배틀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0년의 경험을 걸고 말하는데, 이보다 큰 규모의 키보드 대전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물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분야의 학자들, 그 분야의 ‘빅 네임’들은 서로의 명예와 학자로서의 자부심을 걸고 진리를 밝히기 위해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저널에 논문을 게재하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키보드 배틀’은 그렇게 정식화된 학계의 논쟁과는 무관하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많이 보듯이, 몇몇의 블로거나 인터넷 사용자들이 공적이지 않은 경로를 이용해 서로 은근히 심기를 긁어가며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한정해볼 수 있겠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키보드 배틀’ 중 가히 최대 규모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무언가가 최근 한창 진행되었다. 무대는 미국. 참여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학문적 업적과 수준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크루그먼과 정치적 입장을 자주 함께하는 U.C. 버클리의 경제학자 브래드포드 드롱(J. Bradford DeLong), ClimateProgess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환경학자 조셉 롬(Joseph J. Romm), 기후 변화에 대하여 온라인 대중들에게 더 나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블로그 RealClimate 등이 한쪽에서 전선을 짜고 SuperFreakonomics를 공격해 들어왔다.

공저자 중 한 사람인 스티브 더브너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항변하였고, 스티븐 레빗 또한 (그의 동의 하에) 공개된 이메일을 통해 ‘오해’를 해명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노벨상 수상 확률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대학의 그레고리 멘큐는 간략한 코멘트와 링크 게시를 통해 이 사건에 슬그머니 개입하려다가 특별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이 논쟁과 관련된 문서들의 대략이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 있으나(http://en.wikipedia.org/wiki/Superfreakonomics), 결코 완전한 목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직 논의가 끝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일까?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블로그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마치 평범한 블로거들처럼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문제는 SuperFreakonomics의 5장에 등장한 지구 온난화에 대한 내용이, 적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부당할 정도로 온난화 문제의 심각성을 회피하고 그것을 사소한 오류처럼 만들고 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어느 종교에나 이단은 있는 법. 지구 온난화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저자들이 말할 때 이미 그 갈등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레빗과 데브너는 말한다. “이산화탄소로 인한 온난화 재앙을 믿는 것,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것만으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모두 비논리적이다.”

요컨대 온난화 회의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레빗과 데브너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이 그러하였듯이, SuperFreakonomics도 ‘기존의 통념’이라고 불릴만한 것들에 대해 경제학적 시선을 통해 황당하고 기발하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는 반론을 제시하는 책이다. 적어도 저자들의 의도는 그러했다. 그래서 그들은 지구 온난화를 경고하고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그 ‘통념’이라는 것이 지구와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린 주제이며, 수많은 학자들의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학계에서 널리 인정되고 통용되는 상식이라는 데 있다. 지구의 평균 기온이 4도 상승하면 현재 존재하는 생물 종의 절반 이상이 멸종한다. 환경의 파괴, 종 다양성의 파괴는 많은 경우 해당 문명의 몰락을 초래하는 요소가 되었다. 게다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기후 온난화 문제는 전 세계적인 것으로, 그 어떤 나라도 독자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레빗과 더브너는 ‘지오 엔지니어링’(geo-engineering)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이산화탄소 배출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기온이 상승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므로, 평균 기온을 낮출 수 있는 더 저렴한 방법을 찾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들은 환경학자 켄 칼데이라(Ken Caldeira)의 말을 인용하여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정작 인용된 당사자 켄 칼데이라는, 환경 블로그 ClimateProgress의 운영자 조 롬과의 이메일 대화를 통해, SuperFreakonomics의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잘못 인용했으며 자신의 학문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화가 난 건지 웃자고 그러는 건지, 10월 21일 현재 켄 칼데이라의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이산화탄소는 진짜 악당이다.” 켄 칼데이라가 말했다. “사람이 아닌 사물을 ‘악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2008 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에 빛나는 뉴욕 타임즈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 이런 재미있는 싸움에 빠질 리가 없다. 레빗과 데브너는 경제학자 마틴 와이츠먼(Martin Weitzman)의 논문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논문의 논지와 정 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며, SuperFreakonomics의 5장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강한 비판을 가했다.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크루그먼 본인이 해당 논문을 읽어봤을 뿐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 와이츠먼과 함께 작업한 바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키보드 배틀’이 흥미로운 것은 단지 참여자들이 최고 수준의 연구자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이 논쟁이 타블로이드 신문의 지면을 장식할만한 이슈는 결코 아니고, 그만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대신 이 논쟁은 우리에게 ‘인터넷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준다. 인터넷 문서의 기본 포멧인 HTML은 학문적 텍스트의 형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마우스로 링크를 클릭하는 것은 논문을 읽고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바로 그 행동을 전자화한 것이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생활 가전제품의 일부가 되어버렸지만, 본질적으로 그것은 학문 연구의 도구였고 인터넷 또한 그러했다. 가장 난폭하고 거친 언어가 오가는 그곳은 사실 가장 정제된 지적 담론을 위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또한 진중권의 표현대로 ‘문자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채 구술문화가 인터넷을 지배’하게 되면서, 우리는 마치 인터넷이 반지성주의의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물론 인터넷을 통해 개인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기존의 출판 매체를 통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별도의 편집자가 없기 때문에 저자의 감정적 판단과 기준이 여지 없이 노출되며, 한 번 공개된 텍스트는 국경을 넘어 순식간에 모든 곳에서 접속 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뿐, 그 속에서 어떤 내용의 담론이 오가느냐는 전적으로 이용자들의 손에 달려 있다.

SuperFreakonomics를 둘러싼 이 논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레빗과 더브너의 인용이 잘못되었는지 여부를 논외로 한다면, 이 논쟁은 ‘지오 엔지니어링’이라는 개념에 대한 재평가를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량 감소를 위한 전 지구적인 노력이 과연 비효율적인 행동인가, 그래서 경제학자의 눈으로 볼 때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가 또한 하나의 주제로 떠오를 수 있다. 데브너가 현재(10월 21일 오후 9시 50분) 기준으로 가장 최근 올린 글에서 ‘나의 목표는 더 많은 논의를 불러오는 것이었다’고 말한 것을 액면 그대로 존중한다면, 그와 레빗은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학자로서, 또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뢰가 크게 떨어지긴 했지만 말이다.

유명한 지식인, 학계의 이름 높은 학자가 인터넷을 하고 있다는 그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를 알아보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터넷에서 홀대당하고 저평가당하는 듯 보이는 이유를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더듬어볼 수 있다. 인터넷과 함께 성장한 세대는 그 공간을 지적으로 활용하기보다는 사생활의 영역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당연하기만 하던 세대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맥을 짚어내어 온라인 공간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프라인에서 사고하고 온라인에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우리 현실에서 요원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한국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없을 뿐 아니라, 그 노벨상 수상자가 동료들과 온난화 회의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을만한 환경 또한 조성되어 있지 않다. 어지러운 관계망 속에 얽혀들어 있는 지식인들은 서로에 대해 공정한, 냉정한 평가를 하지 않고 패거리 놀음에 열중한다. 현재 인터넷이 지적 담론의 토양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인터넷 자체의 속성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한국의 지식인들은 인터넷을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가? 물론, 그 이유는 폴 크루그먼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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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264
벌써 5일 전에 올라간 기사이므로 전문을 블로그에 게시합니다. 그래도 가급적 위 링크를 찍어서 조회수를 높여주시면 좋을 것 같군요.

이 기사를 올리면서 몇 가지 예언을 하겠습니다.

1. 이미 당연히 번역이 되어가고 있거나 원고는 다 끝났을 것이므로, 어쨌건 한국어판이 나온다. 저자들이 수정판을 내지 않는 한 곧 나온다.

2. 한국어판이 나오면 이런 논쟁이 있기라도 했냐는 듯 국내 일간지들은 서평란에서 온난화 회의주의 내지는 지오 엔지니어링에 대한 내용을 대서특필하거나 슬쩍 다루거나 한다.

3. 대중들은 '와우, 정말?!' 이러면서 다 낚인다.


여러분 그러나 속지 마세요. 이미 SuperFreakonomics는 나노 단위가 되도록 까였답니다. 본문에 언급된 환경 블로거 조 롬이 오늘 또 하나 올렸어요. 저자들이 인용한 기상학자 Caldeira가 자기 입으로 책에서 인용된 내용을 생생하게 부인하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인터넷 칼럼을 통해 '이렇게 단순한 지오 엔지니어링이 대안인 양 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언급할 지경입니다.

http://climateprogress.org/2009/10/26/caldeira-interview-superfreakonomics-geoengineering/

http://www.economist.com/world/international/PrinterFriendly.cfm?story_id=14738383&fsrc=rss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발전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찾아왔으면 합니다. 이 논쟁이 궁금하신 분은 밑에서 두 번째 주소를 클릭해서 관련 링크를 훑어주시고, 전체적인 그림을 알고 싶으시다면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먼저 봐주세요.

2009-10-21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독일 관념론은 프랑스 혁명의 이론이라 불리어 왔다." 마르쿠제는 자신의 책 『이성과 혁명』의 서론에서 서슴없이 단언한다. 선진국 프랑스의 발전된 정치경제적 상황을 동경하던 독일의 지식인들이 그 혁명을 정신 속에서 구현해낸 것이 바로 독일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성은 칸트의 1784년 텍스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 이미 하나의 싹으로 심어져 있다.

칸트는 자신과 독자들이 "계몽된 시대"(aufgeklärten Zeitalter)에 살고 있지 않지만, "계몽의 시대"(Zeitalter der Aufklärung)에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 "일반적 계몽을, 다시 말해 마땅히 스스로 그 책임을 져야 할 미성년에서의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가 차츰 감소해가는 명백한 징후"를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발견은 사실의 보고라기보다는 희망사항의 표현에 더욱 가깝다. 그것은 칸트가 "이 시대는 바로 계몽의 시대이며, 환언하면 프리드리히 왕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명확해진다.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칸트는 끝없이 외줄타기를 벌인다. 그는 결코 프리드리히 왕, 계몽군주의 통치가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출판물에 대한 검열과 삭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고, 칸트 본인도 결국 그 칼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래서, 그는 프리드리히 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거나 비난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당시의 낙관주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양자가 하나의 텍스트 안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이룬다.

칸트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왕은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스스로 계몽된 군주"이며, 동시에 "공공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잘 훈련된 수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는 군주"이다. 이러한 칭송은 두 세기 전의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친 찬사를 보는 것만 같은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킨다.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의 힘을 칭송한다. 따라서 프리드리히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나마 말해줄 것을 칸트가 희망한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관해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이른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부권적 명령을 전제로 해야 이해 가능하다.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주체는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왕이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을 가로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무엇인가? 왕은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왕은 검열하고, 삭제하고, 저자를 고문하고 심판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프리드리히 왕이 '허용한다'고 말함으로써, 그가 전적으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 사람의 학자로서 독자 대중 앞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공적 사용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어떤 시민적 지위나 공직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경우"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라고 칸트는 말한다. 여기서 칸트가 이성의 사적 사용이 "종종 매우 좁게 제한될 수도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아메리카의 용맹한 시민들보다 한참 소심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영국에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고, 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했다. 반면 칸트는 어떠한 세금이 부당하다는 것에 대해 '학자로서 비판'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민은 그에게 부과된 조세의 납부를 거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이성의 사적 사용의 제한] 때문에 계몽의 진행이 특별히 방해받지는 않기 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소극적인 설명일 뿐 적극적인 설명이 되지 못한다. 시민적인 차원에서, 시민의 목소리로 권력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것을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때, 칸트의 귓가에는 여전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복종하라!"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이라는 구분을, 어떤 적극적인 재해석을 가하지 않는 한, 사실상 현대 한국 사회의 문제에 적용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을 비판할 자유, 정부의 시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아직 학자와 시민들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헌법상의 권리들은 실질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가 칸트처럼 비굴한 강화 협상을 계몽군주에게 제안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칸트는 그가 누리고 싶은 정치적 자유를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우리는 표현되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수많은 자유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가 살고 있던 '계몽의 시대'와 우리가 살고 있는 '계몽의 시대'는 데칼코마니처럼 대칭을 이룬다.

더 결정적인 차이는 이것이다. 칸트는 대중들이 계몽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계몽되지 않는 대중들에 대한 절망은 20세기의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민중이 스스로를 계몽하는 것은 오히려 가능한 일"이며, "이런 계몽을 위해서는 자유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이성의 공적 사용에 대한 자유를, 그 반쪽짜리 원웨이 티켓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이유를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자가 자유롭게 비판하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는다면, 언젠가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칸트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함성 앞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을 보장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래서, 앞서 말했듯 매우 적극적이고 치열한 재해석을 가하여 그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 한, 성립할 수 없다. 칸트적 의미에서 '학자'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자신의 책을 검열당하지 않고 써서 시장에 출판한 다음이라면, 대중들이 스스로의 이성을 감히 사용하여 자신을 계몽할 것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칸트에 대한 온갖 재해석이 담론계에 떠돌고 있지만 그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다. 칸트는 이성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믿음은, 마치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러하였듯이, 그의 삶과 학문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

이 텍스트는 내가 읽은 칸트의 저작 중 가장 극심한 정신적 굴곡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나누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성은, 권력 앞에서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주저하는 일개 대학 교수의 그것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텍스트는 『정신현상학』보다 앞서서 독일 지식인들의 내면을 그려내어 보여준다.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저작 중 드물게 '뜨거운' 글이다. 그 열기는 분출될 수 없는 억압된 자유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여전히 외치고 있다. "따져 보라, 그러나 복종하라!"

내가 이 글을 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칸트의 시대부터 이미 독일 관념론의 그것이라 볼 수 있는 어떤 정신적 에너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것이다. 난삽하고 어지러운 문장을 읽다 지친 검열관의 시선이 거기까지는 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였을까? 마지막 문단의 중간 부분부터 칸트의 어조는 급변한다. "이렇게 하여 여기서 이상하고 예기치 않았던 일이 진행된다." ... "이러한 일의 진행 속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역설적이다." 이하 진행되는 내용은, 앞서 말했듯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나의 요약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는 직접 길게 인용하여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크게 하는 것은 국민의 정신의 자유에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정신의 자유에 넘을 수 없는 한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시민적 자유의 정도를 한층 적게 하는 것은 국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때 이런 딱딱한 껍질 밑으로부터 자연이 가장 조심스럽게 보호하는 싹을, 곧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을 계발하게 되면, 이것은 점차 국민의 성격에 반작용하게 되고(이에 의해 국민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발휘하게 된다), 마침내는 이 반작용이 통치의 원리에까지 미치게 되어 정부는 이제야 기계 이상인 인간을 그의 품위에 어울리게 대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시민적 자유의 제약이 정신적 자유의 확장을 가져오고, 확장된 정신적 자유가 자유 사상에의 경향과 소명으로 이어지며, 결국 행동의 자유를 거쳐 통치의 원리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는 것, 그러한 강렬한 역사적 발전에의 소망이 조심스럽게 쇳물을 부어 거푸집에 담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이러한 대미에 이르러 칸트의 이 텍스트는 한없이 '인간'의 텍스트에 가까워진다. 매우 용감하게, 과감하게 말하자면 칸트는 여기서 이미 헤겔이 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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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언급된 글 중 마르쿠제의 『이성과 혁명』은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한국어 번역본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편역, 서광사)을 참조하였습니다.

* 이 글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 외의 다른 레퍼런스가 없기 때문에, 이 생각이 (혹시라도) 독창적인 것인지, 아니면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텍스트를 곡해하고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 확답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