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권의 핵심은 처분권이다. 내가 내 연필을 소유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남에게 팔 수 있다. 아무 의미 없이 그것을
부러뜨리거나, 크로마티 고교에 나온 것처럼 괜히 씹어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 자유다. 반면 가을이가 내 연필을 빌려서
공책에 낙서를 하고 있다면, 내가 허락한 범위 내에서 그 연필을 사용해야 한다. 주인인 나의 허락 없이 그것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하거나 처분해버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오공감의 44 사이즈 논란을 보고 있노라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턱없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할 수 있다. 프랑소와즈 사강의 유명한
말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소유권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피오줌을 싸건
말건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신체는 그러나, 여성의 소유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대체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 즉 가부장 혹은 혈족의 소유물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여성들이 자녀를 낳고 키울 수
없다고 주체적으로 판단하여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알량한 캠페인으로 현재의 출산율 저하 경향에 대응하고자 하는
정부의 안일한 태도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전근대적 여성관이 깔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큰 무리가 아닐 것이다.
평소에
그토록 이명박 정부의 여성정책, 혹은 인구정책에 대해 가볍게 비아냥거리던 이글루스의 여론 또한 거의 비슷한 프레임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혈뇨가 나오도록 밥을 굶는 사람이 왜 '건강하라'는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기초적인 자유주의적 명제에 동의한다면 애초에 그런 값산 '충고'를 함부로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것이 '상식'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로 놀랍다.
극심한 다이어트를 통해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행위는 성매매나
장기매매와 같지 않다. 성매매나 장기매매의 경우 그것을 합법화하면 대부분의 경우 경제적으로 궁박한 상황에 몰린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자의적으로'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마저도 법으로 보호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다(암스테르담의 합법적 성매매로 인해 그
지역에 얼마나 많은 동구권 여성들이 몰려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그 '자발성'의 허구성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이어트를 통한 건강의 저하는 그런 외부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남성들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호르몬 성분이 함유된 약물을 주사하고
먹으며 인공적으로 추출된 단백질을 과다 섭취하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문제의 여성은 혈뇨를 누었지만 단백질 보충제를 과다하게
섭취할 경우 소변에 단백질 성분이 섞여 나오고 그 과정에서 신장에 무리가 온다. 그러나 그 누구도 보디빌더 앞에서 '지금,
스스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라고 느끼한 충고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남성'의 몸은 남성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소유권 행사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없다는 것을 역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적 가치가
지닌 몇몇 미덕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자유주의의 폐단에 항거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태초부터 겪어야 했던
딜레마이다.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특정한 미의 형태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은 타당하지만, 과도한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에게 '너는 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고 외치는 전근대적 함성에 대해서는 반대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몸은 여성의 것이다. 제발 기초적인 것들부터 지키면서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