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0

세대론 메모

아까 모 편집자님과 만나서 식사하던 중 나온 이야기.

'대학생 말하기 강의'라는 책이 있다고 하자. '20대 말하기 강의'라는 책을 또 누군가 낸다고 하자. 두 책을 사서 볼 독자층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제목은 다르다. 나는 후자가 전자에 비해 윤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대 문제'라는 말 자체가 그렇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대학생들이 겪는 문제가 있고,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어쩌면 객관적으로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20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아직도 읽지 않았다면, 당장 검색해서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를 정독할 것).

특히 조선일보. '386세대'라는 단어를 띄움으로써,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갈등을 화이트칼라 사무직 직원 및 인근 엘리트들 사이의 세대 다툼으로 치환해버렸다. IMF 당시 30대였던, 80년대 학번을 단, 60년생들. 이른바 '58년 개띠'들에게 밀리는 세대들. 이 구조가 지금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386에게 밀리는 88만원 세대라는 이름으로. 세대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단어를 꺼내면서도 왜 노동문제에 무관심한지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이 유의미한 지점은 분명 존재한다. 2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문화적 담론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특정한 문화 컨텐츠를 함께 생산하고 소비하는 단위로서의 세대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구학적으로 유의미한 지표를 만들어낼 수준이 아니라면, 보편성을 지니는 세대론이라는 것이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 나는 회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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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 세대론은 '작은 칼'이다. 작은 단위에서는 잘 들어맞는다. 가령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대학생들의 세대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계기는 학부제의 전면적 도입 및 실시였다. 그것이 기존의 학생 조직의 재편을 강요하면서 와해시키지 않았다면 현재 대학가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법조인들에게는 곧 들이닥칠 로스쿨 세대가 기점이 될 터이다.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낸 세대들도 영상원이라는 하나의 교육기관이 생긴 것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세대론은 작은 단위를 분석할 때 유효하다. 문제는 그것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거대담론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첨언2: 세대론에 한국의 식자층이 우르르 쏠려간다는 것 자체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국의 담론 지형이 얼마나 협소하고 위축되어 있으면, 하나의 섹트를 분석할 때에나 맞아떨어질 이야기에 글 읽는 자들이 모두 관심을 갖고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일이 발생한단 말인가. 세대론을 유지하고 싶다면 세대론을 분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빈곤 문제를 다루고 싶다면 '88만원 세대'라는 히트상품을 버릴 각오를 하고 논의를 구성해야 한다. 담론적 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2009-12-29

이건희 사면 문제

이건희 사면 문제의 핵심은 '사면법' 그 자체이다. 제왕적 사법부 운운하는 것은 한국 실정에서 개소리다. 사법부에서 아무리 잡아넣어봐야 뭐하나, 어차피 '사법적 제왕', 즉 대통령이 사면해주면 그만인 것을.

사면법은 건국과 함께 만들어진 후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권력의 칼을 쥔 이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절대반지와도 같기 때문이다. 심지어 '권위주의 탈피'를 부르짖은 노무현도 마찬가지였다. 노 정권 당시 '탈권위주의'가 가지고 있던 본연의 한계에 대해서는 내가 지난 블로그에 쓴 이 글을 참조할 것.

2009-12-27

[노정태의 우물 밖 개구리] 오바마는 ‘미국의 노무현’이 아니었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올해의 인물’이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올해 취임한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오직 그 하나의 업적만으로 노벨평화상 후보에 올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취임 즉시 관타나모 수용소를 폐쇄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라크에서 병력을 즉각 철수하겠다고 말했으며,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노라 선포했다.

드라마틱한 당내 경선을 헤치고 후보 자리에 올랐으며, 지지자들의 열성적인 팬덤에 힘입어 집권하였고, 그들을 실망시킬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는 점 등 너무도 닮은 모습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오바마에게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필자 또한 어느 시점까지는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가령 올해 8월 27일 미디어스에 송고한 “오바마의 곤경으로부터 배운다: 중도주의의 덫”을 쓸 당시, 필자는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 법안들을 집권 초기에 밀어붙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며,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추구하다가 지지 기반을 상실해버린 노무현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미국 오바마 대통령  
 
현지시각으로 12월 24일 아침, 기나긴 토론 끝에 미 상원 의회는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당 의원 전부와 무소속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져 60표를 확보하였고, 공화당 의원들은 전부가 반대하고 일부는 기권하였으나 39표에 그쳐 법안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였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지만, 큰 고비를 넘겼다. 상원과 하원의 찬성표를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더라도, 드디어 미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한 건강보험 시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바마 취임 1년, 그가 거두어낸 가장 값진 승리이다.

우리는 국제 문제를 바라볼 때 크게 두 가지 오류에 빠지곤 한다. 가장 큰 오류는 세상 모든 일을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지구 중심의 오류’이다. ‘빌 클린턴의 방북은 김대중의 뜻에 따른 것이다’와 같은 발상이 그에 해당한다. 클린턴이 납북된 여기자들을 데려온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자국민이 외국에서 납치되건 살해되건 ‘사람 하나 죽었다고 파병 안 하는 나라도 있느냐’고 정부 관리가 찍찍 내뱉을 수 있는 것은 한국 같은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평범한 시민도 아닌 기자가 취재 도중 납치되었는데 그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클린턴은 김정일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경직된 표정으로 자리에 머물렀고, 기자들과 함께 재빨리 북한을 탈출했다. 클린턴 개인이 김대중을 존경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과 미국의 대외정책은 무관하다고 보는 편이 옳다. 우물 안 개구리들이나 모든 별들이 자기 머리 위에서 도는 줄 아는 법이다.

과도한 유비추리의 오류’ 또한 피하기 어려운 오류에 속한다. 국제 문제는 각국의 특수한 사정에 따라 발생하고 움직이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에, 자국 문제를 바라보던 시각을 고스란히 적용하는 것은 곤란할 수 있다. 가령 올해 이란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를 떠올려보자. 초록색 헝겊과 손수건을 두르고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은 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민주화와 재투표를 요구했다. 얼핏 보면 이것은 우리가 작년에 겪었던 촛불시위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2009년의 이란과 2008년의 대한민국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촛불시위도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 어떤 대통령 후보건 이슬람 학자들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나라, 민병대가 자국민을 총으로 쏴죽이고도 문책을 당하지 않는 나라에서 발생한 목숨을 건 시위와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 한해 오바마 미 대통령의 행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필자 본인을 포함해서, 이 두 가지 오류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한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동참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미국의 손아귀에 쥐고 흔들겠다는 음험한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전쟁에 끼어들어 수많은 미국 젊은이가 생면부지의 땅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거니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테러라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위협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12월 26일 오늘 아침에도 한 건의 테러 기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민항기 안에서 폭약을 터뜨리려다 실패한 한 젊은이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은 알카에다를 뿌리뽑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고, 그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을 증파하는 것은 물론 지지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처럼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은 아니다. 한국이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우리가 파병한다고 해서 미국이 자신들의 전략적 필요성을 어겨가며 해야 할 폭격을 안 하리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라크에 병력을 보내면 그 순간 우리는 해당 테러 단체의 적국이 되며, 민간인과 군인들의 생명이 위협당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안전만을 고려한다면 파병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가만히 있어도 미국인을 겨냥한 테러는 벌어진다. 따라서 해외에 군대를 보내서라도 테러 단체를 무력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은 ‘이해할 수 있는’ 일에 속한다.

오바마가 말하는 ‘초당적 협력’ 또한 노무현 정권에서 추진한 대연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의회 정치의 수준과 문화가 다르고, 여당의 정치적 능력과 목표에 대한 동기 또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상원에서는 수십여 일에 걸쳐 끝없는 토론을 통해 건강보험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무조건 결사반대로 막아서는 한국의 국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토론이 되느냐 안 되느냐 이전에,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언론학자 강준만은 『대한민국 소통법』에서 참여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 실패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내놓았다. 한나라당을 설득하여 폭력적 충돌 없이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당은 그렇게 하는 대신 야당을 ‘꼴통’으로 몰아가기에 바빴고, 결국 협상은 벌어지지 않은 채 국회는 다시 파행으로 접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런 일들을 겪고 나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거론했다. 지지자들이 이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지자들이 바라는 만큼의 강도 높은 개혁을 선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어서, 아직도 노무현과 오바마는 유사하다. 그러나 한 쪽은 ‘현실’의 이름으로 ‘이상’을 폐기처분하면서 스스로의 행보를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남긴 반면, 다른 한 쪽은 ‘현실’과 ‘이상’을 은근과 끈기로 조화시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바마를 ‘미국의 노무현’이라고 생각하면서부터 우리는 국제 문제를 지나치게 희화하하여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12월 6일 뉴욕타임즈에 실린 “How Obama Came to Plan for ‘Surge’ in Afghanistan”이라는 장문의 기사는 탁월한 조정자이자 경청자로서 오바마가 지니고 있는 조정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보여준다. 그는 끝없는 회의와 토론을 통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최선의 결론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그 결과가 반드시 선한 것이 되리라고 보장할 수야 없지만, 부시 정부의 그것처럼 성급하고 개인적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오바마가 미국의 노무현이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불안정하고 거친 곳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노무현이 한국의 오바마였더라면 우리는 좀 더 평화로운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심리일 수도 있고, 어처구니 없이 떠나버린 전대미문의 카리스마적 정치인에 대한 아쉬움이 아직도 덜 가신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오바마와 노무현은 여러 모로 다르다. 하지만 아직도 오바마를 바라보며 노무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노정태 / 칼럼니스트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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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사진들

잊을만 하면 올라오는 사진들입니다.

다량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1. 크리스마스 특별 감자 셀러드.



당근과 빨간 파프리카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 보았음.



2. 가을이와 입동이




무릎고양이 입동이...


의 앞발.


부엌 매트에 턱을 괸 입동이


책장 정리하던 날, 기회를 놓치지 않는 가을이


둘이 별로 안 친한 분위기


책상을 정복한 가을이


생체 레그워머 입동이



3. 저는 장남입니다


된장남...


악플을 상대하다가 지친 된장남...


이런 분위기의 까페에서...


집필에 몰두하는 된장남인 것입니다.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의 무지를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천박하다고 말할 때 나는 차라리 비애감이 든다. 인문학은 필요하지만 인문학 하는 사람이 많을 필요는 없다는 말은, 나무가 자라는 것은 좋지만 숲은 필요하지 않다는 말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대한 문학의 시대를 뒷받침하고 있던 것은 위대한 작가들이 아니다. 그 작가들처럼 되고 싶어서 그들의 책을 사고 문체를 흉내내며 문예지를 탐독하던 지망생들이야말로 시대의 버팀목이다. 평지의 거봉은 없다. 모든 높은 봉우리는 비슷한 높이의 산들과 함께 산맥을 이루고, 산맥은 가장 야트막한 언덕까지 쭉 이어진다. 한 마리 호랑이의 포효를 위해서는 하나의 산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