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1

이성은 정념의 노예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Hume, David. A Treatise of Human Nature


너무도 유명한 인용구. 흄이 '이성은 정념(passion은 철학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열정'이 아니라 '정념'으로 번역됨)의 노예'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나 판단을 낳지 못하며, 그것들을 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지성과 판단이 인간의 같은 사고 기능이 아니라는 인식은 칸트에게도 이어져, 말년의 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판단력의 결여는 사람들이 본디 천치[天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러한 결함은 전혀 구제할 수가 없다. 둔한 머리나 편협한 머리는 다름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성과 지성 고유의 개념들을 결여한 것으로, 이러한 머리는 배움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보통은 (페트루스의 제2부의) 저것을 결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대단한 학자들이 그들의 학식을 사용할 때 결코 개선될 수 없는 판단력의 결함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A134=B173, 375쪽.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파악된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런 것들을 혼동할까. 왜 자신들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념'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고 성급한 단정짓기를 서슴치 않을까. 그런 판단은 대체 어떤 정념에 의존하고 있는지, 관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03-31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

세상에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종종 그것을 상실하곤 한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차가운 머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가운 것은 그들의 가슴이며, 본인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냉혈한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는 곧잘 뜨거워지곤 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사실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장이 뛰는 순간 두뇌가 멈춘다고? 현실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심장이 멈추는 순간 두뇌도 멈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2010-03-24

계층 이동 없는 한국

한 가지 기본적인 질문. 계급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사회,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1950년대부터 1990년대 무렵의 대한민국처럼 사회 내 계층 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사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20세기 중반 이후 대한민국이 겪은 급격한 경제 발전은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이며(경제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성장한 유일한 경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사회의 모습은 바로 그 '비정상적' 상황에 기반하고 있다.

또 한 가지 질문. 대학 교수 자식들이 대학 교수가 되고, 노동자의 자식들은 노동자가 되는 나라. 필리핀과 동남아시아만 그럴까? 영국을 포함한 서구 선진국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아들 테리 이글턴이 영문학 교수가 되었을 때 그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영국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와 계층이 전부 파괴된 채 혼돈 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같은 나라가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회적 계층이 어느 정도 분화되어 있고 그것이 '일반적'이다.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식의 계층 이동과 신분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한국도 이제 필리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계층에 따라 주거지가 나누어져 있고 입는 옷이 다르고 생활하는 문화가 다른 것은 필리핀만 그런 게 아니다. 영국도 그렇고 독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다. 물론 '현재'의 한국인들은 그런 사회가 도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계급의 차이가 생긴다고 해서 사회가 바로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로 치닫는다고 말하는 것에는 분명 어폐가 있다.

이 글(에서 퍼온 글)은 바로 그 지점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누락하고 있다. 한국이 그런 식으로 망하고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묵시록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람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아무 대답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계층간 이동이 원활하지 않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결국 노동운동과 노동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정당의 출현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의 글은 '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노동 없는 정치' 말이다. 지금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조직적으로 '기존 정치권'이 노동운동과 노동정치를 탄압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인간의 역사는 그렇게 한심스럽게 진행되어오지 않았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덧말) 여담인데, '사회를 지배하는 1%'라는 표현은 좀 이상하지 않나 싶다. 현재 인구를 5천만으로 잡으면, 그것의 1%는 50만이다. 수능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수능 1%로는 SKY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기도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SKY 나와도 대한민국 1% 안에 못 낀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까? 한 해 SKY 졸업생들의 숫자는 같은 연령대에 속하는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1%보다 당연히 더 적다. 사소한 레토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나는 '대한민국 1%'라는 헐거운 표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네티즌과 대중들의 진지하지 못한 시선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고 있다.

2010-03-21

법정 스님의 유언에 대하여

다음 두 문장은 완전히 다르다.

① 나는 내 제자들 중 그 누구도 내가 남긴 책의 저작권으로 인해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② 나는 내 이름을 단 출판물이 더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법정 스님의 유언은 분명히 ②를 의미하고 있다. 워낙 돈에 미쳐 있는 세상이라 그런지, 저작권자에게는 인세를 받을 수 있는 권리 외에도 '저작물에 대한 인격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 책을 절판시켜라'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책을 더 찍어내지 말고, 어떤 식으로건 공개하지 말라는 뜻이다.

한 저자가 자신의 책을 절판시키고 싶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신의 제자들이 추가적인 이권을 놓고 큰 다툼을 벌이거나 그에 준하는 추문을 일으킬 가능성을 배제하고 싶은 것도 그중 일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본인의 이름을 단 책이 더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말 그대로 무(無)와 공(空)으로 사라지고 싶어서 그런 유언을 남겼을 수도 있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 등을 읽어본 사람으로서, 나는 법정 스님이 애초부터 '완전한 소멸'을 원해서 본인의 저서를 절판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쪽에 속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돈에 미쳐있는지, '절판시키라고 유언을 남겼어? 그렇다면 인터넷에 공짜로 뿌리면 되겠네?'라며 눈을 희번덕거릴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책은 상품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사상과 인격의 표현이기도 하다. (만약 가능하다면 '내 책을 전부 태워버려라'고 유언을 남기시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평생 '무소유'를 설파한 한 스님이 자신의 인격을 위해 더 이상의 출간을 멈추라고 유언을 남겼을 때, 그것을 '공짜로 만들어라'고 해석할 만큼 우리 사회가 돈에 미쳐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고명하신 노알 백작님께
성스러운 교회의 고문관,
성신의 기사,
육군 통수권자,
루에르그의 통치사,
폐하의 오베르뉴 총독,
저의 주군이자 존경하는 후원자.

고명하신 백작님께.

당신께서 저의 이 책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기꺼워하시니 당신의 위대하심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제가 다른 책들을 써냈을 때 생긴 불행한 일들과 그에 따라 제가 실망하고 좌절을 겪은 일들은 당신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손으로 쓴 것이나마 어딘가에 남겨서 제가 연구한 것들을 논리적으로 따지려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께 제가 쓴 글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을 보존하기에 그보다 더 소중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제게 배풀어주신 호의를 보면 당신께서 저의 연구와 노력의 결과를 받아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저는 당신께 편지를 통해 여러 번 제 존경심을 바쳤습니다. 당신께서 로마에서 돌아오실 때 저는 직접 찾아뵙고 그때 제가 준비하고 있던 이 두 개의 글들을 바쳤습니다. 제가 바친 것들을 당신께서 기꺼이 받아주셨으니 저는 그것들이 잘 보존되리라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그것들을 프랑스로 갖고 가셔서 이 분야에 밝은 당신의 친구분들께 보여 주셨으니 제가 이렇게 조용히 지내지만 제가 실제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저는 이것들을 독일, 플랑드르,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으로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엘제빌이 제 책을 찍어 냈으며 저에게 이 책을 누구에게 헌정할 것인가 즉시 응답을 하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하도 뜻밖의 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아마 당신께서 저의 글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셨는데 그것들이 출판사 사람들 손에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전에 제 책을 찍어 낸 적이 있기 때문에 저를 위해서 그 글들을 책으로 꾸며 낸 것 같습니다. 당신과 같이 고명하시고 저명하시고 존경스러운 분의 비판을 거친 것이기에 이 글은 더욱 값어치가 있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글들을 널리 전하려 하시니 당신의 관대하심과 당신께서 이것을 통해 만민의 복리를 증진하려 하시는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건대 저는 당신의 관대하심과 당신께서 저의 이름과 일들을 사방으로 저로서는 엄두도 못 낼 지역으로 널리 전하여 주신 데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저는 제 노력의 결과인 이 책을 기꺼이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꼐서 제게 베푸신 은의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제가 당신의 보호 아래에 있을 때에 적들이 저의 명예를 공격하더라도 당신께서 지켜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당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당신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할 때, 당신께서 최고의 행복과 위대한 성취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당신의 충실한 종
갈릴레오 갈릴레이



9-10쪽,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무현 옮김, 『새로운 두 과학 - 고체의 강도와 낙하 법칙에 관한 대화』(서울: 민음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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