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수첩의 방영 이후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고 있다. 검찰에서도 외부 인사가 대거 포함된 특위를 꾸려 내부 감찰을 실시하겠다는
입장이다. 여기까지는 좋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고, 좋은 반응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논의하는 지점에서 몇 가지 빠진 구석이
보인다.
1. 성매매와 여성 문제
검찰들은 어디서 접대를 받는가? 그 접대의 양식이 성매매를
포함한 음주가무라는 점을 들어 사람들은 '떡찰이 떡친다'는 식의 조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대량
성매매'가 아무렇지 않게 벌어질 수 있는 문화가 대한민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 미국에서도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고급 성매매 업체가 적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양상은 한국과 달랐다. 우리는 남자들이 떼로 한
건물에 몰려가서 술을 마시고 삼삼오오 모텔로 흩어진다. 미국에서는 은밀하게 연락을 받은 고급 콜걸들이 고위 공직자가 있는 호텔에
찾아가 성매매를 했다.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요컨대 한국에서는 '남자'라면 당연히 끼어야 하는 어떤 추접한 아랫도리
업무가 따로 존재한다. 그 사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TV에서 본 것과 같은 향응 접대가 가능한 것이다. 성매매 자체를 근절하는
것은 절도나 강도를 근절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지만, 지금처럼 '다들 쉬쉬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는' 형태로 대규모
성매매가 시행되는 사회 구조를 방치하고 있는 한, 돈을 가진 자들은 당연히 권력자들에게 술과 성을 접대할 것이다.
고위공직자 사회 내의 성비를 깨뜨리는 문제가 그래서 중요하다. 자료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성비가 골고루
나누어지면 나누어질수록 비리가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집단적 로비'가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모든 검사들이 다리 사이에 좆을 달고 있다면, 그 숫자만큼 아가씨를 붙여주면 된다. 하지만 일부 검사들이 여성이고
그들이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와 있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고 집단적으로
움직이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풍토가 바로 이와 같은 집단 성매매를 통한 향응 접대를 낳는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 검찰에 대한 비난과 더불어 이 문제를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도 비판할 수 있고, 그 비판이야말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많은 분들이 상기해 주었으면 싶다. 성매매를 옹호하는 당신은 떡찰을 옹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비리와 노동 문제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잘 말하고 있듯이, 기업의 내부 비리를 척결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그 기업에 강경한 노동조합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삼성도 그렇거니와 이번에 PD수첩에 나온 그 기업도 그렇다. 사장님이 검사 영감님들게 술 사드리고 여자 바치는 그 돈이
과연 어디서 나왔을까? 사장의 개인 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게 다 회사 공금이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그런 일이
완전히 근절될 수 없더라도, 많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은 그래서이다. 회사돈으로 사장이 친분 쌓고 다니면서 '공적 활동'이라고
우기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기업과 권력간의 유착을 상당 부분 제거해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점
노동조합에 대해 비우호적으로 변해가고 있고, 그것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고 외치는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유시민은 87년
78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한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를 '분열'이라고 말하더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말에 한치의 동의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성장'이다. 노동운동이 온전히 자리를 잡고 정치적으로도 제 몫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한국
사회의 자정능력 신장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노동운동을 매도하면서 한국 사회의 개선을 바란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ㄴ자만 나와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이런 인식도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3. 검찰 수사비 현실화
한
차례 사정의 폭풍이 몰아친다 하더라도 결국 검사들은 다시 스폰서에게 돈을 받을 것이다. 그래야 할 핑계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말이다. 검사들은 늘 수사비가 모자란다. 혹은 그렇다고들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자금이 모자라면, 공적으로 신청해서 받아내면 되는 일이 아닐까?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바로 그
현실을 뜯어고쳐서 검사들이 돈 받아먹을 핑계를 대지 못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도덕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이 옳다. 수사비가
부족하다는 핑계로 어디 어디 사장님들 만나서 접대 받는 것이 문제라면, 일단 수사비도 제대로 지급하고, 수사비를 유용하거나 접대를
받을 경우 훨씬 가혹한 처벌을 받게 해야 앞뒤가 맞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개혁안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하고, 나온다고 해도 시민사회에서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백리를 요구하기만 하면 나오는 것은 탐관오리 뿐이다.
관직에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인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면서 인간적으로 통제하고자 하지 않는
한, 구조적인 비리와 부패의 사슬은 끊기 어렵다.
검찰에 대한 이번 비판을 통해 검찰이 진실로 변화하기를 바란다. 그 변화의 과정 속에서 앞서 말한 요소들도 조금씩 진전되어 나간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2010-04-21
2010-04-15
학문으로서의 철학
철학에 대해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학계의 철학자들이 하는 논의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것은 철학
연구자들이고, 진정한 철학자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라고 외치겠지.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대중교양서 수준의 지식을
반복해서 읊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대중들에게 물리학의 초보적인 내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고 해도 대중들은 그게 물리학의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건 물리 연구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진정한 물리학자는 우리의 표피적 관찰(가령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같은 것)과 어긋나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라고 누군가 외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철학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자신들이 표피적으로 생각한 초보적인 논증 수준 이상을 벗어날 경우 '현학적'이라느니 '궤변'이라느니 하는 항의가 따라온다. 그러나 철학은 학문이고, 대중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논의들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에 덧붙이는 훈장과도 같은 기호로서의 '철학'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진지하게 추구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활동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강단철학은 틀렸다, 우리가 간다!'라고 외치는 '인문 상업주의'는 바로 그런 대중적 경향성에 편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물리학자가 대중들에게 물리학의 초보적인 내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고 해도 대중들은 그게 물리학의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그건 물리 연구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진정한 물리학자는 우리의 표피적 관찰(가령 무거운 물체는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 같은 것)과 어긋나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라고 누군가 외치고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철학의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적어도 내가 겪은 바로는, 자신들이 표피적으로 생각한 초보적인 논증 수준 이상을 벗어날 경우 '현학적'이라느니 '궤변'이라느니 하는 항의가 따라온다. 그러나 철학은 학문이고, 대중적으로 소화될 수 있는 것 이상의 논의들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다.
사람들은 철학에 관심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자신들의 이런 저런 생각에 덧붙이는 훈장과도 같은 기호로서의 '철학'에는 지대한 관심이 있지만, 진지하게 추구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에는 완전히 무관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오히려 전자를 위해 후자의 활동을 비난하고 폄하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강단철학은 틀렸다, 우리가 간다!'라고 외치는 '인문 상업주의'는 바로 그런 대중적 경향성에 편승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다.
2010-04-05
천안함 문제를 보며, 단상 하나
천안함 침몰 사태와 관련해서, MBC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군(軍)이 청와대에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이미 노무현 시대부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관료 집단은 통제가 되지
않기 시작한 것 아닌가. 가령 이런 경우.
가히 폭력적인 인사 개혁을 통해 하나회를 물갈이한 김영삼의 군에 대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김대중 시절을 거쳐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희망의 군국주의자'로 떠받들고 이명박은 '미필 씹새끼'로 몰아붙이는 그런 도식화를 통하지 않고도.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인간으로 구성된 기계, 즉 관료 집단과의 알력싸움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외교에서 무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이미 노무현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권력은 관료 집단의 정보 독점과 의사 결정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정책들, 특히 외교부가 관할하는 분야는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민주주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반민주주의고 노무현은 민주주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기존의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한 것. 노무현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대통령과 지지자들 모두 '조선일보 때문이다'라는 편리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그 변명을 스스로에게까지 남발했다는 것 아닐까.
노무현 대통령이 실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서 근무하며 이 과정을 지켜 본 김종대 씨의 최근 책 <노무현, 시대의 문턱을 넘다>(김종대 지음. 나무와숲 펴냄)를 보면 노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하고도 남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5월 20일 안보관계장관회의에서 심지어 이렇게까지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사람 아무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 전부가 나에게는 진실로 들리지 않아요. 이게 대책회의 맞습니까?"
참고 링크
가히 폭력적인 인사 개혁을 통해 하나회를 물갈이한 김영삼의 군에 대한 카리스마와 통제력이, 김대중 시절을 거쳐 조금씩 약화되다가,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러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은 '희망의 군국주의자'로 떠받들고 이명박은 '미필 씹새끼'로 몰아붙이는 그런 도식화를 통하지 않고도.
요컨대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이 인간으로 구성된 기계, 즉 관료 집단과의 알력싸움에서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는가의 문제. 이명박 정부가 특별히 외교에서 무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이미 노무현 시절부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 권력은 관료 집단의 정보 독점과 의사 결정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 연속성을 지니는 정책들, 특히 외교부가 관할하는 분야는 한결같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 '민주주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명박은 반민주주의고 노무현은 민주주의고 이런 차원이 아니라, '선출된 권력'이 '기존의 집단'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영향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부재한 것. 노무현 시대의 비극 중 하나는, 대통령과 지지자들 모두 '조선일보 때문이다'라는 편리한 모범답안을 가지고 그 변명을 스스로에게까지 남발했다는 것 아닐까.
2010-04-01
이성은 정념의 노예
Reason is, and ought only to be the slave of the passions, and can never pretend to any other office than to serve and obey them.
- Hume, David. A Treatise of Human Nature
너무도 유명한 인용구. 흄이 '이성은 정념(passion은 철학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열정'이 아니라 '정념'으로 번역됨)의 노예'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행위나 판단을 낳지 못하며, 그것들을 억제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성 혹은 지성과 판단이 인간의 같은 사고 기능이 아니라는 인식은 칸트에게도 이어져, 말년의 그가 『판단력 비판』을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판단력의 결여는 사람들이 본디 천치[天痴]라고 일컫는 것으로, 이러한 결함은 전혀 구제할 수가 없다. 둔한 머리나 편협한 머리는 다름아니라 보통 정도의 지성과 지성 고유의 개념들을 결여한 것으로, 이러한 머리는 배움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박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때에도 보통은 (페트루스의 제2부의) 저것을 결여하는 것은 흔한 일이므로, 대단한 학자들이 그들의 학식을 사용할 때 결코 개선될 수 없는 판단력의 결함이 자주 눈에 띄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A134=B173, 375쪽. 『순수이성비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판단 자체가 이성적이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성적으로 파악된 현실 속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다. 왜 사람들은 자꾸 이런 것들을 혼동할까. 왜 자신들의 판단이 '이성적'이고, 다른 사람들은 '정념'에 의해 판단하고 있다고 성급한 단정짓기를 서슴치 않을까. 그런 판단은 대체 어떤 정념에 의존하고 있는지, 관찰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0-03-31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
세상에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수의 사람들이 '차가운 이성'을 유지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종종 그것을 상실하곤 한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컨대 '차가운 머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차가운 것은 그들의 가슴이며, 본인들이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냉혈한처럼 굴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들의 머리는 곧잘 뜨거워지곤 한다. '차가운 머리, 뜨거운
가슴'은 사실 '뜨거운 머리,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인 것이다. 심장이 뛰는 순간 두뇌가 멈춘다고? 현실은
그와 정 반대 아닌가? 심장이 멈추는 순간 두뇌도 멈춘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살아 숨쉬는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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