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8-26

안철수의 국민연금 생각

꼭 아파트를 새로 지으려고만 하지 말고 민간의 다세대주택을 사들여서 공공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정책 같은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많은 재원을 갖고 있는데 국민의 소중한 자산을 가지고 미래가 불안정한 오피스빌딩을 매입하기보다 국가보증하에서 안정적이고 공공성이 높은 공공임대주택 건설에 투자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요?
— 안철수, 제정임 엮음, 『안철수의 생각』(서울: 김영사, 2012), 106쪽. 강조는 인용자.

2012-07-18

2010.10.10 - 2012.07.18

2012년 7월 19일부로 저는 다시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기대 섞인 우려, 혹은 우려 섞인 기대와 달리, 단 하루의 추가 복무 없이 병장 만기 꽉 채우고 나왔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간략하게 몇 가지 항목만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군 복무 형태는 카투사, 근무지는 미 2사단 1여단 모 대대 모 중대, 병과는 통신병입니다. 몸 쓰는 일과 머리 쓰는 일을 골고루 다 하며 후회 없는 군생활을 하다가 나왔습니다.


2. IOTV 입고 뛰어다니고 통신망 설치하는 것 외에 다음과 같은 활동을 하였습니다.

2-1. 『마이크로스타일』 번역 및 출간.

2-2. 《프레시안북스》에 서평 기고.

2-3. DOMINO 동인 활동.


3. 이 블로그는 2011년 8월 17일 비공개로 전환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날 제가 2사단 지역대에 소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군인의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이우람'이라는 분이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보 시면 아시다시피 저 글은 '정치의 이론적 해석'에 대한 글이지 '정치적 지지나 비난'을 담고 있지 않으므로 큰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만, 최장집이나 손학규 같은 실존 인물이 거론되고 있으며, 어쨌건 민원이 들어왔으니 뭔가 조치가 취해지기는 해야 한다는 이유로 블로그 폐쇄를 지시받고 그 당일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4. 물론 군대는 군대니까 모든 게 다 쉽거나 재미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나이가 많은 채 군대를 간 덕에 논산훈련소와 KTA(KATUSA Training Academy)는 쉽게 넘겼지만, 자대에 가보니 얘기가 좀 달랐습니다.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한 불굴의 이성이 본인의 처지마저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개인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당시 썼지만 공개하지 않은 다음 글에서 확인하실 수 있겠습니다.

"지배하지도 지배당하지도"(2011년 1월 16일)


5. 하지만 그것도 이른바 '짬'을 좀 먹으니, 대략 일병 꺾이고 난 다음부터는 별 문제 없이 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01학번인데, 저보다 많게는 열 살 정도 어린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이른바 '이중의 시차'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시점부터는 선임이건 후임이건 다 제 밑으로 동생들이 되고 말았지만, 저는 워낙 스스로에게 엄격한 탓에 특정 시점을 넘기까지는 함부로 말을 놓고 하대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런 군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6. 본연의 현실로 돌아와 생각해보면, '논객질'이라는 특정한 활동의 범주가 있습니다. 다들 군대 오면 비로소 '대중'의 존재를 느끼고 논객질의 한계를 고민한다던데, 저는 카투사라 그런지 학력은 높지만 지성은 미숙한 다수의 고학력자들이 새로운 차원의 '계몽'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 당장 뭘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무튼 돌아왔습니다. 고전 명작 뮤직비디오를 감상하며 이 기쁨을 만끽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2012-02-11

이정렬 판사가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에 대해 재판한다면

서기호 판사의 재임용 탈락에 대한 논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사람은 진중권이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관련된 뉴스의 링크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나는 그의 전체적인 취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불만이 없다.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가카’라는 외재적 거악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나 사기업 혹은 기타 생활세계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는 자기 구속과 억압이다. 다른 수많은 사례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작은 두목’들이 휘두르는 조직 내의 정치가 문제인 것이다.

이옥형 서울지법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린 글은 바로 그 지점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길게 인용해보자.
이제 판사들은 법원장으로부터 근무평정을 좋게 받지 못하면 판사직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을 목격하였다. 꼭 사건처리와 일치하지도 않는다. 사건처리를 못하면 그것을 이유로, 사건처리를 잘해도 조직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간관계가 원만해도 판결에 나타난 국가관이 이상하여 균형감이 없다는 이유로, 무슨 이유로든지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로 좋지 않은 평정을 받을 수 있다.
서기호 판사의 글(링크)
이 항변의 내용은, 공교롭거나 공교롭지 않게도, 최근 큰 논란을 불러온 ‘석궁 테러’의 가해자인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의 그것과도 같다. 그 사건의 대략적인 맥락을 상기해보자.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기재하는 실력자이지만, 입시 문제의 출제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재직중인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교수, 평소 다른 교수 및 재단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학생들에게도 막말을 했다는 그런 교수가,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당시 서울고등법원에 재직중이던 이정렬 판사는 본인이 주심을 맡은 이 사건에서 성균관대학교는 김명호 교수를 복직시킬 필요가 없다는 원심을 확정지었다.

이 판결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김명호 교수가 해당 재판의 재판장인 박홍우 부장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갔고, 그는 이후 살인미수로 수사받고 상해죄로 기소되어 징역 4년형을 살고 현재 석방된 상태다. 이미 나는 그 형사사건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이번에는 지난 글에서 다루지 않았던 민사사건에 대해 살펴보자.

이정렬 판사는 ‘김 교수가 판결문을 읽어보았더라면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그 판결문은, 이정렬 판사의 자부심 넘치는 발언처럼, 논리적으로 빈틈이 없다. 학생들에게 욕을 얼마나 했느냐, 욕 먹은 학생들은 다들 앙심을 품어서 그런 것이냐, 따위의 자질구레한 ‘진실게임’은 다 접어두고 판결문의 기본적인 논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구 교육법(김명호 교수가 재임용 심사를 받을 당시의 법률)에 따르면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具有)하게 하여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념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2. 같은 법에 따르면,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그 광범하고 정치한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며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 그러므로 성균관대학교가 교수의 임용과 관련하여 연구 실적과는 무관한 요소들, 가령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평가의 항목으로 삼는 것은 정당하다.

4. 그런데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항목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고, 대학측이 제출한 자료를 통해 보건대 그 평가는 정당하다(또한 김명호 교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고 있지 않다).

5. 따라서 성균관대학교의 재임용 불가 처분은 정당하다.

이와 같이, 이정렬 판사는 철저하게 해당 사건과 관계되는 법률을 찾아내고, 그에 기반한 판결을 내린다. 그를 ‘우리편’으로 만들어준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과 ‘꼴통’으로 만들어준 억대 내기 골프 무죄 판결 모두를 관통하는 원칙이 바로 그것이다. 기존 판례나 ‘국민감정’보다 현행법으로부터 도출되는 법도그마틱을 우위에 두는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는 것이 그를 ‘튀는 판사’로 언론에 오르내리게 만든 원동력인 것이다(물론 ‘가카새끼 짬뽕’으로 인한 유명세는 별개로 쳐야 한다).

물론 그 원칙은 정당한, 혹은 우리 모두가 정당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판사가 법도그마틱이 아닌 다른 요소를 통해 판결을 내린다면 국민들은 안정적인 법 작용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법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렬 판사의 그 판결문을 반박하기가 쉽지 않다. 해당 사건과 관련된 법을 통해 판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수의 임용에 교육자로서의 자질 같은 주관적 평가를 개입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항변은 판사가 아니라 입법부를 향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같은 논리가 서기호 판사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한 단계씩 그 논리를 따져보도록 하자.

1. 헌법 제101조 3항에 따라 법관의 자격은 법률로 정한다. 헌법 102조 3항에는 대법원과 각급법원의 조직은 법률로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 위 헌법 조항들은 법원조직법으로 구체화되고 있는데, 법관의 근무성적의 평가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다.

제44조의2 (근무성적의 평정) ①대법원장은 판사 및 예비판사에 대한 근무성적을 평정하여 그 결과를 인사관리에 반영시킬 수 있다. ②제1항의 동무성적평정에 관한 사항은 대법원규칙으로 정한다.

3. 그런데 대법원규칙(2012년 1월 1일 개정)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6조(임용기준)

판사임용대상자에 대해서는 법률지식 및 법적 사고 능력, 공정성, 청렴성, 전문성, 의사소통능력, 품성, 적성, 공익성 등을 참작하여 법관 수급 사정에 따라 임용 여부를 결정한다.

4. 대법원규칙은 “법적 사고 능력”뿐 아니라 “공정성”과 “품성”을 임용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객관적인 지표로 측정될 수 없는 요소가 평가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은 정당하다.

5. 그러므로 서기호 판사는 법원의 재임용 거부에 대해 항변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앞서 우리는 조직과 기관마다 속속들이 박혀있는 작은 두목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하는 한국 사회의 분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동일한 논리를 지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단순히 분위기나 문화나 ‘빌어먹을 꼰대 새끼들’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엄격하게, 혹은 이정렬 판사의 방식대로 따져보면, 바른 말 하는 당신보다는 당신에게 ‘젊은 친구가 세상을 모르네’라고 말하는 ‘꼰대’가 법정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렇게 법에 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이 개인에게 ‘인격’을 요구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 인격을 판단하는 주체는 적어도 당신보다는 더 힘이 있는 누군가일 것이다.

나에게는 김명호 교수의 재임용 탈락이 서기호 판사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국가의 법이 개인에게 특정한 ‘인격’을 갖추라고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쟁점이라면, 두 사건은 상호 교환 가능하다.

허재현 한겨레 기자를 비난하기 위해, 김명호 교수를 ‘완전히 4차원’으로 몰아붙여간 진중권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몇몇 언론은 진중권이 김명호 교수를 닦달한 그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논조로 서기호 판사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려 든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잘릴 만하니까 잘렸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서 판사는 심사 하루 전인 6일 자신의 근무 평정을 판사 내부 통신망에 스스로 공개했”는데, “그는 초반 7년 동안 ‘상·중·하’에서 ‘하’를 5회, ‘중’을 2회 받 았고 ‘상’은 한번도 받지 못했”고, “이후 A~E 까지 5단계로 평가한 3년간은 C를 2회, B 를 1회 받았”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그 평가의 내용이 반드시 법관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내용이 아닐 수도 있고, 대법원규칙에 의해 규정된 바에 따른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김명호 교수의 사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송 따위로 인해 그 ‘인격적’, ‘품성적’ 내용이 공개되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뿐이다.

‘김명호는 4차원이지만 서기호는 천사표’라는 식의 저질스러운 반론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조선일보는 세심하게 팩트를 던진다. “그는 또 변호사가 재판부에 낸 준비서면을 그대로 오려 붙여 ‘72자(字) 짜리’ 무성의한 판결문을 썼다가 변협의 공개 항의를 받는 등 물의를 빚은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중권은 ‘요새는 판사도 Ctrl-c Ctrl-v 하느냐’는 식의 조롱 대신, 근무 평점이 중간인 사람이 어떻게 뒤에서 2등이 되는지 ‘논리적’으로 궁금하다며 너스레를 떨 뿐이다(이미 조선일보는 ‘그 둘 빼고 중하위권은 다 알아서 나갔다’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계속 진중권을 걸고 넘어지는 이유는 논의의 이성적 수위를 공고하게 높이기 위해서이다. 누군가가 어떠한 인격과 품성과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법에 써놓고 강제하는 것이 가능한 나라, 100개의 조직마다 100명의 원님이 호령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하는 나라에서, 바로 그 메커니즘에 의해 짓밟힌 누군가를 향해 ‘알고 보면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말 실망했다. 이성과 상식을 부르짖지만 그 방법론은 과연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열정으로부터 그것의 토대가 되는 문화적 맥락을 분리하고, 그 문화적 기제의 바탕에 깔린 제도적 장치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깝깝한 이유는 늙었는데 죽지도 않는 노인부대가 정신줄 놓고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나 찍고 자빠져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 속의 인간을 분리하고, 사건 자체의 문화적 측면과 법적 측면을 별개의 것으로 고찰하는 사고의 구조가 확립되고 보편화되지 않는 한 현재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연이어 불거진 두 개의 사건을 바라보는 한 총명한 논객의 발화를 검토해보고 있노라면, 밤은 깊고 갈 길은 멀 뿐이다.

진중권은 ‘김명호 민사사건 담당, 일명 튀는 판사로 유명한 이정렬 판사네요’라며 단정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김명호 교수에 대한 판결이 옳을 것이라는 뉘앙스를 트위터에 흘린 바 있다. 바로 그 이정렬 판사와 같은 방식으로 서기호 판사의 경우를 바라보면, 그러나, 그 결론에 동의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면 뭘 어쩌자는 말인가? 개별적인 사안에 대해, 사람에 대해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현재 상황이 그 자체로 문제적이라는 위기 의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닳고 닳은 인용구로 긴 글을 끝내야겠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2012-02-04

시바스 리갈과 비키니

MBC의 부장급 여성 직원께서 52년만의 맹추위를 무릅쓰고 벗어주신 덕분에 이 논란의 본질이 또렷해졌다. 사안의 본질은 섹스 혹은 젠더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인간 혹은 생물의 본능적 욕망인 섹스 그 자체와, 그 위에 덧입혀진 군사독재 시절 혹은 ‘유교 꼰대’적 문화의 갈등이 이 사안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제아무리 개방적인 문화권이라 하더라도 섹스 위에는 문화적 레이어가 존재한다. 상호 합의된 자유로운 성욕이라는 최소한의 개념에도 역시 근대적 자유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좀 덜 개방적인 문화 속에서는 ‘진정한 사랑’, ‘가문간의 결합’, ‘인구학적 지속 가능성’ 따위가 섹스의 직접적인 노출을 막는 차단막 역할을 한다.

문제는 그러한 문화적 기제가 단지 문화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권력적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경우이다. 가령 박정희와 그의 측근들은 젊은 여자를 끼고 놀고 싶다는 욕망을 ‘조국 발전에 힘쓰시는 각하의 피로를 풀기 위한’ 일로 승화시켰다.

(섹스에 대한 욕망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는, 그만큼 성폭력에 대해서도 둔감한 곳일 수밖에 없다. 거대한 가치, 거스를 수 없는 대의를 타고 누군가의 욕망이 흘러넘칠 경우, 상대적인 사회적 약자들이 그것을 거스르기란 더욱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봉주는 성욕 억제제를 먹고 있으니 안심하고 비키니 사진을 보내라’고 김용민은 말했다. 육 여사를 잃고 나라 근심에 지친 각하를 달래드리는 거지, 결코 네놈들이 생각하는 그런 천박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박정희의 채홍사들은 둘러댔을 터이다. 나는 두 발화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권력’을 단지 국가나 젠더 사이의 위계적 차이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우리는 좀 더 풍부한 논의를 해볼 수 있다. 대체 MBC의 그분은 왜 벗었는가? ‘이건 단지 찧고 까부는 건데 너무 진지하게 비판한다’는 항변의 뉘앙스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애들 장난인데 왜 그래?’라고 말하고 싶고, 그러므로 ‘애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무색하게 하기 위해 ‘언니’로서, ‘선배’로서, 혹은 ‘형님’으로서 총대를 매는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섹슈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 보스 행세를 해야만 하는.

이제 문제의 ‘비키니녀’들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나는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의 ‘진심’은 다만 두 개의 층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본인의 탐스러운 육체를 많은 이들에게 과시하고픈 욕망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잘 벗을 수 있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는 더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레진 블로그에 축전을 보내고 공개되고 서로 좋아라 하는 그 행위에는, 지금의 이것과 같은 이중의 음습함이 없다.

문제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와 가카를 깔 수 있는 자유 등등, 절대적 까방권이 될 수밖에 없는 선량한 대의가 마치 입안에 감도는 미원의 맛처럼 뒤덮혀있다는 것이다. 수신자 정봉주와 엿보게 되는 수많은 남자들을 흥분시키려 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그와 같이 고상한 목적으로 사탕발림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나꼼수에서 둘러대면서 만들어내고 있는 섹스에 대한 권력적 포장을 완성시킨다.

‘나는 자발적으로 벗었는데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냐’는데, 정작 그 자발적인 육체의 섹슈얼한 맥락은 다들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가운데(혹은 “찧고 까부는” 일이라는 식으로 모에빔 처리되어), 국가와 민족과 민주주의의 성전에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비키니 사진을 보내는 이들을 슬럿워크와 비교하는 것은 그래서 결코 온당하지 않다. 슬럿워크는 추상적인 여성의 자유를 ‘홍보’하기 위해 옷을 벗는 게 아니라, 걸레처럼 싸보이게 입고 다니는 것 자체가 여성의 자유의 본질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꼼수를 듣고 지지하고 응원의 사진을 보낸 여성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꼼수를 ‘초월’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침묵과 이후의 어정쩡한 해명을 통해 김용민과 나꼼수 제작진이 만들어낸 ‘섹스를 표현하면서 민주주의를 말하는’ 변태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권력적인 맥락 작용을 추인해버린 것이다.

정봉주의 발기를 기대하고 벗었다면 왜 본인의 진실을 말하지 못할까? 벗긴 벗되 그런 걸 바란 게 아니라면 대체 뭘 바라고 비키니를 입은 채 가슴을 모아올렸나? 비키니 응원녀들의 두 개의 진심은 모두 순수하고 진정성 넘치는 것이기에, 서로 충돌한다. 그런 구조 속에서 재미를 보는 건 결국 꼭데기에서 그 구조를 만들고 조정하는 자들 뿐이다. 박정희의 섹스가 국가와 민족의 과제로 승화되던 그 변태성이, 역시나 이번에는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논의에서 나는 ‘마초’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를 있는 그대로 꺼내서 과시하지도 못하는, 자칭 민주투사들이 서로 민망하게 노는 모습이 유출되었을 뿐이다. 정봉주가 옥중에서 투약한다는 성욕감퇴제가 대체 무엇인지 알 길은 없지만, 그 남자들이나 그 여자들이나 결국 태극기 망또를 두르고 민중가요 부르며 팬티를 벗어재끼는 변태들처럼 보일 뿐이다.

2012-01-13

부러진 화살, 뭉툭한 이성

1.

이 건은 애초에 논의할 건수가 못 된다. 만약 석궁이라는 무기가 마치 장전된 총과 같다면 말이다. 김 교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석궁을 쏘면 멧돼지의 가죽도 뚫는 화살이 날아간다. 그런데 사람이 그걸 배에 맞고 깊이 1센티미터가 안 되는 상처를 입은 채 무사히 집에 걸어갔다가 병원에 걸어서 갔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이 조건을 인정한다면, 김 교수의 가방에서 사시미 칼이 나오건 말건, 그가 석궁 발사 연습을 했건 말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발사하였고, 그 발사된 화살이 판사의 배에 상해를 입혔다’라는 검찰 측의 주장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 강력한 석궁의 화살이 발사되었고 맞았다면, 판사는 사망하거나 그에 준하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영화와 그 외 언론 등을 통해 접한 모든 논리는 바로 이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정상적으로 석궁이 발사되었다면 그 정도 피해에서 멈출 리가 없는데, 어떻게 김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홍우 판사가 자해를 했다거나, 와이셔츠에 피가 묻어있지 않다거나 하는 그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김명호 교수가 석궁을 고의로 발사했다는 사실을 반박하기 위한 가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와이셔츠와 통화 기록과 혈흔 감정 등등에 대한 모든 논의, 즉 ‘재판이 개판’이 되어버린 시점의 이야기들을 모두 접어둔 채, 일단 석궁에만 집중해 보도록 하자. 검찰은 김 교수가 석궁에서 화살을 ‘발사’하였고 그로 인해 ‘발사된’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발적으로 발사된 것이며, 몸에 맞지 않고 바닥에 부딪쳤기 때문에 부러졌고, 경찰 검찰 사법부 병원 등 모든 기득권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부러진 화살을 숨긴 채 자신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2.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른 관점으로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있겠으나, 하나의 형사 사건으로서 석궁 사건이 갖는 핵심적인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발사’된 석궁이 사람을 죽이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고 경미한 상해(전치 5주?)만을 남길 수 있는가. 김 교수 역시 어떤 식으로건 석궁에서 화살이 날아갔다는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석궁이 발사되더라도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치지 않는 수준으로 화살이 날아갈 수 있다면, 와이셔츠에서 눈에 보이는 혈흔이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김 교수가 가지고 갔고 석궁에서 발사된 그 화살이 박 판사에게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영화 ‘부러진 화살’이 제대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사실이 있다.
판사: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1회의 요지는 검찰에서 설명한 것 외에 … [피의자, 즉 김 교수는] 석궁의 위력에 대해서 검찰에서 사람에게 쏠 경우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라는 신문에 대해서 다다미 연습을 할 때에 어떤 곳은 1쎈치 정도 꽂히고 다다미가 풀려진 곳은 좀 더 깊이 꽂혔는데 그렇게 치명적인 위력을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박홍우가 화살을 배에 맞아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피고인이 발사한 화살에 다친 것을 인정하느냐는 신문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화살을 맞은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로서는 화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서 김 교수는 본인 스스로, ① 자신이 연습할 때에는 다다미에 꽂히는 화살의 깊이가 그다지 별 볼일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②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죽이거나 큰 상해를 입히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취지의 항변을 한다. ③ 발사자의 미숙한 조작에 의해 석궁의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은 뒤이어 등장한 증인에 의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조준을 잘못했다던지 하는 경우는 어떤가요.
답 ☞ 조준이 잘못되는 경우가 아니고, 시위를 걸 때 초보자인 경우 시위가 한쪽으로 쏠리는 경우가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석궁이 발걸이가 한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동식 석궁이라고 하는데, 양발을 사용해서 석궁 줄을 당길 수도 있고 한발을 놓고 당길 수가 있는데, 지금 사용한 석궁 같은 경우는 왼발 또는 오른발 어느 발을 사용하든 한쪽 발을 놓고 시위를 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몸 중심에서 한쪽으로 어느쪽이든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활대에 있는 힘이 중심으로 몰려와서 바로 화살 뒤를 가격해야 되는데 한쪽으로 쏠린 현상일 때는 파워가 좀 떨어집니다.
1심 3차 공판기록문
영화에서는 이와 같이, 제대로 장전된, 즉 화살누름판에 의해 화살이 물려 있는 석궁이라 하더라도 미숙한 조작자로 인해 위력이 크게 감소될 수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공판에 출석한 두 명의 증인 중 두 번째 사람의 증언에만 초점을 맞춘다. 화살을 아래로 눌러 고정시켜주는 하향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화살을 계단 위에서 아래로 겨누고 발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증언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답 ☞ 예, 끌려 들여와 있으니까 아예 대 놓고 쏴도 들어가 버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또 하나는 내려 쐈을 경우 파워가 없다고 한다면 화살누름판이 없을 때, 아니면 빠져나왔을 때 파워가 없는데, 송파경찰서에서 의도한거는 이렇게 놓고 쐈을 경우에 파워가 있는데 실제로는 조금 들어갔잖습니까? 박홍우 판사가 그런 의도를 모르겠다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만약에 화살누름판이 없는 상태에서 이렇게 나와서 쐈을 때 조금 들어갔다면 이해를 한다 이겁니다. 근데 하향사격을 하면 혼자 흘러 내려옵니다. 화살누름판이 없는 경우에는 그러니까 어떻게 그렇게 쏠 수 있느냐. 화살누름판이 없다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있는 상태에서 흘러 내려온다면 이렇게 되면 파워가 약한 것은 당연한데, 이 상태에서 이렇게 하향사격을 한다면 계단위에서 쐈다고 하더라고요 두 계단위에서 쐈다고 한다면화살이 흘러내려 오는데 어떻게 쏘냐 그 말입니다.

사실상 발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요 ?
답 ☞ 불가능하다, 쐈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화살이 이만큼 내려오는 사이에 쏘겠냐? ‘느덜 물어보는 의도를 나는 이해를 못한다’ 그렇게 밖에 답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경찰들이 박홍우 전치 2주 상처에 가장 가까운 상황이 바로 불완전 장전 상태이고, 그 상태는 화살 누름판에 눌려져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헌데, 그 상태는 계단 위에서 하향 조정을 하게 되는 경우, 그냥 화살이 흘러 내려오니 발사가 불가능 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고영환씨가 지적하며 경찰들 보고 ‘니들의 의도가 뭐냐?’ 즉, 증거조작하는 수작아니냐?라고 물었다는 것)

아~ 그런의도셨습니까?
답 ☞ 그러니까(물어보는 취지를 모른다는 듯이) 재판장님, 이해하셨습니까? 인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1심 3차 공판기록문
여기에 한 가지 논리적 함정이 있다. 화살은 화살 누름판에 제대로 물려 있지 않아서 불완전하게 발사될 수 있다. 하지만 제대로 물렸다고 할지라도 양쪽 현에 고르게 힘이 받히지 않으면 역시 완벽하게 발사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이 사건에서 증인 A는 후자를, 증인 B는 전자를 설명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은 오직 증인 B 뿐이다. 두 가지의 원인은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고, 둘 중 하나만 성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오발의 조건 모두 석궁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화살을 쏘게 만드는 충분조건이다. 따라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고 싶다면, 검찰은 두 조건 중 하나에서만이라도, 불완전하게 발사된 화살이 피해자에게 경미한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없이 증명해야 한다.

3.

김 교수의 상해죄에 대한 유죄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논점이 바로 이것이지만, 영화 ‘부러진 화살’을 둘러싼 논란을 다룬 언론 기사 중 이 지점을 제대로 짚은 것은 대단히 드물다. 경향신문에 등장한 한 기사에서 핵심적인 쟁점을 요약하였는데, 그 중 한 문단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그 대목을 인용해보자.
김 전 교수는 항소심에서 석궁으로 박 부장판사를 맞힌 일이 없다고 했다. 영화에서 김 전 교수의 변호사는 ‘석궁이 제대로 맞을 경우 수십㎝ 두께의 돼지고기를 뚫고, 잘못 장전되면 발사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험을 통해 확인한다. 화살이 빗나가 벽을 맞히면 화살촉이 뭉툭해지고 화살이 부러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재판에서 전문가들은 “석궁의 시위를 당기는 2개 손가락에 균일하게 힘이 분배돼야 하지만 초보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하기 힘들다. 이렇게 장전하면 화살이 부러지거나 쪼개지고 심지어 사과도 관통하지 못할 정도로 위력이 떨어진다”는 의견을 냈다.
‘석궁 사건의 진실’ 쟁점②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공방(경향신문)
기사의 내용에 따르자면, 석궁에서 발사(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오발)된 화살이 ‘빗나가고’, ‘벽이나 그 외 단단한 곳’에 맞아서 ‘부러질’ 수도 있지만, 애초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고 그것이 박 판사에게 경미한 상처를 입힐 가능성도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그쪽이 훨씬 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훨씬 단순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 본인이 인정한 바와 같이, 그의 석궁 실력은 변변치 않았고 과녁을 제대로 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커스가 시작된다.

와이셔츠의 혈흔 감정을 육안으로만 했을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혈액의 흔적은 대단히 극미량일 경우에도 시약을 통해 검출되고, 섬유에 한 번 스며들면 잘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노모의 손빨래로 완벽하게 지워지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아무튼 속옷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었고, 사건을 통해 발생한 모든 혈흔은 단 한 사람의 혈액이라고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그 피의 주인이 누구일지는 구태여 물어볼 필요가 없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갔다 온 것은, 공격받은 ‘동물’이라면 일단 자신의 거점으로 피신한 후 다음의 행동을 취한다는 일반적인 행동의 논리상,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하다. 옷을 갈아입은 것은 ‘피해자’가 아닌 ‘판사’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약점과 피해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할 법한 행동이다. 즉 동물처럼 숨었다가 판사로 다시 등장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김 교수가 이 모든 사실관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많은 음모론이 등장하고, 음모론의 본질적인 속성상 그것은 한없이 팽창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한다. 경찰은 증거를 숨겼고, 검찰은 그 과정을 지휘하였으며, 병원의 의사들도 박 판사의 상처에 대해 제대로 된 증언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모든 배후에는 사법부, 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재판 테러범’들이 있다.

4.

이 거대한 서사에 동의할지 하지 않을지는 당신의 자유다. 내가 말하는 ‘당신’은 이 사건과 관련된 판사 및 검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처럼 무궁무진한 서서가 자아분열을 시작할 때, 그것을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검사가 해야 할 일이 아니다. 검사는 피고인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지, 피고인은 무죄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 중 석궁으로 인한 상해와 관련해서, 검사와 판사는 피고인과 변호인의 페이스에 서서히 말려들어갔다. 화살이 벽에 맞아 부러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부러진 화살’이 발사되어 상해를 입혔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할 판에, 화살이 오발되어 부러졌고 그 화살을 경찰이 숨겼고 등등으로 이어지는 구구절절한 ‘의혹’에 일일이 답변을 하느라 기력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내용들이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98%의 진실’을 형성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런 ‘의혹’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기 전에,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경험적 세계의 법칙 안에서 그와 같은 상해가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검찰 측에서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했느냐이다.

물론 검사와 판사는 그 증명이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피고인 본인의 진술도 있고, 증인들의 증언도 있고, 다 있다고 보고 그 논점에 대해서는 더 다룰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방심’이 이 재판을 개판으로 만든 주된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피고인의 유죄를 피고인이 납득하도록, 혹은 반박하지 못하도록 입증하지 않고,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설명한 후 유죄 판결을 내릴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이 사건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차 공판 이후 어느 지점에서 피고인과 변호인은 소송 전략을 조용히 변경한다. 의혹을 뿌리고 더 큰 소동을 피운다. 그 바탕에는 ‘발사된 석궁에 맞았다면 그 사람이 살아있을 수가 없다’는 상식 혹은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법원은 그 논점에 대한 반박의 가능성을 이미 지적해놓고도, 피고인이 슬쩍 그것을 밀어놓은 채 자신만의 쇼에 돌입하자, ‘증거신청을 기각하겠습니다’를 반복한다. 피고인과 변호인측이 바로 그 반응을 얻기 위해 그런 ‘의혹’들을 제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재판부는 해 보았을까?

법학을 공부할 때, 학생들은 논점을 하나 하나 나열한 후 그것들을 순차적으로 논박한다. 그렇게 답안지를 쓰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논박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끝없이 같은 구멍을 향해 미끄러지고, 이미 해결되었다고 생각한 문제에 대해서 연거푸 질문을 던진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에는 하나의 핵심이 있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못 박고 넘어갈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이 석궁 상해사건의 중심 질문은 이것이다.
화살은 발사된 후 부러졌는가, 아니면 부러진 채 발사되었는가?

SBS 그것이 알고싶다를 비롯하여 몇 번의 실험 결과, 석궁에서 발사된 화살은 돼지고기에 10센티미터 이상 푹 박혀든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그런 광경을 본 대중들은 ‘화살이 발사된 후 부러졌다’는 시나리오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숙달된 전문가의 손으로 발사된 것이고, 피의자 김명호 교수에 의해 발사된 것들의 경우는 다를 수 있지 않을까?

5.

한국 사법 역사상 가장 괴로운 사건 중 하나인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한 화장실 안에 두 사람의 용의자가 있었고, 두 사람 중 하나가 피해자를 칼로 찔러서 숨지게 했다. 하지만 검찰의 잘못된 수사와 기소로 인하여 두 사람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지금은 새로운 증거가 나와서 다시 절차가 진행중이지만, 아무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건 중 하나로 여태까지 기억되고 있다.

왜 두 사람 모두 무죄인가? 증언이 철저하게 불일치했고,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휘두르는 재현 과정에서, 검찰에서 지목한 주범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상처가 실제 시신에 남은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을 칼로 찔러서 살해했다’고 보기에는 합리적 의혹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더구나 검찰은 두 사람을 하나의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기소하지 않고, 한 사람은 주범으로 한 사람은 공범으로 기소했다. 그리하여 주범이 무죄가 되는 순간 종범도 무죄가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안타깝고 억울하며 분노할만한 사건이지만, 국가가 개인을 처벌하는 과정이 얼마나 치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우리는 범인들을 비난하는 것 만큼이나 제대로 된 수사와 재판을 하지 못해 그들을 풀어줘버린 검찰과 경찰을 비판해야 한다. 열 사람의 범인을 잡는 것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잡아넣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한 사람의 범인을 놓치지 않고 적법절차에 의해 처벌하는 것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김명호 교수를 상해죄로 처벌함에 있어서 피의자와 그의 재판을 바라보는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한 것의 책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형사 피의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자유, 혹은 재판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취하고자 한다. 오직 ‘올바른’ 것만 따지자면, 박흥우 판사는 석궁에 맞은 후 본인의 집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지 말았어야 한다. 그것은 동물적 본능에 의한 피신이면서, 판사로서 몸에 벤 품위의 유지를 위한 행동이었다.

마찬가지로, 김명호 교수가 수많은 논점 일탈과 가상의 시나리오를 들이대며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행동 역시, 즉각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피고인석에 서면 누구나 피흘리고 쫓기는 투우가 된다. 검사가 해야 할 일은, 그 피고인이 진정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면, 깨끗한 결말을 내주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대적 사법 체계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성과 논리와 법에 의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처벌을 받는 것 말이다.

6.

영화 ‘부러진 화살’의 개봉과 함께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우리 사회의 이성이 얼마나 뭉툭하기 짝이 없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진중권은 다시금 용감한 반대자의 목소리를 내면서 영화를 ’98% 진실’로 몰아붙이는 경향성에 일침을 가했다. 그 정신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박수가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김명호 교수를 단지 ‘정신이 이상한 사람’, ‘재판을 개판으로 만드는 주범’으로만 몰아붙이는 행동에 대해 지금까지도 사그러들지 않는 분노를 표하고 싶다. 어쩌다가 그는 이토록 야만적이고 상스러운 방식으로 이성과 합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재판 기록을 직접 보세요, 이 사람 완전히 사차원입니다. 이것이 진중권이 말하는 이성과 합리라면, 나는 그가 내미는 ‘빨간약’을 단호히 거절하겠다.

한편 ‘튀는 판사’로 잘 알려진 이정렬 판사의 대응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법원의 내부 규칙을 어겨가면서 김명호 교수의 복직 신청에 대한 민사소송의 결정 과정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원래 김 교수가 승소할 사건이었는데, 3월 2일 이후 접수된 성균관대의 반대 논거에 제대로 답변하지 않아서 패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폭로가 ‘김명호는 제 정신이 아니다’라는 식의 매도에 일조하는 것임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그는 ‘김 교수가 상처받을까봐 걱정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더 염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그 과정에서 ‘사립학교의 교원 임용에 대하여, 학문적 성취 외의 다른 주관적 요소가 판단의 대상이 되는지, 된다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남는 것은 법의 논리에 대한 설명과 납득이 아니라, ‘나는 사법 피해자다’와 ‘사법부야말로 억울하다’는 두 가지의 감정적 호소 뿐이다.

물론 그는, 모든 판사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판결문을 읽어보라. 하지만 판결문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법학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더불어 판결문 자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판결문을 보라’는 답변이 어떻게 대중들에게 이해되는지, 과연 법원의 구성원들은 모르고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는 몇 가지의 중요한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므로, 용기가 없는 자들의 이성은 뭉툭하기만 하다. 사건의 핵심, 논쟁의 심장으로 뚫고 들어갈 만큼 충분히 뾰족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지 못해 싸우는 검은 소처럼 김명호 교수는 좌충우돌했고, 어떤 이들은 그가 흘린 피를 보며 열광하는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다. 이 모든 광란의 서커스를 멈추라고 말하는 조커 역시 엉뚱한 무덤에 침을 뱉는다. 이 무질서한 사육제 속에서 우리는 훨씬 더 냉철하면서도 뜨겁게 이 사건을 주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