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8일 오전 10시 54분,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 막 진입하던 오금 방면 전동차 안에서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그로부터 불과 한달 전 벌어진 세월호 참사의 악몽이 잊히지도 않았거니와, 5월 2일 상왕십리역에서 벌어진 2호선 열차 추돌 사고의 충격이 생생하던 시점, 지하철에 불을 지른 범인은 71세 노인이었다. 범인 조 모 씨는 유흥업소를 운영하다가 손해배상 소송을 벌였는데, 재판 결과가 불리하게 나오자 ‘억울한 사연을 알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2003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의 범인 김 모 씨는, 범행 두 해 전 부터 갑작스럽게 걸린 병으로 장애인이 되었고, 신병을 비관하여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심정으로 지하철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국보 1호 숭례문 역시 그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재가 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던 채모 씨는 토지 문제로 H건설과 갈등을 빚다가 소송을 걸었고, 패했다. 비슷한 시기 아내와 이혼한 그는 곧 창경궁 문정전에 불을 질렀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2년 후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
이 사건들에는 일관된 패턴이 있다. 무엇보다, 나이 많은 남성이 있다. 지하철 3호선 방화 사건의 범인 조 모 씨는 71세,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김 모 씨는 당시 56세, 숭례문 방화 사건의 채 모 씨는 당시 70세였다. 그들은 사회, 세상, 혹은 시스템과 충돌하고 불화한다. 갑작스런 개인적 재난 상황에서, 그들은 일관되게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 지하철에 불을 질러 억울함을 알리겠다는 생각,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남들도 죽이고 나도 죽어야겠다는 발상,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매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개인 대 개인, 인간 대 인간으로 보자면, 우리는 이러한 무작위 증오 범죄를 용납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인 차원으로 시각을 확장해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상으로부터 당하고 쌓인 게 많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공공장소를 활보하는 ‘그들’에 대해, 우리는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2014년 6월 5일 <중앙일보>에 흥미로운 기사가 등장했다. ‘질풍노도의 노인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양선희 논설위원은 “요즘 노인 무섭다”는 말이 떠돈다며 운을 뗀다. 2011년을 기준으로 노인 범죄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폭력 사건이다. 전체 범죄 중 무려 32.5퍼센트를 차지한다. 지난 10년간, 노인들이 저지른 강도와 강간 사건은 4배, 방화는 2.7배, 살인은 2배 증가했다. 요약하자면, “노인 1명이 늘면 범죄 3건이 느는 꼴이다. 게다가 평생 전과 없이 살다가 60, 70대에 처음 범죄를 저지르는 초범은 5명 중 3명꼴이다.”
노인이 늘어나는 사회 속에서, 그 노인들이 강력 범죄를 저지르는 비중 역시 커지고 있다. 이것은 다른 나라의 노인 범죄와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노령화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주장을 펴는 이들은 대체로, 젊은 남성이 늙은 남성으로 대체되면서 그에 따라 강력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을 논거로 삼곤 한다. 몸이 지치면서 영혼도 유순해지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노인들은 반대다. 은퇴 연령을 넘긴 노인들이 사람을 때리고 칼을 휘두르며 성범죄를 저지르고 지하철에 불을 지른다. 나름의 방식으로 조사를 해본 양선희 논설위원은 이 현상에 대한 선행 연구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한다.
이렇듯 폭주하는 비행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는 가운데, 얄궂게도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노인 친화적’인 곳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일단 호칭 문제부터가 그렇다. 노인들은 언제부턴가 ‘어르신’의 위치를 획득했다. 한국어의 크나큰 단점 중 하나는 발화자와 수용자 사이의 사회적 위계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는 2인칭 호격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향해 ‘야’, ‘너’ 같은 표현을 쓰면 십중팔구 좋지 않은 대답이 돌아온다. 애매하면 ‘저기요’나 ‘사장님’ 정도로 통칭하게 마련인데, 이 혼란 속에서 한국의 고령층, 특히 남성들은 ‘어르신’이라는 극존칭 대명사를 쟁취해냈다. 얼마 전 난동을 부리는 노인을 향해 사복경찰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어르신, 진정하시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어르신이라는 표현이 갖는 상대적 비중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극존칭이지만, 실제로는 별볼일없는 노인들에게 돌아가는 호칭이 바로 어르신이기 때문이다. 지하철에서 요금을 안 내고 승차하는 어르신,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비켜주기를 바라며 헛기침을 하는 어르신, 담배 피우는 젊은 여성과 시비가 붙은 어르신 등,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이렇듯 우리가 일상 속에서 부대끼는 어르신들을 향해 짜증과 분노를 느끼는 동안,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어떤 이들은 멘토나 스승, 혹은 원로의 자리에 오른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찬조 연설에 나섰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의 찬조 연설을 보고 감동한 젊은이들의 반응은 사실 대부분 비슷했다. 그 나이대의 노인이 이성적인 태도로 합리적인 말을 조곤조곤 한다는 사실 자체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대중교통에서 맞닥뜨리는 그 막무가내 어르신과 다른 모습을 봤다고 흥분했다. 드디어 우리가 존경할 수 있을 만한 어른을 만났다면서.
이듬해부터 서점가에 불어닥친 인문학 열풍은 어떤 면에서 ‘어르신의 귀환’이기도 했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한때의 차세대 사상가 아즈마 히로키마저도 이제는 중견 취급을 받는다. 사사키 아타루나 히로세 준, 후쿠시마 료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이 인문서의 주요 저자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인문학 열풍은, 강신주를 빼고 나면, 주로 그보다 나이대가 더 높은 저자들의 것이었다. 서울대의 김난도 교수나 법륜 스님 등, 해당 직업군에서는 한창때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이미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경계에 선 사람들이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 불문학자 황현산이나 문학평론가 도정일 같은 원로 인문학자들이 그동안 쟁여둔 원고를 꺼내 들고 나섰다.
이미 학문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높은 성취를 이룬 이 원로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또래의 어르신과 지하철 등 대중교통 수단에서 부대낄 일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반면 그들의 책을 손에 든 젊은이들은 출퇴근 시간의 번잡함을 견디며, 어르신과 함께 고단한 하루를 여닫고 있다. 어떤 노인의 책을 읽으며, 다른 노인을 가까스로 견디는 젊은이들은, 언제 어디서 불길이 치솟을지 모르는 지하철을 탄다.
이것은 대단히 부조리한 일이다. 일제강점기 때 교육을 받은 1930년대생, 4.19세대, 386세대 등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을 나이대로 묶고 이전 세대와 차별화하며 스스로의 이권을 지켜나갔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주로 대학생들을 향해, 멘토가 되어주고 꾸짖는다. 하지만 대학교 입학 연도를 중심으로한 세대론의 구조 속에서, 재산이 없고 대학에 가지 못한 사람들의 자리는 애초에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잊힌 채 제대로 된 이름조차 가져본 적 없는 그들이 오늘날 어르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엘리트 계층에 속하지 못한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아저씨가 되었고, 나이를 먹고 나니 어르신으로 불리며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엘리트들은 동년배 대중들의 존재를 내팽개쳤다. 그들을 설득하고 계몽해 민주 사회의 시민으로 재구성하는 대신, 그저 선거철이 다가오면 지역 개발 이슈를 던지거나 지역 감정을 자극하는 식으로 표를 긁어냈을 뿐이다. 그렇게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한평생 먹고사는 일에 급급하다가 나이를 먹은 어르신들, 새로운 세상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한 그들은, 가슴속에 방향 없는 울분을 가득 쌓은 채 지하철에 타고 버스에 오르며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어르신들, 노인들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기 전에, 멘토들이 먼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