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9

[판결문]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2013헌사907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

통합진보당 해산 청구 사건

(2013헌다1 통합진보당 해산, 2013헌사907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

선고

헌법재판소는 2014년 12월 19일 재판관 8(인용) : 1(기각)의 의견으로, 피청구인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그 소속 국회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한다는 결정을 선고하였다.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는 등 활동을 한 것은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고, 이러한 피청구인의 실질적 해악을 끼치는 구체적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 외에 다른 대안이 없으며,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비례의 원칙에도 어긋나지 않고, 위헌정당의 해산을 명하는 비상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으므로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위헌정당해산 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당해산의 요건은 엄격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하는데,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고, 피청구인의 강령 등에 나타난 진보적 민주주의 등 피청구인의 목적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으며, 경기도당 주최 행사에서 나타난 내란 관련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만 그 활동을 피청구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 없고 그 밖의 피청구인의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재판관 김이수의 반대의견이 있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청구인이 신청한 정당활동정지가처분신청은 기각하였다.

2014. 12. 19.

헌법재판소 공보관실

사건의 개요 및 심판의 대상

사건의 개요

- 청구인은 2013. 11. 5. 피청구인의 목적과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피청구인의 해산 및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구하는 이 사건 심판을 청구하였다.

심판의 대상

-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을 선고할 것인지 여부와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의원직 상실을 선고할 것인지 여부

※ 피청구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과의 관련성이 인정되는 범위에서 판단의 자료로 삼을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의 목적이나 활동 자체가 이 사건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결정이유의 요지

청구의 적법성 - 적법

- 대통령이 직무상 해외 순방 중인 경우에는 국무총리가 그 직무를 대행할 수 있으므로,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이 사건 정당해산심판 청구서 제출안이 의결되었다고 하여 그 의결이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

- 국무회의에 제출되는 의안은 긴급한 의안이 아닌 한 차관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하나, 의안의 긴급성에 관한 판단은 정부의 재량이므로,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 등이 관련된 내란 관련 사건이 발생한 상황에서 제출된 이 사건 정당해산심판청구에 대한 의안이 긴급한 의안에 해당한다고 본 정부의 판단에 재량의 일탈이나 남용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정당해산심판의 사유

○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

정당해산심판제도는 정당 존립의 특권 특히 정부의 비판자로서 야당의 존립과 활동을 특별히 보장하고자 하는 헌법제정자의 규범적 의지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제도로 인해서 정당 활동의 자유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민주적 기본질서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적 한계 역시 설정되어 있다.

○ 정당해산심판의 사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 중 어느 하나라도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어야 한다.

헌법 제8조 제4항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개인의 자율적 이성을 신뢰하고 모든 정치적 견해들이 상대적 진리성과 합리성을 지닌다고 전제하는 다원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과 자유와 평등을 기본원리로 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정치적 질서를 말한다.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지 않는 한 정당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념적 지향을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단순한 위반이나 저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강제적 정당해산은 핵심적인 정치적 기본권인 정당 활동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 제한이므로 헌법 제37조 제2항이 규정하고 있는 비례의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 위배

○ 피청구인의 목적

정당의 강령은 그 자체로 다의적이고 추상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피청구인이 지도적 이념으로 내세우는 진보적 민주주의 역시 그 자체로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이른바 자주파에 의해 피청구인 강령에 도입되었다.

자주파는 이른바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 NL) 계열로 우리 사회를 미 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 반(半)봉건사회 또는 반(半)자본주의사회로 이해하고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파악하고 계급적 지배 체제의 극복을 중시했던 민중민주(People‘s Democracy, PD) 계열 또는 평등파와 구별된다.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연합의 주요 구성원 및 이들과 이념적 지향점을 같이하는 당원 등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자주파에 속하고 그들의 방침대로 당직자 결정 등 주요 사안을 결정하며 당을 주도하여 왔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과거 민혁당 및 영남위원회, 실천연대, 일심회, 한청 등에서 자주ㆍ민주ㆍ통일 노선을 제시하면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거나 북한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였다. 이들은 북한 관련 문제에서는 맹목적으로 북한을 지지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무리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이석기가 주도한 내란 관련 사건에도 다수 참석하였고 이 사건 관련자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나라를 미국과 외세에 예속된 천민적 자본주의 또는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인식하고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자본가 계급의 정권으로서 자본가 내지 특권적 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민중을 착취 수탈하고 민중의 주권을 실질적으로 강탈한 구조적 불평등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민중이 주권을 가지는 민중민주주의 사회로 전환하여야 하는데 민족해방문제가 선결과제이므로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로 안정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과도기 정부로서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설정하였다. 한편,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연방제 통일을 추구하고 있는데, 낮은 단계 연방제 통일 이후 추진할 통일국가의 모습은 과도기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거친 사회주의 체제이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 사회가 특권적 지배계급이 주권을 행사하는 거꾸로 된 사회라는 인식 아래 대중투쟁이 전민항쟁으로 발전하고 저항권적 상황이 전개될 경우 무력행사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헌법제정에 의한 새로운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여 집권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이석기 등의 내란 관련 사건으로 현실로 확인되었다.

○ 피청구인의 활동

이석기를 비롯한 내란 관련 회합 참가자들은 경기동부연합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고, 당시 정세를 전쟁 국면으로 인식하고 이석기의 주도 아래 전쟁 발발 시 북한에 동조하여 대한민국 내 국가기간시설의 파괴, 무기 제조 및 탈취, 통신 교란 등 폭력 수단을 실행하고자 회합을 개최하였다.

내란 관련 회합의 개최 경위, 참석자들의 피청구인 당내 지위 및 역할, 이 회합이 피청구인의 핵심 주도세력에 의하여 개최된 점, 회합을 주도한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의 수장으로서의 지위 및 이 사건에 대한 피청구인의 전당적 옹호 및 비호 태도 등을 종합하면, 이 회합은 피청구인의 활동으로 귀속된다.

그 밖에 비례대표 부정경선,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 및 관악을 지역구 여론 조작 사건 등은 피청구인 당원들이 토론과 표결에 기반하지 않고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으로 지지하는 후보의 당선을 관철시키려고 한 것으로서 선거제도를 형해화하여 민주주의 원리를 훼손하는 것이다.

○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이를 기초로 통일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북한을 추종하고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과 거의 모든 점에서 전체적으로 같거나 매우 유사하다.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민중민주주의 변혁론에 따라 혁명을 추구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옹호하고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도 게양하지 않는 등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석기 등 내란 관련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사정과 피청구인 주도세력이 피청구인을 장악하고 있음에 비추어 그들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의 목적과 활동으로 귀속되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보면,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은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최종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 피청구인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조선노동당이 제시하는 정치 노선을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당의 특정한 계급노선과 결부된 인민민주주의 독재방식과 수령론에 기초한 1인 독재를 통치의 본질로 추구하는 점에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피청구인은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민항쟁이나 저항권 등 폭력을 행사하여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모든 폭력적ㆍ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다수를 존중하면서도 소수를 배려하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기본원리로 하는 민주적 기본질서에 정면으로 저촉된다.

내란 관련 사건,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 및 관악을 지역구 여론 조작 사건 등 피청구인의 활동들은 내용적 측면에서는 국가의 존립, 의회제도, 법치주의 및 선거제도 등을 부정하는 것이고, 수단이나 성격의 측면에서는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ㆍ위계 등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민주주의 이념에 반하는 것이다.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숨은 목적을 가지고 내란을 논의하는 회합을 개최하고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이나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을 일으키는 등 활동을 하여 왔는데 이러한 활동은 유사상황에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피청구인 주도세력의 북한 추종성에 비추어 피청구인의 여러 활동들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성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란 관련 사건에서 피청구인 구성원들이 북한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의 존립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것은 피청구인의 진정한 목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서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넘어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구체적 위험성을 배가한 것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피청구인의 위와 같은 진정한 목적이나 그에 기초한 활동은 우리 사회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실질적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구체적 위험성을 초래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 비례의 원칙에 위배되는지 여부

피청구인은 적극적이고 계획적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공격하여 그 근간을 훼손하고 이를 폐지하고자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초래되는 위험성을 시급히 제거하기 위해 정당해산의 필요성이 인정된다.

대남혁명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려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하여야 한다.

위법행위가 확인된 개개인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당 자체의 위헌성이 제거되지는 않으며,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언제든 그들의 위헌적 목적을 정당의 정책으로 내걸어 곧바로 실현할 수 있는 상황에 있다. 따라서 합법정당을 가장하여 국민의 세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정당보조금을 받아 활동하면서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려는 피청구인의 고유한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당해산결정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정당해산결정으로 민주적 기본질서를 수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법익은 정당해산결정으로 초래되는 피청구인의 정당활동 자유의 근본적 제약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일부 제한이라는 불이익에 비하여 월등히 크고 중요하다.

결국,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가해지는 위험성을 실효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부득이한 해법으로서 헌법 제8조 제4항에 따라 정당화되므로 비례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피청구인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 여부 - 상실

○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과 정당 기속성

국회의원은 국민 전체의 대표자로서 활동하는 한편, 소속 정당의 이념을 대변하는 정당의 대표자로서도 활동한다. 공직선거법 제192조 제4항은 비례대표 국회의원에 대하여 소속 정당의 해산 등 이외의 사유로 당적을 이탈하는 경우 퇴직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의 의미는 정당이 자진 해산하는 경우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퇴직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과 정당기속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적절히 조화시켜 규율하고 있다.

○ 정당해산심판제도의 본질적 효력과 의원직 상실 여부

엄격한 요건 아래 위헌정당으로 판단하여 정당 해산을 명하는 것은 헌법을 수호한다는 방어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러한 비상상황에서는 국회의원의 국민 대표성은 부득이 희생될 수밖에 없다.

해산되는 위헌정당 소속 국회의원이 의원직을 유지한다면 위헌적인 정치이념을 정치적 의사 형성과정에서 대변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활동을 허용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그 정당이 계속 존속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오므로, 해산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을 상실시키지 않는 것은 결국 정당해산제도가 가지는 헌법 수호 기능이나 방어적 민주주의 이념과 원리에 어긋나고 정당해산결정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헌법재판소의 해산결정으로 해산되는 정당 소속 국회의원의 의원직 상실은 위헌정당해산 제도의 본질로부터 인정되는 기본적 효력이다.

재판관 김이수의 반대의견의 요지

※ 이 사건 심판청구의 적법성, 그리고 정당해산심판제도의 의의와 정당해산심판의 사유에 대하여는 법정의견과 의견을 같이함.

○ 정당해산요건의 엄격한 해석, 적용의 요구

정당해산요건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그 문언적 의미를 제한적으로 이해하여야 하고,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의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자료 내지 근거를 선별함에 있어서는 당해 정당과의 관련성을 정밀하게 살펴야 한다.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의 판단자료는 대부분 표현행위이므로 그 의미는 가능한 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수용 가능한 해석 방법론에 의하여 확정되어야 한다. 또 정당해산의 요건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는 어떤 논리적 오류나 비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 피청구인에게 ‘은폐된 목적’이 있다는 점 자체가 엄격하게 증명되어야 할 사항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청구인의 논증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피청구인은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 당원의 수만 3만 여명에 이르는 정당인데, 그 대다수 구성원의 정치적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논증하는 과정에서 구성원 중 극히 일부의 지향을 피청구인 전체의 정견으로 간주하여서는 안 된다. 피청구인의 일부 구성원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머지 구성원도 모두 그러할 것이라는 가정은 부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을 전체에 부당하게 적용하는 것으로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자주파가 주축이 된 피청구인의 목적이 1차적으로 폭력에 의하여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최종적으로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있다는 법정의견의 판단이 정당해산심판 사유를 엄격하게 해석, 적용한 결과인지 의문이다.

○ 피청구인의 목적 -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음

피청구인의 강령이나 이를 구체화하는 문헌들을 종합해 볼 때,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민중이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인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피청구인의 선언은, 일하는 사람, 민중에 해당하는 계급과 계층의 이익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극복해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하겠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피청구인의 강령상 ‘진보적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른바 진보적 정치세력들에 의하여 수십 년에 걸쳐 주장되고 형성된 여러 논리들과 정책들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조합한 것으로서 실질적으로 광의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또 법정의견이 보는 것처럼 피청구인이 북한식 사회주의 추구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진보적 민주주의’를 도입하였다고 볼 수 있는 증거도 없다.

한편 자주파의 대북정책이나 입장이 우리 사회의 다수 인식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고 자주파가 친북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주파 전체가 북한을 무조건 추종하고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다. 민주노동당에서 피청구인에 이르는 분당과 창당 및 재분당 과정을 통하여 피청구인은 민주노동당보다 인적으로 축소된 상태이고 자주파나 이에 우호적인 사람들의 비중이 커졌다고 볼 수 있으나, 민주노동당 구성원 가운데 종북 성향을 가진 사람만이 피청구인에 남았다고 볼 수도 없다.

청구인은 민혁당 잔존세력이 피청구인을 장악하였다고 주장하나, 피청구인 구성원 가운데 민혁당 조직원이나 하부 조직원 또는 관계자였던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직접 유죄판결을 받았거나 판결에서 조직원으로 언급된 단지 몇 명에 불과하고, 경기동부연합이 과거 민혁당 또는 민혁당 조직원 등에 의하여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나,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부산울산경남연합이 어떤 이념을 공유하거나 지지하여, 통일적으로, 단결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점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피청구인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구조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구조적이고 급진적인 변혁을 추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확립된 질서에 도전한다는 것만으로는 민주 국가에서 금지되는 행위가 되지 않는다. 피청구인이 표방하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사회’나 외세로부터 자유로운 ‘자주적 정부’는 오래된 정치철학적 전통 속에 있는 주장으로 각국의 다양한 진보정당들이 같은 취지의 주장을 개진하고 있으며 피청구인이 독창적으로 구성하여 제기한 것이 아니다. 피청구인이 현존하는 정치ㆍ경제 질서에 부정적 의사를 표시하고, 선거를 통한 집권 이외에 예외적으로 헌법질서가 중대하게 침해받는 경우에는 저항권에 의한 집권이 가능하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사정만으로, 폭력적 수단이나 민주주의 원칙에 반하는 수단으로 변혁을 추구하거나 민주적 기본질서의 전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었다고 볼 수 없다.

피청구인이 사회주의적 요소를 내포하는 강령을 내세우고 있고, 북한도 적어도 대외적ㆍ공식적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내세우고 있으므로, 피청구인의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일정 부분 유사한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피청구인이 북한을 추종하기 때문에 위와 같은 유사성이 나타났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해석이다. 정부와 권력에 대한 비판적 정신과 시각이 북한과의 연계나 북한에 대한 동조라는 막연한 혐의로 좌절되는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점만으로 북한 추종성이 곧바로 증명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 피청구인의 활동 -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않음

피청구인의 지역조직인 경기도당이 주최한 2013. 5. 10. 및 5. 12. 모임에서 이루어진 이석기 등의 발언은, 전쟁이 벌어졌을 때 남의 자주세력과 북의 자주세력이 힘을 합쳐서 적인 미국과 싸운다거나 대한민국의 국가기간시설을 공격한다는 발상을 담고 있어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 어긋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임을 되풀이하거나 구체적 실행으로 나아갈 개연성 등을 고려하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 그러나 피청구인의 지역조직인 경기도당 행사에서 이루어진 위와 같은 활동은 비핵평화체제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하는 피청구인 전체의 기본노선에 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피청구인이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그로부터 기본노선에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므로 이를 피청구인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 없다. 즉, 이석기 등의 그와 같은 발언은 피청구인의 기본노선과 현저하게 다르고, 이 사건 모임 참석자들이 피청구인 전체를 장악하였다고 할 수 없으며, 나아가 피청구인이 이 사건 모임 또는 모임에서의 발언을 승인하였다고 볼 수도 없으므로, 이 사건 모임이나 그 모임에서 이루어진 구체적 활동으로 인한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의 문제를 피청구인 정당 전체의 책임으로 볼 수는 없다.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이나 중앙위원회 폭력 사건, 야권단일화 여론조작 사건과 같은 피청구인 일부 구성원의 개별 활동이 당내 민주주의를 훼손하거나, 민주적 의사결정원리를 존중하지 않았거나,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피청구인 전체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 계획적, 적극적, 지속적으로 위와 같은 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활동들을 제외하면 피청구인은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정당활동을 영위하여 온 점, 그간 우리 사회가 산발적인 선거부정 행위나 정당 관계자의 범죄에 대하여는 행위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당해 정당의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해결하여 온 점 등을 고려하면, 위와 같은 활동들이 피청구인의 정치적 기본노선에 입각한 것이거나 거꾸로 피청구인의 기본노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구체적 위험이 있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

또한 피청구인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목적의 추구를 위하여 적극적, 의도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를 기용하였다고 볼 수도 없다.

결국 피청구인의 활동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지 아니한다.

○ 비례원칙 충족 여부 - 해산의 필요성 인정되지 않음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그것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사회적 이익이 통상적인 관념에 비해 크지 않을 수 있다. 그 반면 피청구인의 해산결정으로 인해 초래될 사회적 불이익은 민주 사회의 순기능에 장애를 줄 만큼 크다. 강제적 정당해산은 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정당의 자유 및 정치적 결사의 자유에 대한 중대한 제약을 초래한다.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우리 사회가 추구하고 보호해야 할 사상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특히 소수자들의 정치적 자유를 심각하게 위축시킬 수 있다. 나아가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결정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통합과 안정에도 심각한 영향을 준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피청구인이 한국 사회에 제시했던 여러 진보적 정책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하게 만든 부분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고, 이는 피청구인에 소속된 대다수 당원들이 이 당의 당원이 되고자 결심하도록 만든 큰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석기 등 일부의 당원들이 보여준 일탈 행위를 이유로 피청구인을 해산해 버린다면, 이 노선과 활동을 지지해 온 대다수 일반 당원들(피청구인 전체 당원 수는 10만여 명에 이른다)의 정치적 뜻을 왜곡하고 그들을 위헌적인 정당의 당원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에게 사회적 낙인 효과를 가하게 될 것이다. 이는 피청구인 자체를 반국가단체로, 그리고 당원 전체를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피청구인을 지지한 국민을 반국가단체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과거 독일에서 공산당 해산심판이 청구되고 해산 결정이 이루어진 후 다시 독일공산당이 재건되기까지, 12만 5천여 명에 이르는 공산당 관련자가 수사를 받았고, 그 중 6천~7천 명이 형사처벌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직장에서 해고되는 등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는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에 비추어 보면, 이 결정으로 우리 사회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피청구인 소속 당원들(이석기 등 내란 관련 사건의 관련자들) 중 북한의 대남혁명론에 동조하여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전복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형법이나 국가보안법 등을 통해 그 세력을 피청구인의 정책결정과정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배제할 수 있다. 그 세력 중 일부가 국회의원이고 그 지위를 활용하여 국가질서에 대한 공격적인 시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다면, 국회는 이를 스스로 밝혀내어 자율적인 절차를 통해 그들을 제명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헌법 제64조 제3항).

정당해산제도는 비록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최후적이고 보충적인 용도로 활용되어야 하므로 정당해산 여부는 원칙적으로 정치적 공론(선거 등)의 장에 맡기는 것이 적절하며, 2014. 6. 4. 치러진 제6회 지방선거 결과(광역 비례대표 정당득표율 4.3%)와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정치적 공론 영역에서 피청구인에 대한 실효적인 비판과 논박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위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피청구인에 대한 해산은 정당해산의 정당화사유로서의 비례원칙 준수라는 헌법상 요청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이 사건 심판청구는 기각되어야 한다. 이는 피청구인의 문제점들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피청구인을 옹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오랜 세월 피땀 흘려 어렵게 성취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성과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것이고, 또한 대한민국 헌정질서에 대한 의연한 신뢰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며, 헌법정신의 본질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2014-12-11

폭발물, 터지지 않은

12월 10일 밤에는 '폭탄 테러'로 보도가 되었지만, 다음날인 11일이 되자 "폭죽용 고체연료" 같은 창의적 표현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 고등학생이 다양한 인화성 물질을 모아 도시락통에 넣어, 전북 익산 신동성당 예배실에서 진행중이던 '전국 순회 토크 문화 콘서트' 현장에서, 불을 붙인 후 투척한 사건에 대해 지금 우리는 이야기하고 있다.

분명 사고 당시에는 '폭탄 테러'였는데, 어느새 "폭죽용 고체연료" 투척 사건으로, 슬쩍 표현이 바뀌어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 사안의 중요성을 은폐하고, 명백한 폭탄 테러를 마치 불장난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효과가 발생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하지만 저러한 보도 경향 이면에는, '폭발물'에 대한 대법원의 납득하기 어려운 판례가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법원 2012.4.26, 선고, 2011도17254판결을 살펴보자. 피고인은 "①유리꽃병 내부에 휴대용 부탄가스통을 넣고 ②유리꽃병과 부탄가스 용기 사이의 두께 약 1㎝의 공간에 폭죽에서 분리한 화약을 채운 후, ③발열체인 니크롬선이 연결된 전선을 유리꽃병 안의 화약에 꽂은 다음 ④전선을 유리꽃병 밖으로 연결하여 타이머와 배터리를 연결하고, ⑤유리꽃병의 입구를 청테이프로 막은 상태에서, ⑥타이머에 설정된 시각에 배터리의 전원이 연결되면 발열체의 발열에 의해 화약이 점화되는 구조"(원문자는 인용자)의 물건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집어넣었다.

①에서 ⑥까지의 과정을 쭉 읽어보자. 이건 누가 봐도 시한폭탄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하지만 피고인은 재주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들어 있던 것은 연소될 당시 ‘펑’하는 소리가 나면서 물품보관함의 열쇠구멍으로 잠시 불꽃과 연기가 나왔으나, 물품보관함 자체는 내부에 그을음이 생겼을 뿐 찌그러지거나 손상되지 않았고 그 내부에 압력이 가해진 흔적도 식별할 수 없"는, 시시한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제대로 터지지도 않고 피식~ 했다는 뜻이다.

자, 이런 걸 만들고 강남고속터미널 물품보관함에 설치까지 한 이 행위는, 형법상 무슨 범죄에 해당하는가? 두 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다.

제119조(폭발물사용) ①폭발물을 사용하여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을 해하거나 기타 공안을 문란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제172조(폭발성물건파열) ①보일러, 고압가스 기타 폭발성있는 물건을 파열시켜 사람의 생명, 신체 또는 재산에 대하여 위험을 발생시킨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1심은 그 '물건'을 형법 제119조 제1항의 "폭발물"로 보지 않고, 대신 제172조 제1항의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보았다. 검찰은 항소하였고,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은 원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유리꽃병 속에 부탄가스 통을 넣고 그 사이의 공간에 화약을 채워넣은 후 제 나름대로 도화선이라고 할 것도 꽂아넣고 시한장치까지 부착했는데도, 그것은 "폭발물"이 아닌 "폭발성있는 물건"이라고 본 것이다. 제119조 제3항은 "③전 2항의 미수범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폭발물을 만들어 인명을 살상하는 행위의 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음에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시 이유는 이런 것이다. 형법 제172조가 이미 있기 때문에, 제119조에 해당하는 "폭발물"은 아주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하며, "떠한 물건이 형법 제119조에 규정된 폭발물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그 폭발작용 자체의 위력이 공안을 문란하게 할 수 있는 정도로 고도의 폭발성능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엄격하게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강조는 인용자)

이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폭발물'과 '폭발성있는 물질'의 구분은 폭발력, 즉 "폭발성능"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폭발시켜서 일부러 사람과 재산을 손상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냐, 아니면 통상적인 목적에 따라 사용되는 인화성 물질이냐에 따라 그 구분선이 그어져야 마땅하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자동차의 연료통에 담배꽁초를 일부러 집어넣는다고 가정해보자. 휘발유는 만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경우, 한꺼번에 수십 리터의 휘발유가 폭발하므로, "폭발성능"은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나 자동차의 연료통 그 자체는 폭발물이 아니다. 그것은 폭발할 수도 있는 물건이다. 형법 제172조 제1항에서 "보일러, 고압가스"로 '폭발성있는 물건'의 예시를 보여준 것은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어지간한 기름 보일러나 가스 보일러가 폭발하면, 어설픈 사제폭탄을 가볍게 뛰어넘는 폭발성능을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보일러나 고압가스 등도 그 자체가 폭발물인 것은 아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사제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말해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으로 바라보는 대법원의 판례는, 대단히 위험하다. 사제 폭탄을 만들고 테러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만으로는 형법 제119조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론이 불러오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자.

첫째. (<마스터 키튼> 같은 몇몇 귀중한 참고 문헌에 따르면) 전문적인 사제폭탄 제조자라고 해도 불발탄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경우, 그가 만든 폭탄은, "고도의 폭발성능"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폭발물'이 아니게 되는가?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었느냐가 '폭발물'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폭탄 테러범의 터지지 않은 폭탄도 형법 제119조에 의해 처벌 가능해진다.

둘째. 이러한 법 해석론은 총포·도검·화약류등단속법의 제2조 제3항에서 다음과 같이 "화약류"를 규정한 것과도 매끄럽게 상응하지 못한다. 우리의 법 체계는 이렇게 엄격하게 화약류를 규제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모으거나, 만들어낸 폭발물을 왜 '폭발물'로 규정하고 처벌하지 않는가?

     1. 화약

        가. 흑색화약 또는 질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나. 무연화약 또는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화약
        다. 그 밖에 "가"목 및 "나"목의 화약과 비슷한 추진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2. 폭약

        가. 뇌홍·아지화연·로단염류·테트라센등의 기폭제
        나. 초안폭약·염소산칼리폭약·카리트 그 밖의 질산염·염소산염 또는 과염소산염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다. 니트로글리세린·니트로글리콜 그 밖의 폭약으로 사용되는 질산에스테르
        라. 다이나마이트 그 밖의 질산에스테르를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마. 폭발에 쓰이는 트리니트로벤젠·트리니트로토루엔·피크린산·트리니트로클로로벤젠·테트릴·트리니트로아니졸·핵사니트로디페닐아민·트리메틸렌트리니트라민·펜트리트 및 니트로기 3 이상이 들어 있는 그 밖의 니트로화합물과 이들을 주성분으로 하는 폭약
        바. 액체산소폭약 그 밖의 액체폭약
        사. 그밖의 "가"목 내지 "바"목의 폭약과 비슷한 파괴적 폭발에 사용될 수 있는 것으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것

    3. 화공품

        가. 공업용뇌관·전기뇌관·총용뇌관 및 신호뇌관
        나. 실탄(실탄;산탄을 포함한다. 이하 같다) 및 공포탄(공포탄)
        다. 신관 및 화관
        라. 도폭선·미진동파쇄기·도화선 및 전기도화선
        마. 신호염관·신호화전 및 신호용화공품
        바. 시동약(시동약)
        사. 꽃불 그 밖의 화약이나 폭약을 사용한 화공품
        아. 장난감용 꽃불등으로서 행정자치부령이 정하는 것
        자. 자동차 긴급신호용 불꽃신호기
        차. 자동차에어백용 가스발생기

2012년에 나온 대법원의 이 판결은 매우 실망스럽고 또 우려스럽다. 2001년 9월 11일 이후, 전 세계의 양식 있는 시민들은 테러의 공포와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 미국에서 누군가가 압력밥솥을 이용해 사제폭탄을 만들어 보스톤 마라톤 대회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보라. 그때도 일부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그럼 그건 '폭발물'이 아니라 '폭발성있는 물건'인가? 멀쩡히 테러범에 의해 제작되고 현장에 배치되었음에도?

하지만 일부러 폭탄을 만드는 자를 강하게 처벌하겠다는 입법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법문 해석상 그 의도는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대법원은 '폭탄은 터져야 폭탄'이라는, 법적 논리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상식에도 어긋나는 판례를 내놓고 있다.

폭발물은 터뜨리겠다는 의도를 지니고 제작된 물건이다. 그래야 한다. 제대로 터졌냐 안 터졌냐는 '폭발물'을 판단하는 기준일 수 없다. 그래야 이른바 '백색 테러'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게 될 '적색 테러'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가 안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책임 있는 수사와, 검찰의 뚝심 있는 공소가 이루어지기를 강력하게 요구한다.

추가) 언론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12일 오군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과 폭발성물건파열치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공범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일 예정"이라고 한다. 옳지 않은 판례가 미치는 영향이 바로 이런 것이다.

2014-12-09

[북리뷰]20세기 말에 예견한 21세기 모습

문명의 충돌
새뮤얼 헌팅턴 지음·이희재 옮김·김영사·1만7900원

당대에 아무리 큰 논란을 낳은 책일지라도 그 책의 예견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제대로 기억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어떤 작품을 ‘발견’ 혹은 ‘재발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대의 어깨 위에 온전히 놓이는 짐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2014년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문명의 충돌>을 다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게 될 21세기의 모습을 20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냉철하게 예측해냈기 때문이다.

‘문명’들이 ‘충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개별적인 ‘문명’들을 묶어주던 ‘이념’의 틀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세계 정치는 문화와 문명의 괘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전파력이 크며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갈등은 사회적 계급, 빈부, 경제적으로 정의되는 집단 사이에서 나타나지 않고 상이한 문화적 배경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것이다.”(21쪽) 헌팅턴은 서구,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이슬람, 중화, 힌두, 그리스정교, 불교, 일본을 그러한 ‘문명’들로 보았다. 1990년대까지는 서구와 비서구, 즉 공산권이 대립하였지만, 이제는 다른 세상이 왔다는 것이었다.

그 중 이슬람 문명에 대한 평가와 예측이 당시 불러일으켜진 논란의 핵심이었다. “이슬람의 경계선은 피에 젖어 있으며 그 내부 역시 그렇다”(350쪽)는 헌팅턴의 말은 <포린 어페어스>에 논문의 형태로 처음 실렸을 때부터 극단적인 반발과 호응을 동시에 불러왔던 것이다. 199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후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를 향해 2대의 여객기가 날아오면서 헌팅턴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이른바 ‘이슬람 국가’로 스스로를 표방하는 ISIL이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임스 폴리를 참수하면서 ‘문명의 충돌’ 이론은 구태여 반박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상식’의 범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미국은 ‘이슬람 국가’와 싸우고, 중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며, 우크라이나는 유럽에 가까운 서쪽과 러시아에 가까운 동쪽으로 사실상 양분된 상태다. ‘문명의 충돌’ 그 자체인 셈이다.

하지만 이 책의 진면모는 단지 문명들끼리의 충돌을 예견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를 날카롭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와 소련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문명’의 관점에서 보자면 전혀 다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188쪽) 반면 오늘날의 러시아는 ‘전통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성애자에 대한 폭력배들의 린치를 경찰이 묵인하고 방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문명’끼리 충돌하는 세계는 그 ‘문명’ 속의 야만이 ‘이념’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문명의 충돌>은 세월의 검증을 이겨낸 당당한 현대의 고전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21세기의 국제정치적 변화를 예측했고, 그 중 많은 수가 옳은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문제는 그 속에 묘사된 세계와 한반도의 모습이 결코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차분한 마음으로 이 책을 다시 읽고, 다가올 새해와 새로운 세계 속의 우리의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노정태 ‘논객시대’ 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2021053111&code=116

2014-11-30

[별별시선]최장집, 김상률, 통합진보당

“김일성은 국내의 민중적 지지 기반,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대남한 강경 정책에 대한 정치적 물질적 정신적 도덕적 지원,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자신감 등 모든 대내외적 조건들이 압도적 우세에 있었다. 그의 우세에 대한 지나친 과신이 그를 전쟁을 통한 총체적 승리라는 유혹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하였고, 결국 그는 전면전이라는 역사적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1998년, 국민의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최장집의 책에서 인용된 문구다. 당시 ‘월간조선’은 이 ‘발견’을 대서특필하며 최장집을 청와대에서 쫓아냈다. 뒤이어지는 문장이 “무엇보다도 김일성의 오판을 유도하였던 요소는 한반도의 국내 정치적 조건이라기보다는 국제 정치적 조건, 즉 급속하게 변하고 있었던 냉전 체제의 성격과 그곳에서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의 힘이었다”라는 것은 그 시점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문장 하나, 표현 하나를 꼬투리 잡아 ‘빨갱이 사냥’이 벌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핵무기 소유는 열강에 에워싸인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민족 생존권과 자립을 위해 약소국이 당연히 추구할 수밖에 없는 비장의 무기일 수 있다.” 현재 정당해산심판 선고를 앞두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핵심 인사가 내뱉은 말이 아니다. 김상률 신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의 2005년 저서 <차이를 넘어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적어도 인용된 문장의 ‘수위’만 놓고 보면, 1998년의 최장집이나 2005년의 김상률이나, 비슷한 말을 했다. 오히려 김상률의 경우가 더 심각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지나간 일이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니 말이다. 이에 고무된 보수 언론들은 앞다투어 <차이를 넘어서>를 입수한 후 ‘문제 발언’들을 더욱 캐내기 시작했다. 최장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전후 맥락 없이 툭툭 잘려나간 문장들이, 신문 지면을 수놓고 있다.

북한은 대한민국의 주적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더욱 잘 이해해야 한다. 전략적 판단에는 역지사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북한 입장에서야 당연히 생존을 추구하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려 들 테니 말이다. 문제는 저 인용된 문장이 과연 북한의 뜻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나의 정치적 입장은 다르다’는 것인지, 언론 보도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1998년과 거의 유사한 풍경을 연출해내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서술인지, 비판하기 위해 남의 말을 적어둔 것인지, 아니면 저자가 실제로 동의하는 정치적 주장인지 아무런 구분도 없이 마구잡이로 인용된 문구가 언론 지면을 장식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니 어떻게 저런 빨갱이가 청와대에 들어가나’라는 대중의 비난 어린 손가락질이, 이번 경우에는 대통령 쪽으로는 결코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의 선고를 앞두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그 선고를 앞두고 있다. 나 너 우리가 ‘종북’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 선고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북한이라는 ‘적’을 상정해야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는 허약한 군사독재 국가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그것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국면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이 해산된다면 우리는 1998년 이전으로 후퇴한다. 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청와대에 ‘종북’ 의혹을 받는 수석이 임명될 수도 있는, 2014년 이후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최장집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설명하며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김상률은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의 책에 적힌 내용은 에드워드 사이드 및 미국 좌파 지식인들 세계관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니 말이다. 통합진보당 역시 그들 스스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 존속되어야 한다. 그들의 시대착오적 대북관을 심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권자이며 유권자인 국민의 몫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1302100215&code=990100&s_code=ao122

2014-11-25

[북리뷰]모멸, 수치심 자극하는 최악의 방아쇠

모멸감
김찬호 지음·문학과지성사·1만3500원

“박정희가 왜 죽었는지 아냐? 김재규한테는 술 안 따라주고 차지철한테만 따라줘서 총 맞아 죽은 거다.” 이런 이야기를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로부터 듣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기억이 있다. 세상에 자기한테 술을 안 따라준다고 사람을 죽일 수가 있을까? 일국의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그렇게 하잘것없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역사의 방향을 바꾸게 될 거사를 저질렀단 말인가?

<모멸감>을 쓴 사회학자 김찬호에 따르면 저러한 ‘민담’에는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감정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작동하며, 때로는 개인의 감정이 사회적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회학은 인간의 감정을 중요한 변수로 다루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감정은 이성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강렬하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잉여가 아니라, 중대한 인간사를 좌우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29쪽) 그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저자는 ‘감정사회학’이라는, 기존의 연구 문헌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아주 무서운 감정인 ‘모멸감’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멸감: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은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모욕은 누군가의 자기존재감을 해치는 행위라고 정의한 그는 그 모욕 중에서도 ‘경멸’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는 ‘모멸감’에 주목한다. “아무 생각 없이 모욕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무심코 경멸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모멸은 후자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67쪽)

이렇게 구분짓긴 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는 모욕과 모멸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은 곳이다. ‘가족처럼’ 생각해서 여직원의 엉덩이를 더듬었다고 주장하는 중년 남성 관리자와 ‘친하니까’ 함부로 말하고 다소 괄시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은 풍토 속에서, 내가 남에게 모욕을 가했다, 혹은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는 인식에 도달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최근 우리 사회의 양심을 울리고 있는 이른바 ‘압구정동 ㅅ아파트 경비원 분신 사건’의 경우도 그렇다. ‘사모님’으로 흔히 지칭되는 70대의 ㄱ씨는 경비노동자 고 이만수씨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모멸감을 선사했다. 분류된 재활용 쓰레기를 놓고 트집을 잡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5층 높이에서 그에게 음식을 던지며 “슛, 골인”이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 자기 나름대로는 모욕을 주기는커녕 ‘친하니까’, ‘가족같으니까’, 혹은 ‘우리 아파트에서 일하는 머슴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대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주 작은 모욕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내면이 폭발한다. 때로는 그 사람과 함께 사회 전체가 터져나가기도 한다. 이렇게 일상적으로 모멸감을 선사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그대로 두고 있는 한, 이 구조 속의 우리는 그 누구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없다. 젠더 감수성, 인권 감수성과 같은 맥락에서 ‘모욕 감수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사회적 인식을 바꿔나가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그래서이다. 이대로 모멸의 왕국으로 남아 있는 한, 우리 사회에는 지속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노정태 ‘논객시대’저자/번역가>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1118110207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