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플로베르, 민음사, 1만1천원.
보바리 부인은 자살한다. 요즘은 이런 고전의 결론을 말하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고 한다. 루오 영감의 딸 엠마는 많은 책을 읽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푹 빠진 예쁘고 똑똑한 처녀다. 의사인 샤를르 보바리에게 시집을 가 보바리 부인이 되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에 염증을 느껴 불륜을 저지르다가,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생긴 빚을 갚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의 줄거리이다.
이 작품은 세상에 공개된 후 지금까지 '여성의 낭만적 환상, 현실에 대한 불만족, 사치, 방탕, 불륜' 등을 꼬집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는 듯하다. 책의 말미에 붙은 번역자의 해제를 읽어도 그런 논조로 써 있다. 심지어 '보바리즘'이라는 신조어가 당대에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더러 쓰인다고 한다. 그런 정보까지 알고 나면 독자들은 플로베르가 얼마나 섬세하게 '사실주의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을 묘사해냈는지에 대해, 남들의 평가를 참고하여, 호들갑스러운 찬사를 내뱉고 책장을 덮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보자. 엠마 보바리는 왜 죽어야 했을까? 단지 '보다 나은 삶', '여기에 없는 그 무언가'를 꿈꾸었다는 이유로?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초라함, 혹은 평범함을 참지 못해, 자신을 꾸미고 연인을 치장하기 위한 온갖 사치품을 구입하며 진 빚 때문에?
<마담 보바리>를 직접 읽기 전까지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2016년 오늘날에 와서야 이 책을 읽어보니 알겠다. 엠마 보바리는 달콤한 환상 때문이 아니라, 그 환상을 스스로 이루는 것을 꿈도 꿀 수 없었던 당시의 사회적 억압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132쪽)
프루스트가 '사실주의적'으로 고스란히 반복하는 당대의 편견어린 서술을 젖혀두고 엠마 보바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살펴보자. 엠마는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의 아름다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시골 마을 오종의 약제사 오메 역시 마찬가지이다. 엠마가 소설의 세계를 꿈꾼다면 오메는 신문 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삶을 지향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엠마는 파국에 이르는 반면, 오메는 그 모든 위기와 추문을 이겨내고 결국 자신의 목표를 이룬다. 한 여자가 파멸하는 이야기인데, 소설은 한 남자가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503쪽)는 장면에서 끝난다. 모든 환상, 헛된 욕망, 탐욕과 거짓말과 교활함이 아닌, 오직 엠마의 그것들만이 단죄당한 것이다.
"엠마는 여러 가지 책들에서 볼 때는 그렇게도 아름다워 보였던 희열이니 정열이니 도취니 하는 말들이 실제로 인생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55쪽) 그렇다. 엠마는 알고 싶었다. 엠마는 경험하고 싶었고, 자신의 살고 있는 인생이 자신이 알고 있는 멋진 삶의 모습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부합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었다. 다만 그에게 주어진 기회와 가능성이 너무도 제한되어 있었기에, 마치 발사에 실패한 로켓처럼 허공에서 폭발해버렸을 따름이다.
남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야망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이런 생각을 품으면 세상은 그것을 '보바리즘'이라고 부른다. '세상'과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서 <마담 보바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있다.
2016.07.05ㅣ주간경향 1183호에 수록된 서평 원고. 교열 전 원고로 링크된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