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7

20161120 - 20161126: 앙겔라 메르켈 4선 도전, 박근혜 탄핵 추진, 크리스 패튼의 홍콩 독립주의 비판

*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4선에 도전한다. 2005년 이후 총리직을 유지하고 있는 그는, 현지시각으로 11월 23일 연방하원 정책 토론회 연설에서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해도 앙겔라 메르켈은 독일 총리직에 다시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현재, 메르켈은 자유무역과 관대한 이민 허용의 마지막 수호자가 되었다. 그는 연방하원 정책 토론회 연설에서 TPP 탈퇴를 천명한 트럼프를, 이름을 거론하지 않으며 비판했다.

지난 해, 시리아 난민을 대거 수용하기로 한 결정 이후 난공불락이었던 메르켈과 기독민주당의 지지율이 큰 하락세를 보였다. 트럼프의 당선이 보여주고 있다시피 반 이민 정서는 기존 정치권 바깥의 극우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경향이 있다. 메르켈은 구 동독에 임대주택을 확충하는 정책을 펼쳐 지지 기반을 다지고자 한다.


* 야권에서 이번 회기 중으로 탄핵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하면서, 빠르면 12월 2일, 늦어도 12월 9일까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다.

국민의당은 최대한 빨리 탄핵소추안을 가결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은 9일까지 여유를 갖고 최대한 비박계 의원들을 포섭하며 표 단속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과정에서 추미애 민주당 대표가 '새누리당에 탄핵을 구걸하지 않겠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이기도 한, 부역자 집단의 당 대표를 지낸 분이 탄핵에 앞장서겠다고 한다"는 등의 공격적 발언을 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민주당에도 부역자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며, 지금은 탄핵안 통과를 위해 집중해야 할 때라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현재로서는 탄핵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지 않는 한, 검찰 뿐 아니라 특검의 수사 역시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 비박계가 박근혜 대통령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섬으로써 '면죄부'를 얻는다는 식의 비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거야(巨野)의 지지자들이 곧잘 말하던 '차악'과 공조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 1997년 퇴임한 마지막 홍콩 총독인 크리스 패튼(Chris Patten)이 두 명의 홍콩 입법회 선거 당선자인 식스투스 바지오 렁과 야우와이칭에 대해 "일종의 학생 놀음"을 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식스투스 바지오 렁(좌) / 야우와이칭(우)

식스투스 바지오 렁(梁頌恒)과 야우와이칭(游蕙禎) 당선자는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라고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입법회 선서에 임했다. 게다가 그들은 홍콩의 독립을 주장하고 중국을 야유하는 내용으로 선서문을 바꿔 읽었다. 홍콩 법원은 11월 15일 두 당선자의 의원 자격을 박탈했다.

크리스 패튼은 중국의 홍콩 자치권 침해에 대해 침묵하는 영국 정부를 비판하지만, 홍콩의 독립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파이넨셜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진지하게 조언하건대, 당선자들은 통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대화에 복귀하고, 독립과 관련된 것들은 멀리해야 한다. . .  독립은 실현될 수 없으며 홍콩 주민들은 독립이 가능한 것인 양 생각하는 것의 위험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당선으로 인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내의 언론은 홍콩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관심이 낮다. 특히 스스로를 민주화 세력으로 인식하거나 그에 동조한다고 여기는 언론들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지속적으로 추적해볼 사안이다.

2016-11-20

[별별시선]트럼프 당선과 ‘진보’의 가치

미국 대선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마치 페이스북을 통해 조작된 뉴스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미국인들처럼, 특히 일부 진보 인사들은 잘못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해 엉뚱한 방향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틀렸다. 현지시간으로 11월17일 현재, 힐러리 클린턴의 총득표는 6282만5754표, 반면 트럼프는 6148만6735표에 그치고 있다. 약 130만표 차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500만표가량 개표되지 않은 표가 남아있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적 원칙보다 연방주의적 원칙이 우선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트럼프 지지층은 분노한 노동자들이다?’

천만에.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들이다. 숫자를 보자. 미국인의 중위소득은 5만6000달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약 6만1000달러의 중위소득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중위소득은 7만2000달러로, 클린턴 지지층에 비해 1만달러가 높을뿐더러 평범한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1만6000달러나 더 높다. 이것은 평균이 아니라 중위값이므로 ‘슈퍼 리치’들이 공화당을 지지해서 왜곡된 통계가 아니다. 주요 트럼프 지지층이 ‘가난하고 분노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샌더스가 나갔다면 이겼을 것이다?’

어림도 없다.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다. 특히 민주당의 ‘미래 지지 기반’인 히스패닉 및 소수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경선 패배의 원인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국 득표력이 필요하다. 샌더스는 백인 밀집 지역인 ‘러스트 벨트’에서만 상대적 우위를 갖는 약한 후보였다. 게다가 샌더스가 트럼프와 1 대 1 토론에서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봐야 한다.

미국 대선 관련 주요 이벤트를 모두 시청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샌더스는 트럼프의 상대가 못된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잽 부시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닥쳐”(You shut up)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목청을 높이는 트럼프를 부시 집안의 세번째 대통령 출마자는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온갖 부동산 거래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와 프로레슬링 무대 등으로 단련된 ‘미디어 인파이터’다. ‘남자 대 남자’로 맞대결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점잖게 나오면 말을 안 들어먹고, 똑같이 진흙탕 싸움을 하면 이쪽이 더 손해를 본다. 클린턴처럼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가 품위 있는 태도로 맞서는 것만이 해법이었다. 샌더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최소 130만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승리했다.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클린턴과 샌더스의 지지자들보다 잘사는, 교외에 거주하는 겉보기에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분노한 민중’이 아니라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 대선을 ‘가난한 노동자의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여성, 세월호 희생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중국계 동포 등을 모욕하며 증오를 선동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베 스타’가 바로 트럼프다. 일부 인사들은 그러나 승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트럼프의 승리에 어떤 ‘진보적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입력 : 2016.11.20 21:16:01 수정 : 2016.11.20 21:18:55

2016-11-19

20161113 - 20161119: 미 연준 금리 인상 예고, 박근혜 대통령 피의자 신분

*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현지시간 11월 17일 의회에 출석해 남은 임기를 다 채울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된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의 비방 때문이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중 연준이 민주당 정권을 돕기 위해 낮은 금리를 유지하고 있고, 그래서 달러가 저평가되고 있다고 공격했던 것이다.

옐런은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임기를 모두 채울 것임을 천명했다. 2018년 2월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그를 유임시킬 생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므로, 이후로는 미국의 통화 정책이 크게 요동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월스트리트저널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옐런 의장은 의회에서 "현 시점에서 볼 때, 나는 경제가 우리의 목표를 향해 대단히 훌륭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며, 연준이 11월에 도달한 판단 역시 유지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므로 기준금리 인상은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시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준금리 인상이 필요한 이유로, 견실한 회복세를 보이는 미국의 경제 외에도, 지나치게 낮은 금리로 인해 투자자들이 위험한 자산(가령 부실한 주택 담보 대출)으로 향하게 될 우려가 있음을 덧붙였다.


* 11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주중 이루어질 것처럼 이야기되었던 검찰 조사를 거부했다. 검찰에서 그를 피의자가 아닌 참고인 신분으로 조사하려 했기 때문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고 언론과 법조인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자 11월 18일 늦은 시각,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을 피의자라고 적시하지 않은 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경향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특수본 관계자는 18일 “박 대통령에 대해 ‘형제번호’를 땄다(기재했다)”고 말했다." 그 말을 신문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형제번호’는 검찰이 입건된 피의자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사건번호다. 참고인은 입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형제번호가 기재됐다면 피의자라는 의미다."

그러나 검찰은 공식적으로 단 한 번도 박근혜 대통령이 피의자라고 밝히지 않았다.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바는 어디까지나 '관계자'의 말일 뿐이고, 아직 공식적으로 피의자 신분인 대통령에 대한 소환장이 발부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통신사인 교도통신은 검찰 관계자가 박근혜 대통령을 '중요 참고인'으로 지적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편 한국갤럽에서 11월 15일부터 17일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5%, 부정 평가는 90%, 의견 유보는 6%로 지난주와 유사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2016-11-15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에 대한 코멘트

클린턴의 패배에 대한 오바마의 '분석'은 밥을 꼭꼭 씹어먹어야 소화가 잘 된다 같은 원론적인 소리일 뿐. 그거 모르는 정치인도 있나? 문제는 클린턴 캠프가 '왜' 위스콘신 등을 동선에 넣지 않았느냐임. 내 추측은 인구 구성표를 믿고 도박을 했다는 쪽.

카운티 단위의 순회 일정을 감당하기에는 클린턴의 건강이 안 받쳐줬을 것이고,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 '재수없는 년'과의 휴먼 터치를 좋아할지조차 미지수이니, 플로리다와 (심지어) 텍사스 등 인종 구성이 다양한 대도시가 있는 주에 캠페인을 집중하고 망함.

이 가설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음. 1) 힐러리 클린턴의 건강 문제가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2) 백인 남성과 가정주부들의 미소지니의 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을 클린턴 캠프에서 알고 선제적으로 포기했다. 아무튼 숫자를 놓고 보면 해볼만한 도박이었을듯.

문제는 막판에 FBI가 선거에 개입하면서 안그래도 투표율 낮은 마이너리티들의 투표 의지를 떨어뜨리고, 원래 투표율 높은 백인들을 반 클린턴으로 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왔다는 것. 클린턴 캠프에서 패인을 FBI로 짚는 것을 왜 비난하는지 모르겠음...

이 가설이 맞다면, 클린턴 캠프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패인은 당연히 FBI 뿐임. '클린턴이 건강 때문에 카운티 단위 방문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판세를 보고 러스트 벨트를 버렸다' 같은 소리를 공개적으로 할 수야 없을 테니까.

* 2016년 11월 15일 오후 3시경 작성한 트윗들을 모은 것.

[북리뷰] 늑대왕 로보와 시튼, 그 문제적 관계

커럼포의 왕 로보
윌리엄 그릴, 찰리북, 1만5천원

영국 태생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동물학자 어니스트 시튼은 자신이 관찰하고 겪은 일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써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커럼포의 왕 로보'다. 미국 뉴멕시코의 커럼포는 로보라는 이름의 늑대가 지배하고 있다. 로보는 수백, 수천 마리의 양, 염소, 개 등을 물어죽이고 사냥하며 커럼포의 목장주들의 골칫거리를 넘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에게 초청받은 시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로보를 추적한다. 강력한 독약을 정성스럽게 만든 미끼에 설치하고, 비싼 덫을 놓았다. 하지만 로보는 시튼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보다 영악해서, 그 어떤 미끼도 물지 않고, 덫도 피하며, 오히려 사람을 조롱하듯 그 위에 똥을 싸놓기까지 했다.

시튼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동물학자였다. 그는 로보의 무리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감히 로보를 앞서나가는 어떤 늑대가 있다는 것. 암컷이었다. 시튼은 그 늑대가 로보의 짝임을 직감한다. 흰 털을 가진 아름다운 암컷 늑대 블랑카. 블랑카를 잡으면 로보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적중했다. 블랑카의 시체를 찾기 위해 로보는 평소라면 절대 빠지지 않았을 함정으로 달려들었고, 결국 시튼에게 붙잡혀, 물과 음식을 모두 거부한 채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영국의 젊은 일러스트레이터인 윌리엄 그릴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주로 색연필을 이용한 따스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필치로 로보와 블랑카, 로보의 무리, 사냥당하는 동물들, 그들을 추적하는 시튼의 모습을 담아냈다.

단지 그림만 다시 그린 게 아니다. 그는 시튼이 로보를 사냥해낸 후 늑대 보호 운동가로 변신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튼이 깨달은 바, 로보가 가축을 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이 늑대의 먹잇감이 되어야 할 다른 야생동물의 씨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그릴의 로보 이야기는 시튼의 원작을 그대로 담아내면서도, 그것을 오늘날의 맥락에 맞게, 야생의 피 냄새를 파스텔톤으로 지워내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고민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커럼포의 왕 로보>는 흠잡을 데 없는 작품이며, 고전의 리메이크라는 면에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몇 개의 고민이 뇌리에 남는다. 시튼은 로보를 죽이고 나서야 늑대의 '보호'를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윌리엄 그릴은 그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현대적 맥락을 부여했다. 그런데 그것은, 늑대의 야생성을 이미 거세한 후에 벌어지는, 안전한 '애도'의 행위가 아닌가? 우리는 이미 정복한 자연만을 '보호'하며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어네스트 시튼의 로보 이야기 자체가 지니고 있는 시대적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수많은 갱스터물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바, '남성미를 뽐내는 마초가 짐덩어리밖에 안 되는 철없는 여자를 사랑해서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죽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자 주인공의 몰락을 위해 종종 포르노적으로 학대당하는 여성 캐릭터의 원형을 암컷 늑대 블랑카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맥락 속에서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처음부터 '불편한' 이야기이며 우리를 고민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바로 그런 면이야말로 <커럼포의 왕 로보>를, 윌리엄 그릴의 것이건 그 원작이 되는 어니스트 시튼의 것이건, 두고두고 되짚고 곱씹어야 할 걸작으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16.11.15ㅣ주간경향 1201호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611090916411&code=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