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오가는 개헌 논의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 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선거를 이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것인지, 어차피 내각제를 해도 총리 해먹을 깜냥이 안 된다는 걸 스스로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대체 왜 총선과 대선의 날짜를 맞추려 하는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의 핵심은 견제와 균형이다. 영어로는 check and balace. 법을 만드는 입법부와 그것을 집행하는 행정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법적인 판단을 하는 사법부를 분리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핵심인 삼권분립이다. 그러므로 법치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과 같은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중요한 것은 입법, 행정, 사법의 3권이 서로 분열해야 하고,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말은 바로 저 근본적인 원리를 무시하자는 소리다. 4년에 한 번씩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면 대선에서 승리한 정당이 총선도 승리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그렇다면 행정부, 다시 말해 대통령의 전횡을 야당이 견제할 수 없게 된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처럼,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국정농단이 언론에 의해 발각된다 한들, 야당은 탄핵안을 발의할 수도 없고 특검법을 통과시키기도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행정부의 야당이 국회에서 소수당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음 총선이 곧 다음 대선이므로 다음 총선/대선까지 야당은 사실상 아무 것도 못 한다. 대체 이게 민주주의인가? 뭐 하자는 소리인가?
내각책임제를 하고 싶다면 대놓고 내각책임제를 하자고 하는 편이 좋다. 하지만 내각제의 경우에는 '내각총사퇴'가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고, 총선을 다시 치를 여지가 늘 열려있다. 현재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합의한 그 개헌은 대체 그 실체가 뭔지 알 수도 없는 '분권형 대통령제'인데,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낳을 뿐이다.
애초에 총선과 대선을 동시에 치르자는 끔찍한 발상을 정치권에 처음 던진 인물은, 내가 기억하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대체 이유와 목적을 알기 어려운 숱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고 모두 실패했는데,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는 개헌이 바로 그 중 하나였다. 요컨대 그것은 노무현도 실패했던 일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와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선거독재국가'로의 지름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정말 다들 아무말이나 막 던지고 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설령 문재인이나 안철수가 말하는 것처럼 내년 지방선거때 개헌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와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기화하는 그런 종류의 개헌이라면 나는 결사적으로 반대하겠다. 군사독재보다 더 무서운 게 있다면 그것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민주독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대선과 총선을 결합시킨다는 건 총통을 뽑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개헌에 반대한다.
역사적 사실부터 알아보자. "내외 조선인 전문·대학생 4,395명이 일제히 입영한 것은 1944년 1월 20일이었다."(11쪽) 당시 조선인 전문·대학생의 총 숫자는 7천여 명이었으나, 일부는 이공계거나 사범계이기에, 또 일부는 일부러 징집을 피해 도망갔기에, 4,395명이 징집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부족한 병역 자원을 충당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일본과 조선의 대학생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학병'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병들은 다양한 출신지와 개인사를 가지고 있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출신 가문이란, 다양하겠으나 분명한 것 하나는, 자식을 대학에 다니게 할 만큼 상류층에 속했음을 가리킴이 아닐 수 없다."(15쪽) 이들은 모두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선택과 행동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가 '일본인으로서 전쟁에 참전했던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4.19 세대가 그랬다. "순종 한글세대인 이른바 4.19세대는, 그들의 순수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제로상태에서 출발했다고 자부"(67쪽)하면서, 이전 세대의 업적 뿐 아니라 문제의식까지도 단숨에 밀어내버렸다. 작가 및 비평가의 숫적으로, 그들이 생산해내는 원고의 양적으로, 4.19 세대는 압도적이었다.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고 한일협정에 반대하던 새로운 세대는, 책에 인용된 김현의 말마따나 "1960년 이후 한 살도 더 먹지 않"(69쪽)은 채 오늘까지 한국의 문학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일 학병세대의 빛과 어둠』은 크게 세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씌여진 책이다. 첫째, 이병주와 선우휘라는 두 명의 작가밖에 보유하지 못한 학병세대의 존재를 되새기며 그들이 한국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야 마땅한지 검토한다. 둘째, 학병세대에 속하는 가상의, 현실의 인물들을 통해 '식민사관 극복'이라는 과제를 두고 평생을 싸워온 김윤식 본인의 학문적 궤적을 반추한다. 셋째, '일본 전후 지성계의 천황'인 마루야마 마사오를 학병세대에 속하는 한 사람의 일본 지식인으로 정의한 후, 그의 영향력 하에 전개되어온 일본 및 한국 지성사의 전복을 도모한다.
이 책은 세 번째 주제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주제는 김윤식의 다른 책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에서 확장된 형태로 존재한다. 문제는 첫 번째 화두다. 일본인으로서 전쟁터에 끌려간 후 학병세대는 각자 나름의 각성을 했고, 해방된 조국에서 또 한 차례의 전쟁을 경험한 후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이 되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친일파냐 독립군이냐'같은 너무도 단순한 구도에만 매몰되어, 어떤 세대는 그런 고민을 동남아시아나 만주의 전쟁터에서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함성을 외치면서, 정작 그 역사 속 회색의 시공간을 관통해온 이들의 존재는 지워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망각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학병세대는 그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기에 이후 세대들에게 문학적으로 없는 존재처럼 취급되었다. 그러한 선택적 망각은 정당한가. '순수한 민족의식'은 얼마나 순수한가. 김윤식은 우리에게 묻는다. "학병세대의 글쓰기를 건너뛰고도 한국문학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67쪽)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10만원 가량을 도서구입비로 지출한다고 한다. 그런 평균적 소비자를 끌어들여 10만원 쓸 것을 15만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마도 서점 업계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보문고를 선두로 한 대형서점들은 '머물기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나처럼 한 해가 아니라 한 달에 적어도 10만원 이상의 책을 사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부류에게 오늘날의 대형서점이란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이며,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오프라인) 서점도 아니다. '책이 있는 문화공간'을 선호하는 평균적인 열 사람보다 '서점'을 원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해보자.
서점이란 무엇인가?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책을 구입하는 곳이다. 그런데 책이란 심지어 같은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낸 같은 책이라 해도 판본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대표적 다품종 소량 구매 상품이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책은 베스트셀러, 화제의 신간, 스테디셀러의 세 범주로 포괄될 수 있다. 요즘 여기저기서 '특색있는 동네서점' 같은 것을 많이 차리는데, 사실 '동네서점'이란 기본적으로 많이 팔릴 수밖에 없는 저런 책들을 간신히 구비해놓는 곳이다. 남들 다 보는 책, 신문이나 TV에 광고가 나오는 책('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일을 근심하는 인간들아~' 권력과 부를 조롱하며 구름처럼 살다간 천재시인 김삿갓!), 오가며 별 생각 없이 넘겨보다가 버리면 그만인 깔깔 유모어집 등이 '동네책방'의 본령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야 대형서점이 인터넷 이전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형서점이란 '동네책방에는 없고 갖다 놓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책'이 있는 곳이었다. 영어, 일본어 등 이른바 '원서'를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동네책방'에서는 팔지 않는다. '여기 없는 책이 저기에는 있다'가 대형서점의 본질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출현 이후 이 구도가 허물어졌다. 이전의 교보문고에는 온라인 DB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이 종종 꽂혀있었지만 그 또한 2008년 촛불시위 기간의 리뉴얼과, 이후 무슨 열대우림에서 베어온 통나무 테이블 같은 걸 비치하는 과정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2017년 현재, '최대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는 것보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는 편이 낫다. 새롭게 단정된 '복합 문화공간'의 귀한 부동산을 점유할 가치가 없는, 그만큼 팔려나갈 가능성이 없는 수많은 책들이 곧장 창고에 처박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어린이와 학생과 직장인과 노인들이 책을 접고 밑줄을 긋고 원목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다. 그곳에 책은 없다. 적어도 내가 찾는 책은 그렇다. 적잖은 경우 허탕을 친다.
물론 출판업은 10권 중 한 권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 나머지 9권을 발행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려야 적게 팔릴 책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많이 팔릴 책이 많이 팔리도록 최적화된 현재의 대형서점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시장은 동시에, 한국인의 도서 구입 비용 평균을 확 끌어올려주는 존재들 덕분에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동네책방' 뿐 아니라 현재의 대형서점에서도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서점이 필요한가? 나 자신의 경우를 놓고 말해보자. 내가 원하는 서점은 이런 것이다.
책을 직접 들고 카운터에 갈 필요도 없게, 스마트폰의 바코드 리더 앱 등을 이용해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집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책을 욕심껏 집다보면 굉장히 무거워지고 부피도 커진다. 그런데 어차피 당일에 사들고 간 책을 당일에 다 읽는 경우는 없다. 쇼핑은 서점에서 하고, 책은 집(이나 사무실이나 아무튼)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완벽한 플로우를 제공해주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면 아주 좋겠다(교보문고 바로드림을 언급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최대한 많은 책을 보기 좋으면서도 밀도 있게 배치해야 한다. 온라인 서점을 뒤적거리는 것과 도서관이나 (과거의) 대형서점 등에서 걸어다니면서 책을 찾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연히 '어 이 책은?'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바코드만 띡띡 찍으면 장바구니에 담겨서 다음날(혹은 며칠 후)에 집으로 배송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쇼파라던가 문화 예술 공연이나 강연을 할 공간 등을 없애고 최대한 책에게 많은 공간을 제공할 것.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았더라도 실물을 접해본 적 없던 책을 직접 만져보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그것이 더욱 서점의 본령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할 때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문제집 펼쳐놓은 수험생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요컨대 내가 원하는 서점이란 '온라인 서점을 오프라인에서 내 몸으로 브라우징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개가식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번에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 신간이 아주 빨리 들어온다는 점, 빌려서 나갈 수는 없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저런 종류의 서점이 생긴다면 나는 온라인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보고, 물건을 확인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유사한 주제나 제목의 다른 책을 통해 신선한 영감을 얻는 일은 오직 오프라인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서점은 교통이 편한 곳에 큰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릿값이 많이 든다. 그런데 정작 베스트셀러 등의 마케팅에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서점들과 비교해볼 때, 전혀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서점에 과연 상업적 승산이 있을까? 그건 서점 업계의 관계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애초에 책을 많이 사던 사람들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액수의 책을 질러놓고, 집에 와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싶다.
요즘은 유행이 한물 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좀비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원래 사람이었던, 그저 다른 인간을 물어뜯고 감염시켜 같은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그 무리를, 우리의 대중문화는 끝없이 창작하고 변주하며 소비한다.
그런데 좀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중문화계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미국의 정치학자 대니얼 W. 드레즈너에 따르면,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인육을 먹는, 되살아난 시체가 일으키는 문제에 주목해왔다."(30쪽) 진지하게 좀비 사태를 우려했다는 게 아니라 좀비를 소재로 한 다양한 논문과 학술적 단행본이 출간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계통에 있는 학문 분야가 이룬 성과와 비교해보면 사회학 일반, 구체적으로는 국제관계학은 좀비에 대한 이해 격차에 시달리고 있다."(31쪽) 그리하여 그는 『국제정치 이론과 좀비』라는, 짧고 재미있지만 결코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독특한 국제정치학 개론서를 써냈던 것이다.
이 책의 기획에는 합당한 논리적 이유가 있다. 해당 대목을 다소 길게 인용해보자. "여러모로 국제관계학은 좀비 폭동 대처법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에서 빠져 있는 연결 고리다. 언데드가 가하는 위협은 좀비가 등장하는 주요 작품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국제정치에 대한 기초 지식을 충분히 담고 있지 않다. 살아 있는 시체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 분석 단위로 소규모 지역사회나 가족을 이용한다. 한 나라의 중앙정부나 국제관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시체가 '어떤' 식으로든 정책 대응을 야기할 거라는 게 논리적인 판단일 텐데도 말이다."(35쪽)
그렇다. 좀비는 사람을 문다. 좀비에게 물린 사람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서로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에 좀비 집단은 자멸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점점 늘어가는 거대한 골칫덩이가 되며, 한 국가 내에서 통제할 수 있는 규모를 쉽사리 넘어설 것이고, 곧 국제 문제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좀비를 소재로 기존의 국제정치 이론들을 일별하고 장단점을 따져보는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충분히 의미 있는 것이 된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가정해보자. 국제정치 이론의 갈래 중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대규모 좀비 재앙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이상한 비-생명체의 집단 출현 자체야 신선한 일이겠으나, 본디 국제정치의 세계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잡아먹는 생생한 폭력의 현장이기에, 국제사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 힘의 균형을 찾게 된다면 인류의 국제 사회는 좀비들의 집단과 나름 평화로운 공존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상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국제 이론의 눈으로 볼 때 좀비 집단과 인류는 공존이 불가능하다. 세계의 평화는 상호 존중하는 민주주의 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할 때 가능할 것인데, 좀비들끼리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다 해도 그 나라의 구성원들과 우리 평범한 인간들 사이에 공통된 가치관과 이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이론들에 대해서는 직접 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봐도 좋겠다.
이른바 '에듀테이너'들이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으며, 도널드 트럼프 및 북한의 미사일 실험 등 다양한 위험과 변수가 공존하는 요즘이다. 우리는 더 재미있게, 더 진지하게, 한국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 현지시간으로 2월 13일, 마이클 플린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사임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트럼프 당선 후 정권 인수 과정에서 오바마 정부는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해킹을 통해 개입한 정황을 확인하고 러시아 외교관들을 추방했다. 그 시점, 트럼프에 의해 발탁되어 백악관 내에서 고위직을 맡을 것으로 예정되어 있던 플린은 러시아 대사와 통화를 하며 사태의 변화와 추이에 대해 논의했다. 둘째, 자신이 러시아측과 통화를 했다는 사실에 대해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 등 상급자에게 허위로 보고했다. 셋째, 그러한 사유로 인해 정보 당국은 플린이 러시아에게 협박당할 소지가 있으며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플린이 러시아측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정보기관들이 진작부터 몰랐던 것은 아니다. 2015년 9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한 공화당 인사가 워싱턴에 소재한 Fusion GPS라는 싱크탱크에 거액을 기부하여 트럼프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했다. Fusion GPS는 전직 영국 정보요원 크리스토퍼 스틸(Christopher Steele, 현재 종적을 감춘 상태)을 고용해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를 추적했다. 스틸은 트럼프와 러시아의 관계에 대한 막대한 양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보고서는 FBI와 <뉴욕타임즈> 등 언론으로 흘러들어갔다. 진작부터 말이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플린을 도청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 대한 오바마의 제재가 발표되던 그 시점에 플린이 러시아 대사와 통화하고 있었음을 확인했다.
트럼프 측에서는 플린의 해임이 법적 책임과 무관하며 단지 그에 대한 신뢰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선을 긋고 있다. 트럼프는 76분에 걸친 기자회견(전문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을 열어서 본인을 향한 온갖 질문과 비판에 맞섰다. "(망하고 있는 @nytimes, @CNN, @NBCNews) 같은 가짜 뉴스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미국 인민의 적이다! 역겨움!"이라는 트윗을 올렸던 그는, 그것을 지우더니 "역겨움!"(SICK!)을 빼고 남는 공간에 "@ABC, @CBS"를 추가하는 파워트위터리언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의 미치광이같은 대응을 조롱하는 것만으로 이 사태를 논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일이다. 왜냐하면 트럼프 선거본부와 러시아 정보 당국과의 연계 가능성을 알고 있었던 FBI는 그 사실에 대해 선거 기간 중 함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FBI 국장 제임스 코미는 투표를 닷새 앞두고 '클린턴 이메일 스캔들을 재조사하겠다'고 발표해서 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대체 왜 FBI 국장은 이미 의회 청문회까지 마친 민주당 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을 선거 직전에 들쑤시면서, 공화당 후보 진영에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루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는가? 오바마의 임기 8년동안 미국의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인가? 트럼프 행정부의 향후 행보나 탄핵 여부 등과 무관하게, 이 또한 별도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The FAKE NEWS media (failing @nytimes, @NBCNews, @ABC, @CBS, @CNN) is not my enemy, it is the enemy of the American People!
이재용이라는 한 사람이, 아직 유죄 판결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구속수사를 받는다는 것이 왜 그렇게 대단한 뉴스가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뉴스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가지 논점이 얽혀 있다. 첫째, 한국의 재벌 총수, 특히 삼성을 향한 한국 사회의 신화화 경향성. 둘째, 실제로 법원에서 유죄와 무죄가 판결되는 것과 무관하게 '구속되면 유죄고 풀려나면 무죄'라고 여기는 한국 사회의 법 인식. 셋째, 대중들의 무지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언론의 문제.
물론 이재용이 구속되었다는 것은, 그가 최순실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이 구속수사의 필요성을 갖는 중대하고 심각한 사안임을 법원이 인식했다는 것으로, 향후 특검 연장에 있어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중대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위에서 기술한 세 가지 문제점이 고스란히 남아 작동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집행유예가 나올 수 있는 최대한의 형량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제는 그보다 더 크고 확실한 죄목으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할 때다.
* 2월 13일,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피살됐다. 두 명의 여성에게 습격당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약품을 흡입한 그는 고통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송 도중 사망했다.
국가정보원은 김정남이 피살되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김정남을 제거하는 것은 김정은이 권력을 잡은 후로 지속되고 있는 '스탠딩 오더'(standing order)이며, 따라서 북한의 소행'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사흘 전, <주간경향>의 정용인 기자가 "박근혜 유럽코리아재단 대북 비선은 김정남이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단독 보도했던 사실과 맞물려, 박근혜의 대북 접촉 사실을 은폐하려는 국가정보원의 공작이거나 탄핵 국면에서 북풍을 의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기록해두건대 나 또한 사건 초기에 같은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수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은 북한의 소행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실제로 김정남에게 약품을 뿌린 두 명의 실행자 외에, 그들과 함께 활동한 용의자들 중 적잖은 이들이 북한 여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북한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시신을 인도하는 대신 수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북한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는 중이다. 한편 중국은 사건이 벌어진 주의 마지막 날인 2월 18일, 북한산 석탄의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중국이 북한의 최대 후견국이며 석탄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북한에게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북한 입장에서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김정남의 신변을 보호해주던 중국 측의 반발이라고 해석하는 쪽도 있으나 정확한 인과관계는 확인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