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3-06

나는 이런 서점에 가고 싶다

어떤 기사를 보니 한국인은 평균적으로 한 해에 10만원 가량을 도서구입비로 지출한다고 한다. 그런 평균적 소비자를 끌어들여 10만원 쓸 것을 15만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마도 서점 업계의 목표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교보문고를 선두로 한 대형서점들은 '머물기 편안한 공간'을 제공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나처럼 한 해가 아니라 한 달에 적어도 10만원 이상의 책을 사는 독자들이 있다. 이런 부류에게 오늘날의 대형서점이란 죽도 밥도 아닌 무언가이며,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오프라인) 서점도 아니다. '책이 있는 문화공간'을 선호하는 평균적인 열 사람보다 '서점'을 원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해보자.

서점이란 무엇인가? 소비자 입장에서 보자면, 책을 구입하는 곳이다. 그런데 책이란 심지어 같은 저자가 같은 출판사에서 낸 같은 책이라 해도 판본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는 대표적 다품종 소량 구매 상품이다. 따라서 규모의 경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들이 원하는 책은 베스트셀러, 화제의 신간, 스테디셀러의 세 범주로 포괄될 수 있다. 요즘 여기저기서 '특색있는 동네서점' 같은 것을 많이 차리는데, 사실 '동네서점'이란 기본적으로 많이 팔릴 수밖에 없는 저런 책들을 간신히 구비해놓는 곳이다. 남들 다 보는 책, 신문이나 TV에 광고가 나오는 책('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의 일을 근심하는 인간들아~' 권력과 부를 조롱하며 구름처럼 살다간 천재시인 김삿갓!), 오가며 별 생각 없이 넘겨보다가 버리면 그만인 깔깔 유모어집 등이 '동네책방'의 본령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전제로 해야 대형서점이 인터넷 이전 시대에 어떤 의미였는지 파악할 수 있다. 대형서점이란 '동네책방에는 없고 갖다 놓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책'이 있는 곳이었다. 영어, 일본어 등 이른바 '원서'를 새 책으로 구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는데 그 또한 '동네책방'에서는 팔지 않는다. '여기 없는 책이 저기에는 있다'가 대형서점의 본질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출현 이후 이 구도가 허물어졌다. 이전의 교보문고에는 온라인 DB에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책이 종종 꽂혀있었지만 그 또한 2008년 촛불시위 기간의 리뉴얼과, 이후 무슨 열대우림에서 베어온 통나무 테이블 같은 걸 비치하는 과정에서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2017년 현재, '최대한의 책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면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는 것보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는 편이 낫다. 새롭게 단정된 '복합 문화공간'의 귀한 부동산을 점유할 가치가 없는, 그만큼 팔려나갈 가능성이 없는 수많은 책들이 곧장 창고에 처박힌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에서, 어린이와 학생과 직장인과 노인들이 책을 접고 밑줄을 긋고 원목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다. 그곳에 책은 없다. 적어도 내가 찾는 책은 그렇다. 적잖은 경우 허탕을 친다.

물론 출판업은 10권 중 한 권의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만들어 나머지 9권을 발행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많이 팔리는 책이 많이 팔려야 적게 팔릴 책도 존재할 수 있으므로, 많이 팔릴 책이 많이 팔리도록 최적화된 현재의 대형서점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시장은 동시에, 한국인의 도서 구입 비용 평균을 확 끌어올려주는 존재들 덕분에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동네책방' 뿐 아니라 현재의 대형서점에서도 만족스러운 소비를 할 수 없다.

그럼 대체 어떤 서점이 필요한가? 나 자신의 경우를 놓고 말해보자. 내가 원하는 서점은 이런 것이다.

  1. 책을 직접 들고 카운터에 갈 필요도 없게, 스마트폰의 바코드 리더 앱 등을 이용해 장바구니에 넣고 결제하면 집으로 보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책을 욕심껏 집다보면 굉장히 무거워지고 부피도 커진다. 그런데 어차피 당일에 사들고 간 책을 당일에 다 읽는 경우는 없다. 쇼핑은 서점에서 하고, 책은 집(이나 사무실이나 아무튼)에서 받아볼 수 있도록 완벽한 플로우를 제공해주는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면 아주 좋겠다(교보문고 바로드림을 언급하지는 않기로 합시다).
  2. 최대한 많은 책을 보기 좋으면서도 밀도 있게 배치해야 한다. 온라인 서점을 뒤적거리는 것과 도서관이나 (과거의) 대형서점 등에서 걸어다니면서 책을 찾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우연히 '어 이 책은?'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그것들을 바코드만 띡띡 찍으면 장바구니에 담겨서 다음날(혹은 며칠 후)에 집으로 배송되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쁘지 않은가.
  3. 쇼파라던가 문화 예술 공연이나 강연을 할 공간 등을 없애고 최대한 책에게 많은 공간을 제공할 것.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았더라도 실물을 접해본 적 없던 책을 직접 만져보고 페이지를 넘겨보는 그것이 더욱 서점의 본령에 가까운 게 아닐까. 서점에서 책을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래' 할 때 집중력이 향상되는 것이지, 지금처럼 문제집 펼쳐놓은 수험생들 틈바구니에서 부대끼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요컨대 내가 원하는 서점이란 '온라인 서점을 오프라인에서 내 몸으로 브라우징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개가식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단번에 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점, 신간이 아주 빨리 들어온다는 점, 빌려서 나갈 수는 없다는 점 등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만약 저런 종류의 서점이 생긴다면 나는 온라인 서점보다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구입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보고, 물건을 확인하고, 책꽂이에 꽂혀 있는 유사한 주제나 제목의 다른 책을 통해 신선한 영감을 얻는 일은 오직 오프라인에서만 온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서점은 교통이 편한 곳에 큰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한마디로 자릿값이 많이 든다. 그런데 정작 베스트셀러 등의 마케팅에는, 적어도 지금까지의 서점들과 비교해볼 때, 전혀 유리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서점에 과연 상업적 승산이 있을까? 그건 서점 업계의 관계자가 아니라면 함부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처럼 애초에 책을 많이 사던 사람들은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으로 엄청난 액수의 책을 질러놓고, 집에 와서 울부짖을 것이다. 나는 그런 서점에 가서 책을 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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