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7-09

[별별시선]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2008년 12월, 나는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원자력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비판했다. 그해 11월엔 바이오매스, 풍력, 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풍자성 칼럼을 썼다. 그러나 2017년 7월의 나는 당시의 나에게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9년쯤 됐으니 입장이 바뀔 법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다. 첫째, 신재생에너지의 기술적 발전에 대한 기대치가 수정됐다. 둘째, 한국뿐 아니라 세계의 자동차 산업이 변하고 있다. 셋째, 환경오염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나씩 짚어보자. 내 입장이 달라진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장밋빛 기대를 접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 가령 구글의 판단도 그렇다. 2007년 11월27일 구글은 google.org라는 비영리법인을 통해 ‘석탄보다 저렴한 재생가능에너지’(RE<C) 계획을 발표했다. 지열발전을 개량해 석탄보다 낮은 가격의 신재생에너지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것이었다. 유가가 하늘로 치솟고 수많은 기술 기업들이 신재생에너지라는 난제에 덤벼들던 시절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2011년 11월22일, 구글은 RE<C 계획의 실패를 선언했다. 대신 그 외의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에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신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은 꾸준히 개선되고 있으나 아직 갈 길이 멀다. 기대치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동시에 한국의 주요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자동차 산업이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가솔린 혹은 디젤이 아니라 전기를 동력원으로 삼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가령 지난 5일, 스웨덴의 자동차 메이커 볼보는 2019년부터 전기차 혹은 하이브리드 자동차만 출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이폰이 휴대폰 시장을 스마트폰 시장으로 바꿔놓았듯, 테슬라의 국내 진출은 전기차로의 전환에 있어서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전기차는 전기를 연료로 삼는다. 따라서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발전량을 줄이고 냉장고를 없애자는 식의 주장은 너무도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2008년과 달리 미세먼지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중이다. 미세먼지의 주요 발생 원인으로는 석탄화력발전과 디젤 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정부는 대신 액화천연가스(LNG)발전을 늘리겠다고 하지만, 석탄에 비해 비싸고 가격 변동이 심할뿐더러, 정도가 덜하다뿐이지 역시 미세먼지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신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은 날씨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LNG 등 화력발전소가 더 자주 가동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친환경적인가? 최근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탈핵 선언 철회를 촉구한 환경단체 ‘환경진보(Environmental Progress)’의 대표 마이클 쉘렌버거 역시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입장을 바꾼 경우에 속한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미세먼지 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동시에 개인과 산업체가 모두 안정적으로 충분한 전기를 공급받으려면 ‘탈핵’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연구와 투자를 유지하고 늘려나가되 현실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석탄에 비해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원은 현재까지 원자력뿐이다. 원자로 해체, 사용후 핵연료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비용을 모두 포함해도 그렇다. 원전 사고의 우려는 최대한 안전성을 높이고 운영 과정을 투명하게 함으로써 대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모든 사회적 위험 요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저는 생각을 바꿉니다.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했다고 여겨지는 이 말은,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유작인 「When The Facts Change」의 제목이 되었다. 그렇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경향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비고: 탈핵 및 국제 정치에 대한 노선 차이를 이유로 경향신문은 이 칼럼을 끝으로 나를 별별시선 필자에서 제외시켰다.


입력 : 2017.07.09 20:53:00 수정 : 2017.07.11 17:13:33

2017-07-04

[북리뷰] 통일의 길, 헬무트 콜에게 묻는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저·김주일 역·해냄·1만5000원

지난 6월 16일, 헬무트 콜 전 독일 총리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을 한 권 꺼냈다.

『나는 조국의 통일을 원했다』. 헬무트 콜 총리가 1991년 독일 통일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한지 5년만인 1996년에 펴낸 회고록이다. "1990년 10월 3일에 이루어진 독일 재통일,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우연, 필연, 그 아무것도 아니었을까?"(11쪽) 콜은 포퍼의 역사관을 인용하며 독일 통일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성과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익명의 역사 발전 과정에서 이리저리 발길질만 당하는 단순한 놀이공이 아니라, 책임을 갖고 역사 발전에 적극 참여할 능력과 사명감이 있"(11쪽)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통일'이라는 개념을 '외세 배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독일의 통일 과정은 완전히 달랐다. 헬무트 콜 총리 자신부터가 철저한 친 나토(NATO)주의자였고, 1983년 서독 영토 내에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미국의 전략 무기 퍼싱 미사일 배치에 찬성했다. 녹색당과 사민당의 반발이 엄청났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내 주장이지만, 만약 1983년 우리가 퍼싱 미사일을 배치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서독과 미국과의 관계는 큰 타격을 입었을지도 모른다."(27쪽)

그렇게 쌓아올린 미국, 영국, 프랑스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전범국가인 독일의 통일이 기존 전승국들에게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통일된 독일은 세계를 뒤흔들 수 있을만큼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한 존재이기에 위협이 된다는 이른바 '독일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국제 사회가 독일의 통일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기 때문이다. 콜은 그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기존의 우방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소련을 설득하는 어려운 과업에 임했다. 운도 좋았다. 정의감에 불타는 복음주의자 조지 H. W. 부시가 미국의 대통령이었고, 협상이 가능한 지적인 개혁 개방가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였으니 말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충격 속에서 헬무트 콜은 이른바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해 통일 논의의 주도권을 잡았다. 그 중 제3항은 "서독 정부는 독립적, 비사회주의 정당들의 참여하에 자유, 평등, 비밀선거를 원하는 동독 주민들의 요구를 지지한다"(125쪽)고 밝히고 있으며, 제5항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주 국가와 비민주 국가 사이의 국가연합적 구조는 한마디로 난센스다. 그것은 동독에 민주화된 정부가 들어섰을 때만이 가능한 것"(126쪽)이라며 기존의 정권과 선을 긋는 것이었다. 대내외적 압력에 굴복한 여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조기 총선에 임했지만 참패했고, 기민당과 연합한 동독의 군소 3정당의 연합체 '독일동맹'이 압승한다. 요컨대 서독은 동독에 민주적 절차를 강요했다. 그렇게 확보된 정당성이 있었기에 평화적인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이 한국에 번역 소개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약 20여년이 흐른 지금, 과연 우리는 독일의 통일 과정에 대해 보다 잘 알게 되었는가? '통일을 하면 돈이 많이 든다' 외에 다른 논의가 전무한 상태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헬무트 콜 총리는 독일의 통일을 원했고, 진지하게 현실에 대응했다. 2017년 현재,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현황은 어떠한가?

2017.07.04ㅣ주간경향 1233호

2017-06-20

[북리뷰] 뜨거운 반미주의를 바라보던 냉철한 시각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
데이비드 스트라우브 저·김수빈 역 박태균 해제·산처럼·2만원

1976년부터 미국 국무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기 시작한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주 활동 무대는 한국과 일본, 특히 한국이었다. 1979년 한국에 부임한 그는 서울 출신의 한국인 여성과 결혼했고, 1984년부터 1986년까지, 그리고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국무부 한국과에서 일했다. 마지막으로 2002년부터 2004년까지는 한국과장직을 역임했다. 이른바 '한국통'이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2015년 첫 책을 썼다. 그런데 그 주제가 다름아닌 '반미주의'다. 그 어떤 미국인보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국통 외교관의 눈으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반미주의의 열풍을 되짚어본 것이다.

일차적으로 미국인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쓴 책이지만, 저자는 "특히 미국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 관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내부 정보'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당시 미국의 생각을 알게 되면 십중팔구 깜짝 놀랄 것"이라고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예고한다. 왜냐하면 "한국 언론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거의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쪽)

기억을 더듬어보자. 그 시절 한국인들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월드컵 16강 진출을 넘어 '4강 신화'를 달성했다는 자부심에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승리의 서사는 "한국인들이 자국의 역사를 특히 근대사를 열강들의 손아귀에서 희생양이 되어온 역사로 인식"(277쪽)하는, 말하자면 '희생양 내러티브'를 대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희생양 내러티브는 더욱 강화되었다. 스트라우브의 회고에 따르면 "1999~2002년에 미국은 한국의 모든 역사적 가해자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31쪽)

진보 진영에서 익숙한 세계관에 따르면 실로 그러하다. 미국은 '에치슨 라인'을 설정하여 북한의 침략을 유발했다. 실제로는 '한반도 포기 선언'을 한 적 없지만 대체로 그렇게 알려져 있다. 미국은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의 학살을 수수방관했다. 미국 대사관이 백방으로 노력하여 사태를 파악하고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1999년부터 2002년까지 희생양 내러티브는 언론의 경쟁적인 보도를 타고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한국인에게 미국이란 노근리에서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한강에 포름알데히드를 버려서 서울 시민들의 건강을 위협하며, 쇼트트랙 금메달을 빼앗아가고, 두 명의 여중생을 군용 장갑차로 치여 죽인 후 사과하지 않는 오만방자한 폭력의 제국이었다. 저자는 이 모든 사안이 왜곡되었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단정지을 수 없다고 충실한 레퍼런스를 제시하며 반박한다.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는 미국인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는 "미국 또는 미국 시민이 한 것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상당 부분 기반으로 한, 미국 전체에 대한 적의의 표출"(294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반미주의는 언제라도 되살아날 수 있다.

이 책은 '참여정부 1기' 출범 무렵의 한국을 바라보던 미국의 시각을 제공해준다. 청와대가 앞장서 사드 배치와 관련된 논란을 키우는 지금, 우리 모두 진지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물론 "미국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의 관점을 아는 것이 유용하리라 생각한다."(7쪽)

2017.06.20ㅣ주간경향 1231호

2017-06-11

[별별시선] 한·미동맹에 대한 세 가지 오해

사드 배치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는 수상하기 짝이 없다. 대체 왜 끝없이 어깃장을 놓는 것일까? 어차피 미국은 사드를 못 뺀다는 전제하에 벌이는 벼랑 끝 전술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판단은 미국과 한·미동맹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하고 있다. 하나씩 따져보자.

‘한반도는 미국에 이른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한·미동맹을 먼저 파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럴 리가. 한국은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가 결코 아니다. 미국에 전략적 요충지란 석유가 나오는 중동, 유럽을 향해 띄운 ‘항공모함’ 영국, 중국과 러시아 견제를 위한 최대 거점인 일본 등이다. 과거에 그어졌던 ‘애치슨 라인’이 보여주었다시피 한반도는 그에 포함되지 않는다. 2002~2004년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한국통’ 데이비드 스트라우브의 책 <반미주의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보자.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 전까지 한국은 미국에 전략적 중요성이 없었으며 아시아 본토에 미국의 병력이 존재할 경우 미국에 과도한 리스크만 안길 뿐이라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일치된 견해였다. (중략) 미국은 한국전쟁으로 4만2000명에 이르는 미국 시민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등 큰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역대 미국 대통령들에게는 남한을 ‘잃어버려서’, 그런 희생을 헛된 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했다.”(50쪽) 미국에 한반도는 ‘중요하기 때문에 지키는’ 땅이 아니다. ‘지켰기 때문에 중요해진’ 곳에 가깝다. 한국 정부가 미국을 어떻게 대하건 미군이 남아 있으리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한미군이 철수한다 해도 북한은 한국을 선제공격할 수 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을 폭격해도 미군이 직접 반격을 당할 위험이 거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 병력의 손실 없이 폭격이 가능할 경우 결코 폭탄을 아끼지 않는 나라다. 주한미군은 북한보다 오히려 미국의 군사 행동을 제약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안전핀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북한의 반격은 주일미군을 향할까, 한국을 겨냥할까? 진보 진영 자주파들은 ‘북한의 주적은 미국이지 한국이 아니다’라고 굳게 믿고 있지만, 북한은 미국이 아무 공격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연평도를 포격하고 천안함에 어뢰를 쏜 바 있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그릇된 종교적 믿음을 안보의 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싸일 경우 발생하게 될 경제적 혼란을 미국이 원치 않으므로 북한 선제타격은 있을 수 없다?’

과연 그럴까? 물론 미국은 혼란을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는 사정이 다르다. 제임스 코미 전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폭로로 궁지에 몰린 트럼프가 임기를 다 채워나간다고 가정해 보자. 형사 피의자 신세로 전락하기 싫다면 무조건 재선에 성공해야 한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쇼’를 벌여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지난 4월13일, 별다른 전략적 실익 없이 아프가니스탄 이슬람국가(IS) 지하기지에 ‘모든 폭탄의 어머니’라는 별명을 지닌 GBU-43/B를 투하했다. 핵무기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폭탄이다. 그리고 언론 앞에서 우쭐거렸다. 트럼프가 재선용 카드로 북핵 문제를 ‘날려버리고’ 싶어한다면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고? 불과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트럼프의 당선 자체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의 자주파들이 가지고 있는 미국과 세계에 대한 관념은 1970년대의 리영희가 1960년대 일본 좌파들의 그것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2017년 현재, 반세기 전의 세계관에 입각해 대한민국의 외교 안보 정책이 짜여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재인 정권의 정직한 입장 표명과 대국민 토론이 필요하다.


입력 : 2017.06.11 21:16:02 수정 : 2017.06.11 21:24:35

2017-06-06

[북리뷰] '비국민'을 배제하고 '국민'을 앞세우는 그들

누가 포퓰리스트인가
얀 베르너 뮐러 저·노시내 역·마티·1만4000원

'포퓰리즘'이라는 개념은 일종의 정치적 으르렁말이다. 특히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소위 '퍼주기 공약'을 일삼는다는 비난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뿐 아니라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프린스턴 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얀 베르네 뮐러는 바로 그 점에서 문제의식을 느끼고, 포퓰리즘에 대한 짧은 분량의 개론서를 썼다. 『누가 표퓰리스트인가』를 펼쳐보자.

"이렇게 포퓰리즘 거론이 흔한 요즘--현대 민주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카르사테프는 심지어 현대를 "포퓰리즘의 시대"라고 부른다--혹시 우리가 포퓰리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건 아닌가 하는 관찰에서 이 책은 비롯되었다."(10쪽)

우리가 20세기 말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수많은 '이론가'들과 달리, 저자는 길고 현란한 문장으로 빙빙 돌려 말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은 민주주의 최고의 이상("국민이 직접 통치하게 하자!")를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다."(16쪽)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민주주의'이다. 포퓰리즘은 예컨대 왕정이나 귀족정 등과 달리 어쨌건 민주주의의 한 종류에 속한다. 그러나 타락한 민주주의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타락은 국민주권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앞세워 벌어진다는 것이다.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 개념 정의상 '완전한' 실현이 불가능하다. 모든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고, 선호에 차이가 있으며, 사회에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표하는 자와 대표되는 자, 어떤 사안에서 이득을 보는 자와 손해를 입는 자의 간극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포퓰리스트들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부정한다.

포퓰리스트가 말하는 '국민'은 "도덕적으로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33쪽) 존재다. 그리고 "포퓰리스트는 오로지 자기들만 국민을 대표한다고 주장"(33쪽)한다. 그 결과, 첫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는 사람들만이 '진짜 국민'이 된다. 둘째, 포퓰리스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진짜 국민'에서 배제된다. 즉 '순수하고 완벽하게 단일한' 국민의 존재를 위해, 누군가가 '비국민'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이는 해방 후 지금까지 '빨갱이'나 '호남'을 타자화하는 극우 세력의 그것과 유사해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의 군사 독재 세력은 '주권자인 국민 전체'를 대변하고 있다는 도덕적 우월성 대신 박정희 신화, 경제발전의 성과를 앞세워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해왔기 때문이다.

얀 베르너 뮐러가 말하는 포퓰리즘적 정치는 오히려 '촛불 시민의 함성'에서 모든 정치적 선택과 행동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는 오늘날의 풍경과 더욱 잘 맞아떨어진다. 행정부만 바뀌었을 뿐 '기득권 세력'이 존속하고 있으며 그들이 대통령을 '왕따'로 만들고 있다는 식의 피해자 서사가 득세하는 모습 또한 그러한 우려를 증폭시킨다.

포퓰리즘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맞닥뜨리고 있는 가장 큰 위험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일면이다. '포퓰리즘을 추방하자'는 주장은 그러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정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정직하게 조율해나가며 공존하는 성숙한 민주주의로의 이행만이 정답일 것이다. 이 작고 가벼운 책은 그 무거운 고민을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되어준다.

2017.06.06ㅣ주간경향 12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