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3

포방터 돈가스가 '소확행'인가

한국의 언론 종사자들도 분명히 SNS를 할 것이고,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상당히 많이, 열심히들 하고 있을 것인데, 왜 이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지 의문스럽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하여 큰 화제를 불러모은 '돈카 2014' 돈가스집, 일명 '포방터 돈가스'의 인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언론의 소개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2018년 12월 23일 조선일보 기사.

돈가스 하나 먹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은 남들 보기엔 ‘쓸데없는 짓’ ‘실없는 짓’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9시간 이상 줄을 서서 돈가스 한 그릇을 먹는 ‘노력의 과잉투자’를 이들은 다 기꺼이 하고 있었다. 트렌트 전문가들은 올해와 내년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소확행’을 꼽고 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이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에겐 ‘소확행’이 ‘지구를 지키는 일’ 만큼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돈가스 집 앞의 긴 행렬은 증명하고 있었다.

이 문단에서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시피 거기 기다리며 줄을 서는 이들에게 이 돈가스집에서 돈가스를 먹는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그렇다면 '소확행'이라는 말에 현상을 끼워맞추기보다, 왜 이들에게는 돈가스 하나 먹는 게 이토록 중요한 일이 되었는지 이유를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원인은 단순하다. SNS에 인증하는 문화가 낳은 현상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처럼 불특정다수에게 전시하는 종류의 SNS를 하지 않더라도, 카카오톡이나 기타 지인들에게 공유하는 SNS를 누구나 다 하는 세상이다. '야, 나 그 유명한 백종원 포방터 돈가스 먹고 왔다'고 한마디 하면서 인증하고 싶은 바로 그 욕망이 이런 고난의 행군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무언가를 해냈다는 것을 인증하고, 그리하여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서는 절벽이라던가 폭포라던가 하는 곳에서 인증샷을 찍어서 올리려다가 목숨을 잃거나 위험에 빠지는 사람들이 나온다. 또래집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청소년들은 별별 행동을 다 하고, 어른들 역시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거나 소득수준에 걸맞지 않는 소비를 감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평소에 잘 타지도 못하는 산을 굳이 올라가서 셀카를 찍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넣는 중년들이나, 포방터 돈가스집에 전날 새벽부터 줄을 서서 인증샷을 올리는 청년들이나, 인증의 행복을 찾는 것은 마찬가지다. 한국의 언론이 사회 현상을 보다 심층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본다.

왜 20대 여성은 현 정권을 지지하는가

며칠 전부터 언론에서 '20대 남성이 현 정권에 등을 돌린 이유'를 알아보자고 나서는 모양새다. 가령 중앙일보에 실린 이 기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 왜 20대 여성은 현 정권을 지지하는가? 갓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젊은이의 취업이 어렵다면 그것은 남녀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남자들은 '페미니스트 정권'이라는 구호 자체에 실망한 듯한 기색을 보이지만, 여자들은 그 거창한 구호가 한낱 말잔치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20대 여성은 현 정권을 든든하게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꼰대질'을 더민주가 안 하지는 않지만 자한당 측은 감추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 둘째, 더민주 자한당 양자택일 구도가 유권자에게 사실상 강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 셋째, 가장 직접적으로 꼰대질을 당하는 코호트가 노골적인 자한당 꼰대보다는 위선적인 민주꼰대를 지지하는 것.

가령 탁현민 같은 분이 청와대에서 버티는 차원을 넘어 실세로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 정권'을 보면 우습다는 생각이 들고 실소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전 정권에서는 윤창중이 여성 인턴을 자기 호텔방에 불렀는데 그때 팬티만 입고 있었는지 팬티도 안 입고 있었는지 등을 놓고 한동안 언론이 시끌시끌했다. 그런 식이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절대평가를 하면 현 정권은 합격이 아니지만 정치는 상대평가다.

그래서 현 정권, 청와대, 더민주, 지지자들은 절대 자한당의 숨통을 끊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날 구석을 뚫어주고 빌미를 마련해준다. 이른바 적대적 공존 구도인 것이다. 20대 여성은 한국 사회의 억압에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인구 집단이기에, 이들은 탁현민이 벌이는 온갖 쇼를 보며 혀를 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해한 백색 음모'를 유포하여 여자들을 시집보내자는 소리까지 했던 지난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치 세력에는 차마 표를 주지 못한다.

물론 나는 현 정권의 에너지 정책, 경제 정책, 교육 정책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으며, 여성주의의 실천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을 여지가 차고 넘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론조사상 20대 여성들의 지지율 높은 걸 '얼빠들'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건 천박한 여성혐오일 뿐이다. 정치적 지지와 반대는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다양한 갈등이 있고, 그 갈등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 갈등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20대 여성의 지지를 좌우하는 대단히 큰 갈등은, 한국 사회가 '젊은 여자'들을 너무도 쉽게 손가락질하고 재단하며 평가하려 든다는 사실 그 자체다. 유권자 집단으로서의 20대 여성은 그런 면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와 조롱을 일삼던 이들과 한 편에 서는 일은 절대 피하려고 들 것이며, 그것은 어지간한 경제적 유인동기마저도 가볍게 능가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더민주 정권이 경제를 어지간히 말아먹어도, 윤서인이 찍는 정당과 대선후보에 20대 여성들이 투표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대통령 지지율은 경기 따라 좌우되지만 정치적 성향은 훨씬 견고하다. 사람이 밥을 굶으면 죽지만, 예수님의 말마따나 빵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대선에 홍준표가 나온다고 했을 때, 20대 여성들이 홍준표를 찍게 하려면, 홍준표가 문자 그대로 이순신급 업적을 쌓아도 절반 정도 넘어올까 말까라고 볼 수 있다. 왜일까? 20대 여성을 계속 멸시하는 자들(윤서인, 일베, 기타등등)과 같은 후보를 찍는다는 것은, 20대 여성의 입장에서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인간의 심리다.

경상도의 자칭 '진보'들은 김영삼이 경제 다 말아먹은 직후에도 전라도 사람 김대중 찍기 싫어서 조순을 지지한다는 둥, 정동영이 후보 되니까 이명박을 찍지 않나 선거날 낚시 가자고 인증샷 놀이 하지 않나, 그러고 있었다. 그때 그런 선택을 했던 이들은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호남혐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지어 본인들이 당하는 입장인 20대 여성들이, '김치녀' 운운하며 낄낄대는 이들과 같은 후보에 표를 던지고 인증샷을 올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20대 여성이니까 만만하게 보고 '계도'하려 들지 말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판단을 복잡하게 하지 않는다. '내가 신뢰하는 이 사람이 신뢰하는 저 사람이 신뢰하는 그 사람을 신뢰'한다. 그러니까 경제 정책이나 탁현민이나 뭐나 뭐나 마음에 안 들어도, 통상적인 20대 여성이 윤서인이랑 같은 후보를 찍을 수는 없다. 신뢰의 사슬이 뚝 끊긴다.

20대 여성 입장에서 볼 때, '정부 하는 꼴은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저 새끼 때문에 야당은 못 찍겠다'에서 '저 새끼'에 해당하는 사람이 자한당 내외에 너무도 많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제3의 세력을 지지하면서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투자를 할 유인동기나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적대적 공존 구도의 견고한 버팀목이 되고 만다. 고령의 남성들이 그런 매커니즘으로 자한당 찍듯이 젊은 여성들도 저런 이유로 더민주의 열렬한 지지층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놀랍게도, 여자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2018-10-02

당갈, 정글북, 여성 서사

당갈을 보면서 '이건 아버지가 중요 인물이니까 여성 서사 실격!' 이러는 분들이 있나보다. 얼마 전 듀나 님이 트위터에서 했던 말이 맞다. '나는 이 작품이 왜 완벽한 여성 서사로서 실격인지 안다'고 뽐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여성 서사의 흥행에 큰 도움이 안 된다.

마이너리티가 중심이 되는 서사는 원래 '완벽'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사례가 바로 『정글북』이다. 『정글북』은 키플링이 삘받아서 쫙 써갈긴 모글리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인도인'이기 이전에 '인간'의 대표자 자격을 지닌다.

인간은 숫적으로 소수자이지만 서사의 중심이다. 그래서 『정글북』의 모글리 이야기는, 백인 남자애들이 아무런 거리감 없이 감정이입한다는 맥락에서의 '보편성'을 어렵지 않게 획득했고 영국을 지나 전 세계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문제는 그 모글리가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다음의 이야기이다.

펭귄클래식 『정글북』의 해설에 따르면, 키플링이 직접 쓴 그 후의 이야기에서 인도 북부의 삼림 관리원 기스본(당연히 백인)은 정글을 떠난 모글리를 순찰대원으로 채용하고, 모글리는 기스본의 딸과 결혼하며, 기스본의 하수인이 된 모글리는 잿빛 형제들을 기스본에게 사냥하라고 몰아주기까지 한다.

이 엄청난 간극은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가? 『정글북』에서는 모글리가 '인간'의 대표이지만, 정글을 떠난 후의 이야기 속에서 모글리는 한낱 '인도인'이며 키플링이 보는 '인간', 즉 영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글을 떠난 모글리는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도 중심에 설 수 없는 소수자가 되고 만 것이다.

모글리가 정글 속에서 경험하는 이야기는, 당연히 '인간 중심적'이고 '제국주의적'이며 '남성 중심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독자를 매혹시키고 꾸준히 재창작을 불러오는 강렬한 에너지가 잠재해 있기도 하다. 거칠 것 없이 달려나가는 영웅 서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글리가 소수자가 된 다음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후련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정글 밖 세상은 '영국인'들의 것이지 '인도인'의 것이 아니니까. 키플링은 모글리를 '인도에서 흔히 보이는 하인'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그 문제를 치워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스로 소수자임을 인식하면서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은 채,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 상황과 현실 속에서 주체적인 서사를 확립하고자 한다면 어떨까? 그와 같은 조건 하에서 소수자인 주인공은 모글리처럼 단순명료한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세상이 완벽하지 않고, 그 속에서 경험하는 일들은 더욱 완벽함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소수자가 소수자인 채로 주인공인 이야기들은, 만드는 사람과 수용하는 사람 모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고 쓰고 듣고 보는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서사 많이 봅시다.


예전에 썼던 트윗 타래를 갈무리한 게시물입니다.

2018-09-22

'맛 칼럼니스트'인가, '재료 근본주의자'인가

전체는 부분의 합과 동일할까, 아니면 그보다 더 클까? 맛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달고 인쇄 매체와 방송을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중인 황교익에 대해 조사와 고민을 계속할수록, 내 머릿속에는 엉뚱하게도 저 철학적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2011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 앞에 첫 선을 보인 다큐멘터리 〈트루맛쇼〉는 당시 급속히 번져나가던 '맛집'이라는 트렌드에 반기를 드는 영화였다. 당시 MBC의 PD였던 김재환이 일산의 한 쇼핑몰에 직접 점포를 낸 후, 극단적으로 매운 맛을 낸 '죽거나 말거나 돈까스'를 주 메뉴로 선정했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일부러 맛을 느끼기가 힘들만큼 맵게 만든 음식을 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게는 방송에 '맛집'으로 소개되었다. 어떻게? 김재환 감독이 대범하게 폭로한 동종업계의 공공연한 비밀 때문이다. 식당 측은 방송 외주 제작자에게 돈을 주고, 외주 제작자는 그 돈을 방송국과 공유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소비자들은 음식 같지 않은 음식을 먹게 된다. 'TV에 소개된 맛집'이라는 가짜 정보에 속아가면서.

황교익은 바로 그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한국의 요식업계가 매운 맛, 단 맛, 짠 맛으로 범벅이 된 메뉴를 내놓으며 사람들의 입맛을 망치고 있다는 그의 평소 취지와 영화의 내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트루맛쇼〉가 개봉한 것은 2011년, 맛집을 찾아 다니는 새로운 유행이 꿈틀대는 가운데, 사람들은 '내가 먹는 이 음식이 과연 맛있는 음식인가'를 궁금해하며 누군가가 명확한 답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김재환 감독은 'TV 맛집은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폭로를 했고, 그 이면에는 황교익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한 주장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미각의 제국』의 취지는 단순명쾌하다. 우리는 매운 맛, 단 맛, 짠 맛 투성이인 양념에 가려져 온갖 재료들의 진정한 맛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맛, 양념에 가려지지 않은 재료의 맛에 대해 따로 신경을 쓰고 공부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황교익은 단언한다. "단맛의 음식을 두고 맛있다 찬사를 보내는 것은 미식가로서 자질이 없다는 증거이다."(『미각의 제국』 35쪽), "고추에는 캡사이신이라는 매운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것이 입 안에 들어가 통각을 자극하면 몸에서 이 통증을 잊기 위해 엔돌핀이라는 '생리적 마약'을 분비하게 되고, 따라서 기분이 좋아지게 되니, ...(중략)... 그러니까 매운 고추를 즐기는 우리 민족은 엔돌핀, 즉 '생리적 마약' 중독자들이라 할 수 있다."(같은 책, 28쪽)

단 맛과 매운 맛 외에도 '악당'은 더 있다. 다들 좋아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 역시 황교익의 비판 대상이다. 이렇듯 우리가 좋아하는 맵고 달고 짜고 참기름 냄새 고소한 양념들은 결국 "고기나 낙지, 배추, 생선, 떡 같은 주요 재료의 맛이 어떤지 파악할 감각의 여유"(같은 책, 28쪽)를 빼앗는다. 특히 "대박 음식점 주인들"은 바로 그 점을 악용해, "미성숙한 미각의 소유자"인 젊은이들로부터 "단맛에 대한 이런 '무뇌아적 반응'"(같은 책, 34쪽)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황교익의 비판이다. 〈트루맛쇼〉는 바로 이와 같은 미각 이론 위에 방송국과 외주제작사, 그리고 '방송에 소개된 맛집'의 공공연한 비밀을 다루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제 소위 '맛집'들이 다 맛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너무 달거나 맵거나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으며 즐거운 식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이제는 상식의 영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중적 인식의 개선에 황교익과 김재환이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는 꾸준히 대중과 불화하고 있다. 숱한 논쟁을 피하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 불러오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사실 〈트루맛쇼〉에 출연하여 "우리나라의 맛집 방송이 왜 이러느냐?"는 질문에 "방송이 천박한 건 시청자가 천박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을 때부터 이미 그 숱한 논란은 예견되어 있었다. 그는 직설적으로, 대단히 강한 표현을 써가며, 확신을 갖고 본인의 입장을 피력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황교익이라는 이름을 검색하면 나오는 논란들을 몇 개만 추려보자. 2012년부터 2013년 무렵까지 그는 생선회를 활어회가 아니라 선어회로 먹는 것이 "과학적"으로 합당하다는 주장을 펼쳐나갔다. 2015년에는 천일염이 비위생적인 소금이며 정제소금을 먹는 것이 옳고, 관광상품으로 팔리는 게랑드 소금 등의 예외를 제외하고 나면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식탁 위에 천일염을 올리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2017년 7월에는 방송인 김어준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자폐적인 행동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사회적으로 적잖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2018년 현재까지 페이스북에서 떡볶이가 왜 맛없는 음식인지, 왜 한국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지 등에 대해 잊을만하면 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이 가운데 '사회적 자폐' 논란을 제외하고 나면,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논리는 동일하다. 떡볶이는 맛이 없다. 왜? 쌀로 만든 떡의 맛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하는 고추장과 설탕 등의 양념 범벅 때문에. 활어회는 맛이 없다. 왜? 갓 잡아 사후경직이 온 단단한 생선살을 씹을 뿐이며, 그것을 씹어넘기기 위해 초고추장이나 묵은 김치의 힘을 빌리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천일염은 맛이 없다. 왜? 천일염에 포함되어 있는 마그네슘이 만들어내는 쓴맛이 음식의 맛을 모두 망가뜨리기 때문에. 이 모든 논의는, 황교익이 동원하는 과격한 수사법을 제외하고 나면, 〈미각의 제국〉에서 제시된 그것과 동일한 궤적을 그린다. 재료 본연의 맛이라는 절대선이 있고, 그 길을 가로막는 양념이라는 방해물이 있는데, 한국의 많은 음식들은 심지어 제대로 된 양념조차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교익의 주된 논지는 그것이 특정한 재료에 국한되어 있을 때에는, 적어도 내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소나 돼지의 고기와 마찬가지로 생선 역시 어느 정도 숙성해야 맛이 살아난다. 우리가 소금을 먹을 때 느끼는 짠맛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염화나트륨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국내산 천일염은 균질한 맛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김장을 담그기 전에 소금 자루를 매달아놓고 오랜 시간을 들여 간수를 빼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대체로 옳은 말이며, 누군가는 황교익처럼 다소 거친 표현을 써서라도 비판할 필요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황교익이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식재료를 지나 요리를 거론하면서 인류학, 사회학의 초보적인 논의들을 자의적으로 동원한다. 그리하여 나온 것이 '사회적 자폐' 발언이다. 인간은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사회적 동물인데, 일부러 오랜 시간에 걸쳐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뇌에 손상을 주는 행위라고까지 그는 표현의 수위를 높였다.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황교익은 갑자기 박근혜 전 대통령을 거론하며 무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인류학적으로 보자면, '우리는 박근혜라는 공동의 적을 가지고 있으므로 같은 편'이라는 제스쳐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음식의 사회성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신경한 것은 황교익 본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가 공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비판의 예봉을 꺾지 않고 있는 대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떡볶이다. 우리가 '떡볶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올리는, 새빨간 국물에 떡과 라면과 오뎅과 약간의 야채를 넣어 끓인 바로 그 음식 말이다.

문제는 떡볶이야말로 대중적으로 널리 퍼진 이후 학창시절을 보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처음 접하는 '사교 음식'이라는 점이다. 떡볶이는 등하교길에 친구에게 사주고 얻어먹는 음식이며, 중고등학생들이 일부러 찾아다니는 최초의 맛집 메뉴이기도 하다. 워낙 재료가 간단하고 다들 좋아하기 때문에 손수 만들어서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나눠먹기도 좋다. 직장인이 되어서도 출출할 때면 여지없이 떡볶이와 순대가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인의 '소셜 푸드'인 것이다. 떡볶이를 맛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황교익의 개인적 취향이지만, 다들 모여 즐기는 떡볶이 타임에 인상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이 다른 이에게 '사회적 자폐'를 운운하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황교익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확인한 것만 해도 2018년 5월, 7월, 8월에 연이어 떡볶이에 대한, 혹은 떡볶이를 맛있는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 혹은 비아냥을 페이스북에 게재하며 여전히 그는 전쟁중이다. 그런데 그 전쟁이란 대체 무엇과의 전쟁인가? 황교익 스스로는 '한국인이라면 으레 떡볶이를 좋아하리라고 여기는 국가주의, 민족주의'에 대한 저항의 뜻을 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지만, 그 누구도 황교익에게 세상의 모든 떡볶이를 맛있게 먹으라고 강요하고 있지 않다. 황교익보다 떡볶이를 많이 먹는 사람들이야말로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맛없는 떡볶이집이 훨씬 많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크게 다를 바 없는 공장제 떡에 시판 고추장을 쓰는 떡볶이집의 순위를 매기며 최고의 떡볶이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미세한 차이 속에, 맛이 있기 때문이다. 음식은 재료의 맛에 기반을 두지만 단순히 재료의 맛을 다 합친 것을 넘어선다. 프랑스의 바게뜨와 이탈리아의 치아바타는 모두 밀가루와 소금, 물과 이스트만으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바게뜨를 치아바타와 같은 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바게뜨에 비해 치아바타는 밀가루 본연의 맛을 잘 살리지 못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재료는 같지만 다른 음식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처음 제시했던 철학적 화두를 떠올려보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특히 요리의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떡볶이는 재료도 고만고만하고 값도 거기서 거기인데 왜 어떤 떡볶이집은 성공하고 다른 곳은 폐업할까? 황교익은 재료의 맛에만 집착하면서 식중(食衆)이 무엇을 먹고 즐기는지에 대해 놓치고 있는 듯하다. 맛이란 차이에서 나온다는 단순한 진리 말이다.

황교익이 2008년작 『소문난 옛날 맛집』에서 스스로 밝힌 바, 그에게는 세 명의 자식이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그의 집에서는 인스턴트 라면이 금지된 음식인데, 자식들은 먹자고 조른다. 그런데 놀랍게도 입맛이 제각각이어서 그의 부인은 세 명의 자식들이 먹을 라면을 각각 따로 끓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은 다소 길게 인용해볼 가치가 있다.

"어째 그리 입이 제각각이냐. 라면에 달걀 푸는 법이 다 달라요. 첫째는 라면 다 끓고 난 다음 달걀을 넣되 노른자 깨뜨리면 안 되고, 둘째는 라면 끓을 때 다른 그릇에다 푼 달걀을 부으면서 휘휘 저어야 하고, 셋째는 다 끓고 난 다음에 달걀 넣고 젓가락으로 깨뜨려 저어줘야 해."

인스턴트 라면에 달걀만으로도 그렇게 맛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인터넷에 라면 요리법을 검색해보면 인스턴트 라면 하나로 얼마나 다양한 '장난'을 치는지. 인스턴트 음식이 아이들에게 획일화된 입맛을 강제한다고, 이를 먹이지 말아야 한다고 내내 주장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맛의 세계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소문난 옛날 맛집』, 189쪽)

그렇다. 황교익이 모르는 또 다른, 더 넓고 풍요로운 맛의 세계가 있다. 2008년쯤에는 얼핏 그 사실을 인정할 듯도 하더니만, 『미각의 제국』을 출간하고 〈트루맛쇼〉에 출연한 후 날이 갈수록 그는 더욱 강경한 '재료 근본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쯤 되면 누가 우리의 음식 문화에 있어서 "우리의 미각 기준을 그들의 것과 같아지게끔 조작을 하고 있"(『미각의 제국』, 45쪽)는 '제국주의자'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황교익은 문화권력으로 자리매김해갔고, 그러던 중 2018년에 접어들자 사람들은 북한의 평양냉면이 메밀의 고유한 향을 즐기기는 커녕 땅콩버터를 집어넣은 중국식 냉면처럼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음식은 달라지고, 차이가 생기며, 맛이 펼쳐진다. 인류 음식 문화의 진정한 수수께끼란 바로 거기에 있다. 물론 황교익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 《기획회의》 471호(2018년 9월 5일)에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칼럼입니다. 편집부에서 수정하지 않은 판본이니 정확한 인용을 원한다면 《기획회의》를 구입하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입(알라딘).

황교익의 레퍼런스, 『맛의 달인』

『맛의 달인』이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최고의 맛을 찾아 나선 신문사 기자 지로와 미식가인 아버지 우미하라가 요리 대결을 펼쳐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지로와 우미하라가 닭고기 요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게 되면, 먼저 서로 가장 맛있는 닭고기부터 찾는다.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닭고기는 좁은 닭장에서 인공 사료를 먹이며 대량 사육되는 닭임을 확인시켜주고, 진짜 맛있는 닭고기는 자연 상태에서 천연 사료를 먹고 자라는 닭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후 닭고기 맛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요리법을 연구하고 시식회를 열어 우열을 가린다.

몇 해 전 『맛의 달인』을 탐독하면서 지로 방식으로 맛의 세계를 깨쳐나가기로 작심하고 음식 재료 공부에 몰두한 적이 있다. 가령 '최고의 김치'를 상정하고는 그 작품을 그려나가는 것이다.

- 황교익, 『소문난 옛날 맛집』(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25쪽. 강조는 인용자.

황교익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시피, 그의 '미식'은 일본 만화 보고 배운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자신의 책에 직접 써 놓은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