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9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

입만 열면 '차별금지법이 필요하다!' 하던 분들 중, 지금 청와대와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주도하고 있는 '해리스 대사 콧수염 일제 순사' 레퍼토리에 똑부러지게 반대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쪽바리'가 혐오발언인 게 분명하다면, 일본계 미국인을 상대로 '일제 순사같은 콧수염' 타령하는 것이 혐오발언이다. 이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일처럼 여겨지지만, 우리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도 하다. 어떻게 우리 한국인이 백인과 일본인 혼혈인 미국 대사를 '인종차별'할 수 있느냐는 식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지만, 침착하게 설명해보자. 어떤 발언이 혐오발언이냐 아니냐, 인종주의적 언사냐 아니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속한 국가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 그저 '당사자에게 부여된 어떤 범주를 폄하와 모욕의 근거로 삼느냐'만 따져보면 된다.

가령 우리는 드록바를 '흑형'이라 부르는 게 인종주의적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50센트라던가, 쿤타 킨테라던가, 심지어 버락 오바마를 상대하더라도 '흑형' 타령을 하면 그것은 인종주의적 발언이다. 다시 말해 흑인에 대한 '흑형' 운운은 해당 흑인의 모국과 한국의 국력 차이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백인, 혹은 백인 혼혈이라고 해서 절대적으로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그 또한 억지다. 한국에서 미군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많은 혼혈인들이 당해온 모욕과 차별을 도외시하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드록바한테 '흑형' 하는 거나, 웨인 루니한테 '백돼지' 하는 거나, 둘 다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다. 해리스 대사를 두고 '일제 순사', '조선 총독' 운운하는 게 인종주의적 혐오발언이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있긴 한가?

유시민이 만들어낸 '인디언 기우제식 수사'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미 대륙 원주민은 날씨와 기후의 변화를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이 사안에 대해서도 굳게 입을 다물어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차별주의에 반대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파의 이익을 안겨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들은, 당신들은, 심지어 선량하지도 않다. 그저 차별주의자일 뿐이다.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세력에게 딱지를 붙이고 몰아세우기 위해 인권을 동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일말의 인권에 대한 관심 없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던 시절에는 당신들이 인권을 적에게 던지기 위한 돌맹이 취급하던 것이 유의미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제는 아니다. 나는 당신들의 '선량함'에 반대한다.

2020-01-12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제목: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2020년 1월 8일, 요헨 비트너(Jochen Bittner) 작성

독일, 함부르크 - 독일인들은 비이성적인가? 스티븐 핑커라면 그렇게 생각할 듯하다. 하버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핑커는 최근 독일 시사 잡지인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인류가 경제 성장을 멈추지 않으면서 기후 변화를 멈추고 싶다면, 원자력을 덜 쓰는 게 아니라 더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원자력을 몰아낸다는 독일의 결정은 "편집증적(paranoid)"이라고 말이다.

내 조국은 실로 독특한 실험을 감행하는 중이다. 메르켈 정부는 원자력과 석탄 발전소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한 것이다. 독일 최후의 원자력 발전소는 2022년 말에 폐쇄될 예정이며, 최후의 석탄화력발전소는 2038년 문을 닫을 예정이다. 동시에 정부는 친환경적인 전기차 구입을 촉진하고 있는데, 그에 따라 전력 수요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난 수십년간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에너지 소비는 1990년 이후 10퍼센트 상승했다.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독일이 위험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우려한다. 화석 연료와 원자력이 빠진 손실을 채워넣을 수 있을만한 신재생에너지가 적절한 시점에 마련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신재생에너지는 독일의 전력 공급 중 4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이상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적인 것보다 정치적인 것이다.

독일의 몇몇 지방에서 사람들은 점점 늘어만 가는 "풍력 농장"에 진력을 내고 있다. 새로운, 많은 경우 더 큰 풍력 발전기가 주변에 세워지는 것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해안가에서 산업 중심지를 이어줄 송전선이 새롭게 깔리게 될 지역에서도 주민들의 저항이 늘어가고 있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독일의 "에네르기벤데(Energiewende)", 혹은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새로운 송전선의 길이만도 5954킬로미터(3700마일)에 육박한다. 2018년 말 현재 실제로 건설된 송전선은 약 150킬로미터(93마일)에 불과하다.

이 계획은 전력 부족을 야기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을 안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석탄 화력 발전소보다 빨리 폐쇄하고 있는 탓에, 독일은 화석 연료에 의존하도록 상황을 만들어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독일은 필요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후에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에 대한 독일인들의 반대는 굳건하다. 60퍼센트의 독일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현상의 이면에 놓인 태도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편집증은 정확한 용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보다는 딜레마와 맞닥뜨렸을 때 얼어붙은 듯 멈춰버리는 대단히 독일적인 특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선한 일이라면 열성적으로 달려드는 독일 같은 국가에게 있어서, 원자력 발전과 기후 변화라는 두 개의 악을 놓고 선택하는 것은 거의 수행 불가능한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논의의 시작을 위해 언급하자면, 원자력 발전이 궁극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며, 독일인들은 특히 그 점에 대해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발생한 후,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아토마우스티에그(Atomausstieg)", 즉 원자력 발전을 단번에 완전히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왜? 당시 메르켈 총리가 설명한 바는 이렇다. "원자력 발전의 잠재적 위험은,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 위험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에만 용인될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 훈련받은 물리학자인 메르켈 총리는 원자력 재앙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같이 고도로 기술이 발전한 나라에서도 그러한 재앙이 발생했다는 점이 그의 마음을 바꾸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악인 기후 변화는 어떠한가? 그 재앙은 석탄화력발전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으며 거의 확실하게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메르켈 총리는 최근에서야 "기후 변화는 우리가 몇 년 전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했다. 동시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파리 기후 협약에서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나온 희망찬 숫자를 놓고 보더라도, 2020년 말까지 탄소 배출양의 40퍼센트를 줄인다는 목표치는 달성 불가능하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이해가 2011년 이후 훨씬 깊어졌으니, 각 국가들은 화석 연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가 원자력을 폐기하겠노라는 생각을 바꿀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원자력으로 회귀하는 것은 녹색당의 입장에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녹색당은 향후 메르켈의 기민당이 연정을 맺어야 할 상대이기도 하다. 녹색당은 1980년대 초 반핵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반핵운동은 녹색당의 DNA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기후 변화와의 투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중 구속 상태에 대해 녹색당은 그럴듯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한 듯하다. 아날레나 베르보크(Annalena Baerbock) 녹색당 공동대표는 독일 국영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석탄 발전소를 더 빨리 폐쇄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소를 더 오래 유지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러한 발상 자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나라의 그 누구도 우리 이웃의 정원에 원자력 폐기물을 묻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건 정말이지 맞는 말이다. 원자력 에너지가 방사성 폐기물과 기술적 사고의 위험을 사회에 전가시키면서 기업의 배를 불리고 있는 것 또한 맞다. 하지만 석탄 발전소가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계산 또한 참이다.

독일 에너지 실험의 비극은 독일의 거의 종교적 반핵 정서가 기술 발전에 따른 논의의 여지를 전혀 남겨놓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의 과학자들은 방사성 폐기물을 이용해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사용후 핵연료 보관 문제, 즉 원자력에 반대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인 그것의 해법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른바 고속증식로에도 나름의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재생 가능 에너지 시대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원자력은 석탄이나 가스 발전소보다는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일체의 원자력 발전소를 급속도로 폐쇄하면서, 독일은 [원자력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다. 독일은 어쩌면 인류가 본 것 중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인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는 기술과의 접점을 차단해버렸다. 독일이 현존하는 원자력 발전소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화석 연료의 사용을 급격하게 줄이는 방안이 될 수 있을텐데 말이다.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비이성적인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기회를 그냥 흘려 보내는 것은 메르켈 시대가 낳은 최악의 실수 가운데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요헨 비트너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의 토론 지면의 공동 담당자이며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기고한다.

원문: Jochen Bittner. “Opinion | The Tragedy of Germany’s Energy Experiment”. The New York Times, 2020년 1월 8일, sec Opinion. https://www.nytimes.com/2020/01/08/opinion/nuclear-power-germany.html.

2020-01-09

사막의 생명, 인간의 에너지

내 로망 중 하나는 사막 여행이다. 물론 생명에 위험이 없을만큼 안전한 루트와 일정이 제공될 때 일이지만, 아무튼. 나는 사막에 피어나는 온갖 식물과 동물들의 조화를 만끽해보고 싶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막도 생태계다. 사막에는 사막의 환경에 최적화된 동물과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아간다. 온대 기후에 적합한 우리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눈에 '가치' 있는 생물군이 매우 부족해서 그렇지, 사막의 생태계는 사막 나름의 논리와 치열함을 지니고 오늘도 작동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 서부 해안가 대도시에 살면서 인근 사막에 태양광 발전기를 뒤덮어버리는 미국 리버럴들의 '환경주의'에 동의하기 힘든 이유도 그래서이다. 그들은 생태계 보호니 환경이니 잘도 떠들지만, 자기 양심을 달래기 위해 사막 생태계를 황폐화시키는 일은 서슴치 않고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정말로 생태계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에너지 생산 및 소비 과정에서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발전 양식은 모두 지양하는 것이 옳다. 대신 원전처럼 아주 좁은 면적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래야 더 많은 땅에 더 많은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발자국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자연은 되살아난다. 흔히 '죽음의 땅'이니 뭐니 하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현장 인근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발을 끊자, 멸종된 줄 알았던 야생동물까지 모두 돌아와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반면 당신들이 뒤덮어놓은 태양광 발전기는 오늘도 전자파를 내뿜고, 거대한 풍력 발전기에는 곤충과 새들이 부딪쳐 죽는다. 누가 친환경인가? 누가 생태계 파괴자인가?

참고: Pat Brennan, "Desert damage: the dark side of solar power?", PHYS.ORG, 2009년 3월 30일.
Sammy Roth, "Study: California solar farms threaten desert species", The Desert Sun, 2015년 10월 19일.

2020-01-06

필립 풀먼에게서 배우는 글쓰기 수업

작가 필립 풀먼은 새로운 3부작 <먼지의 책>(The Book of Dust) 가운데 첫 번째 편을 깜짝 발표하면서 리라 벨라쿠아(Lyra Belacqua)의 세계로 돌아왔다.

<아름다운 야수: 먼지의 책 1권>(La Belle Sauvage: The Book Of Dust Volume One)은 풀먼의 71번째 생일에 맞춰 목요일에 출간되었다. 그가 앞서 내놓은 3부작의 후속작으로는 17년만이다.

<황금나침반> 시리즈의 리라는 중요 인물 중 하나로, 이야기는 리라가 생후 6개월이던 시절부터 시작한다. 수녀들 틈에 숨어 있는 리라의 삶에 11살 소년 말콤 폴스테드가 끼어들어, 그의 카누인 아름다운 야수에 리라를 태우고 보호해주게 된다.

풀먼을 이토록 성공적인 작가로 만들어준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 갓 시작하는 작가들에게 그가 건낼 조언은 무엇일까?

BBC와 마주 앉아, 풀먼은 그의 행운의 펜에 대해, 그리고 전동드릴이 돌아가는 상황에서는 일할 수 있지만 왜 절대 음악은 안 되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캐릭터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라.

그것은 신비로운 과정이다. 물론 나의 일부는 그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만들어내든 것과는 다른, 발견하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더 나은 단어를 찾아 종이 위에서 펜이 움직일 때까지 책상에 앉아 텅 빈 벽을 바라보며 기다린다.

이 과정을 신비롭게 포장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 느낌은 발명보다는 발견에 가까운 것이다.

마치 이야기가 이미 그곳에 있고, 내가 그것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그 이야기를 말하는 최선의 방식을 찾아내는 것과 같달까.

이 희한한 일에 대해 내가 모든 것을 확실히 안다고 할 수는 없고, 실은 어떤 식으로 장담을 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의혹에 빠져 있는 상태를 좋아한다.


2. 언제나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황금나침반> 시리즈를 끝내고 난 후, 더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황금나침반> 시리즈에서 말한 리라의 이야기는 결말로 향하고 있었고, 끝났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들이 늘 존재한다. <황금나침반> 시리즈가 끝날 때 리라는 고작 12살이었을 뿐이다. 성장하고 어른이 될 것이다.

리라에게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무언가를 해낼 것이다.

나는 그게 궁금해졌다. 말하자면 내 시각의 바깥에서, 내 눈이 닿는 구석 너머에서, 나는 내 흥미를 끄는 다른 캐릭터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점점 내 펜이 그 이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외에 퍽 많은 일들을 해오고 있었지만, 이 새로운 이야기의 설득력과 재미가 너무도 강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캐릭터들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저항할 수가 없었다.


3. 자신에 차 있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음악을 듣지는 마라.

나는 (내 글이) 좋다고 생각했던 적이 전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래, 이 정도면 되겠네" 정도다.

글을 쓸 때 나는 사실 의미보다는 소리를 더욱 의식한다. 어떤 단어가 문장에 들어갈지에 앞서 문장이 어떤 리듬으로 흘러갈지를 먼저 알게 되는 편이다.

이것은 내가 글을 쓰는 방식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음악이 틀어져 있는 상태에서는 글을 쓰지 못한다.

어떤 작가들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나는 시작조차 하지 못한다.

고요한 상태는? 좋다. 전동 드릴 소리는? 괜찮다. 교통 소음? 문제 없다. 하지만 음악은 절대 불가다. 그러므로 나는 고요한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리듬을 들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4. 어조(tone)가 구조보다 더 중요하다.

글이 흘러가는 방향이라면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글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방법은 모른다.

구조를 만들지 않는 것, 그렇다, 나는 그런 식이다. 하지만 나중에 구조가 잡힌다. 종종 구조를 어떤 근본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 않다.

구조는 피상적인 것이다. 책에서 근본적인 요소는 어조, 말하는 어조이며,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모든 문장을 바꾸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구조는 최후의 순간에 바꿀 수 있다. "중간부터 시작하겠다"라던가, 그런 비슷한 말은 가능하다. 구조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뒤따라온다고 할 수 있다.


5. 가장 좋아하는 펜을 골라라.

일단, 나는 볼펜과 종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이게 작동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행운의 펜을 가지고 있다. 몽블랑 볼펜이다. 무게와 크기가 완벽하기 때문에 사용한다.

그리고 잘 작동한다. 그 볼펜으로 여러 책을 썼다. 이제는 그 볼펜 없이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일단 글을 쓴다. 그리고 한 챕터나 두 챕터를 쓸 때마다 컴퓨터로 옮긴다. 지금껏 발명된 편집 도구 중 최고의 것이기 때문이다.


6. 자신을 위해 써라.

글을 쓸 때는 자신을 만족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다른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이란 누군가에게 읽힐 때까지는 온전히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그 상호작용에서 독자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고 싶은 것을 읽어야 한다.

나는 나를 위해서 글을 쓴다. 지금껏 있어온 모든 '나 자신들'을 위해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나부터, 처음으로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던 나, 50년 전에 옥스포드에 있었던 나, 학교 선생으로 일했던 나, 교실에서 이야기를 해주던 나.

이 모든 나 자신.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쓴다. 나는 넓은 독자층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았다. 그 독자들 속에 어른과 아이가 모두 있다는 점이 가장 좋다고 할 수 있다.


원문: "Philip Pullman: Rules of writing from man behind His Dark Materials", BBC, 2017년 10월 19일.

개인적으로 4번이 가장 인상적이다. 소설 뿐 아니라 기타 분야의 글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저 구절을 갈무리해두려는데, 혼자 보는 자료 모음집에 담아둘까 하다가, 전문을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려둔다.

2020-01-01

작년의 영화: <우상>(2019)

<우상>은 <비밀은 없다>의 남매편(자매편x 형제편x) 같다. <우상>에서 성매매가 등장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분들은 <비밀은 없다>에서 디지털성범죄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되짚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두 작품 모두 결백하지 않은 인간들이 등장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이야기.

<비밀은 없다>를 좋아한 사람이 <우상>을 좋아하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전자를 '이해'하면서 볼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후자도 적어도 '이해'는 하면서 볼 수 있다. 양자 모두 평균적인 한국 관객의 영상 리터러시보다 기준점이 훨씬 높기 때문에 애초에 흥행은 불가능한 작품이다.

<비밀은 없다> 이후 한국 영화가 이렇게 '영화답게' 나온 것도, 글쎄, 내 기억에는 중간에 끼워넣을만한 작품이 없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주요 사건 설정, 인물 구도, 기타등등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비밀은 없다>를 본 사람이라면 <우상>은 보고 나서 판단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싫음 말고...

참고로 나는 문제의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말죽거리 잔혹사>를 떠올렸다.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 씨발~' 하더니, 결국에는 강남의 입시학원 다니는 게 결론이었던 그 영화. <우상>도 '대한민국 정의 도덕 다 좆까라 그래 씨발~'을 외치는데, 이쪽은 그따위 얄팍한 자기변명이 아니다.

<비밀은 없다>의 연홍은, 애초에 그 남자와 결혼을 한 게 잘못이었다. 왜 결혼했을까? 그 남자는 '전라도 출신 미녀'가 필요한 정치 지망생이었고, 연홍은 탑 스타가 못 될 것이 거의 확실한 가수(지망생)이다. 물론 사랑도 했겠지. 남자의 야망에 탑승해 스포트라이트도 받고 싶었고. 근본적인 실수.

<우상>의 중식도 아주 근본적인 실수를 했다. 극중에서 아예 본인의 입으로 말을 해버린 그것일 수도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떠한 방향으로건 비극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세팅. 두 영화 모두, 두 인물의 근본적인 실수에서 출발해, 한국 사회가 없는 셈 치는 '터진 맹장'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극장에서 '터진 맹장'(참고로 이것은 영화와 완전히 무관한, 내가 방금 떠올린 은유다) 같은 걸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우상>을 안 보는 편이 나을 수 있고, 솔직히 본다 해도 뭐 이해가 될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비밀은 없다>를 따라갈 수 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봐도 좋을 것이다.

다음 영화에서 댓글을 보니까 정말 '그 장면'에 진심으로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우상>은 어쨌건 '우상 파괴'에 성공한 것이다. 흥행에는 실패했(다고 지금 말해도 큰 무리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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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25일 남겼던 기록. 내가 작년 본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우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