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도덕성'이라는 단어가 일본 문학에서는 '더러움'과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말은 확립된 도덕성에 반하는 경우에만 나타납니다.
하루키 1991년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 교수 시절 인터뷰 中
2020-07-19
인용: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 문학과 도덕성
2020-07-18
페스 내추럴 비강분무액
비염 환우 여러분. '페스 내추럴 비강분무액'을 사십시오. 3% 소금물 외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나잘 스프레이입니다. 건조한 코에 수분을 공급해주며 알레르기 오염원을 제거해주고, 삼투압 효과로 콧구멍도 어느 정도 뚫어줍니다. 성분이 단순해서 부작용의 우려도 매우 적습니다.
라벨을 보니 호주 제약회사 제품이고 생산국은 스웨덴입니다. 국내 비염 환자들이 많이 사야 국내 제약회사가 더 염가로 카피 제품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약국에 있길래 두 개 샀습니다.
가격은 싸지 않습니다. 제가 구입한 곳에서는 개당 1만2천원. 비염 환자라면 속는 셈치고 (비염 환자를 상대로 한 온갖 민간요법과 사기 의약품 및 의료행위가 좀 많습니까?) 한번 시도해보시길.
[노정태의 시사철] 젊은 박원순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젊은 박원순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철] 칸트와 '윤리 형이상학 정초'
대체로 속편은 본편보다 못하게 마련이지만 '대부2'는 예외다. 미국으로 건너간 비토 콜레오네, 그 뒤를 이은 아들 마이클 콜레오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걸작이다. 아들의 시대는 차갑고 쓸쓸하다. 아버지 때부터 알고 지냈던 프랭키 펜탄젤리가 마이클에게 등을 돌렸고 청문회장에서 증언하고자 한다. 마이클은 프랭키를 협박해 증언을 못 하게 막고 나서, 수감되어 있는 프랭키에게 심복인 변호사 톰 헤이건을 보내 제안한다. 마치 고대 로마에서 황제에게 반역을 꾀했던 자를 처분할 때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겠노라고.
반역자에게 자살을 요구하는 것, 그것은 '좋은 거래'였다고 톰이 말하자, 프랭키는 덧붙인다. 고대 로마인들은 뜨거운 욕조에서 정맥을 끊어서 죽곤 했는데, 자살을 앞두고 작은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 떠나는 톰의 뒷모습을 보며 프랭키는 자기에게 남은 마지막 여흥이라 할 수 있는 시가를 한 모금 크게 빨아들이고는, 그날 밤 그 방식대로 목숨을 끊는다.
칸트가 '대부2'를 봤다면 어땠을까? 흔히 갖는 편견과 달리 칸트는 유쾌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영화를 영화로서 즐겼을 것 같다.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프랭키의 선택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 윤리학의 사고방식에서 자살은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를 위반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
칸트는 도덕적 행위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가올 고통이나 공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내게 더 '이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윤리의 토대와 사회 자체가 허물어진다.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남을 속이는 짓이 용납된다면 그 누구도 남을 믿고 계약할 수 없게 되므로 역시 도덕과 윤리는 불가능해진다. 한편 본인의 소질과 능력을 개발하는 일, 다른 사람을 돕는 일 등은 꼭 지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도덕 원칙이 파탄에 이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스스로를 도우며 다른 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 불가결한 요소다.
'윤리 형이상학 정초'가 도달하는 실천적 윤리 준칙 네 가지를 정리해보자. 자살 금지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의무다. 이를 어기는 순간 모든 윤리적 판단과 행동이 불가능해진다. 거짓말 금지는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의무다. 지키지 않는다면 사회가 사회로서 존속할 수 없다. 재능 개발과 운명 개척은 자신에 대한 불완전한 의무다.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대충 먹고살 수 있지만, 온전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다. 자선과 선행 역시 불완전한 의무에 속한다. 사람들이 남을 돕지 않는다고 세상이 당장 망하지는 않겠지만 퍽 각박한 곳이 되어버릴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핵심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칸트는 그 어떤 종교나 통념에도 의존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은 신의 말씀이나 사회적 관습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그 모든 요소를 뛰어넘는 올바름을 찾고자 한다면 우선 이성적으로 보편타당한 원칙을 찾고, 그 원칙에 따라 도덕을 재구성해야 한다. 종교적 계시와 공동체의 관습에서 도덕을 찾던 중세를 지나, 이성과 법 및 규칙에 따라 사회를 형성하고 운영하는 근대로 넘어온 것이다.
박원순 시장의 난데없는 부고 앞에 온 나라가 망연자실한 상태다. 그가 남긴 공과 과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우호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여성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인권 변호사가 다름 아닌 성폭력 혐의를 뒤집어쓴 채 자살했다는 아이러니에 할 말을 잃어버린 이도 적지 않다. 경찰에 접수된 신고가 어떻게 박원순에게 전달되었는지 그 경위도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살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인 것이다. 국회의원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의 회계 문제가 불거지자 마포쉼터 손영미 소장이 자살한 것이 지난달 6일, 고작 한 달여 전 일이다. 이전에도 여러 정치인 및 관련자의 자살이 잇따랐다. 그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는 말기로 하자. 우리 사회가 진실이 무엇이냐는 요구를 '애도'의 눈물로 덮어버리는 이상한 관성에 빠져 있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자살은 왜 나쁜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람'이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고대나 중세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목적이 얼마나 훌륭하고 숭고하냐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어떤 경우에는 살인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자신의 '패밀리'를 위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는 마피아가 상대 조직의 두목에게 너의 '패밀리'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2020년의 우리가 근대국가의 한복판에서 마피아의 윤리를 용납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박원순이 걸어왔던 인권 변호사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그의 성폭력 혐의만큼이나 자살함으로써 법에서 도피한 점 역시 문제적이다. 변호사는 법 속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성폭력 혐의를 받는 사람 또한 다른 형사 피의자와 마찬가지로 변호인의 도움을 통해 공정한 재판을 거쳐 합당한 처벌을 받거나 무죄를 입증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스스로 행사해야 한다. 그렇게 쌍방이 공정하게 맞서 실체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근대 법 체계의 바탕에 깔려 있다. 하지만 박원순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에게 명예와 권력을 안겨준 근대적 법 체계를 송두리째 내팽개쳐 버렸다.
'대부2'는 참 멋진 작품이다. 로버트 드니로와 알 파치노라는 명배우 두 명이 빛을 발하고,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연출 또한 절정에 올라 있다. 그래도 그 본질은 조폭 영화다. '패밀리'를 위해 사법 체계를 교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현대 민주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철학을 공부하기 전 나는 법대에 다녔다. 인권 변호사 박원순은 진보적 법학도의 우상이었다. 이런 사건일수록 그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한다. 우리는 투명하고 합리적인 법치국가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젊은 박원순이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2020-07-04
[노정태의 시사철] 사람은 둘, 짜장면은 하나… 文정부가 나누는 방식
사람은 둘, 짜장면은 하나… 文정부가 나누는 방식
존 롤스와 god, 그리고 '정의론'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에서 살았던 한 소년이 있었다. 남들 다 하는 외식도 몇 번 못 하고 자랐다. 늘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다가 질려서 밥투정을 하자 어머니는 비상금을 꺼내어 짜장면을 시켜주셨다. 그다음 이야기는 독자 여러분도 다 아시리라.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상황 자체에 집중해보자. 사람은 두 명인데 짜장면은 한 그릇이다. 나눠 먹어야 한다. 어떻게 나누어야 공정할까? 정답이 있다. 한 사람이 나누고, 다른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가장 좋다. 상대방이 무엇을 고를지 알 수 없으니 나누는 사람이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나눌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나누어진 짜장면의 양을 평가할 방식 같은 걸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짜장면을 나누는 사람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다. 절차적 공정함이 갖춰진다면 결과적 정의는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평생 단 한 그릇의 짜장면도 먹어본 적이 없었겠으나,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가 일찍이 '정의론'을 통해 주장한 내용도 바로 그것이었다.
약간 황당해 보일 수 있는 질문을 해보겠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왜 나쁜가? 이게 무슨 소리냐 싶겠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목표로 삼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는 차별이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차별하건 차별하지 않건 최대 다수가 최대한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이니 말이다.
롤스는 수긍하지 못했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공정한 절차가 정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내용을 담아 1958년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논문을 펴냈고 가히 파천황 격인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논문의 힘으로 1962년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후 1971년 '정의론'을 펴냈고, 20여 년이 넘는 고민을 담아 1991년에 개정판을 출간했다. 철학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과학 분야에서 반드시 참고하는 현대의 고전이다.
'정의론'은 대단히 두껍고 어려운 책이지만 난해하지는 않다. 요약해보자.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면 좋겠지만, 세상에는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불평등은 모든 이에게 공정한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질 때, 그리고 불평등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의 처지가 이전보다 향상될 수 있을 때, 오직 그럴 때에만 허용된다.
여기서 앞서 말한 '짜장면 문제'가 나온다. 누가 시행하더라도 공정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그것을 '절차적 정의'라 불렀다. 물론 세상 일이 짜장면 나눠 먹는 것처럼 간단하지만은 않다. 중요한 건 정의에 대한 고민을 절차의 문제로 바꿨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완벽한 정의에는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합리적인 문명사회라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론'에 실린 롤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형식적 정의, 즉 규칙성(regularity)으로서의 정의만 있어도 대단한 부정의는 존재할 수가 없다." 공정한 절차를 지킨다 해서 반드시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원칙을 규칙성 있게 지키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결과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법과 제도가 부정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법에 따르는 사람들은 적어도 무엇이 요구되는지를 알게 되고, 따라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쓸 수 있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법과 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결함이 있는 규칙이라 해도 그것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꾼다면 더 나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비록 완벽히 옳은 것은 아니라 해도, 존재하는 규칙을 지키며 그 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인천국제공항에 정규직으로 취업하고자 준비했던 수많은 젊은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노력하고 좌절하여 분노한 젊은이들을 향해 '비정규직 차별'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소위 '진보 인사'들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롤스가 말했듯 젊은이들은 그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고 있을 따름이다. 잘못된 구조를 비판할 수는 있을지언정, 그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이들을 싸잡아 욕할 자격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당신들은 어쩌면 이렇게도 오만한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진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도 그렇거니와,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청년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다는 거시 경제적 현실까지, 이 사안에는 많은 쟁점이 얽혀 있다. 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2017년 5월 12일, 문재인 대통령의 방문 이전에 입사한 사람만을 직고용한다는 그 대목만큼은 절대 납득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정규직 일자리가 대통령의 '깜짝 선물'로 전락해버린 나라에 대체 무슨 정의와 도덕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취업준비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소기업에 취직해 회사와 함께 성장하려는 젊은이, 작은 가게부터 시작해 큰 미래를 꿈꾸는 초보 자영업자 등, 스스로 미래를 개척하려 하는 모든 이들 역시 같은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법도 규칙도 관습도 신뢰할 필요 없이 오직 '이니'만 믿으면 되는 것인가? 이게 나라인가, 팬클럽인가? 팬클럽도 이런 식으로 원칙 없이 운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도와 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공정한 결과를 추구하는 것과 대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규칙을 무시한 채 정의롭다고 여기는 결과를 힘으로 강제하면 반드시 정의롭지 못한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다. 롤스가 반박한 것은 공리주의지만, 현실에서는 공산주의 역시 같은 오류에 빠져들었고 결국 몰락했다. 공정하고 투명한 규칙을 지키는 것만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지만, 대통령이 왔고 안 왔고가 기준인 세상에서는 어떤 정의로운 연설도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최대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정한 규칙과 절차부터 지켜야 한다. 형식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양보도 헌신도 불가능하다. '어머님께'로 돌아가 보자. 어머니가 짜장면을 나누었고 아들이 선택했다. 아들은 그게 공정한 줄 알고 혼자 먹었다. 철이 들고 나서야 어머니의 희생을 이해했다. 굴하지 않고 버티고 이겨내는 젊음을 향해 응원의 노래를 보낸다.
원문: 조선일보 주말판 '아무튼 주말':(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03/2020070301843.html)
2020-07-01
'불쌍한 괴물' 20대, 본인이 자초한 것? '박정희' 부모 세대의 유산?!
[세대론의 다음 단계]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노정태 자유기고가 | 2014.01.24. 18:52:39
1.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고 누군가 당신에게 말을 꺼낸다고 쳐보자. 이럴 경우, 대부분 그 '친구 이야기'란 말하는 사람 본인의 사례일 가능성이 크다. 그거 실은 네 이야기 아니냐고 캐물었을 때, 절대 아니라고 딱 잡아떼면 더 의심스러워질 뿐이다. 그래서 그 친구가 누구냐고, 네 친구 중에 내가 모르는 친구도 있냐고까지 묻기 시작하면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다. 우리는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나약한 존재들이기에, 자신의 문제를 자신의 것이라 선언하는 일마저도, 때로는 버거워한다.
〈애완의 시대〉(이승욱·김은산 지음, 문학동네 펴냄)에 대한 서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책을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오찬호 지음, 개마고원 펴냄)와 함께 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근거는 전혀 없었다. 당시 내가 두 책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은, 제목과 저자 이름 정도였으니까. 혹은 간간히 트위터를 통해 들려오는 독자들의 단편적인 반응 정도가 전부였다. 아무튼 나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무릅쓴 채(막상 책을 읽었더니 두 책의 거리가 너무 멀거나 하면 곤란하다), 서평을 준비하기 위해 독서에 들어갔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는 나름의 장점과 단점을 갖추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자 시도한 좋은 책이다. 하지만 그 모든 장점과 단점 너머에서 이 책들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내 친구 이야기인데 말이야'라면서 말을 꺼내는 바로 그런 화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두 책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20대, 혹은 대학생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2.
〈애완의 시대〉의 저자인 이승옥과 김은산은 프롤로그에서 "'대물림'에 관해 말하고 싶었"(프롤로그, 〈애완의 시대〉)다고 자신들의 의도를 밝힌다. "한국의 부모가 한국의 아들딸에게 물려준 것, 그리고 또 그 자식들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바라보고자 했"(같은 곳)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세대를 호명하고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세대들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지어서 분석적으로 파헤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그 세대들 사이에서 대물림되어가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책 표지에 적혀있는 바와 같이, "길들여진 어른들의 나라"에서, 그렇다면 무엇이 어떻게 대물림되고 있는 것인가? 대물림되어 내려온 무언가를 최종적으로 짊어지고 있을 젊은이들, 특히 대학교 졸업 및 취직을 앞두고 있거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나이대의 청년들을 저자들은 우선 살펴본다.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이른바 에코 세대(베이비부머의 자녀)"(16쪽, 〈애완의 시대〉)에게 청진기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들 중 특히 젊은 남성에게서 엿볼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은, 삶의 중요한 가능성조차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본 후 끝내버린다는 것이다."(같은 곳)
한편 스스로를 '유리 멘탈'이라고 부르는 젊은 여성들이 있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분노와 죄책감에 휩싸여, 평생에 걸쳐 정서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입장에만 서는 그 여성들 또한, "모두 베이비붐 세대인 부모 밑에서 자란, 서른 살에서 두어 살 많거나 적은, 이른바 에코 세대다."(36쪽) 이 '유리 멘탈'의 따님들에게, 어머니들은 자신이 당한 것과 같은 차별과 고통을 안겨주고, 그리하여 대물림의 역사는 이어진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1장이 끝난 후,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는 대리인, 애완견으로 남게 할 것인가.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나? 공동체는 어떤 일을 해야 하나? 이것이 애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질문이다. (71쪽)
3.
그러나 〈애완의 시대〉는 이 책에서 말하는 바 '에코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386, 혹은 486을 중심에 놓고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책도 아니다. 총 4장으로 이루어진 〈애완의 시대〉에서 '에코 세대'를 논하는 1장을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세 장은 모두 베이비부머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대물림'을 받는 '에코 세대'보다는, '대물림'을 전해주는 위치가 된 베이비부머에게 훨씬 더 큰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분량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저자는 '에코 세대'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지도 않다. 물론 그들에게 만화 〈미생〉의 장그래를 본받아 자신만의 직감으로 세상과 맞서보라는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앞서 인용한 바와 같이, 결국 질문의 형식은 "우린 우리의 아이들을 성장시킬 의지가 있는가"로 돌아온다.
요컨대 〈애완의 시대〉는 '에코 세대'와 베이비부머 사이에서 벌어지는 고통의 대물림을 다루고 있지만, 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베이비부머가 쥐고 있다는 것이 저자들의 판단인 셈이다. 혹은, 이 책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청년들을 향해 '애완견이여, 네 목줄을 끊어라!'고 외치는 '뜨거운' 책이 아닌 것이다.
대신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들어, 좁은 의미에서의 베이비부머를 벗어나, 박정희가 독재자로 돌변하여 경제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아버지' 행세를 했던 1970년대를 거쳐 간 거의 모든 기성세대를 자신의 독자로 소환한다. 물론 스스로를 '민주화 세대'라 부르는 오늘날의 486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언급을 내놓지만, 자신이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의 폭을 함부로 좁히지는 않는다. 부모 세대, 50대와 60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을 부르며, 저자는 정신과 의사처럼 혹은 정신과 의사로서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베이비부머는 퇴행해버렸다고 말이다.
2012년의 베이비부머는 왜 퇴행할 수밖에 없었을까? 어떤 '과잉'이, 아니 어떤 '결핍'이 그 시절로 퇴행하게 만든 것일까? 그 시절에 넘치던 것은 '잘 살아보세'였고, 씨가 마른 것은 민주주의였다. 가장 센 놈이던 박정희, 그 센 놈이 다시 21세기의 기아를 경험하는 우리를 다시 잘살아볼 수 있게 해주리라고 믿었으리라. (178쪽, 같은 책)
이러한 '의학적' 진단은, 결국 2012년 대선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40대 후반을 포함한) 베이비부머가 주도한 퇴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같은 곳)이라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애완의 시대〉가 이른바 '20대 문제'를 다루는 다른 책들과 사뭇 다른 어조를 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의 분석의 초점과 비난의 화살은 바로 그 20~30대의 부모 세대인 베이비부머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든 비유를 끌어오자면, 〈애완의 시대〉는 '이건 내 친구가 겪었던 일인데'로 시작하여, '그러니까 나 이제 마음 똑바로 잡고 살아보려고'로 끝나는, 신세한탄이자 반성문인 셈이다.
4.
20대의 문제를 끌어들이고 있지만 실은 베이비부머의 '퇴행'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 〈애완의 시대〉와 달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는 스스로가 20대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사례들은 대다수 내 강의에서 토론하고 논쟁하는 가운데 특히 학생들의 공감을 많이 받았던 사안들"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나의 연구가 아니라 '이십대들 스스로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7쪽)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20대는 그렇다면 (저자의 입을 빌어)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주제가 잘 요약되어 있는 문단을 인용해보자.
내가 이들에게서 발견한 또 다른 반쪽은 암울하기 그지없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더 암울하게 변해버린 이십대,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괴물이 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버린 이십대이다.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란 얘기다. (5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일 수 있다. 즉, '우리 20대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뜻이 되겠다. 그렇다면 그 20대는 어떤 차별에 어떻게 찬성하고 있는가? 언론 서평 등을 통해 많이 인용되었던 에피소드가 책의 가장 앞부분에 등장한다.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이 계약된 2년을 채운 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였고 사측은 거절했다. 그리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는데, 이 사례를 들은 "경영학과 4학년 학생 K(당시 나이 27세)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답했던"(17쪽) 바로 그 사례 말이다.
다른 학생들이 K를 '수구꼴통'으로 몰아갈까봐 걱정했지만, 도리어 술렁거리며 K에게 동조하는 모습을 보며, 저자는 20대가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미 이 책에도 나와 있다시피, 애초에 사측은 2년간의 비정규직 고용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20대가 '괴물'이 되었다고 경악하기에 앞서, '바보'가 되었다고 탄식하는 것이 순서에 부합하는 일 아닐까? 계약을 지키지 않는 회사를 탓하는 것이 먼저지, 그 계약을 이행하라고 주장하는 노동자들을 탓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논점을, 적어도 책의 지면 속에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그 강의실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인성의 문제라기보다 지능의 문제다. 한 사람의 교육자라면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충격과 경악에 빠지더라도, 자신의 '멘탈'을 관리하며 학생들의 부족한 지식을 채워주는 것이 온당할 처사일 터이다.
그러나 오찬호는 당시의 토론 수업을 "노동자들이 그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혹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규정'의 위반에 맞서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벌이는 파업에 "도둑놈 심보"와 같은 단어가 붙는 게 과연 타당한가 하는 논쟁"(20쪽, 같은 책)이라고 요약한다. 그리하여 결국, 계약을 지키지 않는 쪽을 먼저 탓해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 문제가, 정규직 자리 날로 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는 20대의 '인간성' 문제로 전환되고 있는 것이다.
이 토론 수업에서 20대가 '괴물'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다면 토론 진행자인 오찬호의 질문이 훨씬 더 정교해져야 한다. 가령 '그렇다면 회사는 비정규직을 뽑을 때에는 2년 근무 후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그것을 나중에 안 지켜도 되는 것인가?'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K라는 돌대가리 복학생이 '그렇다, 시험을 안 봤으면 무조건 비정규직이다'라고 우긴다고 해보자. 그 경우 교육자라면, '그렇다면 회사는 정규직 사원의 월급을 2년 후에 올려주겠다는 약속도 안 지킬 수 있는가?'라든가, '2년간 KTX 승무원으로 근무한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기간 동안 도서관에 앉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취업준비생 중, 누가 더 KTX 정규직 승무원으로서 일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등의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통해 학생의 무지를 깨우쳐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종류의 질문에도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 학생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시장주의자, 아니 '사장주의자'일 것이다. 이쯤 되면 인간의 본성, 혹은 가치관의 문제이며,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로서 '괴물'이라고 불려도 딱히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인류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그 어떤 정의의 원칙보다, 시험 봐서 점수 따고 그에 맞춰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존재일 테니 말이다.
5.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등장하는 사례가 부족해서, 혹은 그에 대표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사례들을 저자가 이해하고 활용하는 방식으로 인해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책이다. 가령 오찬호는 고려대학교에 다니지만 자신의 학벌을 드러내면 다른 사람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학교 이야기를 절대 꺼내지 않는 '승원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
"그런데 승원이의 이런 자제심에 감춰진 속내는 은근한 우월감이다. '너희들 안 부끄럽게 내가 대학 이름 안 말할게'라는. 그 배려의 기저에는 '무시'라는 감정이 당당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114쪽, 같은 책)
헌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소설가 공지영이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에서 한 표현을 빌리자면, 80년대 학생들은 "연·고대라는 타이틀로 사람이 평가받는 것이 싫어서 그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고자 했고" 지금은 이를 노골적으로 유지하려 한다."(150쪽, 같은 책) 80년대 대학생이 뱃지를 한강물에 던져버리는 그 자의식이야말로, "은근한 우월감" 뿐 아니라, 저자 스스로 인정하다시피 "연·고대생, 연·고대 출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보장되는 것이 워낙 많았"던, '실질적 우월감'에 바탕한 행동 아닐까?
앞서 우리가 검토해본, 어떤 실패한 토론 수업 이야기가 지나가고 나면, 요즘 대학생들의 학교 차별 문제가 주요 소재로 부상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수능을 봤고, 그렇게 얻은 성적표로 얻어낸 학교의 학벌이 너무도 자랑스럽고 뿌듯한 나머지, 그것으로 남을 평가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길 뿐 아니라, 마치 공작새가 깃털을 뽐내듯 '과잠'을 입고 돌아다니게 된다고 오찬호는 주장한다.
단체로 돈 내서 맞춘 학교 과 점퍼라면, 일종의 교복 역할을 해서, 소득이 낮은 학생일수록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하자. 중요한 것은 저자가 '옛날의 학벌주의'와 '지금의 학벌주의'를 굳이 분류하여, 후자를 비판하는데 치중한 나머지 전자에 막연한 긍정적 뉘앙스를 덧붙이는 듯한 모습까지 보여준다는 데 있다.
공지영 소설에 나오는 80년대 대학생과, 오찬호가 만나본 2000년대 대학생은, 모두 은근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오직 후자만을 비판한다. 요즘의 학벌주의는 "동문들끼리 끈끈한 정이 부활해서도, 구성원들끼리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도 아니다. 동문들이 서로 자기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과거의 '학벌' 행태와도 결이 완전히 다르다"(162쪽, 같은 책)고 그는 단언한다. "과거엔 학벌이란 말에 약간의 공동체적 측면이 있었지만, 바로 그 점에서 학력위계주의는 약간 궤를 달리한다"(167쪽)는 말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과거에는 대학 정원도 적었고, 같은 과 학생이라면 모두 얼굴을 알고 생활을 함께하는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좁은 사회'에서 함께 살아갈 사이니만큼 당연히, 좋건 싫건 "공동체"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닌가. 반면 지금의 대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한 학과 내에서도 몇 반 몇 조 같은 식으로 단위를 쪼개야 겨우 얼굴을 익힐 수 있을만한 숫자가 된다. 그나마도 한 두 해 지나면 전공이 결정되며 헤어질 운명이다. 학내 동아리 등은 모두 파탄이 났거나, '운동권 냄새'가 나서 선뜻 택하기 어렵다. '학내 사회'가 사라진 상태에서, 대학생들이 '대학의 이름'에 더욱 집착하는 것은, 어쨌건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모든 문제는 최근의 것이요, 과거에는 문제가 있었어도 이렇지 않았다는 선입견이 이 책을 지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입학한지 6년이 지났어도 "저 친구와는 수능점수 차이가 상당하다"(156쪽, 같은 책)는 식으로 말하는 '석준이'라는 학생의 사례를 들며 오찬호는 '괴물이 된 요즘 대학생'을 성토하지만, 입학한지 30년이 지났어도 학력고사 점수와 전국 석차를 외우고 있는 사례도 존재하는 것이다. 대학의 학벌주의가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1980년대, 서울대 외교학과 82학번 강철 김영환 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학력고사 점수 기억하냐'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던 것이다. "340점 만점에 318점. 문제가 어렵게 나왔다. 문이과 합쳐서 전국 25등."([심층인터뷰] “북한서 민중봉기 일으키겠다 내 방식 주체사상 포기 안 해”, 〈신동아〉, 2012년 9월 25일)
6.
나는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가 모두, 20대 혹은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등 젊은이들의 문제를 통해, 결국 저자 자신 혹은 그가 속한 세대의 문제를 실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 서평을 시작했다.
〈애완의 시대〉의 경우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베이비부머를 향해 저자들은 '정신 속의 아버지'인 박정희를 떠나보내라고, 자식뻘 되는 '에코 세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놓아주라고, 간곡한 어조로 호소한다.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다음 문단을 이해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잘못을 되돌리기 위해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면 그때는 언제일까? 혹자는 거슬러 거슬러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나 광복 전후의 혼란기 또는 남북 분단이나 6·25 전쟁을 그 시기로 거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 시기는 아마도 1970년대와 IMF 때일 것이다. (232쪽, 〈애완의 시대〉, 강조는 인용자)
1970년대의 경제성장에서 '산업역군'으로, 혹은 경제성장의 주역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자식들 낳고 어느 정도 키웠다 싶을 무렵 IMF를 맞은 후, 이후 20여 년간 급격히 '다시 가난'해져버린 한국 사회를 보고 '멘붕'하여 '퇴행'하는 베이비부머들에게, 〈애완의 시대〉의 저자는 '당신이야말로 오늘날의 문제를 바로잡을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9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실패를, 박정희가 갑자기 죽어버리며서 비판받지도 않고 성역에 올라버렸다는 그 사실을 비판하고 곱씹으며, IMF 이후 급격히 각박해진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자고, 저자들은 베이비부머를 향해 호소한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좀 더 깊은 해석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의 저자 오찬호는 자신이 '20대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는 것을, 사실상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20대 문제'로 어떻게든 못 박으려 한다. 이것은 다소 까다로운 논의가 될 것이므로 길게 인용해보자.
사실 지방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문제 삼는 것은 쉽지 않다. "인서울 대학 학생과 지방대 학생 간에 역량 차이,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누구라도 되물을 듯하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차별은 해서는 안 되지만 차이는 있다'는 식으로 대학교의 역량차를 인정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는 어떤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를 들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오십대 경영자나 기업의 사십대 인사담당관은 대학서열과 업무 능력의 객관적 차이를 나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설명할지도 모른다. 물론 업무 능력에 한정된 것이지만, 어쨌든 학교별 차이에 대한 어떤 경험이 분명히 존재해서 (그것이 편견이든 아니든) 나름의 근거를 갖는 이야기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직생활을 하는 보통의 삼사십대 직장인이라면 어떤 업무를 수행할 때 높은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른바 명문대 출신이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서,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대학 출신들을 낮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누군가의 경험들이 이십대에겐 처음부터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쉽게 말해, 이십대들이 대학교의 위계화된 질서를 받아들이는 이유에는 어떤 특정한 자신만의 직접적 경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부분 기성세대의 '살아보니까, 그렇더라!'는 식의 평가를 그저 수용하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셈인데 말이다. (116쪽,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강조는 인용자)
'그럼 충분히 살아본 사람이 학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괜찮다는 말이냐'는 식으로 말꼬리를 잡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다. 왜냐하면, 일부러 운동권에 투신하거나 하지 않았던 이상, '좋았던 시절'에 '인 서울' 졸업한 후 대기업의 관리직 등으로 입사한 사람이라면, 그가 '전문대 출신'을 만나서 뭘 해보고 어쩌고 했을 경험의 폭이 그렇게까지 넓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사람의 경험이라는 것을 살아온 시간과 삶의 범위를 곱해서 나오는 면적으로 본다면, 오히려 취업하기 전부터 치열하게 '스펙 다툼'을 하면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이력서에 넣기 위해 공모전도 넣고 하는 요즘 대학생들이야말로 더욱 경험의 폭이 넓을 수도 있다.
시대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그리고 학벌 등 제반 사회 신분적 조건이 더 '좋아질'수록, 그보다 더 '나쁜' 환경에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오늘날의 20대, "이제 고작 고교를 졸업한 이십대 대학생들"이 별로 경험한 게 없을 것이라고 단정짓는 오찬호의 화법은, 아주 싫어하는 표현이지만, 그저 '꼰대질'이라고 비난받지 않을 여지가 별로 없다.
단 한 번의 시험, 혹은 그 시험 이후 몇 차례의 시험을 더 거쳐, 만나는 사람들의 폭을 좁혀가며 '신분 상승'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문화적, 제도적 전통이다. 별로 겪어본 것도 없는, 고작 수능 한 번 봤을 뿐인 학생 여러분이 '지방대'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오찬호가 비난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학력을 통한 인간 차별이야말로 한국 사회의 '상식'임을 거꾸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우리'는, 이 책의 소재가 되는 20대라기보다는, 맞아 맞아 20대가 다 그렇지 뭐,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 책의 잠재 독자층 전부가 아닐까.
7.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모두, 저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환위기 이후 아노미 상태가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여준다. 역사의 큰 목표가 사라지고, 더 이상 기업과 국가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스스로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린 상태다.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 지음, 레디앙 펴냄) 이후 그토록 많은 책이 나와서 20대에 대해 이런 저런 분석을 내놓고 해답을 제시하며 '힐링'까지 해준 것은 바로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아직 사회에 발을 내딛지 않은 청년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자화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깔려있었을 수도 있겠다. 20대를 향해 '싸우라'고 외치는 과거의 386은 결국 자신이 싸우고 싶었던 것일 테며, '너희에겐 희망이 없다'고 내뱉던 이는 본인이 깊은 절망에 빠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애완의 시대〉는 주목할 만한 진전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젊은이들의 고난이 기성세대로부터 비롯하였다고, '대물림'되었다고 인정할만한 용기를, 이제서야 비로소 한국의 기성 세대들이 꺼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1970년대의 고통이 어떻게 IMF의 고통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분석 등에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젊은이들을 향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 말을 하는 우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다'라는 당연한 진실을 인정하는 책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30대가 된 오늘날까지 종종 '20대 논객'으로 불리는 내 입장에서는 특히 흡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적지 않은 아쉬움을 남긴다. 모든 차별적 구조는 그 참여자를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상황'으로 몰아간다. 대한민국이 능력주의에 중독되어,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공정한 시험의 판타지에 기대 차별을 정당화하는 그런 사회라면,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인 것은 20대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는 20대 또한 '순결한 피해자'가 아님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화자가 얼마나 명료한 자기 인식을 보여주는가는 별도로 판단되어야 할 문제인데,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그 지점에서 실망스러운 면을 여러 차례 노출하고 있다.
20대가 됐건 30대가 됐건 386 세대가 됐건, 특정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삼아 분석하고 비판하며 때로는 조롱하기도 하는 그런 책은, 앞으로도 많이 나와야 한다. 문제는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 집단을 포함하고 있는 한국 사회 전체가 얼마나 제대로 드러날 수 있는가, 그 과정 또한 저자의 또렷한 자기 인식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가일 것이다. 〈애완의 시대〉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함께 읽는 것은, 그런 면에서 더 큰 고민거리를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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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북스에 실렸던 서평입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13127